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2권, 영조 34년 1758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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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갑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루아침에 환하게 깨달아 달통(達通)하는 경지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바깥과 안쪽, 정밀하고 조잡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온전한 체(體)와 커다란 용(用)이 밝혀지지 아니함이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몇 차례나 이를 강하여도 아직도 환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1월 3일 병술

밤에 유성(流星)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서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5경(五更)에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누런 색이었다.

 

헌부(憲府) 【장령 남학종(南鶴宗)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마침 대정(大政)을 당한 뒤에 수령의 서경(署經)을 요대(僚臺)의 비원(備員)들과 함께 서명하여 제출하였으나, 글자가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아 허다한 서경 명단(名單)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추후로 소문을 들으니, 태천 현감(泰川縣監) 조종렴(趙宗濂)이 바로 흉적(凶賊) 윤취상(尹就商)의 외손서(外孫壻)이라고 합니다. 대저 역적 윤취상의 이름이 서경의 명단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전혀 이런 사실을 살피고 깨닫지 못한 채 관례에 따라 서명 제출하였습니다. ‘엄하게 방비하라[嚴堤防].’고 한 3글자는 신이 평상시에 손을 빌려 서경하는 기준이었는데, 지금 조종렴의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이러한 착오가 있었으므로,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번갈아 생깁니다. 청컨대 신의 관직을 체차시켜 내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4일 정해

밤에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누런 색이었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광한(鄭光漢)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의 문집(文集)을 본관(本館)에 간직하여 두는 것은 대개 문헌(文獻)의 부족에 대비하려는 까닭인데, 지금 들으니, 4대신(大臣)들의 문집을 사가의 재력(財力)으로써 비로소 인쇄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자(文字)는 반드시 상고할 만한 사실이 많을 것 같으므로, 즉시 본관에서 인쇄하여 간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주의(奏議)를 평양 감영[箕營]에서 또한 인쇄하여 출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도 또한 가지고 와서 같이 간직하여 후일에 상고하는 자료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5일 무자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유신(儒臣)이 4대신의 문집(文集)과 민(閔) 봉조하(奉朝賀)의 주의(奏議)를 인쇄하여 간직하자는 말을 아뢰었는데, 내가 이것을 다시 생각해 보니, 사가(私家)의 문집(文集)을 호조(戶曹)에서 인쇄하여 출간하는 것은 후일의 폐단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것은 그대로 두도록 하고, 주의(奏議)는 이미 인쇄한 책이 있으니, 본관(本館)에서 가져다가 간직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인쇄하여 가져오면 좋겠습니다. 호조는 후일의 폐단과 관계가 있을 것이니, 유신의 아룀은 잘못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신(使臣)의 아뢴 말로 인하여 대신(大臣)들에게 하순(下詢)한 뒤에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은(銀) 2천 냥을, 병조·금위영(禁衛營)에 각각 4천 냥씩을, 수어청(守御廳)·총융청(摠戎廳)에 각각 3천 냥씩을, 평안 감영(監營)에 1만 2천 냥을, 병영(兵營)인 의주(義州)·선천(宣川)에 각각 3천 냥씩을 나누어 배정하게 하고, 즉시 관마(官馬)로써 수송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역관(譯官)들에게 빌려 주는 것을 허락하고, 연한을 정하여 본은(本銀)을 추쇄(推刷)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11월 6일 기축

밤에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강(講)하는 《대학(大學)》은 바로 임진년293)  에 사부(師傅)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7년 동안 시탕(侍湯)하다가 신축년294)  에 저군(儲君)이 되어서 비로소 강을 끝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장차 효장 의소궁(孝章懿昭宮)에 들어가서 임어(臨御)하려 하는데, 양성헌(養性軒)은 바로 옛날에 호(號)를 받은 것이며, 임진년에 이 책을 강하던 곳이다. 일흔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 책을 다시 강하고, 또 옛날 그 곳에 임어하게 되니, 중유(仲由)295)  가 쌀짐을 지던 옛날을 생각하던 마음296)  이 더욱 간절하다. 중순(中旬)의 주강(晝講)을 오늘로 정하여 진행하도록 하라. 환궁(還宮)할 때에 효장묘(孝章廟)를 두루 돌아보고, 양성헌에 임어하여 《대학》을 강할 것이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왕년에 강하였던 책을 오늘 이 집에서 다시 강하는구나. 그러나 40여 년 동안에 아무런 실효(實效)가 없은 채,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이니, 내가 실로 이 양성헌에 부끄럽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 나이 스무 살에 이 집에서 강하였었는데, 지금 또 일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집에서 강하게 되니, 어찌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풍패(豊沛)에서 술을 마셨던 감회297)  보다 더하지 아니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이곳에서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바로 고인이 된 사부 이현익(李顯益)에게서였는데, 오늘 일어나는 감회 때문에 내 마음이 서글프다. 그 아들을 해조(該曹)에서 특별히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7일 경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승지에게 구저주강기회문(舊邸晝講記懷文)을 쓰도록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안국동(安國洞)의 집 이름을 ‘존심헌(存心軒)’이라고 내려 주고 창의궁(彰義宮)의 집 이름을 ‘양성헌(養性軒)’이라고 내려 주었는데, 이처럼 명명(命名)하신 뜻이 어찌 쓸데없는 것이었겠는가?"
하고,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 한 권(卷)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이를 읽다가 ‘그 마음을 살피고 그 성정(性情)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려는 것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두 집을 이처럼 명명하신 까닭은 이 장(章)의 뜻을 취한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양성헌의 포진(鋪陳)298)  과 석자(席子)299)  는 모두 옛날 것 그대로이다."
하였다.

 

임금이 함안재(咸安齋)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을 부르고, 임금이 말하기를,
"잠시 동안 읽었던 글을 내가 마땅히 계속해서 읽어야겠다."
하고, 이어서 진심장(盡心章) 한 편을 읽고 유신들로 하여금 문의(文義)를 말하게 하였다.

 

11월 8일 신묘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의 서헌(西軒)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어제 《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 한 권(卷)을 읽었고, 오늘 또 무일장(無逸章) 한 권을 강(講)하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이다."
하고, 임금이 각편(各篇)의 제목을 읽고 유신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읽게 한 다음에 이어서 문의(文義)를 말하게 하였다.

 

임금이 함안재(咸安齋)에 나아가 승지들에게 명하여 계일편(戒逸篇)을 불러 주고 베껴 쓰도록 하였다.

 

11월 10일 계사

3도(道)의 유생(儒生) 이범주(李範朱)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기사(耆社) 당상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가 연로한 사람에게 공부하고 인군(人君)이 노인들을 보살피는 것은 모두 노인을 존경하는 뜻에서이다. 내가 걸상에 걸터 앉아서 노인들을 볼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일어나 서서 말하기를,
"맹자(孟子)께서도 ‘서백(西伯)300)  은 노인들을 잘 보살핀 자였다.’라고 어찌 이르지 아니하셨던가? 옛날에도 무릇 나이 많은 자에게 양로연(養老宴)을 베푼 것은 모두 노인들을 공경하기 때문이었는데, 하물며 기사의 여러 신하들을 봄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임금이 박치원(朴致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이 오래도록 사는 것은 땔감을 지는 힘든 노동을 한 결과인데, 지금도 또한 능히 땔감을 질 수가 있겠는가?"
하니, 박치원이 말하기를,
"신이 지금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형편에 있지만, 만약 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비록 오늘이라도 또한 땔감을 질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과 더불어 기사와 강론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임금이 먼저 《대학(大學)》을 읽고, 여러 기사 당상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읽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의(文義)를 말하도록 하라. 이것도 또한 직언(直言)을 구하려는 뜻이다."
하고, 임금이 손수 글을 쓰기를,
"무인년301)   11월 상순(上旬)에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을 특별히 소견하고 공묵합(恭默閤)에서 기로(耆老)와 강론을 행하는 바이다."
하고, 이어서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내려 주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목판(木板)에 새겨서 기영관(耆英館)에 걸고 여러 당상들이 각기 이를 찍어서 가지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갑오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서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설면의(雪綿衣)302)                  를 만들어 바쳤는데, 그것을 진어(進御)하셨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목묘(穆廟)께서 삼승금(三升衾)303)                  을 덮으셨다고 하는데, 나도 또한 주의(紬衣)304)                  를 입지 아니하기 때문에 아직 그 옷을 입지는 않았다."
하였다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옷의 안팎이 모두 무명이면 너무 무거워서 입기에 곤란하기 때문에 처음에 안은 무명으로, 바깥은 명주로 만들었는데, 작은 옷들이니,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안팎을 바꾸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이 명주이면 나는 본래 이를 싫어하니, 삼베로써 안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원주(原州) 읍내(邑內)에 인렬 왕후(仁烈王后)께서 탄생한 터가 남아 있으니, 마땅히 해주(海州)의 예에 의하여 비(碑)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하니,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왕비께서 사제(私第)에서 탄강(誕降)하신 홍주(洪州)의 합덕(合德) 같은 곳에도 또한 비를 세우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대왕(大王)이 탄강한 터가 남아 있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조조[宣廟朝]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정신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려 주도록 청하였으나, 시장(諡狀)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0년 뒤에 비로소 시호를 내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선정신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시호를 내려 줄 때에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거행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이것을 마치 응당 시행하여야 할 관례로 보는데, 신은 시장의 법이 마침내 폐지될까봐 두려우니, 청컨대 주의를 기울이고 신중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함안재(咸安齋)에 나아가 형조 당상들을 소견하고, 친히 의옥(疑獄)을 결재하였다. 승지 윤동승(尹東昇)이 합천(陜川) 염씨(廉氏) 사건을 읽고 아뢰었는데, 염씨는 곧 사인(士人) 조후창(曹後昌)의 아내였다. 같은 마을에 윤후신(尹後莘)이란 자가 있었는데, 염씨가 잠자는 틈을 타서 몰래 그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면포(綿布)와 의복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길에서 염씨의 남편을 만났다. 조후창이 보고서 그 도둑질한 물건을 빼앗으니, 윤후신이 이어서 말을 하기를,
"내가 조가(曹家)의 아내를 몰래 통정(通情)하고 이것을 얻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가의 아내가 낳은 아들·딸들은 모두 나의 소생(所生)이다."
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말들을 가지고 자기의 도둑질한 흔적을 덮어보려고 하였었다. 염씨가 관가에 고소하고 이어서 스스로 칼을 가지고 배를 갈라 죽었던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중국〉 왕응(王凝)305)  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깻죽지를 칼로써 자른 것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고, 즉시 명하여 유신(儒臣) 김응순(金應淳)을 불러서 어사(御史)로 삼아 역마를 타고 달려 가서 윤후신의 죄를 통쾌히 처결하고 염씨의 집에 정문(旌門)하게 한 다음에 어사로 하여금 제문(祭文)을 지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1월 12일 을미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11월 13일 병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전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에게 명하여 문형(文衡)의 권점(圈點)을 행하게 하였는데, 남유용이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기니, 임금이 연달아 엄한 하교를 내리자, 남유용이 어명을 받들고 권점하였다. 이리하여 남유용은 6점(點)이 되고, 이존중(李存中)은 5점이 되고, 윤봉조(尹鳳朝)·김양택(金陽澤)·윤급(尹汲)은 4점이 되고, 오수채(吳遂采)·이성중(李成中)은 3점이 되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권점을 비록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명령을 내리면 밤이 깊더라도 이를 거행해야 한다. 사체(事體)의 명분과 의리가 모두 한심한 형편이니, 남유용을 내쳐서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보임(補任)하고, 김양택을 대제학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명하여 권점록(圈點錄)을 가져다가 이존중의 이름 그 아래 부분을 지우고 ‘비록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의 글이 있다고 하더라도[雖有韓柳之文] 삼십 년 고심(苦心)을 마땅히 지켜야 한다.[卅載苦心宜守].’라는 열 두 글자를그 아래에 쓰게 하였다.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라도 감사 홍인한(洪麟漢)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조정의 처분(處分)을 보건대, 곧 개량(改量)하기로 정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궁핍한 백성들을 진휼(軫恤)하려는 목적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징세(徵稅)를 없애려는 의도가 필요하고, 또한 허다한 방해의 단서가 있기 때문에 즉시 신은 그 편리한지의 여부를 다시 아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신(藩臣)의 사체(事體)로서는 다만 마땅히 조정의 명령을 준수하고 받들어야 할 따름이며, 또 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또한 반드시 충분히 자신(自信)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시험삼아 이것을 여러 고을에 반포(頒布)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개량은 총액(摠額)이 많은가 적은가를, 진전(陳田)이 새것인가 옛것인가를 논하지 말고 한 도(道)를 통틀어 척량(尺量)을 다시 하되, 단지 시기전(時起田)만을 가지고 실제 총액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개량에서 목하 땅이 묵은 곳을 기전으로 집복(執卜)306)  할 수가 없다면, 진실로 마땅히 진전으로 현록(懸錄)307)  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한 도의 전답(田畓) 가운데 진전으로 탈면(頉免)하는 것이 장차 몇 만 결(結)이나 될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진전의 결수(結數)로 하여금 수 만결의 많은 양에 이르게 하더라도, 조정에서 양전(量田)의 총액이 크게 줄어드는 것을 혐의스러워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실제 기전을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가 즉일(卽日)에 개량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지금 나라의 계산으로서는 경비(經費)가 날로 없어지는 것만을 애통하게 여기고, 유사(有司)의 신하는 이것을 들어주거나 허락하기를 결단코 어려워하는데, 이것이 개량을 행하기가 어려운 까닭입니다. 혹은 부세(賦稅)가 감하거나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반드시 구전(舊田)의 총액을 견주어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면, 외방(外方)은 해조(該曹)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며, 여러 고을들은 상사(上司)를 무서워할 것입니다. 만약 원전(元田)에다 결복(結卜)308)  을 더하지 아니한다면, 반드시 장차 허위로 결수를 더하여 보고할 것이고, 또는 심지어 ‘갑’이란 자의 지금 진전이 비록 혹은 탈면(頉免)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을’이란 자의 옛날 진전을 도리어 시기전으로 만들어 둔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그 원래 총액과 같아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백징(白徵)하게되고 피차가 장차 같게 조정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갓 민읍(民邑)에 소요스러운 폐단만을 끼칠 뿐이니, 어찌 그 개량하는 의의가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상서한 글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신(稟申)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4일 정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11월 15일 무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11월 16일 기해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서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나아가 특별히 정랑 이성규(李聖圭)를 제수하여 수찬(修撰)으로 삼았는데, 승지 윤동승(尹東昇)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중비(中批)로 옥서(玉署)309)  의 관직을 제수하셨는데, 전에는 이후달(李厚達)이 있었고 뒤에는 이성규(李聖圭)가 있습니다. 모두 종신(宗臣)의 아들이라고 소원(疏遠)한 신하들과는 다르게 대우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음은 사적이면 사적인 것이고, 공적이면 공적인 것이다. 내가 만약 열어주지 아니하면 누가 그들을 열어줄 것인가?"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하였다. 임금이 《숙야잠(夙夜箴)》의 서문(序文)을 읽고, 유신(儒臣)과 승지(承旨)·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윤독(輪讀)하게 하였다.

 

3도(道)의 유생(儒生) 정사제(鄭師濟) 등이 상서(上書)하여 두 선정신(先正臣)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라는 청을 다시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8일 신축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11월 19일 임인

밤에 번개가 쳤다.

 

권혁(權爀)을 이조 판서로 삼고, 특별히 박도원(朴道源)을 제수하여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1일 갑진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11월 22일 을사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동지제(冬至祭)를 행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지일(至日)310)  의 윤음(綸音)을 쓰게 하기를,
"아! 선왕(先王)께서 지일(至日)에 관문을 닫아 음기(陰氣)를 억누르고 양기(陽氣)를 북돋우셨는데, 바야흐로 엄동을 당하여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아래에서 생기는도다. 아! 저 양기가 이미 쇠퇴하였다가 도로 회복되는데, 중외(中外)의 백성들도 그 또한 절기의 변화와 함께 회복되어야 아니되겠는가? 지금 세상의 도리를 보고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건대, 나는 그들의 힘이 회복되는지 알지 못하겠도다. 〈《서경(書經)》〉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라.’고 하였는데, 자목(字牧)311)  의 신하가 된 자들이 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또한 선왕께서 양기를 아끼던 도리를 본받아야 아니되겠는가? 아! 저 백성들은 바로 나의 어린아이들이다. 나의 어린아이들을 자목의 신하들에게 맡기니, 자목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어찌 감히 그 책임을 소홀히 하겠는가? 아! 도신(道臣)과 수령(守令)들은 나의 한밤중까지 정사에 부지런하라는 하교와 환과 고독(鰥寡孤獨)에게 은혜를 미치려는 정치를 본받아서, 정치에 힘쓰고 힘쓸지어다. 8도의 도신과 3도(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노라."
하였다.

 

임금이 함안재(咸安齋)에 나아가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주인옹문답(御製主人翁問答)과 어제계일편(御製戒逸篇)을 쓰게 하였다.

 

11월 23일 병오

임금이 경복전(景福殿)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을 소견하고 경복전(景福殿)의 소지를 친히 지었다.

 

11월 24일 정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임금이 《예기(禮記)》의 문왕 세자편(文王世子編)을 읽고,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계속하여 읽게 한 다음에 문의(文義)를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몽배자성흥회기(夢拜慈聖興懷記)를 쓰게 하였다.

 

11월 25일 무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청하기를,
"전조(銓曹)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나아가서 의논하고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난 사람들을 초록(抄錄)하게 한 다음에 빈자리가 생기는 대로 차정하여 채워서, 말세의 풍속을 권장 격려하고 생민(生民)들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해서(海西) 지방 송화현(松禾縣)에서는 전부터 전정(田政)을 시행할 때 허위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기전(起田)이 해마다 증가하여 많으면 5백여 결(結)에까지 이릅니다. 매년 전결(田結)에서 조세를 거둘 때 원래의 세액(稅額)에 의하여 거두는 것 이외에도 차례로 돌아가면서 추가하여 거두기 때문에 심지어 ‘가회결(加回結)’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습니다. 비단 부세(賦稅)가 편중될 뿐만 아니라 실지로 명목(名目)도 바르지 못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허위와 사실을 상세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과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과 승지 심관(沈鑧)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원주(原州) 읍내에 인렬 왕후(仁烈王后)께서 탄강한 터를 알지 못하였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알았다면 마땅히 명하여 비(碑)를 세우고 비각(碑閣)을 건립하여야 한다."
하고, 임금이 인렬 왕후 탄생 고기 비문(仁烈王后誕生故基碑文)을 친히 지었다.

 

11월 26일 기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들과 형조 당상들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초복(初覆)312)  을 친림(親臨)하였다. 명하여 이명식(李命植)을 어사(御史)로 삼아 안동(安東)의 안필(安弼)의 옥사(獄死)를 염문(廉問)하게 하였다.

 

11월 27일 경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11월 28일 신해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서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8도(道)의 유생(儒生) 이규오(李奎五) 등이 상서(上書)하여 두 선정신(先正臣)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자는 청을 다시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추조(秋曹)313)   당상들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삼복(三覆)을 친히 행하였다. 임금이 친히 철산(鐵山)의 정기세(鄭起世)의 살인 옥사(獄事)에 대한 문안을 열람하고, 전 도신(道臣) 이태중(李台重)이 역량이 크지 못하다고 하여, 특별히 명하여 정만순(鄭晩淳)을 어사(御史)로 삼아 그 곳에 가서 이를 핵실(覈實)하게 하였다.

 

11월 29일 임자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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