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7권, 순조 14년 1814년 7월

싸라리리 2025. 6. 2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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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경인

비가 왔는데 물 깊이가 2촌 6푼이었다.

 

7월 5일 계사

비가 왔는데, 물 깊이가 5촌 2푼이었다.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진주목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 35명에 대하여 별도로 구제하여 주도록 명하였다.

 

7월 6일 갑오

비가 왔는데 물 깊이가 6촌 4푼이었다.

 

7월 8일 병신

비가 왔는데 물 깊이가 3촌 8푼이었다.

 

이날부터 생위군자탕(生胃君子湯)을 올렸다.

 

성균관에서 칠석제를 설행하였다.

 

7월 10일 무술

봉모당에 나아가 정배하였다.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7월 11일 기해

의정부 좌참찬 송전(宋銓)이 졸(卒)하였다.

 

5부(部)의 무너지고 깔린 민가 4백 86호에 대하여 별도로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함경 감사 김이양이 아뢰기를,
"갑산(甲山)·삼수(三水)·후주(厚州) 등의 읍진에 지난달 16일에 홍수가 나서 평야가 모두 물에 잠기고 산골짜기는 대부분 무너져 내렸습니다. 경원(慶源)과 경흥(慶興)에는 한 달에 걸쳐 장마가 져서 강물이 범람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원부는 읍사(邑社)로부터 조산(造山)에 이르기까지 4개 마을의 땅이 거의 다 침몰하여 평지가 강이 되고 각종 곡식이 잠겨 버려 남은 곡식 이삭이라고는 없으므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판에 가득하여 그 참혹한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옛사람이 왕명이라고 속여서 창고 곡식을 내어 준 정신을 본받아 우선 함흥(咸興)의 환모(還牟) 1천 석을 두 고을에 나누어 보냈습니다."
하였다.

 

7월 13일 신축

인정전에 나아가 추도기 유생(秋到記儒生)을 시험 보였는데, 강경에 수석을 차지한 백시형(白時亨)과 제술에 수석을 차지한 이헌구(李憲球)를 모두 직부 전시토록 하였다.

 

7월 14일 임인

태묘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신계현(新溪縣)의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 1백 45호와 엄사(渰死)한 44명에 대하여 별도로 구제 조치를 취하도록 명하였다.

 

7월 15일 계묘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차대하였다. 각도의 가을철 조련을 정지하였다. 기보(畿輔)와 삼남(三南)의 가을 농사가 거의 흉년으로 판정되었고, 서북의 3도도 모두 수재를 입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접때 함경 감사의 임기 만료로 대체해야겠으나 진제(賑濟)를 마친 뒤에 후임자를 자출하도록 연석에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들으니, 북쪽 고을의 수재가 너무나 심하고, 또 영남에서 곡식을 옮겨가야 함을 면하지 못할 형편이기 때문에 예비해서 가디리게 하였는데, 만약 지금 도신을 교체한다면 틀림없이 지장이 많을 것입니다. 평안 병사도 또한 이미 임기가 찼으나, 본영은 탕잔(蕩殘)함이 여러 고을보다도 심하여 공화(公貨)를 빌어서 별도로 영환(營還)에 보태어 연한을 정해 이식(利殖)을 취해서 지방(支放)을 대략 보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하는 초창기에 생무지에게 맡기기는 어렵습니다.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과 평안 병사 이원식(李元植)을 금년 말까지 유임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산(平山) 등 4개 고을의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 1백 72호와 물에 빠져 죽은 사람 21명에 대하여 별도로 구제하는 조처를 취하도록 명하였다.

 

7월 16일 갑진

춘당대에 나아가 일내(一內)049)  의 금군(禁軍)과 서북도(西北道)의 별부료(別付料)050)  에 대한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박윤수(朴崙壽)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박종경(朴宗慶)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형조에서, 위외(衛外)에서 징[錚]을 친 죄인 홍양(洪陽)의 유학 채주영(蔡柱永)이 그의 조부 채제공(蔡濟恭)을 위하여 신리(伸理)한 일은 극히 외월(猥越)051)  하므로 원정(原情)을 시행하지 않고 엄중히 신칙하여 석방해 보냈다고 아뢰었는데, 그 원정에 이르기를,
"아! 경신년052)   무렵에 그때 사람들이 저의 조부에게 말다툼을 한 것이 처음에는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더니 나중에도 말에 말이 보태어져서, 드디어 요환(妖宦)과 결탁하고 척리(戚里)와 연결하였다고 교묘한 말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죄목을 거짓으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러고도 부족할 듯하여 또 말하기를, ‘역종(逆宗)을 느슨히 성토하고 영소(嶺疏)053)  를 부추겼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척리니 요환이니 하는 말은 곧 임인년054)   무렵에 헐뜯던 말인데, 그뒤 임금께서 통유(洞諭)하시고 10년 동안 정승으로 있었으니, 모두 없어져 버린 것이므로 다시 따질 것도 못됩니다. 그런데 그 성토함이 느슨하였다는 말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저의 조부가 이 일에 대하여 혹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힘써 논쟁하기도 하고 혹은 장래의 일을 생각하여 진면(陳勉)하기도 하면서 상소와 차자로 전후에 엄중히 성토한 것이 합하여 16번이나 됩니다. 그래서 파직·삭직·부처(付處) 등 여러번 엄중한 처분을 당했지만, 끝내 차자를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등연(登筵)하여 머리까지 부딪치며 아뢰고 물러났습니다. 그러니 느슨하게 성토하였다는 지목은 이미 지극히 억울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앞서 역적 홍국영(洪國榮)의 음모와 역절(逆節)은 오로지 역종(逆宗)에게 마음을 붙였던 것인데, 송덕상(宋德相)의 흉소(凶疏)는 바로 그 부리입니다. 저의 조부가 그 상소문을 보고 땅에 내던지면서 말하기를, ‘이 빈(嬪)의 죽음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감히 「종사(宗社)가 의탁할 곳이 없다.」고 한단 말인가?’ 하고는 또 말하기를, ‘「모종의 도리[某樣道理]」라는 네 글자는 더욱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뒤 선대왕께서 하교하기를, ‘홍국영이 경의 이 말을 들었다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禍)가 있었을 것이니, 나는 더욱 경의 충직함을 알게 되었다. 경은 실로 의리의 주인공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도리어 성토함이 느슨하였다고 몰아 붙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임자년055)  의 영소(嶺疏)가 또 한 가지 죄목이 되었습니다만, 소록(疏錄)이 많고 적은 것은 본래 영남 사람들의 일로, 어찌 저의 조부와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떻게 한 도(道)의 전부를 지휘하여 천리 바깥을 불러 맞이 할 수가 있습니까? 떳떳한 도리로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불가능한 일인데, 억지로 남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계획을 하여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학(邪學)하는 무리의 괴수[邪魁]’라는 두 글자를 제창하여 마치 비준을 받은 단안(斷案)인양 여겼는데, 대개 그때 마침 사옥(邪獄)이 일어난 때를 당하여, 불행하게도 성기(聲氣)가 서로 가까운 사이에 있던 자들 중에서 사학을 범한 무리들이 나왔으므로, 한 곳으로 몰아넣으려는 계획을 하다가 집어낼 만한 증거가 없자, 포도청의 삼적(三賊)의 일을 억지로 찾아내어 ‘가만히 포도 대장을 부추겨서 때려 죽여 증언할 사람을 죽여 없애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삼적의 체포를 청한 것은 본래 저의 조부에서 나온 의논으로 요상(僚相)이 연중(筵中)에서 아뢴 것이니, 그 증언할 사람을 죽여 없애 버리려 한 자가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증언할 사람을 죽여 없애도록 몰래 부추겼다는 말은 원래 역적 권유(權裕)의 상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상소에 대한 비지에서 이 일에 관하여 자세히 말하여 남김없이 부석(剖析)하였으며, 전교(傳敎)로 인해 장폐(杖斃)하였다는 뜻으로 연중(筵中)에서 하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 뒤에 포도 대장 조규진(趙圭鎭)의 아들이 글을 가지고 그 당시 정승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때 판하(判下)에 따라서 엄곤(嚴棍)하여 물고(物故)한 사정을 모조리 폭로하였습니다. 이 일은 바로 이런 내용에 불과한데도 도리어 이 일을 가지고 없는 사실로서 죄를 만들었으니, 그 말이 조리에 맞겠습니까? 평소에 엄중히 배척하던 상소나 당시 조사하여 체포할 것을 청한 일들은 모두 빼내 버리고, 단지 역적 권유의 상소문의 말만 따라서 마침내 추탈(追奪)하는 대안(大案)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사(邪)’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낱낱이 들어가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조부에 대한 최종적인 감단(勘斷)이 바로 ‘사학하는 무리의 괴수[邪魁]’라는 두 글자에 있는 것이고 보면, 먼저 변명해야 할 일이 역시 이 지극히 부끄러운 죄안(罪案)에 있는 것입니다. 이밖의 조목들은 모두 실상이 없는 그림자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일에 관해서는 이미 지극히 명성(明聖)하신 선대왕께서 분명하게 감파(勘破)한 것이므로, 모두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한 번만 살펴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혹시 일언 일사(一言一事)라도 죄를 성토한 자들이 운운(云云)한 것에 가까웠다면 일월처럼 밝으신 선대왕께서 어떻게 기필코 죽이려 하는 함정에서 구출하시어 삼공(三公)의 반열(班列)에 두었겠습니까? 오랜 기간의 맡기심이나 비할 데 없는 은혜가 천고(千古)에 뛰어났습니다. 하물며 정승으로 임명하던 날에 친히 임명하는 교지를 써서 대궐문에 나와 선포하였으니, 이와 같은 은영(恩榮)은 4백 년의 황각 고사(黃閣故事)056)  를 상고해 보더라도 비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 무엇 때문에 친히 뇌문(誄文)을 지어서 삼대 의리(三大義理)에 대하여 허여(許與)하셨으며, ‘내 붓이 부끄러움이 없다[予筆無愧].’는 네 글자로 그 평생을 단정하기까지 하였습니까? 그리고 또 사고(私稿)를 들이라 하여 영광스럽게도 어필(御筆)로 교정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한결같이 열성적이었습니다. 그 죄가 있는지 없는지, 억울한지 억울하지 않는지는 저 높은 하늘이 굽어 살피시는 바요 공의(公議)가 엄연히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청원하건대, 특별히 밝혀 풀어 주는 은혜를 내리시어 이승과 저승의 억울함을 씻어 주소서."
하였다.

 

7월 18일 병오

경모궁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7월 20일 무신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7월 20일 무신

형조에서, 위외(衛外)에서 징[錚]을 친 죄인 여주(驪州)의 동몽(童蒙) 김성길(金聖吉)이 그의 증조 김한록(金漢祿)을 위하여 사리를 밝혀 진술한 내용이 종이 가득히 장황하였지만, 지극히 흉악하고 매우 도리에 어긋난 것들이므로 원정(原情)을 시행하지 않고 엄중히 신칙하여 놓아 보냈다고 아뢰었는데, 그 원정에 이르기를,
"이 몸이 재작년 가을에 거둥하시는 길 앞에서 상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의 신하가 외람(猥濫)하다고 제사(題辭)를 써서 물리쳤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신민(臣民)으로서 극한 억울함을 품고 국법에 걸린 자가 모두 이를 스스로 폭로할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 몸이 상언한 것은, 첫머리에 김이양(金履陽)이 선조를 무핍(誣逼)한 죄를 말하고 엄중한 말로 분명히 밝혔은즉, 사체(事體)에 관계됨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도 이를 담당한 신하가 감히 제마음대로 물리쳐서 임금께 전달되지 못하도록 한단 말입니까? 고금 천하에 어찌 이같이 무엄한 무리가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김이교(金履喬)·김희순(金羲淳)·김이양 세 사람은 이몸이 상언한 것이 나온 뒤, 서로 이어서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어(疏語)는 모두 무핍(誣逼)한 것이요 꾸며댐이요. 궁색한 둔사(遁辭)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 또다시 재작년 가을에 임금에게 전달되지 못한 상언에다가 김이교·김희순·김이양이 뒤에 올린 소에 대한 대변(對卞)하는 말을 간략하게 보태어서 징을 울려 다시 호소하는 바입니다.
대저 저의 가문은 병인년057)  에 일문(一門)의 노소가 모두 사방으로 귀양가서 집에 장정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으며, 저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에게도 의지할 데가 없이 홀로 있는데, 비록 우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나 그래도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는 양심은 있어서 밤낮 피눈물을 흘리며 임금께서 다시 돌아보시기만 빌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 큰 경사가 거듭하는 해를 맞이하여 유독 밝으신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감히 우러러 호소하오니, 만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대저 저의 집은 임진년058)  의 상소가 들어간 이후로 남의 혈원 골수(血怨骨讎)가 되어 저의 집을 무함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이른바 ‘여덟 글자의 흉언’이란 것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선조의 밝으신 지혜는 그 정상을 통촉하시고 참설(讒說)을 믿지 않으시어 처음부터 끝가지 떨쳐버리셨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 무리들도 감히 방자하게 소를 올려서 성총을 가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에는 전하께서 어리신 나이에 왕위를 이으셨기 때문에 선조 때의 처분을 사실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고는 감히 김이교·김이양·김희순의 세 사람이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한 것이니, 공심(公心)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 속을 빤히 들여다 보지 않겠습니까? 그 설이 맹랑하여 근거가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저의 증조부인 추탈 죄인(追奪罪人) 김한록의 사원(私冤)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선조를 무핍한 아주 패려(悖戾)한 설이 있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저의 집안의 사원을 변명·폭로하는 일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므로, 지금 간곡하게 청하면서 먼저 무핍한 실상을 아뢰고, 이어서 저의 집의 사원에 관한 것을 폭로하겠습니다. 대개 김이양은 앞의 상소에서 저의 증조부에게 흉언과 실범(實犯)이 있다고 말했으며, 또 말하기를, ‘옛날에도 한두 신하가 아뢴 적이 있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자가 요행으로 피하여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선대왕의 산수(山藪)059)   같은 넓으신〈아량(雅量)〉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과연 그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선대왕께서 이미 저의 증조부의 흉언을 통촉하시고 크고 넓으신 아량으로 보전하시어 처벌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선대왕께서 견지(堅持)하신 대의(大義)와 효성스런 성덕(盛德)에 대하여 그 무핍함이 과연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김이양도 선조의 신하인데,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특히 남을 무함하기에 급하였기 때문에 이미 ‘흉언인 줄을 임금께서 알아들었다.’고 했으니, 당시에 보전하여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해석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말하기를, ‘이것은 산수 같은 넓으신 아량이다.’라고 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김상로(金相魯)나 홍계희(洪啓禧) 같은 무리를 엄중히 처벌했던 것은 산수 같은 넓으신 도량이 부족해서 그랬단 말입니까? 먼저의 흉역(凶逆)에 대해서는 기필코 용서없이 처벌하고 뒤의 흉역에 대해서는 관대히 용서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이치에 가까운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의 증조부가 홀로 온전히 보전하는 은혜를 입은 것은 어찌 억울함을 통촉하신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저의 증조부가 경술년060)  에 죽었지만, 생전과 사후를 통하여 수십 년간 선조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 주시어 처분을 내리신 일이 없었으니 다만 온전히 보전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저의 조부 김관주(金觀柱)는 세상이 버린 바 되어 화괴(禍塊)로 지목되었습니다만, 항상 대정(大政)을 당하면 우리 선조께서는 반드시 견서(甄敍)061)  의 은혜를 베푸셔서 내직(內職)에서나 외직(外職)에서나 여러 번 제명(除命)을 입었으며, 나중에는 친히 승탁(陞擢)하시어 동래 부사에 제수하였습니다. 신의 종조부인 죄인 김일주(金日柱)에 대해서도 초야(草野)에서 간발(簡拔)하여 주연(胄筵)을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겼으며, 경신년062)   여름에는 서연이 끝난 뒤에 특별히 직학 신 이만수(李晩秀)를 계방(桂坊)의 직숙(直宿)하는 곳에 보내어 보도를 전임한다는 성의를 하유하였는데, 지의(旨意)가 지극히 융숭하고 진지하였습니다. 또 죄인 정승[罪相] 심환지(沈煥之)에게 연교(筵敎)를 기록하여 전시(傳示)하도록 하였는데, 연교에 이르기를, ‘강연(講筵)의 입시(入侍)로 인하여 그 백발이 성성한 헌걸찬 모습을 보고 묻지 않고도 김일주임을 알았다. 그 사람이 지닌 바를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는 바, 경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의 경학(經學)과 문식(文識)에 대해서 나는 항상 《맹자(孟子)》의 이른바 「당세의 거벽(巨擘)」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 다행히 협책(挾冊)의 반열(班列)에 출입하고 있으니, 옛일을 상고하여 올바로 보도하는 공을, 이 사람을 버리고서 어떻게 하겠는가? 조금 후 두 직학을 시켜 이 뜻을 상세히 전할테니, 경은 이러한 뜻으로 연교를 써서 보내어 그가 자임(自任)하여 노력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저의 증조부가 범한 것이, 김이양이 무함한 것에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면, 저의 조부와 종조부는 모두 흉역의 아들이 되는데, 어떻게 흉역의 아들을 청조(淸朝)의 극선(極選)의 자리에 발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떻게 흉역의 아들에게 주연을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전임(專任)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이양이 저의 증조부를 무함한 것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우리 선대왕을 장차 어떤 처지에 두려는 것입니까? 저의 증조부가 무함 당한 억울한 사정을 선조 때에 환히 알고 계신 것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 상신 윤시동(尹蓍東)이 전관(銓官)이 되었을 때, 선조께서는 저의 조부 김관주를 승탁의 망(望)에 의입(擬入)하라고 하교하였으며, 윤시동이 즉시 봉행하지 않자, 임금께서 그 까닭을 하문하셨습니다. 윤시동이 대답하기를, ‘바깥에서 이러쿵 저러쿵하는 흉언이 있어서 감히 의입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선조께서 남김없이 모두 밝혀서 하유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온 세상이 다같이 들어서 아는 바이요, 그때의 연설(筵說) 또한 틀림없이 기주(記注) 중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찾아내어 임금께서 보신다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분별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올린 상언이 나온 후, 김이양도 선왕을 무핍하였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그의 후소(後疏)에서 자신을 변명함에 있어 먼저 ‘무핍’이란 두 글자를 언급하고, 산수(山藪)에 관한 설을 바꾸어서 정순 성모(貞純聖母)의 친속(親屬)인 까닭이라고 했으니, 그가 무핍한 것이 또 마땅히 어떠하였습니까? 그의 상소에서 말하기를, ‘성모의 지극히 명성(明聖)하고 지극히 인자하신 덕은 오직 선왕이 있음만 알았으므로, 선왕이 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성궁(聖躬)에 속하게 하여 경법(經法)과 권도(權道)를 충분히 활용하여 조화를 빠짐없이 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김귀주(金龜柱)의 죄악을 처벌하고는 곧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김한록의 흉언을 알고도 불문에 붙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살펴보면, 선대왕께서 저의 증조부에게 실제로 흉언이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단지 성모의 친속이었기 때문에 용서하여 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성모께서는 다만 선왕이 있음만 알았다고 그자도 또한 말했습니다. 성모의 사심이 없는 인덕으로 볼 때, 저의 증조부에게 만약 실제로 흉언이 있었다면, 비록 김귀주의 처지와 같을지라도 당연히 선왕에게 고하여 주공(周公)이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처벌하는 조처063)  를 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저의 증조부가 무엇이 아까워서 국법으로 단죄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의 집안이 온전히 보전되는 은택을 입은 것은, 모두 성모와 선왕께서 그 억울한 실상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어찌 감히 선왕께서 보전하여 주신 은택을 성모의 친속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돌린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찬양하는 말은 빈 말뿐이고 무핍하는 뜻으로 실덕(實德)을 범하였으니, 이를 만약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이른바 ‘성궁(聖躬)에 속하게 하였다.’고 한 말은 더욱이 무패(誣悖)한 말입니다. 저의 증조부가 만약 김이양이 무함한 바와 같다면 이것은 성궁을 간범(干犯)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성궁을 간범한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더구나 성궁을 간범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은 자를 선왕께서 어떻게 성궁에 속한 것으로써 처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자의 무핍한 말이 아무리 있는 마음을 다 써서 꾸며 내더라도 여기저기에 탄로가 나서 더욱 무핍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지금 만약 그자에게 묻기를, ‘선조 때에 김상로·홍계희 등을 처벌한 것은 우연한 처분이었던가? 아니면 굳게 지키신 대의(大義)와 애통하신 효사(孝思)에서 나온 것이었는가?’라고 했을 때 그 자가 아무리 흉역한 심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효사와 대의가 아니라고는 감히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묻기를, ‘이미 효사와 대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김한록의 역절(逆節)도 김상로나 홍계희와 똑같은데, 이것은 불문의 죄과에 붙였으니, 이것을 또한 대의요 효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김상로와 홍계희의 일이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에 관계되어서 이것은 엄중히 처벌하고, 유독 김한록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단정하여 처벌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공의(公議)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그 자가 여기에 대하여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기껏해야 이것은 산수(山藪)와 같은 관대함이라거나, 그냥 불문에 붙여 버렸다거나 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이른바 산수와 같은 관대함이나 그냥 불문에 붙여 버리는 일은 선대왕께서 본래 굳게 지키신 것과는 서로 배치될 뿐만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무핍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저 김이양이 꾸며대는 말이 앞뒤로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만, 선왕을 무핍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또 우리 성모를 무핍함에 그 끝없는 흉패함이 갈수록 심하여졌습니다. 감히 자기의 설을 선왕의 뜻이라고 함부로 핑계하고서 온갖 농간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부려서 이처럼 무핍하는 일을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이재(金履載)의 명분이 없는 화(禍)라는 것에 대해서는 ‘협박을 당했는데도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양성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반쯤 읽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간담이 떨릴 지경입니다. 지난 경신년 5월에 내린 수만(數萬) 마디의 연교(筵敎)는 성고(聖考)께서 말년에 내린 대처분(大處分)에 관한 것으로서 사관에게 주어서 사고에 보관하라고까지 하였으니, 그 고심한 대의는 정말로 귀신을 울리고 감각이 둔한 돈어(豚魚)064)  까지도 감동시킬 일이었습니다. 이제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12년 남짓한데, 그 자가 감히 당일의 김이재에 대한 처분을 명분도 없는 화라고 일컬으면서, 그자들이 저의 집안의 위협을 받았으나 흔들려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저의 집안에서 화를 양성하게 되었다고까지 하였으니, 선조께서 고심한 대의를 한쪽 말만 믿고 이런 처분을 양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속마음을 캐보면 다만 하늘을 욕하고 해를 꾸짖는 역적일 따름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도리로서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증조부의 사원(私冤)에 대하여 스스로 변명해야 할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김이양 무리 세 사람의 전후의 상소에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김이양의 전소(前疏)에서 말하기를, ‘영묘(英廟)신사년065)   이후는 천지가 뒤집히고 신민들이 진탕(震蕩)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김한록이란 자가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066)  을 끌어다 한두 친구에게 문제점에 대하여 물어보다가 마침내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대답067)  한 정론(正論)에 저지당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한두 친구란 김희순과 김이교의 상소로써, 살펴본다면 곧 김희순의 조부 김교행(金敎行)과 김이교의 종숙 김의행(金毅行)입니다. 아! 예로부터 소인들이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여 없는 것을 있다고 한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만, 어찌 김이양의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이 설에 대해서 명백하게 변명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고 동지(同知) 신 이동윤(李東允)은 젊어서 김교행에게 수업하였으므로 정의(情義)가 부자 사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동윤이 일찍이 그의 언행을 기록하여 한 책을 만들었는데, 그중 한 조목에서 말하기를, ‘신사년 봄에 김한록이 찾아와 《주서(朱書)》를 강론하였는데, 당나라 중종의 일에 이르러서 선생이 말하기를, 「비록 남헌(南軒)068)  의 의논이 있기는 하지만 의당 주자(朱子)의 설을 정론(定論)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선생이란 김교행을 가리킨 것입니다. 저의 증조부는 김교행과 동문의 벗으로 서로 만나 《주서》를 강론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강론했다는 말은 단지 이처럼 주자와 장식의 의논을 대강 말한 것뿐인데, 다시 무슨 말을 가리켜서 흉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강설(講說)은 신사년 봄에 있었던 것인데, 김이양은 신사년 이후라고 말하였습니다. 연조(年條)를 뒤바꾸고 허실(虛實)을 현란(眩亂)시켰으니, 그의 속마음을 따져 본다면 어찌 간교하고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한편 김교행은 저의 증조부와 아무리 동문의 우호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저의 증조부가 스스로 흉언을 발설하였다면 김교행으로서는 대의상 당연히 즉시 임금에게 아뢰야만 할 일이고, 소장(疏章)에 기록하여 국인들과 함께 분개할 의리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무슨 까닭에 이렇게 하지 않고 당파를 위하여 공의(公義)를 배반한 채,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어 스스로 실정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는[知情不告] 죄에 빠졌단 말입니까? 이것은 절대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상언한 것이 나온 뒤 김이양의 상소에 말하기를, ‘천고의 일이 한없이 많은데, 유독 당나라 중종의 일을 적출(摘出)하여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고, 김이교의 상소에는 말하기를, ‘김한록의 말이 과연 통상적인 관점에 대해 물은 것이라면 《주서》라는 책은 폐기하고 강론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의 이른바 《언행록(言行錄)》이란 것은 저의 집에서도 일찍이 사람을 통해 녹취(錄取)해서 보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위에서 아뢴 것과 같은 것일 뿐이었습니다. 저의 증조부에 대한 말은 본래 한 마디도 기록된 것이 없는데, 김이교의 이른바 ‘김교행이 배척했다.’는 것은 무슨 말에 근거해서 배척했는지 모르겠으며, 이른바 ‘저처럼 자세히 기재되었다.’고 한 것도 그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 것이 무슨 말인지 또한 모르겠습니다. 어찌 저처럼 근거 없는 황탄(荒誕)한 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때 만약 저의 증조부가 단 한 마디의 흉언만 있었더라도 이동윤은 당연히 함께 수록해서 자기 스승이 엄정하게 배척한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어찌 유독 저의 증조부의 말에 대해서만 빠뜨리고 수록하지 않았겠습니까? 단지 한 말이 없었기 때문에 수록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그 거짓 꾸민 실상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김이교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김이양의 연전의 상소는 소문을 듣고 기술한 것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이동윤의 《언행록》 중의 말을 중시하여 인용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연조(年條)를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저의 증조부와 김교행이 《주서》를 강설한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근거할 만한 문자가 없고 다만 이동윤의 기록 중의 한 가지 설뿐이므로 김이양이 근거하여 무함한 것이 대개 이 기록에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이것을 근거로 해서 명백히 변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김이교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신사년이 과연 어떤 때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국가에 변란이 있음을 틈타서 분풀이를 하려고 생각하였다.’ 하였습니다.
김희순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일이 발생하기 전에 화란(禍亂)을 빚어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저의 증조부가 흉심을 품고 미리 이런 흉론을 떠들어서 때가 오면 흉악한 짓을 하려는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설과 같다면, 사대부들이 《주서》와 《당사(唐史)》를 읽는 것은 평일에 늘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사년 중에도 이 책들을 읽은 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니, 이들이 모두 흉심을 품고 이 책들을 읽었단 말입니까? 말이 도리에 어긋난 것이 어찌 이처럼 심합니까? 김이양은 후소(後疏)에서 말하기를, ‘또 무엇 때문에 한두 사우(士友)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았단 말입니까?’ 하였습니다. 이른바 한두 사우에 대하여 이름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대체 무슨 심사입니까? 그 자의 전소(前疏)에서 이미 ‘한두 지구(知舊)에게 어려운 곳은 물어보았다.’고 하였는데, 한두 지구란 곧 김교행과 김의행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김교행과 김의행 이외에 또다시 한두 사우라고 말하였으니, 이 또한 궁색하게 회피하려는 수작으로 그 내용을 막연하게 얼버무리려는 술책입니다. 그의 간교한 정상이 또한 어떻습니까? 하물며 김교행·김의행 등은 병술년069)  에 죽었으니 병인년은 죽은 지 41년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자가 말한 당시의 사우란 벌써 죽은 지 오래 되어서 무덤의 흙이 되었을 것입니다. 김이양은 전소(前疏)에서 말하기를, ‘견식이 있는 자들은 이미 그 마음을 벌주고 마음속으로 단절하였다.’ 하였고, 김희순도 전소에서 말하기를, ‘신의 조부는 말로서 물리치고 마음으로서 벌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견식이 있어서 마음으로 벌준 자’란 것도 역시 김교행의 무리를 가리킨 것입니다. 저의 증조부가 만약 참으로 흉언을 하였다면 비록 하찮은 보통 사람들이라도 모두 당연히 벌주어야 한다는 도리를 알 터인데, 어찌 견식이 있는 자를 기다린 후에야 주었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째서 직접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고 단지 마음속으로만 단절하였단 말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신의 증조부를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무함하였지만, 그들이 저의 증조부에 대하여 정의(情義)가 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세상이 다같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의 비평이 두려웠던 까닭에 이런 조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만들어서 그 정적(情跡)을 엄폐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전에 저의 조부가 호서에 성묘차 내려갔을 때, 김이양이 홍주(洪州)에서 중로(中路)까지 마중나와 하루 종일 정을 나누다가 돌아갔으며, 또 김이양이 전임(銓任)을 맡고 있을 때에는, 저의 증조부를 악정(樂正)의 망(望)에 통의(通擬)하여 은점(恩點)을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바입니다. 김희순이 경상도 관찰사로 갔을 때는 문안하고 궤유(饋遺)하며 서로 돕기를 친족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사서(四書)》를 인출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이른바 견식이 있는 자가 말로서 물리치고 주절(誅絶)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입니까? 김이교는 전소에서 말하기를, ‘신이 들었는데 김한록을 말할 때는 성을 붙여서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한록이 흉역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차츰 커가면서는 더욱 그 일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흉언을 직접 듣고 물리친 자는 신의 족숙인 신 김교행과 종숙인 신 김의행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들 무리가 이미 흉언을 듣고 성을 붙여서 부르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면 그를 깊이 미워하고 엄격히 단절한 것이 더이상 여지가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김교행과 김의행은 끝내 생전에 고발(告發)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저의 증조부에 대한 평소의 정호(情好)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김교행과 김의행이 죽은 뒤에 저의 증조부는 즉시 제문을 지어 조문하면서 그 애통하고 애석함을 다하였으며, 김의행의 아들 김이성(金履成)이 또 그의 아비를 위하여 저의 증조부에게 만사(輓詞)070)  를 청하므로 저의 증조부는 그 청에 따라 만사를 지어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호향(湖鄕)071)  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편지나 만사나 제문이 모두 저의 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남의 자손으로서 흉역한 자의 조전(弔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선친의 혼령 앞에 올리고, 또다시 흉역한 자의 만사를 청하여 선친의 행적을 드러내는 이것은 모두 상정(常情)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른바 ‘견식이 있다는 자가 마음으로 단절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입니까? 김이교의 전소에서 또 말하기를, ‘김의행은 조카로서 그 말을 신의 조부에게 달려와 고했는데, 성품이 엄격하고 말이 준절하여 「이것은 배척하여 공격하는 습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신의 조부가 분개하고 걱정하면서 자질(子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설령 죄를 받아 죽더라도 너들 은 그것을 알고 조정에 나가는 자가 있다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의 조부 김시찬(金時粲)이 생전에 고발하지 않은 것은 실정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질들에게 교고(敎告)한 말은 측달(惻怛)하고 엄정(嚴正)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가소로운 일입니다. 을미년·병신년 무렵에 저의 증조부가 평강(平康)에 우거(寓居)할 때 김시찬의 아들 김상행(金常行)이 본읍의 수령으로 와 있으면서 열흘이 멀다하고 수없이 찾아왔으며, 서로 돌보아 주는 정이 지친(至親)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김이교의 아비 김방행(金方行)이 그의 형을 뵈러 왔을 때, 저의 증조부와는 본래 모르는 사이인데도 역시 찾아와서 온갖 정을 나누다가 갔습니다. 김의행의 아들 김이성(金履成)이 관아(官衙)에 와서 머물 때에도 찾아와서 옛정을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오고 간 사실들은 털끝만큼도 거짓을 보태어 임금을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들 종형제는 벼슬하여 조정에 나온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한 차례 소를 올려 그런 흉언에 대한 사실을 폭로하여 아뢰어 그의 아비가 죽을 때에 신신 당부한 교훈을 실천하지 않고, 도리어 서로 번갈아가며 흉역한 자를 찾아다니면서 친척처럼 절친하게 지냈단 말입니까? 그들이 그의 아비가 말한 잊지 말라는 유계(遺戒)를 어찌 이다지도 쓸모없는 물건처럼 내버렸단 말입니까? 저의 상언이 나온 이후로는 그들 무리들이 서로 정분이 두터웠다는 점과 실정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으므로, 김이교의 후소(後疏)에서, 거백옥(蘧伯玉)072)  과 사마광(司馬光)073)  의 일을 인용하였으니, 더욱 그의 구차스러운 변명을 드러내면서 전연 꺼리는 것이 없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저 대현(大賢) 이상이 하는 정의(情義)에 관한 일은 본래 사람마다 본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신하된 자가 함부로 거백옥을 본받게 된다면 스스로 간인(奸人)을 편들어서 임금을 배반하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요, 붕우(朋友)가 된 사람이 함부로 사마광을 본받게 되면 소인의 거짓 꾸미는 작태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의심나는 것이나 위험한 것은 우선 유보하여 두라는 교훈을 남겼으니, 그 경계함이 지극히 깊습니다. 과연 그 자의 말과 같다면 성인(聖人)074)  께서 공산씨(公山氏)075)  에게 가려고 했었는데, 후세의 인신(人臣)으로서 이것도 성인이 한 일이라 하여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의심나는 것이나 위태로운 것은 유보하라는 교훈이 만세를 경계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꾸며대기에 바빴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왜곡·인용하여 임금의 들으심을 현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애처로울 뿐, 나무랄 것도 못됩니다.
김희순의 후소(後疏)에 말하기를, ‘초야의 사람으로 대부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여 한 번 목욕을 하고 성토076)  하고자 하였지만 사세가 어쩔수 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도 또한 그자들의 둔사(遁辭)로서 서로가 모순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시찬이 고발하지 않은 것은 옛날의 현대부(賢大夫)에게 핑계 대었으니, 이것은 대부가 고발하지 않은 것이 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교행이 고발하지 않은 것은 대부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핑계 되었으니, 이것은 대부였더라면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김교행의 의리에 따를 것 같으면 김시행이 대부로서 고발하지 않은 것은 죄를 회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시찬이 의리를 따를 것 같으면 김교행이 대부였을 경우 당연히 고발하는 것은 어진 이의 도리에 배치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설이 너무나 서로 배치되는데도, 모두 옳다고 여기니, 이것이 이른바 까마귀의 암수를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점을 말하면, 그자들은 조정에 있었든 초야에 있었든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 고발하지 않는 것을 옳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대부의 반열에 있든, 초야에 있든 간역(奸逆)을 고발하여 화란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은 모두 의리가 없는 것이라 하여, 사람마다 역절(逆節)을 고발하지 않고 멋대로 세력이 무성하여 퍼져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의리상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몸이 떨리는 한심한 일입니까? 그의 어리석고 무식하여 억지 변명을 서슴지 않은 것이 이와 같으니, 이런 자들과 어떻게 함께 사리를 따지겠습니까? 김이교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위에 고하고 아래에 반포하여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로잡는 것은 반드시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형편이 할 수 있는 경우와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김희순은 또 말하기를, ‘겉에 나타나지 않게 견디어 참고서 분노를 감추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서 발설하였습니다.’고 하였으니, 과연 이 말과 같다면 병인년 이전에 발설하지 않은 것은 과연 발설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랬다는 말입니까? 또 병인년에 기필코 발설한 것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어서 그랬다는 말입니까? 그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김희순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한자리에서 헤어진 뒤로 김한록이 신의 집과 다시는 서로 접촉하지 않았으니, 다시 절교하고 안 하고를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더욱 한 번의 웃음거리도 안 됩니다. 김교행·김의행이 모두 병술년에 죽었는데, 저의 증조부는 계미년·갑신년 이후로 강원도 산골인 평강(平康)에 옮겨 우거하였으므로 전처럼 자주 왕래할 수는 없었지만 편지로 주고받는 일은 오래 끊긴 적이 없으며, 또 그것들은 모두 경전(經典)의 지의(旨義)에 관한 문답으로 안부 문답이나 한 것만이 아닙니다. 또 김교행이 죽은 뒤 저의 증조부가 조복(弔服)을 입고 제문을 지어 애석함을 다하였는데, 그들 집에서도 규례대로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과연 서로 절교한 사이가 되겠습니까? 김이교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설령 그자의 말과 같이 신의 집의 부형들로 하여금 모두 실정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율에 적용시켜 자질들이 모두 원한을 숨긴 지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김한록의 흉역보다야 더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저 김교행이나 김의행이나 김시찬 등이 혹은 사문(師門)에 출입하며 학문에 종사하기도 하고, 혹은 사우(士友)간에 내왕하면서 서로가 의논하였지만, 큰 의리의 관두(關頭)에 있어서 결코 나라를 배반하고 사당(私黨)을 위하여 죽을 사람은 아니었는데, 손자가 옳지 못하여 오로지 이익만 도모하게 되어 하루아침에 자기 조부를 증거로 삼아서 남을 천고에 없는 악역의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저의 증조부가 만약 참으로 그들이 무함한 바와 같다면, 무슨 말로 변명하더라도 그의 조부나 아비가 실정을 알고 고발하지 않은 죄는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근본 뜻은 그의 조부가 실정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일로써 그 손자가 거짓 꾸며낸 실상을 반증(反證)하였으니 그들이 만약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차라리 남을 무함한 율에 자복(自服)할지언정, 어찌 그 조부로 하여금 실정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죄과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까? 지금에 그렇게는 하지 않고 차라리 자기 조부를 고발하지 않는 죄인으로 만들지언정, 다만 저의 증조부가 혹시라도 악역이란 죄목에서 벗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의리를 모조리 잃어버린 자라 하겠습니다. 김이양의 전소에 말하기를, ‘말이란 문자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종적이란 일의 행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므로, 두들겨도 형체가 없고 붙잡아도 흔적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 한 마디야말로 저의 증조부에 대하여 남김없이 밝힐 수 있는 말입니다. 마을 거리에서 푼돈으로 농간하는 자라도 사실을 증거할만한 보증이 되는 문안(文案)이 있어야만 그제야 그 죄가 성립될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을 천고에 다시없는 악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것이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이에 형체도 흔적도 없는 말로써 문자나 일의 행위 밖에 만들어 내었으니, 이것이 비록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저의 상언이 나온 후에 김이양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신의 생각에 문자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말에는 이미 나타나는 것이요 일의 행위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음의 흔적은 이미 드러난 것이니, 곧 말하자면 손발에는 미처 나타나지 않았지만 속마음의 움직임은 응당 모두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하였습니다. 설령 그 말과 같다고 하더라도 저의 증조부가 참으로 흉언을 하였다면 당연히 즉시 아뢰어야 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수적(手蹟)이라도 하나 얻어서 증거를 만들어 두어야 할 터인데, 이런 것조차 없으면서 40여 년이 지난 오랜 일을 갑자기 문자나 일의 행위 밖에 만들어 내었으니, 이것이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전에 감히 소장(疏章)에 진달하지 않았던 것은 선조께서 그 성감(聖鑑)으로 참소하여 무함한 것을 통촉하실 것이기 때문이요, 나중에야 소장을 써서 올린 것은 감히 성상께서 어리셔서 선조 때의 처분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자가 아무리 여러 가지로 꾸며댄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는데 그 속마음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김이성(金履成)이 연석에서 아뢴 일에 있어서는 유독 그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또한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필경 선조의 처분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보전하실 뿐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식(拂拭)하실 뿐이었습니다. 비단 보전하고 불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뽑아 쓰심이 지극히 융숭하였고 촉탁(屬托)하심이 너무나 은근하셨으니, 모두 천고에 없는 특별하신 은택이었습니다. 만약 성감(聖鑑)으로 남을 참소하는 자의 정상을 통찰하지 않았다면 어찌 천고에 없는 특별한 은혜를 흉역의 자손에게 베풀었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살펴본다면 김이성이 아뢴 간사한 참언을 필경 성감으로 통찰하셨음이 또한 매우 분명합니다. 그리고 김이교는 전후의 상소에서, 반드시 김이성이 연석에서 아뢸 때에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이제 이미 작고한 인물에 대하여 다시 사단(事端)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증조부가 작고한 해가 경술년인데, 김이성이 연석에서 아뢴 것은 기유년입니다. 기유년은 저의 증조부가 아직 살아있을 때이니, 선왕의 성교(聖敎)에서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을 이미 작고한 인물이라고 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이교의 무리의 허다한 무함은 모두 근거 없는 말로서 또 여기에 임금을 속인 죄를 면할 수 없으니, 이것은 모두 성상께서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셨기 때문에 선조 때의 처분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서 감히 기만하는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김이양의 후소에 보면 말하기를, ‘김이성의 추탈에 대하여 논의한 것은 연석에서 아뢸 때 먼저 발설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김이성의 추탈에 대한 논의란, 저는 금시 초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 논의를 먼저 발설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저 그날 김이성이 연석에서 아뢰었다는 것은 그들의 간계가 전하의 속마음을 시험하여 보았던 것일 것인데도, 선조께서는 성감이 지극히 밝아서 결국 그 정상을 통찰하였기 때문에 저의 가문에 대한 베푸심은 한결같이 보전하여 주는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이를 미루어 말한다면 그들이 간교하게 참언을 한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또다시 누구를 책망하겠습니까? 김이양은 또 상소에서 말하기를, ‘진실로 억울하다면 왜 그때에 호소하여 폭로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또 ‘선조 때에는 감히 한마디의 말도 내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하나의 중요한 공안(公案)입니다.’라고 한 것은 더욱더 한 번의 웃음거리도 못되는 것입니다. 저의 가문이 옛날 선조 때에 비록 흉당(凶黨)의 무함을 입었으나 그들 무리가 저희들끼리 서로 전파하고 서로 위협한 것에 불과하였고, 한 번도 소장(疏章)의 문자에 기록된 일이 없었으며, 또 우리 선조의 성감으로 통찰하여 밝혀서 더이상 밝힐 것이 없는데, 다시 호소 폭로할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도 또한 억지로 뒤집어씌워서 위협하는 말일 뿐입니다.
김희순은 또 상소에서 말하기를, ‘선왕께서 그 죄안에 대하여 분명하게 통촉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우선 그냥 방치하여 두었던 것입니다.’ 하였으니, 단지 이 한 마디 말은 바로 김이양의 산수(山藪)라는 말과 똑같이 무핍(誣逼)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구선복(具善復)이 자기 죄에 복죄(伏罪)하였으나 그 처음에는 임용했다.’고 한 것은 더욱 심히 패려한 말이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선조께서 등극하신 뒤로 굳게 지킨 의리가 부월(鈇鉞) 같이 엄중하였기 때문에, 김상로(金尙魯)·정휘량(鄭翬良)·홍계희(洪啓禧)·신만(申晩) 같은 무리에 대해서는 이미 그 실질적인 범죄에 대하여 통촉하였으니, 전혀 사의(私義)로써 참착(參錯)하여 법을 굽혀서 용서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선복의 죄역에 대해서는 처벌한 것이 조금 늦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결국 정죄(正罪)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시종 일관 보전하기를 저의 증조부처럼 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자 또한 신하된 자로서,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처분을 인용하여 이처럼 무엄하게 함부로 무패(誣悖)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김이양이 전소에서 말하기를, ‘권유(權裕)의 변이 생기자 김관주(金觀柱)의 죄가 드러났으니, 이 아비와 이 자식이 한결같은 심법(心法)을 서로 전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말이 말 같지 않음이 또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저의 조부가 과연 역적 권유와 통모한 일이 있었다면, 연전에 나라의 경사로 사면을 논의할 때 저의 조부가 어째서 역적 권유에 대해서는 거론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연중에서 아뢰어 윤유(允兪)를 받기까지 하였습니까? 그뒤 권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문서를 수색하여 들였던 바, 그 역적의 일기 중에, 저의 조부가 사전(赦典)을 가로막은 일에 대하여 원망하고 욕설을 한 것이 더할 수 없이 참독(慘毒)하였던 사실은 참국(參鞫)한 신하들이 다함께 눈으로 직접 본 일입니다. 그런데도 저의 조부가 역적 권유와 통모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까운 말입니까? 대저 저의 집과 그들 무리와는 세교(世交)가 있어서 본래는 은원(恩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의 상소가 한 번 있은 후로 언의(言議)가 서로 갈리어서 차츰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대개 김이양이란 자는 가장 한쪽에만 치우친 혈당(血黨)이란 말을 듣는 자로서, 기꺼이 의리를 저버리기 때문에 그자가 처음 벼슬하여 기록을 적었을 때 여러번 선조의 회책(誨責)하는 하교를 입고도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은 일 또한 온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그자의 내력을 어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김이성은 저의 증조부를 평강으로 찾아왔을 때 임진년 상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언의(言議)가 아주 괴패(乖悖)하므로 저의 증조부가 엄격한 말로 경계하여 나무랐더니 그자가 발끈 성내어 가버렸습니다. 이뒤로부터 저의 집을 무함·비방하는 말이 너무 시끄러워서 저의 집과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김이재로 말하면, 지난번에 피적(被謫)된 것은 곧 선조 말년의 대처분으로서, 당일의 사교(辭敎)가 너무나 절엄(截嚴)하였으므로 임술년의 경사(慶赦) 때에 저의 조부가 여러 대신들과 함께 연중(筵中)에서 아뢰어 그의 형 김이교와 함께 사전(赦典)에 거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자들은 은사(恩赦)를 받지 못한 허물을 전적으로 저의 조부에게 돌리면서 원망하는 말이 아주 위험하고 무서웠습니다. 더구나 그들 가문이 중간에 폐기된 것은 실제로 선조 때입니다. 이때부터 그들 무리가 스스로 간구(干求)하는 일이 저의 집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지난번 김이교의 상소 가운데에 이것도 저의 집에서 음해(淫害)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따위 우스꽝스러운 말들은 진실로 수다스럽게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 김희순의 경우는 평소의 정분이 아주 두터웠으므로 의당 서로 원망하고 덮어씌울 이치가 없을 것인데도, 필시 김이양의 무리가 유혹하고 위협하게 되자, 성질이 유약해서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고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저 그들의 혐원(嫌怨)이 차츰 누적된 것이 이와 같았으니, 한 번 저의 가문에 대하여 한풀이를 하려 한 것은 형편상 반드시 이르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설(誣說)이 아무리 장황하다 해도 우리 가문의 부조(父祖)의 말이 이와 같고, 우리 가문의 형제의 말이 이와 같을 뿐이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근거할 만한 문자가 없고 증거할 만한 사적이 없었습니다. 문자나 사적이 없는데도, 단지 집안의 사언(私言)을 가지고 남을 흉역으로 얽어넣는다면 무슨 말인들 못 만들어 내겠으며, 무슨 일인들 못 꾸며내겠습니까? 대저 그들의 전후 상소가 모두 스스로 속마음을 탄로시키는 것이므로 서로가 모순되는 것들로서 막중한 자리를 무핍한 것은 또 김이양의 대안(大案)입니다. 지금 제가 아뢴 것은 모두 낱낱이 사실에 의거하여 쓴 것이니, 우리 성상의 명감(明鑑)으로 한 번 읽어 보신다면 저쪽과 이쪽의 사실과, 죄상의 있고 없는 것을 모두 응당 환하게 살피실 것입니다.
삼가 청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시어 김이양·김이교·김희순 등의 전후의 상소를 찾아 들여 제가 올린 상언과 함께 서로 비교하면서 살펴보신 다음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구문(究問)토록 하되, 저와 대질시켜서 제가 말한 바가 털끝만큼이라도 사정(私情)을 두고 임금을 속인 것이 있다면 저의 일문(一門)은 즉시 모두 함께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남을 악역으로 무함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들이 선조를 무핍한 죄도 의당 모두 천감(天鑑) 아래에 폭로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증조부의 지극한 원통도 저 지하에서 드러나게 밝혀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전 가문이 곧장 목숨이 다하더라도 감읍(感泣)하여 끝마칠 따름이요 다시는 아무런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의계(議啓)하기를,
"김성길(金聖吉)에게 징을 치도록 시킨 자를 속히 엄중히 핵문(覈問)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천부(伊川府)의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 1백 31호와 엄사(渰死)한 27명에 대하여 특별히 구제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7월 21일 기유

대사헌 한용탁(韓用鐸)과 형조 당상 【참판 유경(柳畊)과 참의 유정양(柳鼎養)이다.】 과 옥당(玉堂) 【부응교 김기은(金箕殷)과 부교리 이종운(李鍾運)이다.】 과 대사간 남이익(南履翼) 및 삼사의 신하들이 번갈아 소를 올려 김한록의 손자를 철저히 조사할 것을 청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연차(聯箚)를 올려 여러 신하들이 똑같이 말하는 청에 특별히 따를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에 관한 의리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자가 비록 스스로 밝혔지마는 감히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이제 다시 처분하지 않는 것 역시 선대왕의 당일의 성덕(盛德)을 따른 것이다. 경들은 이를 알고 엄중히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2일 경술

영희전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7월 24일 임자

인정전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강을 행하였다.

 

7월 25일 계축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이 난리 초기에는 싸움에 나가서 공로가 많았고, 난리가 지난 후에는 고을을 다스려 공적을 이룸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난리를 겪은 다른 고을처럼 드러난 상을 받지 못하여 억울하다는 공론이 없지 않습니다. 관서(關西)를 장려하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전례를 벗어나는 특전이 있어야겠으니, 청컨대 특별히 가자하고, 본직은 변지 이력(邊地履歷)으로 허용하되, 본읍이 소성(蘇成)될 때까지는 이천(移遷)하지 말아서 유종의 효과를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 김이양의 장계에 ‘남관(南關)·북관(北關)의 친기위(親騎衛)의 증설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남곤(南閫)이 친기위를 가초(加抄)한 뒤에 깊숙한 북관의 무사들은 더욱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관에도 6백 명을 가설(加設)하여 원액(元額)과 합쳐서 1천 6백 명을 만들어, 8백 명은 본영에 소속시키고 8백 명은 행영(行營)에 소속시켰으면 합니다. 그리고 상전(賞典)이 전과 같아서는 흥권(興勸)할 수 없습니다. 본도의 변장(邊將)은 곧 경교(京校)인 바, 불원(不願)하는 자에 대해서는 남북 지방에서 각각 한 자리씩 뽑아서 제수하여 양곤(兩閫)에 분속(分屬)시키소서.’라고 청하였는데, 남곤·북곤에서 각각 친기위를 증설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용동(聳動)시키고 군제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접때 남곤의 장청에 따라 이미 시행하였으니, 지금 북곤에 대해서도 달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청대로 시행하되, 변장을 가차(加差)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남곤에 허락하였으니, 또한 이미 시행한 전례에 따라 깊숙한 곳의 북곤에 변장 한 자리를 주라는 뜻으로 해조(該曹)에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에서 조산 만호(造山萬戶)를 자벽과(自辟窠)077)  로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계락(金啓洛)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상신(權常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6일 갑인

인정전에 나아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을 행하였다.

 

7월 28일 병진

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생위군자탕(生胃君子湯)을 정지하였다.

 

경상 감사 이존수가 아뢰기를,
"이달 16, 17일의 비로 영하(營下)와 상주(尙州) 등 32읍의 평지가 모두 물바다가 되고, 무너져 터지고 모래가 덮은 전답(田畓)과 물에 잠기고 쓰러진 각종 곡식은 셀 수도 없었습니다. 이 외의 다른 고을들도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본도의 수재는 늘 임자년이 가장 심하였다고 하는데, 이번의 수해는 임자년보다도 더하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7월 29일 정사

호군 김이교(金履喬)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김한록의 손자인 아홉 살 된 흉악한 아이가 필로(蹕路)078)  에서 징을 울려 하소연한 것은 이 무슨 변괴입니까? 대신과 삼사에서 연달아 글을 올려 치토(致討)하면서 철저히 조사할 것을 함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다시 한 말씀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본심이 이 역적과는 함께 살고 싶지 않으며, 신 또한 후일 선왕을 돌아가 뵙게 될 날이 있으리란 것을 분명히 알려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의 성덕과 지극한 밝으심은 먼 곳이라도 빠뜨림이 없으며 은미한 곳이라도 통촉하지 않으심이 없었습니다. 저 역적 김한록이 어두운 곳에서 일을 꾸며서 가는 곳마다 전하의 속마음을 떠보는 정상을 이미 충분히 살피고 있었을 것입니다. 호향(湖鄕)의 사대부들간에는 의리를 강명(講明)하였는 바, 신의 조부가 분명히 말하고 드러내어 배척하여 간사한 싹을 꺾어내린 사실에 대해서도 모두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의 재종형인 참판 신 김이성(金履成)이 연석에서 아뢰어 곧장 성토하였던 것입니다. 전후의 신청(申請)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임자년 겨울 이후에 이르러 다시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반복해서 앙질(仰質)하여 선대왕의 용인하는 본지를 승령(承聆)한 것이 일성(日星)처럼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연교(筵敎)가 신들에게 언급함이 있어 말씀하기를, ‘남들이 모르고 요양(撓攘)하는 것은 오히려 모르기 때문이라고 핑계댈 수가 있다. 저들은 그 조부의 의리가 본래 있으니, 의당 굳게 지켜서 잃지 말면 될 것이다.’ 하셨는데, 신의 형제가 흉도(凶徒)의 유협(誘脅)을 수없이 당하고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 하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전에 성상께서 신의 아우 김이재에게 교유(敎諭)하신 비지에 말하기를, ‘만약 경신년의 붕탁(崩坼)079)  의 변이 없었다면 그대가 어찌 중간의 소조(所遭)가 있었겠는가?’ 하셨습니다. 아! 어찌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은언 지교(恩言至敎)가 이처럼 법칙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역적을 성토하여 의리를 밝히는 일에 대해서 역량이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았지만, 비록 그때문에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흉수(凶竪)의 공사(供辭)를 보니, 기세가 장황하고 사설(辭說)이 변환(變幻)하기가 연전에 올리지 못하였던 상언보다 훨씬 더합니다. 이동윤(李東允)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동윤은 신의 족숙(族叔) 김교행(金敎行)에게서 수업하였으므로 정의(情義)가 부자 사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족숙의 친아들·친아우가 지금 모두 살아 있으므로 그 일을 아는 자는 유독 이동윤뿐이 아닐뿐더러, 각집의 문적(文蹟)이 더구나 이동윤의 기록보다 자세함이겠습니까? 위협하고 움켜쥘려는 것이 본래 흉도의 기량인 까닭에 전하는 방법이나 전하는 버릇이 조금도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어서, 신들의 성토에 대하여 감정을 품고서는, ‘부형들의 정호(情好)가 이처럼 바뀌지 않았다.’고 하고, 성상의 처분에 대하여 원망을 하면서도 또 감히 말하기를, ‘선조에서는 이처럼 보전하여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음은 한결같이 협박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두서너 구어(句語)로 어려움도 없이 막중한 자리에 무핍하였으니, 그 마음씀이나 말투에 대하여 깊이 캐본다면 더욱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아픔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 저 김관주(金觀柱)와 김일주(金日柱)에 대하여 지난날에 은인(隱忍)하여 용대(容貸)한 것이 그자들에게는 일분(一分)의 자중(藉重)할 단서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곧 그자의 공사(供辭)에 인용한 김상로(金尙魯)나 홍계희(洪啓禧)의 일은 예를 들어 참조하기에 아주 합당한 것입니다. 김상로나 홍계희의 역절(逆節)과 간상(奸狀)에 대해서는 영조께서도 일찍이 통촉하시어 선조에게 알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영묘께서 다스릴 때에는 김상로나 홍계희가 안연(晏然)히 무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도 포열(布列)하여 현용(顯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조께서 등극하시게 되자 처분을 한 번 내리니, 대의가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김귀주(金龜柱)와 김한록을 정죄(正罪)한 것은 곧 선대왕께서 김상로와 홍계희를 토죄(討罪)한 것과 같은 처분이라고 여깁니다. 그자가 어찌 감히 병인년 처분의 뒷일에 대하여 말참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김상로나 홍계희의 여얼(餘孼)이 감히 그 당시에 호소하는 일이 있었더라면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결단코 즉시 아뢰어 힘써 다투어서, 그 친속들을 자세히 캐어묻고 지시한 자를 찾아내 다스리어 반드시 지금처럼 우물쭈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선조께서 김상로·홍계희의 지속(支屬)을 처분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천주(天誅)를 받은 것으로, 남김없이 없애버려서 단지 연좌의 율에만 관련시켰을 뿐만이 아닙니다. 이번에 이 흉악한 아이가 징을 친 일은 곧 구악(舊惡)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흉역을 꾸미겠다는 것으로, 스스로 천주를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어떻게 전혀 문책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도록 맡겨 둘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흉추(凶醜)의 생심(生心)을 직접 보고도 육시(戮屍)하여 시조(市朝)에 진열할 만한 힘이 없고, 말로도 당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여, 종전의 일이 발생하기 전에 하던 염려도 거듭 발생하는 변괴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부끄러움도 없이 입버릇처럼 문득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충분(忠憤)이 복받쳐서 다시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이 상소를 다시 대신과 삼사에게 물으시어, 만약 신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신은 응당 피로 얼굴을 씻는[沫血] 정성을 그런대로 바친 것이 될 것이요, 만약 신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시더라도 또한 어리석은 신이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생각하면 신이 조상(祖上)을 떨어뜨리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장차 면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아뢴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7월 30일 무오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영남의 폭우에 관한 장계를 보니, 16, 17일의 비로 도 전체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석 달 동안 가물어서 거의 흉년이라고 판단되었는데, 이틀 동안의 큰 비로 이어서 큰 흉년이 되었습니다. 물이 빠진 뒤에 날씨가 순조롭다면 혹시 늦게나마 조금의 수확이 있겠지만, 대개 본도의 농사는 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백성을 살리는 계책은 오로지 곡물에 있는데, 지금 도내에 남은 곡식으로는 도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전에 이미 북관(北關)의 교제곡(交濟穀)을 예비하여 왕명을 기다리라는 뜻으로 연석에서 품지(稟旨)하여 행회(行會)하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기(先期)하여 정대(整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해를 입은 뒤로는 일전에 비하여 한층 더 심할 터이므로 북관의 곡물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연전에 관동이 재해를 만났을 때 영남의 곡물 4만 석을 옮겨다가 관동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니, 지금 또 관동의 곡물을 옮겨다가 영남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서로 도와 주어서 피차에 바꾼 것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더구나 관동은 조금 흉년을 면하여 민력이 조금은 펴이고 있으니, 곡물의 많고 적은 것은 우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먼저 2, 3만 석을 정비(精備)하여 대기하라는 뜻으로 관동의 도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신칙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다시 아뢰기를,
"함경 감사 김이양이 보고하기를, ‘함흥의 병풍파(屛風坡)는 장진(長津)의 부전령(赴戰嶺)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이 흩어지고 관적(官糴)이 폐지되어 지금은 버린 땅이 되었습니다. 함흥에 대해서는 있고 없는 것이 상관이 없지마는 장진에 있어서는 관령(管領)하기가 가깝고 편리하니, 지금 병풍파를 장진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을 모아서 경작시켜 도움을 얻을 수 있고, 또 형편이나 경계의 설정으로 말하더라도 역시 당연히 장진에 속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것을 함흥에 소속시켜서 버린 땅을 만들기 보다는 차라리 장진에 떼어 주어서 읍치(邑治)를 돕도록 할 일이요, 또 거리 관계로 말하더라도 장진에 소속시키는 것이 가깝고 편리합니다. 보고한 대로 윤허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한용귀가 아뢰기를,
"당성 부원군(唐城府院君) 증 영의정 홍세공(洪世恭)은 곧 선묘조(宣廟朝) 때의 명신입니다. 어려운 때를 만나 왕실을 위해 힘을 쓰고 조도(調度)의 책임을 맡아서 군량이 모자라지 않았으며, 순찰사의 명령을 받자 교로(蕎虜)가 모두 도망갔습니다. 조정에서 크게 의지하여 공업(功業)을 장차 이루게 되었는데, 7년 동안의 전쟁에서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번 봉증(封贈)의 특전을 더하여 영구히 잊지 않는 원훈(元勳)과 같이 배려하였지만 이처럼 공로와 성충(誠忠)이 나라에 드러난 자에게는 시호를 내리는 은혜를 베풀어 생전에 다하지 못한 은영(恩榮)을 빛내 주어서 충신을 표창하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시장(諡狀)을 기다려서 즉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희순(金羲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의호(洪義浩)를 한성부 판윤으로, 심상규(沈象奎)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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