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정해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는데, 권정례(權停例)001) 로 하였다.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말하노라. 자령(慈齡)이 80세에 오르셨으니 그 경사스러움은 사첩(史牒)에 드문 일이고, 새해 첫날에 화려한 예를 올리니 기쁨이 온 세상에 넘치는구나. 선왕의 효도를 추념하고, 팔방(八方)에 은혜를 펼치노라. 삼가 생각하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께서는, 왕실의 빈(嬪)이시며 성인(聖人)의 어머니이시다. 옛날 비궁(閟宮)002) 에서 사중(四重)의 칭송이 드날려 패옥(佩玉)의 꾸밈은 칠장(七章)003) 의 의식에 배합되었고, 우리 영고(寧考)께서 왕위에 빛나게 임어하시어 그 어머니께서는 온 나라의 봉양을 받으셨다. 침소에 날마다 세 번 문안드렸으니 자경당(慈慶堂)의 기쁜 얼굴을 길이 우러러보았고, 일곱 잔의 헌수(獻壽)하는 술을 올렸으니 아직도 을묘년004) 봄 〈회갑 때의〉 성대한 일이 전하여졌다. 거룩하셔라. 돌보아 주심이 이 소자(小子)에게까지 미쳤으니, 아! 어머니처럼 기쁘게 받들어 모시노라. 은교(殷郊)에서 수독(受韣)의 상서를 길렀으니 일월(日月)이 사록(沙麓)005) 에 부합하였고, 한궁(漢宮)에서 함이(含飴)006) 의 즐거움이 흐뭇하시니 밤낮 때때옷 입고 노는 재롱007) 을 곡진히 하였다. 나를 돌보고 또 돌아보시는 은혜가 어머니처럼 아주 가까이 해주시는 것을 언제나 우러러보았다. 어버이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 생각을 미루어 보매 항상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다. 많은 복을 받으시어 해와 달이 솟아오르듯 하였으니 이미 하늘이 도우심을 경험하였고, 번창하고 오래 사시라 축수하면서 다시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되시기를 기원하노라. 새해 새날을 맞아 운세가 길이길이 열리니, 높으신 춘추가 81세가 되셨구나. 태세(太歲)가 또한 을년(乙年)이 되니 이를 송축하는 옥책(玉冊)을 받드는 의식이 감격스럽고, 하늘이 거듭 세월을 늘려 주시니 팔순(八旬)을 축수하는 예절을 지냈도다. 아름답도다, 화봉인(華封人)의 헌축(獻祝)008) 이여. 참으로 희몽(姬夢)의 발상(發祥)009) 이로구나. 노 수모(魯壽母)010) 와 같은 높으신 춘추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얻으실 것이요, 주 문손(周文孫)011) 같은 도타운 경사는 휘음(徽音)이 더욱 길리로다. 죽간(竹簡)에 새기고 은니(銀泥)로 썼으나 자전의 겸양함을 돌릴 수 없음이요, 자리를 펴고 잔치를 베풀 제나라의 예법이 미처 풍성(豊盛)히 할 겨를이 없었노라. 이에 전날의 길러 주신 정성을 보답코자 큰 뜰에 호숭(呼嵩)012) 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노라. 삼전(三殿)013) 의 기뻐하시는 기운이 넘쳤으니 강림하시는 혼령의 도움 아님이 없었고, 백관들의 새벽 반열(班列)이 질서가 당당한데 모두들 무도(舞蹈)가 부족하다고 여기노라. 사해(四海)에까지 이르러 삼대(三代)에서 효도를 일으키는 데 돈독히 한 정치를 견주었고, 오복(五福)을 거두어 또한 만백성에게 똑같이 사랑하는 데로 돌아가는 교화를 펴노라. 이에 은택(恩澤)을 베풀어 널리 교서(敎書)를 반포하노라. 이달 초하룻날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제한다. 아! 자애로우신 덕화(德化)가 봄 햇볕과 같이 흘러서 만물을 경운 서일(慶雲瑞日) 속에 감싸주었고, 왕업이 천지와 함께 무궁하여 온 나라가 장수하는 태평 성세에 오르게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응당 모두 잘 알지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상황(李相璜)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7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1] 권정례(權停例) : 조하(朝賀)의 의식(儀式) 때 임금의 임어(臨御)가 없더라도 권도(權道)로 식(式)만 거행하는 일.[註 002] 비궁(閟宮) : 종묘(宗廟)의 이칭.[註 003] 칠장(七章) : 제후의 곤복(袞服)의 일곱 가지 무늬. 천자(天子)는 구장(九章), 제후는 칠장. 노나라는 제후였기 때문에 칠장임.[註 004] 을묘년 : 1795 정조 19년.[註 005] 사록(沙麓) :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인데,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에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음. 그 뒤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애제(哀帝)가 죽은 뒤 섭정(攝政)하였음.[註 006] 함이(含飴) : 엿을 먹고 손자를 희롱하며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는 것. 후한(後漢)의 마황후(馬皇后)가 "나는 단지 엿을 머금고 손자나 희롱하며, 다시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겠다."고 한 데서 나온 말임.[註 007] 밤낮 때때옷 입고 노는 재롱 : 옛날 중국의 24효자 가운데 초(楚)나라의 현인(賢人)인 노래자(老萊子)는 나이 70에 어린애 옷을 입고 어린애 같은 장난을 하여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음.[註 008] 화봉인(華封人)의 헌축(獻祝) : 요(堯)임금이 화(華) 땅을 순행할 때 화봉인(華封人)이 임금의 덕(德)을 찬양하여, "성인(聖人)은 수(壽)하시고 성인은 부(富)하시고 성인은 다남(多男)하시라."고 세 번 축복하였다는 고사.[註 009] 희몽(姬夢)의 발상(發祥) : 주 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이 제후(諸侯)에게 서약하기를, "나의 꿈은 나의 점과 맞고 아름다운 상서가 겹쳐 있으니, 상(商)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기리라[朕夢協朕卜 襲于休祥 戌商必克]"고 말한 고사(故事).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중(泰誓中)에 보임.[註 010] 노 수모(魯壽母) :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편(閟宮篇)에, "노나라 임금이 즐기고 기뻐하시니, 착한 부인과 수하시는 어머니가 계시도다.[魯侯燕喜 令妻壽母]"라고 하였음. 오래 사시는 어머니, 또는 어머니에 대한 축수의 뜻.[註 011] 주 문손(周文孫)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훌륭한 손자를 말함.[註 012] 호숭(呼嵩) : 산호(山呼)를 말함.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라가 제사를 지낼 때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로서, 나라에 큰 의식이 있을 때 황제나 임금의 축수(祝壽)를 표하기 위하여 만수 무강(萬壽無疆)을 비는 뜻에서 신하나 백성들이 ‘만세(萬歲)’ 또는 ‘천세(千歲)’를 크게 외치던 일.[註 013] 삼전(三殿) : 여기서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효의 대비(孝懿大妃) 김씨(金氏), 가순궁(嘉順宮) 박씨(朴氏)를 말한 것임.
마땅히 자급(資級)을 올려 주어야 할 노인에 대하여 비지(批旨)를 내렸는데, 1백 세가 된 자가 33인이었다.
노인들에게 특별히 세찬(歲饌)을 나누어 주고 이어서 안부를 묻도록 명하였는데, 해마다 하는 규례(規例)이었다.
1월 3일 기축
복과(復科)014) 한 사람 신덕우(辛德雨)를 본래의 방목(榜目)에 올리도록 명하였다.
1월 4일 경인
약방 도제조 한용귀(韓用龜)와 전임 도제조 김사목(金思穆)에게 안구마(鞍具馬)를 면급(面給)하고, 아들·사위·동생·조카 중에 한 사람을 첫 벼슬에 제수하였으며,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제조 김시근(金蓍根)을 정헌 대부에 가자(加資)하고, 부제조 이호민(李好敏)을 가의 대부에 가자하였으며, 표피를 내려 주고 구마(廐馬)를 면급하였다. 따로 입직(入直)한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과 좌참찬 박종경(朴宗慶)에게도 각각 안구마를 면급하고, 아들·사위·동생·조카 중에 한 사람을 첫 벼슬에 조용(調用)하였으며,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를 승서(陞敍)하고, 어의(御醫) 이하는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으니,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기 때문이었다.
1월 5일 신묘
혜경궁(惠慶宮)의 보령(寶齡)이 망구(望九)015) 임을 기념하는 경과 정시(慶科庭試)를 명하여 초시(初試)를 제외하고는 당일에 방방(放榜)016) 하였다.
1월 10일 병신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도성 안에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의 죽음이 날마다 불어나 왕왕 알몸으로 길거리에 버려져 시체가 쌓여서 더미를 이룬다고 하니, 듣기에 몹시 놀랍고 측은합니다. 경조(京兆)017) 로 하여금 낭관(郞官)과 부관(部官)018) 들을 보내 매일같이 적간(摘奸)하도록 한 후에 진휼청(賑恤廳)과 각영문(各營門)에서도 저마다 재력(財力)을 내어서 함께 감독하여, 전에 해골들을 묻어 준 사례와 옛날에 총총(叢塚)을 쓴 방법을 본받아 편의에 따라 깊이 묻어서, 지금처럼 노출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제대로 거행하지 않는다면 초기(草記)019) 하여 논감(論勘)하겠다는 뜻으로 청컨대 신칙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술을 금하는 일은 본래 백성을 위해 주림을 구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듣는 바로는 근간에 오면서 양반 가호(家戶)들의 금법(禁法)을 범하는 것이 갈수록 심해져 이익을 독점하는 자는 어떻게든 모면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자만 그 피해에 치우치게 걸려들어서, 금령(禁令)이 차츰 문란하여 원망이 더욱 심해지니 백성을 구제하려던 것이 이제는 도리어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법관(法官)이 제대로 군명(君命)을 받들어 백성에게 선양했다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습니까? 더구나 들은즉 가짜 금례(禁隷)020) 로 일컬으면서 재물을 약탈하는 민폐가 더욱 심해서 마을 거리에 소요가 끊이지 않으니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합니다. 형조와 한성부의 당상들과 좌·우 포도청의 포장(捕將)들을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여 철저히 이런 일이 없도록 금하게 하고, 백성들을 약탈하는 금례들은 포도청에서 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시임 및 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자문하는 것은 임금이 치리(治理)를 도모하는 근본이 됩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용히 조섭(調攝)하시느라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니, 전하께서 몸소 서무(庶務)를 처결하지 못한 지가 매우 오래 되었다 하겠습니다. 이제 직숙(直宿)도 거두었고 또 새해가 되었으니, 한번 차대(次對)021)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흉년으로 안팎에 부황이 들어 심지어 서울 거리에까지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으니, 외방 고을의 참상은 신이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은 소문만으로도 그 황급한 상황을 말하지 않더라도 가히 알 만한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한가하게 시간이나 보낼 때이겠습니까? 다행히 근래에 선대(宣對)를 가지시어 정사(政事)의 방도를 물으시고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살피시어 나랏일이 적체(積滯)되는 일이 없도록 하셨으면 하는 것이 진실로 간절한 소망입니다. 이제 성후(聖候)가 평복(平復)된 때를 당하여 안팎의 신료(臣僚)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서 송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이들을 위로하여 안정케 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새해의 인대(引對)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습니다. 신들도 조용히 조섭한 나머지에 수응(酬應)하시기 어려울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처럼 한결같이 아뢰어 그칠 줄을 모르는 이유는 진실로 사세가 긴급하여 조금도 늦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1월 11일 정유
이에 앞서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이 아뢰기를,
"본도(本道)의 바닷가 근처 15읍이, 매년 23차나 바치는 물품과 별진상(別進上) 및 윤삭 진상(閏朔進上)·도계 진상(到界進上) 등 불시에 있는 책응(策應)으로 대체로 모두 거두기 때문에, 정비(情費)022) 가 너무 많아서 왕왕 바닷가 마을이 텅텅 비어버려 육지 백성들에게 옮겨 거두고 있는 형편이니, 지금 이를 변통할 계책이란 영작공(營作貢) 한 가지 방법뿐입니다. 지금 연례적인 원진상(元進上)은 해민(海民)들이 납부할 2만 냥 영(零) 중 1만 냥 영을 감급(減給)하였고 그 나머지 1만 냥과 대동민고(大同民庫)에서 인수한 6천 냥을 합하여 1만 6천 냥을 영공(營貢)의 밑천으로 해서 별도로 본영에 진헌고(進獻庫)를 설치하였습니다. 을해년023) 1월의 삭선(朔膳)024) 부터 시작해서 본고(本庫)에서 봉진(封進)하여야 하는데, 별진상과 각 전궁(殿宮)에 아울러 봉진할 경우 한 번에 들어가는 것이 6천여 냥이며 당전(當殿)에만 봉진하는 경우에도 2천 냥 가까이 들어갑니다. 이를 만약 일체로 널리 다스리지 않는다면 철아닌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백성들의 추렴은 배가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전곡(錢穀)을 진헌고에 모아두고 취모(取耗)하여 이식을 늘려서, 윤삭 진상과 함께 물가에 맞추어 그때그때 사서 봉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도신(道臣)이 임기가 차서 바뀐 뒤 도계 진상을 해민에게서 거두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 뒤로는 신구(新舊)의 도백(道伯)이 스스로 마련하여 봉진하는 일을 정례(定例)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헌고에 저축할 물재(物財)가 오히려 혹은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지 못할 염려가 있으니 본도의 영진모(營賑耗)에서 탕채(蕩債)로 대신 지급하고, 원수(元數) 중에서 임신년025) 부터 시작해서 환록조(還錄條)로 매년 6백 50석을 이보(移補)하여 쓴다면, 실로 편당(便當)하겠습니다. 본도에서 진헌하는 생어물(生魚物) 중에서 송어(松魚)·연어(鰱魚)·은어(銀魚)·과어(苽魚)·황어(黃魚)·청어(靑魚)·문어(文魚)·대구어(大口魚) 등 8종은 철의 이름과 늦음에 따라 나는 시기가 다릅니다. 그런데도 월령(月令)과 삭선(朔膳)의 봉진이 모두 당초에 정해진 기한이 있어서, 항상 기한을 놓치고 번번이 연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지난 신미년026) 에 생과어(生苽魚)와 대구어 두 종류를 천신(薦新)하는 일은 특별히 제철에 맞추어 봉진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인데, 나머지 6종도 다름이 없으니, 일체로 적절하게 하는 일을 모두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에서 복계(覆啓)하여, 허락하여 시행토록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이희갑(李羲甲)을 함경도 관찰사로, 정주성(鄭周誠)을 평안도 절도사로 삼았다.
1월 12일 무술
남공철(南公轍)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통영(統營)의 지방(支放)과 주진(賙賑)할 밑천은 영남에 있는 본영(本營) 소관의 원환미(元還米) 중에서 1만 석을 한도로 취하여 쓰도록 명하였다.
1월 13일 기해
제도(諸道)의 봄철 조련(操鍊)을 정지하였으니, 진휼을 설시하기 때문이다.
1월 15일 신축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도성 안의 거지들 중 각 고을에서 흘러 들어온 자는 차원(差員)을 정하여 원래의 호적이 있는 고을에 영부(領付)토록 하고, 원래 서울에 살던 자는 진휼청(賑恤廳)에서 날짜를 계산하여 양식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좌도(左道)027) 를 물리쳐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케 하는 것은 곧 치교(治敎)에 있어서 우선해야 할 일이며,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입니다. 반유(泮儒)028) 들이 성균관에서 무녀(巫女)들을 내쫓자 세종(世宗)께서는 내 병이 나으려 한다는 하교(下敎)까지 하였고, 송도(松都)의 선비들이 송악산(松嶽山)의 음사(淫祠)를 헐어버리자 명묘(明廟)029) 께서는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매우 칭찬했으며, 우리 선조(先朝) 때에는 무격(巫覡)과 승니(僧尼)들이 성 안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하고 이어서 법부(法府)의 금령을 삼았던 것입니다. 요즈음 들으니 무녀와 비구니의 무리들이 종적을 숨기어 출몰하면서 대체로 꺼리는 바가 없어, 현혹시킴이 도성 안에 점점 불어나고 기도와 굿이 거의 사찰(寺刹)에 두루 퍼지므로 들리는 바로는 소란스러움이 옮겨가며 넓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열성조(列聖朝)에서 좌도를 물리쳐 민심을 안정시키려던 성덕(盛德)의 지극한 가르침이라 하겠습니까? 경조(京兆)030) 와 추조(秋曹)031) 로 하여금 삼가 선조의 수교(受敎)를 따라 철저히 찾아내어 즉시 모조리 성밖으로 내쫓아서 서울 부근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고, 만일 금령(禁令)을 무시하고 숨기는 자가 있으면 청컨대 신속히 형배(刑配)의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도승지 이호민(李好敏)과 함경 감사 이희갑(李羲甲)과 행 호군(行護軍) 정상우(鄭尙愚)를 모두 정경(正卿)에 승탁(陞擢)하고, 이조 참의 서유문(徐有聞)과 전 보덕(輔德) 김회연(金會淵)과 부호군(副護軍) 신현(申絢)·남이익(南履翼)과 우승지 김희주(金熙周)를 모두 아경(亞卿)에 승탁하소서. 산림(山林)의 기덕(耆德)032) 들이 이미 모두 죽고 현재 정초(旌招)033) 의 반열에 남아 있는 자는 단지 찬선(贊善) 송치규(宋稚圭)와 전 집의(執義) 송계간(宋啓榦) 두 사람뿐입니다. 각각 한 자급을 가자하여 예우하는 뜻을 보이시고, 이어 별도로 하유(下諭)를 내리시어 더욱더 돈독히 불러 서연(書筵)에 출입케 하여 예학(睿學)034) 을 돕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이상황(李相璜)이 아뢰기를,
"각 궁방(宮房)의 면세전(免稅田)으로 본조(本曹)에서 수송하는 일에 대해서는 기본 수량이 고정되어 있어서 당초부터 풍흉의 구별이 없었으니, 신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혹 궁중과 부중(府中)이 한결같아야 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다고 여깁니다. 위로 전세(田稅)의 정공(正供)035) 은 급재(給災)036) 하는 규례가 있고, 아래로 각 관사(官司)의 공물과 외방으로 영읍(營邑)의 수미(需米)도 모두 감분(減分)하는 법규가 있는데, 유독 궁방의 세(稅)만은 재해를 당해도 감해 주지 않는 것은 일의 체면상으로 보더라도 결코 윤당(允當)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은 원결(元結) 중에서 나누어 준 것인데, 원결을 이미 감급(減給)했으면 나누어 준 부분에 대해서도 감해 주어야 함이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이미 해마다 재실(災實)이 있으니, 일체로 원결의 급재한 수에 따라 각 궁방의 세납(稅納)에도 분배하여 급재 감량하여야만 비로소 공평한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매년 이렇게 한다면 궁방의 사세(事勢)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우선 가장 가벼운 예를 따라서 다만 우재 감분(遇災減分)의 연분율(年分率)로 재감해 준다면 영읍(營邑)의 수미(需米)나 각사의 공물의 예에 비교하여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그대로 따랐다.
김이재(金履載)를 이조 참의로, 김이교(金履喬)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서울의 각관사와 각영(各營)에서 갑술년037) 의 회계부(會計簿)를 올렸다. 【시재(時在)의 황금이 2백 40냥 영(零), 은이 45만 9천 1백 30냥 영, 전문(錢文)이 1백 14만 9천 2백 90냥 영, 면주(綿紬)가 1백 26동 영, 무명[木]이 6천 7백 77동 영, 저포(苧布)가 79동, 포자(布子)가 1천 3백 24동, 백미(白米)가 14만 3천 6백 30석 영, 전미(田米)가 1만 7백 70석 영, 콩이 2만 5천 6백 30석 영, 피잡곡(皮雜穀)이 1만 9천 6백 90석 영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75면
【분류】재정-국용(國用)
[註 037] 갑술년 : 1814 순조 14년.
1월 16일 임인
인정전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는데, 권정례로 하였다. 교문을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말하노라. 과인이 병이 있어 몇 달이 넘도록 앓는 우환을 만났었는데, 하늘이 도우셔서 곧 건강이 회복되는 기쁨을 아뢰게 되었다. 이에 떳떳한 법도를 따라, 여망(輿望)에 응하고자 하노라. 아! 부족한 내가 10년을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 한결같이 두려운 마음을 가졌었다. 조심하였노라. 부여받은 책임이 막중함은 오직 천지(天地)와 조종(祖宗)께서 맡기신 때문이고, 언제나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굽어살피시는 듯하여 한 동작 한 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무릇 지금 할 일이 수없이 많으니 몸과 마음을 아껴 보전함만 같음이 없고, 돌아보건대 보잘것없는 내가 외람되이 이 막중한 기업(基業)을 맡았노라. 질병을 조심하란 공자(孔子)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건만, 어쩌다가 《주역(周易)》에 이른바 예기치 않았던 우환이 있게 되었다. 온갖 신령이 돌보아 주어 몹쓸 병마(病魔)가 느닷없이 침범할 이가 없었으련만, 육기(六氣)가 서로 감염하여 영양(榮養)의 조섭(調攝)을 적절히 하지 못했노라. 처음에 몸이 잠시 불편하기에 곧 원기가 빨리 회복될 줄 알았는데, 끝내 부스럼이 점차 심해져서 드디어 금방 나을 것이 이렇게 오래 끌었구나. 뜰 앞에 와서 문후(問候)하는 일은 지난 가을에 시작되었고, 직숙(直宿)을 하게 된 것도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침식과 동작이 모두 불편하니 전궁(殿宮)의 걱정이 매양 괴로웠고, 침과 뜸으로 온갖 치료를 하니 신민(臣民)들의 초조한 마음이 두루 간절하였으리라. 처결치 못한 국사가 자꾸만 쌓이는데, 어찌 조금이나마 조심을 않고 방심하겠는가? 4도의 기민 구제가 지금 한창이니, 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다행스럽게 새해의 운세가 해로움이 없고, 마침내 묵은 빌미가 제거됨을 보게 되었다. 약으로 안을 다스려 바깥 부스럼이 사라졌으니 마치 구름이 걷히자 눈이 녹듯 하였으며, 정신이 맑고 기운이 왕성해지니 양(陽)이 회복되어 봄이 다시 돌아옴을 징험하겠다. 상서로운 운세가 을해년에 이르러 숙조(肅祖)의 칭경(稱慶)하던 일을 좇았고, 경춘전(景春殿)에 옮겨 조용히 조섭하니 임금의 마마에 약이 필요 없는 좋은 결과에 부합된다. 때는 바야흐로 삼양(三陽)038) 이 활짝 열렸으니, 진정 온갖 복록이 한창 이르는도다. 잠자리는 한밤중 물시계 소리에도 안온했으니 장락궁(長樂宮)039) 에서는 이제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것이요, 어주(御廚)에서는 날마다 진미를 올리니 세자 또한 끼니를 드는 즐거움이 흐뭇하구나. 마치 하늘이 돌고 땅이 회전하듯 단지 약물의 효험만은 아니었으며, 이제 소나무가 무성하고 냇물이 불어나듯 하여 장차 나라의 터전이 길이 튼튼함을 보리라. 훤위(萱闈)의 자애로우신 얼굴빛이 비로소 펴지시니 비록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작은 정성이야 위안(慰安)이 되지만, 가난한 백성들의 삶이 몹시 어려우니 어버이를 위한 잔치인들 어찌 마음 편하겠는가? 그러나 신명(神明)의 가호(加護)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뭇 여망을 끝내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로다. 돌아가신 부왕(父王)의 도우심이 매우 분명하니 사모하는 마음 더욱 애달픔을 느끼었고, 자궁(慈宮)의 병환도 빨리 나으시니 나라의 경사가 겹쳐 이르는 것을 가만히 다행스럽게 여기노라. 종묘(宗廟)의 혼령께서 흠향하시도록 삼가 향기로운 음식을 올리고, 백성들의 즐거운 호소에 부응하여 널리 사륜(絲綸)040) 을 반포하노라. 이달 16일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죄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하노라. 아! 너희들은 모두 이 지극한 다스림으로 돌아오겠지만, 나는 바야흐로 조그만 차도(差度)에 더욱 경계하노라. 유부(兪跗)041) 와 편작(扁鵲)042) 이 훌륭한 기술로 아뢴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병을 고칠 방책을 그 누가 가지고 있는가? 요순 같은 임금도 널리 베푸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니 백성들을 구제할 의견을 듣고 싶구나. 그래서 이처럼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의당 모두 잘 알지어다."
하였다. 【예문 제학 이상황(李相璜)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7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38] 삼양(三陽) : 《주역(周易)》 괘(卦)의 세 양효(陽爻). 여기에서는 삼(三)은 오행(五行)에서 목(木)에 속하고 목은 사시(四時)에서 봄에 속하므로, 정월(正月)에 이르는 말로 쓰임.[註 039] 장락궁(長樂宮) : 한(漢)나라 고조(高祖) 5년에 모후(母后)를 받들기 위하여 세운 궁전. 혜제(惠帝) 이후 황제의 모후는 모두 이곳에 거처했음. 황제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은 서쪽에 있었는데 반해 이 궁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조(東朝)라고 하며, 흔히 대왕 대비(大王大妃)와 대비전(大妃殿)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註 040] 사륜(絲綸) : 교서(敎書).[註 041] 유부(兪跗) : 상고 황제 때의 양의(良醫).[註 042] 편작(扁鵲) : 전국 시대의 명의.
정상우(鄭尙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의 환후가 평복한 데 따른 경과(慶科)를 경과 정시(慶科庭試)와 합쳐서 실시하도록 명했다.
1월 18일 갑진
시강원에서 아뢰기를,
"왕세자 서연(書筵)에 이어서 강독할 책자를 사(師)·부(傅)·빈객(賓客)들에게 문의하였던 바, 사(師)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은 말하기를, 삼가 ‘열성조(列聖朝)에서 진강(進講)한 책자의 목록을 상고하여 보니, 선조(先朝)에서는 《효경(孝經)》과 《소학초략(小學抄略)》을 처음에 진강하고 이어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강독하였으며, 다시 이어서 《소학》 전편(全篇)을 강독하였습니다. 지금 《효경》의 강독을 마쳤으니, 선조의 강학 정식(程式)에 따라 《소학초략》을 진독(進讀)하는 것이 과연 순서를 따르는 공부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소학》은 초학자가 입덕(入德)하는 책으로서 진실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근본이 되고, 또 《초략》은 바로 한 편 중의 대의(大意)와 중요한 어구로서 몸과 마음으로 보람을 거두는 방도에 가장 긴요한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소학초략》을 이어서 강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고, 부(傅)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는, ‘어릴 때 기르는 방법은 미리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옛사람은 자식을 낳아서 밥 먹고 말할 줄 알게 되면 《대학(大學)》의 법을 가르치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으로 매일 앞에서 말해 주면 오랜 기간에 저절로 익숙해져 마치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고원(高遠)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실은 확실하고 영구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요결(要訣)이 됩니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춘궁(春宮)은 예령(睿齡)이 아직 취학할 때가 안되었으니 《대학》을 진강하는 문제는 논하기 어렵고, 지금 《소학》을 먼저 진강하여 진수(進修)의 기초로 만든다면, 깨달아 배양되는 방도에 반드시 점차 연마되어 성취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어서 강독할 책자를 《소학》으로 정하는 것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좌빈객 심상규(沈象奎)는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읽을 것으로는 《소학》과 《사략(史略)》이 다같이 중요합니다. 다만 《소학훈의(小學訓義)》는 편목(篇目)이 너무 방대하고 《초략》은 발췌한 것이어서 간략한 편이긴 하지만, 《사략》은 상고의 삼황(三皇)으로부터 여러 임금들의 일이 기록되어 있어 성현의 자취를 살필 수 있고 치란(治亂)의 연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책으로 이어서 진강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소학초략》 같은 것은 소대(召對)할 때 간간이 겸하여 배운다면 날로 진취(進就)하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감히 단정적인 말씀으로 앙대(仰對)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우빈객 서영보(徐榮輔)는 말하기를, ‘어릴 때의 공부는 우선 평이하여 알기 쉬운 것부터 배우면 나중의 효과를 거두기가 더욱 쉽습니다. 《사략》 같은 책은 열성조께서 왕세자의 서연에 진강했던 것이니, 이 책을 이어서 강독한다면 충분히 성현의 자취를 거울삼을 수 있고 치란의 연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같이 생각되나 감히 질정(質定)하여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며, 좌부빈객(左副賓客) 남공철(南公轍)은 말하기를, ‘《사략》은 역대 치란의 연유를 알 수 있고, 《소학》 1부(部)는 그 안에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일로부터 크고 작은 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부·빈객들이 혹은 《소학》을 먼저 읽어야 한다 하고, 혹은 《사략》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모두 뜻이 있는 말이지만, 열성조에서 진강한 고사(故事)를 삼가 상고하여 보면 《소학》이 《사략》보다 먼저였습니다. 대체로 어릴 때의 진수(進修)하는 순서는 이것이 기본으로서, 옛사람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이 깨달아서 성취하는 데 가장 긴절(緊切)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어서 진강할 책자를 《소학》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감히 단정하는 말씀으로 앙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우부빈객(右副賓客) 박종래(朴宗來)는, ‘사람이 태어나서 여덟 살이 되면 모두 《소학》을 배우는 것은 대체로 입덕의 방법으로는 이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학훈의》는 권질(券帙)이 방대하여 어린 나이에 진강하면 혹은 너무 아득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므로 《소학초략》이 있게 된 것입니다. 삼가 선조의 강학 순서를 상고하여 보니, 《효경》을 마친 뒤에 《소학초략》을 이어서 진강하였습니다. 지금도 또한 고사를 좇아 이어서 읽을 책자를 《소학초략》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감히 어리석은 소견에 단정하는 말씀으로 앙대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소학초략》을 이어서 진강하라고 하교하였다.
1월 28일 갑인
호서와 호남의 목면(木綿)이 흉년이 들었다 하여 대동(大同)043) 및 면세목(免稅木)을 3분의 1만큼 돈으로 대납케 하라고 명하였다.
과천현(果川縣)의 군기(軍器)를 도둑질한 죄인 배천손(裵千孫)을 수원부(水原府)에 회부하여 효수(梟首)케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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