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인
밤에 번개가 치고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채제공(蔡濟恭)·원인손(元仁孫)을 소견하고,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이정(釐正)하였다.
10월 2일 을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지평 손상룡(孫相龍)이 말하기를,
"판결사(判決事) 이산두(李山斗)가 너무 늙고 병이 들어서 체차되기를 원하는 뜻을 신으로 하여금 앙달(仰達)하게 하였습니다."
하고, 교리 이복원(李福源)도 이를 옮겨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는 화사한 편보다는 오히려 질박한 편이다. 영남 사람들이 본래 질박하고 실질적이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그를 우대한 것이다. 자리를 옮겨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손상룡이 말하기를,
"신은 이미 자리를 옮기었습니다."
하고, 물러 나간 다음에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도 또한 질박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그가 비록 피혐(避嫌)하더라도 물러가서 기다리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충청도 경차관(敬差官) 이명환(李明煥)을 바로 그 지역에다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명환이 경시관(京試官)으로서 경차관을 겸하였는데, 시험을 관장하고 일이 끝나자 어버이 병환 때문에 글을 올리고 바로 귀향하였다. 감사 김상철(金尙喆)이 장청(狀請)하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또한 그것이 불가(不可)하다고 말하니, 이때에 이르러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홍경해(洪景海)를 특별히 김성 현령(金城縣令)으로 제수하였다. 홍경해는 종적(蹤跡)이 강직하고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여 여러 번 삼사(三司)의 관직을 사직하였기 때문에 그를 내쳐서 이 현(縣)에 보임(補任)하였다.
임금이 또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0월 4일 정사
유성(流星)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전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에게 이르기를,
"경이 장릉(莊陵)을 봉심(奉審)하고 왔으니, 먼저 어전(御前)에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홍상한이 말하기를,
"신이 영월(寧越)에 있을 때 우연히 《장릉지(莊陵誌)》를 읽어보았더니, 본릉(本陵)을 복위(復位)한 것은 지난 무인년276) 10월 28일이었는데, 신규(申奎)의 소(疏)로 인하여 그리 하였습니다. 장릉의 화소(火巢)277) 안에 사육신(死六臣)의 창절사(彰節祠)가 있는데, 고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이천 부사(伊川府使) 박태보(朴泰輔)가 힘을 합쳐서 개수(改修)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소 안에 있는 사당을 옮겨서 건립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두시(杜詩)》의 ‘임금과 신하는 일체(一體)이고 제사도 같다[一體君臣祭祀同]’라는 귀절을 인용하고, 옮기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 사육신 서원(書院)에다 엄흥도(嚴興道)를 배향(配享)하였고, 안평 대군(安平大君)은 사육신과 같은 시기에 사절(死節)하였으나, 그에게는 이미 시호(諡號)를 주었는데, 사육신도 또한 마땅히 시호를 주어야 하였다. 지금 1주갑(周甲)을 당하여 월일(月日)이 마침 서로 합치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제사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낙화암(落花岩)이 있는데, 그때 궁인(宮人)들이 사절(死節)하였기 때문에 ‘낙화암’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토민(土民)들이 사당을 세운 것도 또한 치제(致祭)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침 60주년을 당하니, 내 마음이 서글퍼진다."
하고, 승지들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지금 예조 판서가 아뢰는 것을 들어보니, 단종[端廟]께서 복위(復位)하신 간지(干支)가 금년 이달 28일과 같다고 하므로 서글픈 심회(心懷)를 억누르기가 어려워, 제문(祭文)을 마땅히 친히 짓고, 대신(大臣)을 보내서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한다. 듣건대, 사육신의 창절 서원(彰節書院)이 능침(陵寢) 동구(洞口)에 있다고 하는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수리 보수하도록 하라. 사육신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을 증직하도록 하고,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려 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증(贈) 참의 엄흥도를 배향한다고 하니, 그에게 특별히 아경(亞卿)을 증직하도록 하고, 사육신과 일체로 치제하도록 하라. 사육신의 후손으로는 단지 감찰 박성협(朴聖浹)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에게 특별히 그 관직에 준하여 승진시켜 서용(敍用)하도록 하라. 지금 대신의 아뢰는 말을 들어보면, 박팽년(朴彭年)의 혈손(血孫)이 남아 있다고 하며, 엄흥도도 또한 그 후손이 남아 있다고 하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즉시 그 이름을 물어보고 도정(都政)278) 을 기다리지 말고 그들을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또 들으니, 그곳에서 약간 몇 리(里)쯤 떨어진 곳에 민충(愍忠)이라고 하는 작은 사(祠)가 있다고 하는데,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중건(重建)하도록 하라. 이런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절개를 세운 것은 지나간 역사에서는 들어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중건한 뒤에도 도신으로 하여금 수령(守令)을 차정(差定)하여 치제하도록 하라. 사육신은 이미 증직하고 증시(贈諡)하였으니,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정분(鄭苯)도 또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그들에게 특별히 시호를 주도록 하라."
하니, 홍상한이 말하기를,
"원주(原州)에 주천(酒泉)이라는 고읍(古邑)이 있는데 빙허루(憑虛樓)가 있었습니다. 심정보(沈廷輔)가 원주 목사로 있을 때 선조(先朝) 경자년279) 1월 28일에 어시(御詩)를 내려 주고 선온(宣醞)을 보내주었습니다. 계유년280) 의 화재(火災)로 누각이 불타 없어지고 또한 어제시(御製詩)도 소실되었습니다. 지금 원주 목사 임집(任)이 바야흐로 이를 등문(登聞)하고 옛날 누각을 중건하고 다시 어제시를 게시(揭示)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어제시 중에 ‘술 취해 난간에 기대어 대낮에 졸고 있다.[醉倚闌干白日眼]’라는 귀절을 외우고 말하기를,
"심정보는 비록 술에 취하기를 권하지 아니하더라도 오래도록 취해 있을 자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짓지도 아니할 것이며, 감히 후미(後尾)에 잇달아 쓰지도 아니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임금이 소지(小識)를 친히 짓고서 홍낙성(洪樂性)에게 명하여 교지(敎旨)를 받들어 쓰게 하였다. 어제시는 임금이 어상(御床)을 내려와서 친히 베껴 쓰고 말하기를,
"지난날의 어제시를 내가 어찌 감히 어상에 걸터 앉아서 베껴 쓰겠는가?"
하고, 나무에 새겨서 옛날과 같이 게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심도(沁都)281) 행궁(行宮)의 뒤쪽 수림(樹林) 사이에 그때 궐중(闕中)의 사람들이 절개를 세운 곳이 있으니, 유수(留守)로 하여금 특별히 제단을 설치하여 치제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임금이 명하여 소대(召對)하고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0월 6일 기미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신위(申暐)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7일 경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이경호(李景祜)·심발(沈墢)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니, 예조 판서·병조 판서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에게 이르기를,
"홍세태(洪世泰)는 노예(奴隷)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문장(文章)은 고귀하다고 내가 어렸을 적에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서, 사람을 시켜서 그의 시(詩)를 받아오게 하였었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몸을 삼가고 조심하여 여리(閭里)의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면목(面目)을 알지는 못한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장릉지(莊陵誌)》를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어시(御詩)에서 ‘욕의(縟儀)를 추후하여 거행하는 날 세조[世廟]의 덕이 더욱 빛난다.[縟儀追擧日世廟德彌光]’라는 귀절이 있는데, 성상의 뜻이 탁월하여 포함한 의도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미덕(美德)을 돌리려는 뜻이 있었으니, 재삼 이를 받들어 완미(玩味)하면 흠모하고 감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하고, 임금이 단종조[端廟朝]의 사육신(死六臣)과 3상(相)에게 ‘충(忠)’자를 가지고 시호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10월 8일 신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講)하였다.
10월 9일 임술
임금이 비변사(備邊司)의 계문(啓聞)으로 인하여 평안도 병영(兵營)의 전(錢) 1만 냥과 무명 50동(同)과 해서(海西) 지방의 상정미(詳定米) 1천 5백 석을 특별히 개성부(開城府)에 획급(劃給)하여, 관례 대로 이식(利殖)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지급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고, 총융청(摠戎廳)에서 동전(銅錢)을 주조(鑄造)하는 것을 정지하게 하고, 본부(本府)로 하여금 계속해서 주조하게 하였으나, 장소를 옮기지 말고 편리한 데에 따라서 이를 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전강(殿講)하였는데, 궐내에 입직(入直)한 무신(武臣) 가운데 으뜸을 차지한 박희윤(朴希胤)을 승륙(陞六)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금일 이러한 조치는 그 뜻이 대개 깊은 것이다. 으뜸을 차지한 수문장(守門將) 박희윤은 경기도 사람으로서 경전을 능히 암송하고 능히 대답하는데, 이 자는 바로 척박한 땅에 사는 백성으로서 경전의 뜻을 잘 이해하는 자이므로 특별히 승륙하게 하는 것이다. 부장(部將) 이형운(李亨運)은 서울 출신 무인으로서 글을 읽지 아니하니, 이 자를 신칙하지 아니한다면, 어찌 시강(試講)하는 뜻이 있겠는가? 금추(禁推)하기를 한결같이 지난번의 한학(漢學)의 예에 의하여 하고 《삼략(三略)》을 다 외우도록 한 다음에 석방시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계해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10월 11일 갑자
임금이 안평 대군(安平大君)과 하원군(河原君)에게 시호(諡號)를 주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사육신(死六臣)과 3상(相)에게 시호를 주는 날에도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10월 12일 을축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10월 14일 정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문신 전강(文臣殿講)에 친림(親臨)하여 으뜸을 차지한 수찬 이석재(李碩載)에게 반숙마(半熟馬)를 내려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는 그 당시 고집(固執)이 있다는 명망이 있었고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였으니, 정말로 구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고 판서 민진후(閔鎭厚)의 나라를 위한 피끓는 정성도 또한 그와 서로 비슷하였다. 김진규의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는 매우 깨끗하다. 문청이라는 시호를 얻는 것은 희귀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10월 15일 무진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10월 16일 기사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평안도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무인년282) 의 예에 의하여 승진 보임(補任)을 위해 청북(淸北)283) 지방에서 취재(取才)할 적에, 도사(都事) 이기덕(李基德)·태천 현감(泰川縣監) 황처호(黃處浩)·대동 찰방(大同察訪) 조태상(趙台祥)을 시관(試官)으로 차정(差定)하여 그들로 하여금 시취(試取)하게 하였습니다. 과차(科次)를 적은 방문(榜文)을 게시한 뒤에 도로 또 방문을 고쳤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낭자합니다. 그 과장(科場)을 엄격하게 하고 후일의 폐단을 막는 방도에 있어서 이것을 그대로 덮어 둘 수가 없습니다. 주시관(主試官) 도사(都事) 이기덕을 파출(罷黜)시키고 방목(榜目)을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시관이 이미 3인이었으므로, 도사만을 혼자 파출시키는 것은 멀리 떨어진 외방의 사정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리고 과장의 사체(事體)는 지극히 엄중하므로 본도를 사문(査問)하여 이를 처리하는 일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으니, 대신(大臣)들에게 하순(下詢)한 뒤에 이를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여러 시관을 모두 먼저 파직시키고, 해부로 하여금 엄하게 처리하게 한 다음에 공사(供辭)를 등대(登對)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에게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을 봉사(奉祀)할 후손으로 누구를 삼아야 마땅한가?"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당시 숙종조[肅廟朝] 때에 정한 자가 있습니다. 조혁(趙爀)은 마땅하지 아니한데, 대개 선정신의 적자(嫡子)들이 같은 때에 순절(殉節)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얼(庶孽) 손자인 조찬문(趙纘文)과 조혁이 있는데, 봉사하기를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조찬문이 말하기를, ‘조혁은 곧 정주(定州) 기생이 낳은 후손이라.’고 하고, 조혁은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라고 합니다. 조찬문이 공문(公文)을 바쳤는데, 바로 광해군(光海君) 때에 조혁의 할아비가 천인(賤人)을 면제하는 허통 공문(許通公文)이었으나, 그러나 공문의 글자가 칼로 삭제한 데가 많았습니다.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봉사손을 정하는 일은 영상의 말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하였다.
10월 17일 경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문신 전강(文臣殿講)에 친림(親臨)하고, 으뜸을 차지한 주서(注書) 윤면헌(尹勉憲)에게 숙마(熟馬)를 특별히 내려 주었다.
10월 18일 신미
우레하고 번개가 쳤으며, 우박이 내렸다.
도승지 황경원(黃景源) 등이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그윽이 듣건대, 하늘의 노여움을 풀리게 하고 하늘의 견책(譴責)을 응답하는 방도는 문식(文飾)의 정치에 있지 않고 오로지 실질적인 정치에 있을 따름이라고 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두려워하여 깊이 반성하시고 더욱더 천재(天災)를 놀라와하고 무서워한다면, 빈대(賓對)하실 때에 반드시 실질적인 혜택을 아래에서 강구하도록 요구하실 것이며, 강연(講筵)하실 때에 반드시 실질적인 과업을 능히 실천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눈앞의 사실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고르는 것도 또한 실질적인 정치의 한 가지 일인데, 양전(兩銓)284) 을 감독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실효(實效)가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릇 정책을 시행할 즈음에 실질적인 마음을 가지고 알찬 정치를 행하여서 나라를 진작하고 쇄신하는 실질적인 정치를 한다면, 장차 천심(天心)이 화락하여 천재(天災)가 날로 없어져가는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삼가 내리신 전교(傳敎)를 보면, 성심(聖心)께서 놀라고 두려워하며, 말씀하신 내용도 간절하고 측은한데, 심지어 감선(減膳)하는 거조(擧措)까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천재를 만나서 수성(修省)하는 방도는 세월이 오래되면, 익숙해져서 편안해질 것이며, 일이 지나가면 쉽게 소홀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이 있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나 능히 끝을 맺는 것이 드물다.’라고 하였으니, 아울러 유념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감선하는 교지에서 나의 두렵고 숭구스러운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그러나 그 힘쓰기를 이와 같이 하여 깊이 반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도승지 황경원(黃景源) 등이 상달(上達)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 바야흐로 《중용(中庸)》을 강(講)하고 계신데, 《중용》에 이르기를, ‘정성이 없으면 물건이 없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리인데, 정성이 없이도 능히 하늘을 감응시킨 자는 대개 아직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저하께서 움직이거나 가만히 계시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실 순간에도 그 정성을 다하십니까? 아니하십니까? 신 등이 비록 감히 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공부를 할 때에는 어려운 부분을 찾아내어 그 뜻을 의심하고 쌓여진 의심을 탐토(探討)하는 자가 과연 공부를 다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정치를 할 때에는 이해 관계를 헤아리고 따져서 정치하는 방도를 강구(講究)하는 자가 과연 정치를 다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만약 이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른바 정성이 없기 때문이며, 정성이 없다면, 저하께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하더라도 한갓 쓸데없는 노력이 될 따름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알겠도다. 황공하여 근신하고 송구스러워서 두려워하는 중에 재이(災異)가 있으니, 더욱 두렵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여 능히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다. 아뢴 바가 절실하고 지극하므로, 어찌 명심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였다.
10월 19일 임신
3상(相)이 번개가 치는 이변(異變)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사임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장령 남학종(南鶴宗)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아가 삼가 보건대, 우리 대조(大朝)께서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중에 재이(災異)를 만나서 놀라고 두려워하여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고, 심지어 6일 동안 감선(減膳)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기에 이르시니, 두려워하고 삼가시는 충정(衷情)이 말씀하신 교지(敎旨)에 넘치며, 수성(修省)하는 방도가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우리 저하께서도 또한 대조(大朝)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았으면 합니다. 무릇 천재를 없애는 방도에 있어서는 더욱더 공부에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데 지금 이러한 전이(轉移)의 기회는 오로지 저하의 한마음 위에 공부를 더하시는 것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학업에 힘쓰는 공부는 비단 책을 강독(講讀)하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내용을 정밀하고 자세하게 탐구하는 데에도 있는데, 그래야만 공효(功效)가 중간에 끊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정치에 부지런하는 방도는 비단 정사를 듣고 결단을 내리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대체(大體)와 요체(要諦)를 밝게 통달하는 데에도 있는데, 그래야만 거조(擧措)가 잘못하거나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처음부터 이루고 마지막까지 이루는 방도는 또 정성이란 글자를 한결같이 관철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황공하여 근신하는 중에 재이(災異)가 잦으므로 더욱 두렵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간절하다. 힘쓸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신만(申晩)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자주 충성스런 정성의 말씀을 바쳤는데, 삼가 저하께서 또한 반드시 이를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하께서 시험삼아 신의 아뢰는 바를 좇아서 말마다 이를 명심하시고 일마다 이를 성찰(省察)하는 등, 깊이 반성하는 아래에서 공부에 힘쓰지 아니하는 태도를 고치고 한마음으로 극복하여, 혹시라도 방종하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하며, 체험하고 실천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저절로 순수하고 독실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어 아름다운 상서(祥瑞)가 이르게 될 것이니, 그것도 또한 하나의 전이(轉移)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태만하고 소홀한 태도에 젖어서 한번 크게 경계하고 분발하는 마음을 더하지 아니한다면, 천심(天心)의 향배(向背)와 인정(人情)의 이합(離合)은 그 기회가 이것에 달려 있게 될 터인데, 어찌 두려워하여 마음이 섬뜩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황송하여 근신하는 중에 또 재이(災異)가 있으니, 더욱 두려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능히 스스로 안정하지 못한다. 아뢴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어찌 명심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지평 윤광국(尹光國)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는 ‘덕(德)을 이미 닦았는데 하늘이 어찌 감동하지 아니하고 재이(災異)가 또 이와 같은가?’라고 하지 마시고, 또한 ‘정사가 이미 거행되었는데, 하늘이 어찌 돌보시지 아니하고 경고(警告)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라고 하지 마시고, 비록 은미(隱微)한 순간에 한적하게 홀로 있는 즈음이라고 하더라도 조심하고 삼가하기를 마치 상천(上天)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고, 항상 마음에 두려워하기를 마치 상제(上帝)가 대월(對越)285)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더욱 노여워할수록 마음을 더욱 공손하게 가질 것이며, 재이(災異)가 더욱 성할수록 덕(德)을 더욱 닦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부모에게 대하듯이 얼굴 색깔을 온화하게 하고 말소리를 온화하게 하여서 그 순종하고 섬기는 도리를 다한다면 저 순순하게 감동하는 하늘을 보건대, 어찌 오로지 노여워하심을 돌이켜서 자애롭게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황공하여 근신하는 중에 또 재이가 있으니, 더욱 두렵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여 능히 스스로 안정하지 못한다. 아뢴 바가 절실하고 지극하니, 어찌 명심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교리 정광한(鄭光漢)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는 바로 성상께서 대정(大政)을 친히 행하신 날이었는데, 재이(災異)가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때에 있었습니다. 하늘의 도리는 높고 멀리서 진실로 추측하고 헤아리기가 어려우나 한가지 이치로 감응(感應)시키면 그 영향은 빠른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도리에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아! 조경(躁競)286) 하는 기풍이 점점 성해지고 선비의 기개가 전혀 없어지며, 조정에서 말을 소리 하는 선비가 없어지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부족하니, 이것을 진실로 식자들이 깊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사람들을 등용하거나 버리는 것과 관리들을 승진시키거나 물리치는 것이 또한 그 적당한 기준을 잃고 있습니다. 윤시동(尹蓍東)이 말 한마디로 배척을 당하여 3년 동안 영외(嶺外)에 있으나 아직도 용서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태화(李泰和)는 공의(公議)에 배척을 당하였으나 갑자기 승진 발탁되어 은대(銀臺)287) 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하였습니다. 경(卿)의 자품(資品)은 곧 명덕(命德)의 그릇인데, 중비(中批)가 너무 번잡하여 한갓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대각(臺閣)은 곧 곤직(袞職)288) 을 보필하는 직위인데,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가 취(取)하여 의망(擬望)을 통(通)하는 격식에 말미암지 아니하므로, 조정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어진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족히 괴이하다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인재를 밝게 드러내는 방도를 다하여 유일(遺逸)의 인재를 천거하고자 하면 초야에서 인재를 밝게 뽑아야만이 반드시 쓸 만한 알찬 사람을 취할 것이고, 널리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구해야만이 숨지 않고 문을 활짝 열 것이므로, 재덕이 뛰어난 선비들이 떼 지어 벼슬길에 나와서 벼슬을 제배(除拜)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재이를 없애고 중화(中和)에 이르는 하나의 단서(端緖)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그 근본은 오로지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연덕(年德)이 높고 크며 함양한 덕이 순수하고 완숙하므로,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마땅히 알맞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마땅히 적당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한번 과격한 감정이 일어나면 갑자기 그 중화를 어기게 되므로, 말씀하는 기색에도 혹은 능히 지나치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거조(擧措)에도 혹은 능히 잘못이 없지도 아니합니다. 이것이 단지 덕성(德性)에 누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수양(修養)하는 도리에도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미 감선(減膳)하라는 하교에 유시(諭示)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힘쓸 바가 간절하고 절실하니, 어찌 깊이 반성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교리 정광한(鄭光漢)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러러 생각하건대, 저하께서 재이(災異)를 만난 이래 과연 크게 경계하며 깨닫고 크게 분발하여서 하늘을 감동시켜 천재(天災)를 없애는 진정한 도리를 행하십니까? 진실로 능히 그렇게 한다면 천재는 반드시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땅히 하늘이 여러 번 경계를 보일 것입니다. 아! 옛날 사람들은 언로(言路)를 혈맥(血脉)에다 비유하였는데, 사람에게서 혈맥이 막히면 죽을 것이고, 나라로서는 언로(言路)가 막히면 위험해질 것입니다. 근일에 공거(公車)289) 의 글장에서 정사를 언급하지 아니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참으로 훌륭한 덕치(德治)에 궐전(闕典)이 없고 조정의 정치에 실정(失政)이 없어서 그리하겠습니까? 특별히 크게는 골경(骨鯁)290) 의 기풍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작게는 위피(骫骳)291) 의 수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따라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구차스레 세월이 지나가기를 바라므로, 비록 비상한 재앙이 이르더라도 또한 응문(應文)의 고사(故事)292) 마저 폐지하니, 말을 하지 않는 뭇 신하들도 진실로 또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하께서 이들을 수용하려는 도량과 은혜를 널리 베푸는 실상이 족히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그들이 와서 간(諫)한다면, 또한 어찌 온 세상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겠습니까? 이것도 또한 저하께서 스스로 반성하고 처리하실 바입니다. 아! 양연(兩筵)을 비록 연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찾아내는 도움이 적을 것이며, 차대(次對)를 비록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거칠고 엉성한 결과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 등이 걱정하고 한탄한다고 한들, 마땅히 다시 어찌 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황송하여 근신하는 중에 또 재이(災異)가 있으니, 더욱 두렵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간절하다. 힘쓸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어찌 명심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10월 20일 계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10월 22일 을해
밤에 번개가 쳤다.
10월 23일 병자
님태회(南泰會)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월부(寧越府)에 명하여 금년의 결전(結錢)을 탕감(蕩減)하게 하였다. 임금이 정배(定配)된 죄인 윤태연(尹泰淵)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은 같은 죄인 윤태연이 아직도 죄를 입고 적소(謫所)에 있다고 하여 인혐(引嫌)하며 시애(撕捱)하고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있으니,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신규(申奎)에게 당상관을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규가 상소하여 장릉(葬陵)의 지위를 고치도록 청하였는데, 그 뒤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경연(經筵)에서 복위(復位)하도록 아뢰었다. 금년이 바로 복위한 지 1주갑(周甲)이었으므로, 임금이 추모하여 신규를 가상히 여겼는데, 일개 전직 현령(縣令)으로서 능히 재상(宰相)들이 능히 하지 못한 문제를 판별(判別)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증직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10월 24일 정축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도정(都政)에서 새로 제수(除授)된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을 소견하였다.
10월 25일 무인
유성(流星)이 천절성(天節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달이 태미성(太微星)의 동원(東垣)을 범하였다.
10월 26일 기묘
밤에 유성(流星)이 귀성(鬼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황인검(黃仁儉)을 승지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서명신(徐命臣)을 천거하여 함경도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10월 28일 신사
3경(三更)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5경(更)에 유성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서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10월 29일 임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였다. 김종정(金鍾正)이 더욱 휴양(休養)하는 데 힘쓰라는 뜻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잠깐 동안 대신(大臣)들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마땅히 정신을 단정히 하여 걱정거리를 접어두고 밤 기운을 가지고 정신을 길렀으나, 나는 저절로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이 많아졌다."
하였다.
10월 30일 계미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장지풍(張志豊)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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