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병진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고, 왕세자는 휘령전(徽寧殿)의 삭제를 친히 행하였다. 왕세자가 익선관(翼善冠)·천담복(淺淡服)·오각대(烏角帶)를 갖추고, 휘령전 판위(板位)에 나아가서 곡(哭)하며 네 번 절하고, 소차(小次)에 들어가서 익선관·흑참포(黑黲袍)·오각대로 바꾸어 갖추고, 다시 판위에 나아가서 곡하며 네 번 절하고 예식을 마쳤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유생 원점(儒生圓點)115) 에 친히 임하여,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이혜조(李惠祚)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4월 4일 기미
유성(流星)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는데, 빛이 붉었다.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포융복(布戎服)을 갖추고, 말을 타고서 묘소(墓所)에 나아갔다. 안윤행(安允行)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회란(回鑾)할 때에, 경기 감영(京畿監營)과 화완(和緩)·화유(和柔) 두 옹주 집을 역림(歷臨)하였다.
4월 5일 경신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갔는데, 유신(儒臣)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꿈에 자성(慈聖)을 배알(拜謁)하였는데, 《중용》을 필강(畢講)하였다고 가상(嘉尙)하심을 깊이 더하시어 은유(恩諭)까지 내리셨는데, 꿈을 깬 뒤에 마음이 몹시 비창(悲愴)한 느낌이 있다."
하고, 인하여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뜻밖에 꿈에 배알하여 《중용》의 필강을 가상히 여기시는 성유(聖諭)를 받았으니, 다시 유신(儒臣)에게 반찬을 내리는 일을 보는구나. 정유년116) 청정(聽政) 때의 일을 추억하건대, 다만 위예(違豫)117) 로 인연하여 강연(講筵)을 열지 못하고 7년을 시탕(侍湯)하다가 용염(龍髥)118) 을 더위잡을 수 없었다. 근년에 원량(元良)에게 대리(代理)를 명한 뒤에 어찌 차마 법강(法講)을 다시 행하겠는가? 그 뒤에 후곤(後昆)을 위하여 달마다 그 강(講)을 열어서 이름을 ‘강경(講經)’이라고 하였으니, 뜻이 또한 있음이다. 한 부(部)의 《중용》이 백 권(卷)과 같은데, 우연히 강을 마쳤으니, 반찬을 주어 이속(吏屬)에게 상(賞) 내리기를 모두 구례(舊例)에 따르도록 하라. 아! 강경의 제도를 정한 것이 재작년 이달에 있었 는데, 금년 이달에 이 꿈을 얻었으니 꿈을 깨고 나자 마음에 얻은 바가 있다. 이 미 은유를 입었으니 만약 척연(惕然)119) 해 하지 않는다면, 어찌 ‘꿈에 주공(周公)을 본 뜻’이겠으며 또한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이겠는가? 오늘부터 강경은 한 달에 세 번으로 정하여, 초1일·11일·21일에 승정원에서 아뢰어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게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밝은 명이 빛난다 함을 항상 눈에 두라[明命赫然常目在之]’는 한 글귀는 경(敬)을 가지는 공부에 가장 적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숭문당에 ‘일감재자(日監在玆)’ 네 글자를 걸어 두고서, 항상 눈으로 보는 자료로 삼겠다. 임금이 된 자가 항상 ‘날마다 보는 것이 여기에 있다.’라는 이치를 안 연후에,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하고 사치하는 근심을 면할 수 있다."
하였다.
4월 6일 신유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나의 어제 밤 하교를 보았는가? 마침 이상한 꿈이 있었는데, 만약 한 달에 세 번 강(講)하지 아니하면 어찌 자식의 도리이겠는가? 이는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태후(太后)를 보고 그날로 알릉(謁陵)했던 뜻과 같다."
하였다. 비국에 명하여 입시(入侍)할 일수를 또한 강경(講經)에 의하여 거행하되 날짜는 초6일·16일·26일로 하게 하였다.
저치미(儲置米) 9백 석(石)을 동래부(東萊府)에 획급(劃給)하고 급채(給債)를 엄금하라 명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4월 8일 계해
임금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서 승지에게 명하여 임금이 지은 효소전(孝昭殿)의 하향 대제(夏享大祭) 제문(祭文)을 쓰게 하였는데, 임금의 눈물이 흘러 용포(龍袍)를 적셨다.
4월 9일 갑자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인하여 효소전 재실에 나아갔는데, 왕세자가 공경히 맞이하였다.
4월 10일 을축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4월 11일 병인
임금이 재전(齋殿)에서 최복(衰服)을 갖추고 효소전에 나아가 하향 대제를 행하였다. 왕세자는 휘령전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가 입시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덕형(李德馨)은 선묘조(宣廟朝)의 대단히 뛰어난 명상(名相)이고, 조헌(趙憲)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는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이나, 부조지전(不祧之典)120) 에 이르러서는 공훈(功勳)이 있지 아니하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국법입니다. 신은 청컨대 두 신하의 공이 마땅히 기록되어야 하는데도 누락된 것을 진달하겠습니다.
임진년121) 난리에 왜적(倭賊)이 이미 바다를 건넜는데, 왜학 통사(倭學通事) 경응순(景應舜)을 사로잡아 서계(書契)를 주어 보내는데 이 선위사(李宣慰使)에게 화친을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니, 대저 전 해에 왜사(倭使) 현소(玄蘇)가 왔을 때 이덕형이 선위사가 되어 매우 경중(敬重)한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 드디어 이덕형을 보냈는데, 호서(湖西)에 도착하여 먼저 보냈던 경응순을 청정(淸正)의 죽인 바가 되자 들어가지 못하고 회정(回程)하여 평양에 복명(復命)하였습니다. 적이 대동강[浿湖] 근처까지 진격하여 또 이덕형과 만나기를 청하므로, 조그마한 전선(戰船)을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났습니다. 〈이덕형이〉 꾸짖기를, ‘너희들이 우리 부모의 나라를 침범하려고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는데, 나라가 망할지라도 길은 빌려 줄 수 없다. 어찌 화친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와 모든 장수가 바라보는 이는 모두 두려워서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적의 공격이 더욱 급하자, 고(故) 상신 이항복(李恒福)과 더불어 명(明)나라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할 것을 힘써 청하여 자신이 가기를 다투어 원하니, 주상께서 이덕형에게 가기를 명하였는데, 이항복이 눈물을 뿌리면서 타던 말[驂]을 풀어 주며 작별하였습니다.
이덕형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그 곳 순안 어사(巡按御使)에게 글을 올리고 뜰에 서서 통곡하니, 순안 어사가 감동하여 먼저 조승훈(祖承訓) 등을 출발시켜 3천 병사를 거느리고 오자, 이덕형이 천장(天將)을 빈접(儐接)하고 군향(軍餉)을 운반하였으며, 정유년122) 에는 또 양호(楊鎬)·유정(劉綎)을 따라 군중(軍中)에 오래 있으면서 그 공로가 가장 많았습니다. 갑진년123) 에 이르러 두 번 난리의 공훈을 감정(勘定)할 때에 미쳐, 호성(扈聖)124) 한 공훈은 반드시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수가(隧駕)한 자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덕형이 누락되자, 선조께서 하교하시기를, ‘천병(天兵)을 얻어서 오기를 청한 사람은 마땅히 원훈(元勳)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덕형은 맨 먼저 건의(建議)하여 가기를 자청하였고, 조승훈의 한 지대(枝隊)의 병사를 먼저 얻어 왔던 것도 또한 응당히 기록되어야 하는데 모두 누락되었으므로 이항복이 그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진달하니, 선조께서 곧 책훈(策勳)할 것을 명하였고,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畵師)를 보내어 화상을 그리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해 보냈습니다. 여덟 번이나 차자(箚子)를 올려서 힘써 사양하면서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을 들어서 양보하기까지 하였으나, 선조께서 오히려 굳게 허락하지 아니하였었는데, 그 뒤에 공훈을 감정한 수상(首相)이 본래 이덕형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말하기를, ‘이 늙은 이가 공훈을 사양하는 것은 이것이 실제의 말이다.’라고 하여, 드디어 빼 버렸습니다.
광해(光海)가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죽일 때를 당하여서는 차자를 올려 힘써 구제하였고, 또 대비전(大妃殿)125) 이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126) 의 상(喪)에 상복(喪服)을 수의함에 나아가서는,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고 어머니를 끊는 의리가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삼사(三司)에서 아울러 형률을 상고해 처벌할 것을 청하자, 근심하고 분하게 여기어 먹지 아니하다가 졸(卒)하였습니다. 조헌은 왜적이 반드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입할 것을 환히 알고 여러 번 상소하여, ‘왜사(倭使)를 베고 천조(天朝)127) 에 상주(上奏)하며, 병력을 엄하게 하여 기다릴 것’을 청하였으며, 난리의 소식을 듣고는 맨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청주(淸州)의 적을 바로 쳐부수니 적이 크게 패하여 시체를 불에 태우고 밤에 호좌(湖左)128) 로 도망쳤으며 여러 적이 위세(威勢)를 바라보고는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금산(錦山)의 싸움에서는 비록 병력의 많고 적음이 현격한 차이가 있어 전군(全軍)이 모두 함몰하였으나 한 사람도 발을 돌려 도망한 자가 없었고, 적의 사망자도 지나치게 많아서 드디어 무주(茂朱)에 주둔한 적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호남·호서가 이에 힘입어 온전함을 얻었으니, 자신은 비록 전사했을지라도 공은 또한 큽니다. 선정신 송시열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조헌을 추록(追錄)하자는 의논까지 있었는데, 선정신이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지금 연대(年代)가 오래 되어서 추록하기가 중난(重難)하니 부조지위(不祧之位)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는 그 큰 공이 없어질 수 없는 것이 진실로 이항복의 차자와 송시열의 논의 같은 것이 있는데, 이제 모두 친진(親盡)129) 하여 체천(遞遷)하기에 당하였으나 이제까지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진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울러 특별히 부조지전을 베풀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체제(致祭)하라."
하였다.
원손(元孫)에게 명하여 《동몽선습》을 외게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야대(夜對)하여 외방(外方)에서의 남형(濫刑)을 엄금하게 하라고 하교하였다.
4월 12일 정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여 이창수(李昌壽)를 부제학으로, 홍억(洪檍)을 승지로, 이한응(李漢膺)을 경상 좌병사로, 이운강(李雲康)을 거창 부사(居昌府使)로 삼았다. 이운강은 후궁(後宮)의 조카인데, 일찍이 희천 군수(熙川郡守)가 되었다가 감사 이태중(李台重)에게 파출(罷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득재(尹得載)가 올려서 부사로 삼았다.
4월 13일 무진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새로 제수한 수령(守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덟 글자의 존호(尊號)를 얻은 것은 모두 선정(先正) 박세채(朴世采)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다. 선정은 말과 의논이 치우치지 아니하고 기울지 아니하며 지극히 화평 공정(和平公正)하여 크게 세도(世道)에 도움이 있었다."
하고, 박사행(朴師行)에게 명하여 선정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4월 14일 기사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향(香)을 친히 전하는 예식을 행하고 《자술경세문(自述警世文)》의 소지(小識)를 친히 지었다.
4월 15일 경오
임금이 효소전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왕제자가 공경히 맞이한 뒤에 휘령전에 나아가서 망제를 행하였다.
4월 16일 신미
사헌부 【지평 채위하(蔡緯夏)이다.】 에서 전에 상달한 일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비록 인자(人子)의 지극한 심정이라 할지라도, 혐의로움을 무릅쓰고 남을 헐뜯는 것도 사부(士夫)의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전번에 박지원(朴志源)이 중신(重臣)을 탄핵한 글은 진실로 근래에 보지 못한 말이 많으니, 그 아들이 된 자가 격고(擊鼓)하여 글을 올리는 것은 불가한 바가 없겠으나, 만약 홍경해(洪景海)가 의(義)를 지켜야 할 처지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말하여 지목하는 증거가 다만 그 아비의 더럽고 악한 조목뿐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신에 속한 것이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문을 닫고 숨을 죽여서 일체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그 형제로 하여금 나가서 변명하게 하고 이제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핑계하여, 뻔뻔스러운 얼굴로 갓의 먼지를 털면서[彈冠]130) 연석(筵席)에 오름에 미쳐서는 단지 관록(館錄)을 취하고 버렸다는 말을 가지고 자기로 인해 아비에게 욕이 미친 자료로 삼아 조작하는 것은 모두 말이 되지 아니합니다. 박상면(朴相冕)에게 끌어다 부침에 이르러서는 더욱 뜻밖입니다.
아! 영선(瀛選)131) 에 우연히 빠진 것은 본래 한 집안에서 보복할 원한이 아니며, 부제학(副提學)·동벽(東壁)132) 은 본시 올리고 물리침을 주관하는 사람인데, 그가 하료(下僚)를 함께 참여시켜 자신의 당연함을 억지로 끌어부침은 진실로 이미 웃을 만합니다. 설령 박상면이 참으로 이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이미 죽었고 형적이 또한 증거가 없으니, 만일 어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결코 차마 그 아재비로 인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홍경해가 박지원에게 이제 비록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맺었다 하더라도 박상면에게는 이가 특별히 사귐이 나빠지기 이전의 죽은 친구일 뿐입니다.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의심스럽고 애매하여 죽은 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저승에서 억울함을 품게 하였으니, 사람의 모질고 독함이 어찌 이에 이릅니까? 대각(臺閣)에 있는 자들은 예사로 보고 하나같이 깨우쳐 경계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부응교 홍경해는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그때에 말하지 아니한 대간(臺諫)은 모두 파직하소서. 대각의 선임(選任)은 구차하게 채우고 외람하게 의망(擬望)할 수 없음이 분명한데, 정원 송덕기(宋德基)는 본래 학식이 없어서 이미 시골의 우매한 버릇이 많았고, 오래 낭서(郞署)에 있었으나 애초에 공의(公議)가 억울함을 일컬음이 없었으니 미원(薇垣)133) 에 통함은 이미 물정(物情)에 놀랠 만한데, 하비(下批)를 받은 뒤에 미쳐서는 옛 친구의 진정(陳情)한 글을 두루 알리고 또 망발(妄發)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정언 송덕기를 개정(改正)하소서. 계방(桂坊)의 참하관(參下官)은 본래 음로(蔭路)134) 의 깨끗한 벼슬인데, 전 부수(副率) 최익남(崔益男)은 사람이 이미 경솔하고 꾀가 많으며 성질이 또 패망(悖妄)하여, 창녀(娼女)의 집에 나들다가 군문(軍門)의 야금(夜禁)에 붙잡힌 적이 있는데, 외람되게 벼슬길에 통하여 전석(銓席)의 급박하게 교체(交遞)함을 입기에 이르렀으니, 사류(士類)가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고 여대(輿儓)135) 가 너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전번에 부수에 통의(通擬)하여 은비(恩批)를 받게 되자 한 사(司)의 많은 관원이 동료(同僚)되기를 부끄러워하니, 그도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는 결국 사직하여 갈렸습니다. 일전의 대정(大政) 때 또 교관(敎官)에 통의하였으니, 관방(官方)의 난잡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전 부수 최익남을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지우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첫째 건(件)의 일은, 그때 입시(入侍)하게 된 것이 대조(大朝)의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이니, 신자(臣子)의 도리로서 어찌 들어오지 아니하겠는가? 이미 연석(筵席)에 오른 뒤에 성상께서 물으시는 밑에서,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니 이치에 옳지 아니함이 없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진실로 지극히 해괴하다. 대신(臺臣)을 파직하라는 요청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다시 번거롭게 말 것이다. 두째 건의 일은, 어버이를 위해 시골에 내려갔으니 인자(人子)의 정리에 그 옳지 못함이 없는데, 임명을 개정하라는 요청은 또한 부당하므로 따르지 못하겠다. 셋째 건의 일은, 소문에 들은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니 번거롭게 말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일찍이 전에는 광주(廣州)가 전영(前營)이 되었는데 유수(留守)가 부(府)로 나간 뒤에는 전영을 이천(利川)으로 옮겼기 때문에, 영장(營將)은 이천(利川)에 있고 군병(軍兵)은 광주에 있어서, 서로 관할하지 아니하여 군제(軍制)를 이루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장은 이천에 있고 군병은 광주에 있으니, 군제에 크게 어긋남이 있다. 별장(別將) 한 사람을 더 차임(差任)하여 전영장(前營將)을 겸하게 하고, 이천에는 영장의 이름을 없애어 이전대로 전영에 속하게 하며, 중군(中軍)은 지금 한가로운 자리[閑窠]가 되었으니 좌우 별장(左右別將)의 예(例)에 의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고, 기타 사례(事例)는 본영(本營)으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나아가서 의논하며 절목(節目)을 만들어 계하(啓下)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말하기를,
"금년 수조미(收租米)는 14만 4천 석(石)에 불과하며, 무명[木]이 1천 1백 동(同)이고, 돈이 13만 냥(兩)이 되는데, 그 가운데 미수(未收)와 불행히 취재(臭載)136) 된 것을 알 수 없으니, 1년의 수입이 1년의 지출을 당하지 못합니다. 쌀은 오로지 혜청(惠廳)에 의지하여 매년 취해 쓰는 것이 적어도 2, 3만 석에 밑돌지 아니하는데, 그렇지 아니한 해가 없으니, 혜청도 장차 텅 빌것입니다.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면 진실로 몸둘 바가 없습니다. 대저 각 아문(衙門)의 전결(田結)에 대하여 이로부터 둔전(屯田)은 부(賦)를 면제하고 세(稅)를 내게 하는 것이 사례에 당연한데, 전세(田稅)와 아울러 면제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세입이 점점 줄어져서,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의 면세(免稅)의 수(數)가 2만 2천여 결(結)의 많음에 이르니, 둔전의 예(例)에 의하여 부를 면제하고 세는 내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상로에게 물으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밭에 세가 있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인데, 대동(大同)에 비하여 더욱 무겁습니다. 호판(戶判)의 아뢴 바가 진실로 옳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4월 17일 임신
임금이 호조 참의 위창조(魏昌祖)가 올린 책자(冊子)를 들이라 명하여 편차인(編次人)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임금이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어제(御製)인 ‘조만간에 마땅히 패택(沛澤)의 용(龍)이 될 것이다[早晩當爲沛澤龍]137) .’라는 글귀를 외면서 말하기를,
"이는 성조(聖祖)께서 여덟 살 때에 지으신 것인데, 기상(氣像)이 어찌 장하시지 아니한가? ‘어제 석왕사 비문 추기(御製釋王寺碑文追記)’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돌에 새겨서 〈능의 〉 왼쪽에 세우게 하라."
하였다. 인하여 ‘능전지 서(陵殿誌序)’를 짓고 또 ‘능전지 추록(追錄)’을 지었다. 위창조를 소견하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였으며 그의 부모에게는 의자(衣資)·식물(食物)을 후하게 주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위창조가 명을 받들어 《북관지(北關誌)》를 편찬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상서(上書)하여 동궁에 올렸는데, 임금이 홍문관[玉署]에 명하여 교정하여 본도(本道)138) 에 내려 보내 간인(刊印)하도록 명하였다.
4월 18일 계유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갔다. ‘어제 중용 서(御製中庸序)’를 입시(入侍)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써서 간인하게 하였다. ‘효소전 단양 제문(孝昭殿端陽祭文)’을 친히 지어 승지에게 명하여 써서 재사(齋舍) 동쪽에 걸게 하였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아! 한 문정(門庭)이 영소전(永昭殿)·경녕전(敬寧殿)·영휘전(永徽殿)이 되었다가, 경자년139) 에 이르러서는 또 효령전(孝寧殿)이 되었고, 갑진년140) 에는 경소전(敬昭殿)이 되었으며, 경술년141) 에는 경휘전(敬徽殿)이 되었었는데, 아! 오늘날은 또 효소전이 되어, 첫째 낭(廊)은 대전(大殿)의 재실(齋室)이 되고 둘째 낭은 동궁의 재실이 되었으며 셋째 낭은 인렬 왕후(仁烈王后) 국휼(國恤) 때에 왕자의 거려청이 되었다. 아! 내가 27세에 용염(龍髥)을 더위잡을 수 없었고 인산(因山)한 뒤 11월에는 여기에 거려청을 하였었는데, 이듬해 8월에 승저(承儲)142) 한 뒤에는 또 동궁 재실에 있었으며, 갑진년 섣달 31세에 또 재전(齋殿)에 있었고, 37세 경술년 7월에는 또 이 전(殿)에 있었으니, 한 사람으로 세 낭에서 거려(居廬)하였다. 아! 나의 지극한 슬픔이 아득함은 바로 이 한 가지 일로써 알 수 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열조(列朝)의 《혼전등록(魂殿謄錄)》이 각사(各司)에 있는 것으로는 선조 대왕은 영모전(永慕殿), 인조 대왕은 영사전(永思殿), 효종 대왕은 경모전(敬慕殿), 현종 대왕은 효경전(孝敬殿), 숙종 대왕은 효령전(孝寧殿), 경종 대왕은 경소전(敬昭殿), 인목 왕후(仁穆王后)는 효사전(孝思殿), 인렬 왕후(仁烈王后)는 숙녕전(肅寧殿), 장렬 왕후(莊烈王后)는 효사전(孝思殿), 인선 왕후(仁宣王后)는 경사전(敬思殿), 명성 왕후(明聖王后)는 영모전(永慕殿), 인경 왕후(仁敬王后)는 영소전(永昭殿),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경녕전(敬寧殿), 인원 왕후(仁元王后)는 효소전(孝昭殿), 선의 왕후(宣懿王后)는 경휘전(敬徽殿), 정성 왕후(貞聖王后)는 휘령전(徽寧殿)인데, 인묘(仁廟) 이전의 등록은 병자년143) 난리에 유실되어 전하지 아니한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註 139]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140] 갑진년 : 1724 경종 4년.[註 141]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142] 승저(承儲) : 왕세제(王世弟)가 됨.[註 143]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열조(列朝)의 《혼전등록(魂殿謄錄)》이 각사(各司)에 있는 것으로는 선조 대왕은 영모전(永慕殿), 인조 대왕은 영사전(永思殿), 효종 대왕은 경모전(敬慕殿), 현종 대왕은 효경전(孝敬殿), 숙종 대왕은 효령전(孝寧殿), 경종 대왕은 경소전(敬昭殿), 인목 왕후(仁穆王后)는 효사전(孝思殿), 인렬 왕후(仁烈王后)는 숙녕전(肅寧殿), 장렬 왕후(莊烈王后)는 효사전(孝思殿), 인선 왕후(仁宣王后)는 경사전(敬思殿), 명성 왕후(明聖王后)는 영모전(永慕殿), 인경 왕후(仁敬王后)는 영소전(永昭殿),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경녕전(敬寧殿), 인원 왕후(仁元王后)는 효소전(孝昭殿), 선의 왕후(宣懿王后)는 경휘전(敬徽殿), 정성 왕후(貞聖王后)는 휘령전(徽寧殿)인데, 인묘(仁廟) 이전의 등록은 병자년143) 난리에 유실되어 전하지 아니한다."
4월 20일 을해
황해도·평안도 유생(儒生) 박집(朴𧀡) 등이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선정(先正)의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사체가 중대하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품(稟)하지 못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가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강원 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삼척(三陟)의 모환곡(牟還穀) 1백 30여 석이 지적해 징수(徵收)할 곳이 없다고 하여 탕감(蕩減)하기를 우러러 청하니, 영(令)을 내려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자신만록(紫宸漫錄)》을 받들어 보고 소지(小識)를 친히 지었다.
4월 24일 기묘
교리 윤득양(尹得養)·부수찬 홍양한(洪良漢)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경해(洪景海)가 사람들의 말을 당한 것은 보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물러나 엎드려서 허물을 생각하며 물의(物議)를 공손히 기다리면 누가 옳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입시(入侍)하라는 명령을 인연하여 감정을 풀 계책을 행하려고 방자하게 갓을 털고 나와 외치면서 대궐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어찌 참혹한 탄핵을 새로 당한 자의 할 수 있는 바입니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의 바르게 꾸짖음은 이에 있지 아니합니다. 곧 그 혐의로운 틈을 돌아보지 아니하면서, 배척하고 모함하는 꾀가 지극하여 이치에 없는 말을 지어내어 이미 죽은 친구를 더럽히고 모욕하는 것은, 그 정상(情狀)을 헤아려 보건대, 실로 몹시 잔인하여 온 세상 사람이 한심해 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고, 후일의 폐단을 막을 수가 없으니, 삭탈(削奪)하기를 청하는 것은 가볍게 감죄(勘罪)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를 논하는 자를 구함(構陷)하는 풍습은 진실로 오늘날에 비롯되었는데, 대신(臺臣)이 된 자가 예사 일과 같이 보고 바르게 경계할 것을 생각지 아니하니, 파직을 청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송덕기(宋德基)가 진신(搢紳)에게 부끄러움을 끼친 것과 최익남(崔益男)이 의관(衣冠)을 더럽힌 것은 모두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임명을 개정(改正)하라는 진달은 그가 ‘시골에 내려가는 말미를 청한 것’을 가리킴이 아니고 바로 그가 서울에 있으면서 행동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적(仕籍)에서 지우기를 청한 것은 평일에 익히 알고 있는 데에 말미암았고, 원래 한때의 풍문(風聞)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대간의 체통이 그러한 것인데, 예비(睿批)를 내리신 처지에 어찌 혐의를 삼겠습니까? 청컨대 지평 채위하(蔡緯夏)를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처치한 일은 진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4월 25일 경진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종신 전강(宗臣殿講)에 친히 임하여, 순통(純通) 두 사람에게 모두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편찬한 《육례의집(六禮疑輯)》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관검(管檢) 교정하여 영남 감영[嶺營]에 내려 보내 간인(刊印)하도록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청한 바로 인한 것이다.
4월 26일 신사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4월 27일 계미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동도(尹東度)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병조 서리(兵曹書吏) 백윤구(白胤耉)를 특명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아뢰기를,
"병조 서리 백윤구는 예서(禮書)에 본래 익숙하다고 일컬었으므로, 이번 편집(編輯) 때에 지명 분차(指名分差)하였는 바, 바야흐로 어미의 복(服)을 입고 있었는데 자기 힘껏 상례(喪禮)를 극진히 하여, 비록 집이 가난한 까닭으로 이역(吏役)을 따라 행할지라도 집에 돌아가면 최복(衰服)144) 을 입고 거적자리에 거처하면서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곁에 있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고, 염장(鹽醬) 외에 다른 것은 입에 가까이하지 아니하다가, 일전에 마침내 상(喪)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으니, 인리(隣里)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어 신의 조(曹)에 정문(呈文)하였습니다. 조가(朝家)의 포권(褒勸)하는 도리에 있어서 사람이 미천하다고 하여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심히 가상(嘉尙)하다. 특별히 정려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득후(洪得厚)를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결사(判決事)는 쉽게 그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직(職)을 제수하였다."
하였다.
4월 29일 을유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향(香)을 친히 전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6월 (0) | 2025.10.06 |
|---|---|
|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5월 (1) | 2025.10.06 |
|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3월 (0) | 2025.10.06 |
|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2월 (0) | 2025.10.06 |
|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1월 (0) | 2025.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