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3권, 영조 35년 1759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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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임자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진전(眞殿)에 구주(口奏)하려고 한 것은 뜻이 종묘와 국가에 있는 것인데, 승지 홍중효(洪重孝)는 거조(擧措)가 경솔하여 해연(駭然)스러우니 특별히 체직(遞職)시키고 그를 대신하여 유현장(柳顯章)을 제수하라."
하였다.

 

임금이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승지 이장하(李長夏)가 구대(口對)에서 어긋난 것으로 인하여 특별히 체차(遞差)하고 이어 유언술(兪彦述)·이석상(李錫祥)을 승지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출궁(出宮)할 때에 춘방(春坊)의 상번(上番)·하번(下番)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을 역림(歷臨)했다가 이안와(易安窩)에 나아가 우의정 신만(申晩)을 소견하고 이르기를,
"이형만(李衡萬)의 사람됨이 가석(可惜)하다. 이태(李泰)의 일은 탈공(脫空)029)  되었는가?"
하니, 신만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신만이 또 말하기를,
"구윤옥(具允鈺)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춘방(春坊)을 가장(嘉奬)하셨다면 춘방에 두고서 앞으로 효험을 쌓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구윤옥에게 승자(陞資)한 것은 내 뜻한 바가 있었으니, 대사간을 제수코자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4경(四更)에 약방(藥房)에서 청대(請對) 입시(入侍)하여 환궁(還宮)을 윤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원량(元良)이 이러한 것을 들으면 우려(憂慮)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하였다.

 

2월 2일 계축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종각(鍾閣)의 거리에서 연(輦)을 멈추어 시민(市民)을 소견하고 하유(下諭)하기를,
"대신(大臣)의 말을 들으니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을 할 때에 너희들이 철시(撤市)를 했다고 하였는데, 며칠이나 철시를 했느냐?"
하니, 시민이 말하기를,
"전부 철시를 한 것은 아닙니다. 나이 젊은 시정(市井)의 무리들은 간간이 물건을 팔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실로 너희들에게 혜택을 준 일이 없었는데, 나의 병으로 인하여 비록 하루라도 철시를 하였다면 나의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뒤로는 비록 약원이 직숙하는 일이 있더라도 철시를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열고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병후(病後)에 기운이 매우 피곤하여 효소전(孝昭殿)에 왕래할 수가 없다. 이 당(堂)은 효소전과 지극히 가까우니 전중(殿中)에 교의(交椅)를 설치하여 바라보며 의지할 처소를 만들라."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남기로(南綺老)가 말하기를,
"유신(儒臣)을 외방에 보직(補職)하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평남 만호(平南萬戶) 심이지(沈履之)와 어면 만호(魚面萬戶) 이의암(李宜馣)의 척보(斥補)하라는 명을 정침(停寢)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3일 갑인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참판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부제학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수득(李秀得)을 충청 감사로,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홍계희(洪啓禧) 등이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가는 털옷을 만들어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물리쳤다. 임금이 말하기를,
"엊그제 효장묘(孝章廟)에 들렀을 때에는 침구(寢具)를 따르게 하지 않고 다만 목침(木枕) 한 개를 베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이 북영(北營)에 적은 정자를 한 채 지었는데 내가 대보단(大報壇)에서 바라보고 이름을 몽답정(夢踏亭)이라고 내려주었으니 이를 걸게 하라."
하였다.

 

2월 4일 을묘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 문형(文衡)을 제학(提學)에 의망(擬望)하여 들인 것은 잘못이다."
하니,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전 사람도 문형을 지낸 뒤에 제학이 되어 행공(行公)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죄(罪)를 입은 여러 사람들을 차례로 인용(引用)하여 성조(聖朝)에 버려진 물건을 면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시동(尹蓍東)·유당(柳戇)·서형수(徐逈修)는 이미 전중(殿中)에서 구주(口奏)하였는데, 조영순(趙榮順)은 이 사람들과 다름이 있는 듯 하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3년의 상(喪)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일반이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상(祥)을 지난 뒤에 일을 보는 옷은 백립(白笠)과 백포(白袍)로써 하게 하고 이를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삼승포(三升布)의 중국 무역을 방색(防塞)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삼승포가 아니면 갑옷을 만들 수가 없으니, 변통(變通)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장령(掌令) 이제암(李齊嵒)이, 과장(科場)이 엄숙하지 않은 것으로써 신칙(申飭)을 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명(皇明) 시절에 용간(用奸)한 시관(試官)의 가죽으로써 북을 만들어서 장중(場中)에 달았는데, 그래도 오히려 그 간악한 짓을 금하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과거의 폐단이 근래에 와서 더욱 날로 심해가는데, 여러 신하들이 혹 면시(面試)030)  로 할 것을 청하나 면시도 또한 어렵겠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차관(敬差官) 엄인(嚴璘)의 장문(狀聞)은 극히 정상(精詳)하였다. 호서(湖西)·호남(湖南)의 영저(嶺底)와 연해(沿海)의 전답(田畓)으로 수목(樹木)이 숲을 이루고 사석(沙石)이 쌓인 곳에 백지 징세(白地徵稅)를 했다고 하니, 진실로 심히 가긍(可矜)하다. 만약 고휼(顧恤)하지 아니하면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엄인으로 특별히 충청 도사(忠淸都事)를 제수하고 홍지해(洪趾海)로 특별히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제수하여 빨리 내려 보내어 양도(兩道)의 도신(道臣)으로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구처(區處)토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충청 감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가전(加田)으로 흠축(欠縮)된 5백 18결(結) 중에서 특별히 반감(半減)을 허락하고 그 밖에 2백 80결은 영구히 속전(續田)으로 만들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척기가 해서(海西)에 있는 관향곡(管餉穀) 중에서 소미(小米)와 두태(豆太) 수천 석(石)을 용호영(龍虎營)에 획급(劃給)하여 금려(禁旅)의 갑주(甲胄)를 만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신임 평안 감사 이성중(李成中)과 더불어 상의하여 관서(關西) 칙수고(勅需庫)의 절목(節目)을 수정(修正)하게 하였다.

 

2월 5일 병진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양서(兩西) 진전(陳田)의 강속(降續)된 절목(節目)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더불어 삭정(刪正)한 뒤에 다시 품정(稟定)토록 하라."
하였다.

 

2월 6일 정사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전라 도사 홍지해(洪趾海)와 충청 도사 엄인(嚴璘)을 소견하고 이르기를,
"특별히 이 직임(職任)을 제수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너희는 도신(道臣)과 더불어 자세히 의논하여 구처(區處)하되, 우리 열성조(列聖祖)의 휼민(恤民)한 뜻과 자성(慈聖)께서 애민(愛民)하시는 인(仁)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또 열읍(列邑)의 수재(守宰)들을 어떻게 모두 적임자(適任者) 얻기를 책하겠느냐? 그 가운데서 매우 심한 자가 아니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하였다.

 

양호(兩湖)의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하유(下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백수(白首)로 복최(服縗)하는 중에 도신(道臣)과 경차관(敬差官)의 상서(上書)와 신문(申聞)을 보고 너희들의 곤란을 받은 것이 여기에까지 이른 것을 자세히 알았다. 지난해에 특별히 징족(徵族)하는 포(布)를 풀어주었는데, 지금은 징족하는 세(稅)가 이보다 배나 된다고 했다. 그리고 침족(侵族)도 부족(不足)하여 또 이웃을 침탈하고 이웃의 침탈도 부족하여 또 호수(戶首)를 침탈한다고 하니, 그 상심되고 측은함을 어떻게 다 말하겠느냐? 연전(年前)에 관동(關東)의 회양(淮陽)·금성(金城)과 호서(湖西)의 단양(丹陽)·회인(懷仁)·청주(淸州)는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안집(安集)시키고 세를 감하여 고휼(顧恤)하게 하였는데 지금 이 보고를 듣고서도 만약 동념(動念)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한갓 백성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조종(祖宗)의 영혼을 저버리는 것이다. 내 비록 정성이 얕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하겠느냐? 본도(本道)의 도신은 이미 그 적임자를 얻었기 때문에 어사를 보내지 않았지만 또한 상격(常格)에 구애하지 않고 옥서(玉署)의 신하로써 특별히 좌막(佐幕)을 제수하여 함께 그 일을 마치게 하였다. 그리고 아뢰야 할 것은 특별히 왕래(往來)하여 품주(稟奏)케 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수의(繡衣)와 다르겠느냐? 너희들은 ‘전에 관동과 호서는 다섯 고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견감(蠲減)하는 정사와 권고(眷顧)하는 은혜에 있어 우리 임금이 비록 뜻을 다하여 시행하였지마는 지금은 허다(許多)한 군현(郡縣)에 아마도 구애되는 사단이 있을 것이니 어찌 다섯 고을에 시혜(施惠)한 것과 같기를 바라겠느냐?’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밤낮 권권(眷眷)한 마음으로 너희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만약 전후(前後)가 다르다면 이것이 어찌 정섭(靜攝)하는 중에 근근(勤勤)한 뜻이겠느냐? 더구나 지금 이 거조는 나의 은혜가 아니고 곧 우리 열조(列祖)의 혜택이다. 아!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50년 동안 모후(母后)로 계시면서 성덕(盛德)이 백성에게 흠뻑 젖어 있다. 나의 얕은 효성으로 망칠(望七)의 나이에 최복(縗服)을 입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만약 은혜를 베풀지 아니한다면 이 또한 위로 효소전(孝昭殿)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하물며 상월(祥月)이 가까이 있어 심회(心懷)를 억제하기 어려운 중에 이러한 보고(報告)를 듣고 너그러운 은전을 베풀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자성(慈聖)을 뵈옵겠느냐? 특별히 효소전(孝昭殿)의 지척(咫尺)인 곳에 앉아서 불러 써서 너희들에게 고유하는 것이다. 나는 결단코 적자(赤子)를 속이지 않을 것이니, 살고 있는 자는 반드시 안도(安堵)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와 모여서 작농(作農)에 전념(專念)해 묵은 땅을 기간(起墾)하여 다섯 고을이 다시 소생한 것과 같게 된다면, 나는 마음을 펴고 잠을 편히 자겠다. 또 방백(方伯)과 도사(都事)는 결단코 나를 저버리지 않고 반드시 수령(守令)을 동칙(董飭)할 것이다. 백성들은 모두 이 하유를 깊이 유념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윤옥(具允鈺)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영춘 현감(永春縣監) 남숙관(南肅寬)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남숙관을 소견하고 이르기를,
"위인(爲人)이 흐리멍덩하여 일을 알지 못하니, 산골 백성에게 일이 있을 때에 이러한 사람에게 부탁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그 직을 그만두게 한다."
하고, 전(前) 문학(文學) 이경옥(李敬玉)으로써 이를 대신케 하고는 말하기를,
"영춘에 사람을 얻었으니 백성들이 장차 힘입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좌포장(左捕將)과 우포장(右捕將)을 소견하였다. 이때 북청(北靑) 사람 이진(李晉)이 갑산부(甲山府)에서 쟁송(爭訟)하는 일이 있어 패소(敗訴)하였는데, 그 본쉬(本倅) 한석필(韓碩弼)을 미워하고 원망하여 구함(構陷)하고자 서울에 올라와서 포도청(捕盜廳)에 무고(誣告)하였다. 포장 구선복(具善復)과 정여직(鄭汝稷)이 그 정상(情狀)을 캐내어 그 실상을 아뢰니, 임금이 어사(御史) 정만순(鄭晩淳)을 갑산에 보내고 이진을 본부(本府)에 내려 보내어 안핵(按覈)케 한 뒤에 영문(營門)에서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고 유신(儒臣)에게 《맹자(孟子)》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2월 9일 경신

임금이 효소전 재실(齋室)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에게 명하여 어제재전기시문(御製齋殿記示文)을 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궁인(宮人)들이 임의(任意)로 앉거나 누워서 불경(不敬)함이 심하다. 이 글을 판(板)에 새겨서 재전(齋殿)에 걸어두어 조심하고 삼가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2월 10일 신유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지금 전라도 도신(道臣)의 장문(狀聞)과 충청도 경차관(敬差官)의 신문(申聞)을 보니 징염(徵斂)하는 폐단을 갖추어 진달하고 또 통변(通變)할 방책도 진달하였다. 지금 양도(兩道)의 도신(道臣)은 잉임(仍任)하고, 양도의 도사(都事)는 옥서(玉署)의 신료로써 차송(差送)하여 검핵(檢覈)과 구획(區劃)을 하는 처지이니 이로부터 양호(兩湖)의 백성이 백지 징세(白地徵稅)의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삼도(三道)의 유생(儒生) 원경익(元景翼)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두 선정(先正)의 도덕(道德)과 절행(節行)은 나도 진실로 알고 있지마는, 사체(事體)가 지극히 무거워서 가볍게 의논할 것이 못되니 번거롭게 품(稟)할 수도 없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學業)을 닦으라."
하였다.

 

2월 11일 임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열고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휘령전(徽寧殿)에 3년이 박두하였으니, 능관(陵官)을 6품으로 올리고 전관(殿官)을 직장(直長)으로 삼으며 충의(忠義)로 참봉(參奉)을 삼는 것은 곧 고례(古例)이었다. 그런데 이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지난번 정사(政事)에서 능관(陵官) 다섯 자리를 비워 두어 대기(待期)하지 않고 일시에 모두 내었으므로 이정보를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두 혼전(魂殿)의 여덟 충의(忠義)를 대상(大祥)이 지난 뒤에 능관의 자리를 만들어 아울러 단망(單望)으로 관직에 임명하고 산관(散官)을 삼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특별히 이조 판서로 제배(除拜)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12일 계해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 예조 판서와 병조 판서 및 이조(吏曹)의 행공 당상(行公堂上)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元孫)은 벌써 책봉(冊封)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지회(遲回)시킨 것은 왕년(往年)을 추사(追思)한 것인데, 만약 3년을 지난다면 어디에 아뢰야 하겠는가? 오늘은 심정을 억제하고 진전(眞殿)과 효소전(孝昭殿)에 아뢰어 원손으로 세손(世孫)을 삼고 책봉하는 예(禮)는 부묘(祔廟)를 기다렸다가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강서원(講書院)에 위종사(衛從司)를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친히 정사를 열어 홍봉한(洪鳳漢)을 세손사(世孫師)로 조영국(趙榮國)을 세손부(世孫傅)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13일 갑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2월 14일 을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후(李)를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후가 정세(情勢)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 강서원(講書院)에 입직(入直)한 관원(官員)을 불러보고 하교하기를,
"비록 범인(凡人)이라 하더라도 그 자손(子孫)을 위하여 그 교도(敎導)를 부탁한다면 일을 마땅히 성심(誠心)으로 가르쳐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인군(人君)의 부탁하는 바이겠느냐?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너희들은 착실히 선도(善導)토록 하라. 강학(講學)하는 외에 모든 동정(動靜)의 절도에서도 또한 모두 경계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세손(世孫)은 바야흐로 강학할 때를 당하였다. 원손(元孫)이던 때에 이미 제1권을 강했으니 강학할 책자(冊子)를 문의(問議)할 필요가 없는데, 지금은 체통이 무겁다. 내가 신축년031)  에 건저(建儲)된 뒤, 《소학(小學)》을 거듭 강한 예(例)가 있으니, 책봉(冊封)된 뒤에 강서(講書)는 다시 《소학(小學)》 초권(初卷)부터 강서원(講書院)에서 강학토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재기제(再朞祭)를 거행하였다.

 

2월 15일 병인

임금이 능전(陵殿)의 서계(書啓)를 들이라고 명하여 상(賞)을 차등 있게 내렸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2월 16일 정묘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했다가 환궁(還宮)할 때에 교동(校桐) 옹주(翁主)의 집을 들렸다.

 

2월 17일 무진

어제 궁문(宮門)을 잠글 때에 어떤 사람이 유건(儒巾)을 쓰고 장차 난입(攔入)코자 하므로 수문장(守門將)이 잡아 병조(兵曹)에 고했는데, ‘상변(上變)의 봉서(封書)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입직(入直)한 병조 당상 원경렴(元景濂)이 입대(入對)하여 앙달(仰達)하니,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양 포장(兩捕將)을 불러 하순(下詢)한 뒤에 이어 포장으로 하여금 합좌(合坐)케 하여 조사하여 물으니, 그 사람은 이천(利川)에 거주하고 성명(姓名)은 곧 유홍(柳泓)이며, 이른바 상변이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습조(習操)를 저지(沮止)시키려는 계책이었는데, 임금이 장살(杖殺)케 하였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함경 감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북병사(北兵事) 손진민(孫鎭民)이 회령 개시(會寧開市)에서 예주(醴酒)를 혁파할 뜻으로 통관배(通官輩)에게 문자(文字)를 만들어 내어 열명(列名)하여 착급(着給)하였는데, 영문(營門)에만 보고하고 치계(馳啓)하지 아니했으므로 파직(罷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8일 기사

이때에 남한 산성의 습조(習操)를 이달 20일에 시행하기로 정했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철보(李喆輔)가 유홍(柳泓)의 상변(上變)을 듣고 밤을 새워 올라와서 궐문(闕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이에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이철보를 잡아들여 군병(軍兵)을 버리고 올라온 죄로써 꾸짖고 이어 바로 흥인문(興仁門)으로 출송(出送)시켜 즉시 내려가서 합조(合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포장(捕將)에게 명령하여 유홍의 형(兄) 유함(柳涵)을 잡아오게 하였다.

 

2월 19일 경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상당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세손(世孫)을 책봉(冊封)한 뒤에는 권강(勸講)이 가장 급하니, 좌우 유선(左右諭善)과 좌우 권독(左右勸讀)을 가설(加設)해야겠다. 유선(諭善)은 대제학 김양택(金陽澤)과 부제학 서지수(徐志修)로 삼고, 권독에는 전 집의 김원행(金元行)과 전 장령 송명흠(宋明欽)으로 삼는다. 상견례(相見禮)는 없게 하고 비록 책봉하기 전이라도 임무를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이어 따로 김원행 등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선비란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해서는 행하는 것이니, 지금 초선(抄選)은 엄광(嚴光)과 주당(周黨)032)  이 아니다. 약간척(若干尺)의 원손(元孫)이 지금 세손(世孫)이 되었는데, 아!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오직 이뿐이다. 교목 세신(喬木世臣)으로서 그 보도(輔導)하는 바에 있어 어찌 돈면(敦勉)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물며 지금의 직명(職名)은 조금도 과중(過重)한 것이 없고 뜻은 권독(勸讀)하는 데에 있다. 비록 산야(山野)에 있더라도 이미 수학(受學)하는 사람이 있어 가르쳤다면 반드시 권독했을 것이니, 권독의 이름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라, 실제에 근거를 두고 이름을 정한 것에 불과하다. 유시를 받는 날에 즉시 올라 오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효소전(孝昭殿)의 상(祥)을 마친 뒤에 왕세손께서 마땅히 두 혼전(魂殿)에 알현(謁見)해야 할 것인데, 복색(服色)을 미리 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冠)은 공정건(空頂巾)으로 하고 옷은 직령(直領)을 착용(着用)토록 하라."
하였다.

 

장령 민숙(閔塾)이 아뢰기를,
"오늘은 특별한 하교(下敎)로 차대(次對)하는 것이니 분의(分義)가 더욱 다른데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이 무단히 위패(違牌)하였으니 일이 매우 편치 못합니다. 청컨대 그 직을 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대사간 만을 파직하고 도헌(都憲)033)  은 원한 대로 적중(適中)하는 것이니, 파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두운(李斗運)은 본래부터 우준(愚蠢)하여 오로지 탐도(貪饕)만을 일삼았습니다. 매양 첨정(簽丁)을 당해서는 뇌물을 받아 조종하고 주금(酒禁)을 핑계하여 돈을 거두어들이는 사단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는 자목(字牧)의 직임(職任)에 둘 수가 없으나. 청컨대 그 직을 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들리는 바와 같다면 파직(罷職)으로 그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들여 처리케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전(陳田)의 징세(徵稅)는 실로 생민(生民)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양남(兩南)에서는 묵은 땅을 조사하는 정사를 시행하였습니다. 영남(嶺南)은 토질이 메마르고 백성이 흩어져서 자못 양남보다 심한데도 도신(道臣)이 새로 부임하여 아직 신청(申請)을 하지 못하였으나 일에 있어 다르게 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옛 묵은 땅을 자세히 조사하여 일체(一體)로 헤아려 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이 양남의 풍문(風聞)을 듣는다면 또한 장계(狀啓)로 청할 듯하니, 아직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김시찬(金時粲)을 대사간으로, 정휘량(鄭翬良)을 예문 제학으로, 홍상한(洪象漢)을 겸 세손사(兼世孫師)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새로 제수한 수령(守令)을 불러 보았다.

 

2월 21일 임신

왕세자가 덕성합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열고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강서원(講書院)의 좌우 유선(左右諭善)은 좌우 권독(左右勸讀)을 겸대(兼帶)하여 실직(實職)을 삼계하라."
하였다.

 

이환(李渙)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2일 계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2월 23일 갑술

달이 남두(南斗)의 제6성(星)을 범하였다.

 

2월 24일 을해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 판부사 이후(李)를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의 위종사(衛從司)를 승문원(承文院)에 이접(移接)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삼(人蔘)이 매우 귀하기는 근일(近日)과 같은 적이 없었다. 또 관동(關東)의 삼공(蔘貢)은 동민(東民)의 큰 폐단이 되고 있다. 원공(元貢) 13근(斤) 안에서 절반은 본도(本道)에서 봉진(封進)하고 절반은 경공(京貢)으로 만들어서 동로(東路)의 폐단을 제거토록 하라. 이 뒤로는 특별히 호삼(胡蔘)의 연무(燕貿)를 허락하여 경외(京外)의 약용(藥用)의 자료로 삼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이기경(李基敬)을 제수하여 호조 참의로 삼고 하교하기를,
"내가 제수하지 아니하면 누가 능히 하겠느냐?"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2월 25일 병자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소대(召對)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유함(柳涵)을 친국(親鞫)하였으니 유함은 곧 유홍(柳泓)의 형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홍이 끝까지 승관(承款)하지 아니하므로 지금 유함에게 물어서 유홍의 소위(所爲)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저가 만약 요연(瞭然)하게 하였다면 마땅히 백방(白放)할 것이지마는 공사(供辭)가 착위(錯違)되어 이미 형신(刑訊)을 받았으니 전석(全釋)을 할 수 없다. 단천(端川)에 정배(定配)케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적에는 국수(國囚)의 초사(招辭)는 전하여 말할 수가 없었는데, 근래에는 세도(世道)가 날로 내려져서 국문하는 일이 마쳐지기도 전에 전설(傳說)이 낭자(狼藉)하여 대명(待命)하는 자가 분운(紛紜)하니, 일이 지극히 한심스럽다. 이 뒤로는 만일 대명하는 일이 있으면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사문(査問)하여 무겁게 다스려서 후폐(後弊)를 막게 하라."
하였다.

 

이언형(李彦衡)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을 불러 보았다.

 

2월 27일 무인

관학 유생(館學儒生) 조진헌(趙鎭憲)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列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사체(事體)가 지중(至重)하다는 것으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2월 28일 기묘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2월 29일 경진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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