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인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갔는데, 융복(戎服) 차림으로 검암(劍巖)에 이르렀을 때 큰 비가 소나기처럼 내렸다. 왕세자가 어가(御駕)를 수행하다가 예후(睿候)가 편찮으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차가운 비에 축축히 젖어서 기운이 능히 안정되지 아니한 것이다. 비록 억지로 행하고자 하더라도 예절을 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즉시 가마를 타고 돌아가라."
하고, 돌아가서 몸을 조리(調理)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벼와 보리가 홍수에 잠겼다고 하여, 감선(減饍)을 10일 동안 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시사복(視事服)을 갖추어 입고 능(陵) 위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친히 제사를 지낸 뒤에, 소차(小次)로 돌아와서 최복(縗服)을 갖추어 입고 능 위에 나아가 곡(哭)하고, 슬퍼하기를 다하였으며, 정자각(正字閣)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낸 뒤에, 시사복을 갖추어 입고 익릉(翼陵)에 나아가 봉심하였다. 이어서 홍릉(弘陵)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능 위에 나아가 곡하고 슬퍼하기를 다하였고, 소차로 돌아와서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환궁(還宮)하다가 주정소(晝停所)232) 에 이르러, 경기 감사와 각사의 차원(差員)을 소견하고 상(賞)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양 군수(高陽郡守) 나충좌(羅忠佐)를 잡아 들여서 엄하게 문책하고 잡아서 데려 나가게 하였는데, 연군(烟軍)인 전부(田夫)에게 길을 닦게 하여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대가(大駕)가 환궁(還宮)하니, 왕세자가 궁궐을 나가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3군문(軍門)의 대장(大將)을 소견하고 군사들 사이에 질병이 없는지를 물어보았다.
8월 2일 을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기 감사와 각사 차원(差員)을 부르고, 경기의 양전(量田)을 다시 하는 고을에서 당년에 내는 결전(結錢)을 특별히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8월 4일 정사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하고, 충청도의 진전(陳田)을 다시 양전하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8월 5일 무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8월 6일 기미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동교(東郊)·서교(西郊)의 백성들을 소견하고 화재(火災)가 어떠한지를 물어보았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명하여 그 상언(上言)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서울과 외방(外方)의 민폐(民弊)를 상언(上言)하면 가져다가 아뢰라는 명은 바로 지난해 내린 덕음(德音)을 우러러 몸받는 뜻이다. 내일 대신(大臣)들과 기판(騎判)233) ·호조 당상·선혜청(宣惠廳) 당상들이 입시(入侍)하거든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다.
8월 7일 경신
달이 저성(氐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니, 대신과 병조 판서·호조 판서·선혜청(宣惠廳) 당상이 입시(入侍)하였다. 경상도 안음(安陰) 등의 세 고을에서 내는 대동 군포(大同軍布)의 마포(麻布)는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서 다 바치도록 허락하고, 충청도 단양(丹陽)과 회인(懷仁) 두 고을에서 을해년234) 에 바치지 못한 대동 군포는 탕감(蕩減)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을 소대(召對)하고, 《심경(心經)》을 읽도록 명하였다.
8월 8일 신유
사학 유생(四學儒生) 송환익(宋煥翼)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니, 왕세자가 하답(下答)하기를,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번거롭게 품지(稟旨)할 수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유신들에게 《심경(心經)》을 읽도록 명하였다.
8월 9일 임술
임금이 재전(齋殿)에 나아가니,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이 입시(入侍)하였는데, 구 윤명이 말하기를,
"신이 그저께 입직(入直)한 뒤에 삼가 들으니, ‘지난 밤에 성심(聖心)께서 밤새도록 번민하시다가 밤을 지새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로 자식을 가르치는 극진한 도리가 아닙니다. 송(宋)나라 유학자 장식(張栻)235) 의 말에 이르기를, ‘부형(父兄)이 자제(子弟)를 가르치는 도리는 뜻을 길러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뜻을 길러준다는 것은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길러주는 것처럼 관용으로 용납하고 의리(義理)로 가르치고 충신(忠信)으로 길러주면, 그 밝은 면에 눈을 뜨고 그 유혹하는 바를 물리치므로, 그 방법만을 이끌어 주고 그 스스로 깨우치기만을 기다리는데, 이것이 어찌 세월의 공적이겠습니까? 주자(朱子)도 또한 말하기를, ‘뜻을 기른다는 것은 함육(涵育)하고 훈도(薰陶)하여 그 스스로 교화(敎化)되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성현(聖賢)의 말씀은 실로 교양(敎養)을 제일 중요한 도리로 내세운 것이며, 한갓 엄격하고 무섭게 하는 것만이 교양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이미 다 하여 보았다."
하고, 임금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금일 춘방(春坊)에서 입대(入對)할지의 여부를 물어보게 하였다. 주서가 돌아와서 다시 ‘동궁(東宮)이 바야흐로 황송(惶悚)한 가운데 있으므로 춘방에서 감히 청대(請對)하지 못한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더욱 가소롭다. 이미 황송한 가운데 있다면 더욱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나 바로 이것을 가지고 핑계를 삼으니, 진실로 한심하다."
하고,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몸이 사부(師傅)의 자리에 있으면서 능히 보도(保導)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데, 단지 중관(中官)236) 의 죄만을 청하고 또 명을 기다리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하였다.
8월 10일 계해
김양택(金陽澤)을 대사성으로, 채제공(蔡濟恭)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무사(武士)와 군졸들의 활을 쏘는 시험장에 친림(親臨)하고, 합격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 주었다.
8월 11일 갑자
사학 유생(四學儒生) 김이용(金履鏞)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비록 포악하다고 하지만 모초(茅焦)의 간언237) 을 따랐으니, 어찌 영웅이라 할 만한 임금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나라를 창업(創業)한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8월 12일 을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 밤에 성심(聖心)께서 밤새도록 번민하면서 지새웠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하셨다면, 성상의 옥체를 손상함이 반드시 많았을 것입니다. 신 등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성궁(聖躬)을 보호한다.’[保護聖躬]는 네 글자입니다. 동궁(東宮)의 자질은 천고(千古)에 빼어나는데,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관대하게 그를 포용하여 그 개도(開導)하는 방도를 다하신다면 차질이 없이 덕성(德性)을 이룰 것이며, 저절로 털끝만한 잘못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명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다. 몸이 사부(師傅)의 자리에 있으면서 능히 왕세자를 보도(輔導)하지 못하고, 나의 잘못이라고 하여 연달아 명을 기다리니, 내가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겠는가?"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좌상이 명을 기다리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성상의 하교를 부지 런히 받들다가 부득이 대명(待命)하는 것이니, 이것은 오로지 슬프고 괴롭고 속타고 쫓기는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언제나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지나친 조처로 돌리는데,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하니, 이천보가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죽을 죄가 있어서 이와 같은 하교(下敎)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아까 춘방(春坊) 요속(僚屬)들의 말을 들으니, 동궁(東宮)께서 양연(兩筵)238) 을 열고자 하나 황송(惶悚)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양연을 여는 것을 허락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에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인도하여 계달(啓達)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나의 뜻 때문에 계청(啓請)하니, 이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도 또한 대궐을 나가서는 명을 기다리려고 하는가?"
하니, 이천보가 울면서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삼가 마땅히 명을 기다리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전정(殿庭)의 맨바닥에 엎드려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좌의정 김상로(金相魯)를 처분한 일을 구두로 아뢰고, 이어서 재전(齋殿)에 나아가 영의정 이천보와 좌의정 김상로를 파직시키고,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를 영의정으로, 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도록 명하였다.
8월 13일 병인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계단 위로 급히 올라가서 부복(俯伏)하고 말하기를,
"삼가 어제 저녁에 내리신 초책(草冊)239) 에다 기주(記注)할 만한 사실을 써넣으라는 명령을 보았는데,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조처가 계십니까? 쓰지 말도록 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요, 이를 쓰도록 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신하의 직분상 절대로 감히 할 수가 없는 짓입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문서를 돌려드릴까 합니다."
하고, 이어서 옷소매 가운데에서 전교(傳敎)를 꺼내어 어안(御案) 앞에다 꿇어앉아 놓으니, 한참 동안 있다가 임금이 마지못하여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240) 의 말이 옳다. 내가 마땅히 이를 받아들이겠다."
하였다.
8월 14일 정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원인손(元仁孫)을 승지로 삼았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상소하여 힘쓰도록 아뢰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금번의 조처를 내가 어찌 그리 하기를 기꺼워하겠는가? 바야흐로 공묵합(恭默閤)에 거처하면서 마음 속에 구하는 것은 ‘참는다[忍]’ ‘입다문다[默]’라는 것이다. 아! 대신들이 왕세자의 사부(師傅)를 겸하고 있는데도 그 명분(名分)을 오히려 잊어버리고 있으며,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귀머거리·눈봉사 노릇하는 것을 습속으로 삼고 벙어리처럼 행동하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삼고 있다. 오늘날의 재상이 한기(韓琦)241) 처럼 행동하고 이목의 관원이 고윤(高允)242) 처럼 행동한다면, 그들이 비록 만 가지 정사를 이미 열심히 하지 않는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마음이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옛사람들의 보궤 불식(簠簋不飾)243) 한 뜻을 본받아서, 재상의 관직이라 일컬으면서 일을 처리하는도다. 경의 소장을 보니, 전 영상(領相)과 전 좌상(左相)처럼 까닭없이 내 뜻을 거스리려고 그리하는 것 같다. 아! 나의 금일의 마음이 어찌 번민스럽지 아니하겠으며, 어찌 곤혹스럽지 아니하겠는가? 설령 혹시라도 내가 좌상(左相)에게 과중하게 처리한 점이 있다면 나는 결코 이를 지나쳐버리지 못하겠도다. 그러나 반드시 말하기를, ‘신의 몸은 족히 긍휼히 여길 것이 못되나 중앙과 외방에서 이를 청문(聽聞)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전하의 이번 조처에 신은 남몰래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마땅히 마음을 억누르고 웃으면서 위로할 것이다. 중관(中官)244) 에게 더 한층 엄한 조처가 있었을 때, 또한 마땅히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간쟁(諫爭)하기를, ‘신은 중관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나라를 위해서입니다.’라고 하였다면, 내가 마땅히 감동하여 마음을 돌렸을 것이다. 전 영상(領相)이 억지로 참고서 등대(登對)하였을 때 내가 어찌 그 마음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그가 단지 선천(先天)의 들을 말을 되풀이할 뿐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 구대(求對)하는 바가 어찌 앞뒤가 바뀌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下敎)를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구대(求對)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영상이 사부(師傅)를 겸직한 체모이겠는가? 원량(元良)이 지금 바야흐로 청정(聽政)하는데, 그가 진달(陳達)할 것이 있다면, 어찌 나에게 상관하겠는가? 비록 원량이 청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직책이 사부의 관직에 있으므로, 무슨 규간(規諫)하기에 힘쓸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또한 어찌 나에게 상관하겠는가? 직책이 사부에 있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전교(傳敎)를 기다린 다음에야 춘방(春坊)의 요속(僚屬)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무릇 힘써 진달할 때에 그는 반드시 대조(大朝)의 말씀을 받들었다고 일컫을 것이요, 다만 중앙과 외방으로 하여금 그 임금이 까닭 없이 지나친 조처를 하였다고 일컫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기질을 부리는 것 같다면, 어찌 명(命)을 기다릴 때에 이를 처분하지 아니하고 조용하게 날을 보냈다는 말인가? 그 사유를 따진다면 원인이 임금에게 있겠는가, 재상에게 있겠는가? 지금 경의 소장에도 또한 어찌 규각(圭角)245) 이 없겠는가? 그러나 통틀어서 나더러 까닭없이 지나친 조처를 하여서 그러한 것 같다면, 나는 그윽이 경을 위하여 깊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그 의리가 있는 쪽으로 같이 돌아가고자 하는가? 영상은 오히려 아무런 동정(動靜)도 없는데, 다만 경 한 사람만이 이와 같이 지금의 나라 일을 돌아보니, 내가 참으로 말을 아니하고자 한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설서(說書)의 제도를 정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나라에서 관제(官制)를 마련하고 직책(職責)을 나누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곧 나라를 위하여 마련하는 것이다. 초사(初仕)로서 분관(分館)246) 하는 제도를 가지고 말한다면 옛날에는 교서관(校書館)에서 명공(名公) 거경(巨卿)이 된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운각(芸閣)247) 을 마치 천직(賤職)으로 보기 때문에 비록 운각에 분속(分屬)되는 자도 반드시 국자(國子)248) 의 예에 따라서 임용된 다음이라야 이에 그만둔다. 아! 한림(翰林)과 설서가 비록 ‘초사(初仕)의 청선(淸選)’이라고들 하지만 한원(翰苑)과 춘방(春坊)에는 스스로 차례가 있다. 설서는 청정(聽政)할 때에 비록 사관(史官)을 겸임하지만, 어찌 청구(靑丘)의 사필(史筆)을 잡은 듯이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설서는 하나같이 한림에서 천거(薦擧)하는데, 한권(翰圈)249) 을 받은 뒤에는 설서가 한림보다 무겁게 되어, 소시(召試)250) 할 적에도 면(免)하려고 반드시 꾀한다. 설서의 관직에 대하여 하나의 청선의 자리로 만들어 수시로 이정(釐正)하고 또한 시왕(時王)이 제도로 만들었는데, 그 관직이 옛날에는 귀하고 지금은 천한 것은 오로지 임금의 자리에 있는 자의 명령을 내리는 데에 달려 있다. 금후로는 설서는 따로 통청(通淸)251) 하지 말게 하고, 한림 소시(翰林召試)할 때에 합하여 고시(考試)하고, 차상인(次上人)을 의망(擬望)에 추천한다면, 설서의 통청은 저절로 한원(翰苑)의 수중에 있게 되므로, 관명(官名)은 스스로 차례가 있게 될 것이며, 한번 소시하여 그 두 가지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사국(史局)은 이로 인하여 무거워질 것이며, 분경(奔競)252) 은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제도로 정하여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5일 무진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고, 이어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갔다.
이조 판서 이후(李)를 특별히 제수하여 우의정으로, 신만(申晩)을 좌의정으로 삼고,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고, 전 참판 이창수(李昌壽)를 발탁하여 판윤(判尹)으로 제수하였다.
8월 16일 기사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아! 대략은 지금 좌상(左相)의 비답에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 그 처분한 것이 마음이 괴로운 데에서 나왔다. 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창창(蒼蒼)한 하늘이 환히 내려다본다. 이미 척강(陟降)을 아뢰었는데, 이러한 연고 때문에 삼공(三公) 가운데 두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다. 아! 지난번에 내가 경에게 이미 유시한 것은 지나간 일인데, 지금 어찌하여 이를 들먹이는가? 끌어다가 복직(復職)을 시키고자 한다면 경을 두고서 그 누구에게 부탁하겠는가? 아! 경은 두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으로서 자성(慈聖)의 선온(宣醞)을 받들던 날에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같이 참여하였도다. 아! 자성(慈聖)께서 경과 김 봉조하(金奉朝賀)를 거론하면서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고 감회에 젖었으니, 이러한 마음이 한결같이 갑절이나 더한다. 이러한 때에 원보(元輔)는 황구(黃耉)253) 고신(故臣)에서 마땅히 구하여야 하는데, 더구나 경은 너그럽고 큰 도량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니, 어찌 경이 다만 백관(百官)들을 영솔(領率)할 뿐이겠는가? 원량이 스스로 공경하고 꺼려할 만한데, 지금에 와서 경을 중복(重卜)254) 한 것이 어찌 우연한 뜻이겠는가? 지금에 한결같은 마음은 오로지 종묘와 나라와 원량뿐인데, 이러한 때에 원보를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성의 뜻을 몸받고, 소자(小子)의 이러한 마음을 돌아보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8월 20일 계유
식년(式年) 감시(監試)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좌의정 신만(申晩)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성심(聖心)께서 번민하시는 것이 근간(近間)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차대와 강연(講筵)을 공공연히 정지하시는데, 국사(國事)의 끝이 없는 일들을 마땅히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대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를 하려면, 마땅히 주강(晝講)을 먼저 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차대는 결코 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신이 전 좌상(左相)과 더불어 동궁(東宮)께 입대(入對)하여 정사에 힘쓰도록 아뢰었더니, 저하(邸下)의 마음은 한결같이 두려워하고 경계하기를 더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이 만약 책임을 뉘우치고 잘못을 고치는 일이 있다면, 강연과 차대를 내가 마땅히 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좌의정 신만(申晩)이 청대(請對)하여 입대(入對)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말씀하시기를, ‘원량이 잘못을 뉘우치는 하령(下令)을 내린다면, 내가 마땅히 다시 강연과 차대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으니, 더욱 절박하고 황공합니다."
하고, 이어서 여러 승지들로 하여금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게 하였고, 승지들로 하여금 왕세자 자신을 꾸짖는 글을 쓰도록 하령(下令)하였다.
8월 22일 을해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생쥐들이 곡식들을 해치는 손재(損災)가 있었다.
8월 23일 병자
교리 이복원(李福源)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경연(經筵) 중에 ‘관리(館吏)가 책(冊)을 붙잡고 울었다.’는 말씀을 삼가 듣고, 즉시 대료(大僚)의 소비(疏批)를 삼가 보았더니, 전하께서 무슨 마음으로 강연(講筵)의 강론하던 책들을 궤짝 속에 간직하라고 유시하셨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는 전하께서 실언(失言)하심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강연(講筵)을 설치하는 것은 성학(聖學)을 배우기 위해서인데, 뭇 아랫사람들의 죄 때문에 성상께서 학업을 폐지하시니, 이것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전하께서 근일에 강론하신 책이 3개나 됩니다. 《중용(中庸)》은 그 첫번째 뜻이 바로 희(喜)·노(怒)·애(哀)·낙(樂)의 발생되는 곳에 공력(工力)을 기울이자는 데에 요체가 있으며, 《심경(心經)》 1부는 모두 본원(本源)의 바탕을 함양(涵養)하기 위해서이며, 《숙야잠(夙夜箴)》에 또한 이르기를, ‘마음이 침착하고 고요하면, 정신이 안정되고 생각이 없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삼아 성심(聖心)이 편안치 아니하실 때에 이러한 따위의 문자(文字)를 자주 꺼내서 소리내어 읽어보시고 자세히 뜻을 새기며, 반복하여 몸소 체험하신다면, 반드시 번뇌(煩惱)를 없애거나 씻어주어 중화(中和)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좌의정 신만(申晩)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엄숙히 조심하면 날로 강건해지며, 편안하고 방종하면 날로 나약해진다.’고 하더니, 내가 일전에 차대(次對)하고 강연(講筵)할 때에는 기운이 조금 나아지는 듯하였으나, 하루를 정지하고 폐지하자 기운이 도리어 강건하지 못하였다. 작년 이후에 더욱더 말할 수가 없을 만큼 한 가지 마음은 종묘와 국가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강연과 차대를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결코 행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동궁(東宮)의 하령(下令)을 입람(入覽)하도록 명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를 입람(入覽)한다면 반포(頒布)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으므로, 처음부터 입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실로 지극히 자애로운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만약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한다면 좋을 것이다. 《속상훈(續常訓)》도 또한 볼 만한 것이다."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마땅합니다. 마땅히 이를 춘방관(春坊官)에게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일찍부터 병이 많으니, 걱정스럽다."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동궁의 기품이 침착하고 심후(沈厚)하여 지중(持重)한 덕을 가졌으니, 비록 혹시라도 한 때의 잘못이 있을지라도, 만약 전하께서 순순히 직접 타이르신다면, 반드시 확연하게 깨닫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와 좌의정 신만(申晩)이 입시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삼가 궁관(宮官)의 말을 들으니, 저하(邸下)께서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다고 하므로, 신은 일찍이 삼가 칭송하였습니다. 근래에 성상의 마음이 편찮으시니, 걱정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어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신다면, 마땅히 생각하고 이해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곧 하늘입니다. 그 일이 잘못되거나 그 일이 실패한 것을 점검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아까 ‘입람(入覽)한다면 반포(頒布)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입람(入覽)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하교를 하셨는데, 이것은 실로 지극히 자애로운 지극한 덕에서 나온 것이므로, 신은 감격하여 눈물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바가 너무나 절실하므로, 마땅히 마음에 명심하고 몸소 실행하겠다."
하였다.
8월 24일 정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을 소견하고,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영상·좌상·호조 판서를 소견하니, 여러 신하들이 차대(次對)와 강연(講筵)을 다시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8월 25일 무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니, 선혜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입시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갑술년255) 에 관동(關東) 지방의 상정법(詳定法)을 이정(釐正)할 때에 결역(結役)256) 의 가장 무거운 곳과 연호전(煙戶錢)257) 가운데 상정법에 들어가 있는 것을 참고하니, 마땅히 변통(變通)해야 하였으나 대신 충당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그 고을의 규례에 따라서 그대로 두었던 것입니다. 지난번에 좌상(左相)의 건의로 인하여 신이 뒤따라 구획(區劃)하여 우러러 품지(稟旨)하여야 마땅하다는 뜻을 가지고 정탈(定奪)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획한 일의 두서(頭緖)가 다단(多端)하여, 선혜청에서 양남(兩南) 지방의 포(布)를 백성들에게 거둔다면, 무명과 서로 같아질 것이지만, 그러나 서울에서 쓴다면 무명에 비하여 반이 될 것입니다. 공물(貢物) 값이 오르내리므로, 원래의 분수(分數) 이외에 혹은 3필(疋)로써 쌀 1석(石)을 대신 충당하는 데에 씁니다. 그러므로 문득 이것을 각처(各處)에 돌려서 요리(料理)의 미천을 얻고자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오래도록 창고 가운데 버려 두어서 그대로 쥐들이 파손하게 만듭니다. 지금 1백여 동(同)을 균역청에 이송(移送)하여, 이것으로 하여금 종전에 포를 대신 지급하던 곳에 보충하여 지급하게 하고, 그 값을 계산하여 강원청(江原廳)에 보내면, 강원청에서는 연례(年例)대로 구획하여 오던 양남지방의 쌀은 3필로써 1석의 쌀을 대신하는 규례에 의하여 수량을 계산하여 그대로 머물러 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거행할 도(道)에서는 각청(各廳)이 절목(節目)을 만들어 준행한다면, 일이 매우 편하고 순조로와질 것이며, 본도(本道)에서 감량하는 수량도 또한 족히 상당할 것입니다. 다만 본도에서 상납(上納)하는 수량도 매우 적어질 것이지만, 전조(錢條)가 없지 아니하므로, 균역청의 각가지 상납전(上納錢)을 가지고 이처럼 감하여 지급한 수량을 보충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본청에서 즉시 준비하여 보고한다면, 서울과 외방이 모두 편할 것이며, 관동 지방의 백성들이 은혜를 입는 것도 실로 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절목을 만들어서 이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6일 기묘
김상복(金相福)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대신이 정사를 품신(稟申)할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 신만(申晩)이 변방 지역의 수령(守令)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오는 자를 임명해서 보내지 말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변방 지역의 수령과 변장(邊將)으로서 근무 기한이 차기도 전에 빨리 자리를 옮기는 자는 병으로 파직되거나 좌천되어 파직되거나를 논하지 말고 변방 지역의 이력(履歷)을 가지고 시행하지 말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영장(營將)으로 새로 승자(陞資)하는 것은 15개월을 기한으로 하고, 구 당상(舊堂上)은 1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자리를 옮기지 말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전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를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영상과 좌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언유(鄭彦儒)는 곧은 사람이며, 청렴하고 우아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니,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정언유가 여러 차례 주(州)의 목사(牧使)를 맡았는데, 청백(淸白)한 마음을 스스로 가지고 평상시에 있어서 궁핍한 생활을 합니다. 그가 대관(臺官)이 되었을 적에 언론(言論)이 볼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8월 29일 임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니, 영상·좌상·예조 판서와 유신(儒臣)들이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유척기가 말하기를,
"전중(殿中)의 장서(藏書)를 불사르도록 다시 아뢴 다음이라야 중외(中外)의 인심(人心)이 이에 진정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궁(東宮)의 마음도 또한 이에 감동하여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장서를 불사르고 다시 강연(講筵)과 차대(次對)를 한다면, 장래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대신의 말을 전하께서 먼저 뜻을 굽혀서 곡종(曲從)하신 다음이라야, 저하(邸下)께서 대신을 대접하는 것도 또한 이를 보고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신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동궁이 대신의 말을 공경하고 듣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 어렵지 아니하겠습니까?"
하고, 승지 윤동승(尹東昇)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전중의 장서를 지금 이미 한번 바라보시고 언제나 신료(臣僚)들에게 대하여 그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지금 만약 장서를 불사르고 다시 강연과 차대를 행하신다면, 장래를 보건대, 반드시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사부(師傅)와 요속(僚屬)에게 동궁을 부지런히 가르치도록 책임지우고도, 만약 동궁을 잘 인도할 효과가 없다면, 마땅히 그들에게 동궁을 바로잡지 못한 형률(刑律)을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8월 30일 계미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걸어서 효소전(孝昭殿)의 행각(行閣) 바깥에 이르러 땅에 부복(俯伏)한 채 통곡하였다. 춘방관(春坊官)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고 돌아와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갔다. 임금이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자성편(自省編)》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임금이 내편(內篇)을 읽었다. 영부사(領府事) 이종성(李宗城)이 입시(入侍)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 평상시에 스스로 마음을 다짐하시는 것이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더 하시는데, 근래에는 정도에 지나치는 점이 많이 있으시니, 신은 걱정하고 탄식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인(聖人)이 우환(憂患)에 대처하고 변란(變難)에 대처하는 방도에는 스스로 법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오로지 나더러 나쁘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 등이 전하께 우러러 말씀드리는 것은 그 말이 옳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동궁께 학업에 힘쓰도록 아뢰는 것도 또한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좌상에게 이르기를,
"경이 이 사람과 함께 동궁을 진견(進見)하는 것이 좋겠다. 동궁이 지금부터 시작하여 열흘 동안에 세 번 강연(講筵)을 하고,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따위의 일들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는다면, 나도 마땅히 다시 강연과 차대(次對)를 행할 것이다."
하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내가 이미 전정(殿庭)에서 신령께 계달(啓達)하였으니, 장서를 불사르기 전이라고 하여 어찌 이러한 마음을 돌이키겠는가? 그러나 다만 강학(講學)하기를 추모할 뿐이므로, 어찌 차마 강연을 그대로 중지시키겠는가? 지금 국사(國事)를 돌아보건대, 차대를 모두 빠뜨린다면, 그것이 민사(民事)의 처리에 있어서 폐단이 끝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전정에서 신령께 주달하고 대신들에게 유시(諭示)하였으니, 마땅히 열흘 동안 동궁의 태도를 보고서, 강학과 차대에 대하여 융통성이 있는 방도를 강구하겠다."
하고, 또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하들은 그 형묵(刑墨)258) 을 바로잡지 아니하는데, 아! 지금의 사건이 어찌 여러 신하들의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그 직책이 춘방(春坊) 요속(僚屬)의 자리에 있으나, 아직 그들이 면관(免冠)하고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서 대죄(待罪)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이를 만하다. 근일에 입직(入直)한 춘방 관리들에게 내가 이미 전정(殿庭)에 주달하고 모두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형률을 시행하였다."
하였다. 왕제자가 시민당(時敏堂) 북정(北庭)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하였다. 석강(夕講)할 때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니, 승지 원인손(元仁孫)과 윤동승(尹東昇)이 석고 대죄한 사유를 가지고 대조(大朝)께 앙주(仰奏)하자고 청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즉시 아뢰지 말도록 하라."
하니, 승지와 대신들이 다시 차가운 곳에서 밤을 새우면, 예후(睿候)를 상하게 할 것이므로, 마땅히 즉시 대조께 품주(稟奏)해야 한다고 하니, 하령하기를,
"이해 관계를 따져 비교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나도 또한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있으니, 반드시 지나치게 서로 버틸 것이 없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여 입대(入對)하였다. 좌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효소전(孝昭殿)의 행합(行閤) 바깥에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습니다. 신 등이 초조하고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써 아뢰었더니,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동궁이 열흘 동안 날마다 세 번 강연(講筵)하고,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따위의 일들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다시 강연과 차대(次對)를 행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대조의 성심(聖心)으로 애를 태우시고 걱정하고 괴로와하심이 이와 같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신 것은 나의 불효하고 불초(不肖)한 죄가 아닌 것이 없도다. 만약 조금이라도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이킬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열흘 동안을 어찌 꺼려하겠는가? 비록 한 달이라도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봉행(奉行)할 것이다."
하고, 또 하령하기를,
"방금 석고 대죄(席藁待罪)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스스로 정성을 다하려는 방도로 삼으려는 것인데,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와 좌의정 신만이 말하기를,
"하령하신 것이 지극히 마땅하니, 빨리 빨리 그렇게 하시어서 성심(聖心)을 빨리 돌이키는 방도를 취하소서."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종성(李宗城)이 추후에 입대하여 또한 말하기를,
"이것은 저하(邸下)께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이니,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신만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석고 대죄하여 찬 데에 앉아계신다면, 신 등도 또한 마땅히 집영문(集英門) 바깥에서 대죄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니, 도승지 채제공(蔡濟恭)이 입시(入侍)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동궁(東宮)께서 금일 석고 대죄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신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일을 보기 때문에 감히 주달(奏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춘방(春坊)의 상번(上番)·하번(下番)을 불렀다. 김종정(金鍾正)이 나와서 엎드려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하령하시기를, ‘조금이라도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이키는 방도가 있다면 어찌 반드시 열흘 동안이겠는가? 비록 한 달 동안이라도 내가 마땅히 봉행(奉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을 갖추어 놓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하고, 홍경해(洪景海)·윤방(尹坊)·이경옥(李敬玉)을 보덕(輔德)·필선(弼善)·사서(司書)로 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밤에 재전(齋殿)에 나아가니, 승지들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주서(注書)가 입대(入對)할 때의 초책(草冊)259) 을 주문(奏聞)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 윤동승(尹東昇)에게 이르기를,
"대신이 공부에 힘쓰도록 아뢴 말이나, 동궁(東宮)이 하령(下令)한 말이 거칠고 엉성한 것을 면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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