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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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해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 친히 제사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3월 3일 기축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은 마음이 황단(皇壇)070)  에 있으니, 정성을 다해 재계(齋戒)하고 목욕하는 뜻을 입직(入直)한 주서(注書)로 하여금 우의정에게 전하게 하라."
하였다.

 

3월 5일 신묘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가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전번에 대조(大朝)께서 차대(次對)가 너무 초초(草草)하다는 것을 하교하셨는데, 오늘 차대에 삼사(三司)에서 한 사람도 들어와 참여하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영(令)을 내려 신칙하면 반드시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공조 참판이 침구(針灸)로써 말미를 받았기 때문에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70년 전에 한번 종2품이 침구로 정사(呈辭)한 일이 있었다고 하나, 이는 그때에 살피지 못한 정사에 불과합니다. 이 뒤로 정경(正卿) 이외에 침구는 법을 정해 받아들이지 말고, 남태혁(南泰爀)의 정사는 물시(勿施)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3월 6일 임진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는데, 좌의정·우의정이 입시하고 왕세자가 헌밑[軒下]에 입시하였다. 임금이 필선(弼善) 김광국(金光國), 사서(司書) 남기로(南綺老)에게 이르기를,
"춘방(春坊)이 와서 대신(大臣)의 뒤에 섰으니, 이는 좋은 기회이다. 이때를 잃지 말고 자주 경계할 것을 진달하는 것이 가하다. 오늘날의 일은 오로지 너희들만 믿으니, 날마다 나아가서 규간(規諫)하여 국가를 저버리지 말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하니, 김광국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이 감히 힘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세자에게 구대(求對)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가 앉았는데, 좌의정·우의정이 입대(入對)하였다.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승지(承旨)는 글로 쓰라. 근래에 기(氣)가 올라가는 증세가 때로 더 심함이 있어 작년 가을의 사건까지 있었는데, 이제 성상께서 하교하신 처지에 삼가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나간 일을 뒤따라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고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내관(內官) 김한채(金漢采) 등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후하게 거행하여 나의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춘방관(春坊官)이 비록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너그럽게 용서하여야 될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제주(濟州) 백성들을 불러 보았다. 이때 제주 백성이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로 서울에 올라온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불러들여서 그 곳의 연사(年事)와 작년 진정(賑政)의 득실(得失)을 물었다. 이보다 먼저 섬 백성이 굶주림을 고하였는데, 임금이 근심하기를 마지 아니하여 특별히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보내어 곡식 만여 석을 옮겨서 구호하니, 일도(一島)의 백성이 힘입어서 온전히 살아났다.

 

3월 7일 계사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좌의정·우의정이 입시했을 때에 하교하기를,
"이제 세자의 하령을 보니, 슬프고 가엾음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여섯 사람에게 판(板)071)  을 주고 베를 주어, 해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간검(看檢)하여 매장하게 하며, 그 처자(妻子)는 후하게 돌보아 주어 자신에 한하여 복호(復戶)072)  해 주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가 앉았는데, 승지가 입대(入對)하였다.

 

3월 8일 갑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서 친히 제사를 행하였다.

 

3월 9일 을미

회가(回駕)할 때에 양정재(養正齋)에 역림(歷臨)하였다. 양정재는 바로 조학천(趙學天)의 집인데,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여기에서 탄생하였다. ‘어제 양정재기(御製養正齋記)’를 친필(親筆)로 써서 판(板)을 걸기를 명하였다. 조학천을 승서(陞敍)하고 조명욱(趙明勗)을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며, 사재감 계(司宰監契) 동인(洞人)들에게 복호를 3년 동안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어떤 사람이 손에 상언(上言)을 가지고 땅에 엎드린 것을 보고는, 승지에게 명하여 가져와서 읽게 하였는 바, 바로 상미전(上米廛) 사람인데, 본서(本署)073)  의 제조(提調)가 지금 형조(刑曹)로 옮겨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게 한 때문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해 서로 다투는 것을 시원스럽게 재절(裁節)하였으니, 이미 평시서(平市署)의 뜻이 아니다. 경조(京兆)와 법조(法曹)074)  가 있으니, 본서에서 좋아함과 미워함에 따라 하도록 일체 맡겨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물며 장 1백, 도 3년은 법조의 넓히고 좁힘에 있는데, 한 서(署)의 제조가 어찌 감히 법률을 쓰겠는가? 해서(該署)의 제조 윤급(尹汲)을 특별히 파직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조의 사람됨이 좁다. 이 같은 일은 마땅히 자세히 살피고 헤아려서 처리해야 할 것인데, 이제 경솔히 처단하였으니, 이는 마음이 좁은 소치이다. 무릇 사람은 관대(寬大)한 연후에 일을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마음이 좁다. 그가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박절해 할 것이나, 나는 곧게 말한 것뿐이다."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을 거쳐서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예관(禮官)의 파견을 명하여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의 묘(廟)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다. 대저 선정이 일찍이 양정재(養正齋) 제액(題額)을 썼고 또 소지(小識)를 지었는데, 임금이 이를 보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선정의 글을 보니, 욕기(浴沂)075)  의 기상(氣像)이 있으며 바로 동춘(同春)의 호(號)에 합한다."
하고, 곧 치제(致祭)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3월 10일 병신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가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고 영(令)을 내려, 제도(諸道)의 수령으로 권농(權農)에 힘쓰지 아니한 자와 환곡(還穀)을 지나치게 나누어 준 자를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임금이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서 시장 백성을 소견하고, 폐막(弊瘼)을 물어 본 다음 홍봉한(洪鳳漢)을 특별히 제수하여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로 삼았다.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상미전(上米廛) 사람이 관장(官長)을 구소(搆訴)하는 것은 이미 지극히 놀랄 만한데, 성(城) 안의 상언(上言)은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을 어제 이미 그들에게 말하였다. 낙송(落訟)076)  이 족한데, 어찌 형배(刑配)까지 이르겠는가? 이제 만약 엄하게 처단하면, 이는 그 사람을 부르면서 문을 닫는 것이다. 하미전(下米廛) 사람에게 이미 지나간 일은 또한 묻지 않기로 하였으니, 이는 왕자(王者)의 정사이다."
하였다.

 

3월 12일 무술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북평사(北評事) 이휘중(李徽中)이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경수(金景洙)를 결곤(決棍)한 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평사(評事)가 비록 다르기는 하더라도 도사(都事)·우후(虞候)와 그다지 서로 멀지 아니하다. 그렇다면, 군문 종사관(軍門從事官)이 결곤 초관(決棍哨官)인가? 주장(主將)에게 품(稟)하지 아니하고서 경솔하게 먼저 곤장을 쳤으니, 지극히 잘못하였다. 북평사는 북병사(北兵使)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고, 병사(兵使)를 파직하라."
하였는데, 뒤에 대신(大臣)이 상주한 바, 평사가 변장(邊將)을 결곤하는 그릇된 법이 이미 오래 되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명을 바꿔 잡아다 국문하게 하고, 병사의 파직은 그만두게 하였다.

 

3월 13일 기해

유최기(兪最基)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14일 경자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이조 판서 윤득재(尹得載)로 지춘추(知春秋)를 겸하도록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득재는 고(故) 판서 윤유(尹遊)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부랑(浮浪)하며, 또 당론(黨論)에 험하고 급한데, 임금이 특별히 그가 옛 신하의 아들이라고 해서 보살피고 대우하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승자(陞資)와 제직(除職)이 모두 중비(中批)에서 나와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그가 정주(政注)077)  를 함에 있어 시재(時宰)에게 모두 품지(稟旨)하여 비위를 맞추기에 분주하니, 세상에서 모두 더럽게 여겨 침을 뱉았다. 이때 송덕기(宋德基)란 자가 있어 이조 참의 홍낙성(洪樂性)에게 압근하였는데, 홍낙성이 대선(臺選)에 통하게 하려고 하자 윤득재가 감히 어기지 못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송덕기가 대직(臺職)에 제배되자 어떤이가 말하기를, ‘송덕기가 응모(應慕)하여 통함을 얻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또 사람을 논하니 물의(物議)가 떠들썩하다.’고 하니, 윤득재가 이를 듣고 두려워하였다. 얼마 뒤에 송덕기가 그 어버이의 병으로 글을 올리자, 윤득재가 그 서본(書本)을 미처 보지도 않고 논핵을 당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자처(自處)하려고까지 하였으니, 그 겁냄이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정론(政論)


[註 077] 정주(政注) : 정조(政曹)의 주의(注擬), 곧 관원을 임용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 무관(武官)은 병조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일.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득재는 고(故) 판서 윤유(尹遊)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부랑(浮浪)하며, 또 당론(黨論)에 험하고 급한데, 임금이 특별히 그가 옛 신하의 아들이라고 해서 보살피고 대우하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승자(陞資)와 제직(除職)이 모두 중비(中批)에서 나와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그가 정주(政注)077)  를 함에 있어 시재(時宰)에게 모두 품지(稟旨)하여 비위를 맞추기에 분주하니, 세상에서 모두 더럽게 여겨 침을 뱉았다. 이때 송덕기(宋德基)란 자가 있어 이조 참의 홍낙성(洪樂性)에게 압근하였는데, 홍낙성이 대선(臺選)에 통하게 하려고 하자 윤득재가 감히 어기지 못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송덕기가 대직(臺職)에 제배되자 어떤이가 말하기를, ‘송덕기가 응모(應慕)하여 통함을 얻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또 사람을 논하니 물의(物議)가 떠들썩하다.’고 하니, 윤득재가 이를 듣고 두려워하였다. 얼마 뒤에 송덕기가 그 어버이의 병으로 글을 올리자, 윤득재가 그 서본(書本)을 미처 보지도 않고 논핵을 당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자처(自處)하려고까지 하였으니, 그 겁냄이 이와 같았다."

 

3월 15일 신축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제반(祭班)에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은 대신(大臣)·봉조하(奉朝賀)·기사(耆社)의 여러 신하 외에는 모두 아울러 금추(禁推)하고, 대사헌 유최기(兪最基)를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승지 한광회(韓光會)가 제문(祭文)의 일로써 우러러 아뢴 바가 있었는데, 하교하기를,
"이미 집례(執禮)가 아닌데 막중한 제문을 어찌 감히 여러 번 말하는가? 이같은 버릇은 내가 취하지 아니하는 바이다. 체차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 망제를 행하였다.

 

3월 16일 임인

임금이 거려청에 나아가 약방에서 입진할 때에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영돈녕(領敦寧) 조재호(趙載浩)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왕세자가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재호는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의 아들이다. 세도(世道)를 자기의 임무로 삼고부터 임금도 이를 신임하여 출신(出身)한 지 얼마 안되어 갑자기 대관(大官)에 올랐는데, 입상(入相)한 뒤로부터는 마침내 병을 핑계하고 사절하면서 나오지 않고, 비록 나라에 큰 연고가 있더라도 참여한 적이 없었으며, 문을 막고 물러가 살면서 시사(時事)에 관여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 속을 엿볼 수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3면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재호는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의 아들이다. 세도(世道)를 자기의 임무로 삼고부터 임금도 이를 신임하여 출신(出身)한 지 얼마 안되어 갑자기 대관(大官)에 올랐는데, 입상(入相)한 뒤로부터는 마침내 병을 핑계하고 사절하면서 나오지 않고, 비록 나라에 큰 연고가 있더라도 참여한 적이 없었으며, 문을 막고 물러가 살면서 시사(時事)에 관여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 속을 엿볼 수 없었다."

 

3월 17일 계묘

박창윤(朴昌潤)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8일 갑진

김상복(金相福)을 대사헌으로, 김선행(金善行)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3월 19일 을사

임금이 화순 옹주방(和順翁主房)에 거둥하였는데, 그 반우(返虞)078)  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공경히 전송하고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화협 옹주(和協翁主)·화유 옹주(和柔翁主)의 방(房)을 역림(歷臨)하였다.

 

3월 21일 정미

좌의정 김상로의 아뢴 바로 인하여, 조동제(趙東濟)를 금고(禁錮)에서 탕척(蕩滌)하고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종덕신편(種德新編)》 서문(序文)을 지어서 내렸는데, 지훈련사(知訓鍊事) 김성응(金聖應)이 이를 썼다. 《종덕신편》은 바로 고 상신 김육(金堉)이 지은 것이고 김성응은 바로 그 후손이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입으로 불러 주며 쓰게 하였는데, 풍수지탄(風樹之歎)079)  에 느낌을 두어 감회(感懷)를 기록하는 글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3월 22일 무신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修正)한 뒤에, 제조(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밤중에 불이 나서 내려 준 명소패(命召牌)가 불에 탄 바가 되었는데, 이천보가 차자를 올려 견책(譴責)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당후(堂后)080)  의 임무를 서울에 있는 자는 일체 피하고 싫어하므로 매양 먼 시골 사람으로 구차하게 수를 채우니, 주서(注書)를 추고(推考)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원(政院)에서 신칙(申飭)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주서 정이환(鄭履煥)이 바로 나가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주서가 어떤 벼슬인데 보잘것 없는 소관(小官)으로서 무단히 바로 나가니, 일이 몹시 해연(駭然)하다. 곧 운두리 권관(雲頭里權管)을 제수하여 오늘 안으로 급히 보내라."
하였는데, 뒤에 대신(大臣)의 아뢴 바로 인하여 도로 정지하였다.

 

3월 23일 기유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홍계희(洪啓禧)를 인견하였다. 이때 홍계희가 강화 사고(江華史庫)에 가서 열성(列聖)의 《실록(實錄)》을 고출(考出)하여 왔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효령(孝寧)·양녕(讓寧) 두 대군(大君)은 마음속에 물욕이 없었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예전 태백(泰伯)081)  의 일에 비하여 손색이 없습니다. 또 이보다 큰 일이 있었는데, 병인년082)  에 성희안(成希顔)의 무리가 거의(擧義)083)  한 뒤 정현 왕대비(貞顯王大妃)께 아뢰어 중묘(中廟)084)  를 세울 것을 청하자, 대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며 이르시기를, ‘세자(世子)085)  가 있으니 이를 세우는 것이 가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덕의 일로서 곧 불쌍히 여김이 없이 입완(立完)하려던 뜻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 거룩하시다."
하였다.

 

3월 24일 경술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승지에게 명하여, 태봉 윤음(胎峰綸音)을 입으로 불러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이제 상고해 온 《실록》을 보니, 광묘(光廟)086)  의 잠저(潛邸) 때 태봉(胎峰)087)  이 성주(星州) 선석산(禪石山)에 있는데,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왕자의 태봉이 같이 있기 때문에 예조에서 다시 봉(封)하기를 청하매, 그때 민폐(民弊)를 위하여 동태(同胎)의 〈매장에 관한〉 하교가 있었는데, 단지 다시 돌만 세우게 하였으니, 아름답고 거룩하다. 이로써 보건대, 근래에 태봉을 반드시 봉정(峯頂)088)  에 하는 것은 바로 그릇된 예(例)이고 또 예조의 초기(草記) 가운데에 ‘동강(同崗)’이란 두 글자로써 보더라도 정상(頂上)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태의 아우를 형의 태봉 아래에 묻고 손아래 누이를 손위의 누이 태봉 아래에 묻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하물며 예전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비록 동강에 묻는다 하더라도 무슨 혐의로움이 있겠는가? 지금은 한 태(胎)를 묻는 데에 문득 한 고을을 이용하니,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것도 마땅히 조종(祖宗)의 제도를 본받아야 될 것이니, 이 뒤로는 새로 정하지 말고 차례로 이어서 묻되, 한 산등성이가 비록 다하였을지라도 한 산 안에 또 다른 산등성이를 이용할 것이며, 그 이어서 묻는 곳은 서로의 거리가 2, 3보(步)에 지남이 없도록 하라. 이른바 동생을 형의 태봉 아래에 묻는다는 것이다. 세자(世子)와 여러 서자(庶子)의 장태(臧胎)는 이미 그냥 두라고 명하였으나, 이 뒤에는 비록 여러 적자(嫡子)와 군주(郡主)가 있을지라도 원손(元孫)과 두 군주(郡主)의 장태한 산을 같이 이용할 것이며, 일후에 대군(大君)·왕자(王子) 이하의 장태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 대(代)의 멀고 가까움을 구애하지 말고 산등성이가 다하는 것으로 한정할 일을 운관(雲觀)에 분부하라."
하였다.

 

3월 25일 신해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는 예식을 행하고, 인하여 진전(眞殿)에 나아갔다가 명정문(明政門)으로 나와서 승지에게 묻기를,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부복(俯伏)한 부인(婦人)이 누구인가?"
하였다. 이때 평양(平壤) 권이형(權以亨)의 아내 홍조이(洪召史)가 연상(練祥) 때에 서울에 올라와서 궐문 밖에 부복한 것이다. 이보다 먼저 권이형이 인장(印章)을 위조한 죄로 옥(獄)에 구속된 지 10여 년인데, 홍조이가 그 남편을 위하여 궐문 밖에 와서 엎드린 지 한 달이 넘도록 아침부터 어두울 때까지 혹시 폐한 적이 없었다. 임금이 듣고 이상하게 여겨서 특명으로 정려(旌閭)하고 권이형에게 사형(死刑)을 감하여 정배(定配)하였는데, 그 여자가 이로부터 은혜에 감사하여 〈정성 황후(貞聖王后)의〉 인산(因山) 때에는 올라와서 자신이 흙을 져다 날랐고, 이제 또 효소전(孝昭殿) 연상 때에 맞추어 궐문 밖에 와서 엎드렸는데,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해조(該曹)로 하여금 식물(食物)과 의자(衣資)를 후하게 주도록 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뜰에 나아가서 연주(練主)089)  를 공경히 맞이하여 모시고 효소전에 나아갔으며, 이어서 재실(齋室)에 머물렀다. 밤에 임금이 베로 싼 익선관[布裏翼善冠]과 시사복(視事服)을 갖추고서 연주를 쓰고, 소차(小次)에 나아가서 최복(衰服)을 갖추고 판위(板位)에 나아가서 석최례(釋衰禮)090)  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임금은 연복(練服)을 갖추고 행사하였다.

 

임금이 비국(備局)과 전조(銓曹)에 명하여 시임(時任) 교하 군수(交河郡守) 김인대(金仁大)를 탁용(擢用)하게 하였다. 김인대는 음관(蔭官)인데, 인원 대비(仁元大妃)의 먼 친족(親族)이다.

 

3월 26일 임자

효소전(孝昭殿)의 소상(小祥)이다. 임금이 연주(練主)를 친히 썼다. 이때 임금이 각부(脚部)에 담주(痰注)의 증후(症候)가 있어서 걷기가 자못 어려웠으나, 매양 제사에 임하여 예(禮)를 행하고 오르내림과 절하고 꿇어앉는 데 거지(擧止)091)  가 매우 편안하였다. 일찍이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병이 있을지라도 매양 전중(殿中)에 들어가면 내 몸이 스스로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반드시 연주를 친히 쓰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춘추(春秋)가 이미 높음으로써 혹시 그 예(禮)를 이루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는데, 제사하는 저녁을 당하여 매사를 반드시 친히 하고 예도(禮度)에 실수가 없으니, 여러 신하가 흠송(欽頌)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연제(練祭) 때 집사(執事)한 사람에게 차등 있게 상전(賞典)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우주(虞主)092)  를 매안(埋安)할 때에 땅속에서 인렬 왕후(仁烈王后)093)  의 시책(諡冊)을 얻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달 정성(貞聖)094)  의 우주를 매안할 때에 인종(仁宗)의 옥책을 얻었는데, 이제 또 이를 얻었으니 또한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고, 낭청(郞廳)에게 명하여 받들어 들이게 하여 곧 수장(修粧)하여 태묘(太廟)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인묘조(仁廟朝) 병자년095)   난리 때에 매안한 때문입니다."
하였다. 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내리고, 제주(題主)할 때에 입시한 봉상시 도제조(奉常寺都提調)·예조 판서 에게는 모두 말[馬]을 주며, 승지 이이장(李彛章)은 가자(加資)하고, 연주를 만들 때의 감동관(監董官)·감역관(監役官)은 모두 6품에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3월 27일 계축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서 호서 암행 어사(湖西暗行御史) 이경옥(李敬玉)을 소견하였다. 월성위(月城尉)096)  의 행상(行喪) 때에 예산(禮山)의 군정(軍丁) 12명이 우연히 죽게 되었었는데, 그 고을 수령(守令)이 고휼(顧恤)하지 아니한 까닭으로 해당 현감을 나처(拿處)하고, 그 12명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며, 그 처자(妻子)에게는 1년을 복호(復戶)하고 도사(都事)를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평택과 수원에서는 민폐(民弊)를 끼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말을 주라고 명하였다.

 

정언 박지원(朴志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사사로이 듣건대, 고(故)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임종시에 울면서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한스러운 것은, 한 간사한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세도(世道)에 무궁한 해(害)를 끼쳤다.’고 하였다 합니다. 저 상신은 오히려 잘못 천거한 것을 한스러워하였으나, 신은 언직(言職)097)  에 있으면서도 오늘날에 능히 이를 물리치지 못하니, 이는 또 신의 죄입니다. 행 사직(行司直) 홍계희(洪啓禧)는 본래 작은 재주로써 오로지 천유(穿窬)098)  를 일삼는 버릇으로, 마음을 씀이 간사하고 처신(處身)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일에 스스로 꾀를 쓰기를 좋아하고 아첨하여 교묘히 꾸미며, 길게 한숨짓고 짧게 탄식하여 밖으로는 가여워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몰래 엿보고 가만히 헐뜯어서 안으로는 참소하고 모함하는 술책을 써서, 얻기를 탐하고 욕심을 채우며 세력을 믿고 권세를 부리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낸 간세(奸細)한 무리입니다. 평생의 기량(伎倆)이 찬자(鑽刺)099)  에 교묘하여 벼슬이 높은 자리에 올라 극진한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일분(一分)의 보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利)를 보고 의(義)를 잊어서 불러들이는 권세를 드러내 보이고, 곁으로 뇌물을 통하여 몰래 벼슬을 파는 길을 열었으니, 그 조정(朝政)을 무너뜨려 어지럽힌 것이 이미 오래입니다. 이리[狼]처럼 탐하고 쥐처럼 훔쳐서 문득 가계(家計)를 이루었습니다. 해사(海槎)100)  와 호번(湖藩)101)  에서 제 마음대로 남의 물건을 거저 빼앗았고 남성(南城)과 기성(騎省)102)  에서 닥치는 대로 농간하였으며, 탁금(橐金)을 발송하여 역적 양찬규(梁纘揆)의 토지를 점령하였고, 민장(民狀)을 억눌러 양포(良浦)의 장시(場市)를 옮겼으며, 남주(南州)의 옥답(沃畓)을 혹은 7백 리(里)나 연영(連營)한다 일컫고, 동호(東湖)의 판박(販舶)103)  은 삼부자(三父子)의 표호(標號)까지 있었으며, 광진(廣津)의 정사(亭榭)는 그 참람하고 사치함을 극진히 하여 산을 뚫고 포(浦)를 파서 사람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또 서울 집에 토목(土木)의 일을 크게 일으켜서 여염집을 철거하고 섬돌 아래를 널리 개척하여 웅장하고 넓게 차지하였으며, 대마루[甍]와 서까래가 연하고 뻗쳐서 탑·사(塔寺) 두 동(洞) 사이가 거의 모두 홍씨(洪氏)의 집이 되었습니다. 조가(朝家)의 금령(禁令)은 본래 스스로 엄히 단속하는 것인데, 만약 조금이라도 고기(顧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방자하기가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고 승지 이광운(李光運)은 성밖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죽고 집이 헐어 〈홍계희가〉 헐한 값에 철취(撤取)하기로 하였는데, 〈집을〉 옮겨서 지을 계책으로 그 외로운 아들이 시일을 늦추어서 염장(殮葬)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릴 것을 빌었으나 완강히 생각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핍박하여 헐게 하였으므로, 흰 포장과 검은 관(棺)이 비바람에 다 드러나게 되어 고아(孤兒)와 과부 아내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부르짖었으며 품팔이꾼의 노래와 상주의 슬픈 곡성(哭聲)이 한데 섞여 길을 가는 이는 우는 얼굴을 가리고 듣는 이는 분해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의 광경을 신도 눈으로 직접 보니, 잔인하고 야박한 행동은 이미 사람의 도리로 책(責)할 수 없었는데, 남의 말이 낭자한 뒤에 미쳐서는 감히 일후에 미봉할 꾀를 내어, 천위(天威)104)  의 지척지하(咫尺之下)에서 ‘성 밖에 집을 허는 것은 금지할 필요가 없다.’고 청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헐어서 옮겨 세운 것이 과연 누가 한 짓인데, 성 안과 성 밖을 억지로 구별하려고 하였으니 그가 스스로 계획한 것은 교묘하다 하겠으나, 임금을 속이며 면전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님을 유독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관작(官爵)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버리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반드시 뜻을 얻고야 그만두었기로, 예문 제학(藝文提學)에 통한 것이 이미 남우(濫芋)105)  인데, 또 대제학[文衡]을 망령되게 엿보는 생각을 내어, 낮에는 천얼(賤孼)에게 아첨하고 밤에는 요사한 아이를 놓아, 정도(正道)를 밟지 않고 부정한 방법을 써서 왼쪽으로 뚫고 오른쪽으로 엿보았으나, 종적(蹤跡)이 스스로 드러나고 면목을 가리울 수가 없게 되자 ‘체결(締結)하여 차지하기를 도모하였다.’는 말이 헌장(憲長)106)  의 입에서 나오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오히려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거만한 얼굴로 승정원[喉院]의 공좌(公座) 가운데에서 변명 질정하였으니, 어찌 의관(衣冠)107)  의 반열(班列)에서 이같은 해괴하고 놀랠 만한 거동이 있을 것을 뜻하였겠습니까? 그 아들 홍경해(洪景海)는 회휼(回譎)함이 이보다 더 간특(奸慝)하고 이랬다저랬다함이 이에 더하여, 포의(布衣)로 있을 때부터 이미 간사하고 아첨한다는 지목이 있었는데, 그 아비의 명을 받아 정승의 집에 나들면서, 상신(相臣)의 폐첩(嬖妾)에게 얻어먹고 상신의 행랑에 머물러 잠잤던 것은, 온 세상에서 타매(唾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리어 상신이 비천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으며, 그 아비가 전형(銓衡)을 맡음에 미쳐서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일에 종용(慫慂)하지 아니함이 없게 되자, 대단한 기세를 빌어 의지하고 명성과 위세를 널리 자랑하였는데, 남이 혹시 자기보다 나으면 몰래 물리쳐 해치고, 일이 마음을 따르지 아니하면 분독(忿毒)을 드러내 보여서, 비록 평소에 사생(死生)을 같이하는 친구라 하더라도 작은 일을 억지로 끌어대어 꾸짖어 절교함에 어려워함이 없습니다. 그가 세상을 살아가고 능력을 자랑하는 바의 바탕은 사사로운 말을 엿들으면 바로 달려가서 먼저 통하고, 작은 하자(瑕疵)를 들추어내어 얼굴을 바치고 기쁨을 맺는 일에 불과하며, 돈을 사랑하는 버릇은 천성(天性)에서 나와 그 아비의 정권[政柄]을 사사로이 농간하여, 호남(湖南)의 부자 사람을 유치(誘致)해서 수백 냥의 금전을 받고는 한 자리 재랑(齋郞)을 허락하였는데, 은점(恩點)을 얻지 못하기에 이르자 그 사람이 서장(書狀)을 보내어 환추(還推)하려 하였으니, 당시 사람의 말은 추하여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전번에 문형(文衡)을 의천(議薦)할 즈음에는 아비를 위해 힘써 도모하여 주천(主薦)의 집 지친(至親)에게 몰래 통하여 삼고(三鼓)108)  에 가서 오고(五鼓)에야 돌아오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수십 일 만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잠을 자지 못하게 하여 거의 병이 나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없기가 어찌하여 이렇게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또 연석(筵席)에서 주대(奏對)하는 즈음에는 아래를 내려보고 위를 쳐다보며 좌우를 돌아보아 기미(幾微)를 잘 탐지하여, 물러나온 뒤에 미쳐서는 문득 물의(物議)를 채택하여 칭찬하면 현저히 자기의 공을 자랑하는 빛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바로 말하기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의 들어와서는 〈임금에게〉 고하고 나가서는 〈신하에게〉 말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개 험한 일을 행하고 교묘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는 성질과 이(利)를 좋아하고 화(禍)를 즐겨 하는 마음은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아서 마음을 같이하며 악함을 이룩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좀벌레이고 당세(當世)의 간녕(奸佞)인데, 만약 정상(情狀)을 일찍 분변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날뛰게 맡겨 둔다면 조정이 이 두 사람 손에 허물어질까 그윽이 두렵습니다. 청컨대 홍계희는 성문 밖으로 추방하고, 홍경해는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전번에 뉘우치고 깨달아서 돕기를 요구하는 영(令)을 내린 뒤에 나의 과실이 진실로 많은데, 몸이 대신(臺臣)이 되어 벙어리처럼 침묵을 일삼고 한 가지 일도 진계(陳戒)함이 없다가, 이 상하(上下)가 슬퍼하는 때를 당하여 감히 협잡하고 무망(誣罔)하는 말로써 위로 성상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니, 진실로 지극히 해괴하다. 마땅히 엄하게 처단할 것이지만 대조(大朝)께서 이미 처분하였으니, 그 상서를 돌려주라."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주서(注書)가 박지원의 상서를 가지고 들어오니, 임금이 박지원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경해가 상신(相臣)의 첩(妾)에게 얻어먹었다고 하였는데, 홍경해가 굶주려서 얻어먹었는가?"
하니, 박지원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이 동교(東郊)에 있을 때에 홍경해가 포의(布衣)로 행랑에 가 머물면서 얻어먹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경해가 상신의 첩에게 아첨하였기 때문에 상신이 추천하였다고 이른 것인가?"
하니, 박지원이 말하기를,
"이와 같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록 천거하였을지라도 나중에는 더럽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땅을 치면서 높은 소리로 말하기를,
"네 자신이 보았느냐?"
하니, 박지원이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눈으로 본 뒤에야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마땅히 말할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우선 체차(遞差)하여 성문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의 하답(下答)한 것을 반포하지 말고, 입대(入對)하게 하라."
하니, 승지가 가지고 들어가서 주달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았는데, 승지가 입대하니, 박지원(朴志源)의 상서에 대한 비답을 쓰게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갔는데, 약방(藥房)에서 입시(入侍)하고 우의정 신만(申晩)이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가 겨우 지났는데 그가 감히 이 버릇을 하는가? 을해년109)  의 종자가 나로 하여금 심기(心氣)를 쓰게 하였는데, 박지원이 다시 격하게 하였으니, 이 뒤에 그가 비록 절의(節義)로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충(忠)이라고 하지 아니할 것이다. 오늘날에 말할 만한 것이 어찌 이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내가 임명해 쓰는 사람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니, 진실로 지극히 마음 아프다."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동궁의 하답을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 하답한 것이 범연(泛然)하기 때문에 조금 언급함이 있었는데, 말한 것이 조금 낫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았는데, 우의정이 입대(入對)하였다.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대조(大朝)께서 대간(臺諫)을 처치하였다고 하교하셨다. 그런데 대조께서 이미 방축(放逐)의 벌을 시행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벌을 더하겠는가? 사리가 의당 이와 같을 듯한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하령이 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갔는데, 좌의정·우의정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지원(朴志源)은 반드시 주동해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다."
하니,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 부자(父子)는 나랏일에 마음을 다함은 사람이 미치기 어려운 바인데, 홍계희가 균역(均役)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이른바, ‘조 영돈녕(趙領敦寧)이라’고 이른 것은, 그 뜻이 오로지 균역을 저희(沮戱)한 데 있다. 이 법은 장차 나라와 더불어 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인데, 누가 감히 저희하겠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홍경해(洪景海)는 고(故) 상신과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하고 또한 조문(弔問)도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 친하였다면 어찌 조문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 그 첩(妾)에게 밥을 얻어 먹으면서 그 상(喪)을 묻지 아니하겠는가? 박도원(朴道源)이 구택규(具宅圭)를 욕하였는데, 박지원도 하나의 박도원이다. 윤급(尹汲)은 애초부터 악한 뜻이 없었고 다만 남의 말을 믿기 좋아하였었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그 언론의 치우침을 의심하시어 쓰지 아니하고 일이 없는 데 두었으므로, 단지 고상한 이야기[高談]만 하였습니다. 전형(銓衡)의 벼슬에 또한 불가함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급은 이 무리의 영수(領袖)인데, 홍계희는 후진으로서 포장(褒奬)해 써서 위에 있으니, 지금 그가 당한 바는 오로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윤급과 홍계희는 친하기가 형제와 같은데, 이 일을 윤급이 만약 알았으면 반드시 힘써 말렸을 것입니다."
하니, 김 상로가 말하기를,
"우의정의 주달한 바가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비록 서로 친할지라도 그 졸도(卒徒)는 그렇지 아니하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일에는 경중(輕重)이 있기 때문에 먼저 처분한 것이다. 아! 연사(練事)가 이미 지나서 군신(君臣)의 복(服)이 크게 다르나 작년을 추억함에 갑절이나 망극(罔極)한데, 비록 가슴에 가득히 간사한 마음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선제(先帝)의 은혜를 추억하여 폐하(陛下)에게 보답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연사(練祀) 이튿날에 날뛰겠는가? 바로 이 한 조목으로 이미 신하의 명분이 없다. 하물며 말없는 가운데 만약 글을 쓸 종이를 찾는다면 마땅히 종국(宗國)의 격언(格言)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인데, 한 편(篇)의 글에 장황한 말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데〉 있으니, 비록 길 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제 박지원의 마음으로 말하면, ‘우리 임금의 슬픔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기복(朞服)을 겨우 벗은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며, 종국(宗國)의 두려운 근심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하여서, 단지 남과 서로 충돌하는 버릇을 멋대로 하고 남을 모함하는 꾀를 행하려고 하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먼저 조처한 이유이다. 일필(一筆)로 글귀를 끊어 마음대로 더럽게 욕하였으니 이는 신임하는 신하를 깊이 미워한 것인데, 그 아뢰고 대답한 바가 불분명하고 주차(周遮)110)  하여 말이 조리가 없으며, 그가 맨 먼저 조 영돈녕을 들어 말한 것은 뜻이 교묘하고 세밀하다. 그 하나를 들어서 우리 중신(重臣)을 참소하고 우리 균역을 어지럽히고자 하였으니, 아! 내가 비록 노쇠하였다 하더라도 제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 글 가운데 ‘탑·사(塔寺) 양동(兩洞)’의 말은 저번에 연(輦)을 타고 그 집을 지나면서 일찍이 내가 본 것인데, 이를 핍박해 묻자, 탑·사 양동의 사이에 있다고 하였으니, 원서(原書)와 이미 모순(矛盾)이 된다. ‘걸식(乞食)’ 등의 말은, 상신이 시골에 있으므로 ‘그 행랑(行廊)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 것은 원서와 역시 어긋난다. 글의 첫 머리에 떨어진 말이 바로 당인(黨人)의 옛 버릇이다. 먼저 그 아비를 들어서 그 아들을 은밀히 비쳤다가 끝에는 합하여 일필로써 아비와 아들을 무욕(誣辱)하는 말로 논박하였으니, 순서가 없고 의리에 어긋난다. 그 더욱 무례한 것은 ‘양성(陽城) 칠년(七年)111)  ’이란 말로, 눈에 그 임금이 없고 눈에 왕세자가 없는 것이다. 이같은 사람을 만약 엄중히 다스리지 아니하면, 장차 나라는 나라가 아니고 임금은 임금이 아닌 데에 이를 것이다. 전 정언 박지원을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지우고 전리(田里)로 방축하여, ‘내가 더불어 중국에 같이하지 아니한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 아! 입으로 아뢴 뒤에 그 상서에 대해 이미 말을 만들어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그 형이 되어 그 동생을 가르치지 아니하여 나라에는 임금을 잊어버리고 집에는 조상을 잊어버림이 형제간에 누가 더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금을 모르고 조상을 모르면서 어찌 감히 고을에 있을 수 있겠는가? 충원 현감(忠原縣監) 박도원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3월 28일 갑인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갔다.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이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계희의 소식이 어떠한가?"
하니, 구윤명이 말하기를,
"신이 홍계희를 보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문득 결별(訣別)하고 떠남에 있어 어찌 한번 천안(天顔)을 뵙고 싶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지난날의 첩장(牒狀)에도 없던 이런 참혹한 논박(論駁)을 당하였으니, 은혜로운 하교가 비록 중할지라도 입시(入侍)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홍계희를 입시하라고 하교한 뒤에 들으니, 글로 진달하고 강교(江郊)에 갔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다한 것은 이미 아는 바이며 그를 모함하여 축출하려고 한 뜻도 밝혀져서 남음이 없는데, 특교(特敎)를 내리는 처지에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다시 신칙하건대, 곧 들어와서 유시(諭示)를 듣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홍경해(洪景海)를 즉시 입시하게 하라."
하니, 홍경해가 대궐 밖에 이르러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주서(注書)를 시켜 재촉하여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자 홍경해가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참소하는 말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마는 어찌 이번 같은 일이 있겠는가?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기면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내가 비록 밝지 못할지라도 어찌 투저(投杼)112)  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나라에서 임용(任用)하는 자를 반드시 모두 쫓아내고야 말고자 하니, 이것이 통탄할 만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는 바로 유신(儒臣)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이니 진달하는 것이 가하다."
하니, 홍경해가 말하기를,
"이는 모두 신으로 인연한 사건이나 욕이 신의 아비에게 미쳤으니, 이것이 더욱 신의 통박(痛迫)한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이때를 당하여 일신의 염우(廉隅)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바로 들어와서 아버지의 원통함을 진달하려고 하니, 효자라고 이를 만하다. 내가 본디 이와 같음을 알기 때문에 과감히 부른 것이다. 중신(重臣)113)  이 언제 출성(出城)했는가?"
하니, 승지가 말하기를,
"이 하교를 받고는 감히 발걸음을 앞으로 떼놓지 못하고 아까 이미 성(城) 안에 들어와 금오문(金吾門)에서 명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홍경해에게 이르기를,
"말하고 싶은 것을 진달하는 것이 가하다."
하니, 홍경해가 말하기를,
"신이 부수찬으로서 권점(圈點)을 매기는 일에 참여하였는데, 박지원 숙질(叔侄)은 누락되고 박상덕(朴相德)의 동생만이 홀로 참여한 때문에 박지원의 무리가 뜬 말을 잘못 듣고서, 취하고 버린 것이 신의 말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정하여 신의 몸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말을 신도 들었습니다. 또 듣건대, 박상면(朴相冕)이 관록(館錄) 뒤에 오래지 아니하여 죽었는데 이로써 한(恨)을 품었다고 합니다. 박지원이 제문(祭文)에서 ‘마침내 뜻한 일을 이루었다.’는 뜻을 끼워 넣었다고 하니, 그 숙질이 신의 집을 원망하는 것은 오로지 ‘관록’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구나."
하고, 하교하기를,
"아! 인심과 세도(世道)가 시끄럽고 패려함은 익히 아는 바이나 그 염치가 없이 망측(罔測)하기가 어찌 박지원 같은 자가 있겠는가? 한 사사로운 혐의(嫌疑)로 인하여 남의 부자(父子)를 모함하니, 뜻이 무상(無狀)한 데 관련된다.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지우고 전리(田里)로 방출하게 한 율(律)은 그에게 있어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한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시인(寺人) 맹자(孟子)의 말에 이르기를, ‘북방(北方)의 불모지(不毛地)에서 받지 아니하면 시호(豺虎)에게 던지겠다.’고 하였는데 이같은 사람은 비록 맹수(猛獸)에게는 던지지 못할지라도 어찌 예사로 전리에 내칠 수 있는가? 박지원을 북도의 종성부(鍾城府)에 귀양보내어 갈 길을 갑절로 걷게 하여 압송(押送)하라."
하였다. 홍경해가 말하기를,
"행사(行査)한 연후에 신의 아비의 억울함을 세상 사람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 말하기를,
"껍질이 있지 아니하니,114)   결단코 행사할 수 없다."
하였다.

 

3월 29일 을묘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갔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상면의 제문(祭文) 가운데 운운(云云)한 것은 더욱 무상(無狀)하다."
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오래지 아니하여 박상덕의 딸이 홍지해(洪趾海)의 며느리가 될 것이니, 박상덕의 딸이 마땅히 박지원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지친(至親) 사이에 어찌 이러한 사리(事理)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괴이하다. 설령 제가 이 마음이 없이 이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 형적(形跡)을 덮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원손(元孫)에게 명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 서문(序文)을 강하게 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읽는 소리가 맑고 깨끗하며 아뢰고 대답함이 분명하므로,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여러 신하가 흠탄(欽歎)하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영사(領事)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는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인렬 왕후(仁烈王后)의 시책(諡冊)을 공경히 맞이하고 공경히 전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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