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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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자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효소전(孝昭殿)의 삭제(朔祭)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효소전의 우제(虞祭)·졸곡(卒哭) 이후의 모든 삭망(朔望)의 향전(享奠)에 일찍이 섭행을 명한 적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의 환후가 편안치 못한 중에 있으므로 대신이 섭행하기를 간절히 청하여 여러 날을 굳이 간쟁하니,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오히려 몸소 행하지 못함으로써 슬퍼하고 사모함을 참지 못하여 말함에 따라서 눈물이 흘러내리니, 연신(筵臣)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이날 새벽에 제사지낼 시각이 되자 분향(焚香)하고 뜰에 부복(俯伏)하여 제례를 마치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침전(寢殿)으로 돌아오니,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제왕(帝王)의 효(孝)는 필서(匹庶)와 다름이 있어서 진실로 예절(禮節)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성상은 몸을 손상할 나이가 아니고 건강이 좋지 못한 때를 당하여 한 번 섭행을 명하는 것이 어찌 혹시 인정과 예문(禮文)에 모자람이 있겠는가마는, 이제 슬퍼하고 사모하시는 하교를 여러 번 사륜(絲綸) 사이에 나타내었고 재계하는 정성을 병환 중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만약 하늘이 낸 효성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타남이 아니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성인(聖人)은 이르기를, ‘50세에 부모를 사모하는 이는 내가 대순(大舜)에게서 보았다.’고 하였으니, 50세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70세이겠는가? 아! 지극하시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춘향(春享)은 결단코 섭행하라고 명하기 어렵다."
하니,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가 비록 조금 나으셨다 하더라도 평상을 회복하시자면 아직 멀었는데, 어찌 한기(寒氣)를 무릅쓰고 밤새워 행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언제나 섭행을 명하면 누가 3년 거상(三年居喪)을 어렵다고 하겠는가? 또한 능히 자식의 도리를 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제주(濟州)에 운곡(運穀)을 독려해 이미 장발(裝發)을 마쳤다고 하는데, 그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목사(牧使)에게 있다. 하나라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은 연후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으니, 내가 정섭(靜攝)하는 중에도 섬 백성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뜻을 체득할 일을 본목(本牧)에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친히 지어 팔도(八道)에 반시(頒示)하였다.

 

1월 2일 기축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즘 시장 값이 어떠한가?"
하니, 이익정이 말하기를,
"공물미(貢物米) 한 섬 값이 한 냥 서 돈[一兩三錢]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인(貢人)들이 반드시 곤란할 것이다."
하자, 구윤명(具允明)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술을 금한 보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같은 때에 쌀을 사서 두는 것이 좋다."
하니, 이익정이 말하기를,
"듣건대, 홍봉한(洪鳳漢)이 균역청(均役廳)에서 쌀을 사서 많이 쌓아 두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원조 윤음(元朝綸音)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내가 부덕(否德)으로 34년을 임어(臨御)하였고 나이가 또 65세가 되었는데, 나라 일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고 민생(民生)은 더욱 곤궁하니, 삼양 회태(三陽回泰)001)  의 날을 당하여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봄에 내린 조서(詔書)를 생각함에 마음이 그윽이 부끄럽다. 과인이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최복(衰服)을 입고 밤낮으로 추모(追慕)하니 슬픈 소회가 더욱 간절하며 비록 양춘(陽春)을 당하였을지라도 엄동(嚴冬)과 같음이 있다. 그러나 한 마음에 잊지 못하는 것은 오직 백성이 있을 뿐이다. 어제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제 남은 뜻을 가지고 거듭 당부하니,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나의 권권(眷眷)002)  한 뜻을 체득하여 그 민생의 일에 세세(細細)함을 논하지 말고, 한결같이 민폐(民弊)를 없애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아 밤낮으로 힘써서, 해동(海東)의 서민으로 하여금 함께 춘대(春臺)003)  ·수역(壽域)004)  에 나아가게 하여, 다른 날에 기쁜 소식을 위에 아뢰면 선왕(先王)의 영혼이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니, 어찌 우리 동방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듣건대, 쌀 값이 크게 헐하다고 하니, 공인들이 반드시 곤란할 것이다. 혜국(惠局)으로 하여금 상평법(常平法)에 따르게 하라."
하였다.

 

1월 3일 경인

약원(藥院)에 명하여 돌려가면서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닭찜[雞蒸]을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가축들에 대하여 그 생동(生動)함을 보면 문득 이 물건이 어느 때인가는 사람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측은한 마음이 있었는데, 만약 삶아서 올렸는데 먹지 아니하면 이는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일005)  이다. 어찌 이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먹기가 싫은데 어찌 죽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상의 이 하교는 바로 천지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마음과 그 인후(仁厚)함을 같이하였으니, 송(宋)나라 황제가 ‘구운 양고기[燒羊]를 먹지 아니하겠다.’는 말006)  에 비하여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김상로가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다 하여 종묘(宗廟)에 고하고 경사를 치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에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이 복색(服色)으로 하례를 받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부제조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일이 있으면 종묘에 고하는 것은 예(禮)입니다. 성상의 환후가 빨리 회복하셨으니 나라의 경사가 더할 수 없이 큰데, 어찌 종묘·사직에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자전(慈殿)께 진하(陳賀)할 때에 오모(烏帽)와 백포(白袍)로 행하였으나, 그때는 나의 복제(服制)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압존(壓尊)되어 길례(吉禮)를 임시 빌려 쓰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지금은 내가 어찌 차마 백포로써 하례를 받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4면
【분류】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 식생활(食生活)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註 005] 양(梁)나라무제(武帝)의 일 :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는데도 후경(侯景)이 모반하여 대성(臺城)을 함락시키자 굶어죽었다는 일을 말함.[註 006] 구운 양고기[燒羊]를 먹지 아니하겠다.’는 말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어느날 밤에 배가 고파서 구운 양고기 생각이 났으나, 참고 준비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선부(膳夫)가 이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양을 잡아둘까 염려했기 때문임.
삼가 살펴보건대, 성상의 이 하교는 바로 천지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마음과 그 인후(仁厚)함을 같이하였으니, 송(宋)나라 황제가 ‘구운 양고기[燒羊]를 먹지 아니하겠다.’는 말006)  에 비하여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김상로가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되었다 하여 종묘(宗廟)에 고하고 경사를 치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에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이 복색(服色)으로 하례를 받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부제조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일이 있으면 종묘에 고하는 것은 예(禮)입니다. 성상의 환후가 빨리 회복하셨으니 나라의 경사가 더할 수 없이 큰데, 어찌 종묘·사직에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자전(慈殿)께 진하(陳賀)할 때에 오모(烏帽)와 백포(白袍)로 행하였으나, 그때는 나의 복제(服制)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압존(壓尊)되어 길례(吉禮)를 임시 빌려 쓰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지금은 내가 어찌 차마 백포로써 하례를 받겠는가?"
하였다.

 

약방 도제조 김상로(金尙魯)에게는 안장 갖춘 말을 직접 주고, 제조 이창수(李昌壽), 부제조 이성중(李成中)에게는 아울러 가자(加資)하며, 의원(醫員)·중관(中官)·원역(員役) 등에게는 모두 차등이 있게 상(賞)을 내릴 것을 명하였는데, 약원(藥院)의 노고 때문이었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자성편(自省編)》을 강하였다. 임금이 학문에 힘써 늘 한 달에 한 번 강경(講經)하는 여가에 자주 유신을 불러서 경사(經史)와 선유(先儒)의 격언(格言)을 토론하였다. 비록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을지라도 일찍이 오랫동안 폐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하교하기를,
"목릉(穆陵)007)  의 증손(曾孫)은 단지 하릉군(夏陵君)·하평군(夏坪君)이 있으니,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종친과 돈목(敦睦)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금오(金吾)008)  와 추조(秋曹)009)  에 명하여 도유형(徒流刑) 이하의 죄인은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특별히 우승지 한광회(韓光會)와 수찬 송형중(宋瑩中)의 직을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한광회 등이 야대(夜對)에서 도류형의 죄인을 소방(疏放)하는 일로 인하여 전후에 말로 죄를 지은 자들을 아울러 언급하였는데, 그 의도가 대개 윤시동(尹蓍東)·서형수(徐逈修) 등을 지목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악한 사람을〉 방류(放流)010)  하여 중국(中國)에 같이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이 무리를 이른 것이다. 나는 굳은 뜻이 있다."
하고,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파하였는데, 갑자기 비망기(備忘記)를 특별히 내려서, 그들이 시기를 이용하여 석방하기를 청한다고 꾸짖고, 인하여 이 명이 있었다.

 

1월 4일 신묘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을 소견하였다. 김상로 등이 종묘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기를 굳이 청하니, 임금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경례(慶禮)를 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다른 날에 사관(史官)이 쓰기를, ‘우리 임금이 영모당(永慕堂)을 추억하여 종묘에 고하고 경사를 치르는 것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영모당은 바로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승하한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의 병이 이튿날 곧 나은 것은 진실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이며, 상중에 있으면 하례하지 않는 것은 또한 예제(禮制)의 바꾸지 못할 도리인데, 여러 신하가 두 번 세 번 진달하여 청하는 것은 비록 전례에 의거하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상이 처음에서 끝까지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예제의 바름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4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삼가 살펴보건대, 왕의 병이 이튿날 곧 나은 것은 진실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이며, 상중에 있으면 하례하지 않는 것은 또한 예제(禮制)의 바꾸지 못할 도리인데, 여러 신하가 두 번 세 번 진달하여 청하는 것은 비록 전례에 의거하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상이 처음에서 끝까지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예제의 바름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홍중효(洪重孝)를 특별히 제수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졸(卒)하였다. 조정에서 받들어 위로하고, 정후(庭候)하였다. 하교하기를,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은 최초의 도위(都尉)011)  로 염아(恬雅)하고 근칙(謹飭)하여 마음으로 항상 이를 아름답게 여겼는데, 어찌 한 병으로 의약의 효험이 없을 것을 뜻하였겠는가? 갑자기 이 소식을 들으니, 슬픔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무릇 여러 가지 일은 일체 해창위(海昌尉)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고, 장생전(長生殿) 퇴건(退件)012)  의 구재(柩材)013)  를 골라서 보내며, 3년을 기한하여 월름(月廩)을 그대로 주고, 시호(諡號) 의정(議定)은 성복(成服)을 지난 뒤에 곧 거행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한신은 고(故) 상신 김흥경(金興慶)의 아들로서 천가(天家)014)  에 빈생(賓甥)015)  이 되었는데, 부귀로 생장하였으나 분화(芬華)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의복이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출입에 초거(軺車)를 타지 아니하고 항상 말을 타며 많은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다니니, 가로(街路)의 사람들이 간혹 도위가 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 성품이 효우(孝友)하고 공근(恭謹)하여 교만하고 귀한 뜻이 절대로 없으며, 노예를 엄하게 단속하여 여리(閭里)에 횡포하고 방자함이 없도록 하였다.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대(輿儓)016)  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아름다움을 일컬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 임금이 슬퍼함을 그치지 아니하고, 비봉(庀賵)017)  을 모두 우대하는 법으로 썼다. 아는 이나 모르는 이가 모두 말하기를, ‘어진 도위가 죽었다.’고 하였다." 시호를 정효(貞孝)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4면
【분류】인물(人物) / 인사(人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註 011] 도위(都尉) : 부마.[註 012] 퇴건(退件) : 불합격품.[註 013] 구재(柩材) : 널감.[註 014] 천가(天家) : 왕가.[註 015] 빈생(賓甥) : 사위.[註 016] 여대(輿儓) : 하인.[註 017] 비봉(庀賵) : 상사에 주는 물품.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한신은 고(故) 상신 김흥경(金興慶)의 아들로서 천가(天家)014)  에 빈생(賓甥)015)  이 되었는데, 부귀로 생장하였으나 분화(芬華)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의복이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출입에 초거(軺車)를 타지 아니하고 항상 말을 타며 많은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다니니, 가로(街路)의 사람들이 간혹 도위가 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 성품이 효우(孝友)하고 공근(恭謹)하여 교만하고 귀한 뜻이 절대로 없으며, 노예를 엄하게 단속하여 여리(閭里)에 횡포하고 방자함이 없도록 하였다.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대(輿儓)016)  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아름다움을 일컬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 임금이 슬퍼함을 그치지 아니하고, 비봉(庀賵)017)  을 모두 우대하는 법으로 썼다. 아는 이나 모르는 이가 모두 말하기를, ‘어진 도위가 죽었다.’고 하였다."
시호를 정효(貞孝)라 하였다.

 

신위(申暐)와 남태제(南泰齊)를 승지로 삼았다.

 

1월 5일 임진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교리 이심원(李心源)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방금 새벽에 내린 비망기를 삼가 보건대, 승지 한광회(韓光會)와 수찬 송형중(宋瑩中)을 체차하라는 명이 있으나, 마음속으로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성세(聖世)의 죄인은 깨우치게 할 것이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윤시동(尹蓍東)을 3년 동안 영해(嶺海)에 귀양보내고 서형수(徐逈修)는 집에 늙은 어미가 있는데 벌이 이미 너무 지나쳤고 사정도 몹시 가엾으니, 이제 나라에 대패(大霈)018)  가 있어 만민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날을 당하여, 근신(近臣)이 조용히 진달하여 만민을 한결같이 보는 은혜를 베풀기를 청하는 것은 진실로 그 직분일 뿐입니다. 말이 미처 감동을 주지 못하였는데, 엄한 하교가 뒤따라 밤중에 야대(夜對)를 파하시고 일시에 견책(譴責)을 입었으니, 대성인(大聖人)의 화평한 마음으로 사물에 응하는 도리에 혹시 어긋남이 없겠습니까? 신은 밤 연석(筵席)에 같이 들어간 사람으로 처분의 과중(過中)함을 눈으로 보고는 의리상 침묵하고 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양찰(諒察)하심을 더하시어, 그 벌함을 정지하고 그 말을 받아들이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진전(眞殿)에 입으로 아뢰고 중외(中外)에 반포하였으니, 그 뒤에 협잡하는 자를 신칙함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작년 봄에 판의금(判義禁)을 처분한 일이 있었는데, 승지와 유신(儒臣)이 석방하는 하교로 인하여 혹은 먼저, 혹은 뒤에 말함이 구차하므로 특별히 그 직을 체차하였다. 그런데 하나는 제방(隄防)을 엄하게 함이고, 하나는 세도(世道)를 가다듬는 것이나 또한 간략하게 하였으니, 그때 침묵한 것은 옳다고 이를 만한데, 지금 차자(箚子)의 진달을 어찌 다시 헤아렸겠는가? 이같은 버릇은 비록 피곤하게 누워 있을지라도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 이심원을 체차하고 그 차자를 돌려주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어젯밤에 특별히 체차하라고 명하신 일은, 상교(上敎)에서 이미 뜻이 직절(直切)함에 부족하고 말이 명백하지 못함을 그르게 여기셨고 신의 뜻도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감히 우러러 주달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세수(歲首)를 당하여 한 승선(承宣)과 두 유신(儒臣)을 일시에 아울러 체차하는 것은 경상(景像)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하교를 도로 거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이 전교를 인하여 마음에 품은 바를 간략하게 진술하였으나, 너무나 명백하지 못하였다. 그가 이른바 ‘온 세상을 용동한다[聳動一世].’라고 이른 것은 지극히 웃을 만하다. 일개 윤시동을 석방하는 것이 과연 용동하는 도리인가? 유신이 이른바 ‘만물과 더불어 봄을 같이하는 뜻으로 추측하면 승선의 진달한 바가 옳다.’고 한 것은 더욱 지극히 초초(草草)하다. 한유신은 연중(筵中)에서 묵묵히 있으므로 내가 옳다고 여겼지만 만약 대체를 말하면 의당 ‘윤시동이 잘못은 잘못이지만 이제 나라의 경사를 당하여 대사[大赦]를 고르게 입는 것이 좋다.’고 말해야 할 것인데, 끝내 말이 없다가 이미 나간 뒤에 무슨 생각이 나서 이러한 차자를 진달함이 있는가? 비망기 가운데, ‘우하갱료(又何更料)’란 네 글자는 내가 생각하고 쓴 것이니, 잘 형용한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대단치 아니한 일로써 세 사람을 아울러 체차하는 것은 또한 소조(小朝)019)  에 교훈을 전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대신의 진달함을 듣고, 황연(怳然)히 깨달았다. 이미 깨달은 뒤에 무엇을 아끼고 버티겠는가? 승지 한광회·수찬 송형중·교리 이심원을 체차하는 명을 특별히 정지하라."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휴퇴(休退)를 청하니,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동래(東萊)에 취리(取利)하는 은전(銀錢) 1만여 냥(兩)을 모두 면제하고 본조(本曹)020)  에 저축해 둔 대동미(大同米)를 대신 주게 하였다. 임금이 동부승지(同副承旨) 홍중효(洪重孝)를 소견하고, 조용히 묻기를,
"그대가 동래에 있을 때에 왜차(倭差)를 쫓아서 돌려보냈는데, 필시 방략(方略)이 있을 것이니, 상세히 진달함이 가하다."
하니, 홍중효가 대답하기를,
"왕령(王靈)021)  이 성대하시어 왜차가 스스로 갔습니다. 신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아무도 모르게 돌려보낸 실상을 간략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다시 묻기를,
"본부(本府)에 무슨 폐막(弊瘼)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본부에 공가 은전(公家銀錢)을 민간에 빚을 놓는 것이 있어, 거의 만여 냥이 넘었는데, 해가 오래 된 후에 채주(債主)가 도망해 없어지자, 인족(隣族)에게서 포(逋)를 징수하니, 온 경내(境內)가 억울함을 원망하여 거의 지탱할 수 없습니다. 신의 뜻은 의주(義州)의 예(例)를 모방하여 일체 모두 면제하고 전세(田稅)로 급대(給代)하면, 공사(公私)가 모두 편리하여 변경 백성이 은택을 힘입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한 고을의 전세를 아껴서 변경 백성을 위로하지 아니하겠는가?"
하고, 곧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을 와내(臥內)에 불러서 영남 도신 조운규(趙雲逵)·동래 부사 조엄(趙曮)과 더불어 왕복, 상확(商確)하여 은전의 구포(舊逋)를 모두 감면하게 하고, 저장한 쌀로 급대함을 일체 의주와 같이 하였다.

 

1월 7일 갑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춘향을 친히 행하였다.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과천 삼강 어사(果川三江御史) 홍경해(洪景海)를 소견하고, 양주(釀酒)를 범한 자의 유무를 하문하였다.

 

1월 8일 을미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사직(司直) 서종급(徐宗伋)이 상서하여 나이가 많음을 들어 휴퇴를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장령 신응현(申應顯)이 상서하여 시무(時務)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학문에 근면하고, 둘째는 유일(遺逸)을 불러들이며, 셋째는 정사(政事)에 근면하고, 넷째는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었다. 또 윤시동(尹蓍東)·서형수(徐逈修) 및 전후에 말로써 죄를 받은 자는 모두 석방해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면려할 것을 진달함에 말이 심히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아니하겠는가? 앙품(仰稟)한 일은 그때 성상께서 처분하신 것이 지극히 정당 명백하니,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이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대제학 윤봉조(尹鳳朝)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대조(大朝)께서 신에게 이 직(職)을 주시어 여러 번 돈박(敦迫)을 가한 것은 단지 천망(薦望)하는 한 가지 일을 위한 것입니다. 한번 사은한 뒤에야 현직에 있을 수 있고 한 번 체임(遞任)한 뒤에야 전임(前任)으로서 추천에 당할 수 있는데, 사은하지 아니하고 체임하지 아니하면 의의(擬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은 은명(恩命)을 받들고부터 대조의 특교(特敎)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바로 문형(文衡)의 자리가 오랫동안 빈 까닭으로써 사사로이 스스로 근심하여 국조(國朝)의 옛일을 두루 열람한즉, 고(故) 상신 노수신(盧守愼)과 고 판서 이식(李植)은 모두 문형을 맡았는데, 다 천망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글을 올려 대(代)를 천거하였으니, 당시에 두 신하가 힘써 굳이 사양한 것은 무슨 까닭임을 알지 못하지만, 요는 이것이 아름다운 뜻입니다. 이 일이 삼관(三館)에는 비록 혹시 전함이 없을지라도 두 신하의 문집(文集)에는 함께 실렸으니, 오히려 상고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에 감히 전배(前輩)의 이미 행한 법을 끌어 의거하여 삼가 여기에 붙여서 진달합니다. 대저 사원(詞垣)의 정평(定評)은 옮기고 바꿀 수 없습니다. 호조 참판 신(臣) 남유용(南有容)은 문학의 아망(雅望)이 일찍 명예를 차지하여 온 세상이 추대하는 바이니, 공의(公議)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신이 나가서 추천에 당할지라도 이를 버리고 누구를 먼저 하겠습니까? 한 맥(脈)의 벼루를 전하는 길이 이로부터 이어질 수 있고, 다른 날 권형(權衡)은 장차 후인(後人)에 속할 것이니, 신은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몸소 나아가서 입으로 천거하는 것은 이미 그 길이 없으니, 당돌함을 무릅쓰고 진달하여 묘당(廟堂)의 권점(圈點)을 대비하려 합니다. 일이 비록 옛일을 인용하였더라도 참람함을 저지르는 간섭이오나,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묘당에 내리어 대조(大朝)께 전품(轉稟)하여 처분을 듣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의 성명(成命)한 밑에서 이와 같이 글로 사양할 필요가 없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봉조가 비록 노수신·이식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였으나, 노 수신·이식은 모두 오래 문형을 맡았고, 이미 체차하자 또한 전임(前任)으로 자처하였으며, 추천한 사람은 일찍이 이미 천망에 올랐기 때문에 비록 글을 진달하여 천거해 대신하게 하였으나, 공격(公格)에 어긋나지 아니한다. 윤봉조는 이미 명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니 문형으로 자처할 수 없고, 또 묵은 천망[宿薦]이 아닌데, 억지로 끌어서 예(例)로 삼는 것은 그릇되고 어긋남을 면치 못한다. 이때 사람이 말하기를, ‘문형을 추천하는 법이 이때에 이르러 크게 허물어졌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5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봉조가 비록 노수신·이식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였으나, 노 수신·이식은 모두 오래 문형을 맡았고, 이미 체차하자 또한 전임(前任)으로 자처하였으며, 추천한 사람은 일찍이 이미 천망에 올랐기 때문에 비록 글을 진달하여 천거해 대신하게 하였으나, 공격(公格)에 어긋나지 아니한다. 윤봉조는 이미 명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니 문형으로 자처할 수 없고, 또 묵은 천망[宿薦]이 아닌데, 억지로 끌어서 예(例)로 삼는 것은 그릇되고 어긋남을 면치 못한다. 이때 사람이 말하기를, ‘문형을 추천하는 법이 이때에 이르러 크게 허물어졌다.’고 한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승지에게 명하여 신응현(申應顯)의 상소를 읽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작년 봄 시탕(侍湯)하던 날에 전문(殿門)에 부복(俯伏)하여 소록(疏錄)에 이름을 지웠는데, 무슨 관계이길래 신응현이 어찌하여 감히 영호(營護)하는가? 무엄할 뿐만 아니라, 그 임금이 흰 머리 늙은 나이에 당습(黨習)이 다시 일어남을 앉아서 보고 무슨 얼굴로 선왕(先王)의 영령(英靈)에 배알하겠는가?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영호하니, 외직(外職)에 보임하는 데 그칠 수 없다. 전 장령 신응현을 기장현(機張縣)에 귀양보내고, 본 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키라."
하였다.

 

임금이 화순 옹주방(和順翁主房)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화순 옹주는 월성위(月城尉)가 죽은 뒤로부터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된 도리라 하겠는가?"
하고, 곧 거둥하였다.

 

도배 죄인(徒配罪人) 윤광찬(尹光纘)·조재민(趙載敏)·유동원(柳東垣)·오명좌(吳命佐)·오중관(吳重觀)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도승지 이창수(李昌壽) 등이 이를 쟁집(爭執)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윤광찬 등은 모두 을해년022)   역당(逆黨)으로 관련이 이미 긴밀하고 죄명이 매우 중한데, 사형을 감하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자, 사람들이 모두 형벌을 잘못하였다고 이르렀다. 지난해 소결(疏決) 때에 특명으로 감하여 도배(徒配)되었으나 대신(大臣) 및 대관(臺官)이 한 사람도 다투어 논함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사유(赦宥)하는 법으로 인하여 석방하는 과(科)에 두기를 명하자, 김상로 등이 비로소 온전히 석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여 굳이 쟁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등(減等)할 때에 이미 쟁집하지 아니하였으니, 도년(徒年)023)  이 사유를 만나면 곧바로 석방하는 것은 법전에 실린 바인데, 어찌 올리고 낮출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나라에 중한 것은 형법(刑法)이다. 형법이 적중함을 잃으면 민심이 복종하기 어렵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한다. 이러므로 성왕(聖王)은 법을 행하고 형(刑)을 씀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정하여 조금도 낮고 높음이 없는 것은, 진실로 한번 들고 놓는 사이에 혹시 그 공평함을 잃어서 뭇사람에게 거슬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다. 아! 윤시동(尹蓍東)이 한두 재신(宰臣)을 논척(論斥)하였다 하여 3년을 영해(嶺海)에 귀양가 있었는데 마침내 용서해 돌아오게 함을 아끼고, 아울러 신구(伸救)한 사람과 더불어서 죄척(罪斥)이 따라 이르렀다. 오직 저 윤광찬 등 다섯 사람은 그 가운데에 비록 죄를 범한 천심(淺深)의 구분이 있을지라도 요컨대, 역얼(逆孼)이 됨은 일반이다. 원래 처음에 목숨을 용서한 것이 이미 왕법(王法)에 어긋났는데, 아직 수 년이 못되어 감등하고 온전히 석방하여 엷은 죄와 작은 과실처럼 보니, 형법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러 여지가 없게 되었다. 감등할 때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도 쟁난(爭難)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대신[股肱]과 대간[耳目]의 책임인데, 전에 이미 잘못하였거늘 어찌 두 번이나 용납되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주상의 뜻이 매양 이쪽과 저쪽을 붙들거나 누르려고 하기 때문에, 처분하는 즈음에 그 적중함을 잃은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곧음이 지나친다.’는 것이니, 어찌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지 아니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5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註 022]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023] 도년(徒年) : 도형(徒刑)에 의하여 처벌하는 햇수.
사신(史臣)은 말한다. "나라에 중한 것은 형법(刑法)이다. 형법이 적중함을 잃으면 민심이 복종하기 어렵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한다. 이러므로 성왕(聖王)은 법을 행하고 형(刑)을 씀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정하여 조금도 낮고 높음이 없는 것은, 진실로 한번 들고 놓는 사이에 혹시 그 공평함을 잃어서 뭇사람에게 거슬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다. 아! 윤시동(尹蓍東)이 한두 재신(宰臣)을 논척(論斥)하였다 하여 3년을 영해(嶺海)에 귀양가 있었는데 마침내 용서해 돌아오게 함을 아끼고, 아울러 신구(伸救)한 사람과 더불어서 죄척(罪斥)이 따라 이르렀다. 오직 저 윤광찬 등 다섯 사람은 그 가운데에 비록 죄를 범한 천심(淺深)의 구분이 있을지라도 요컨대, 역얼(逆孼)이 됨은 일반이다. 원래 처음에 목숨을 용서한 것이 이미 왕법(王法)에 어긋났는데, 아직 수 년이 못되어 감등하고 온전히 석방하여 엷은 죄와 작은 과실처럼 보니, 형법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러 여지가 없게 되었다. 감등할 때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도 쟁난(爭難)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대신[股肱]과 대간[耳目]의 책임인데, 전에 이미 잘못하였거늘 어찌 두 번이나 용납되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주상의 뜻이 매양 이쪽과 저쪽을 붙들거나 누르려고 하기 때문에, 처분하는 즈음에 그 적중함을 잃은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곧음이 지나친다.’는 것이니, 어찌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지 아니하겠는가?"

 

1월 10일 정유

도승지 이창수(李昌壽) 등이 아뢰어, 죄인 유동원(柳東垣) 등을 특별히 방면한다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다시 아뢰어, 죄인 이성망(李聖望)을 같이 풀어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응교 홍자(洪梓)·교리 윤득양(尹得養) 등이 차자를 올려 쟁집하였으나,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 【지평 서유량(徐有良)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여 윤광찬·조재민·유동원·오명좌·오중관 등은 대조(大朝)께 계품하여 이전대로 도치(島置)하고, 감등할 때에 말하지 아니한 대신(臺臣)은 아울러 파직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유동원 등의 일은 대조께서 이미 처분하셨는데, 어찌 감히 번거롭게 하겠는가? 대신을 파직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납 이수봉(李壽鳳)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정원(政院)과 옥당(玉堂)의 계차(啓箚)를 삼가 보건대, 유동원 등 여섯 사람을 석방하는 일로 쟁집하는 바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 여섯 사람들이 지은 죄가 어떠한 것입니까? 당초에 감등한 명령은 크게 형법을 잃었었고, 지금에 이르러 온전히 석방하니, 세상 여론이 더욱 격앙되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대조(大朝)께 앙품하여 빨리 당초에 감등하라는 명을 정지하여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유동원 등의 일은 성상께서 이미 처분하셨는데, 어찌 번거롭게 계품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극수당(克綏堂)에 나아가자,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도승지 이창수(李昌壽)가 말하기를,
"어제 성상께서 신응현(申應顯)의 일로써 밤을 새워 처분하시어 침수(寢睡)를 전혀 잃으셨으므로 어제 아침에 입시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전교로써 보건대, ‘보당(報黨)’ 두 글자는 진실로 개연(慨然)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당인(黨人)이 무슨 보답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만일 나라에 보답하지 아니하고 당에 보답한 것이 있다면, 그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이로써 신하를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을해년024)   이후로 피차간에 어찌 당이 있겠습니까? 밑에 있는 사람이 비록 ‘당’이란 글자를 쓴다 하더라도 위에서는 통렬하게 금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찌 ‘당’이란 한 글자를 사륜(絲綸) 사이에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설혹 의견이 합하지 아니하고 좋아함과 싫어함이 같지 아니함에서 나온 것이 있을지라도, 결단코 ‘보당’ 두 글자로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성인(聖人)의 사령(辭令)은 귀함이 화평함에 있는데, 이같은 하교는 아마도 박절(迫切)함에 가까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의 말이 과연 옳다."
하였다. 이창수가 말하기를,
"서형수(徐逈修)의 일은 성상께서 매양 ‘진전(眞殿)에 구고(口告)하였다.’고 하교하시고, 혹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위엄과 노여워하심을 문득 내리시니, 신도 죄를 두려워하는 자이라, 비록 감히 우러러 주달하지 못하였으나, 윤시동(尹蓍東)에 이르러서는 그 논한 바의 지목한 뜻이 오로지 두 중신(重臣)에게 있습니다. 조영국(趙榮國)은 신의 외당(外黨) 지친(至親)이고, 이성중(李成中)은 바로 신이 어려서부터의 친구로 이제 흰 머리에 이르렀는데, 만약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말하면, 신이 어찌 일분(一分)이라도 윤시동을 애석해 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윤시동의 논한 바가 만약 ‘사실이 아닌 전해 들은 것’을 치우치게 믿은 것이 아니면, 혹시 따로 두 중신에게 좋아하고 미워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신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당심(黨心)에서 나온 것인지는 신이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물며 그 율명(律名)은 찬(竄)도 아니고 배(配)도 아니며, 곧 전에 없는 벌(罰)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새로 대각(臺閣)에 들어온 자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한번 말함이 있으면 성상께서 매양 한번 처분이 있으시고 그칠 기한이 없으시니, 진실로 민망스러운데, 두 중신에게 또한 어찌 좋은 일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주심(主心)을 가지면 이 세상에 어찌 당론(黨論)이 있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경비[經用]가 다하였다고 하면서 평안도의 수세미(收稅米) 2만 석을 취해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자, 약방에서 입진하고 우의정 신만(申晩)이 같이 입대하였는데, 신만이 병조와 총융청(摠戎廳)에 돈 각 1천 5백 냥을 꾸어서 봉상시(奉常寺)의 두 혼전(魂殿)에 공상(供上)하는 생채(生菜) 값으로 하였다가, 1년 후에 곧 돌려 갚기를 청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가하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아서 승지를 소견하였다.

 

1월 11일 무술

윤득양(尹得養)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금부(禁府)에서 감등(減等)한 도배 죄인(徒配罪人) 유동원·이성망·오명좌·오중관·조재민·윤광찬 등을 풀어 주라는 명이 있었으나, 대간(臺諫)의 계달이 있었기 때문에 거행하지 못하였다고 상달하였다.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서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승정원이 두 번 계달한 것을 작환(繳還)하였으니, 진실로 근래에 처음 보는 일입니다. 아무리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두세 번 작환하는 것은 어찌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차례는 가하겠지만, 두 차례는 지나치고 또 괴롭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이 있는 터에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이니, 추고(推考)는 말감(末減)할 것이다."
하였다.

 

이지억(李之億)을 승지로 삼았다.

 

고 찬선(贊善) 민우수(閔遇洙)에게 증직(贈職)하고, 인하여 시호(諡號)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민우수는 젊어서 문학과 중한 명망이 있었는데, 신축년025)  ·임인년026)   이후로 과거보는 일에 뜻을 끊고, 자신의 수양에 전념하여 경전(經傳)을 연구하고 의리(義理)를 강구해 밝히니,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여강(驪江)027)  에 숨어 살면서 도(道)를 즐기고 벼슬하지 아니하였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은일(隱逸)로 불러 뛰어 올려서 찬선(贊善)·도헌(都憲)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품계가 아경(亞卿)028)  에 그침으로써 시호(諡號)를 청하지 못하였는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하여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입게 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02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26]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027] 여강(驪江) : 여주.[註 028] 아경(亞卿) : 종2품.
사신(史臣)은 말한다. "민우수는 젊어서 문학과 중한 명망이 있었는데, 신축년025)  ·임인년026)   이후로 과거보는 일에 뜻을 끊고, 자신의 수양에 전념하여 경전(經傳)을 연구하고 의리(義理)를 강구해 밝히니,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여강(驪江)027)  에 숨어 살면서 도(道)를 즐기고 벼슬하지 아니하였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은일(隱逸)로 불러 뛰어 올려서 찬선(贊善)·도헌(都憲)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품계가 아경(亞卿)028)  에 그침으로써 시호(諡號)를 청하지 못하였는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하여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입게 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월 13일 경자

원경순(元景淳)을 대사헌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에게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그의 차청(箚請)으로 인하여 허부(許副)한 것이었다.

 

청포(靑布)를 연경(燕京)029)  에서 사 오는 것을 금하고, 청색으로 물들인 목면(木綿)을 대용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 등이 건의하기를,
"청포(靑布)는 우리 나라의 생산이 아닌데, 연경의 값이 날마다 뛰어서 시민(市民)이 이(利)를 잃고, 또 그 수용(需用)에도 목면의 단단하고 질긴 것만 못하니, 청컨대 연경에서 사 오는 수량을 조금 줄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금할 것을 명하여, 모든 유역(帷帟)·기복(旗服) 등 일찍이 청포를 쓰던 것을 모두 물들인 무명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체계(髢髻)030)  를 금하여 궁중 모양[宮樣]031)  으로 할 것을 허락하고, 모든 다른 모양을 아울러 엄금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조 참판 김치인(金致仁)을 소견하고, 친히 어찰(御札)을 주어, 그 아버지인 새로 치사(致仕)한 김재로에게 전하게 하여 권권(眷眷)한 뜻을 보였다.

 

1월 14일 신축

유성(流星)이 천시원(天市垣)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鉢]와 같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시사복(視事服)을 갖추고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방금 들으니,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병이 가망이 없다고 한다. 먹지 아니한 지가 지금 10여 일에 이르렀는데, 그의 절개는 곧다[貞]고 이를 만하나, 나로 하여금 장차 비참한 지경을 보게 할 것이니, 어떻게 마음을 잡겠는가? 오늘 저녁은 보름 제사[望奠]이니, 비록 좋지 못한 소식이 있을지라도,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통기하지 마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월 15일 임인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보름 제사를 친히 행하였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월 17일 갑진

화순 옹주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바로 임금의 첫째 딸인데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동복 누이동생[同母妹]이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시집가서 비로소 궐문을 나갔는데, 심히 부도(婦道)를 가졌고 정숙(貞淑)하고 유순함을 겸비(兼備)하였다. 평소에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복식(服飾)에 화려하고 사치함을 쓰지 않았으며, 도위(都尉)와 더불어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항상 깨끗하고 삼감으로써 몸을 가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진 도위와 착한 옹주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도위가 졸하자, 옹주가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그 집에 친히 거둥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곧 토하니, 임금이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돌아왔는데, 이에 이르러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되어 마침내 자진(自盡)하였다. 정렬(貞烈)하다. 그 절조(節操)여! 이는 천고(千古)의 왕희(王姬) 중에 있지 아니한 바이다. 조정에 받들어 위로하고 정후(庭候)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인(婦人)의 도(道)는 정(貞) 하나일 뿐이다. 세상에 붕성지통(崩城之痛)032)  을 당한 자가 누구나 목숨을 끊어 따라가서 그 소원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지라, 하루아침에 목숨을 결단하여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는 이는 대개 적다. 그러나 정부(貞婦)·열녀(烈女)가 마음의 상처가 크고 슬픔이 심한 즈음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자인(自引)033)  하는 것은 혹시 쉽게 할 수 있지만, 어찌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끊고 한 번 죽음을 맹세하여 마침내 능히 성취하였으니, 그 절조가 옹주와 같은 이가 있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비록 군부(君父)의 엄하고 친함으로서도 능히 감동해 돌이킬 수 없었으니, 진실로 순수하고 굳세며, 지극히 바른 기개(氣槪)가 분육(賁育)034)  이라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할 바가 있지 아니하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이는 진실로 여항(閭巷)의 필부(匹婦)도 어려운 바인데, 이제 왕실의 귀주(貴主)에게서 보게 되니 더욱 우뚝하지 아니한가? 아! 지극한 행실과 순수한 덕은 진실로 우리 성후(聖后)께서 전수(傳授)하신 심법(心法)이므로, 귀주가 평일에 귀에 젖고 눈에 밴 것을 또한 남편에게 옮겼던 것이다. 아! 정렬하도다. 아! 아름답도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032] 붕성지통(崩城之痛) : 남편이 죽은 애통.[註 033] 자인(自引) : 자살.[註 034] 분육(賁育) :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인(婦人)의 도(道)는 정(貞) 하나일 뿐이다. 세상에 붕성지통(崩城之痛)032)  을 당한 자가 누구나 목숨을 끊어 따라가서 그 소원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지라, 하루아침에 목숨을 결단하여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는 이는 대개 적다. 그러나 정부(貞婦)·열녀(烈女)가 마음의 상처가 크고 슬픔이 심한 즈음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자인(自引)033)  하는 것은 혹시 쉽게 할 수 있지만, 어찌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끊고 한 번 죽음을 맹세하여 마침내 능히 성취하였으니, 그 절조가 옹주와 같은 이가 있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비록 군부(君父)의 엄하고 친함으로서도 능히 감동해 돌이킬 수 없었으니, 진실로 순수하고 굳세며, 지극히 바른 기개(氣槪)가 분육(賁育)034)  이라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할 바가 있지 아니하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이는 진실로 여항(閭巷)의 필부(匹婦)도 어려운 바인데, 이제 왕실의 귀주(貴主)에게서 보게 되니 더욱 우뚝하지 아니한가? 아! 지극한 행실과 순수한 덕은 진실로 우리 성후(聖后)께서 전수(傳授)하신 심법(心法)이므로, 귀주가 평일에 귀에 젖고 눈에 밴 것을 또한 남편에게 옮겼던 것이다. 아! 정렬하도다. 아! 아름답도다."

 

임금이 화순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청대(請對)하여 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다. 임금이 환궁(還宮)한 뒤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 앉아서 자식의 죽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거듭 타일러서 약을 먹기를 권하니, 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시니 어찌 억지로 마시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하고, 조금씩 두 차례 마시고는 곧 도로 토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을지라도 중심이 이미 정해졌으니, 차마 목에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하기로, 내가 그 고집을 알았으나, 본심이 연약하므로 사람들의 강권을 입어 점차로 마실 것을 바랐는데, 마침내 어버이의 뜻을 순종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이로써 운명(殞命)하였으니, 정절(貞節)은 있으나 효에는 모자란 듯하다. 그날 바로 죽었으면 내가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마는, 열흘을 먹지 아니하니 내 마음에 괴로움이 많았다. 아까 예조 판서가 정려하는 은전을 실시하라고 청하였는데, 그 청함은 잘못이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자손에게 법을 주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뒤에 폐단됨이 없지 아니하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오나, 우뚝한 정절을 없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세(百世)에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정절에 있고 정려에 있지 아니한데,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후세에 폐단을 끼치지 아니하려고 한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왕림하였을 적에, 그가 시호(諡號)로써 그 지아비의 명칭을 바꾸고 싶어하여 내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었는데, 시호를 내리던 날에 죽었으니, 시호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임종(臨終) 때를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마음 아파하는 바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귀주(貴主)의 열행(烈行)은 이미 사람의 입에 전파되어 있으며, 또한 장차 사첩(史牒)에 전해질 것인데, 어찌 구구한 작설(綽楔)035)                          의 표함을 기다리겠는가? 더구나 ‘아비가 자식을 정려할 수 없다’는 하교는, 위대하신 왕의 말씀이 넓고 공정하여 더욱 만세의 법이 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


[註 035]              작설(綽楔) : 정려(旌閭).
사신(史臣)은 말한다. "귀주(貴主)의 열행(烈行)은 이미 사람의 입에 전파되어 있으며, 또한 장차 사첩(史牒)에 전해질 것인데, 어찌 구구한 작설(綽楔)035)                          의 표함을 기다리겠는가? 더구나 ‘아비가 자식을 정려할 수 없다’는 하교는, 위대하신 왕의 말씀이 넓고 공정하여 더욱 만세의 법이 될 만하다."

 

1월 18일 을사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었다.

 

임금이 주서(注書) 오태장(吳泰章)을 우관(郵官)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육진(六鎭)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기주관(記注官) 이익보(李益普)에게 이르기를,
"임명주(任命周)의 까닭으로써 너에게 어떠한 마음이 없을 수 없겠지만, 어떠한 마음이 있으면 진실로 믿는 도리가 아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의심하고 막히는 마음이 있겠는가? 내 마음은 안팎이 없어서, 속에 있는 것은 말에 나타난다."
하니, 이익보가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1월 19일 병오

이날은 바로 화순 옹주의 입관(入棺)하는 날이었는데,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1월 20일 정미

화순 옹주의 성복(成服) 뒤에, 조정에서 정후하였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와 앉자, 약방에서 입진하고, 우의정 신만(申晩)이 같이 입대(入對)하였다.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무지개의 변괴로 경계할 것을 진달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진달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1월 21일 무신

이날은 왕세자의 탄일(誕日)이다. 조정에서 정후하였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승지를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아! 나라 일이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고 하늘이 날마다 깨우침을 보이니, 어찌 떨리지 않으며 두렵지 않겠는가? 흰 무지개[陰虹]가 달을 꿰뚫은 것이 이제 몇 차례인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 모양은 보지 못하나 그 그림자를 살피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니, 현재 두려워서 떨리는 형상은 비록 운대(雲臺)036)  의 보고가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 보고가 있는 것이겠는가? 아! 그 임금이 날마다 쇠모(衰耗)하고 백 가지 법도가 해이하니, 까닭을 살피면 바로 나의 부덕(否德)에 있다. 아! 대리(代理)하는 당(堂)에는 먼지가 쌓인 지 오래이고, 춘방(春坊)의 관원은 직무하는 곳에 한가롭게 누웠으며, 대간(臺諫)의 관원은 귀가 먹고 눈이 멀었기로, 고요히 병을 수양하는 중에 강대(講對)를 진정(進定)하라 하였으나, 한갓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 조금도 그 보람이 없다.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역시 나의 허물이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에 최복(衰服)을 입고 하루 두 번 탕약을 먹으면서, 오히려 몸으로 가르치려고 하여 와내(臥內)에 불러서 강(講)을 하였으나, 해가 이미 바뀌었는데 상하(上下)가 고요하니 또한 할 것이 없어서 그러한가? 지금 세도(世道)를 보건대, 또한 어찌 할 것이 없다고 이르겠는가? 비록 요순(堯舜)의 융성한 시대에서도 고요(皋陶)037)  가 말하기를, ‘하루 이틀 사이에 만 가지 사기(事機)가 이른다.’고 하였으니, 현금의 기상(氣像)은 지나간 역사에서 찾을지라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역시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1월 22일 기유

이창수(李昌壽)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1월 24일 신해

도승지 이지억(李之億)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대조 전하(大朝殿下)께서 흰 무지개의 재이(災異)로 인하여 특별히 하교를 내려서 통렬하게 스스로 허물을 끌어 뭇 신하를 책려(責勵)하시고, 또 한 통을 등사하여 저하(邸下)에게 올리라 명하셨으니, 위대하십니다. 왕의 말씀이시여! 비록 우왕(禹王)·탕왕(湯王)의 자신을 죄책하는 덕(德)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에 더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저하께서 재이를 만나 두려워하고 근심하시는 가운데 밝게 가르치심을 친히 받들어서, 위로 하늘의 견책(譴責)에 보답하고 우러러 성상의 하교를 체득할 것을 생각하는 바가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신 등이 마음속으로 생각건대, 오늘날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는 요체(要諦)는 정사에 부지런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한다는 두 가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요즘 예후(睿候)의 조섭(調攝)하는 형편이 오래 회복되지 않으시어, 빈대(賓對)와 양연(兩筵)을 정지한 지가 거의 두어 달이 지났습니다. 몸에 병이 오는 것은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면하지 못하는 바이나, 기무(機務)에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걱정거리가 있고 예학(睿學)은 앞으로 성취될 희망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작은 사고이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가운데 진달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 이석상(李錫祥)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이켜 생각하건대, 유유(悠悠)한 만사(萬事)가 오로지 저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데, 지금 저하께서 비록 예후가 오래 불편하신 때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대조(大朝)께서 정섭(靜攝) 중임에도 강대(講對)를 진정(進定)하신 마음으로써 저하의 마음을 삼아, 와내에 불러 접견하고 자주자주 강대하여 촌음(寸陰)을 아끼는 공부를 다해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법으로 삼아서, 바른 말을 날마다 올리게 하고 세도(世道)를 크게 변하게 하시면,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여 재앙이 변하여 상서로움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대조께서 몸으로 가르치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아니함일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두려워하고 근심 있는 가운데 진달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25일 임자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갔다. 임금이 포융복(布戎服)을 갖추어 말을 타고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부관(部官) 이입중(李立中)을 잡아들이니, 교량(橋梁)을 잘 수선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임금이 경기 감사 조돈(趙暾)과 각무 차원(各務差員)을 소견하고, 민폐(民弊)를 물었다. 전어 차원(傳語差員) 죽산 부사(竹山府使) 유동무(柳東茂)가 바로 능소(陵所)에 간 까닭으로 감사가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청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신모미(新耗米) 2천 석 내에서 매년 3백 석을 특별히 해영(該營)에 획급(劃給)하여 지용(支用)하게 하고, 경기(京畿)의 곡식 얻기를 청하는 것을 엄히 방지하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갔다.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시사복(視事服)으로 바꾸어 입고, 홍살문[紅箭門] 안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다시 능(陵) 위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서 친히 제사한 뒤에, 도로 홍살문 안으로 나아가서 사릉례(辭陵禮)를 행하였다. 작은 막차에 들어가서 최복(衰服)으로 바꾸어 입고, 홍살문 안에 나아가서 곡(哭)하며 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 신릉(新陵) 위에 나아가서 봉심하고 슬픔을 다하였으며, 이어 정자각에 나아가서 상식(上食)하고 겸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에게는 모두 말[馬]을 내려 주고, 참봉(參奉)·충의(忠義)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라 명하였다. 도로 작은 한 막차에 나와서 시사복(視事服)으로 바꾸어 입고 익릉(翼陵)에 나아가서 사배례를 행하고, 명릉의 재실(齋室)에 다시 돌아왔다.

 

1월 26일 계축

임금이 능 위에 나아가서 슬픔을 다하고, 홍살문 안에서 사릉례를 행하였다. 막차에 들어가서 포융복을 갖추고 홍릉(弘陵)에 나아갔다. 막차에 들어가서 최복을 갖추고 바로 능 위에 나아가서 봉심하였으며, 정자각에 나아가서 작헌례를 행하였다. 수릉관·시릉관에게 모두 자급을 더하고 참봉·충의에게도 한 자급를 더하였다. 재배례(再拜禮)를 행한 뒤에 막차에 나아가서 포융복으로 바꾸어 입고는, 고양(高陽)의 주정소(晝停所)에 나아가서 본군(本郡)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모두 석방하게 하고, 이조 좌랑 정운유(鄭雲維)를 어사(御史)로 삼아 양주(楊州)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니, 두 고을은 능원(陵園)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소녕원(昭寧園)에 나아가서 시사복으로 바꾸어 입고 원(園) 위를 봉심하였으며, 돌아와 정자각에 나아가서 제사를 행하고, 이어 재실에 들어갔다.

 

1월 27일 갑인

임금이 시사복을 갖추고 사원례(辭園禮)를 행한 다음, 재실에 들어갔다. 유생(儒生) 이원섭(李元燮)이란 자가 와서 옥대(玉帶)를 바치며 말하기를,
"저희 9대조(九代祖) 완원군(完原君)은 바로 성묘(成廟)038)  의 왕자(王子)인데, 이 옥대는 바로 성묘께서 하사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임금이 포융복을 갖추고 환궁(還宮)하였다. 하교하기를,
"작년에 두 번 능역(陵役)을 겪었고 금년에 사흘을 거둥[動駕]하였으니, 경기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마땅하다. 금년 봄 대동미(大同米)와 계유년조의 구포미(舊逋米)를 아울러 특별히 탕감(蕩減)하고, 경기 감사에게는 호피(虎皮)를 내려 주며, 지방관과 양주 목사(楊州牧使)에게는 각각 궁시(弓矢)를 주라."
하였다.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들어가서 훈련 대장·어영 대장·수궁 대장(守宮大將)을 불러들였는데,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관복(冠服)으로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대장으로 불렀는데, 어찌 감히 관복으로 입시하는가?"
하고, 잡아들일 것을 명하였다. 잡아들일 때에 선전관(宣傳官)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승지가 처음에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 때문에 그러하다. 승지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1월 28일 을묘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수어사(守禦使) 이철보(李喆輔)가 입시하여 말하기를,
"양주 목사는 한 수령이 영장(營將)을 겸한 것에 불과하며, 사율(師律)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마땅히 도신(道臣)에게 청하거나 혹은 수어사에게 장문(狀聞)하는 것이 가하거늘 감히 바로 청하였으니, 사체(事體)가 한심합니다. 파직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지극히 옳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대개 양주 목사 이익원(李翼元)이 어제 주정소(晝停所)에서 수어 아병(守禦牙兵)의 습조(習操)하는 기일을 이미 장문(狀聞)하였는데, 동가(動駕)와 상치(相値)되어 사세가 군급(窘急)함을 우러러 진달한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이철보가 이 요청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남한 산성의 승도(僧徒)로 대가(大駕) 앞에서 상언(上言)한 자를 경기 감사로 하여금 이미 결곤(決棍)하게 하였는데, 이미 군총(軍摠)에 계루하였으니, 총섭(摠攝)도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이번 습조 때에 수어사로 하여금 총섭을 결곤하게 하며, 수어사도 마땅히 검속(檢束)하지 못한 책임이 있으니, 종중 추고하라."
하였다.

 

형조(刑曹)에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는 일체 모두 풀어주게 하였다.

 

1월 29일 병진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효소전(孝昭殿)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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