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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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을묘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대조(大朝)를 공경히 맞이한 뒤에 효소전 삭제에 참여하고, 곧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삭제를 행하였으며, 대조께서 환궁(還宮)할 때에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시독관 이석상(李錫祥)이 말하기를,
"‘성(誠)’의 한 글자는 곧 《중용》의 대지(大旨)로, 그 ‘성’을 다하면 지미(至微) 한 것이 나타납니다. 지금의 일로써 말하건대, 전하께서 성심으로 가뭄을 번민하시어 연달아 친히 기우(祈雨)하심에 두 차례 비가 내렸으니, ‘성’은 감출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하였다.

 

6월 2일 병진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제술(製述) 시험을 친히 행하였다. 북교(北郊)에 거둥할 때에 공경히 맞이한 때문이다.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김필원(金必源)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6월 3일 정사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외감(外監)의 공인(貢人)에게 대여한 돈, 1만 5천 7백여 냥(兩)을 특별히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비국 당상 김치인(金致仁)의 진달한 바로 인한 것이다.

 

임금이 명하여, 해서 사안 어사(海西査按御史)의 계본(啓本)을 승정원에서 곧 소화(燒火)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매(英梅)를 이미 효시(梟示)하였으니 이란대(移蘭代)는 낱낱이 엄하게 형벌하고 바로 공초(供招)하기를 기(期)하여 일체로 효시하며, 영시(英時)는 엄형한 뒤에 흑산도(黑山島)에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6월 5일 기미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을 소견하고, 황세중(黃世中)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무겸직(武兼職)을 빈자리에 따라 조용(調用)하며 여러 사람은 혜청(惠廳)으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후하게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다.

 

6월 6일 경신

상이 숭문당(崇文堂)에 납시어 농민을 불러 보시고 농사 형편을 물으셨다.

 

6월 7일 신유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병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내국 제조(內局提調)로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병판(兵判)의 시애(撕捱)169)  한 것으로써 누누이 타이르고 꾸짖었다.

 

6월 9일 계해

삼도 유생(三道儒生) 이원후(李垣垕) 등이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6월 10일 갑자

유한소(兪漢蕭)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강원도의 간성(杆城) 등 다섯 고을의 허결(虛結)을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교정 당상(校正堂上) 조명정(趙明鼎)·구윤명(具允明)·채제공(蔡濟恭)에게 각각 호피(虎皮)를 내려 주어 이미 이번 교정한 공에 대하여 시상(施賞)하였는데, 전일에 편차(編次)한 노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원경하(元景夏)·홍계희(洪啓禧)·이철보(李喆輔)에게도 호피를 내려 주고, 오광운(吳光運)·조명리(趙明履)는 모두 고인(故人)이 되었으니, 그 아들이나 손자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열성 지장(列聖誌狀)과 어제 보편(御製補編)을 이정(釐正)하여 발간(發刊)해 올린 때문이었다.

 

6월 11일 을축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편차인(編次人) 채제공에게 명하여, 《어제속상훈초(御製續常訓草)》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뒤의 사왕(嗣王)이 만약 이를 음미(吟味)한다면 나라를 위하여 희망이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혹시 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비록 작을지라도 제왕(帝王)의 득실(得失)과 국가의 성쇠(盛衰)가 여기에 매였는데, 그 득실과 성쇠의 원인이 되는 바는 모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공부에 부지런함과 태만한 사이에 말미암을 따름이다. 만약 임금이 되어 하늘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포학하게 하고서, 그 나라가 실패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듣지 못하였다."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함은 임금의 큰 정사입니다. 이 글은 처음에서 끝까지의 뜻이 하늘과 사람 사이에 섬기고 사랑함을 바로 설파하였는데, 늠연(凛然)함이 이와 같으니, 자손에게 편안함을 주는 계책이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채제공을 도승지로 삼고, 남태회(南泰會)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3일 정묘

임금이 어의궁(於義宮)에 거둥하였다. 병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내국 제조(內局提調)로서 입시하였다가 병(病)으로 시위(侍衛)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유를 다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중군(中軍)이 모임을 기약하여 나오지 아니하는 자가 있겠는가? 먼저 허물을 기록하고 인하여 수가(隨駕)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봉안각(奉安閣)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문무관(文武官)의 엄체(淹滯)170)  가 요즘과 같은 적이 없다. 계해년171)  에 서궁(西宮)172)  이 친정(親政)한 일을 추억하면, 이제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내일 친히 향(香)을 전한 뒤에 재실(齋室)에 따라 나아가 친히 정사(政事)하여 엄체를 들어 쓰겠다. 아! 이것도 《상훈(常訓)》 가운데 ‘옛 해의 경(卿) 등이 오는가 아니 오는가?’라는 하교를 체득하고, 또한 우리 자성(慈聖)의 지극하신 덕을 체득하는 것이며 바로 자강(自强)173)  하는 뜻을 이어서 행하는 것이다. 대소 신공(大小臣工)은 멀리 장릉(長陵)174)  을 바라보며 나의 뜻을 체득하라."
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교동(校洞) 옹주(翁主)의 집에 역림(歷臨)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서 효소전(孝昭殿) 재실(齋室)에 나아가서 이조·병조에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여, 친히 정사(政事)하였다.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이윤성(李潤成)을 황해 병사로 삼고, 상서원 관원(尙瑞院官員)은 입직(入直)으로써 거행하였는데, 도목정(都目政)의 예(例)에 의하여 특명으로 승륙(陞六)시켰다. 하교하기를,
"영장(營將)을 승자(陞資)시킴은 대정(大政) 외에는 의망(擬望)하지 못하는 일로, 비록 법식(法式)을 임시로 정한 것이더라도 이번 정사는 도목정과 다름이 없으니, 구애하지 말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남유용(南有容)이 세 번 상서(上書)하여 비답을 받은 뒤에 특교(特敎)로 신칙(申飭)하였는데, 또 패초(牌招)를 어기니 임금이 의금부에 내려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보다 먼저 어람 관안(御覽官案)을 만들기를 명하였는데, 무릇 문신(文臣)으로 6품에 올랐으나 낭서(郞署)175)  를 지내지 못한 자와, 낭서를 지냈으나 수령(守令)을 지내지 못한 자와, 수령을 지냈으나 대선(臺選)에 통과하지 못한 자를 차례로 열록(列錄)하게 하여 고열(考閱)에 대비케 하였는데, 이날 임금이 친히 관안을 보고 그 엄체(淹滯)가 가장 오래 된 자를 뽑아서 모두 참여함을 얻게 하였으니, 아! 어람 관안은 선조(先朝)의 대주첩(代柱帖)에 비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90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인사-관리(管理)


[註 175] 낭서(郞署) : 낭관.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보다 먼저 어람 관안(御覽官案)을 만들기를 명하였는데, 무릇 문신(文臣)으로 6품에 올랐으나 낭서(郞署)175)  를 지내지 못한 자와, 낭서를 지냈으나 수령(守令)을 지내지 못한 자와, 수령을 지냈으나 대선(臺選)에 통과하지 못한 자를 차례로 열록(列錄)하게 하여 고열(考閱)에 대비케 하였는데, 이날 임금이 친히 관안을 보고 그 엄체(淹滯)가 가장 오래 된 자를 뽑아서 모두 참여함을 얻게 하였으니, 아! 어람 관안은 선조(先朝)의 대주첩(代柱帖)에 비할 만하다."

 

6월 15일 기사

임금이 효소전에 나아가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의 망제를 섭행(攝行)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내린 전교(傳敎)에서 강경(講經)을 주강(晝講)으로 법을 정하고 일차(日次)를 차대(次對)로 한 것은 명분을 바르게 하는 뜻을 깊이 얻었으니, 누가 흠앙(欽仰)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인하여 삼가 생각하건대, 소조(小朝)의 빈대(賓對)를 한 달에 여섯 차례로 한 것은 바로 대리(代理)한 후의 절목(節目)입니다. 대개 소조(小朝)의 인접(引接)은 빈대가 아니면 다른 길이 없으니, 신은 그 일수(日數)가 잦지 아니함을 두려워하는데, 이제 그 세 일수를 줄였습니다. 전하께서 항상 날마다 소조를 책려(責勵)하시는 것은 정사에 부지런하도록 하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니, 빈대를 아홉 차례 자주 거듭하는 것은 또 무엇이 구애되겠습니까? 또 대조와 소조의 빈대를 상순(上旬)·하순(下旬)으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신이 생각건대, 혹시 구애됨이 있는 것은, 외방(外方)의 장문(狀聞)과 각사(各司)의 초기(草記)에는 계달한 것이 있고 건의한 것이 있으며, 보름 뒤에 대조(大朝)께 품(稟)해야 하는 것과 보름 전에 마땅히 소조(小朝)께 품해야 하는 것이 있게 되므로, 형세가 장차 15일을 엄체(淹滯)될 것이니, 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뜻은 상순·하순을 나눌 필요가 없이 전하께서 한 달에 세 차례 하신 나머지에 소조(小朝)께서 여섯 차례를 이전대로 거행하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뜻이 명분을 바르게 함에 있으니, 어찌 〈정사가〉 부지런함에 있겠는가? 오늘 우의정의 아뢴 바도 바로 경의 차자와 같아서 이미 하교하였는데, 상삼차(上三次)·하삼차(下三次)의 전교는 바로 초5일·15일·25일이 상삼차가 되고 초10일·20일·30일이 바로 하삼차이다. 경의 차자 가운데 ‘보름 전, 보름 후’라고 이른 것은 하교의 뜻이 통하지 아니하여 잘못 안 것이 아닌가? 아! 지난간 해에는 바야흐로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어서 차대를 모두 대리에게 명하였기 때문에 절목 가운데 한 달에 여섯 차례의 규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달에 한 차례로 처음에 이미 법을 정하였는데 또 한 달에 세 번 강(講)함으로 인하여 한 차례를 세 차례로 하였다. 한 조선(朝鮮)의 한 비국(備局)에 입시(入侍)는 하나이다. 예전의 여섯 차례가 지금은 아홉 차례가 되었고 때로는 혹시 겹치기도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함이 되지 아니하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여섯 차례의 이름은 진실로 전과 같은데 상삼차의 날에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할 일을 이미 우의정에게 하교하였으니, 그러면 공사를 가지는 것이 자재(自在)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차대(次對)를 이미 하교하였으니 모든 거행은 구례(舊例)에 의함이 마땅한데, 삼사(三司) 여러 신하를 어찌하여 패초(牌招)하지 아니하였는가? 해방 승지(該房承旨)를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이 말하기를,
"전번의 하교 가운데 중순(中旬)에 시사(試射)하여 대상(代賞)할 것을 정하여 행하게 하였는데, 지금 시상할 무명[賞木]이 지극히 귀한 것으로 보아 시사를 행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무명이 귀하여 중순에 행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비국을 찰추(察推)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성응이 말하기를,
"형편이 행하기 어려운 것이 스스로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죄(勘罪)를 기다리는 중에 주달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추고(推考)함이 가하다."
하였다. 판의금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황간(黃榦)·박명양(朴鳴陽)·이우(李堣) 등은 지금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풀 때를 당하여 작처(酌處)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무리 판의금이라도 작처할 것을 가볍게 먼저 청하였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윤시동(尹蓍東)을 영남으로 방축(放逐)하는 죄를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주강(晝講)은 매월 중에 어느 날로 정하여 행할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월 초1일·11일·21일로 할 것이다. ‘경연(經筵)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계품하면 명분이 바를 것이다. 동궁(東宮)의 강(講)도 주강(晝講)이라 일컫는 것은 나와 같다. 옛적에는 주강에 종신(宗臣)·무신(武臣)이 입참(入參)하였는데, 일찍이 한 종신이 선정(先正)을 배척한 때문에 입참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제는 홀로 무신만 입참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임금이 서북 부료청 군관(西北付料廳軍官)을 소견하였다.

 

6월 16일 경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6월 17일 신미

월식(月食)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여 김응순(金應淳) 등 32인을 뽑았다.

 

6월 19일 계유

강릉부(江陵府) 임계면(臨溪面)에 우박이 내렸는데, 우박의 크기가 새알과 같았다.

 

6월 20일 갑술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 신 만이 전라 병사(全羅兵使)의 첩정(牒呈)으로써 도내(道內)의 상진곡(常賑穀) 가운데 쌀과 벼를 참작하여 1만 석을 한정해 옮겨서 획급(劃給)하여 이들로 하여금 회록(會錄)176)  하고, 취모(取耗)177)  하여 보태어 쓰도록 하기를 우러러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6월 22일 병자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도당록 권법(都堂錄圈法)178)  은 응권(應圈) 외에 또 이른바 산점(散點)이란 것이 있습니다. 만일 이 선발에서 조금 적합함이 있는데 누락되었으면, 여러 당상관이 보는 바에 따라 권점(圈點)을 가하는 것이 또한 전례입니다. 지금 도당록(都堂錄)이 이루어졌는데 그윽이 물의(物議)를 듣건대, ‘산점 가운데 참하(參下)로서 마땅히 들어가지 못할 자가 권점을 많이 얻는 것까지 있다.’고 합니다. 무릇 참하(參下)를 녹용(錄用)함은 광선(曠選)179)  이며 준망(峻望)180)  인지라, 애초에 하위(下位)는 세상에서 일컫는 바 ‘지정점(地定點)’이란 것이 없는데, 여러 당상이 무엇을 좇아서 권점을 가하였겠습니까? 그 실수를 논하면, 하위(下位)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여러 당상도 책임이 없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여러 당상을 아울러 중추(重推)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의 자리는 번화하고 파탕(波蕩)하며 또 식색(食色)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진실로 신독(愼獨)181)  을 하기가 어렵고, 여러 신하들은 들떠들고 조경(躁競)182)  하므로 신독하기가 모두 어렵다. 참으로 항상 《중용》을 가지고 담화할 수만 있다면 그 부조(浮躁)함을 떨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6월 23일 정축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친히 휘음(諱音)183)  을 지어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고, 말하기를,
"예전에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휘변(諱辨)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비록이하(李賀)184)  를 위하여 억양(抑揚)한 말이 없지 아니하나, 대의(大意)는 진실로 옳다. 말세(末世)에 혐의하는 길이 크게 넓어져서 비록 소중한 것 이외라도 혐명(嫌名)을 기하는 것이 많으니, 마음으로 항상 개연(慨然)해 하였다. 동진(東晉)의 청담(淸談)이 유행될 때에 부자(父子)의 이름이 형제와 같았던 것은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국초(國初)의 습속(習俗)도 이와 같음이 많았으니, 지금 어찌 과중(過中)한 길을 열겠는가? 근래에 남상(南床)185)  의 이름으로 인하여도 또한 그 차마 하지 못하는 바를 강제로 할 수 없었다. 듣건대, 고(故) 판서 이성룡(李聖龍)의 처음 이름이 운룡(雲龍)이고, 고 참의 이양신(李亮臣)의 처음 이름이 종신(宗臣)인데, 두 사람의 이름을 고친 것은 비록 감히 할 수 없는 데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지나치다고 한다. 한 원임(原任)이 글을 올려 고치기를 청하니, 이는 이종신(李宗臣)이 양신(亮臣)이 됨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다. 이를 만약 허락하면, 띠를 띠고서 조정에 있는 자가 《보략(譜略)》을 두루 상고하여 혹은 상소하고 혹은 정문(呈文)하여 그 이름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장차 어지러울 것이니, 그 폐단이 나로 말미암아 열릴 것이다. 이미 대신(大臣)에게 내린 비답에 유시(諭示)하였으며, 인하여 남은 소회(所懷)를 서술하여 뒤에 보이는 것이니, 이 뒤로는 두 글자의 이름에서 ‘윗 글자를 들어 성(姓)과 붙여서 기피하는 것’은 일체 금하고, 이름을 짓는 데에도 이로써 기피하지 말도록 할 일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6월 24일 무인

이정보(李鼎輔)를 이조 판서로, 이유수(李惟秀)·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았다.

 

전 자의(諮議) 송능상(宋能相)이 졸(卒)하였다. 송능상의 자(字)는 사룡(士龍)이고 은진인(恩津人)으로 선정(先正) 송시열의 후손인데, 스스로 호(號)를 동해자(東海子)라고 하였다. 자품(資稟)이 고매(高邁)하고 규모(規模)가 정대(正大)하여 나이 20세가 못되어 이미 큰 선비[大儒]를 이루었다. 한 당시의 정승이 도통(道統)을 속이고 욕되게 함이 있자 상소하여 엄하게 배척하였고, 대훈(大訓)186)  을 반사(頒賜)함에 미쳐서는 또 항의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이를 막아 드디어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난하였다. 이해에 평양[箕都]에 들렸다가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 두세 학자(學者)와 더불어 《대학(大學)》을 강(講)하였는데, 하루 저녁에 문득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49세이다.

 

6월 25일 기묘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김이순(金履順)이 상서(上書)하여, 이름을 고쳐서 이헌(履獻)으로 하기를 청하였다. 대저 김이헌의 처음 이름이 숙묘(肅廟)의 성휘(姓諱)와 음(音)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서,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고, 전 병사(兵使) 윤태연(尹泰淵)은 도 삼년(徒三年)으로 정배(定配)하며, 전 부사(府使) 이유신(李裕身)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나치(拿致)하라 명하였다. 이때 동래 부사 조엄(趙曮)의 장계(狀啓)에 잠상 죄인(潛商罪人) 등의 초사(招辭)를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를,
"역관(譯官) 정사흠(鄭思欽)은 변경(邊境) 백성과 결탁하여 관(館)에 들어가서 몰래 팔았는데, 인삼이 이미 사공 담(司空墰)에게서 나왔으니 사공 담은 바로 잠상의 와주(窩主)187)  이므로 정사흠과 더불어 일체로 논단(論斷)할 것이고, 정세장(鄭世章)은 매매를 주관하였으니 정사흠과 마땅히 다름이 없으며, 백우언(白瑀彦)은 인삼이 이미 잡혔으니 입관(入館)의 율(律)로 논할 것이고, 이업동(李業同)과 이치우(李致雨)는 인삼과 은(銀)을 같이 거래하였는데, 이업동이 멀리 귀양간 이치우에게 추위(推諉)188)  하니 대질(對質)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형조(刑曹)로 하여금 신부(臣府)189)  에 압송(押送)하게 하소서. 안무선(安武善)은 이치우가 은과 인삼을 가지고 거래하였으니, 대질(對質)하고 감안(勘案)하여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의 훈도(訓導)·별차(別差)는 《속전(續典)》에 의하여 나처(拿處)하며, 이제부터 호조(戶曹)의 공문(公文)이 없이 내려오는 것은 모두 속공(屬公)하도록 다시 법을 정하고, 전후(前後) 잠상을 잡은 장교(將校)는 논상(論賞)할 일을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우의정 신만(申晩)이 아울러 시행을 허락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계본(啓本) 가운데 또 논하기를, ‘좌병사 윤태연은 백우언 등을 잡아 가두어서 훈국(訓局)의 삼채(蔘債)를 징출(徵出)하였고, 전 부사 이유신은 속공(屬公)한 삼가(蔘價)를 장문(狀聞)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또한 엄하게 처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은 비록 둘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은 하나이다. 정사흠은 홍우정(洪禹鼎)과 다름이 없으니 홍우정과 일체로 감률(勘律)할 것이며, 사공 담은 인삼이 한 물건이고 연도도 또한 같다. 전번에 이미 처분하였는데 율(律)을 어찌 거듭하겠는가? 정세장은 본토(本土) 사람으로서 잠상의 주인과 다름이 없으니, 동래 부사로 하여금 한 차례 엄하게 형을 가한 뒤에 도배(島配)할 것이며, 이업동·안무선·백우언은 또한 이치우와 다름이 없으며 그가 이미 범하였는데, 이치우에게 무슨 경중(輕重)이 있는가를 물어서 이치우와 같이 감률할 것이다. 훈도·별차의 일과, 공문(公文)이 없이 내려온 것은 모두 속공할 일과, 잠상을 잡은 사람에게 논상하는 일은 모두 장청(狀請)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아! 국법은 마땅히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 곳에 미쳐야 할 것이다. 훈국(訓局)은 비록 주전(鑄錢)에 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물화(物貨)가 많은데 어찌하여 금삼(禁蔘)을 허락하겠는가? 이 까닭으로써 허다한 사람의 목숨이 장차 일률(一律)190)  에 빠질 것이다. 만약 인삼 파는 것을 허락함이 없었으면, 어찌 이 일이 있겠는가?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끝을 다스리니, 어찌 형정(刑政)에 어긋나지 아니하겠는가? 또 윤태연이 가까스로 병사[閫任]가 되었으니 스스로 신칙함이 마땅한데, 굽혀서 훈국의 영(令)에 따라 삼상(蔘商)에 간예하였으니, 이 사람을 신칙하지 아니하면 국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훈련 대장 김성응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이며, 은(銀)으로써 인삼을 매매할 때는 반드시 중간에서 환롱(幻弄)한 장교가 있을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사해 신문하여 정배하고 윤태연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도 삼년으로 정배하게 하라. 전 부사 이유신은 그 주착(做錯)191)  된 바가 비록 생각 밖이라 하더라도, 이미 들은 뒤에는 신칙함이 없을 수 없으니,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대사간 유한소(兪漢蕭)를 장기 현감(長鬐縣監)으로, 정언 임성(任珹)을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보외(補外)하라 명하였다. 패초(牌招)를 어긴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앉았는데,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6월 26일 경진

신회(申晦)를 병조 판서로, 서명응(徐命膺)을 대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고, 채제공(蔡濟恭)을 우윤(右尹)에 탁제(擢除)하였다. 장령 이태화(李泰和)를 승지에 탁제하였는데, 그가 열 여덟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아직 대성(臺省)192)  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서 야대(夜對)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게 하였다.

 

6월 28일 임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농민을 불러 보고 농사 형편을 물었다. 하교하기를,
"이달은 선왕(先王)께서 승하하신 달이고, 8월은 바로 〈선왕께서〉 석년(昔年) 탄강(誕降)하신 달이다. 인자(人子)로서 부모를 정성(定省)함이 어찌 날을 가릴 것인가? 중추(仲秋)의 첫 길일(吉日)에 마땅히 명릉(明陵)에 전배(展拜)할 것이니, 산릉(山陵)의 모든 전알(展謁)과 행제(行祭)는 정월(正月)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고, 원량(元良)의 아헌(亞獻)은 전례에 의하여 거행할 것이다. 의릉의 기신에 알릉(謁陵)하는 예(禮)를 정하였으나 바로 추수(秋收)하는 시기에 당하니, 길을 닦을 때에 절대로 농민을 쓰지 말아서 내가 석년에 휼민(恤民)을 체득한 뜻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서 야대(夜對)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숙흥야매잠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늙바탕에 삼강(三講)193)  을 하는 때인지라 홍문관의 여러 신하들이 외지(外地)에 있는 자가 많았으므로, 신칙하여 올라올 것을 명하였다.

 

6월 30일 갑신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주강(晝講)·석강(夕講)을 행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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