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3권, 영조 35년 1759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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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미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좌의정·예조 판서가 입시(入侍)하여 상후(上候)가 평복(平復)된 경사로써 종묘(宗廟)에 고하고 교지를 반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조종(祖宗)의 영혼이 묵묵히 도우심을 알았으니, 역시 고사(叩謝)의 도리가 없을 수 없다. 또 금년은 내가 초봉(初封)001)  되었던 해에 해당되니, 군호(君號)를 내리신 은전을 뒤좇아 생각하건대, 어찌 묵묵히 있겠느냐? 고유문(告由文)을 마땅히 지어 내리고 취사(取士)의 거조가 있어야 하겠으며, 막중(莫重)한 고묘(告廟)를 어찌 감히 경사와 합치겠느냐? 마땅히 정시(庭試)를 별시(別試)의 뒤에 설행해야 할 것이니, 의조(儀曹)에서는 상세히 알라."
하였다.

 

1월 3일 을유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유신(儒臣)에게 《자성편(自省編)》을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이후(李)에게 선유(宣諭)하고 이어 함께 오도록 하였으니, 이때에 이후가 대언(臺言)을 만나 교외(郊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6일 무자

지진(地震)이 있었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직숙(直宿)을 파(罷)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이후(李)의 사면(辭免)하는 청원(請願)을 허락하였다.

 

김이형(金履亨)을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삼았으니, 수의(首醫)로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1월 7일 기축

이중호(李重祜)를 대사간으로, 남정오(南正五)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이날에 상후(上候)가 평복된 것으로써 교지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1월 10일 임진

경원(慶源)의 유생(儒生) 채휘은(蔡徽殷)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원에 개시(開市)한 것은 재전(再前)의 을유년002)  에 시작되었는데, 우호(友好)를 도모하는 방도로써 비롯한 것이므로 비록 예단(禮單)을 증급(贈給)하는 규정은 있었으나, 달리 침요(侵擾)하는 폐단은 없었습니다. 을미년003)   이후로 내려오면서는 청나라에서 차사(差使)로 나오는 자가 점점 탐학(貪虐)한 짓을 함부로 하며 징구(徵求)하고 토색(討索)함이 한정이 없어 채찍질이 심지어 장리(長吏)에까지 미칩니다. 강약(强弱)의 형세는 항형(抗衡)하기에 어렵고 임시 변통의 방책은 고식(姑息)에 익숙해져서 요구가 있으면 문득 들어주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느새 그릇된 규례(規例)를 이루었습니다. 저들은 또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해마다 징구를 더하니, 금년이 작년보다 더하고 명년이 금년보다 더할 것입니다. 각종 지급하는 잡다한 비용이 상년(常年)을 기준으로 하여 베[布]로 계산하면 4백 63동(同)이 되고 곡식으로 계산하면 8천 7백 20여 석(石)이 됩니다. 그런데 조가(朝家)에서 간년(間年)으로 획급(劃給)하는 것은 전미(田米)가 3백 50석, 보리가 2백 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들어간 것의 십분의 일에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부족한 수를 언제나 민간(民間)에서 책징(責徵)하니, 도망하는 자와 죽는 자가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져서 7, 8년 전에는 4천여 호(戶)가 되던 백성이 지금은 겨우 2천여 호가 됩니다. 진실로 지금 변통(變通)하지 않는다면 비단 경원 한 부(府)뿐만 아니라, 육진(六鎭)이 통틀어 폐허가 될 염려스러운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신 등이 폐단의 근원을 깊이 살펴보니, 대개 교구(矯救)할 방책으로 크고 작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을 작은 것이라 이르느냐 하면, 온성(穩城)도 또한 육진 중의 한 부입니다. 비록 조잔(凋殘)이 심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여기는 청나라 차사가 한때 지나가는 고을에 불과하고 그들을 용납하여 들임에 따라 절반(折半)을 회감(會減)004)  한 숫자가 정곡(正穀) 3천 2백여 석에 이르는데, 지금 20일 동안 관사(館舍)에 머물러 있는 고을의 회감되는 바는 도리어 한때 지나가는 온성만 같지 못하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차별 없이 평등하게 혜택을 고루[一視均惠]하는 정사가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큰 것이라고 이르느냐 하면, 의주부(義州府)에도 개시(開市)한 장소가 있는데 압록강의 밖 몇 리쯤 되는 곳에 있어 개시를 관장하는 청나라의 차사가 우리 경계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맞이해 오는 것이나 호송(護送) 및 유관(留館)·방수(防守) 등 허다한 폐단이 없었으며, 그 예폐(禮幣)도 역시 원래 정한 수(數)에 의하여 보낼 뿐이요 다시 해를 따라 가증(加增)하는 폐단도 없었습니다. 무릇 서북(西北)의 인접한 호인(胡人)은 하나이고 저들과 우리의 호시(互市)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편은 방비를 경외(境外)에 설치하고 한편은 우리 경내에 방비를 설치하니, 사례(事例)가 같지 않고 고락(苦樂)이 판연히 다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북쪽 고을의 개시(開市)도 한결같이 서관(西關)에 의지하여 방비를 경계 밖에 설치한다면 변방을 공고(鞏固)히 하는 장책(長策)이 오로지 여기에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상서에 한 말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약방 도제조 김상로(金尙魯) 등을 소견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조영순(趙榮順) 등 네 사람은 이번 세초(歲抄)005)  에서 거론(擧論)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는데, 대신(大臣)의 아뢴 바에 의하여 비록 효주(爻周)006)  하였으나 그 중 윤시동(尹蓍東)과 조영순은 그대로 방치된 가운데에 스스로 있었고 그의 전리(田里)가 아닌데 도명(道名)만을 들어서 내치는 것은 옛부터 그 예가 없었고, 영구히 그 신분을 금고(禁錮)하는 일도 또한 법전(法典)에 없다. 저들이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옛날에 없는 명목으로써 진신(搢紳)을 대접하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인(小人)은 쓰지 말라.」는 말이 《주역(周易)》에 실려 있으니, 또한 어떻게 죄를 탕척(蕩滌)하겠는가? 단지 윤시동을 전리(田里)에 방축(放逐)하는 것과 조영순을 영구히 금고하라는 명은 정침(停寢)하여 후일의 폐단을 제거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1월 11일 계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특별히 정언섬(鄭彦暹)을 단천(端川)의 적지(謫地)에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월 12일 갑오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하교하기를,
"삼양(三陽)007)  이 돌아와 천지(天地)가 교태(交泰)하여 만물(萬物)이 모두 소생하는데, 아! 그 임금은 겨우 병이 회복되어 바야흐로 조용히 조섭(調攝) 중이어서 삼강(三講)008)  을 아직 열지 못하고 삼대(三對)009)  도 또한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을 입시(入侍)케 하여 엊그제 원량(元良)이 차대(次對)하던 때에 주서(注書)의 기록한 언행(言行)을 물은즉 신원(新元)에 처음 대할 뜻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마음이 그윽이 개연(慨然)하여 밤에 거의 잠을 잊었다. 아! 왕자(王者)가 원(元)을 본받고 인(仁)을 행하는 정사를 추성(鄒聖)010)  께서 자세히 말씀하였으니, 그것을 우러러 본받고 인을 행하고자 한다면 보민(保民)을 지금의 선무(先務)로 삼아야 한다. 오늘 영상과 좌상이 아뢴 바가 하나는 왕정(王政)의 가장 큰 것이요, 하나는 삼가 오직 구휼하는 정사이며, 하나는 골고루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이니, 모두 이미 윤허하였다.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신하들은 조지(朝紙) 가운데 의례적(依例的)인 말이라고 이르지 말고 각별히 조심하여 거행토록 하라. 그 보민에 있어서는 비록 적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며, 그 백성을 침학(侵虐)하는 일에 있어서는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하지 아니하여 3백 60주(州)의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새봄을 함께 하는 뜻을 갖도록 하라. 아!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에 있어서는 나의 수의(繡衣)가 있으니 어떻게 감히 속이겠느냐? 지난번 공인(貢人)과 시인(市人)의 폐막(弊瘼)을 제거토록 한 것은 과연 지금까지 준행(遵行)하고 있느냐? 구관(句管)하는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자세히 공인과 시인에게 물어 본 뒤에 하교를 기다려 입시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제주 조방장(濟州助防將) 아홉 자리를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로 나누어 만들고 관교(官敎)를 내어주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아뢴 바에 의한 것이었다.

 

영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졸(卒)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이 영부사는 봉조하(奉朝賀)의 아들로서 참하(參下)에서부터 그 임금의 지우(知遇)를 얻었고 말초(末抄)에까지 확연(廓然)한 그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기에 나에게는 뿌리쳐도 가지 않는 신하였다. 지난번에 입시(入侍)한 지가 약간일(若干日)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이러한 흉보(凶報)를 들을 줄 뜻하였겠느냐? 듣고서도 심히 의아스러워 문득 참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슬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겠느냐? 무릇 여러 가지 범절을 예(例)에 의하여 거행토록 하고 녹봉(祿俸)을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주며, 그 아들은 결복(闋服)011)  을 기다려 녹용(祿用)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종성은 문사(文詞)가 섬민(贍敏)하고 성질(性質)이 강명(剛明)하였다. 그런데 을해년012)   뒤에는 허물을 씻을 수가 없어서 부끄러움을 품은 채 구용(苟容)함을 면치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종성은 이태좌(李台佐)의 아들로 소년(少年)에 급제하여 남상(南床)013)  에 뽑혔었고, 시배(時輩)들이 추예(推譽)로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위가 태보(台輔)014)  에 이르러서는 소론(少論)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평일(平日)의 사범(師範)은 단지 이광좌(李光佐) 뿐이였는데, 을해년에 이르러서야 황연(怳然)히 크게 깨달아 비로소 전년(前年)의 잘못을 알고 임금 앞에서 우러러 진달하였다. 그가 참으로 잘못을 깨닫고 그렇게 할 것인지, 아니면 중심(中心)에는 그렇지 못한 바가 있었던 것인지 마땅히 분별할 자가 있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011] 결복(闋服) : 3년의 복을 바침.[註 012]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013] 남상(南床) : 홍문관 정자.[註 014] 태보(台輔) : 재상(宰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종성은 문사(文詞)가 섬민(贍敏)하고 성질(性質)이 강명(剛明)하였다. 그런데 을해년012)   뒤에는 허물을 씻을 수가 없어서 부끄러움을 품은 채 구용(苟容)함을 면치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종성은 이태좌(李台佐)의 아들로 소년(少年)에 급제하여 남상(南床)013)  에 뽑혔었고, 시배(時輩)들이 추예(推譽)로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위가 태보(台輔)014)  에 이르러서는 소론(少論)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평일(平日)의 사범(師範)은 단지 이광좌(李光佐) 뿐이였는데, 을해년에 이르러서야 황연(怳然)히 크게 깨달아 비로소 전년(前年)의 잘못을 알고 임금 앞에서 우러러 진달하였다. 그가 참으로 잘못을 깨닫고 그렇게 할 것인지, 아니면 중심(中心)에는 그렇지 못한 바가 있었던 것인지 마땅히 분별할 자가 있을 것이다."

 

1월 14일 병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공시 당상(貢市堂上) 홍봉한(洪鳳漢)을 소견하고 공시인(貢市人)의 폐막(弊瘼)을 하순(下詢)하였는데, 헌부(憲府)에서 각사(各司)로부터 등유(燈油)를 책징(責徵)한 일을 아뢰니, 임금이 전후(前後)의 감찰(監察)을 먼저 도태시키고 뒤에 잡아들이라고 명했다가 뒤에 윤동도(尹東度)의 아룀으로 인하여 도태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

 

1월 15일 정유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서 전배(展拜)하고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1월 16일 무술

달이 태미원(太微垣)을 범하였다.

 

유언민(兪彦民)과 홍중효(洪重孝)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전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들으니 전 판서 이종백이 이미 고인(古人)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한림(翰林)으로부터 맡겨진 지가 오래였다. 이번에 보니 옛날에 비할 것이 아니여서 마음에 그윽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어찌 이러한 비보(悲報)가 있을 것을 뜻했겠는가? 이로써 보건대, 지난번에 진달한 바를 미루어 알만하다. 상심하고 슬픔을 어떻게 비유하겠느냐? 모든 일들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후(厚)하게 거행하여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을 읽게 하였다.

 

1월 18일 경자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었다.

 

비변사(備邊司)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관서(關西)의 세수미(稅收米) 2만 석(石)과 돈 2만 냥(兩)을 특별히 호조(戶曹)에 획송(劃送)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려 8도(道)와 양도(兩都)에 교칙(敎飭)하여 폐막(弊瘼)을 묻게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보첩(譜牒)을 조심스럽게 상고하고 강개(慷慨)한 생각이 들어 회포를 서술한 글[敬攷譜牒興慨述懷文]을 쓰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효묘(孝廟)께서 저위(儲位)에 오를 때에 춘추(春秋)가 나와 부합되었다. 나의 양덕(涼德)으로써 비록 감히 성조(聖祖)께 견주어 비길 수가 없으나 일인즉 기이하다."
하였다.

 

1월 19일 신축

도승지 윤동도(尹東度) 등이 아뢰기를,
"삼양(三陽)이 돌아와 천지가 교태(交泰)하여 만물(萬物)이 새로워졌으니, 이는 바로 성왕(聖王)께서 세수(歲首)를 맞이하여 원(元)을 본받는 기회(機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지도(地道)가 편치 못하여 이미 경고(警告)를 보이더니 열흘이 못되어 또 이렇게 흰 무지개[陰煇]가 달을 꿰뚫은 이변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무릇 천재(天災)가 생기는 것은 반드시 인사(人事)의 실책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구치(求治)의 마음이 성근(誠勤)하셨는데, 다스림의 효험이 밖에 나타난 것으로 보더라도 또한 내세울 말이 없지 않습니다. 견감(蠲減)의 은택을 두루 내렸으니 인정(仁政)을 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백성의 곤궁은 날로 급박하고, 몸소 세탁(洗濯)한 옷을 입으시니 검덕(儉德)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재정(財政)의 탕갈은 날로 심하며, 탐학(貪虐)을 징벌하는 법을 엄히 하는데도 독화(瀆化)의 기풍은 더욱더 성해지고, 염담(恬淡)을 권장하는 뜻을 보이는데도 즐겨 나아가는 풍습은 더욱 치성(熾盛)해 갑니다. 삼무사(三無私)015)  를 받든 덕(德)으로 번번이 성왕(聖王)을 본받는데, 조정(朝廷)의 사이에는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고, 사방(四方)을 통달한 총명으로 광부(狂夫)의 말도 오히려 선택하는데 대각(臺閣)의 위에서 당의(讜議)가 두절(杜絶)되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로 미루어 보아 말한다면 치화(治化)가 순일치 못하고 정법(政法)에 하자가 있는 것을 대개 징험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늘의 경고가 그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족히 괴이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 형상을 보지 못하거든〉 그 그림자를 살피라.’ 하였는데, 지금 나의 심기(心氣)가 가슴 속에 갑절이나 된다. 면려(勉勵)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맹성(猛省)하여 스스로 힘쓸 것이다."
하였다.

 

도승지 윤동도(尹東度) 등이 상달하기를,
"저하(邸下)께서 깊은 궁궐(宮闕) 안에 계시니, 대저 유독(幽獨)한 곳에서 하시는 일을 신 등이 감히 다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우선 저하께서 지금 강(講)하는 《주역(周易)》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덕 수업(進德修業)’의 네 글자는 실로 건곤(乾坤) 중에 제일의(第一義)가 되는 것이니, 또한 어찌 저하께서 착실하게 체득(體得)하여 행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산림(山林)의 어진 이를 초연(招延)하고 빈사(賓師)를 예우(禮遇)하는 것은 실로 저하의 자질을 더욱 성취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저하께서 여기에 일찍이 체인(體認)하시어 소홀히 하심은 없으십니까?"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대답하기를,
"바야흐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중이었는데 면려하는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명심(銘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20일 임인

부수찬 이의암(李宜馣)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의 책임은 홀로 침전(寢殿)에 문안드리고 수라를 보살피는 절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없이 많은 여러 가지 일은 근학(勤學)과 근정(勤政)의 두 가지 일에서 넘지 않습니다. 대조(大朝)께서 저하께 바라시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고, 신민(臣民)들이 저하께 바라는 바도 오직 이것뿐인데, 저하께서는 무엇을 꺼리어 하지 않으십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상천(上天)의 고계(告戒)하는 것은 오직 날마다 강연(講筵)을 여시고 자주 빈대(賓對)를 내리시어 널리 전대(前代)의 득실(得失)을 궁구하고 국가(國家)의 큰 운명을 연장(延長)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대답하기를,
"바야흐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중이었는데 면려하는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달을 이어 발생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동동 촉촉(洞洞屬屬)016)  하여 반드시 유독(幽獨)하고 은미(隱微)한 가운데서도 일언(一言)·일행(一行)과 일동(一動)·일정(一靜)을 모두 성심(誠心)으로 성찰(省察)하시어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재이(災異)를 물리치는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한 달 안에 지이(地異)와 천변(天變)이 이와 같이 겹치고 거듭하니 늠척(懍惕)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는가? 면계한 바는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1월 21일 계묘

판부사(判府事) 김상로(金尙魯)를 좌의정으로, 좌의정 신만(申晩)을 우의정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이조 판서로, 김치인(金致仁)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오윤명(吳允明) 등을 소견하고 스스로 잠저시장적축(潛邸時帳籍軸)이라고 쓴 다음 이르기를,
"이것은 곧중유(仲由)017)                  가 부미(負米)018)                  한 뜻을 추사(追思)한 것이다."
하였다. 또 쌍서(雙書)로 쓰기를 명하고 이르기를,
"석년(昔年)에 어의동(於義洞)의 성조 장적(聖祖帳籍)을 한성부(漢城府)에서 얻었는데 그 축(軸)을 보니 3항(行)에 모두 국휘(國諱)019)                  를 썼다. 이는 고례(古禮)이니 이것도 또한 그때에 우러러 품고(稟告)한 것이다. 아! 경자년020)                  은 곧 부왕(父王)께서 승하(昇遐)하신 해였는데 여기에 있다가 동위(銅闈)021)                  에 들어왔으니, 이것도 이른바 중유 부미(仲由負米)의 탄식이다."
하였다. 또 쌍서로 쓰기를 명하고 이르기를,
"갑오년022)                  과 정유년023)                  의 호적 단자(戶籍單子) 2장(張)과 양년(兩年)의 한성부 호구 단자(戶口單子)를 함께 궤(櫃)에 넣었는데, 기묘년024)                   10월 24일 봉작(封爵)할 때의 관교(官敎)025)                  와 임진년026)                  의 총관 관교(摠管官敎) 및 같은 해의 녹패(祿牌) 1장을 함께 여기에 넣도록 하라. 대저 본 관교는 궤에 담아 태령전(泰寧殿)에 안치하였는데, 이 3장은 휘자(諱字)를 다시 썼으니 곧 초본(草本)은 휴지(休紙)이겠으나 어보(御寶)가 있어 감히 설만(褻慢)할 수 없다. 함께 여기에 안치하라."
하였다.

 

1월 22일 갑진

대사간 홍종해(洪宗海)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마음의 은미(隱微)한 즈음과 홀로 거처하여 방자할 수 있는 곳에서도 동정(動靜)과 운위(云爲)에 혹 터럭만큼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천심(天心)에 계합(契合)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부험(符驗)이 밖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정성은 비록 어진 이를 좋아하기에 돈독히 한다 하더라도 많은 선비가 모여드는 아름다움이 없고, 강(講)은 한갓 서적을 열람하는 데 부지런히 하더라도 날로 새로워지는 도움은 없었으며, 언로(言路)가 오래토록 막혀 당론(讜論)이 총청(聰聽)에 상달되지 못하였고 관방(官方)이 무겁지 않아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에 많이 채워졌습니다. 수령의 어진 치적(治績)은 들을 수 없어 부옥(蔀屋)의 원망이 많이 쌓였고, 염퇴(恬退)하는 풍조가 장려되지 않아 진신(搢紳)들의 조경(躁競)이 날로 더해지며, 사유(四維)027)  가 펴지지 않아 염치(廉恥)가 모두 없어졌고, 백관(百官)이 태만하여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무릇 이러한 몇 가지 일은 한 가지만 있어도 괴기(乖氣)를 불러서 재이(災異)을 겹쳐 이루게 할 것인데, 하물며 얽히고 설키어 겸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중이었는데 면계하는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명심(銘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낙성(洪樂性)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24일 병오

남태제(南泰齊)를 개성 유수로, 판윤 윤급(尹汲)을 형조 판서로, 참판 심성진(沈星鎭)을 판윤으로 발탁해 제수했으며, 이지억(李之億)·원인손(元仁孫)·윤동섬(尹東暹)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5일 정미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참의로, 남태저(南泰著)를 승지로 삼았다.

 

1월 26일 무신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대신과 형조 판서·호조 판서를 소견하였다. 혜당(惠堂) 정형복(鄭亨復)이 금년의 결전(結錢)을 감할 것을 청하매, 혜당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반드시 후폐(後弊)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정형복이 말하기를,
"금년에 비록 감해 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모으는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요당(僚堂)은 감해 줄 것을 청하고 요당은 모아서 준다고 하니, 이는 이른바 장삼(張三)은 육젓[醢]을 먹고 이사(李四)는 물을 마신다는 격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것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다. 내가 비록 여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살찌게 된다고 하면 어찌 좋지 않겠느냐? 지금 중신(重臣)들이 아뢴 바를 들으니 실로 하고 싶은데, 다만 내 몸만 돌아보겠는가? 어장(御將)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 백성을 저버리는 것이 깊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백성을 위하는 원려(遠慮)이니 어찌 나의 사사로움을 위하여 그러하는 것이겠는가? 이 뒤로 혹 낭비(浪費)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눈을 감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록 당나라 덕종(德宗)의 경림(瓊林)028)  이 가득 채워졌다 하더라도 어찌 아끼겠는가? 주서(注書)는 반드시 이 말을 써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1월 27일 기유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희었고 광채가 땅을 비추었다.

 

정기안(鄭基安)·이장하(李長夏)를 승지로, 민백상(閔百祥)을 대사헌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성중(李成中)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1월 28일 경술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황해 병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본도(本道)의 관향곡(管餉穀)으로 창고에 쌓아 둔 것 중에서 1만 석(石)을 4년을 한정하여 덜어 주기를 허락하되 환곡(還穀)으로 나누어서 모곡(耗穀)을 취하여 4천 석에 이른 뒤에 원곡(元穀)은 관향(管餉)으로 되돌려 주고 그 모곡으로써 본영(本營)의 군향(軍餉)으로 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1월 29일 신해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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