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정사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초하루 제사를 친히 행하였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서 조강(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전 이조 판서 서종급(徐宗伋)에게 봉조하(奉朝賀)를 특별히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서종급이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아뢰기를,
"신은 견마(犬馬)의 나이가 지금 또 71세인데, 글을 올려 휴퇴(休退)하기를 애걸한 것이 무릇 세 차례였으나, 준청(準請)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전후에 휴치(休致)한 이가 10여 사람인데, 신은 본디 보잘것없으나 차별 없이 대우하는 은혜를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중신(重臣)이 염아(恬雅)하고 근신(謹愼)하여 이제 휴퇴를 청하는 것은 바로 만절(晩節)을 보전하는 뜻이다. 이와 같이 간절히 청하니, 경의 소원에 허부(許副)하겠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오늘 특진관 서종급이 을해년039) 경과(慶科)의 방(榜)으로 같이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이를 만하다. 염아한 지조는 이미 아는 바인데, 만절을 보전하려고 하여 치사(致仕)할 나이로 휴퇴하기를 청하니, 그 뜻이 숭상할 만하다. 곧 그 청함을 윤허하니, 무릇 여러 가지 일은 원경하(元景夏)의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종급은 근졸(謹拙)하며 다른 재능(才能)은 없으나, 염아로 자신을 지키고 부화(浮華)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문정(門庭)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년에 몸과 이름이 함께 완전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다 하면서 해마다 연달아 글을 올려 휴퇴하기를 빌었으나,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연(講筵)에 들어와서 힘써 전의 간청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그 지조(志操)를 아름답게 여겨서 특별히 허락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7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039]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종급은 근졸(謹拙)하며 다른 재능(才能)은 없으나, 염아로 자신을 지키고 부화(浮華)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문정(門庭)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년에 몸과 이름이 함께 완전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다 하면서 해마다 연달아 글을 올려 휴퇴하기를 빌었으나,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연(講筵)에 들어와서 힘써 전의 간청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그 지조(志操)를 아름답게 여겨서 특별히 허락하였다."
2월 2일 무오
유성(流星)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조재홍(趙載洪)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수원 부사 김효대(金孝大)의 아뢴 바로 인하여, 본부(本府)의 초하루 조련[朔操]을 평안도 각읍(各邑)의 예(例)에 의하여 매년 농사를 쉬는 여섯 달에 돌려가며 관문(官門)에서 조련을 행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균역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의 진달한 바로 인하여, 본청에 바칠 것을 각읍에서 만약 기한을 넘기면, 비국에서 감영(監營)의 비장(裨將)을 잡아들여 중하게 곤장(棍杖)을 치도록 명하였다.
2월 4일 경신
승지에게 명하여, 명정문(明政門) 밖에서 금위 향군(禁衛鄕軍) 시방(試放)에 입격한 사람에게 반상(頒賞)하게 하였다.
2월 5일 신유
장지풍(張志豊)·임사하(任師夏)를 승지로 삼았다.
홍계희(洪啓禧)가 효묘(孝廟)께서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에게 준 친필 어찰(親筆御札)을 사사로이 박아서 올리니, 임금이 사고(史庫)에 간직하라 명하고 홍계희에게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명하여 지춘추(知春秋) 이성중(李成中)을 체개하고 홍계희로 대신하게 하여, 강도(江都)에 가서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상고해 오도록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홍계희가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을 교정(校正)할 때에 고거(考據)할 일이 많이 있다고 하여 강도(江都)에 간직한 《실록》을 가서 열람하기를 청하였는데, 지춘추 이성중은 바야흐로 약원 제거(藥院提擧)의 직무를 띠고 있어 멀리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홍계희를 대신 보냈다. 홍계희가 재주를 자랑하고 일을 좋아하여, 무릇 국가의 전례(典禮)와 정무(政務)를 참섭하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스스로 한원(翰苑)040) 을 지내지 못하였다 하여 매양 비사(秘史)를 한번 보기를 원하다가, 이에 이르러 《실록》을 상고한다고 말하면서 이성중의 대임(代任)을 차지하기를 도모하여, 강도[沁都]에 가자 그 자제(子弟)로 하여금 사서(史書)를 전사(傳寫)하게 하였는데, 무릇 전장(典章)과 사실이 원거(援据)하기에 부당한 것을 돌아와서 주달한 것이 많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8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 출판(出版)
[註 040] 한원(翰苑) : 예문관.
사신(史臣)은 말한다. "홍계희가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을 교정(校正)할 때에 고거(考據)할 일이 많이 있다고 하여 강도(江都)에 간직한 《실록》을 가서 열람하기를 청하였는데, 지춘추 이성중은 바야흐로 약원 제거(藥院提擧)의 직무를 띠고 있어 멀리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홍계희를 대신 보냈다. 홍계희가 재주를 자랑하고 일을 좋아하여, 무릇 국가의 전례(典禮)와 정무(政務)를 참섭하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스스로 한원(翰苑)040) 을 지내지 못하였다 하여 매양 비사(秘史)를 한번 보기를 원하다가, 이에 이르러 《실록》을 상고한다고 말하면서 이성중의 대임(代任)을 차지하기를 도모하여, 강도[沁都]에 가자 그 자제(子弟)로 하여금 사서(史書)를 전사(傳寫)하게 하였는데, 무릇 전장(典章)과 사실이 원거(援据)하기에 부당한 것을 돌아와서 주달한 것이 많다고 한다."
2월 6일 임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능행(陵幸) 때에 수가(隨駕)한 무사 군병(武士軍兵)의 사방(射放) 시험에 입격한 사람에게 반상(頒賞)하였다.
청안 안집 어사(淸安安集御史) 홍경해(洪景海)가 복명(復命)하였다. 삼남(三南)의 수륙 조련(水陸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요청에 인한 것이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2월 7일 계해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유신(儒臣)과 춘방(春坊)의 관원을 소견하고, 사서(司書) 이인배(李仁培)에게 이르기를,
"지나간 해에 특명으로 6품으로 올릴 때에 마음이 곧다고 생각하였더니, 요즘 일을 보니 임금을 저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너희들이 긴 날에 직려(直廬)041) 하면서 낮잠만 일삼으니, 예전에 공자(孔子)는 꿈에 주공(周公)을 보았고,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蝴蝶]가 되었는데, 너희들은 꿈을 꾼 것이 과연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인하여 임금이 지은 경성동룡학사문(警省銅龍學士文) 한 편(篇)을 내렸다. 글에 이르기를,
"저 춘방을 보니 몇 달이나 서연(書筵)을 멈췄는가? 예전에 공성(孔聖)은 꿈에 주공을 보았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아! 제갈 양(諸葛亮)은 한(漢)나라 왕실을 일으킬 마음이 초당(草堂)의 봄 잠자던 날에 이미 있었는데, 슬프다. 춘방의 학사는 그 꿈이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유익한 벗이 셋이고 손해되는 벗이 셋이라.’고 하였는데, 아! 저 학사는 유익한 벗이 되는가, 해로운 벗이 되는가? 벙어리가 유익한 벗이 된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의 시(詩)에 이르기를, ‘순장 잉관은 참으로 우습다.[巡將剩官眞可笑]’라고 하였으니, 글 읽는 학자가 어찌하여 잉관이 됨을 마음에 달게 여기는가? 나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음을 그치지 아니하면 임금은 어찌 능히 임금이 되며, 신하는 어찌 능히 신하가 되겠는가? 밤중에 이를 생각하니, 마침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슬픈 회포를 간략하게 기록하여 동룡(銅龍) 여러 학사를 깨우쳐 살피게 한다."
하였는데, 이를 게시(揭示)하여 직려(直廬)할 때에 경성(警省)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2월 8일 갑자
한광회(韓光會)를 승지로 삼았다.
2월 10일 병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입시했을 때, 청주의 만동사(萬東祠)에 본도(本道)로 하여금 물역(物役)을 보조하라고 명하니, 이익정의 진달한 바로 인한 것이다.
2월 11일 정묘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2월 12일 무진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소견하고, 《주례(周禮)》를 읽으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丙子年)042) 의 난리는 저들이 진실로 우리를 두려워하여 온 것이고, 우리를 업신여겨서 온 것이 아니다. 애석하다! 우리 나라에 계책이 없어서 저들로 하여금 무인지경(無人之境)같이 들어오게 하였으니, 어찌 통한(痛恨)스럽지 아니한가? 지금은 2갑(二甲)이 이미 지났고, 황하(黃河)가 다시 맑아지지 아니하니,043) 나는 마침내 불충 불효(不忠不孝)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시를 짓기를, ‘어느 때에 한(漢)나라 의관을 다시 볼 것인가?[何時復覩漢衣冠]’라고 하였는데, 지난날에 저 사람들의 의관을 보고 마주 대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저들이 비록 망할지라도 몽고(蒙古)가 할 것 같으니, 몽고는 곧 원(元)나라 종족이다. 내가 일찍이 시를 짓기를, ‘모름지기 홍라(紅羅)의 한 각단(角端)044) 을 볼 것이다[須見紅羅一角端]’라고 하였는데, 대저 각단은 일이 다르다. 원나라가 마땅히 다시 들어올 것이다."
하였다.
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3일 기사
신사건(申思建)을 대사헌으로 삼고, 유언국(兪彦國)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일본(日本)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평의번(平義蕃)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향(香)을 올렸다. 대마도는 언제나 국휼(國恤)에 조차(弔差)045) 를 보내어 향을 올리고 해를 넘긴 적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올리는 침향(沈香)이 대마도 안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강호(江戶)046) 에서 구하였으나, 또한 품절되어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 산 때문에 지난 가을에 비로소 준비하여 출발하였는데, 차사의 배가 또 풍파에 표류하여 해를 지난 뒤에야 비로소 부산에 닿았다고 하였다.
2월 14일 경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망제(望祭)를 행하고, 곧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상제(祥祭)를 행하였다. 3경(三更)에 왕세자가 베로 싼 익선관(翼善冠)과 시사복(視事服)을 갖추고, 휘령전 신문(神門) 밖으로 나아갔다. 소차(小次)에 들어가서 장(杖)을 제외한 연복(練服)으로 갖추고, 위차(位次)에 나아가서 곡(哭)하며 네 번 절하였다. 소차에 나아가서 베로 싼 익선관과 시사복으로 바꾸어 입고, 나아가서 곡하며 네 번 절하였다. 임금이 베로 싼 익선관과 시사복을 갖추고, 효소전에 나아가서 제사를 행한 뒤에, 휘령전 재실(齋室)에 나아가서 연복(練服)을 갖추고 상제(祥祭)를 친히 행하였는데, 전호(殿戶) 밖에 서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왕세자는 판위(板位)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소차(小次)에 나아가서 시사복으로 바꾸어 입고 들어갔다가, 전호(殿戶) 밖으로 나아갔다. 제사를 행한 뒤에 임금이 단휘문(端暉門)에서 진전(眞殿)으로 들어갔다.
2월 15일 신미
화성(火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선원전(璿源殿) 재실에 나아가서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조명정(趙明鼎)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편집(編輯)하는 일을 신속히 마쳐서 일찍 간인(刊印)하는 것이 좋다. 이는 내가 여러 해 힘써서 공력(功力)을 쌓은 것인데, 경자년047) ·갑진년048)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처 겨를이 없었던 것을, 모두 강정(講定)하여 이제 비로소 크게 갖추었으니, 비록 중국 사람이 와서 보더라도 반드시 법을 취할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설국(設局)하기를 명하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편집함이었다.
2월 16일 임신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2월 17일 계유
명하여 홍릉(弘陵)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참봉(參奉)·충의(忠義)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가하며, 휘령전 혼전(徽寧殿魂殿)의 당상관 이하에게는 모두 말[馬]을 주게 하였다.
이성중(李成中)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효소전(孝昭殿) 소상(小祥) 뒤에 왕세자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명하니,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제 이 휘령전(徽寧殿)의 담사(禫事)는 비록 효소전의 3년 안이더라도 제사를 행할 수 없으나 담제(禫祭)에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바로 고금에 통행하는 예(禮)인데, 담제 날을 당하여 동궁 저하(東宮邸下)는 다만 마땅히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哭)하면서, 상제(祥祭) 때에 입은 참포(黲袍)를 벗고 현포(玄袍)를 입으며, 이 뒤에 평상시 있을 때는 심제(心制)049) 를 입어, 스스로 사사로운 정(情)을 펴게 해야 하는데, 만약 삭망(朔望) 제사를 당하면, 현포에서 다시 참포로 변할 수 없으니, 그대로 현포를 입고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예기(禮記)》 잡기편(雜記篇)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喪)이 있어 아직 상을 마치지 아니하였는데 어머니가 죽으면, 아버지의 상을 벗을 때에는 그 상을 벗는 옷을 입었다가, 일을 마치면 도로 상복(喪服)을 입는다.’고 하였으며, 주(註)에는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이 소상(小祥) 후 대상(大祥) 전에 있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상을 마치지 아니한 것인데,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하면 아버지 상을 벗을 때를 당해서는, 자연히 상을 벗는 옷을 입고서 대상을 행한 다음, 일을 마치면 곧 어머니의 상복을 입는다.’라고 하였고, 엄릉 방씨(嚴陵方氏)는 말하기를, ‘앞의 상에 마침[終祥]이 있음을 보인 것인데, 이는 대상 제사를 가리킨 것이다. 만약 담제(禫祭)에는 길복으로 뒤의 상 3년 안에 제사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담제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 뜻으로써 미루어 보면, 이미 3년 안에 길복을 입을 수 없는 까닭으로써 담사를 폐한다면, 담제 날 곡하며 복을 벗을 때에 곧 도로 현포를 입는 것은 예(禮)의 뜻에 방해가 있을 듯합니다. 대개 대상 때 복색은 참포를 입고 제사를 행하며, 담제 때에는 참포를 벗고 길복을 입는 것은 예의 떳떳한 것인데, 지금 휘령전의 담사는 예의 변(變)입니다. 이미 담기(禫期)가 지났는데 담기 전의 참포를 그대로 입을 수 없으며, 또 바로 길복을 입을 수 없으니, 이른바 현포·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는 비록 순길복(純吉服)은 아니라 하더라도 마침내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만약 옅게 물들인 검은 색으로 하고 베 오리도 심히 가늘지 아니하면, 그런대로 혹시 가하겠습니까? 방금 또 삼가 듣건대, 예조(禮曹)의 의주(儀註)에 ‘휘령전 상제(祥祭)의 복색은 전하와 동궁이 연복(練服)을 벗은 뒤에는 참포를 입지 아니하고 시사복(視事服)으로 제사를 행한다.’고 하니, 시사복은 바로 백포(白袍)입니다. 그러면 변례(變禮)로 임시 편의의 방도는 담제 날을 당하여 참포로 바꾸어 입고, 그뒤에 삭망(朔望)에는 그대로 참포를 쓰는 것이 또한 혹시 하나의 방법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영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담(禫)을 하고 섬(纖)050) 을 입는데, 제사할 때는 현관(玄冠)·조복(朝服)을 하고, 제사를 마치면 머리에는 섬관(纖冠)을 쓰고 몸에는 소단 황상(素端黃裳)을 입고서 길제(吉祭)까지 이릅니다. 대개 고례(古禮)에 담제에는 순길(純吉)을 입고, 제사를 마치면 미길(微吉)을 입으며, 길제에 이르면 또 순길을 입으니, 《오례의(五禮儀)》의 담제조(禫祭條)에 ‘내상(內喪)이 먼저 있으면 왕세자는 무양 적색 흑의(無揚赤色黑衣)로 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휘령전 담제는 비록 장차 행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담기(禫期)에 이르러 왕세자가 신위를 설치한 다음 현포를 입고 곡하면서 변제(變除)051) 하는 것이 저절로 고례(古禮)와 《오례의》에 합하겠으나, 가볍게 고칠 수는 없을 것으로, 그대로 현포로써 삭망제(朔望祭)를 행함에 이르러서는 심제를 가지는 데에 어긋날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연상(練祥)에서 담길(禫吉)까지 고례에는 처음부터 3년과 기년(朞年)의 구별이 없이 일체로 제도를 정하였는데, 기년에는 단지 담제 후에 심제를 가져서 3년을 마치는 것이니, 그 ‘심제’라고 이르는 것은 몸으로 복(服)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담제 후에 현포로 제사를 행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데, 만약 심제 가운데 현포를 입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여 참포를 입으면, 담제 후의 복색이 상제(祥祭) 후의 복색과 다름이 없으니, 상(祥)으로 말미암아 담(禫)에 미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포와 참포의 사이를 조절해 헤아림이 있으면, 고례의 소단 황상이 적중할 듯합니다. 하지만 그 글은 비록 알 수 있을지라도 그 제도는 지금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신이 정밀하지 못하여 억측으로 대답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고, 행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지금 이 물으심은 변례(變禮)에 매였으니, 신의 어둡고 누(陋)함으로써 엉터리로 우러러 대답할 수 없지만, 담제 복색(服色)을 반드시 미길(微吉)을 취하는 것은 차마 갑자기 길복을 입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의주(儀註) 가운데 현포를 입는다는 글은 실로 이 뜻을 취한 것인데, 이는 3년 상제(喪制)의 점차로 길복에 따라 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신은 신사년052) 의 예(例)를 알지 못하지만 역시 현포로써 경묘(景廟) 당일의 복색을 마련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 상례(喪禮)를 복고(復古)한 뒤에는 이정(釐正)하는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말하는 자가 ‘비록 담제를 행하지 아니할지라도 담제 달에 변제는 빠뜨릴 수 없다.’고 하나, 이미 현포를 썼으면 후일의 삭망(朔望)·상식(上食)에 도로 참포를 쓰는 것은 의심스럽습니다. 신의 천견(淺見)으로는 남자는 머리가 중하므로, 변제의 절차가 포(袍)에 있지 아니합니다. 관면(冠冕)의 익선관(翼善冠)은 이미 흑백(黑白)의 다름이 있고, 또 담제를 행하지 아니하므로 애초에 현포를 쓰지 아니하였으니, 참포를 그대로 쓰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듯합니다만, 주책없이 망령되게 대답하니 부끄럽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는 말하기를,
"상제(祥祭) 복색의 참포와 담제(禫祭) 복색의 현포는 바로 점차로 길복(吉服)에 따라가는 뜻입니다. 휘령전의 담제는 효소전의 3년 안이라고 하여 행할 수 없는데, 왕세자가 담제 기일을 당하여 설위(說位)하고 곡하면서 복을 벗는 것은 《오례의》를 인용하여 현포를 쓰는 것이 스스로 예(禮)에 합당하겠으나,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설위하여 곡하면서 복을 벗었는데, 상제의 복을 바꾸지 아니하면 벗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복이며, 점차로 길복에 따른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하는 자가 이르기를, ‘상제(喪制)는 마음에 있는데, 현포를 입는 것이 마침내 불안한 바가 있으면 설위하여 곡제(哭除)할 때에는 현포를 입고, 그 뒤의 삭망 제전(朔望祭奠)에는 도로 참포를 입어 심제를 마치는 것도 혹시 한 방법이 된다.’고 하니, 그 말이 정례(情禮)에는 어긋나지 아니할 듯하나, 곡제할 때에 한번 현포를 입었으면 참포는 바로 이미 벗은 복인데, 이미 벗었다가 도로 입는 것은 ‘나아감이 있고 물러감이 없다.’ 하는 바가 아닙니다. 만약 말하기를, ‘설위하여 곡하는 것은 예를 갖춘 담제가 아닌데, 바로 현포를 입는 것은 자못 너무 갑작스러운 데 가깝다.’고 한다면, 예(禮)에 이른바 ‘설위하고 곡하는 것은 중한 바가 복을 벗는 데 있다.’는 것인데, 복을 벗지 아니하면서 설위하여 곡하는 것은 아마도 의의(義意)가 없을 듯합니다. 현포·참포 사이에 만일 다른 복제가 고례(古禮)에 가합한 것이 있으면 현포를 쓸 필요가 없지만, 신은 병들어 혼미하고 학문이 거칠어 억측으로 대답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元良]의 복색은 유 영부사(兪領府事)의 헌의(獻議)에 의하여 시행하되, 평상시에 현포를 입는 것은 옳지 못하니, 담흑 저포(淡黑苧袍)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8일 갑술
필선 박성원(朴聖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궁료(宮僚)를 설치한 것은 장차 진강(進講)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저하께서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시어 바로 학문이 장차 진취할 때를 당하였는데, 강연(講筵)을 자주 정지하고 궁료를 드물게 접견하심이 그렇지 아니한 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예후(睿候)053) 가 항상 편치 못하신 때가 많음에 말미암은 것이어서 뭇 신하의 근심하고 개탄함이 진실로 이미 오래였습니다. 요사이 의관(醫官)의 전하는 말과 전날 밤 제반(祭班)의 우러러본 바로 말하더라도, 여러 가지 증형(症形)이 한결같이 덜함이 없고, 행보와 절하고 꿇어앉은 것도 심히 곤란하시니, 이런 때를 당하여 감히 예에 따라 과강(課講)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병중에 책을 보는 것은 병을 요양하는 데에 해롭지 아니하고, 와내(臥內)에서 궁료를 접견하는 것도 고례(古例)가 있습니다. 저하께서 만약 대우(大禹)가 촌음(寸陰)을 아낀 일로써 마음을 가진다면, 어찌 그 작은 여가를 이용하여 궁료를 불러 접견할 때가 없겠습니까? 이제 여러 달에 이르렀으나 한번도 들은 적이 없고, 때로 입대하기를 구함이 있었으나 번번이 또 허락을 꺼리시니 뭇사람의 심정의 억울함이 더욱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아마도 이와 같이 하고 그치지 아니하면 예지(睿志)가 날마다 퇴보되어 앞으로 진취될 가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거(起居)하고 언동(言動)하는 즈음에 비록 과실이 있을지라도 경계하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니, 장차 어디에 강관(講官)을 쓰도록 하겠습니까? 저하의 하늘이 낸 효성으로써 만약 예후가 불편하신 때가 아니면, 그 혼전(魂殿)에 아침·저녁의 전애(展哀)와 초하루·보름의 집전(執奠)에 반드시 하루도 혹시 폐하심이 없었는데, 다만 작년 겨울 이래로 은전(殷奠)054) 을 몸소 행하지 못하신 것이 또한 몇 달입니다. 이로써 보면 대내(大內)에 새벽과 밤에 문침(問寢)하는 절차도 혹시 때로 빠뜨림이 있으실까 두렵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그 진달해 힘쓰게 한 말이 심히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시강원 입직관(入直官) 심익성(沈益聖)에게 녹비(鹿皮)를 내려 주기를 명하였다. 심 익성이 입직하는 중에 마침 글을 읽었는데, 임금이 정탐해 알고는 드디어 이 명령이 있었다.
2월 21일 정축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2월 23일 기묘
이천 부사(伊川府使) 채제공(蔡濟恭)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4일 경진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서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예강 학도(禮講學徒)를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동몽에게 《소학(小學)》을 강(講)하라 명하였다. 교관 안종무(安宗茂)가 능히 가르침을 힘썼다 하여 6품에 올려 삼조(三曹)에 곧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한경(韓警)에게는 말[馬]을 내려서 칙려(飭勵)한 뒤에, 예강(禮講)을 아직 행하지 아니한 전후 예조 당상을 중추(重推)하였다.
이이장(李彛章)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6일 임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자, 좌상(左相)·우상(右相)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아까 혈변(血便)을 보았는데, 이는 대개 마음을 써서 그러한 것이다. 경 등은 모름지기 이 뜻으로써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를 청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왕세자가 관의합에 나가 앉자 약방에서 입진하고, 좌상·우상이 청대(請對)하여 입대(入對)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아까 대조(大朝)의 성후(聖候)가 불편하시다는 하교를 듣고 의관(醫官)을 불러 입진하기를 우러러 청하였으나, 성교(聖敎)가 윤허하지 않으시니 진실로 몹시 민망스럽고 박절합니다. 저하께서 바야흐로 조리(調理)하시는 중에 계시므로 서연(書筵)을 달이 지나도록 오래 정지하였으니, 대조께서 사랑하시는 성심(聖心)으로써 이 엄한 하교가 계시어 감히 와서 입대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상시(常時)에 소대하는 책자(冊子)를 가지고 들어오라."
하였다. 편수관(編修官) 심익성(沈益聖)이 책자를 가지고 들어오니, 하령하기를,
"이제 바야흐로 대조(大朝)께 문후(問候)하려 한다."
하였다.
임금이 거려청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하고, 우상(右相) 신만(申晩)이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과연 입대하기를 청하였으면, 동궁의 하령을 무엇이라고 하던가?"
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이 청대하여 성후(聖候)의 편찮으신 사유를 갖추어 진달하니, 저하가 크게 놀라서 바야흐로 친히 와서 문후(問候)하려고 하였으며, 소대도 곧 하령할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후에 왕세자가 들어와서 뜰 밑에 부복(俯伏)하고 관(冠)을 벗었다. 임금이 보덕(輔德)을 부르라 명하고,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세자와 함께 들어오게 하니, 세자가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지금 이와 같이 하니, 우리 나라가 그대로 되겠다."
하고, 인하여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이제 동궁을 보니, 내 마음이 후련하다."
하였다.
휘령전(徽寧殿) 담제(禫祭) 후에 음악을 쓰는 일을 수의(收議)하니, 봉조하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무릇 상(喪)에 있어 담제 후에 보통 제사와 같이 음악을 쓰는 것은 예(禮)의 상경(常經)이고, 내상(內喪)이 먼저 있어서 담제 후에도 오히려 조석 상식(朝夕上食)을 행하는 것은 예의 권도(權道)인데, 어찌 권도로 인하여 상경을 폐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논자(論者)의 말로서 진실로 고집스러운 바가 있으나, 또한 그러하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이날에 곡(哭)하면 노래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남은 슬픔을 잊지 못함인데, 하물며 같은 궁전 안에서 한편에서는 곡하고 한편에서는 음악을 쓴다면 이같은 예문(禮文)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예의 뜻으로 말하면, 담제 후에 비록 상식을 그대로 행한다 하더라도 곡하지 아니하고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큰 제사에 이르러서는 사체가 상식에 비하여 더욱 중한데, 더욱이 곡하면서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음악을 쓰지 아니할지라도 곡하지 아니함으로써 의주(儀注)를 마련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상식과 대제를 모두 곡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마련하면, 대제에 음악을 쓰는 것이 불가하지 아니할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 예에 3년을 장가들지 아니하는 것은 달자(達子)055) 의 뜻인데, 일은 비록 같지 아니하더라도 예는 방조(旁照)할 만합니다. 왕세자는 아직 심제(心制)를 가졌으니, 27개월을 한정하여 본전(本殿) 큰 제사에 잠시 악을 쓰지 말고, 27개월을 지낸 뒤에 예에 의하여 음악을 쓰는 것이 아마도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신이 젊을 적에 일찍이 고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의 문집(文集) 중에, 영소전(永昭殿) 담제 후에 음악을 쓰는 의논을 보았는데, 그 대강의 요지를 말하면, ‘담제 뒤에 상식하는 것은 한때의 권의(權宜)이고, 상을 마치면 음악을 쓰는 것은 선왕(先王)의 제도이므로 음악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끝에 가서 처분이 과연 어느 것을 따랐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일찍이 그 말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장기(杖期)의 제도는 연제(練祭)로부터 상제(祥祭)에 이르고 상제로부터 담제(禫祭)에 이르므로, 복(服)을 이미 벗었으니 3년의 제도를 이미 마쳤습니다. 능전(陵殿)에 상식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단지 권의에서 나온 근래의 예(例)로서, 고례(古例)가 아니고 국전(國典)도 아닌데, 어찌 이로 인하여 고례와 국전에 실린 담제 후의 큰 제사에 음악을 쓰는 것을 갑자기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는 말하기를,
"삼가 영소전 담제 후에 음악을 씀에 있어 여러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의 헌의(獻議)를 보니, 담제 후의 상식은 한때 권의의 제도에서 나온 것인데, 예전에 이른바, ‘예(禮)에 없는 예’ 입니다. 큰 제사에 음악을 쓰는 것은 바로 제례(祭禮)의 떳떳한 것인데, 아마도 한때의 권의로써 그 떳떳한 예식을 폐할 수 없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음악을 쓰는 것은 과연 어렵다. 김 봉조하(金奉朝賀)도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세 대신은 모두 음악을 쓰는 것은 대경(大經)이 된다고 하니, 이는 예조 당상이 이긴 것이다."
하였다. 승지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세 대신뿐만 아니라, 고 상신 김수항·민정중과 선정신 박세채도 일찍이 선조(先朝)의 수의 때에 역시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여러 대신은 예관(禮官)의 말을 듣고 또 옛 상신의 수의를 보았는데, 외면으로 갑자기 보면 이 말을 하는 것이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지금 이 음악을 쓰라는 말은 마침내 행할 수 없는 일이니, 한편으로는 곡(哭)을 행하고 한편으로는 음악을 쓰는 것은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아도 형세가 불가합니다. 또 전(殿)을 혼전(魂殿)이라 일컫고 능(陵)을 산릉(山陵)이라 일컬으며,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이 모두 아직 있는데, 음악을 쓰라고 하는 것은 어찌 말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상식례(上食禮)와 수릉관·시릉관을 파한 연후에야 음악을 쓸 수 있습니다. 예관이 반드시 음악을 쓰려고 하면, 먼저 이 예(禮)를 다투어야 음악을 쓰기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신만(申晩)은 말하기를,
"이미 상식을 파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를 아울러 행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식을 행하고 음악을 쓰는 것은 내 생각으로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은 《오례의》에 의하여 먼저 정지한 연후에 음악을 쓸 것이다. 상식의 정지 여부를 마땅히 《보편(補編)》에 이정(釐正)하여 휘령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로써 다시 문의(問議)할 것이며, 상식을 정지하지 아니하면, 담제 후에 관원을 보내어 섭행(攝行)할 때에는 제복(祭服)을 입고, 왕세자가 섭행할 때에는 아헌(亞獻) 이하가 길복(吉服)을 입는 것을 일체로 문의할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5월 후에는 여러 신하가 이미 효소전의 복(服)이 없고, 또 휘령전의 담월(禫月)이 지났으니, 천담복(淺淡服)을 입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 생각은 무양 흑단령(無揚黑團領)으로 제사를 행함이 가할 듯하다. 이를 또한 문의하라."
하였다.
2월 27일 계미
권혁(權爀)을 대사헌으로, 임위(任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보덕(輔德) 이익성(李益聖)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 춘추가 정성(鼎盛)하시고 혈기가 방장(方壯)하시니 바로 대우(大禹)의 촌음(寸陰)을 아낄 때를 당하였는데, 연달아 예후(睿候)가 편치 못하심으로 학업을 닦지 못하고 서연(書筵)을 폐한 지 오래 되어 개강(開講)할 기약이 없습니다. 질병이 오는 것은 성인(聖人)도 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비록 성장(盛壯)한 나이에 있을지라도 한때의 건강이 좋지 못함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오나 해를 지나도록 미류(彌留)하시고 달을 지나도록 학문을 폐하시며, 궁료(宮僚)의 계달한 말에 혹시 사이를 기다려서 불러 보겠다는 비답을 받았으나 마침내 형식으로 돌아가고, 의관(醫官)의 입진이 약을 쓰지 않고도 병이 낫다는 기쁜 소식은 듣지 못하며 매양 같은 양상을 전하니, 아! 궁중의 주선 언동(周旋言動)하는 절차는 비록 외정(外廷)에서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나, 혹시 예효(睿孝)가 하늘에 뛰어나서 상중(喪中)의 슬퍼하시고 외로워하시는 중에 있으신 지 이미 일기(一朞)를 지났으니, 부르짖으며 애모(哀慕)하시는 즈음에 스스로 손상하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시고, 깊숙한 곳에 한가로이 계시는 가운데 혹시 성인(聖人)의 병을 삼가는 방법을 잃어서, 뒤척이며 오래 끌어 쉽게 평상을 회복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이제부터 날씨가 따뜻해지고 낮시각이 바야흐로 길어지니, 마땅히 신기(神氣)가 소성(蘇醒)할 때와 아침과 낮의 청명한 즈음에 궁관(宮官)을 불러 접견하시어 경사(經史)를 강설(講說)하되, 그 예수(禮數)056) 를 간략하게 하고 그 연중(筵中)의 체통을 버려서, 혹은 베개에 기대어 읽는 것을 들으시며 혹은 읽으심을 인하여 의심스러움을 물으시기도 하여, 연묵(淵默)을 숭상하지 마시고 대화를 활발히 하시면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공부가 기대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이를 것이며, 오랜 병환이 몸에서 없어짐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대조(大朝)께서 30여 년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 거룩하신 덕과 큰 업적이 밖으로는 팔방(八方)의 이목(耳目)에 퍼져 있고, 안으로는 수많은 간편(簡編)에 밝게 실렸으니,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을 바인데 어찌 다른 데에서 구하겠습니까? 밤에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에 문안하시는 때에 저절로 귀에 젖고 눈에 물들어서, 호령(號令)을 내려서 시행하며 어진이를 올리고 간사함을 물리치는 일동 일정(一動一靜)과 일언 일행(一言一行)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곧 법으로 삼으면, 훈도(薰陶)의 빠름과 젖고 물듦의 쉬움은 진실로 구구(區區)한 강설(講說)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음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가정 사이에서 몸으로 가르침이 쉽게 들어감을 말한 것입니다. 또 학문의 공부는 오로지 글을 읽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조(先祖)를 받들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학문이 아님이 없으며, 사물을 접하고 일에 응하는 것이 학문이 아님이 없습니다. 음식을 대하면 학문이 여기에 있고, 잠자고 누움을 당하면 학문이 여기에 있으니, 단지 한 마음을 잡고 버림에 있을 뿐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어지는 것은 오직 마음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이번 복색(服色) 일절(一節)은 어제 이미 대조(大朝)께 품정(稟定)하였는데, 효소전(孝昭殿) 제사에 참여할 때와 대조에 나아가서 뵐 때에는 참포(黲袍)로 정하였고, 휘령전(徽寧殿) 제사에 참여할 때에는 흑포(黑袍)로 정하였으며, 법강(法講)에는 천담복(淺淡服)으로 하고 차대(次對)에는 흑립(黑笠)·흑대(黑帶)·백도포(白道袍)로 하였으며, 《오례의(五禮儀)》에 상제(祥祭) 후에는 곡(哭)이 없는데, 이번에는 바깥 뜰에서 참제(參祭)하는 백관(百官)은 곡이 없으나 근시(近侍)와 아헌관(亞獻官) 이하는 따라 곡하게 하였습니다. 휘령전만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효소전의 상제 후 담제(禫祭) 전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 뜻으로 어제 이미 정탈(定奪)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승지가 입시하자,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의 주연(胄筵)057) 은 바로 법연(法筵)이고 비국의 차대(次對)는 나라의 중한 일인데, 이제 약원(藥院)에서 듣건대, 관의합에서 행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입진·소대와는 차이가 있으니, 결단코 와합(臥閤)에서 행할 수 없다. 주연과 차대는 모두 덕성합(德成閤)에서 하도록 하라. 세자의 시민당(時敏堂)은 나의 정전(正殿)과 같으니, 심제(心制) 전에는 인하여 이 합(閤)에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달 만에 개연(開筵)하고 차대했다는 보고를 들으니, 비록 차[茶]를 마실지라도 마음은 조금 열린다. 앞으로 이를 그치지 아니하면 우리 나라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아! 춘방(春坊) 요속(僚屬)은 이와 같이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전과 같이 함묵(緘默)하지 말고 세자를 보도(輔導)하라. 만일 다시 태만하고 소홀하게 한다면, 한갓 세자의 허물만이 아니라 강원(講院)의 요속도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앞으로 이 하교 한 건(件)을 써서 세자에게 들이고, 한 건은 강원의 벽에 붙여서 서로 힘씀을 삼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자, 승지가 입시하였다. 주서(注書) 정창순(鄭昌順)에게 이르기를,
"사책(史冊)은 비록 볼 수 없으나, 차대의 조목은 약간 듣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무슨 일인가?"
하니, 정창순이 대답하기를,
"우상(右相)은 강원 감사가 장문(狀聞)한 강릉(江陵)의 불탄 곡식에 대하여 탕감(蕩減)해 주지 말자고 하였고, 경상 병사가 장문한 통영(通營)의 이획곡(移劃穀)에 대하여 서로 반씩 취해 쓰자고 하였으며, 불참(不參)한 대신(臺臣)을 파직시키자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이라고 하답(下答)하던가?"
하니, 정창순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고 하령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바는 어떤 일인가?"
하니, 정창순이 말하기를,
"유신 홍양한(洪良漢)이 힘쓰고 경계할 것을 진달하였는데, 대체는 ‘어제 소대(召對)와 오늘 빈대(賓對)는 오래 폐한 나머지에 나왔으니, 신민(臣民)이 기뻐하기를 상서로운 별[景星]과 경사스러운 구름[慶雲]을 본 것과 같습니다.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오늘날 마음을 확충하여 유구(悠久)한 공부로 삼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말하지 아니한 것은 상서로운 별과 경사스러운 구름을 보지 아니해서 그러한 것인가? 이미 본 뒤에는 진달한 바가 이에 그칠 뿐인가? 대신(臺臣)도 진달한 바가 있었는가?"
하니, 정창순이 말하기를,
"장령(掌令) 이수일(李秀逸)의 소회(所懷)는 대체로 유신의 뜻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답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니, 정창순이 말하기를,
"‘각별히 깊이 유념하겠다.’라고 하답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이 좋은 기회이다. 이는 바로 여러 신하가 붓을 뽑아서 바르게 말할 때인데 초초(草草)하게 진달하였으니, 진실로 심히 개탄(慨嘆)스럽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유신(儒臣)·헌신(憲臣)의 말한 바는 내가 오늘날에 바라던 바가 아니다. 삼사(三司)의 신하가 골경(骨鯁)058) 이 없음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원량(元良)을 널리 열어서 대하는 뜻이겠는가? 수찬 홍양한(洪良漢)과 장령 이수일(李秀逸)을 아울러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재실(齋室)로 들어가서, 시임·원임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을 소견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상식(上食)은 근래에 정(情)에 따르는 권례(權禮)059) 이고, 악(樂)을 쓰는 것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행한 대경(大經)060) 인데, 만약 이제부터라도 시작하여 상식을 없애고 《보편(補編)》에 싣는 것은 신의 생각에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갑자기 개정할 수 없으며, 순문(詢問)을 내리심에 미혹한 소견은 이와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뜻은 과연 음악을 쓰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산릉(山陵)에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이 있고, 혼전(魂殿)에는 곡(哭)이 있어서, 낮에 제사를 행하면 곡하고 밤에는 음악을 쓰면 어찌 이같은 정례(情禮)가 있겠는가?"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비록 상식이 있을지라도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산릉은 사체가 다름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말하기를, ‘만약 상식을 걷고 음악을 쓰면, 의당 심제(心制)가 탕연(蕩然)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진실로 옳다."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어찌 탕연함에 이르겠습니까? 또 예문(禮文)이 번쇄(繁瑣)하여 고례(古禮)를 일일이 모두 회복할 수 없으니, 큰 것만 들고 작은 것은 논하지 마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보편》은 바로 연구하여 하나도 빠짐이 없는 데 이르렀으나, 다만 이 한 가지 일은 그대로 두어 논하지 말고 잠시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경례(經禮)를 고집함은 진실로 귀중하나, 내 마음은 아직 의혹된다. 낮에 상식하고 밤에 악을 쓰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반드시 신사년061) ·경신년062) 의 예(例)로써 행하는 것이 가합니다. 담제(禫祭) 후에 곡(哭)을 그치는 것이 마땅한데, 이번에 담제 후의 곡은 예(禮)의 뜻을 잃었습니다."
하였다.
대신(大臣)이 헌의(獻議)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담제 후 3년 안의 조석 상식(朝夕上食)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단지 권제(權制)이고 고례(古禮)에 어긋남이 있으니, 이제부터 개정하는 것이 불가하지 아니합니다만, 다만 생각건대, 국가에서 비록 수하(手下)의 상(喪)이라 하더라도 또한 3년을 상식한 것이 있으니, 효순(孝純)·의소(懿昭)와 같은 경우에도 오히려 그대로 상식을 하였는데, 수 백년 준행(遵行)한 고례(古例)를 어찌 감히 휘령전(徽寧殿)으로부터 시작하여 단정해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전의(前議) 가운데, ‘곡하지 아니하고 행한다.’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내상(內喪)이 앞에 있고 담제 후 3년 안에 큰 제사 때,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한가 아니한가에 이르러서는, 상식을 행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과 곡하고 곡하지 아니하는 데 얽매이지 아니합니다. 선왕(先王)의 제정한 예(禮)에서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복(服)은 비록 낮출지라도 심제(心制)를 허락한 것은 아들의 뜻을 이루게 하는 의미입니다. 27개월을 한(限)하여 음악을 쓰지 아니하는 것은 단연코 옳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내상(內喪)이 먼저 있으면 담제(禫祭) 후에 음악을 쓰고 왕세자의 복색을 무양 적색 흑단령(無揚赤色黑團領)·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정한 것은, 오히려 심제(心制)를 온전히 없애지 못하는 뜻입니다. 몸에 순길(純吉)의 복색을 입지 아니하였는데, 이에 도리어 음악을 써서 행사하면, 예(禮)와 이(理)에 합당하겠습니까 아니하겠습니까? 복색과 음악이 크게 모순(矛盾)되지 아니하겠습니까? 경신년 국휼(國恤)063) 때에 여러 대신(大臣)과 유현(儒賢)이 모두 음악을 쓰는 것이 옳다고 한 것은, 그때에 국가에는 심제(心制)를 가진 세자[儲位]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담제 후에 모든 일을 길례(吉禮)를 쓰는 상례(常禮)만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경신년의 대신과 유현이 역시 신사년 국휼(國恤)064) 을 당하였으면, 그 헌의한 바가 혹시 다름이 있었을 듯합니다. 담제 후에 여러 신하의 복색은, 관원을 보내어 섭행(攝行)할 때에는 제복(祭服)을 입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나, 왕세자가 섭행할 때는 세자가 이미 면제(冕祭)의 상복(常服)을 아직 회복하지 아니하였는데 제관(祭官)만 감히 홀로 제복을 입을 수 없을 듯하니, 무문 흑단령(無紋黑團領)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천담복(淺淡服)은 상하(上下)와 경중(輕重)의 차례를 잃으니 아마도 불가할 듯합니다."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상제(祥祭) 뒤에 상식은, 선정신 송시열의 의논에 이르기를, ‘이미 대상(大祥)이라고 하면 상제 후에 상식하는 것은 예의(禮意)에 어긋난 듯한데, 영소전(永昭殿)에 이 예(禮)를 그대로 행하는 것은 어떠할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며, 선정신 박세채(朴世采)의 의논에 이르기를, ‘담제를 지낸 뒤에 산릉(山陵)의 곡위(哭位)와 혼전(魂殿)의 상식은 모두 한때의 권의(權宜)에 따른 방도에서 나온 것이니, 바로 예전에 이른바, 「예(禮)에 없는 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상제 후의 상식은 두 선정신의 뜻이 모두 멈추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니, 이에 신의 구구한 소견으로는 비록 고례(古禮)가 아니고 또한 국전(國典)이 아니라 하더라도, 열조(列祖)의 행하였던 바는 안신제(安神祭)의 유(類)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상식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비록 권제(權制)라 하더라도 행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는데, 이제 일체를 고례라 하여 폐지하려는 것은 또한 감히 의논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대저 거행함이 있으면 폐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예(禮)이기 때문입니다. 담제 후에 제사하는 복색에 이르러서는 헌관(獻官)이 섭행(攝行)하면 자연히 제복(祭服)을 갖추고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패옥(佩玉)을 뒤에 늘여뜨리는 것이 순길(純吉)이냐를 의심하여 물었는데, 《전(傳)》에 이르기를, ‘담제(禫祭)에는 섬세(纖細)한 것으로 하며 차지[佩]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담제의 제주가 차지 않는 것이 없으면, 담제 후에 섭사(攝事)하는 제관(祭官)이 순길의 복색을 차림은 의심이 없으며, 왕세자가 섭행하면 아헌관(亞獻官) 이하가 마땅히 무양 흑단령으로 행사하라는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윤당(允當)하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내상이 먼저 있을 때에, 혼전 상제(魂殿祥祭) 뒤에 그대로 상식을 행하여 3년을 마치는 것은 이미 고례와 국전에 어긋남이 있으니, 지금에 이르러 개정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겠으나, ‘거행함이 있는 것은 감히 폐하지 못한다.’는 의리로써 헤아려 보건대, 혹시 미안할 듯합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내상이 앞에 있으면, 혼전·산릉의 우제(虞祭)로부터 조석 상식(朝夕上食)과 사시 대향(四時大享)까지 왕후(王后)의 신좌(神座)를 아울러 설치하여 각각 예찬(禮饌)을 올리는 것은 역시 《오례의》에 실려 있는데, 어느 조(朝)로부터 정지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인조 대왕(仁祖大王) 대상(大喪) 때에 선정신 김집(金集)의 말한 바로 인하여 그쳤다.’고 합니다. 대개 오래고 가까움을 물론하고, 《오례의》에 실려 있는 바이고,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행한 바를 또한 이미 예(禮)에 어긋난다고 하여 정지하였으니, 지금 이 상식의 일단(一段)을 《보편》에 개정하는 것은 불가함이 없을까 합니다. 길복(吉服)과 제복은 경중이 조금 다르니 5개월 후 휘령전 대제에 왕세자가 섭행할 때에 헌관 이하의 복색은 무양 흑단령을 쓰라는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마땅하며, 관원을 보내어 섭행할 때에는 헌관 이하가 제복을 입는 것은 또한 의의(意義)가 있으니, 고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2월 28일 갑신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고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한식제(寒食祭)를 친히 행하였다. 제사를 파한 뒤에 익선관(翼善冠)과 시사복(視事服)을 갖추고,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제사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아직 정섭(靜攝) 중에 있으므로 아헌례(亞獻禮)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의 춘추(春秋)가 이미 높은데, 예(禮)를 친히 행함이 심히 경건하여 무릇 삭망(朔望)의 조포전(朝哺奠)에 혹시라도 섭행을 명함이 없었고, 만일 몸이 불편할 때가 아니면 반드시 몸소 친히 행하며, 제사에 임하는 저녁에는 경건한 정성으로 미리 재계하였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을 신료(臣僚)들이 감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보호하는 신하가 매양 성궁(聖躬)에 손상이 있을 것을 말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듣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1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사학(史學) / 의생활(衣生活)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의 춘추(春秋)가 이미 높은데, 예(禮)를 친히 행함이 심히 경건하여 무릇 삭망(朔望)의 조포전(朝哺奠)에 혹시라도 섭행을 명함이 없었고, 만일 몸이 불편할 때가 아니면 반드시 몸소 친히 행하며, 제사에 임하는 저녁에는 경건한 정성으로 미리 재계하였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을 신료(臣僚)들이 감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보호하는 신하가 매양 성궁(聖躬)에 손상이 있을 것을 말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의 담제(禫祭) 후에 음악을 쓰는 것을 정지하기를 명하고, 친히 윤음(綸音)을 지어 《보편(補編)》에 싣게 하였다. 이때 휘령전 담기(禫期)가 장차 가까워 오는데 담제 후에는 음악을 쓰는 것이 법에 마땅하나, 임금이 3년상을 마치지 아니하였는데 갑자기 음악을 쓰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명하였는데, 모두 일치하지 아니하였으나, 오직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그 불가함을 힘써 말하여 임금의 뜻과 같으므로 드디어 정지하기를 명하고, 영구히 정제(定制)로 삼은 것이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았는데, 좌의정·우의정과 어영 대장 홍봉한이 청대(請對)하여 입대(入對)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면유(勉諭)의 어제(御製)와 구주(口奏)를 우러러 진달하였는데, 대개 정서(正書)하여 가지고 오라는 뜻이었다.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이것을 읽자, 김상로가 조목의 순서에 따라 부연(敷衍)하여 진달하고, 우의정 신만(申晩)이 문의(文義)를 교진(交陳)하고 겸하여 힘쓸 것을 진달하니, 왕세자가 고쳐 앉으며 옷깃을 거두고, 혹은 엎드려서 탄식하며 소매로 눈물을 닦기도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대조(大朝)의 면유가 간측(懇惻)함이 이와 같고, 구주(口奏)가 또 이처럼 간절하니, 저하가 보답할 바를 범연히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지금 정신이 망연(惘然)하여 글을 입으로 불러서 쓰기가 어렵다."
하고, 인하여 울먹이면서 영(令)을 내리기를,
"이 어제(御製)를 보니, 황송하고 감읍하여 실로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다. 이는 모두 나의 죄이다. 오직 원하건대, 이제부터 이 뒤로는 마음을 다해 받들어 행하여 지극하신 사랑과 지극하신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려고 하니, 이 밖에 달리 우러러 답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삼가 마땅히 성상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 오늘의 이 어제는 다른 어제와 다름이 있으니,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첩(帖)을 만들어 들이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받들어 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휘령전(徽寧殿)에 악(樂)을 정지하는 윤음(綸音)을 써서 내리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15월의 담제(禫祭) 후, 3년 안에 음악을 쓰는 것이 옳은지 않은지를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하니, 서로 의견이 어긋나서 아직 일치하지 아니한다. 상경(常經)을 주장하는 의논과 심제(心制)를 중히 여기는 의논은 모두 각각 근거가 있고 또 두고 논하지 말라는 의논도 있다. 아! 경자년065) 이후로 한(漢)·당(唐)의 누습(陋習)을 씻고 3년의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나도 성상의 뜻을 우러러 체득하여 무신년066) 이후로 기공(朞功)067) 의 제도를 모두 개정하여 장자(長子)의 상(喪)을 회복함에 이르게 되어, 《상례보편(喪禮補編)》의 수찬을 명하였으나, 이같은 중대한 절차를 만약 보지 아니하고 듣지 아니하면 이것이 어찌 이 책을 만드는 뜻이겠는가? 이 마음이 경경(耿耿)068) 하였는데 제사를 행한 후에 홀연히 크게 깨달았다. 무엇인가 하면, 《대학(大學)》의 경(經) 1장에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사물(事物)은 본말(本末)이 있다.’고 하였으니, 전중(殿中)에서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한가의 여부는 바로 그 근본이고, 3년 안에 음악을 쓰는지의 여부는 바로 그 여줄가리이다. 아! 명년에 부묘(祔廟)한 뒤에는 문정전(文政殿)이 장차 휘령전(徽寧殿)이 될 것이다. 만약 혹시 오향(五享)에 친림(親臨)하여 전중(殿中)에 들어가 보면 황연(怳然)히 척강(陟降)이 임한 것과 같을 것이니, 경자년의 미칠 수 없는 회포를 추억하건대, 어찌 차마 이 전(殿)에 음악을 쓰겠는가? 혹시 말하기를, ‘이는 옛 법인데 어찌 가볍게 의논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아니하다. 아! 내가 당한 바는 왕첩(往牒)에 없는 바이다. 한 몸으로 네 번 최복(衰服)을 입었고 1년 안에 두 번 최복을 입었으니, 이 마음으로 그 음악을 이 전(殿)에서 억지로 쓰면 마음에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선왕(先王)의 제정한 예(禮)를 감히 넘을 수 없다. 예는 절차가 있음을 옛사람이 또한 말하였으니, 내가 비록 배우지 못하였을지라도 어찌 무한(無限)한 정(情)으로써 마땅히 행할 예를 소홀히 하겠는가? 대저 영희전(永禧殿)의 사체가 얼마나 중한데도 오히려 음악을 쓴 일이 없으며, 또 이 전(殿)은 부묘하기 전에는 바로 한 왕후의 혼전(魂殿)인데, 이미 변두(籩豆)의 설치가 없고 또 육일(六佾)의 무(舞)가 없으며 팔음(八音) 가운데 금·석(金石)도 결(缺)하였으니, 억제하기 어려운 회포를 억제하고 충만하지 못한 음악을 행하면, 마음에 어떠하겠는가? 선정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이 옛날에 헌의(獻議)한 것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 논의라고 이를 만하고, 선정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헌의는 비록 개진(開陳)이 은밀하나 뜻은 볼 수 있는데, 이제 만약 근본을 바르게 하면 3년 안에 음악을 쓰는 것은 자연히 논할 것 없는 가운데에 있으니, 어찌 두고 논하지 아니하는 것보다 낫지 아니하겠는가? 아! 선정이 옛날에 올린 헌의를 오늘에서 행하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크게 깨달은 바이다. 그 문의(問議)한 바를 모두 버리고 일체 문정공의 헌의에 의하여 시행하기로 《보편》에 싣는다. 혹시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바를 지금 정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써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아니하다. 시왕(時王)의 제도가 고금이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오례의》에 실린 것을 지금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많다. 이는 바로 부묘한 뒤에 음복(飮福)과 회가(回駕)할 때의 나례(儺禮)·진향(進香)·지화(紙花)·전후부 고취(前後部鼓吹)의 유(類)인데, 혹은 성조(聖祖)의 명한 바이고 혹은 성고(聖考)의 하교한 바이다. 《오례의》는 《오례의》이고 《보편》은 《보편》인데, 무엇이 본의(本儀)에 방해로움이 있겠으며, 또한 무엇이 옛 글을 산삭한 혐의가 있겠는가? 오늘 이후로 《보편》이 저절로 원만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2월 29일 을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홍경해(洪景海)를 소견하고,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었다. 인하여 수령이 직접 농경(農耕)을 권장하지 아니한 자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게 하였다.
2월 30일 병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불러서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의 춘추(春秋)가 거의 칠순(七旬)을 바라보며 또 이미 대리(代理)를 시켰는데도, 오히려 차대(次對)·강경(講經)의 규정을 정하여 달마다 반드시 궐함이 없고 경연(經筵)에 임하여 묻고 토론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뭇 신하가 감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82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의 춘추(春秋)가 거의 칠순(七旬)을 바라보며 또 이미 대리(代理)를 시켰는데도, 오히려 차대(次對)·강경(講經)의 규정을 정하여 달마다 반드시 궐함이 없고 경연(經筵)에 임하여 묻고 토론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뭇 신하가 감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원경렴(元景濂)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다. 원경렴은 일찍이 음관(蔭官)이 되어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잘 바쳤으므로 발신(發身)하였는데, 사람됨이 각박하고 가혹하여 행실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바로 적신(賊臣) 이명언(李明彦)의 딸이다. 원경렴이 그 집에서 보호해 길러졌는데 을해년069) 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서 이명언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하였으나, 그 아내가 이미 죽어서 법이 이혼(離婚)에 해당되지 아니하였는데도 원경렴이 그 자신에 누(累)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미 죽은 아내를 구태여 내치니, 세상에서 모두 그 사람됨을 박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일찍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입었으며, 임금이 비록 죄주지 아니하였으나 마음으로는 미워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대신(大臣)이 그를 쓸 만하다고 힘써 추천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등제(登第)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비로소 이 관직에 제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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