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3권, 영조 35년 1759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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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신사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3월 2일 임오

눈이 내렸다. 하교하기를,
"아! 부재(不才)·비덕(否德)으로써 어려운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30년 동안 임어(臨御)하면서 선왕을 섬김에 있어 정성으로써 할 수가 없었고 아래로 백성을 어거함에 교화(敎化)로써 하지 못하였다. 지금 국세(國勢)와 세도(世道)를 보건대 상도(常道)를 어기는 자가 많고 경박(輕薄)한 자가 우승(優勝)하며, 제일(祭日)을 당하면 문득 비바람이 쳤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그 형상을 보지 못하거든 그 그림자를 살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대저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순(順)하면 천기(天氣)도 따라서 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러러보고 구부려 살펴보건대 순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 겨울이 따뜻하여 봄과 같고 봄이 추워서 겨울과 같으니, 시기(時氣) 또한 순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 지난 겨울에 눈이 없다가 첫봄에 눈이 오니, 이미 이것은 이변이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날 밤에 얼음을 처음 보았고 쌓인 눈이 겨울과 같았다. 인사(人事)가 이미 아래에서 어긋났으니 시기(時氣)도 또한 어찌 어긋나지 않겠는가? 3년의 상기(喪期)가 장차 다하려고 하는데 어찌 징창(懲創)을 흥감(興感)하는 생각이 없겠느냐? 지금의 국세(國勢)는 나의 허물이요, 지금의 인사(人事)도 또한 나의 허물이다. 이미 그 허물을 알고서도 만약 스스로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러러 사죄하겠는가? 금일(今日)부터 열흘 동안 감선(減膳)하여 늠척(懍惕)의 뜻을 자책(自責)하려 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3월 3일 계미

도승지 이지억(李之億)이 상달(上達)하기를,
"우리 저하(邸下)께서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하여 일심(一心)으로 대월(對越)하고 대조(大朝)의 훈계를 조심스럽게 이어받아 체천(體天)의 요지를 깊이 알았으니, 진실로 괴기(乖氣)는 저절로 사라지고 아름다운 징조가 날로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어찌하여 시후(時候)가 상궤(常軌)에서 어긋나고 재이(災異)가 생겨서 이렇게 극단에까지 이르는 것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대조께서는 당요(唐堯)의 권근(倦勤)함을 깊이 생각하시고 몸소 서무(庶務)를 보살피시며 자자(孜孜)하여 게을리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저하께서 성심(聖心)을 우러러 본뜨시어 모든 정사에 임(臨)하시는 바에 과연 유궐(遺闕)의 실수가 없었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대조께서는 비록 양암(諒闇)034)  에 계시면서도 자주 경연(經筵)을 열으시어 진진(進進)하여 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저하께서는 성지(聖志)를 잘 따르시어 무릇 강학(講學)하시는 바에 과연 작철(作輟)035)  의 실수는 없으십니까?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척연(惕然)히 맹성(猛省)하시어 한결같이 대조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으시면 장차 서정(庶政)이 모두 잘 되고 백도(百度)에 궐(闕)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교리 김종정(金鍾正)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대조(大朝)께서 친히 술편(述編)을 지으시어 우리 저하(邸下)를 훈계하셨는데, 특별히 ‘심기(心幾)’라는 두 글자로써 내외편(內外編)의 머리에 서술(敍述)하셨습니다. 저하께서는 대조의 간고(幹蠱)036)  의 책임을 이어받으셨으니 국가 안위(安危)의 기미와 음양 소장(消長)의 기미와 인심 이합(離合)의 기미가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매여 있습니다. 하루, 이틀에 만기(萬機)가 이목(耳目)에 접(接)해지는 것이 분운(紛紜)하게 교착(交錯)되어 그 사이에는 터럭만한 것도 용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척연(惕然)히 경계하고 두려워하시어 혹 먹고 쉬는 사이에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저하께서는 책머리에 밝힌 성의(聖意)를 깊이 체득하시고 먼저 일심(一心)의 위에서 그 위미(危微)037)  의 기미가 천리(天理)의 바른 데서 나온 것이면 반드시 보존하여 함양(涵養)할 것이요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면 반드시 물리치고 두절(杜絶)시키어 통철(洞澈)하고 광명(光明)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연후(然後)에 이를 일용(日用) 사위(事爲)에 미루어서 정사에 임하시고 일을 보시면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의 기미를 분별할 것이며, 경전(經傳)을 완색(玩賾)하시면 현우(賢愚)와 성광(聖狂)의 기미도 궁구(窮究)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처가 편안하면 게으름이 움틀 것을 경계하고 재앙을 만나면 소이(消弭)하는 방도를 살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인이 되고 현인(賢人)이 되는 지극한 공(功)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근래(近來)에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어서 송름(悚懍)히 여기는 중에 시기(時氣)가 괴상(乖常)하여 심지어 감선(減膳)의 명이 계시었다. 이는 내가 불초(不肖)·불민(不敏)하여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뜨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늠척(懍惕)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면계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마땅히 심골(心骨)에 새기겠다."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익선(李益烍)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사체가 지중(至重)하다는 것으로 인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집의 박성원(朴聖源)이 말하기를,
"재앙을 늦추는 방도는 성궁(聖躬)을 수성(修省)하고 언로(言路)를 널리 여는 것만 같음이 없으니, 이렇게 한 연후에야 그 궐실(闕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당차(堂箚) 이외에 대간(臺諫)의 차자(箚子)도 들어오지 아니한 지가 오래되었고, 진소(陳疏)의 길도 아울러 막혔으니 뭇 신하가 비록 말을 올리고 충성을 바치고자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진소의 길을 열으시고 이어 구언(求言)의 하교(下敎)를 내리시어 하늘이 소재(消災)하는 방도에 응(應)하게 하소서. 신이 이미 언로를 여는 것으로써 앙진(仰陳)하였는데, 언로가 열리는 것은 말하는 자를 넉넉하게 용납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이형규(李亨逵)가 상신(相臣)을 탄박(彈駁)한 것은 과연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 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대간이 대신(大臣)을 논핵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절해(絶海)에 투비(投畀)되는 율을 베푸는 것은 이미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에 모자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새로이 대사령(大赦令)을 겪어 전후(前後)로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자들이 모두 용서를 입었으니 곧바로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으므로 감히 상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둘러대어 말을 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3월 4일 갑신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경재잠(敬齋簪)과 구방심재명(求放心齋銘)과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을 읽었다.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어제 연석(筵席)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마는 가만히 들으니 옥당(玉堂) 이성규(李聖圭)가 박성원(朴聖源)을 파직시킬 것을 청했다고 하는데, 사체(事體)의 미안한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박성원이 백수(白首)로서 연석에 올라와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신하를 구제하려고 한 것이거늘, 박성규는 삼사(三司)의 신하로서 즉시 파직을 논하였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청컨대 집의 박성원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거두시고, 특별히 이성규를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저께 그 사람을 보니 실로 우활(迂闊)한 사람이었다. 밤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이와 같이 요요(寥寥)한 때에 처분(處分)할 필요가 없겠고 또 갈등(葛藤)이 있을까 두렵다. 그러니 박성원의 일을 도로 정침(停寢)하고 이성규는 단지 그 거조(擧措)만을 논(論)하였으니, 그 관직을 파하지 말라."
하였다.

 

3월 5일 을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 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정언(正言) 정술조(鄭述祚)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자강(自强)할 길은 그 조목에 넷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덕 수신(進德修身)에 힘쓰는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제왕(帝王)의 학문(學問)은 본래 선비와 더불어 같지 않은 것이며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계책은 한갓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의 말(末)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아래를 꿰뚫고 시종(始終)을 이루어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고 인욕(人慾)이 말끔히 제거되는 것은 돌아보건대 몸을 닦는 공부에 있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종용(從容)하고 침잠(沈潛)하며 우류(優游)하고 충족(充足)하여 이 마음을 재장(齊莊)·정일(靜一)한 데에 두고 이러한 이치를 분규(紛糾)와 번화(繁華)의 즈음에서 살펴 몸소 실행하고 힘써 찾아 참으로 알고 실천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진덕 수신의 실(實)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태만과 안일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안일(安逸)은 인군(人君)이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어느 곳에든지 안일함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저하께서는 연안(燕安)의 속에서 생장하셨고 영성(盈成)의 업적을 이어받아 안으로는 내시(內侍)와 궁첩(宮妾)의 안적(安適)함이 있었고 밖로는 우환(憂患)의 비란(沸亂)이 없었으니 생민(生民)의 질고(疾苦)를 혹 다 살피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요, 국계(國計)의 이해(利害)를 다 통촉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드디어 이미 편안하고 이미 다스려졌다고 생각하여 문득 깊은 연못과 엷은 얼음을 임하는 경계를 소홀히 할 것이니,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서 두려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셋째는 기욕(嗜慾)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기욕이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은 병혁(兵革)보다 심한 것입니다. 주자(朱子)는 항상 말하기를, ‘하북(河北)의 적(賊)은 쫓기가 쉽지마는 한 몸의 욕심은 제(除)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저하께서는 야기(夜氣)가 청명(淸明)한 때에 이 말을 깊이 음미(吟味)해보시면 반드시 척연(惕然)히 깨닫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맹장(猛將)이 적을 시살(撕殺)하고 혹리(酷吏)가 죄수를 추감(推勘)하듯이 하여 일호(一毫)도 사욕(私慾)을 끼이지 말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연후에야 마음이 넓어지고 몸도 편안하여 청명한 기운을 몸에 지니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는 희노(喜怒)를 조심하는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희노란 사람으로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야 할 때에 기뻐하고 성내야 할 때에 성을 낸 연후에야 밖에 발현(發現)되더라도 모두 절도(節度)에 맞을 것입니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명경 지수(明鏡止水)와 같아서 사물(事物)이 오면 순응(順應)할 따름이니, 무슨 희노가 있겠습니까? 근일(近日)에 일후(日候)로써 증험해 보건대 한 겨울의 쌀쌀한 기운이 나타나야 할 때에 도리어 우로(雨露)의 은택이 있었으니 수장(收藏)의 효험을 이룰 수가 없었고, 바야흐로 봄볕이 화창해야 할 절후에 도리어 상설(霜雪)의 징후가 있으니, 발육(發育)의 공(功)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대학(大學)》에서 이른바 ‘마음에 희락(喜樂)하는 바가 있으면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분내고 조급함이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에 대하여 대비(待備)한 말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근래에 재앙과 이변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어서 송구스럽고 걱정하는 중에 시절의 기운마저 상도(常道)에 어긋나서 심지어 감선(減膳)의 명이 있었다. 이는 내가 불초(不肖)하고 불민(不敏)하여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면한 네 가지 조목은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내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기는 바이다. 늠척(懍惕)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니, 마땅히 심골(心骨)에 새기겠다."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제술(製述)에서 수위(首位)를 차지한 유학(幼學) 이성곤(李性坤)에게 특별히 급제(及第)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유학 조덕양(趙德亮)은 작년(昨年)의 비교(比較)에서 순통(純通)이였더니 금번(今番)의 비교에서 또 순통이 되었다고 하여 역시 일체(一體)로 급제를 내리라고 명하였는데, 옥당(玉堂) 이미(李瀰)가 이를 다투어 말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제술에서 수위를 차지한 생원(生員) 이형필(李衡弼)에게도 급제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3월 6일 병술

혜성(彗星)이 허성(虛星)의 도내(度內)에서 나타났는데, 형체는 하고성(河鼓星)과 같았고 빛깔은 창백(蒼白)하였다.

 

오언유(吳彦儒)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7일 정해

유현장(柳顯章)·이길보(李吉輔)·서명응(徐命膺)을 승지로 삼았다.

 

함경도(咸鏡道) 유생(儒生) 한정신(韓鼎臣)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王世子)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교리 김종정(金鍾正)을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유선(諭善)을 정3품(正三品)으로써 한계(限界)를 정하고 종2품(從二品)에서 그치도록 명하였다.

 

3월 8일 무자

혜성(彗星)이 허수(虛宿)의 도내(度內) 이유성(離楡星)의 북쪽에서 나타났는데, 모양은 하고(河鼓)의 대성(大星)과 같고 빛깔은 창백(蒼白)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3월 9일 기축

혜성이 검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였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박성원(朴聖源)의 일 때문에 미안하다는 하교(下敎)를 받들었다고 하여 소(疏)를 올려 면직을 빌었고 또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를 거행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한식제를 거행하였다.

 

3월 10일 경인

혜성(彗星)이 이유성(離楡星) 아래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응제 시권(應製試券)을 상고하여 입격(入格)한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주라고 명하였다.

 

3월 11일 신묘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홍자(洪梓)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성변(星變)을 가지고 진계(陳戒)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경계하고 살피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새로 방(榜)에 든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불러보았는데, 생원 이여자(李如梓)의 나이 75세이므로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3월 12일 임진

구름이 끼어서 혜성(彗星)이 보이지 않았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열고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정경(政經)》과 《심경(心經)》을 들이라고 명하여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읽어 아뢰게 하였다.

 

겸 우찬독(兼右贊讀) 박상철(朴相喆)이 위패(違牌)하니, 임금이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출보(出補)할 것을 명하였다.

 

3월 13일 계사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고 혜성(彗星)이 다시 나타났다.

 

특별히 이창의(李昌誼)를 제수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고, 유언국(兪彦國)을 대사간으로, 윤급(尹汲)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김석행(金奭行)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원경순(元景淳)을 특별히 비국 당상에 차출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조경(躁競)의 풍습을 억제하고 진실(眞實)을 취하는 뜻을 보인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을해년038)   이후로 한편은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했으며 한편을 외면(外面)으로 비록 혼합(混合)되어 간격이 없는 것 같았으나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편중(偏重)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나는 실로 ‘체천 건극(體天建極)’의 네 글자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임금이 《정경(政經)》 서문을 읽고 승지에게 함인정소대윤음(涵仁亭召對綸音)을 쓰라고 명하기를,
"30년 동안 임어(臨御)하면서 한 가지 혜정(惠政)도 없이 지금에 이르러 쇠모(衰耗)하여 면려하고 신칙하기에도 게을러졌다.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을 품게 한다면 이는 한갓 석년(昔年)을 체득치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자성(慈聖)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체득하지 못한 것이 된다. 아!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신하들은 그 임금의 양덕(凉德)함을 말하지 말고, 사랑하며 구휼하여 3백 60주(州)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동인(同仁)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내가 장차 신하가 있다고 전중(殿中)에 아뢸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신칙할 것이 있다. 공성(孔聖)께서 말하기를,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되 때를 따라서 하라.[節用愛民使民以時]’고 하였으니, 이것이 치국(治國)의 요도(要道)이다. 그러므로 석년에 이 여덟 글자를 가지고 종신(宗臣)에게 써서 경복전(景福殿) 안에 걸라고 명하였다. 지금 이 글로 인하여 추모(追慕)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무릇 백성을 부리는 일은 일체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3월 14일 갑오

혜성(彗星)이 다시 나타나고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였다.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 대신(大臣)을 불러 보았다. 승지에게 평안 감사 민백상(閔百祥)의 장계(狀啓)를 읽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선천부(宣川府)에서 보고한 바 점마(點馬)의 폐단이 이와 같으니 태복시(太僕寺)로 하여금 10년을 한정하여 〈점마를 하지 말라.〉 옛사람이 말의 수를 세어 대답했으니, 마정(馬政)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 비록 기한 안이라도 때때로 간혹 주품(奏稟)토록 하고 추첨해 적간(摘奸)하되 점마는 하지 말고 다만 근만(勤慢)만을 살피도록 하라. 강계(江界)의 인삼(人蔘)에 대한 일은 비록 장문(狀聞)에는 없었지마는 어찌 모르겠느냐? 지금 장문을 보니 민인(民人)의 괴로운 정상을 보는 것과 같다. 관동삼(關東蔘)의 원가(元價)에 대해서는 이미 호판(戶判)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였으니 등대(登對)하여 품(稟)하도록 하라. 지금까지 사들인 20근에 대해서는 전 호판이 관서미(關西米)를 얻어 그 값을 계산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뜻은 진실로 옳았다. 그러기 때문에 허락한 것인데,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쌀로써 값을 첨부해 주겠느냐?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 세삼(稅蔘) 외에 중간에 가수(加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마는 지금 20근은 곧 가수한 중에 또 더한 것이니, 어찌 상례(常例)를 따른 것이라고 하겠느냐? 관서(關西)의 세미(稅米) 중에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참량(參量)하여 더해 주어서 조금이나마 민폐(民弊)를 덜도록 하라. 장문 중에 군정(軍政)은 이정(釐正)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채로(債路)에 있어서는 전후의 도신(道臣)이 구처(區處)한 것이 진실로 옳았다. 혹 이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어찌 도신이라고 해서 관용(寬容)하겠느냐? 조적(糶糴)에 대해서는 도신의 장문이 의견(意見)이 있으니 반드시 이 법으로써 영구히 준행(遵行)토록 하라. 관서에 전정(田政)이 문란한 것은 오로지 양전(量田)을 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비국(備局)으로부터 도신에게 신칙(申飭)하여 차례로 거행토록 하라. 지난해에 특별히 재신(宰臣)을 보내어 병영(兵營)에 오래된 채권(債券)에 대하여 이미 풍환(馮驩)039)  의 예(例)를 썼으니 감영(監營)에서도 또한 어찌 이러한 폐단이 없었겠느냐? 그러나 도신이 이미 자세하고 분명하니, 어찌 풍환의 예를 쓰겠느냐? 도신으로 하여금 채권 중에 오래되어 징수하기 어려운 것은 그 채권을 취하여 대동강(大同江)에 던저버린 뒤에 장문(狀聞)토록 하라."
하였다.

 

3월 15일 을미

혜성(彗星)이 희미하게 이유성(離楡星)의 서쪽에 나타났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 납시어 망제를 행하였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나아가 호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대 들으니 3년상 뒤에 상품으로 내릴 물건을 일찍이 궁중(宮中)에서 조비(措備)해 두셨다고 하니 인자(人子)가 되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느냐?"
하고, 이어 오열(嗚咽)하기를 말지 아니하였다.

 

3월 16일 병신

혜성(彗星)이 다시 여수(女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의 통독(通讀)을 설행하고 겸하여 행한 제술(製述)에서 수위를 차지한 생원(生員) 김재순(金載順)과 진사(進士) 유항주(兪恒柱)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리고 강경(講經)에서 수위를 차지한 유학(幼學) 복태진(卜台鎭)과 신익빈(申益彬)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아!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곡진(曲盡)하지 아니함이 없으셨으니, 어찌 3년 뒤에 상으로 내리실 사단(紗緞)의 등속을 뜻하셨던가? 혹 시민(市民)에게 폐(弊)를 끼칠 것을 두려워하셔서 미리 연경(燕京)에서 사와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자성께서 시민을 위하여 이와 같이 근간(懃懇)하셨으니 듣고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최마(縗麻)를 적신다. 그 승봉(承奉)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날을 넘길 수 있겠느냐? 그 날 봉안제(奉安祭)를 행한 뒤에 마땅히 본릉(本陵)에서 상(賞)을 나누어 주어야 하겠으니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을 미리 글로써 아뢰고, 궁중에서 내리는 상격(賞格)도 또한 일체 글로 아뢰도록 하라. 아! 자성께서 휼민(恤民)하시는 덕은 이 한 가지 일로서도 지극하고 다한 것이다. 그런데 불초(不肖) 비덕(否德)으로서 능히 계술(繼述)하지 못하고 석년(昔年)에도 또한 자의(慈意)를 우러러 받들지 못했으니 어찌 한갓 스스로 부끄러워 할 뿐이겠느냐? 송구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채제공(蔡濟恭)과 윤봉오(尹鳳五)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석년(昔年)에 선온(宣醞)하실 때에 교유(敎諭)하시기를,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로는 다만 김 봉조하(金奉朝賀)와 유 영상(兪領相)이 있어서 나라의 의망(倚望)이 된다.’고 하셨는데, 영상(領相)이 정사(呈辭)하여 생각건대 산반(散班)에 참여할 것이니, 마음에 실로 척연(慽然)하다."
하였다.

 

3월 17일 정유

혜성(彗星)이 희미하게 여수(女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정림(鄭霖)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청을 다시 상달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소대(召對)할 때에 신은(新恩)040)  을 불러 보고 수릉관(守陵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3월 18일 무술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세 번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허부(許副)하였다.

 

판부사 이천보(李天輔)를 영의정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판부사로, 황경원(黃景源)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개연(慨然)함이 있어 마음속에 숨겨두지 못하겠다. 당초에 내게 이르기를, ‘관서백(關西伯)의 망(望)은 마땅히 서지수(徐志修)와 윤동도(尹東度)·이성중(李成中)으로써 주의(注擬)해 들인다.’고 하기에 ‘서지수는 방금 보양관(輔養官)을 띠고 있었으므로 내가 어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완천(完薦)이 된 때에 이르러서는 전(前)의 두 사람의 망(望)을 뽑아버리고 의외(意外)의 사람으로써 수의(首擬)로 하였으니 대신(大臣)이 실로 가석(可惜)하다. 대제학에 대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 망을 하지 아니했더라면 지금 어떻게 이러한 하교를 하겠느냐? 그때에 만약 등점(等點)이였더라면 무사(無事)하겠지만 반드시 한 점을 더했으니, 과연 누가 한 것인가? 전관(銓官)이 만약 연석(筵席)에서 모인(某人)으로써 어떤 망에 천거한다고 진주(陳奏)하고 나서 물러난 뒤에 다른 사람을 선의(選擬)하였다면 대신의 도리에 있어서는 추고(推考)를 청하는 것이 옳은데, 대신으로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실로 가석하다. 지금에 와서 어찌 꼬집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음식(飮食)을 가지고 비유해 말한다면 모름지기 다 씹지 않아야 자미(滋味)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3월 19일 기해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와 박지원(朴志源)을 한 정사(政事)에 아울러 의망한 것은 나는 실로 알지 못하겠다. 고인(古人)은 ‘곧은 것을 들고 굽은 것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만약 굽은 것을 들면 곧은 것이 버려질 것이고, 굽은 것을 버리면 곧은 것을 들어 쓰는 것은 그 이치가 분명한 것이다."
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도승지와 더불어 홍계희와 박지원을 한 정사(政事)에 아울러 천거할 것을 함께 의논했습니다마는 도승지도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으니, 정관(政官)의 평물(平物)의 정(情)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누가 희고 누가 검으냐? 승려와 속인(俗人)이 함께 있으면 혼잡(混雜)하겠는가, 아니하겠는가? 박지원이 사서(司書)의 망(望)에 들고 정언(正言)의 망에는 들어 있지 않으니, 이는 무슨 뜻이 있은 것이다. 홍경해(洪景海)가 만약 본다면 그의 생각이 어떻겠느냐?"
하니, 신만이 말하기를,
"정사(政事)는 깨끗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열고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임금이 연려(輦輿)의 복색(服色)이 주착(做錯)된 것이 많이 있다고 하여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을 체차(遞差)하고 이창의(李昌誼)로 대신하게 하였다.

 

문무(文武) 식년 회시(式年會試)의 시관(試官) 및 감시관(監試官)과 양사(兩司)의 많은 관원들이 연달아 소패(召牌)를 어기니, 임금이 대사헌 윤급(尹汲)과 대사간 유언국(兪彦國)·집의 서명천(徐命天)·장령 유사흠(柳思欽)·시관 남유용(南有容)을 아울러 도배(徒配)하라고 명하였다.

 

3월 21일 신축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헌납 박치륭(朴致隆)의 아뢴 것이 대체(臺體)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하여 파직(罷職)을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영부사(領府事)로 이춘제(李春躋)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23일 계묘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3월 24일 갑진

우박(雨雹)이 내렸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어찌 나를 괴롭히는가? 대관(大官)은 알지 못하는가?"
하고, 조금 후에 비답을 내렸다. 이날 영의정 이천보가 나와서 숙배(肅拜)하였고, 다음날 영부사 유척기가 나와서 숙배하였다.

 

3월 25일 을사

이태상(李泰祥)을 평안 병사로, 이익보(李益輔)를 병조 판서로, 이창의(李昌誼)를 이조 판서로, 이철보(李喆輔)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6일 병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대상제(大祥祭)를 거행하고 이어 명릉(明陵)에 나아갔는데, 연로(輦路)가 좌우(左右)에 경지(耕地)를 범했다고 하여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사질(李思質)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경릉(敬陵)과 익릉(翼陵)과 순회묘(順懷墓)에 전배(展拜)하였다.

 

3월 27일 정미

임금이 창릉(昌陵)과 홍릉(弘陵)에 나아갔다가 이어 소영원(昭寧園)에 나아갔다.

 

3월 28일 무신

환궁(還宮)하였다.

 

3월 29일 기유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왕세손이 효소전(孝昭殿)과 휘령전(徽寧殿)에 전알(展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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