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조중회(趙重晦)·장지풍(張志豊)을 승지로,【장지풍은 곧 무승지(武承旨)194) 이었다.】 오수채(吳遂采)를 대사헌으로, 심발(沈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갔다. 승지들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차대(次對)195) 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원량(元良)이 그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인가, 대신들의 탈품(頉稟)196) 이 있어서인가?"
하니, 승지 이태화(李泰和)가 말하기를,
"대신들이 삭제(朔祭)의 재계(齋戒) 때문에 탈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대를 하지 않는 날에는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라고 하교(下敎)하였는데, 오늘은 이를 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승지들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중용(中庸)》을 조강(朝講)하였다. 정언 김응순(金應淳)이 말하기를,
"근래 관사(官師)197) 를 만나보는 규례가 폐지된 지 또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성상께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마 혹시라도 미진해서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능히 언로(言路)를 배양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뭇 신하들의 직언(直言)할 용기가 없는 것도 또한 문책하여야 마땅하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권도(權噵)가 말하기를,
"찬알(贊謁)은 집사관(執事官) 중에서 가장 아래입니다. 김이헌(金履獻)의 일을 남상(南床)198) 에게 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길을 열어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소전(孝昭殿)의 찬자(贊者)를 어찌 감히 ‘남상이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유신(儒臣)의 말이 잘못이다."
하고, 먼저 종중 추고하고, 뒤에 금추(禁推)199) 하게 하였다. 시독관 김종정(金鍾正)과 정언 김응순(金應淳)이 합사(合辭)하여 극력 이를 구원하니, 임금이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지사(知事) 정휘량(鄭翬良)과 특진관 홍봉한(洪鳳漢)이 극력 이를 구원하였으나, 임금의 노여움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특진관 이후(李)가 말하기를,
"종묘(宗廟)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효소전의 찬자 김이헌도 반드시 이를 영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유신(儒臣)과 대신(臺臣)이 능히 잘 대답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체차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 장령 신이복(愼爾復)이 두 손을 맞잡고 가만히 보면서 입을 다물고 한마디의 말도 없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이 특별히 제수(除授)하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구구한 소회(所懷)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유신과 간신(諫臣)이 이미 체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는데, 잠깐 내쫓았다가 도로 불러들이시니, 실로 성상의 덕이 빛납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잠시 물러가 있으라고 명하였다. 다시 들어가니, 임금이 또 엄한 하교를 내리었다. 김종정이 말하기를,
"성인께서 말씀하신 때 귀하게 여기는 것은 중화(中和)200) 인데, 이와 같이 노하시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석연히 깨닫고, 말하기를,
"유신의 아뢴 말이 내 마음으로 하여금 시원스레 깨닫게 하였다."
하고,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모두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보도록 명하였다. 김응순이 혼자서 대신(臺臣)은 다른 관직과 다르다고 하면서 굳이 염치를 지키려고 체차되어 파직되기를 간절히 구하니, 임금이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김종정을 가상히 여겨 포장하기를,
"아뢴 말이 유신의 체모를 깊이 터득하였도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모두가 이와 같다면, 내가 원량(元良)과 더불어 베개를 높이 베고 자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다. 특별히 숙마(熟馬)를 내려 주니, 집현문(集賢門) 밖에서 친히 이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일 병술
교리 홍낙명(洪樂命)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신이 홍경해(洪景海)에게 가서 조문(弔問)하였을 적에 그에게 제문(祭文)의 일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는데, 신이 들은 바의 출처(出處)와 사람들이 말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말을 가지고 대략 묻는 말에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구초(口招)201) 할 때에 이르러 신을 끌어대어 말하였는데, 신이 대답한 말을 가지고 신이 스스로 한 말로 만들며, 신이 말하지도 아니한 것을 가지고 신이 말한 것으로 만드는 등 그는 말을 뒤바꾸고 날조하여 맞추는 짓을 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상정(常情)으로 능히 추측할 수가 있는 바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의정 신만(申晩)을 소견하고, 홍경해와 홍낙명을 함문(緘問)202) 으로 처치(處治)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7월 3일 정해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203) 를 행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숙야잠(夙夜箴)》을 읽도록 하고 어제(御製)로서 자서(自序)를 짓기를 끝마쳤다. 시독관(侍讀官) 정광한(鄭光漢)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는 노여워하기에 마땅하면 노여워하고, 기뻐하기에 마땅하면 기뻐하되,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 것이며, 내 마음으로 하여금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게 한다면, 어찌 사기(辭氣)에 평정함을 잃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도다."
하였다. 형조 판서 이후(李)가 홍경해(洪景海)와 홍낙명(洪樂命)의 함답(緘答)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친히 함답을 예람(睿欖)하고서, 홍낙명이 추기(樞機)의 잘못을 신중하게 다루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그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고 함사(緘辭)를 부병(付丙)204) 하여 말세(末世)의 진신(搢紳)들의 수치를 깨끗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7월 5일 기축
남유용(南有容)과 김양택(金陽澤)을 원손(元孫)의 사부(師傅)로 삼았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회령(會寧)의 〈두만강〉 건너편에 말을 탄 청(淸)나라 사람 3명과 말을 타지 않은 사람 1명이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까지 강가에 출몰하였는데, 그들은 ‘사슴을 쫓는다.’라고 두루 핑계대었으나 강이 가로막혀 있어서 사정을 물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일이 지극히 소홀하였으니, 청컨대 전 부사 이방좌(李邦佐)는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잡아오도록 하며, 북병사(北兵使)는 종중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만이 말하기를,
"홍계능(洪啓能)·송덕상(宋德相)·김양행(金亮行)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나 오히려 정초(旌招)205) 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초선(抄選)하는 예로써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홍계능의 사람됨이 음흉하여, 유자(儒者)로서 이름을 도적질하였다고 식자들이 슬그머니 그를 비웃었다.
공조 판서 윤득재(尹得載)가 졸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고 몹시 슬퍼하였으며, 해조(該曹)로 하여금 모든 여러 가지 상례(喪禮) 등의 일은 후한 예에 따라서 지급하게 하고, 그 아들은 전조(銓曹)로 하여금 복제(服制)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명나라 사람들의 자손들은 군역(軍役)에 충당하지 말고 그 신역(身役)의 지속(紙束)도 또한 면제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7월 6일 경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우의정 신만(申晩)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연달아 양연(兩筵)206) 을 열었는데, 그 글을 읽는 소리는 어떠하던가? 그리고 두건과 복장도 또한 단정하던가?"
하니, 신만이 말하기를,
"명치 사이에 가래가 끓는 증세가 있어서 소리를 내는 데 편하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건과 복장은 매우 단정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강경(講經)한 뒤에 자연히 좋은 자리가 되어 있구나."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글은 중요한 것이 있다. 지난번에 김이헌(金履獻)이 휘령전(徽寧殿)의 대축(大祝)이 되었는데, 효소전(孝昭殿)의 찬자(贊者)로 삼았던 것은 뜻이 대개 있었던 것이다.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정자(正字)의 이름만을 생각하고 예문(禮文)에 실린 글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아니하지만, 이름이 비록 정자라고 하더라도 관직이 참하관(參下官)이므로, 승륙(陞六)207) 하기 이전에는 비록 작세위(酌洗位)208) 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임명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대묘(大廟)의 대축(大祝)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아직 승륙하기 전에는 비록 청망(淸望)으로서 전차(塡差)209) 한다고 하더라도 대축의 사체(事體)로 보면 불가하다. 그러나 만약 당상관의 관직을 거쳤다면, 비록 낭서(郞署)210) 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대축을 할 수가 없겠는가? 이것은 구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7일 신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왕세자가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한 뒤에 이어서 재실(齋室)로 나아갔다.
임금이 동궁(東宮)의 재실로 나아갔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요즈음 원량(元良)은 몸에 더운 기운이 있으니, 행례(行禮)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더위는 전에 비하여 심한데, 재실은 밤새도록 더위가 어제보다 더욱 심할 것이다. 원량이 비록 행례하기를 강행하지만, 대신(大臣)과 춘방(春坊)에서도 또한 그에게 행례하기를 권유하는 것을 지금 내가 이미 눈으로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를 행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남의 아비가 되어서 단지 자식을 말로만 사랑하는 데 그치겠는가?’라는 것이다. 경고(更鼓)211) 가 아직 깊어지기 전이니, 먼저 방에 들어가서 몸을 조리하고, 제조(提調)와 춘방의 요속(僚屬) 의관(醫官)들로 하여금 진후(診候)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에게 명하여 섭행(攝行)하도록 하였는데, 원량이 바야흐로 몸을 조리하는 중에 있어서 능히 행례(行禮)를 할 수가 없다.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명명(冥冥)한 마음이 반드시 섭섭하게 여기리라고 생각되니, 효소전(孝昭殿)에 행례한 뒤에 마땅히 휘령전(徽寧殿)에도 행례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내일도 또한 마땅히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입진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우선 병세를 보아가면서 내전(內殿)에서 마땅히 의관을 소견할 것이다."
하였다.
7월 8일 임진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거행한 뒤에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제사에 참여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의 요속(僚屬)들을 소견하고, 교칙(敎勅)하기를,
"원량을 보필하고 인도하는 책임은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하고, 또 대신(臺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미 춘방에 이미 하교하였다. 그런데, 너희들도 또한 언관(言官)이니, 이러한 기회를 놓쳐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임금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니, 도승지 남태회(南泰會)가 울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에게 항상 엄격한 위엄을 가지고 주로 대하셨기 때문에 저하(邸下)가 지나치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어젯밤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저하께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이 말은 박홍준(朴弘儁)과 가깝다."
하였다. 남태회가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춘방의 말을 들으니, ‘동궁께서 전하가 진전(眞殿)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서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의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한 가운데 이와 같이 초조하고 심려한다면, 어찌 민망하고 절박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어찌 이를 알았다는 것인가?"
하였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동궁이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에 이를 알았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의 청대는 지나치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입대(入對)하기를,
"오늘 새벽에 대조(大朝)께서 진전(眞殿)에 나아가실 때에 소신(小臣)에게 노차(路次)에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하교하시기를, ‘만약에 이와 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한다면, 경은 모름지기 춘방관(春坊官)과 함께 동궁에 입대하여 경계하는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어명을 받들고 물러나와 그대로 즉시 구대(求對)하였던 것입니다. 문침(問寢)과 시선(視饍)은 곧 저하께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저하께서 항상 전하를 진현(進見)하려는 예념(睿念)이야 어찌 간절하지 아니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전하의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황송하게 여겨서 간혹 이를 행하지 아니하시므로, 신이 일찍이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앙달(仰達)하였던 것입니다. 저하께서 비록 엄격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한 번 진현하고 두 번 진현하며 오늘 이와 같이 하고 내일 또 이와 같이 한다면, 대조(大朝)의 성심(聖心)이 어찌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오늘 휘령전(徽寧殿)의 대제(大祭)에 저하께서 행례(行禮)하실 수가 없다면, 예념(睿念)의 거북스러움이 생각건대, 반드시 갑절이나 더할 것입니다. 이 뒤로는 두 혼전(魂殿)에 삭망(朔望) 때 상식(上食)과 다례(茶禮)를 수시로 나아가서 참여하는 것이 곧 저하께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인 것입니다. 비록 혹시라도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할 때가 있을지라도 만약 억지로 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이르지 아니하거든 반드시 몸소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학문과 정사(政事)는 전후로 연중(筵中)에서 신이 또한 이미 앙면(仰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조(大朝)께서는 비록 무더운 여름철을 당하더라도 1개월에 삼강(三講)212) ·삼대(三對)213) 에 한번이라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소대(召對)214) ·야대(夜對)에서 빈번하게 명령을 내리시는 등 우리 대조(大朝)께서 만년의 정사에 부지런하고 힘쓰시는 것을 흠앙(欽仰)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사야말로 대조(大朝)께서 몸소 가르치려는 성의(聖意)이니, 저하께서 한마음으로 우러러 본받아서, 서연(書筵)의 소대(召對)는 평상시에 이를 하도록 하고, 승지의 입대(入對)와 빈청(賓廳)의 일차(日次)도 또한 탈품(頉稟)이 없도록 하소서. 그런데 대조(大朝)께서 하교하신 중에,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은 실로 저하로 하여금 이러한 기회를 타서 더욱더 수양에 힘쓰게 하려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조께서 단지 말로만 사랑하는 데 그치겠는가라는 거룩한 생각은 뭇 신하들이 누구인들 감읍(感泣)하고 칭송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저하께서 반드시 통렬하게 스스로 문책하시어, 한번 지난번의 일을 반성하신 다음이라야 곧 성상의 거룩한 뜻을 우러러 받드는 도리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전날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시어, 뉘우칠 만한 것은 뉘우치시고 고칠 만한 것은 한 칼로 베어내어, 자주 잘못을 반복하는 걱정이 있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대신의 모든 말은 절실하므로, 내가 마땅히 마음에 새겨서 몸받아 이를 행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김종정(金鍾正)에게 명하여 《심경부주(心經附註)》와 서(序)를 읽게 하고, 정원달(鄭遠達)에게 《심경》의 찬(贊)을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 그림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
하니, 정원달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잘못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번(上番)도 이를 알고 있는가?"
하니, 김종정이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의 보는 바가 각기 달랐습니다. 선정신 이황(李滉)은 이 그림을 《성학십도(聖學十圖)》 가운데 넣었습니다. 선정신 이이는 글을 지어서 그 잘못을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선정신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는 모두 이이의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경발휘(心經發揮)》가 또한 있다고 한다."
하니, 김종정이 말하기를,
"《심경발휘》가 있는데 선정신 이황의 문인(門人) 정구(鄭逑)가 지은 것입니다. 《심경부주》 말단에 오(吳)·월(越)이 왕(王)을 참칭(僭稱)하였다는 말은 육학(陸學)215) 을 가리키는 것인데, 선정신 이황도 또한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여 시비를 구분하고 밝혔습니다."
하였다.
공조 참판 이정작(李庭綽)이 졸(卒)하니, 나이 때문에 재상(宰相)으로 올려 주었다.
7월 9일 계사
교리(校理) 이담(李潭)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관(瀛館)216) 의 선임은 그 법이 지극히 엄격한데, 신사운(申思運)은 천박하고 우둔하며, 안표(安杓)는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혹은 대신(大臣)의 족당(族黨)이라 하고, 혹은 문형(文衡)의 가까운 인친(姻親)이라고 하여 이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경옥(李敬玉)·이수훈(李壽勛)·이기건(李耆建)은 본래 지벌(地閥)과 명망이 없는데다가, 비굴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곧 온 세상에서 함께 알고 있는 바인데도, 느닷없이 함부로 이에 참여하여, 고석(顧惜)217) 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홍억(洪檍) 같이 문명(文名)과 재예(才藝)가 있는 몇 사람에 비하여 볼 때에는 본래 자신이 아주 뒤떨어지는데도 또 관록(館錄)218) 에 참여하여, 아무 이유도 없이 발탁되었고, 그 연좌된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불과 연전(年前)의 한 글에서는 ‘이는 장려할 만하므로 죄를 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바로 혐의스러움을 무릅쓰고 권점(圈點)할 때를 당하여 반드시 사람을 뽑고나서야 겨우 그만둡니다. 바로 이러한 한 가지 일에서 그 사사로운 뜻을 함부로 행하고 사람을 취사(取舍)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신이 삼가 보건대, 대신(大臣)들의 차본(箚本)과 여러 신하들의 입대(入對)하는 글에서 ‘참하록(參下錄)에서 권점(圈點)을 무산시킨 일’을 가지고 각자 변명만 하고 모착(模捉)219) 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러한 권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 나라의 체면에 있어서 죄를 경감(輕勘)한 것을 말로써 물어보고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서는, 권점에 참여한 여러 당상(堂上)을 견책하고 파면하는 벌(罰)을 마땅히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우의정 신만(申晩)이 이담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기를,
"이담의 처분을 이미 하교하였다. 경들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더구나 영상(領相)이 이를 듣고서 괴로워하니, 경의 번민이 우상(右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담은 이미 경을 배척할 뜻이 없었는데 더욱이 어찌하여 시애(撕捱)220) 를 고집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가?"
하고, 이어서 명소(命召)를 전하고 면유(面諭)한 다음에 이어서 함께 같이 오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담은 내가 일찍이 그 사람됨을 가상히 여겼는데, 그는 반드시 직언(直言)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담을 소견하고 원서(原書)를 읽고서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그가 논한 여러 사람들을 물어보니, 이담이 역력(歷歷)히 탄핵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이담을 좌천시켜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하고, 이석표(李錫杓)가 외방(外方)에 임명되었을 적에 말을 준 전례를 준용하여 또한 그에게 말을 주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성상께서 탕평(蕩平)의 정치를 힘써 시행하여 노론(老論)·소론(小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당(黨)을 다 같이 하나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세도(世道) 정치의 책임은 오로지 노론에 있었다. 만약 정치가 능히 화평하고 공정하면 족히 건극(建極)의 성화(聖化)를 도울 것인데, 자기들 안에서 또 각기 분열되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어떤 자는 말하기를, ‘동인은 남인 중에서도 북인이므로 서로 경알(傾軋)한다.’라고 하는데, 조종부(趙宗溥)·조영순(趙榮順)이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한 것은 남인이 동인을 공격한 것이며, 박지원(朴志源)이 홍계희(洪啓禧)를 탄핵하고 이형규(李亨逵)·이후(李)를 탄핵한 것은 동인이 남인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이천보·남유용(南有容)이 도당록(都堂錄)221) 의 전선(銓選)을 주관하였기 때문이다. ‘동인이 많이 참여하였다.’ ‘남인이 혹은 빠졌다.’라고 하다가 마침내 이담의 글이 제출되게 되어 혐의와 원망이 더욱 생겼다. 아! 당을 물리치고 당을 만드는 것이 어느 때에 그칠 수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4책 9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9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 사법(司法)
[註 216] 영관(瀛館) : 홍문관.[註 217] 고석(顧惜) : 자중(自重).[註 218] 관록(館錄) : 홍문관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제1차 선거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의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관록이라 함. 홍문록(弘文錄)·본관록(本館錄).[註 219] 모착(模捉) : 진상을 포착함.[註 220] 시애(撕捱) :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워 승강이 함.[註 221] 도당록(都堂錄) : 의정부(議政府)에서 홍문관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선임하기 위한 제2차 추천 기록. 의정(議政)·이조 판서(吏曹判書)·참찬(參贊)·참의(參議) 등이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사람 가운데서 뽑음.
사신(史臣)은 말한다. "성상께서 탕평(蕩平)의 정치를 힘써 시행하여 노론(老論)·소론(小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당(黨)을 다 같이 하나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세도(世道) 정치의 책임은 오로지 노론에 있었다. 만약 정치가 능히 화평하고 공정하면 족히 건극(建極)의 성화(聖化)를 도울 것인데, 자기들 안에서 또 각기 분열되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어떤 자는 말하기를, ‘동인은 남인 중에서도 북인이므로 서로 경알(傾軋)한다.’라고 하는데, 조종부(趙宗溥)·조영순(趙榮順)이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한 것은 남인이 동인을 공격한 것이며, 박지원(朴志源)이 홍계희(洪啓禧)를 탄핵하고 이형규(李亨逵)·이후(李)를 탄핵한 것은 동인이 남인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이천보·남유용(南有容)이 도당록(都堂錄)221) 의 전선(銓選)을 주관하였기 때문이다. ‘동인이 많이 참여하였다.’ ‘남인이 혹은 빠졌다.’라고 하다가 마침내 이담의 글이 제출되게 되어 혐의와 원망이 더욱 생겼다. 아! 당을 물리치고 당을 만드는 것이 어느 때에 그칠 수가 있겠는가?"
7월 10일 갑오
임금이 승지 윤득양(尹得養)을 소견하고, 어제 이담(李潭)의 처분을 잘못하였다고 유시(諭示)한 다음에 이담을 좌천시켜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임명하라고 다시 명하였다.
임금이 남상(南床) 김이헌(金履獻)이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겼다고 하여 특별히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임명하니, 김이헌(金履獻)이 사은(謝恩)하였다. 임금이 그를 소견하고,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말을 들으니, 너의 어미가 어질어서 너에게 남상의 직임을 행하게 아니하고자 한다고 하기 때문에 운각(芸閣)222) 의 자리에 옮겨 임명하는 것이다. 이미 청환(淸宦) 현직(顯職)을 면하였으니, 다시 시애(撕捱)하지 말라."
하니, 김이헌이 말하기를,
"신의 사정이 감히 당돌하게 영광스러운 벼슬길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관직을 옮겨 주시니, 신의 마음도 감격하고, 신의 어머니도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뢰는 바도 순수하다."
하고, 임금이 명하여 그를 6품(品)으로 승진시켜 수령(守令) 가운데 빈 자리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調用)하여 성(城)을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게 하며, 한편으로 그 조상을 추모하는 뜻을 나타내게 하고, 한편으로 그 어미의 현명함을 드러내게 하였다.
형조 판서 이후(李)를 특별히 제수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다.
교리 박필수(朴弼燧)가 홍문관(弘文館)의 직임을 시애(撕捱)하니, 임금이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7월 11일 을미
문학 송영중(宋瑩中)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 부교리 이담(李潭)의 상서한 계본(啓本)을 얻어서 보니, 새로운 관록(館錄) 중에 5인을 끄집어내어 욕하고 꾸짖은 것이 자세하고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전 문학 이경옥(李敬玉)의 이름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가 있었으므로, 신은 이미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경연(經筵)에 나아가 아뢴 말들이 바로 신의 관서(關西) 지방에서 수작한 말들과 관록을 만들 때의 이야기들을 거론하여 파병(欛柄)을 잡는 짓을 하였다고 주장한 사실을 어제 저녁에 비로소 들었습니다. 신은 이경옥과 직접 교제가 없지만, 그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집에 있을 적에 효도하고 우애(友愛)하는 행동이 돈독하고 자기 몸을 경계하여 졸렬한 본성을 삼가는 규범을 지키므로, 영관(瀛館)223) 의 선임과 같은 일에 이르면 처음에는 인물을 취사(取舍)하는 사이에 의문점이 생기지 않지만, 언제나 관록에 적합한 사람을 두루 헤아릴 적에는 반드시 이 사람을 첫번째로 거론합니다. 이담이 신에게 들은 사실은 이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대저 관록을 회권(會圈)할 때에 이르러 신이 과연 그 이름을 먼저 천거하였는데, 부제학 김치인(金致仁)은 실제로 이 권점을 주장하였으나 이경옥과는 사이가 멀어서 그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이 김치인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의 지망(地望)과 재능을 이번 선임에 참여시키지 못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일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김치인이 비로소 그가 어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이 가엾게 여기고 아까와하기를 더하여, 지난 일에 뉘우치고 탄식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도당록(都堂錄)에서 이 사람이 아니면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 가운데에서 여러 번 말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담이 억지로 무고하는 말을 만들어 경연에서 입대(入對)할 때를 당하여 날조하여 말을 한 것은, 이담이 무엇에 근거하여 가볍게 욕하고 무고하기를 더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승지에게 이르기를,
"옥당(玉堂)에서 명패(命牌)를 두 번씩이나 받고도 나오지 아니하는 자는 권도(權噵)인가?"
하니, 조중회(趙重晦)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흔살을 바라보는 늙은 나이로 다시 강연(講筵)을 10년 만에 한 뒤에 명패를 다시 내리는데, 인신(人臣)의 분수와 의리로서 어찌 특별히 어가(御駕)를 기다리지 아니하겠는가? 염우(廉隅)를 비록 크게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처리를 곡진(曲盡)하게 한다면 용서할 만한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법강(法講)을 장차 열 터인데, 명패를 어기는 짓을 일삼는다면, 일의 한심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권도는 비록 같은 또래의 친구들끼리라고 하더라도 직접 거만하게 행동할 수가 없을 터인데, 하물며 군부(君父)이겠는가? 어제 이미 한 차례 염우하다는 것을 보였으니 감히 시애(撕捱)하는 뜻을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이미 직접 아뢰었고, 지금 또 명패를 어기었으니, 권도를 이성 현감(利城縣監)으로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원손(元孫)에게 명하여 글을 외우게 하니, 원손이 《논어》 유필유방장(遊必有方章)을 외웠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필유방(遊必有方)이란 뜻이 무슨 뜻인가?"
하니, 원손이 대답하기를,
"간곳을 찾기가 어려워서 반드시 방위를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숙야잠(夙夜箴)》을 읽게 하였다.
7월 12일 병신
우의정 신만(申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의 사람들은 비록 지친(至親)의 관계에 있더라도 오히려 내직(內職)에 천거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신사운(申思運)은 바로 신의 단문복(袒免服)224) 의 족친이지만, 진실로 그가 현명하다면, 신이 비록 공적으로 그를 천거하더라도 정말로 불가(不可)함이 없을 터인데, 하물며 그의 문장과 학문이 우수하고 그의 성격이 조용하고 스스로 법도를 지키므로, 본래 같은 동료들에게 추앙을 받으며, 여러 의논에 그가 참석하는 것을 또한 모두 허락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권점(圈點)에 참여한 것이 어찌 신의 힘을 빌렸겠습니까? 도당록(都堂錄)의 권점하는 법이 지극히 엄격하고 또 중요하므로, 어떤 사람은 간혹 말하기를, ‘아니다. 감히 그를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혹은 취하고 혹은 버릴 때 하나같이 공의(公議)를 따른다면 비록 그 사사로운 뜻을 스스로 용납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만약 그가 시애(撕捱)한다면 또한 지나치지 아니하겠는가? 또 이담(李潭)이 가슴 속에 가득찬 울분을 참지 못하여 영상(領相)에게 퍼부었기 때문에 그 필봉(筆鋒)이 족당(族黨) 따위의 말에까지 범람(汎濫)하였던 것이다. 그가 깊은 뜻이 없었는데, 경이 어찌 깊이 혐의스러워하는가? 그가 권점하는 자리에 들어가 앉으면 그가 권점하는 사람이라고 배척받으니, 마땅히 일소에 붙여야 하는데, 어찌 족히 마음에 걸릴 게 있겠는가? 즉시 함께 들어와서 나의 직접 유시하는 말을 들어 보라."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입시(入侍)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신이 이미 영상(領相)과 더불어 권점하는 자리에 같이 참여하였으니, 지금 그와 다르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구별하시려고 하시니, 더욱 민망스럽습니다. 할 만한 사람은 뽑아내고 하지 못할 사람이 이를 한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서 사람을 취사(取舍)한 것인데, 신이 어찌 영상과 차이가 있겠습니까? 영상이 홍억(洪檍)에게 어찌 감정을 품고서 뽑아냈을 리가 있겠습니까? 영상의 사람됨이 본래 이와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연전에 조엄(趙曮)이 영상을 지독하게 탄핵하였으나, 영상은 이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조엄의 도당록(都堂錄)을 만들 때 영상이 극언(極言)하여 주장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감정을 품고서 보복한 것이겠습니까? 전일에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도당록에서 심수(沈鏽)를 뽑아냈었는데, 그 뒤에 별로 시비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억의 사건은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또 고(故) 상신(相臣)이 관련된 사건이 있었구나."
하였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유신(儒臣) 이상지(李商芝)가 말하기를,
"이담(李潭)이 사자(士子)였을 때부터 자칭 영상(領相)의 문생(門生)이라고 일컫으면서 밤중에 이부자리에까지 찾아가서 알현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그를 배척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다하여져 교분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담이 이경옥(李敬玉)·신사운(申思運)과 더불어 장난을 치다가 틈이 벌어졌으며, 또 안표(安杓)와 더불어 재종 형제가 되는데 어려서부터 안 표에게 수학(受學)하였기 때문에 이담의 단점을 안표가 잘 알고서 규제하고 경고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노여움이 생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의 사건을 부추기고 억제하는 것에 노하여 이상지를 좌천시켜 해남 현감(海南縣監)에 임명하였다.
7월 13일 정유
호조 참의 이가우(李嘉遇)를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도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전유(傳諭)하기를,
"아! 경의 충성하는 마음은 저 창천(蒼天)에 물어볼 만하도다. 몇 년 동안 경을 임용하면서 부수지소(膚受之愬)225) 를 얼마나 당하였던가? 국구(國舅)의 외손이니, 의리상 휴척(休戚)을 같이해야 할 것이로다. 내가 비록 늙고 쇠약하나 결코 경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니, 경의 항심(恒心)으로 어찌 차마 나를 외롭게 두겠는가?"
하였으나, 이천보가 왕명을 받들지 아니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옛날에 왕명을 힘써 따른 대신을 직접 보았더니, 임금이 몸소 임어(臨御)한다는 하교가 있었다. 경종[景廟]께서 대리로 정사를 보실 때 관직이 사부(師傅)를 겸하였기 때문에 또한 임어하고자 하던 뜻을 보이셨다. 경이 만약 줄곧 왕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도성에 들어오지 아니한다면, 한번 어가(御駕)를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내가 비록 명령을 보내지 않더라도 원량(元良)이 사부를 청할 것인데, 그것도 또한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이다. 아! 지금의 하교는 몹시 놀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일을 몹시 걱정하여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불행하게도 또 도당록(都堂錄)을 감당하여 유신(儒臣)들의 글이 또 제출되게 되었습니다. 한 가닥 정신이 홍억(洪檍)의 사건에 오로지 있지만, 신이 홍억에 대하여 어찌하여 반드시 보복하려는 혐의를 가졌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유신들은 홍억이 지난번에 썼던 글 하나를 가지고 신에게 혐의를 돌리는데, 그 글이 여기 있으니, 전하께서 한번 예람(睿覽)을 거치신다면, 그 혐의스러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신의 말을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전하께서 통촉(洞燭)할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대개 조종부(趙宗傅)와 조영순(趙榮順)의 처분은 모두 과중하였기 때문에 삼사(三司)에 있는 자들이 언관(言官)을 대접하는 도리를 가지고 서로 잇달아 진언(進言)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홍억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글 뜻이 여러 사람에 비하여 실지로 일언 반구라도 신의 몸을 직접 배척한 말은 없었으나, 다만 대간(臺諫)의 체모를 조금 어겼을 뿐인데, 만약 이것을 가지고 조종부의 당류가 되어 신을 욕하였다고 한다면, 이것은 홍억의 본심(本心)이 아닌 것입니다. 신사운(申思運)·안표(安杓) 두 사람은 유신들이 일필(一筆)로 속단하여 재상의 족당(族黨)이고 문형(文衡)의 가까운 인친(姻親)이라고 몰아붙이는데, 그 목적은 다만 두 사람만을 공격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문장과 학문이 우수하고 뛰어나 사우(士友) 간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그들이 도당록에 참여할 것입니다. 신도 또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권점하는 자리에 참여한 두 신하로 하여금 그 죄를 받게 해야 하는데, 신만이 홀로 이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을 내려 용서하고, 도승지를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농민들을 소견하고, 농사 형편을 물어보았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심경(心經)》을 읽게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이석재(李碩載)가 말하기를,
"이상지(李商芝)가 나이가 적은 신진(新進)이므로 경연(經筵)의 자리에 처음으로 나아가서 소회를 모두 아뢰었던 것이며, 주대(奏對)할 적에도 비록 혹시라도 사의(辭意)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이는 그 본심을 따져보면 실지로는 마음 속에 숨긴 바가 없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억제하고 죄를 주는 것이 너무나 지나쳐서 신은 그윽이 전하를 위하여 개탄합니다. 대개 이담(李潭)은 포의(布衣)로 있을 때부터 영상(領相)의 사생(師生)이라고 일컬었으나, 지금 갑자기 영상을 침학하고 욕하기를 이와 같이 합니다. 심지어 그에게 배척당한 몇 사람들도 또한 사사로운 혐의를 가지고 그리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으로는 이 때문에 울분을 터뜨립니다. 이상지의 아뢴 것은 사사로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담이 영상에게 반드시 경알(傾軋)하려는 뜻은 없다. 이상지가 연석(筵席)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추패(麤悖)하다는 두 글자는 매우 아름답지 못하였다. 이담더러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두 글자의 죄목이 될 것인데,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담이 잘못되었다면 영상이 옳은 것이고, 영상이 잘못되었다면 이담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영상에 대하여 불만이 많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7월 14일 무술
임금이 하루 동안에 세 번 명소(命召)하였으나,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오지 않았다. 임금이 어가(御駕)를 내도록 명하여 몸소 친림(親臨)하겠다고 하교하니, 이천보가 즉시 들어와서 사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원보(元輔)226) 를 그대로 두고 이담에게 곤란을 당한다면, 경을 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언제나 신이 겁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신의 기력이 진실로 홍억(洪檍)을 도당록(都堂錄)에서 뽑아내기에는 부족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이상지(李商芝)를 외방에 보임(補任)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정지시켰으니, 이천보(李天輔)가 구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7월 15일 기해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전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그대로 임명하라고 명하니, 비국 당상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윤태연(尹泰淵)은 이미 정배(定配)되었는데, 훈련 대장이 또한 어찌 혼자서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뢰는 바가 진실로 옳다."
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비국 당상 김상복의 아뢰는 바를 들어보니, 처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전 훈련 대장 김성응이 그 길을 열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몰래 장사를 하였겠으며, 전후의 동래 부사(東萊府使)도 또한 어찌 형벌을 받았겠는가? 윤태연의 몸은 수신(帥臣)227) 을 맡아서 오로지 명령만을 따랐던 것뿐이지만 어찌 투비(投畀)228) 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근본 책임은 훈련 대장에게 있다. 김성응도 마땅히 윤태연과 그 형벌을 똑같이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집안 노인을 공경하여 남의 집안 노인에게 미치는 것이 바로 혈구지도(絜矩之道)이다. 김성응(金聖應)이 1백살을 바라보는 늙은 편모(偏母)가 있으니, 특별히 투비의 형벌은 용서하여 주고 5등의 고신(告身)을 빼앗는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또한 김상복에게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심경(心經)》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공(伯恭)이 가사(家事)를 타파(打破)한 것은 비유하건대, 아비가 그 자식을 가르치다가 혹시라도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는 점이 있으면 그 아비가 문득 화를 내어 그 아들을 매질하는 것과 같도다."
하니, 홍자(洪梓)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정말로 옳습니다. 부자지간(父子之間)과 같은 경우에는 책망이 너무 심하여 그 아비가 혹은 그 아들에게 화를 내다가 매질하게 되면, 은정(恩情)이 저절로 도리어 사라지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자식을 바꾸어서 가르친다.’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옳도다. 아비가 된 마음은 반드시 그 아들을 진선 진미(盡善盡美)하게 만들고자 하여 털끝만치라도 미심쩍은 곳이 있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만약 직접 스스로 가르치다가 혹시라도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면, 반드시 화를 내어서 매질을 하니, 은의(恩義)가 도리어 상할 뿐만 아니라 그 학문하는 바도 또한 반드시 이루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7월 17일 신축
임금이 모년(暮年) 자서문(自序文)을 친히 지었다.
원경순(元景淳)을 대사헌으로, 황인검(黃仁儉)을 대사간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원손(元孫)의 사부(師傅)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천거하여 홍봉한(洪鳳漢)을 훈련 대장으로, 정여직(鄭汝稷)을 어영 대장으로, 정찬술(鄭纘述)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7월 19일 계묘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심경(心經)》을 읽게 하였다.
정언 엄인(嚴璘)을 특별히 부교리로 제수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7월 20일 갑진
부사직 남유용(南有容)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과 안표(安杓)가 비록 연혼(連婚)의 친분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원래 상피(相避)할 만한 혐의가 없는 특별한 하나의 지구(知舊)일 뿐입니다. 비록 신이 스스로 그를 천거하였다고 하나, 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데, 하물며 그 바탕과 행동, 문장과 학문이 본래 선비와 친구들 사이에서 추앙을 받으므로, 신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그 이름이 이미 공좌(公座)에서 나왔으니, 신이 어찌 법에 규정된 이외의 혐의를 스스로 꺼려하여 여러 동료들의 논의를 굳이 거절하겠습니까? 또 신이 어찌 불우(不虞)의 배척을 껄끄럽게 여겨서 남의 방금 승진하려는 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경옥(李敬玉)·신사운(申思運)은 진실로 합당한 인선(人選)이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서도 좋다고 허락하였고, 신도 또한 이를 좋다고 허락하였는데, 이담(李潭)이 이미 신더러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의(公議)를 무시했다고 지목하니, 이것은 곧 인신(人臣)의 지극한 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명(离明)께서 위명(威命)을 빨리 내리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전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통촉(洞燭)하여 모조리 아시니, 그 어찌 시애(撕捱)하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들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모든 속전(續田)은 비록 혹은 기경(起耕)하는 대로 조세를 거두지만, 조세를 거둘 적에 원전(元田)의 세액(稅額)에서 감해 주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에서부터 전정(田政)의 법례(法例)가 되는데, 오로지 황주(黃州)·봉산(鳳山) 두 고을의 속전에서만 매 결(結)에서 4두(斗)를 감해서 받았으며, 이를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으니, 비단 그 부세(賦稅)하는 법이 법전에도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이것은 다른 고을에도 없는 바이므로, 그 명분도 바르지 못하고 뒷날의 폐단도 있으니, 금년을 시작으로 하여 다른 예(例)에 의하여 일체로 조세를 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7월 21일 을사
집의 김원행(金元行)이 상서(上書)하여 사직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여러 번 명소(命召)하였으나, 능히 초치(招致)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정성이 적은 때문이므로, 지금까지 마음속에서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대조(大朝)께서 한 달에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고 빈대(賓對)를 행하는 등 정상에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또 산림(山林)에서 덕(德)을 닦은 선비들에게 특별히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아! 그대는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학문과 덕행을 겸비하여 순수하고 돈독하므로, 경연에 출입하면서 성상의 뜻을 받들어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고 경전의 심오한 부분을 명쾌하게 해석하는데, 그대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그대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바로 속히 올라와서, 성상의 정사에 부지런하고 선비들을 돈독하게 명소(命召)하는 지극한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한림(翰林)229) 이 비록 설서(說書)230) 가 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한림이 승륙(陞六)하는 기한에 준하고 설서라고 하여 빨리 승륙하지 말게 하는 일을 정식(定式)하라고 명하였다.
7월 23일 정미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참의로, 홍계능(洪啓能)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병조 참의 윤동승(尹東昇)을 소견하고, 명하여 중종[中廟]의 지장(誌狀)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종께서 장경 왕후(章敬王后)를 사랑하여 그 친족에서 간택한 결과 문정 왕후(文定王后)를 얻었던 것이다. 장경 왕후가 병환이 위독했을 때에 붓을 잡고 손수 글을 쓰기를, ‘원자(元子)가 잉태하였을 때에 꿈에 어떤 사람이 고(告)하기를, 「이 아이가 태어나거든 이름을 억명(億命)이라고 지으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인종(仁宗)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方)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존중(李存中)의 사건이 그 부형(父兄)과 관계되는데, 신은 정부를 두둔하였으나, 이존중이 은전(恩典)의 낙점(落點)을 언제나 받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편안치 못하였습니다. 조영순(趙榮順) 등 4대신(大臣) 집안의 남아 있는 후손들은 아직도 10세대를 너그러이 봐주고, 윤급(尹汲)은 본래 장점이 많은 데도, 가장 정밀한 정사의 전주(銓注)에서 그 종손 윤시동(尹蓍東)의 사고 때문에 어찌 끝내 그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박지원(朴志源)이 한 사람의 재상(宰相)을 논박하였다고 또한 어찌 그를 영원히 벼슬길에 못 나오도록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심경(心經)》을 읽게 하였다.
7월 24일 무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심경(心經)》을 읽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동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을 소견하였다. 그의 나이가 많은 것을 불쌍히 여기고 이어서 그의 마음이 편안하고 욕심이 없는 것을 칭찬한 다음, 후한(後漢) 탁무(卓茂)231) 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특별히 지중추원사에 임명하였다.
7월 25일 기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들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권도(權噵)를 외방에 임명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정지시켰으며, 또 신응현(申應顯)을 석방시켰는데, 대신들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왕손(王孫)의 사부(師傅)를 소견하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유신(儒臣)들을 불러서 《심경(心經)》을 읽도록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7월 26일 경술
함경도 온성(穩城) 유학(幼學) 오태섭(吳泰燮)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청(淸)나라 차사원(差使員)의 폐단은 곧 북로(北路)의 공통된 근심거리인데, 6진(鎭)이 심하지만 온성(穩城)이 더욱 심합니다. 왜냐하면,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의 경우는 해마다 개시(開市)하는 장소로 되어서, 1로(路) 21주(州)의 민력(民力)을 합하여 물자를 도와주므로 2부(府)에서 저들을 접대하는 비용이 오히려 여유가 있으며, 무산(茂山)과 경흥(慶興)의 경우는 하나는 두만강 상류에 있고 하나는 두만강 하류 지방에 있어서 오랑캐 사람[虜人]들의 거래(去來)하는 것과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종성(鍾城)과 온성의 두 고을만은 두만강 중반의 요충지에 있으면서 회령부·경원부 2부의 사이에 끼어 한 해를 걸러서 청나라 차사원이 반드시 경유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이동하든 지 머물든 지 수 십일 동안 받는 폐단은 대략 같습니다. 종성에는 또 병사(兵使)와 평사(評事)가 군영(軍營)을 옮겨가서 관할하기 때문에 오랑캐 추장들이 꺼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온성만은 저들이 침학(侵虐)하려고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끝없는 욕심을 채웁니다. 심지어 우리 관원의 우두머리를 매질까지 하기에 이르며, 뇌물의 세폐(歲幣)가 해마다 더한층 증가합니다. 온성에서 2부(府)에 물자를 도와주는 역(役)도 이미 다른 고을과 같은 데다가 한 해를 걸러서 저들을 접대하는 비용도 또 편고지역(偏苦之役)을 면치 못합니다. 비록 불모의 토지에서 거두어들이고 생민(生民)의 고혈을 짜더라도 장차 그 폐단을 헤아려서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글의 내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등대(登對)할 때에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숙야잠(夙夜箴)》을 읽도록 명하였다.
7월 28일 임자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7월 29일 계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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