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0권, 영조 33년 175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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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기축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삭제(朔祭)를 몸소 거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아헌(亞獻)을 행하였다. 이날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금주(禁酒)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어서 하교하기를,
"오늘날 금해야 할 것은 부녀들의 다리[髢髻]이다."
하니, 지경연(知經筵)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집에서 혼례(婚禮) 때 다리를 사기 위하여 심지어는 가산을 탕진하는 지경까지 이르는데, 금령(禁令)이 한번 내리면 온 도성이 반드시 고무(鼓舞)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법제로 정한 뒤라야 비로소 금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정형복(鄭亨復)은 말하기를,
"물정(物情)이 반드시 좋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으로 대용하면 좋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젊은이들은 족두리(簇頭里)를 쓰고 늙은이가 되어야 비로소 다리를 얹었다고 하는데,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의정(議定)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교리 윤득양(尹得養)은 말하기를,
"혹은 족두리라고도 하고 또는 화관(花冠)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만일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을 금하지 않고 머리의 장식을 호화스럽게 하게 되면, 그 폐단은 다리보다 더 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를 불러 계주(戒酒)하라는 윤음(綸音)을 널리 알리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경재들과 저 나의 백료(百僚)들은 모두 나의 유시(諭示)를 들으라. 아! 옛사람이 이르기를, ‘궁중(宮中)에서 상투[髻] 높이기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한 자[尺]를 높인다.267)  ’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관원들이 술을 삼가지 않는 것은 진실로 나의 허물인 때문이며, 서민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도 역시 나의 불성실한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위로는 조상의 영혼에 죄를 짓고 아래로는 대사(大赦)의 은전(恩典)을 막았으니, 이게 나의 허물이고 나의 허물이다. 어찌하여 위로 조상에게 죄를 졌는가 하면, 한번 금주(禁酒)를 시킨 뒤로 늘 자성(慈聖)으로부터 잘하였다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인산(因山)이 겨우 끝나고 올해가 다가지도 않아서 금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회음(會飮)까지 하였으니, 영혼이 알고 있다면 내가 능히 금하였다고 하겠는가, 안하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위로 조상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아래로 대사의 은전을 막 았다는 것인가 하면, 아! 금년 봄에 내린 대사의 은전은 과거에 없던 일인데 범주(犯酒)한 자에 있어서는 혹시라도 금령(禁令)이 해이해질까 두려워 모두 사면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처분을 하기 위하여 도류안(徒流案)을 가져다가 보았는데, 그 수가 1천 명에 가까이 되니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 않는다면 장차 몇천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이는 곧 내가 가르치지 못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법에 빠져들게 만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봄의 대사에서 석방시키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경사를 함께 맞이하는 의의이겠는가? 지금 비록 모두 석방시킨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사전(赦典)에 참여시켰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아래로 사죄의 은전을 막았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효소전에 삭제(朔祭)를 거행하겠으며 또 무슨 낯으로 진전(眞殿)을 배알하겠는가? 아! 술은 바로 요사(妖邪)한 물건이다. 얼마 전에 선유(宣諭)한 것이 소민(小民)들의 감동을 어찌 가히 기필하겠는가마는, 단지 부로(父老)들에게만 하유하고 경재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자(董子)268)  가 말하는 ‘조정을 바로 잡아야 만민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의의이겠는가? 오늘 새벽에 제사가 끝난 뒤 계속하여 전중(殿中)에서 울며 아뢰기를, ‘신(臣)과 후사왕(後嗣王)이 혹시라고 술을 삼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 여러 신하들이 비록 모르더라도 밝으신 영혼께서는 거울처럼 밝게 비추어 주소서. 뭇 신하들이 혹시라도 알고 간하지 않거나 혹 자신이 경계할 일을 범하였거든 또한 큰 징벌(懲罰)을 내리시어 해동(海東)의 신하와 백성된 자로 하여금 소홀히 여기는 태도가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아! 위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경재로부터 아래로 백료들에 이르기까지 나의 종사(宗社)를 위한 고심을 본받아 깊이 아로새겨 간직하여 내 마음을 바꾸지 않게 하고 형벌이 필요 없기를 기약하여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큰 허물에 빠지지 않게 하라."
하였다

 

김선행(金善行)을 대사헌으로, 조중회(趙重晦)를 대사간으로, 송덕중(宋德中)을 사간으로, 민숙(閔塾)·이만육(李萬育)을 장령으로, 이세연(李世演)을 지평으로, 권도(權噵)·이미(李瀰)를 정언으로, 윤동승(尹東昇)을 부교리로 삼았다.

 

11월 2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서 나타나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유학(幼學) 홍술인(洪述人)이 상변(上變)할 일이 있다고 일컫고 소(疏)를 가지고 궐문에 나오자, 여러 승지(承旨)들이 청대(請對)하고 좌상과 우상도 또한 구대(求對)하였는데, 임금이 그 소를 독주(讀奏)하지 말라 명하고, 홍술인을 전정(殿庭)으로 불러들여서 그 소의 내용을 물으니, 곧 노비(奴婢)를 추심(推尋)한 데에 감정을 품어 화를 떠넘기려는 자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추국(推鞫)하라고 명하여 그가 본성을 잃었고 다른 정절(情節)은 없음을 알았는데 흑산도(黑山島)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자, 양사(兩司)에서 다투어 고집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3일 신묘

임금이 동지 정사(冬至正使)인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과 부사(副使) 김상익(金尙翼)을 인견(引見)하였다. 강이, 상역(象譯)269)  의 가지고 가는 은(銀)이 부족하다고 하여 관서(關西)의 관은(官銀)을 빌려가기를 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의 은은 모두 광은(礦銀)인데 매년 사신이 갈 때마다 번번이 모두 빌려간다. 지금 청인(淸人)은 매우 온순하여 우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나 몽고(蒙古)는 말할 수 없이 흉포하여 우리가 광은을 쓰는 것을 보면 반드시 조선(朝鮮)에 은이 난다고 하여 침을 흘릴 것이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뜻을 얻게 되면 반드시 우리에게 은을 내라고 요청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이 어찌 망국의 화를 끼치지 않겠느냐? 중원(中原)은 회복할 기약도 없고, 몽고인들의 세력이 점점 번성하여 가니, 나는 진실로 그것을 근심하는 바이다. 어찌하여 경들은 목전의 계획만 생각하고 후일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한참 뒤에 상역을 불러 물어보고 임금이 적당한 양을 빌려 가도록 허락하였다.

 

11월 4일 임진

전후의 계주(戒酒)에 대한 윤음(綸音)을 한 책으로 엮어서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간포(刊布)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5일 계사

임금이 시사복(視事服)으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니, 장차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거행하려는 것이었다.

 

11월 6일 갑오

밤에 달이 우림군성(羽林軍星)을 침범하였다.

 

새벽에 임금이 예(禮)를 행하였는데, 따라간 백관들이 모두 배제(陪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다가 저녁에 환궁하였다.

 

11월 7일 을미

밤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5경(更)에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인병(引病)하여 계속 사단(辭單)을 올린 것이 60번이 넘었으나, 임금이 물어보지도 않았고 좌상과 우상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는데, 이천보가 사단을 소조(小朝)에 들여보냈기 때문에 임금이 몰랐던 것이라고 여겨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소가 들어간 지 5일이 되어도 비답이 없다가 이날 비로소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승지를 시켜서 함께 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과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 홍계희(洪啓禧)를 불러서 윤음(綸音)의 간행(刊行)에 대하여 물었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헌수(獻酬)하는 데에도 오히려 현주(玄酒)270)  를 썼으니, 태묘(太廟)에 단술을 쓰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대신(臺臣) 이민곤(李敏坤)이 글을 올려 간쟁하였으니 신은 일찍이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근자에 금주(禁酒)가 잘되지 않는 듯하여 마음에 몹시 분완(憤惋)하였는데 선전관(宣傳官)이 적간(摘奸)한 거조를 보고는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술로 인하여 사람에게 형을 가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셨으나, 주고(酒誥)271)  에도 또한 ‘내가 그 범죄한 자를 죽이리라.’는 말이 있으니, 그 법을 엄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법사(法司)의 기찰(譏察)을 허락하시지 않는데 대저 ‘기(譏)’ 자는 《주례(周禮)》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곧 성인(聖人)의 법입니다. 시행함에 있어서 진실로 그 법도를 얻는다면 가히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구윤명(具允明)이 말하기를,
"법사의 기찰은 이서(吏胥)에게 일임하는 것이니, 아무런 폐단이 없게 하려고 하지마는 그것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오로지 택인(擇人)하는 데 달렸습니다."
하니, 구윤명이 말하기를,
"이서를 가리는 일은 관장(官長)을 가리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누룩을 금하지 않으면 술을 금할 수가 없다."
하니, 말하기를,
"단술도 역시 누룩이 아니면 만들지 못할 것이니, 누룩은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종묘(宗廟)에서 술을 쓰는 것을 숭상하여 삼대(三代) 이후로 혹시 고친 일이 없었는데, 지금 단술을 사용하는 것은 비록 성상의 술을 없애기 위한 고심에서 나왔지마는 마침내 금주에는 무익할 것이고 향사(享祀)의 예에만 큰 결례(缺禮)가 되었다. 이민곤의 상서에 성취(聲臭)로 신명이 흠향한다는 이치를 갖추어 논하였는데, 거기에 말한 ‘울창주(鬱鬯酒)272)  와 오제(五齊)273)  는 고례(古禮)에 폐지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은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정론이다. 그런데 홍계희는 임금의 뜻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데에 급하여 도리어 그르다고 배척하였고 심지어는 주고(酒誥)의 ‘죽인다.’는 말과 《주례》의 ‘기(譏)’ 자까지 끌어다 억지로 붙여 설명하여 준엄하고 가혹한 정치를 하도록 임금을 인도하였으니, 가히 경문(經文)으로써 간교함을 꾸미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11월 8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연달아 사직 단자를 올리니, 임금이 다시 돈독하게 면려하고 승지를 시켜서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대제학 윤봉조(尹鳳朝)가 상서하여 인노병(引老病)으로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상과 우상이 청대(請對)하여 들어와 아뢰기를,
"북경(北京)의 자문(咨文)을 의주(義州)에서 베껴 왔는데 3조(條)로써 설문(設問)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안핵사(按覈使)의 문목 조사(問目措辭)를 독주(讀奏)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매우 분명하다."
하고, 조자영(趙自永) 등을 북도로 보내어 단단히 가두어 기다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안핵사가 돌아온 뒤에는 마땅히 주문(奏文)이 있어야 하는데, 한 가지 일로써 두 번 아뢰는 것은 또한 너무 번거롭습니다. 청컨대 자문을 가지고 재자관(齎咨官)을 정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청국(淸國)에서 반사(頒賜)한 장릉(長陵)274)   이하 열성(列聖)들의 시호(諡號)를 합하여 한 책(冊)에 써서 춘추관(春秋館)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청국에서 준 시호를 우리 나라에서 주문(奏文)에 비록 쓰지 않지마는, 피국(彼國)에서 혹 선왕(先王)의 일에 대하여 일컫게 되면 그 시호로서 일컫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시자(諡字)를 내가 이미 모르고 있으니, 이는 매우 불가한 것이다. 마땅히 아울러 한 통을 더 써서 사각(史閣)에 간직하라."
하였다.

 

임금이 좌상과 우상에게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7월 이후로는 진현(進見)한 일이 없다."
하니, 김상로(金尙魯)가 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아뢰기를,
"신 등이 밖에 있어서 진실로 이런 줄을 몰랐습니다. 신 등이 성상 앞에 있을 때에는 말을 가리지 않고 다하였으나 동궁에게는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성교(聖敎)를 받들었습니다만, 마땅히 입대(入對)하여 조심하도록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11월 9일 정유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5, 6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강원 감사 심수(沈鏽)가 철원 부사(鐵原府使) 최일형(崔一衡)이 올린 첩보(牒報)를 가지고 장달(狀達)하였는데, 이르기를,
"본부(本府)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으로서 이미 방어사(防禦使)를 둔 병영(兵營)을 이설(移設)하였으나 아직도 별도로 군향(軍餉)을 저축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매우 엉성합니다. 청컨대 여러가지 향미(餉米) 2천 석(石)을 획급(劃給)하여 반으로 나누어 조적(糶糴)하게 해서 군수(軍需)를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훈국(訓局)에서 강도(江都)에 대변선(待變船)이 있어야 된다고 하며 늘 양남(兩南)의 퇴전선(退戰船)을 얻기를 청하였고, 또 그것을 고쳐야 하는 재목과 집물(什物)을 청하였는데, 봉산(封山)의 금송(禁松)을 베어서 쓰도록 허락함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잃을 것이고 여러 진영(鎭營)의 백성과 병졸들은 가혹한 수탈(收奪) 때문에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폐단이 매우 클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엄하게 막으소서."
하매,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미 대변선이라고 일컫고 묘당(廟堂)에 얻기를 청하였으니 아주 모른체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지금부터 강도와 훈국에서 개조(改造)하는 선척(船隻)에 대하여 길이와 넓이의 척도(尺度)를 책(冊)으로 만들어 비국(備局)에 보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양남 경차관(兩南敬差官)이 장계(狀啓)로써 천반 포락(川反浦落)275)  에 대한 급재(給災)를 청하였는데,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사목(事目) 이외의 급재라 하여 그만 둘 것을 청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경차관이 직접 재해를 입은 형상을 보았는데, 백성들로 하여금 백지(白地)276)  에 세금을 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상달한 바가 옳다.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김상로와 신만이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여 말하기를,
"어제 대조(大朝)의 하교를 받았는데, 이러이러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러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불충 불효(不忠不孝)한 죄이다. 성상께서 비록 7월 후로 하교하셨으나 사실은 6월 이후에는 나아가 뵙지 못하였다. 품은 바를 말하고자 하였으나 좌우가 번거로워 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김상로 등이 물러나서 대조에게 입시하니, 임금이 묻기를,
"경 등이 오늘 입대(入對)하여 과연 단서를 열어 보았는가?"
하니. 김상로와 신만이 말하기를,
"신들이 앙달(仰達)하고 진계(陳戒)하니 동궁(東宮)의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남태저(南泰著)에게 이르기를,
"동궁이 과실을 뉘우쳤다면 반드시 하령(下令)이 있을 터이니, 승지는 가지고 들어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도정(都政)에서 새로 제수(除授)한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을 입시하라 명하고 각각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물은 뒤에 면칙(勉飭)하여 보냈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기읍(畿邑)에 원옥(冤獄)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교리 홍경해(洪景海)에게 명하여 양주(楊州)·포천(抱川) 등지를 염문(廉問)하게 하였는데, 이날 복명함에 있어 한두 건의 살옥(殺獄)에 관한 일을 우러러 진달하고 인하여 양근 군수(楊根郡守) 유언현(兪彦鉉)과 포천 현감 심국현(沈國賢)이 선정을 한 정상을 말하였다. 또 말하기를,
"영평 현령(永平縣令) 박명양(朴鳴陽)은 5월 안에 한 집안의 세 사람을 죽였고 잉부(孕婦)가 곤장을 맞아 낙태까지 하였으니, 문득 네 사람을 죽인 것이나 같습니다. 또 박명양은 관위(官威)를 빙자하여 강제로 고을 안 사족(士族)의 서녀(庶女)를 첩으로 삼으려다가 그 여자가 따르지 않아서 낭패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괴하게 여겨 박명양을 잡아다가 엄히 신문한 뒤에 조율(照律)하여 경성(鏡城)으로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말하기를,
"초봄에 권농(勸農)의 윤음(綸音)에서 묵정밭[陳田]을 개간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그 세(稅)를 감해 준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여러 도(道)의 감세(減稅)하는 규정이 각기 달라서 혹은 3년을 감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혹은 1년만 감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속전(續典)》에는 ‘묵정밭을 일군 자에게는 반감(半減)하라.’고 말하였는데, 세를 부과함에 있어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년의 세만 감하라."
하였다. 신만이 해서 도신(海西道臣)의 장계로써 말하기를,
"재령(載寧)의 여물리(餘勿里) 통내(筒內)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는 일찍이 군역(軍役)으로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경내(境內)와 타읍(他邑)의 백성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투속(投屬)합니다. 비록 본래 군역을 가졌던 자라도 한번 여기에 들어오게 되면 문득 모두 방면되므로 본읍(本邑)의 군액(軍額)을 충당하기가 어려운 것은 참으로 큰 폐단입니다. 당초 통(筒)을 쌓을 때 수고한 자의 자손들은 모두 면역시키는 것이겠고 그밖에 거주하는 백성은 그 인원 수를 제한하여 잡역(雜役)으로 침범하지 말 것이며, 중간에서 한가롭게 노는 자는 청컨대 묶어서 군역에 충당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0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여러 능묘(陵墓)의 동지(冬至)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이보다 앞서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 및 순회(順懷)·소현(昭顯)·민회(愍懷)·효장(孝章)·의소(懿昭)의 묘(廟)들에 사중월(四仲月)의 삭제(朔祭)를 춘분(春分)·추분(秋分)과 하지(夏至)·동지(冬至)에 행하기 때문에 궁묘(宮廟)에는 일이 동지제(冬至祭)가 없었다. 11월 6일은 육상궁의 생신(生辰)이므로 임금이 만일 동향(冬享)을 여기서 친히 행하게 되면 반드시 이날로 옮겨서 행하여야 하였다. 지난해 동짓날에 임금이 육상궁만 홀로 동지의 제향을 거행하지 않았다 하여 예관(禮官)을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가 바로 예관 김한철(金漢喆)의 ‘일정한 규례가 없다.’고 주달한 것으로 하여 도로 정침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이익정(李益炡)이 청대(請對)하여 작년에 예관이 아뢴 바의 잘못을 갖추어 진달하고 말하기를,
"초6일이 마침 동짓날을 당하였으니, 저절로 겸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일 동지와 앞서든지 뒤서든지 동지제를 설행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잊었었다. 특별히 지금부터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익정이 말하기를,
"각릉(各陵)에 모두 동지제가 있는데, 소녕원(昭寧園)만 홀로 거행하지 않음은 궐전(闕典)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園)과 묘(墓)에는 모두 정례가 없으니, 나는 새로 만들어서 행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친히 동짓날의 윤음을 지어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알리고 신료들을 면려하고 신칙하기를,
"복(復)277)  의 서괘(序卦)에 ‘물건은 끝나서 다하지 않는 까닭에 복(復)으로 이어진다.’고 하였으니, 아! 음(陰)이 궁극(窮極)한 중에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회복된 것이다. 박괘(剝卦)의 상구(上九)에는 ‘큰 과일이 다 먹히지 않는다.’ 하였고, 〈복괘(復卦)의 상사(象辭)에는〉 ‘선왕(先王)이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동짓날에는 관문(關門)을 닫고 상려(商旅)로 하여금 길을 다니지 못하도록 하고 임금도 사방(四方)의 일을 살펴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억음 부양(抑陰扶陽)하는 뜻이 가히 지극하다고 이르겠다. 나와 같은 부덕(否德)한 처지로 쇠모(衰耗)함이 나날이 심한데도 30년 동안 왕위에 앉았는데 만일 혜택이 아랫사람에 극진하였고 은덕이 백성에게 미치었다면, 아! 나의 백성이 이와 같이 심한 고통을 받겠느냐? 돌아보건대, 지금 일양이 아래에서 생겨났으니, 소민(小民)들도 역시 소생하려는 뜻이 있느냐? 아! 대소 신료들은 과궁(寡躬)의 덕이 모자란다고 말하지 말고 열성(列聖)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뜻을 깊이 추념(追念)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를 강구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함께 복(復)으로 돌아오게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기해

임금이 효소전의 동지제를 친히 거행하였다.

 

임금이 개국 공신(開國功臣)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의 화상(畵像)을 취하여 보고 그의 후손 이연오(李衍五)를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정원(政院)에 하령하기를,
"나같은 불초 불민한 사람으로 성효(誠孝)가 천박하여 침선(寢膳)을 돌보는 절차를 이미 때맞추어 하지 못하였고 양 혼전(兩魂殿)의 제향도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자식된 도리에 진실로 어긋남이 많았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대조(大朝)께서 전후(前後)로 가르침을 거듭 간곡하게 하심은 진실로 자애로운 성의(聖意)와 사물(事物)에 부응하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불초 불민함으로 인하여 만분의 일도 우러러 본받지 못하였고 작년 5월 책궁(責躬)하겠다고 한 말도 역시 한두 가지도 실천한 일이 없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갑절이나 되어, 비록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으나 이루지 못하겠다. 강학(講學)을 돈독하게 하지 못하고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지 못한 데에 이르러서는 어느 것도 나의 허물이 아닌 게 없는데, 어제 양 대신(兩大臣)이 반복해 진면(陳勉)함으로 인하여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 막급(追悔莫及)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 막급하다. 지금부터 통렬히 스스로 꾸짖고 깨우쳐 장차 모든 일에 허물을 보충하여 한번 종전의 기습(氣習)을 바꾸려 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실천하여 행하지 못하고 작년과 같이 된다면, 이는 나의 과실이 더욱 심한 것이다. 아! 조정의 신료들은 나의 이 뜻을 체득하여 일마다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니, 승지        남태저(南泰著)가 하교(下敎)에 의하여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청한 다음 저녁내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입시하라는 명령이 없었는데, 이때 남태저가 청해백(靑海伯)의 화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계제를 얻어 비로소 면대(面對)하여 올리니, 임금이 남태저에게 명하여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경탄하기를,
"기특하고 기특하다. 조선이 흥하겠구나! 비록 태갑(太甲)278)                  이 허물을 뉘우쳤다 하여도 여기에 지나칠 수는 없겠고, 내가 동짓날 반포한 윤음보다 낫다. 지금 양복(陽復)의 날을 당하여 이러한 하령이 있으니, 지중(地中)에서 올라오는 일양(一陽)보다 낫다. 마땅히 빨리 반포하되 그 과실은 드러내지 말고 그것을 능히 고쳤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라."
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아! 백수(白首) 늙은 나이에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되는 가운데 밤낮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3백 년 종사(宗社)를 조종(祖宗)의 영혼이 묵묵히 도와 주시고 황천(皇天)이 복을 내리시어 승지가 원량(元良)의 하령을 가지고 들어와서 아뢰었는데, 실로 만만 번 몽상(夢想) 밖이었다.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아! 이목지신(耳目之臣)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역시 앞서와 같이 참는 마음으로 어물쩍거리겠는가? 이게 누구의 힘인가? 곧 우리 중대신(重大臣)들의 힘이다. 늘 면칙(勉飭)하지 못하여 마음이 부끄럽다. 원량을 불러서 하유할 일이 있으니, 시임 대신·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유신(儒臣) 및 간원들을 입시하게 하라."
하고, 또 홍봉한(洪鳳漢)도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밤에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좌참찬        홍봉한 및 양사(兩司)의 장관(長官)과 유신(儒臣)이 모두 궐(闕) 안에서 기다렸다. 초경(初更)에 임금이 최복(衰服)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崇化門) 밖에 나와 노지(露地)에 엎드려 곡을 하고 동궁(東宮)도 역시 최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었으니, 숭화문은 곧 효소전(孝昭殿)의 바깥 문이었다. 대신(大臣) 이하가 앞에 나아가 엎드려 울면서 고하기를,
"전하께서 어이하여 이러한 거조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동궁의 하령을 가지고 와서 아뢴 데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있으므로 얼른 지나쳐 보고는 놀라고 기쁨을 금치 못하여 장차 경 등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정신을 쏟은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동궁을 불러 묻기를, ‘옛날부터 허물을 뉘우치는 임금은 반드시 자기가 잘못한 곳을 나타나게 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윤대(輪對)의 조서(詔書)279)                  와 같이 한 다음에야 백성이 모두 믿을 것인데, 지금 네가 뉘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고 하였으나, 동궁이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같은 소리로 말하기를,
"동궁께서 평일에 너무 엄하고 두려운 까닭에 우러러 말씀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위차(位次)로 들어가시어 신 등을 불러 조용히 하교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재전(齋殿)에 나아가 승지에게 전위(傳位)한다는 교지를 쓰라고 명하매, 승지가 붓을 던지고 죽어도 감히 못 쓰겠다고 아뢰자, 여러 신하들을 따라 들어오라고 명하고 다시 동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동궁이 나아와 부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추회 막급(追悔莫及)하다고 일렀는데, 그 뉘우치는 내용을 말하지 않으니, 남의 이목(耳目)만 가린 것에 불과하다."
하고, 이어서 엄한 하교를 내리니, 동궁이 꿇어 엎드려 체읍(涕泣)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자제(子弟)를 가르치는 데는 귀천에 차이가 없으므로 시험삼아 여항(閭巷)의 일을 가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형이 만일 엄위(嚴威)가 지나치면 자제가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말하고 시봉(侍奉)하는 사이에 저절로 잘 맞지 않고 어긋남을 면치 못하며 혹은 심지어 그것이 질병으로 발전되기까지 하는데, 만일 자애와 온화함을 위주로 하여 도리를 열어 깨우쳐 준다면 은의(恩義)가 모두 온전하여지고 정지(情志)가 서로 믿음을 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엄위가 너무 지나치시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움과 위축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응대(應對)하는 즈음에 머뭇거림을 면치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심기(心氣)가 화평하도록 힘쓰시고 만일 지나친 잘못이 있으면 조용히 훈계하여 점점 젖어 들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하루 이틀 사이에 자연히 나아져가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신만은 말하기를,
"가르쳐 깨우치게 하는 도리는 비유하자면 의원이 약을 쓰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한 첩의 약으로 효험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달아 복용하여 그치지 않아야만 자연히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였던 것은 대개 군부에게 기뻐함을 얻지 못하였고 너무 엄외(嚴畏)한 데에 연유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하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제부터 동궁을 자주 불러 일에 따라 가르쳐 인도하시어 몸을 안일하게 하지 못하게 하면 점점 성취할 것입니다."
하였다. 동궁이 물러나와 뜰에 내려가다가 까무러쳐서 일어나지 못하니, 유척기가 급히 의관(醫官)을 불러 진맥(診脈)하도록 청하였다. 그런데 맥도(脈度)가 통하지 않아 약을 넘기지 못하여 청심환(淸心丸)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한참 있다가 비로소 말을 통하였다. 홍봉한이 태복(太僕)280)                  의 가교(駕轎)에 태워 안으로 들게 하자고 주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호남의 전주(全州) 등 5읍(邑)과 호서의 공주(公州) 등 22읍에 지난달 25일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1월 13일 신축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우의정        신만·북도 구관 당상(北道句管堂上) 홍계희(洪啓禧)를 입시하라고 명하니, 약원 도제조        유척기와 제조 조영국(趙榮國)이 함께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첫 어둠이 깔릴 때 임금이 편복(便服)으로 함인정(涵仁亭) 아래에 나아가 앉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추진(趨進)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낙상(落傷)을 하였다."
하였다. 김상로가 아뢰기를,
"신 등이 마땅히 곧 들어가 진후(診候)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상과 우상에게 같이 가라고 명하였는데, 잠시 후에 돌아와 아뢰기를,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홍봉한이 매우 잘못 되었다. ‘군부에게 기뻐함을 얻지 못하였다.[不得於君]’고 한 네 글자는 곧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기뻐함을 얻지 못한 것을 이름이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창황 망조한 때에 갑자기 한 말이라서 저절로 가려 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하고, 조영국은 말하기를,
"무릇 글에는 문장의 일부를 따서 뜻만 취하여 오는 경우도 있으니, 주자(朱子)의 봉사(封事)에도 역시 부죄 인특(負罪引慝)281)                  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을 협시(挾侍)하는 자가 잘못 보호하였으니, 내가 국문(鞫問)하려 한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는 중관(中官)의 죄가 아닙니다."
하고, 조영국은 말하기를,
"중관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용서하라고 하지마는, 중신(重臣)은 법으로 처리해야 된다고 한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다시 의관(醫官)을 시켜서 진찰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과 제조는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가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조금 물러나서 합문(閤門) 밖에 있으니,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구전(口傳)으로 하교하기를,
"서태항(徐泰恒)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남간옥(南間獄)에 엄히 가두게 하라."
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여러 신하들을 공묵합(恭默閤)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원량(元良)이 떨어져 넘어진 것은 오로지 중관(中官)들의 삼가지 못한 탓이니, 심상한 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중관 유인식(柳仁植)·서태항(徐泰恒)·최성유(崔聖兪) 및 승전색 홍석해(洪碩海)는 모두 멀리 정배하고, 나인(內人) 득혜(得惠)는 대정현(大靜縣)으로 정배하되 배도 압송(倍道押送)하라."
하였다가, 또 흑산도(黑山道)로 바꾸었다. 임금이 조영국에게 묻기를,
"주자의 봉사는 어느 때에 있었는가?"
하니, 조영국이 말하기를,
"이는 〈송(宋)나라〉 영종(寧宗) 때였습니다."
하고, 유척기는 말하기를,
"광종(光宗)은 〈그 아들인〉 영종을 보지 않았으므로 영종도 역시 궁(宮)을 지나가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주자가 이 말을 하게 된 까닭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간 뒤에 임금이 승지를 도로 들어오라고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분명하고 엄격하다. 옛날 김만중(金萬重)은 주달하는 말을 잘 살펴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중하게 처분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한계를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께 어장(御將)이 아뢴 바는 비록 경솔한 데에 말미암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세상에 있어서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 조영국이 진달한 바는 뜻이 비록 관대히 생각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인용한 바가 오늘에 맞지 않으니,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렇게 한 뒤라야 군신의 분의가 중하게 되는 것이다. 김만중의 일을 승지는 아는가?"
하니, 안집(安𠍱)이 대답하기를,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조사석(趙師錫)을 가복(加卜)282)                  할 때의 이야기이다."
하였다.

 

11월 14일 임인

약방(藥房)의 입시를 명하며 임금이 약원 도제조 유척기를 노병(老病)으로 체임(遞任)하게 하고 좌의정 김상로로 대신하도록 하니, 유척기가 사례하기를,
"신의 근력이 비록 쇠약하기는 하나 국사(國事)가 이러하므로 오직 엎드려질 때까지를 기약하였는데, 성은(聖恩)이 이와 같이 진념(軫念)하여 주시니 대단히 황송하고 감격합니다마는, 사심(私心)은 역시 매우 섭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전하였다.

 

약원 제조 이후(李)가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관의합(寬毅閤)에 입대(入對)하였다. 이후가 안후(安候)를 물으니, 동궁이 말하기를,
"아픈 곳을 모르겠다."
하였다. 여러 의관들이 진찰을 끝내자 이후가 의약(議藥)을 청하니, 동궁이 말하기를,
"의약은 무엇 때문에 하는가?"
하매, 이후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특명으로 입진하고 의약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말하기를,
"이미 성상의 하교가 있었다면 의약하는 것이 가하다."
하니, 드디어 당귀수산(當歸鬚散)으로 품정하고 물러갔다.

 

11월 15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망제를 친히 거행하였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를 강하고, 이길보(李吉輔)를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11월 17일 을사

나리포 어사(羅里舖御史) 송덕중(宋德中)이 복명하니, 서계(書啓)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송 덕중이 말하기를,
"제주(濟州)의 백성들이 모두 별장(別將)을 복설(復設)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1월 18일 병오

경기 안핵 어사(京畿按覈御史) 홍경해(洪景海)가 복명하였는데,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포천(抱川) 사족(士族)의 딸 윤씨(尹氏) 성을 가진 여자가 그의 형부(兄夫) 이성호(李星祜)와 몰래 간통하여 풍교(風敎)를 더럽혔습니다."
하니, 법에 따라 처치하라고 명하여 이성호는 곤장을 맞아 죽고 윤씨 여자는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관서 안핵 어사 이이장(李彛章)이 복명하였는데, 묻기를,
"조자영(趙自永)이 끝내 자복하지 않던가?"
하니, 이이장이 말하기를,
"그의 말이 ‘나라를 위하여 죽으라면 죽겠습니다마는 이 일은 천만 애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총(鳥銃)에 대한 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였다. 이이장이 말하기를,
"마을 안을 수색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길림 장군(吉林將軍)이 이미 친검(親檢)을 하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단지 그들의 말만 믿고 할 뿐이요, 발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보(步)의 안에서는 총을 쓸 곳이 아니다."
하였다. 이이장이 말하기를,
"가히 염려스러운 것은 흉악한 일을 저지른 기계(器械)의 차착(差錯)으로서 또 혹시 조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제학(提學)과 더불어 회의(會議)하여 자문(咨文)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상서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좁은 성품이 악한 일을 미워하는 데 지나쳐서 정승래(鄭承萊)가 기만하고 농간하는 추악한 모습을 눈으로 보고는 놀랍고 분한 마음이 북받쳐 번거롭게 장문(狀聞)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이르기를, 신이 일부러 그 당시의 도신(道臣)을 침핍(侵逼)하려고 한다는 두려운 말들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아! 현정(賢正)한 사람에게도 혹시 거스르는 자식이 있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집안에도 혹은 교활한 종이 있습니다마는, 혹시 그 현정한 어버이나 삼가고 조심하는 주인의 덕을 손상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한때의 편비(褊裨)가 아래에서 작간(作奸)한 것이 돌아보건대 주장(主將)에게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근래에 듣건대 묘당(廟堂)에서 신의 막비(幕裨) 이국현(李國賢)이 처의(處義)를 잘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전조(銓曹)에 말을 전달해서 곤망(閫望)을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대개 이국현이 일찍이 고(故) 판서 이태중(李台重)의 막비로 있었다가 또 신을 따라왔는데, 신이 봉장(封狀)을 할 때에 곧 결연히 돌려보내지 못하였다고 이른 것입니다 아! 이 어떠한 일입니까? 진실로 이국현에게 과연 처의를 잘못한 실수가 있었다면, 이는 신이 진실로 이태중을 상해(傷害)하는 거조가 되는 것입니다. 중신(重臣)의 관후(寬厚)한 덕과 청백(淸白)한 지조를 신이 서쪽으로 온 뒤에 더욱 흠복(欽服)한 바가 있어 그의 유풍 여혜(遺風餘惠)가 참으로 원대하여 따라갈 수 없는 한탄이 많았었는데 불행히도 한 편비를 논박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뜻밖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의심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죄를 막비에게 옮겨 씌웠으니, 고개를 들기가 부끄럽고 한탄스러워 무슨 말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1월 19일 정미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서 범주 죄인(犯酒罪人) 유세교(柳世僑) 등을 잡아들이게 하고, 도성 안 백성들을 많이 모은 다음 장차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효시(梟示)하게 할 즈음 형관(刑官)을 시켜 술이 든 그릇을 가져다가 보라고 명하니 모두들 술이라고 하였고, 모여 있는 부로(父老)들에게 보이게 하니 역시 술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죄인이 초(醋)라고 주장하는데, 여러 신하들은 술이라고 말하니, 경 등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처음 보기에는 술과 같았으나 종이에 적시어 냄새를 맡아 보니, 역시 초 같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의 소차(小次)로 들어가서 중관(中官)에게 술 그릇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다시 나와서 하교하기를,
"사람의 목숨이 지중(至重)한 까닭에 내가 친히 그것을 맛보았더니, 과연 초였다. 유세교는 특별히 석방하고 형관 중에 술이라고 말한 자는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신회(申晦)를 특별히 제수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이날 김상로가 어탑(御榻) 앞에 나아가서 나직한 목소리로 진언(進言)하였는데, 사관(史官)은 들을 수가 없었다.

 

11월 21일 기유

임금이 형판(刑判)·판윤(判尹)·금장(禁將)을 불러 금주(禁酒)에 대하여 물었다. 특별히 유신(儒臣) 홍경해(洪景海)를 보내어 5부(部)와 3강(江)283)  을 두루 다니면서 백성을 모아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그가 떠날 때에 경계하여 이르기를,
"유신은 나를 대신하여 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내가 형벌이 필요 없기를 기대하는 의도를 알게 하라. 백성으로 하여금 알아서 감동하게 한다면 바로 유신의 공이다."
하였다.

 

밤에 유신을 불러서 《주례(周禮)》를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현법 상위(懸法象魏)284)  하는 글에 이르러 임금의 말하기를,
"계복(啓覆)285)  을 오래도록 행하지 못하였다. 금년에도 날을 잡도록 명령하여야 하는데, 근래 나의 정신이 점점 전과 같지 못하니, 오결(誤決)이 있을까 염려된다. 해방(該房)은 반드시 문안(文案)을 상고하고 유신(儒臣)도 역시 가져다가 살펴보아서 의단(疑端)을 찾아내어 아뢰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매, 교리 이석상(李錫祥)이 말하기를,
"죽여야 할 죄가 있는데, 거기에 꼭 살리는 방도를 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살릴 것을 구하여 보아서 그렇게 안될 경우에는 죽는 자나 내가 모두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정존겸(鄭存謙)이 말하기를,
"이러하므로 옛날에는 재거(齋居)를 하고 죄수를 결안(決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당나라 태종(太宗)의 일이었다. 비록 거짓으로 인(仁)과 의(義)를 빌린 뜻은 있었지마는 오히려 정관(貞觀)의 치286)  를 이루었다. 진실로 성심을 가지고 있다면 옳겠지만 만일 단순히 재거만을 본받고 성심이 없다면 비록 1백 일을 재거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였다.

 

11월 22일 경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3일 신해

밤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홍경해(洪景海)가 선유(宣諭)를 끝내고 돌아와서 민정(民情)이 감동하지 않음이 없다고 아뢰니, 10월 이후에 금주(禁酒)을 범한 자 3백여 인을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홍주(洪州)의 육신사(六臣祠)에 치제(致祭)하고 박팽년(朴彭年)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는데, 지의금(知義禁) 김한철(金漢喆)의 말로 인한 것이다.

 

11월 24일 임자

정항령(鄭恒齡)·이정철(李廷喆)을 장령으로, 이복원(李福源)을 헌납으로, 윤광섬(尹光暹)을 정언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약원 도제조로서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동궁을 입진한 뒤에 이어서 침하(枕下)에 나아가 엎드리어 낮은 목소리로 아뢴 바가 있었는데, 사관(史官)은 듣지 못하였다.

 

임금이 지사(知事) 박치원(朴致遠)을 인견(引見)한 뒤에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술년287)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 종부시(宗簿寺)에서 구례(舊例)대로 제도(諸道)에 편지를 보내어 진향(進香)할 비용을 구하였다. 당시에 당저(當宁)288)  가 본시(本寺)의 제조(提調)로 있었는데, 박치원이 장령으로서 상소(上疏)하여 친왕자(親王子)로서 편지를 보내어 부조를 구하는 것은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못된다고 하였었다. 을사년289)   당저가 즉위한 초기에 박치원은 장죄(贓罪)에 연루되어 30년간 금고(禁錮)되었는데, 이제 비로소 거두어 서용(敍用)하게 되고 연이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로 숭질(崇秩)까지 뛰어올랐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박치원에게 대하여 진실로 마음속에 거리낄 것은 없으나, 내가 즉위하던 초기에 죄를 입고 오래도록 물러나 있게 한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었다. 군신(君臣)으로서 아직 지면(知面)이 없기에 내가 한번 보고 내 뜻을 알리려고 하나 다만 부를 만한 명목이 없다. 기사(耆社)에 신입(新入)한 자로서 들어오도록 하면 옳겠다."
하였다. 박치원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불러서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이르기를,
"경은 그 당시에 능히 왕자(王子)도 논박하였는데, 오늘날 아첨하는 풍습에 비교하여 보면 가히 훌륭하다고 하겠다."
하매, 박치원이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는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으셨으므로 신이 경망하고 어리석은 말을 진언(進言)하였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도 선왕과 같이 언로를 다시 열어 놓으시면 충직한 말이 반드시 날마다 이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칭찬하며 말하기를,
"대답한 바가 과격하지도 않고 유순하지도 않다."
하고, 드디어 호피를 내려 권장하고 그의 아들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6일 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가 계복(啓覆)을 행하였다. 이날 사형수가 15명이었고, 부생의(傅生議)290)  된 자가 9명이었다. 의주(義州)에는 고한(辜限)291)  을 지나고도 성옥(成獄)한 자가 있었다.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고한을 지났는데 성옥한 것은 반드시 뒷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형을 감하여 원배(遠配)하려고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미 고한을 지났으니, 정배(定配)하는 것도 역시 과합니다."
하니, 드디어 특명으로 석방시키고, 그 당시의 도신(道臣)과 부윤(府尹)을 모두 파직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김상로에게 이르기를,
"계복 죄인을 곧바로 석방한 것은 사복(嗣服)한 뒤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하니,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고한이 비록 지났더라도 사람을 구타하여 치사(致死)하였다면, 온전히 석방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고, 좌참찬 윤급(尹汲)은 아뢰기를,
"사람을 때려 죽였는데 전혀 죄가 없다면, 유독 뒤 폐단이 없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29일 정사

약원(藥院)에서 동궁을 입진하고 의약(議藥)이 끝난 뒤에 김상로(金尙魯)가 침하(枕下)에 나아가 엎드리어 삼복(三覆)을 대행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뜻으로써 나직한 말소리로 앙달하고, 이어서 몰래 아뢰는 말이 있었다.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에게 말하기를,
"상의원(尙衣院)에서 연포(練布)를 올렸는데, 나는 바야흐로 중상(重喪)이 있는 몸이다. 어찌 휘령전(徽寧殿)의 연복(練服)을 입을 수 있겠느냐?"
하니, 이익정이 말하기를,
"이는 전례에 따라 올린 것에 불과합니다. 비록 사가(私家)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부모상(父母喪)를 입게 되면 반드시 처상(妻喪)을 위하여 연복을 입지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로는 말하기를,
"휘령전의 연제(練祭)를 전하께서 이미 주관하시니, 연복을 입지 않고 제사를 거행한다면 어찌 연제라고 하겠습니까? 비록 중상이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연복을 입었다가 제사가 끝나거든 도로 중복(重服)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기상(朞喪)으로써 연복을 입는다면, 뭇 신하들은 어찌하여 연복을 입지 않느냐?"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뭇 신하들은 부장기(不杖朞)가 되지마는, 전하께서는 장기(杖碁)가 됩니다. 장기는 실제로 3년의 체제(體制)를 갖추었기 때문에 연제가 있고 담제(禫祭)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나는 세자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압존(壓尊)이 되어 11개월에 연제를 행한다고 하였다."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그러하지 않습니다. 처상에 아들이 비록 어리더라도 반드시 연사(練事)를 행하여야 하겠으나 담제에 있어서는 몸에 중상이 있는 이는 행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거행할 수 없으므로 휘령전에는 담제가 없고 동궁께서는 다만 택일(擇日)을 하여 복(服)을 벗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일에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듣건대 모두 나에게 연제가 부당하다고 이르더니,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하였다. 이익정이 말하기를,
"전부터 국휼(國恤)의 연제 절목(練祭節目)에는 3품(三品) 이하의 시산관(時散官)은 백의(白衣)와 백립(白笠)을 착용하고 혼전(魂殿)의 문밖에서 곡배(哭拜)한다고 되어 있으나, 이미 최복(衰服)을 받은 사람이 다만 백의와 백립으로 행례(行禮)를 하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곧 상례(喪禮)가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의 절목이다. 지금 휘령전의 연제에는 백관(百官)이 최복을 입고 행례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때에 이익정은 예절에 대하여 전연 모르고 다만 하리(下吏)들에게 부탁해서 전례를 참조하여 거행하려다가 대신(大臣)들의 말을 듣고서야 바로소 고치자고 아뢰었다고 하였다.

 

교정관(校正官) 구윤명(具允明)을 승자(陞資)하였다. 이어서 승지 정존겸(鄭存謙)을 교정관으로 차임(差任)하고, 한광회(韓光會)를 승지로 삼았다.

 

이날 밤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입시하여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292)  가 송염(宋濂)을 죽이려고 하니, 의문 태자(懿文太子)293)  가 간(諫)하였습니다. 황제가 성이 나서 꾸짖으니, 태자가 황공(惶恐)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마는, 세상에서는 이것 때문에 고황제에게 누(累)가 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책에 있는가?"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은 실상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그 책을 본 자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홍계희(洪啓禧)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도 역시 일찍이 보지 못하였는데, 정사(正史)가 아니 듯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의문 태자를 위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후에 《의문전(懿文傳)》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유신(儒臣)을 시켜 읽게 하였는데, 고황제가 태자를 교회(敎誨)한 말에 이르러서 임금은 칭탄(稱歎)하기를 오래도록 하였다.

 

11월 30일 무오

임금이 편차인(編次人)을 소견하고 효소전(孝昭殿)의 삭제문(朔祭文)을 친히 지었다. 하교하기를,
"삭망 능제(朔望陵祭)에 헌관(獻官)을 경자년294)  에는 아경(亞卿)을 시켰는데, 지금 1품(品)으로 차임하는 것은 고제(古制)가 아니니, 복고(復古)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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