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삭제(朔祭)를 친히 행한 뒤에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일시에 착오(錯誤)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관계되는 바가 무거운 경우에는 그 말류(末流)의 폐단을 미리 막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 군신(君臣)의 관계와 부자(父子)의 관계는 오륜(五倫) 가운데 두 가지이다. 아! 그 사이에 어찌 감히 두 번째이고 첫 번째이라고 하겠는가? 오늘의 아뢴 바는 정말로 뜻밖이었다. 인군(人君)이 신하들을 칙려(飭勵)할 때 마땅히 대관(大官)부터 먼저 해야 한다. 영부사(領府事) 이종성(李宗城)을 파직시키라."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다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갔다.
임금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니, 승지들이 입시(入侍)하였다. 그때 임금이 주서(注書) 정언섬(鄭彦暹)의 초안한 초기(草記)의 주(注) 때문에 그를 단천(端川)에 귀양보내라고 특별히 명하였고, 겸춘추 유만건(柳萬健)이 초기의 주를 상세히 썼다고 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를 특별히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루에 세 번 강연(講筵)하는 것과 날마다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일은, 오늘부터 정지할 것을 춘방(春坊)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아까 정지하라고 명한 것은 곧 하루에 세 번 강연하는 것과 날마다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는 것이지, 양연(兩筵)260) 과 5일마다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승지 이태화(李泰和)가 말하기를,
"이미 하교하셨다가 도로 정지하라고 명하신다면, 동궁(東宮)께서 반드시 당황하고 위축되는 마음이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정지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강연을 회복하려는 뜻이 못될 것이다. 동궁의 서연은 비록 하루에 열 번 강경하더라도 내가 이를 금지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9월 2일 을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승지와 춘방(春坊)을 방금 추고(推考)하고자 하는데, 옥당(玉堂)에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경상(景像)인가? 아! 그 처음 명령을 중지하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는 사유(事由) 때문이다. 아! 숭덕문(崇德門) 밖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뒤에 열흘 동안 법강(法講)261) 을 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공부에 힘쓰도록 하고자 해서이다. 그날 밤에 승선(承宣)이 아뢰기를, ‘만약 그 명령을 중지한다면, 저하께서 반드시 황송하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대답하기를, ‘비록 그 명령을 중지한다고 하더라도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강연(講筵)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교한 뒤에 원량이 그 어찌 강연하기를 그치겠는가? 비록 날마다 열 번 강연하더라도 이것을 내가 어찌 금지하겠는가? 내가 이미 전정(殿庭)에 주달(奏達)하였으니, 나는 오직 거듭 그 스스로 공부에 힘쓰게 하는 방도를 펴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 비록 명령을 중지한다고 하더라도 한 달에 세 번 강연하는 것과 평일에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것을 어찌 감히 갑자기 정지할 수가 있겠는가? 아! 저 춘방(春坊)에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보도하는 방도를 알지 못하는도다. 아! 저들 승선들은 중지한다는 명령의 하교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공사(公事)를 가지고 구대(求對)하기를, ‘저하의 마음은 반드시 황송함이 갑절이나 더 하시리라고 생각되지만, 대조(大朝)께서 스스로 힘쓰시는 때에 또한 어떻게 갑자기 입대하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어찌 아니하는가? 그리하면, 원량(元良)이 바야흐로 대리(代理)하는 중에 있으므로, 후원(喉院)262) 의 자리에 있는 신하들도 또한 세자를 보필하는 도리를 다할 것이다. 지금 이미 여러 날이 지나도록 이와 같이 많이 웅성거리면서 일을 처리하지 못하니, 춘방과 승선을 모두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김종정(金鍾正)에게 명하여 그의 상서(上書)를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일을 꾸며 보고자 하여 그리하는가? 한번 염치의 도리를 펴 보고자 하여 그리하는가?"
하니, 김종정이 말하기를,
"신은 원래 필경 일을 꾸며보려는 뜻은 없었으며, 다만 이담(李潭)의 글이 도당록(都堂錄)을 오로지 공격하였는데, 신도 또한 도당록 가운데 들어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글을 아뢰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복원(李福源)의 무리들은 신물이 난다고 이를 만하다. 네가 먼저 행공(行公)263) 한 다음에 다른 사람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네가 나와서 행공하는 것이 옳다."
하니, 김종정이 말하기를,
"관직(館職)의 거취(去就)는 염치와 크게 관계됩니다. 이 다음에 관직을 제배(除拜)할 적에 어찌 감히 나오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금일에는 실로 무릅쓰고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 아침에 김종정의 상서를 들으니, 마음에 매우 미심쩍은 것이 많았다. 이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기관(機關)을 만드는 것인가? 그 글을 가져오도록 명하고, 이어서 그 사람을 불러서, 그의 상서를 들어 보고, 그의 아뢰는 말을 들어 보았으나, 모두 긴요한 문제에 관계되지는 아니하였다. 이미 하교가 있었으니, 정원(政院)에서 받들지 아니하는 것은 사리에 마땅하다. 김종정은 도당록 가운데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여, 지금 그 소장을 통하여 한번 이것을 아뢰고자 한 것이다. 비록 이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이미 행공하라고 신칙(申飭)한 마당에, 막중한 법강(法講)을 몇 차례나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이를 신칙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애(撕捱)하는 유신(儒臣)들은 이미 도당록 가운데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행공을 행한 지 몇 달이 되는데, 김종정이 한 장의 소장으로 한 기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막중한 법강으로 하여금 구간(苟簡)하는 한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것이 아무런 의의(意義)가 없고 분수와 의리가 한심하여 이미 그 관직을 체차시켰으니, 지금 이를 논할 수는 없다. 부수찬(副修撰) 김종정은 특별히 그 관직을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3일 병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4일 정해
선혜청(宣惠廳)의 초기(草記)에 의하여, 관동(關東) 지방의 인삼 결역(結役) 가운데 가장 무거운 곳과 연호전(煙戶錢) 가운데 상정법(詳定法)에 들어가는 것을 헤아려서 감(減)한 뒤에, 경청(京廳)264) 으로부터 대신 충당하도록 구획(區劃)하는 일은 이미 정탈(定奪)하였었다. 강릉(江陵)·삼척(三陟)·정선(旌善)·울진(蔚珍)의 네 고을에서 혹은 ‘인삼 결역[蔘結]’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은 ‘연호전’이라고 칭하기도 하면서 임시로 나누어 징수해서 그 원래 정해진 숫자를 충당하므로, 궁핍한 백성들이 지탱하기가 어렵고 나라의 체면도 손상되는 것이 이것보다 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결역을 감할 적에 한두 가지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곧 도신(道臣)의 청한 숫자대로 충분히 상량(商量)하였다. 강릉에서 감한 전(錢)은 1천 87냥 영(零)이었고, 삼척에서 감한 전은 9백 73냥 영이었고, 정선에서 감한 전은 3백 98냥 영이었고, 울진에서 감한 전은 3백 93냥 영이었는데, 결역과 연호전을 고르게 계산하여 나누어 배정하고 감해서 지급하였다. 심지어 상정법에 이르러서는, 양양(襄陽)에서 매 결(結)마다 감한 전(錢)이 4전 영이었고, 간성(杆城)에서 매 결마다 감한 전이 5전, 조(租)가 3두(斗) 영이었고, 흡곡(歙谷)에서 매 결마다 감한 전이 6전이었고, 그 나머지 고을에서는 그대로 두었다. 연호전(煙戶錢)은 평창(平昌)이 7백 16냥 영이었고, 낭천(狼川)이 4백 33냥 영이었고, 인제(麟蹄)가 5백 90냥 영이었고, 금성(金城)이 2백 67냥 영이었는데 전부 감하였으며, 도합 감한 전(錢)이 5천 6백 냥 영이었고, 조(租)가 1백 47석 영이었다. 금년 가을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에 의하여 시행한다. 간성군(杆城郡)의 잡역조(雜役條) 가운데 종전에 ‘연호전’이라고 일컫던 것은 아울러 감할 수가 없으므로, 다른 고을의 예에 의하여 ‘시탄가(柴炭價)’라고 고쳐서 이름을 붙이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받아서 사용하며, 각 고을에서 대신 지급하면, 본도에서 다른 상납(上納)할 수량으로 서로 바꾸어 줄 방도가 없을 경우에 균역청(均役廳)의 상납할 전(錢)을 그대로 머물러 두어 충당하여 지급한 다음에, 그 경청으로부터 대신 충당한 수량을 계산하여 이첩(移牒) 보고해서 절목(節目)을 만든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강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9월 5일 무자
민백행(閔百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 영부사(領府事) 이종성(李宗城)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서지수(徐志修)가 나아와서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사람과 물건은 본성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전에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내어 의제(疑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근래 학자들이 다투던 말을 모은 것이라고 합니다. 고 유현(儒賢) 권상하(權尙夏)는 이것을 다르다고 하였고, 김창흡(金昌翕)은 이것을 같다고 하였고, 이재(李縡)는 이것을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싸울 만한 자도 없는데, 문의(文義)를 가지고 싸우게 하고자 하는가? 나는 유생(儒生)들이 나에게 다투는 것을 결판하여 달라고 할까봐 두렵다."
하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법강(法講)은 사체(事體)가 엄한데, 사류(士類)가 서로 다투는 문의를 가지고 나와서 아뢸 수가 없는 자가 이것을 아뢰니, 신칙을 행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하고, 사직(司直) 서지수를 파직시켰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신회(申晦)가 군문(軍門)의 아장(亞將)은 진실로 구하기가 어렵다고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승진시킬 만한 사람을 하문하였다. 신회가 말하기를,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한 조제태(趙濟泰)·윤구연(尹九淵)이 있으며, 충신의 손자로는 남정오(南正五)도 또한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윤구현·남정오를 모두 가자(加資)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9월 6일 기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7일 경인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특진관(特進官) 송창명(宋昌明)의 쇠로(衰老)한 것을 보고 특별히 지중추(知中樞)에 제수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8일 신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원손(元孫)을 불러서 나와 입시(入侍)하게 하고, 《소학(小學)》을 외우도록 명하였다.
농민(農民)을 부르도록 명하여 농사 형편을 하순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9일 임진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10일 계사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다시 탄신한 달을 맞았도다. 아! 언제나 이날을 맞이하면, 단지 ‘나를 낳아서 구로(劬勞)하셨다.’는 구절만을 읊조릴 뿐이다. 세제[銅闈] 때부터 재작년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하례(賀禮)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우러러 보고 의지할 사람은 오로지 우리 자성(慈聖)뿐이었다. 아! 작년 이후로 내가 어디에다 의지하고 우러러 사모하였겠는가? 월강(月講)도 오히려 어려운데 하물며 일강(日講)이겠는가? 그러나 금번에 열흘 동안의 강연(講筵)은 이미 전정(殿庭)에서 신령께 아뢰었으니, 어찌 감히 일강(日講)을 빠뜨리겠는가? 그러나 내가 쇠모(衰暮)하므로 또한 그 정한 날짜를 준수하리라고 바라겠는가? 처음에 정할 때에는 스스로 아득하다고 보았는데, 지금 이미 기한을 준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바로 ‘뜻이 있는 자는 일을 끝내 이룬다.[有志者事竟成]’는 것이다. 금일에는 또 강연(講筵)을 끝마친 사유를 아뢰었는데, 내일은 바로 중순이므로 예대로 강연할 것이다. 아! 대소 신료들을 ‘자기 임금이 늙었다.’고 하지 말고 부지런히 열 번 강연하여 우리 종사(宗社)를 보필하고, 나로 하여금 만약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게 한다면 우리 나라에 다행할 것이니, 그것을 명심(銘心)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1일 갑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장령 이보관(李普觀)을 오수 찰방(獒樹察訪)으로, 지평 김시구(金蓍耉)를 경양 찰방(景陽察訪)으로, 정언 이진형(李鎭衡)을 제원 찰방(濟原察訪)으로 삼았으니, 그들이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석강(夕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9월 12일 을미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13일 병신
임금의 탄일(誕日)이었으므로, 조정에서 전정(殿庭)에서 문안를 드렸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9월 14일 정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15일 무술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지냈다.
9월 16일 기해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기로(耆老) 백성들을 소견하고, 친히 지은 금주(禁酒)의 윤음(綸音)을 내려 선시(宣示)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덕(德)으로써 백성들을 인도하고 예(禮)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수치를 알고 또 바르게 되지만, 법으로써 백성들을 인도하고 형벌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죄만을 면하려 하고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아!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이 어찌 우리를 속이는 것이겠는가? 또 한번 늦추고 한번 죄이는 것은 문무(文武)의 도(道)에서는 부득이한 일이다. 편배(編配)265) 된 자를 특별히 석방하고 죄명(罪名)을 감한 다음에 거듭거듭 가르치고 타일러서 너희들이 감복하고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작년 겨울에는 조금 그 효과가 있었지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두루 물어보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눈치를 살폈으므로, 내가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백성들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정(殿庭)에 아뢴 뒤에 먼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諭示)하고 그 다음에 대소 신료들에게 유시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중국 삼대(三代)266) 의 백성들을 바르게 하여 도(道)가 곧게 행하여졌던 까닭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습속(習俗)을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곤란하므로, 언제나 법통이 해이하여질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어사에게 명하여 강촌(江村)과 근기(近畿) 지방을 염문(廉問)하게 하였는데, 어사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몰래 술을 빚는 일이 서로 잇달았다.’라고 하였으며, 또 현장에서 체포된 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뒤로 나는 마음으로 매우 부끄럽게 여겨, 전정(殿庭)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없었다. 먼저 백성들에게 신칙하고 권려하는 하교를 내리는데, 이제부터는 마음으로 능히 참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고달픔을 꺼리지도 아니할 것이다. 다시 경조(京兆)267) 에 명하여 군민(軍民)들을 불러 모으고, 특별히 정문(正門)에 나아가서 순순(諄諄)히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다. 아! 대소 군민(軍民)들은 조용히 이러한 유시(諭示)를 들으라. 먼저 나의 잘못을 타이르고, 다음에 너희들의 잘못을 타이르겠다. 동자(董子)268) 가 이르기를,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조정(朝廷)이 바로잡히고 만민(萬民)들이 바로잡히며, 《대학(大學)》의 혈구지도(絜矩之道)도 그에 따라 또한 저절로 가까와지고 멀어지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능히 만민들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가 능히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니, 또한 무슨 면목으로 그대들을 대하겠는가?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대학》에서 어찌 그러하다고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요(堯)임금·순(舜)임금 시대의 백성들이 법령을 따른 것과 걸왕(桀王)·주왕(紂王) 시대의 백성들이 법령을 따른 것도 이것이 그 임금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옛사람이 말하기를, ‘풀은 바람이 불면 반드시 한쪽으로 쓰러지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금령(禁令)은 결코 그 좋아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이 법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잘못이다. 아! 한 사람의 편배(編配)를 열 사람이 지켜 보는 것이다. 법을 범한 자들은 비록 족히 불쌍히 여길 것도 없으나, 그 처자식이야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것이 그대들의 잘못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가 그 아들을 부르고 아들이 그 아비를 부르고, 지아비가 그 지어미를 부르고 지어미가 그 지아비를 부르면서 가르치고 타이를 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 법을 범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잘못이다. 한때의 욕망으로 인하여 오륜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바다의 절도(絶島)나 변방의 요새(要塞)에서 일생을 마치더라도 스스로 불쌍히 여길 것은 없으나, 늙은 아비와 늙은 어미와 외톨이 아들과 과부 아내가 대문에 기대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겠는가? 이와 같은 때가 이르면 그 남의 아비가 되거나, 그 남의 아들이 되거나, 그 남의 지아비가 되거나 그 남의 아내가 되는 자의 심정을 너희들은 깊이 생각해 보라. 법령을 따르고 술을 경계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 나는 본래 너무 관대하여 비록 하찮은 땅강아지나 개미조차 차마 발로 밟아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백성들이겠는가? 아! 이러한 마음을 저 하늘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내가 비록 흰 머리에 나이가 많다 하나, 밤낮으로 마음 속에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은 군민(軍民)들이다. 그들이 비록 능히 법을 어기지 아니하더라도 내 마음이야 어떠하겠는가? 아! 내 마음을 그대들은 잘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임어(臨御)한 지 수십 년이지만, 또한 너희들에게 큰 부담이 없었는데, 그대들은 또한 무슨 마음으로 이와 같이 나에게 부담이 되는가? 또 만약 표적이 없으면 활을 쏘는 자가 없을 것이고, 지름길이 없으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만약 술을 빚는 자가 없다면 어디에서 술을 구해 마시겠는가?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범하고 술을 팔거나 술을 마시는 자는 모두 나라의 법을 범하는 것이다. 시업(市業)이 여러 가지인데, 또한 무슨 까닭으로 편한 업종을 버리고 위험한 업종을 택하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술을 빚는 자도 또한 술을 마시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막중한 제사의 전례(奠禮)에는 예주(醴酒)269) 를 사용하고 술을 금지하니, 나라의 흥망이 오로지 금주(禁酒)가 행하여지고 행하여지지 아니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므로, 그대들이 나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아니되는데, 이것은 진실로 나라의 흥망이 달린 문제이다. 휘령전(徽寧殿)에서부터 오늘부터 시작하여 상식(上食)은 주다례(晝茶禮)의 예에 의하여 차(茶)로써 예주(醴酒)를 대신하도록 하라. 내가 특별히 정문(正門)에 나아가서 마음을 터놓고 효유(曉諭)하는 바이니, 그대들도 모두 이러한 효유를 듣고, 내가 늙은 나이에 정문에 나아가니 거듭거듭 당부하는 유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9월 17일 경자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사인(舍人) 이석상(李錫祥)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9월 18일 신축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19일 임인
유성(流星)이 좌기성(左旗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바리때와 같았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에 비추었다.
유언민(兪彦民)을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조중회(趙重晦)를 대사간으로, 이윤덕(李潤德)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거려청(居廬聽)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역관(譯官) 조기정(趙箕鼎)의 상언(上言)으로써 청하기를,
"관은(官銀) 4만 냥을 가지고 그 잉여(剩餘)를 취하도록 승인하여 공용(公用)에 보충하도록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을 나에게 아뢰고 청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허다한 관은을 어찌 품달(稟達)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내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이런 따위의 모리(牟利)하는 일들을 나는 일찍이 비루하게 여겼다. 또 햇수가 오래된 뒤에 모두 본래의 은전(銀錢)보다 손실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 때에 경 등은 반드시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사간 이수덕(李壽德)이 말하기를,
"신은 구구(區區)한 어리석은 의견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물러가라. 전정(殿庭)에 아뢴 다음에는 사체(事體)가 이와 같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였다.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술편(述編)》에서 ‘내가 만약 지나친 행동이 있거든 여러 신하들은 이 편(編)을 가지고 간(諫)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지금 대신(臺臣)이 다 말하지도 아니하였는데, 갑자기 위엄과 노여움을 더하시니, 《술편》에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술편》을 지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아! 이러한 마음을 오히려 속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척강(陟降)할 때이겠는가? 사간 이수덕(李壽德)이 전정(殿庭)에서 아뢰는 것이 막중한데도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 하였다. 이런 따위의 아장(亞長)을 장차 무엇에다 쓰겠는가? 우선 그를 체차하여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제수하라."
하였다.
9월 20일 계묘
달이 동편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유언민(兪彦民)과 성천주(成天柱)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이기경(李基敬)을 예조 참의로 제수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기경을 승지로 특별히 제수한 것은 그 뜻이 대개 있었던 것인데, 그 사람의 문재(文才)가 쓸 만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9월 21일 갑진
밤에 번개가 쳤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23일 병오
밤에 우레가 울고 번개가 쳤다.
상이 함인정(涵仁亭)에 납시어 소대(召對)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24일 정미
밤에 우레가 울고 번개가 쳤다.
도승지 황경원(黃景源) 등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지극히 효도하는 덕(德)이 위로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전하의 순수하고 인자한 은택이 아래로 신민(臣民)들에게 미치십니다. 양암(諒闇)270) 중에 계시면서도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시고, 일하는 것이 싫어지는 나이를 당하여서도 부지런히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수고하시니, 나의 아름답고 훌륭한 정치가 황천(皇天)에까지 이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놀랍고 두려운 천재(天災)가 해마다 일어나지 아니하는 때가 없고, 심지어 밤에 우레하고 번개가 칠 정도로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으로서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아! 언로(言路)의 개폐(開閉)에 국가의 성쇄(盛衰)가 달려 있는데도, 근래 대청(臺廳)을 오래도록 폐쇄(閉鎖)하니, 단지 조정의 정치가 잘못되었을뿐만 아니라 아울러 백관(百官)들과 더불어 서로 규계(規戒)하는 일까지도 논란하지 못하는데, 이를 우대하고 포용하는 전하의 도량이 혹시라도 크고 넓음을 다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백성들의 습속이 변하는 것을 법령으로 거듭 엄하게 규제하지만, 그러나 지난해에 술을 금지한 뒤에도 이를 범하는 자가 끊이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옥지(玉趾)271) 로써 임문(臨門)하여 대고(大誥)를 선포하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을 계도(啓導)하는 술책에서 혹시라도 그 방도를 강구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 차례 덕음(德音)을 발표하셨지만, 관리를 등용하고 승진시키는 것이 엄체(淹滯)되어서, 초야에 묻혀 있는 재주 있고 어진 선비들이 오히려 관리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자주 수의(繡衣)272) 를 파견하여 형옥(刑獄)을 심리하시지만, 그러나 주현(州縣)에서 억울함을 품은 백성들이 오히려 그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할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명분과 실제를 자세하게 따져서 밝히는 것은 대개 쓸모 없고 거짓된 말류(末流)의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까닭인데, 그러나 정치 체제가 혹시라도 번거롭고 가혹한 데로 흘러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신료들을 독려하고 책임을 지우는 것은 대개 야박하고 나태한 적폐(積弊)를 경계하려는 까닭인데, 사령(辭令)이 혹시라도 돈후(敦厚)한 면이 결여되어서 그러한 것은 아닙니까?"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그 영향이 어떠할지 내 마음이 두렵다."
하였다.
도승지 황경원(黃景源) 등이 상달(上達)하기를,
"이연(离筵)과 삼강(三講)을 부지런히 힘쓰지 아니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이치와 뜻을 깊이 연구하는 데 오히려 체험의 가미(加味)가 결여되었다면, 마땅히 저하(邸下)께서는 학문의 실제 공력(工力)을 이루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빈청(賓廳)의 순대(旬對)를 일찍이 오랫동안 헛되이 한 적이 없지만, 그러나 모유(謨猷)를 상의하는 데 조언(助言)을 구하는 방도를 다하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저하께서는 정사(政事)의 실제 효과를 거두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궐실(闕失)을 바로잡고 구제하는 것은 오로지 이목(耳目)의 관원에게 달려 있을 뿐인데도, 그러나 직언(直言)을 듣지 못하는 것이 혹시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넓지 못한 데에 연유한다면, 마땅히 저하께서는 스스로 반성하는 데 성실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세자의 덕망(德望)을 성취시키려면 반드시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대우해야 하는데, 그들의 세속을 멀리 하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여 언제나 비지(批旨)와 효유(曉諭)가 한갓 헛수고로 그치는 것을 보면, 마땅히 저하께서는 널리 선비를 초빙하는 데 성실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황공하여 근신하고 있는 중에 더욱 두렵고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뢴 바를 어찌 명심(銘心)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응교 서명천(徐命天)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저하의 하늘은 둘이 있으니, 높은 것으로 높게 여겨야 할 하늘은 곧 저 창천(蒼天)이고, 어버이로 친하게 여겨야 할 하늘은 바로 대조(大朝)입니다. 어버이로 친하게 여겨야 할 하늘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 높은 것으로 높게 여겨야 할 하늘도 저절로 도로 감응(感應)될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상천(上天)을 감응시켜 재이(災異)를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도리어 성심(聖心)을 순종하여 거스르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평일에 삼강(三講)273) 을 열고 승선(承宣)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한 것이 지금 이미 20여일이 되었으나, 학문과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지 아니하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 저하께서 대조(大朝)의 생각을 순종하려고 힘쓰시는 것인데, 모든 조정의 진신(搢紳)들이 누구나 이를 흠모하고 감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순종하여 거스르지 않는 방도를 생각해 보면, 다만 이것에만 있지는 아니합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언제나 생각이 얼마간 떠오르지만, 다 처분하지는 못하므로, 효도하는 자식의 마음은 더욱 일찍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저하께서 밤낮으로 통촉하며 순종하지만 날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터인데, 또한 어찌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겸연쩍어 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일을 행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이것이 대조(大朝)의 마음에 어긋나지 아니할까?’라고 하시고, 한마디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대조의 뜻에 합치하겠는가?’라고 하시고, 오로지 대조의 마음을 마음 삼아 한 발자국을 옮기는 사이 동안의 짧은 순간에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여기에다 둔다면, 장차 어버이로 찬하게 여겨야 할 하늘이 기뻐하는 것을 보실 것이며, 높은 것으로 높게 여겨야 할 하늘도 또한 이에 따라서 감응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성충(聖衷)의 번뇌(煩惱)가 심하시고, 세자의 마음도 근심하고 두려워하심이 지극하시니, 뭇사람들의 마음도 걱정하고 당황하여 나라의 일은 끝이 없는데도, 대관(大官)·소관(小官)들의 정성이 얕고 말이 치졸하여 끝내 능히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성심(聖心)을 열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키는 것이 오직 저하의 한 몸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어찌 유념하시지 아니하겠으며, 어찌 이에 힘쓰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황공하여 근신하고, 송구스러워 절박한 중에 더욱 두려운 마음이 간절하다. 힘쓸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어찌 이를 명심(銘心)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응교 서명천(徐命天)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 열심히 강(講)하시는 것이 어찌 《중용(中庸)》 1부가 아닙니까? 《중용》의 지극한 공부는 ‘중화(中和)에 이른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지(天地)가 자리하면 만물(萬物)이 자라는데 대개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 이치이고 피차가 차이가 없으므로, 인주(人主)의 마음이 중화되면, 형상(形狀)이 중화되고 기(氣)가 중화되어서 천지가 중화되고 감응될 것이며, 인주의 마음이 불화(不和)되면, 천지의 기(氣)가 능히 스스로 중화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윽이 보건대, 근일 이래 성충(聖衷)이 중화를 잃어서 성내고 괴로와하시는 것이 다단(多端)하시며, 연석(筵席)에서 자주 불평스러운 뜻을 보이시고, 사륜(絲綸)의 사이에서도 언제나 비상(非常)한 말씀을 하시고, 경색(景色)이 근심스럽고 당황하는 듯하여 진정될 기약도 없으며, 상하가 격조(隔阻)하여 정과 뜻이 서로 통하지 못합니다. 이로 인하여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루시지 못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며, 거의 말씀 한마디 정사(政事) 한 가지도 중화에 합치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주(人主)의 마음 하나가 만 가지 교화(敎化)의 근본인데, 중화에 어긋나고 평정을 잃어버리심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신다면, 천심(天心)이 어찌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으며, 화기(和氣)가 어찌 저절로 인도되어 나타나겠습니까? 송(宋)나라 유자(儒者)가 말하기를, ‘생각 한번 잠깐 바로하면 바로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하고, 생각 한번 잠깐 바르게 하지 못하면 바로 상제가 진노(震怒)하신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유념하지 아니하겠으며,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그 근본이 되는 자리에 계신 분이 덕성을 함양(涵養)함이 미숙하고 공부(工夫)가 순일(純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추진하더라도 심지어 시책을 베풀거나 말씀하고 행동하실 즈음에 이르러 혹은 정도에 지나치는 일이 많습니다. 신료들이 비록 소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말씀을 다 드리지 못하는데, 대각(臺閣)에서 미처 말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갑자기 엄한 견책(譴責)을 당하였는데, 조정에서 이 때문에 탐오하는 기풍이 생기고, 언로(言路)가 이 때문에 완전히 막혀버리니, 이것이 우리 전하께서 마음 가운데 그 중화를 이루지 못하여 그러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영향을 돌이켜 살펴보면, 바야흐로 두려운 마음이 간절하다."
하였다.
왕세자가 손지각(遜志閣)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25일 무신
밤에 번개가 쳤다.
원경순(元景淳)을 대사헌으로, 김시찬(金時粲)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참여하지 않은 양사(兩司)274) 의 장관(長官)들을 파면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천재(天災)가 이와 같으므로, 성상께서부터 방금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데,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분주하게 직분을 수행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양사에서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전체 숫자가 들어와서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근래 여러 신하들은 성상의 마음이 번뇌하신다고 하여 비록 소회가 있더라도 황공하여 감히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지난번 이수덕(李壽德)과 같은 경우는 처음에 단서가 될 만한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먼저 죄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로 하여금 그의 말을 다 끝마치도록 하고 죄를 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죄를 받았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분(處分)하신 것이 지극히 엄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어찌 진언(進言)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재를 만나면 구언(求言)하는 것이 비록 문구(文具)인 것 같으나 오히려 고사(故事)에 해당하고 지금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언로의 폐쇄가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수덕은 분명히 단서가 될 만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죄 준 것이다. 나도 깊은 뜻이 있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자에게 덕성합(德成閤)에 도로 들어가서 법복(法服) 차림으로 강연(講筵)에 임하도록 명하였다는데, 두 번 강연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26일 기유
우레하고 우박이 내렸다.
9월 27일 경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예(禮)를 다하면, 사람들은 이를 아첨한다고 한다. 공자(孔子) 같은 성인은 ‘아첨하지 않는 것이 곧 예이며, 소인(小人)의 인정으로서는 예가 아닌 것이 곧 아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와 소인의 구분은 안으로 보아서는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밖으로 보아서는 누가 소인이 예를 다하는 것을 가지고 이를 아첨한다고 말하겠는가?"
하였다.
9월 29일 임자
충청·전라·경상·경기의 4도 유생(儒生) 이제후(李濟厚)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충청도 이산현(尼山縣)에 노성산(魯成山)이 있고, 산 아래에 궐리촌(闕里村)이 있는데,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일찍이 계미년275) 사이에 많은 선비들과 모의하여 이곳에 하나의 사당(祠堂)을 세웠습니다. 권상하는 일찍이 공부자(孔夫子)의 영정(影禎) 구본(舊本)을 중국에서 오는 자에게 구해 얻어서 그 공역(工役)이 끝마치게 되자, 이어서 이를 봉안(奉安)하였습니다. 다만 오로지 사액(賜額)을 청하는 따위의 일들은 인순(因循)하여 뒤로 미루었는데, 이것이 어찌 유림(儒林)들이 남몰래 탄식하고 밝은 시대에 전장(典章)의 결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그 청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번거롭게 품(稟)할 수가 없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9월 30일 계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 대학 서문(御製大學序文)을 쓰게 하고, 또 어제(御製)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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