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해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자년(庚子)041) 이후로 이미 군신(君臣)의 3년 복제(服制)를 회복하였으니 한(漢)·당(唐) 이후에 예의(禮義)가 우리 나라에서 크게 밝아졌다. 아! 3년의 복제를 입은 자가 중월(中月)을 지나기 전에 금옥(金玉)으로 꾸민다면 상제(喪制)가 분명한 것이냐, 아니냐? 중관(中官)이 비록 사서(士庶)와는 다름이 있으나 제최(齊縗)도 또한 3년의 복제이다. 그런데도 겨우 상월(祥月)이 지나가면 금옥으로 치장을 하는데, 그 전례(前例)를 궁구해보면 결코 중관이 시작한 것은 아니니 임인년042) 으로부터 조신(朝臣)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반드시 근본을 단정히 해야 할 것이니 어떻게 끝을 다스리겠느냐? 이 뒤로는 뭇 신하로서 상복(喪服)을 입는 자는 중월이 되기 전에는 금옥을 제거(除去)하는 것을 정식(定式)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효소전(孝昭殿)의 담사(禫祀) 때에는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현포(玄袍)로써 제사(祭祀)를 거행하도록 하고, 효소전의 담사 이전에 휘령전(徽寧殿)의 대제(大祭) 때는 서계(誓戒)를 거행(擧行)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일 임자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해서 어사(海西御史) 김광국(金光國)이 복명(復命)하였는데, 평산 부사(平山府使) 안상오(安相五)는 장오(贓汚)의 불법(不法) 때문에 의금부에 내리어 율(律)에 의하여 엄중 처치케 하였다. 해서인(海書人) 윤은빙(尹殷聘)은 나이 8세에 그 아버지를 위하여 단지(斷指)하였고 임씨(林氏)의 딸은 수상(守喪)하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니 아울러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4월 3일 계축
초저녁에 혜성(彗星)이 익수(翼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크기는 금성(金星)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척(尺)쯤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장리(贓吏) 안상오(安相五)의 전최(殿最)043) 의 제목(題目)이 실제와 어긋났기 때문에 특별히 황해 감사 조명정(趙明鼎)을 파직시켰다.
서지수(徐志修)를 대사헌으로, 정옥(鄭玉)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문과(文科)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행하였다.
이조 참판 김상복(金相福)을 파직토록 명하였다. 수봉관(守奉官)을 승서(陞敍)하도록 승전(承傳)한 자라고 현주(懸注)하여 봉사(奉事)에 추천하여 들인 때문이었다. 승지(承旨) 이길보(李吉輔)가 정관(政官)이 당초에 조종(操縱)한 것이 아니라고 앙진(仰陳)하니, 임금이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가 다음날 임금이 전번의 명령을 멈추도록 명하였다.
윤동도(尹東度)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4일 갑인
밤에 혜성(彗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타났는데, 크기는 목성(木星)과 같았고 빛깔은 황백(黃白)이었다.
원경순(元景淳)을 도승지로, 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니 대신과 예조 판서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을 부묘(祔廟)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묘(廟)에 부(祔)하는 예(禮)를 고례(古禮)에서 자세히 상고하니 성묘(成廟) 이전에 정묘(定廟)·광묘(光廟) 양조(兩朝)에서는 모두 납향(臘享)으로 인하여 달을 넘겨서 행하였고 성묘 이후에는 모두 담월(禫月)에 행하였다. 정희 왕후(貞熹王后)는 5월에 부묘를 하였는데, 이때 처음에는 성묘께서 맹추(孟秋)의 향일(享日)에 거행하라는 하교가 계셨다. 이런 때문에 이번에는 선왕(先王)의 전헌(典憲)을 지키고자 하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즉시 길일(吉日)을 가려 들이게 하라. 아! 이번에 처음에는 두 달을 넘어서 행하기로 내정(內定)하여 미칠 수 없는 슬픔을 조금이나마 펴려고 하였는데, 이번에 진정(進定)하여 나의 기운으로써 장차 11실(十一室)에 4위(四位)을 함께 모시는 성의(盛儀)를 목도(目覩)하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여감(餘憾)이 있겠느냐? 연려(輦輿)와 의물(儀物)은 모두 석년(昔年)에 쓰던 것인데, 한결같이 인산(因山) 때의 예(例)에 의하여 새로 갖추지 말고 옛것을 사용하도록 하라. 아! 지난해에 영휘전(永徽殿)을 중수(重修)할 때에 우리 자성(慈聖)께서 선미(膳米)로써 도감(都監)을 도우셨는데, 하물며 지금의 대례(大禮)이겠느냐? 대내(大內)에서 내린 은자(銀子)는 탁지(度支)에 부치고, 선미(膳米) 1백 석(石)은 도감에 부쳐서 내가 자성을 우러러 깊이 유념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4월 5일 을묘
구름이 짙어서 혜성(彗星)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야대(夜對)하였다.
4월 6일 병진
밤에 혜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타났는데, 크기가 좌각성(左角星)과 같았고 빛깔은 담백(淡白)이었다.
4월 7일 정사
구름이 짙어서 혜성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4월 8일 무오
밤에 혜성이 익수(翼宿)의 3도(三度)에서 나타나서 북극(北極)과 거리(距離)가 1백 12도인데, 달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또 노니는 기운[游氣]이 있어 형체는 약간 희미하고 빛깔은 담백(淡白)이었다.
4월 9일 기미
구름이 짙어서 혜성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조 판서 이창의(李昌誼)를 체차하고 이철보(李喆輔)로 이를 대신하도록 명하고,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의 하향 대제(夏享大祭) 때문에 재전(齋殿)에서 재숙(齋宿)하고, 왕세자는 휘령전(徽寧殿)의 하향 대제 때문에 휘령전에서 재숙하였다. 하교하기를,
"부묘(祔廟)하는 날에 신위(神位)를 남쪽 신문(神門) 밖 악차(幄次)에 봉안(奉安)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재실(齋室)에 들어있겠느냐? 신문 밖의 길 남쪽에 나의 소차(小次)를 설치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부묘의 경과(慶科)는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했으니 서울에 모두 모을 수가 없다. 경외(京外)에 나누어 시취(試取)하되 한결같이 영모전(永慕殿)의 구례(舊例)에 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0일 경신
구름이 짙어서 혜성(彗星)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철보(李喆輔)가 일찍이 차전(次銓)이 되었을 때에 탄핵을 받은 일이 있으니, 돈박(敦迫)하는 것은 정성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는 특별히 허체(許遞)를 명하고 이창수(李昌壽)로써 이를 대신토록 하였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하향 대제를 거행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의 하향 대제를 거행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4월 11일 신유
해에 거듭된 햇무리가 있었는데, 관(冠)이 있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밤에는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가고 구름이 짙어서 혜성(彗星)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도승지 이길보(李吉輔) 등이 연계(聯啓)하여 면려(勉勵)하기를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도승지 이길보 등이 면계(勉戒)할 것을 상달(上達)하기를,
"보전하고 아끼는 방도가 마땅함을 잃어 성인(聖人)의 병을 조심하라는 경계에 어긋났고,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온전치 못하여 대조(大朝)께서 사물(事物)에 순응(順應)하라는 가르침도 체득(體得)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료(臣僚)들이 진계(陳戒)하는 말에는 의례적으로 가장(嘉奬)의 답(答)이 있습니다마는 마침내 체행(體行)의 실(實)에는 흠(欠)이 있으며, 저하(邸下)께서 책궁(責躬)하시는 말씀은 간측(懇惻)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도리어 형식(形式)에 따르는 귀결(歸結)이 되고 맙니다. 생각건대 저 날마다 굽어 보는 하늘이 정녕코 우리 저하를 옥성(玉成)하기 위하여 신복(申復)하는 바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해마다 없는 해가 없는 중에 요성(妖星)이 나타나는 변(變)이 두 달 동안에 연이어 나타났으니, 마음에 실로 놀랍고 두렵다. 이는 모두 불민(不敏)한 탓인데, 면계하는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마땅히 마음속에 새길 것이다."
하였다.
교리 송형중(宋瑩中)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앙이란 헛되게 생기는 것이 아니니, 이치가 진실로 교연(較然)합니다. 아! 사욕(私慾)을 극복(克服)하지 못하면 용사(用捨)에 있어 편벽되는 데에 이르기가 쉽고, 위로(威怒)가 혹 폭발하면 형정(刑政)이 평윤(平允)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원보(元輔)의 진퇴(進退)는 실로 국체(國體)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세 번 정고(呈告)하매 즉시 허부(許副)하였으니 예우(禮遇)가 이미 간소(簡疎)하였고 시패(試牌)를 어기고 포만(逋慢)하면 스스로 처분하는 규례가 있는데 일시(一時)에 멀리 귀양보내시니 처분(處分)이 과중(過重)합니다. 총재(冡宰)는 중질(重秩)인데 쉽게 바꾸기를 미관(微官)과 다름이 없으니 마침내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는 뜻이 결함되었으며, 방백(方伯)은 중기(重寄)인데도 조용(調用)하기를 승전(承傳)과 같이하니 자못 탄압(彈壓)하는 중망(重望)이 없습니다. 낭묘(廊廟)의 사이에서는 광정(匡正)하는 말이 없어졌고 대각(臺閣)의 위에서는 규탄(糾彈)하는 의논이 들리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조경(躁競)은 더욱 심해지고 염괴(廉愧)는 모두 상실(喪失)되었습니다. 총탁(寵擢)이 지나치게 잦아 모두 희기(希覬)의 생각을 갖게 되고, 견벌(譴罰)이 서로 잇달으니 모두 출박(沭迫)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조강(朝綱)과 세도(世道)가 날로 점점 내리막을 접어들어 한가지 일도 전도(顚倒)된 것을 붙들어 일으키고 위태로운 것을 바로 잡을 수가 없으니 저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고 천체(天體)의 현상이 재앙을 내리는 것은 진실로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정원(政院)에 하유(下諭)하였는데 또한 송름(悚懍)스러운 생각이 간절하다."
하였다.
교리 송형중(宋瑩中)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혜성(彗星)의 재앙은 이미 비상(非常)에 도달했는데, 홍관(虹貫)의 변괴가 또 어찌하여 만들어졌겠습니까? 우리 저하께서는 날마다 두 번씩 서연(書筵)을 열었으니 학문을 강(講)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고, 한달에 세 번씩 빈대(賓對)를 행했으니 정사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독(幽獨)하고 은미(隱微)한 곳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기가 어려웠으며, 한가하고 고요한 중에는 사람이 방자하기가 쉬우니, 정령(政令)에서 발현되는 것이 혹 성실(誠實)을 결(缺)하게 되고, 사물(事物)에 응하는 것이 자못 문식(文飾)에 가깝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하고 완호(玩好)를 경계하지 않는 데에 이르게 되었으니 천심(天心)의 시경(示警)이나 천체(天體)의 현상이 재앙을 알리는 것은 괴이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재앙을 늦추는 방도는 오직 저하께서 몸을 돌이켜 수성(修省)하시는 데에 있을 것인데,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하는 마음이 생겨 혹 성실치 못한 일이 있으시면 질풍(疾風)과 뇌우(雷雨)를 부르는 것이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는 중에 요성(妖星)이 다시 나타나고 홍관(虹貫)의 변이 두 달 사이에 거듭 나타났으니 마음이 실로 놀랍고 두렵다. 나의 불민(不敏)으로 말미암아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고 언제나 성교(聖敎)를 번거롭게 하니 늠척(懍惕)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면계(勉戒)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마땅히 심부(心腑)에 새기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는 중에 요성(妖星)이 다시 나타나고 홍관(虹貫)의 변이 두 달 사이에 연이어 나타났으니 마음에 실로 경척(驚愓)스럽다. 이는 나의 불민(不敏)으로 말미암아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고 언제나 성심(聖心)을 번거롭게 한 소치이니, 경(卿)들이 어찌 지나치게 인구(引咎)하려는 것인가? 우애(憂愛)의 마음으로 진면(陳勉)한 것은 글자마다 간절하고 옳으니, 심골(心骨)에 새기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2일 임술
헌납 이심원(李心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 근일에 삼가 살펴보건대 하늘에서 경고(警告)함이 거의 비는 달이 없었습니다. 혜성(彗星)의 재앙이 그치지 않는데다가 홍관(虹貫)의 경보(警報)가 또 이르렀으니, 아! 이것이 무슨 징조입니까? 오늘날 소이(消弭)의 방책을 아뢰는 자들은 반드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도 또한 이러한 말을 버리고 따로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른바 ‘근(勤)’이란 것은 한갓 하루에 두 번 강독(講讀)하고 한 달에 세 번 인접(引接)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학문과 정사는 실질(實質)로써 하는 것이요 형식(形式)으로써 하지 않은 연후(然後)에라야 바야흐로 부드런히 한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던 중에 요성(妖星)이 거듭 나타나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이 두 달 사이에 연이어 일어나서 바야흐로 늠척(懍惕)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일은 나의 불민(不敏)으로 말미암아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고 매양 성심(聖心)을 번거롭게 한 소치이다. 진달한 바는 간절하고 지극하니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달빛 때문에 혜성(彗星)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4월 13일 계해
구름이 짙어서 혜성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대사간 홍종해(洪宗海)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우리 대조 전하(大朝殿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장차 40년에 다가오고 있는데, 그동안 인성(仁聲)과 인문(仁聞)이 사람들의 살결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위로는 이미 하우(夏禹)가 죄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인(仁)이 있었고 아래로는 요(堯)임금의 백성들이 추대를 원하는 정성이 간절하였으니, 우리 국가의 억만년(億萬年)토록 무강(無彊)한 복록(福祿)이 마침내 반드시 힘입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저하께서는 하늘에서 품부(稟賦)한 온화(溫和)의 자질(資質)로써 대조께서 부탁한 중임(重任)을 이어받아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한 지 여러해가 되었습니다.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행하시어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종(鍾)의 틈을 바르는데에 소를 바꾼 것044) 과 같이하고, 송제(宋帝)가 양치질한 물을 뱉을 때에 개미를 피한 것과 같이 하신다면 백성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하늘도 반드시 복을 내려 육기(六氣)045) 가 저절로 순조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모든 복이 저절로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일월(日月)은 빨리 흘러 효소전(孝昭殿)의 상사(祥事)도 어느듯 지나갔으니 망극(罔極)함이 갑절이나 된다. 근래에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는 중에 요성(妖星)이 거듭 나타나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이 두 달 사이에 연이어 나타났으니 마음에 실로 놀랍고 두려운데, 이는 모두 내가 불민(不敏)한 탓이다. 아뢴 바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 이기경(李基敬)이 상서하여 진면(陳勉)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대답을 내렸다.
대사헌 서지수(徐志修)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어떻게 근년(近年) 이래로 전학(典學)에는 작철(作輟)의 탄식이 있어 수용(受用)의 효과가 없으며, 청언(聽言)에는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아량은 있으되 개역(改繹)의 실상은 없으니, 혹여나 안일(安逸)의 사사로움에 예지(睿志)를 빼앗긴 바가 있고, 직절(直切)한 말이 예충(睿衷)을 감동하지 못함이 있어서입니까? 《대학(大學)》의 전지십장(傳之十章)에 혈구(絜矩)046) 의 도(道)가 있는데 대개 재물이란 백성이 이로 말미암아 생활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나라나 집에 화란(禍亂)을 일으키는 소이(所以)는 모두 이 속을 좇아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한 겨자[芥]만한 적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취하기를 도(道)로써 하지 아니하면 백성은 반드시 미워하고 원망하여 위란(危亂)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혈구장(絜矩章)에 오로지 재화(財貨)를 논(論)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구의 뜻은 매우 넓어서 어디든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이와 같이하여 미루어 행한다면 인의(仁義)를 장차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 무릇 사람들이 글을 읽다가 고인(古人)이 인(仁)을 해치는 정사나 의(義)를 거스르는 일을 보면 탄식하고 통한(痛恨)하며, 비웃고 타매(唾罵)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자신이 당하기에 이르러서는 상정(常情)에서 어긋나는 일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은 인(仁)이요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羞惡之心]은 의(義)인데 이는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확충(擴充)시킨다면 인의(仁義)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시건(李蓍建)과 변치명(邊致明)은 시종(侍從)의 신(臣)인데 상언(上言)에 들어있으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복(金相福)과 원인손(元仁孫)을 승지로 삼고, 이은춘(李殷春)과 윤태연(尹泰淵)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라고 명했으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천거한 바에 의한 것이었다.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과명(科名)이란 인신(人臣)으로서 발신(發身)하여 임금을 섬기는 첫 길입니다. 이런데도 신은 견식(見識)이 밝지 못하고 진취(進取)에만 조급히 서둘러 의리의 소재를 살피지 못했으니, 몸과 이름을 크게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신은 매양 생각이 한 번 여기에 이르매 뉘우치고 부끄러워 스스로 몸둘 바가 없습니다. 신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공의(公議)를 더욱 알만합니다. 비록 국체(國體)로써 말한다고 하더라도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진 뒤에는 이 과명은 문득 껍질이 없는 털과 같으니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은 사리(事理)에 분명합니다. 신이 연전(年前)에 이 일을 가지고 여러 번 연석(筵席)에서 아뢰었고 서장(書章)으로 번거롭게 진달했습니다마는 과명이 바르지 못하면 이 몸은 영구히 더러운 수렁 속에 잠겨있어 세탁(洗濯)할 길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때가 낀 옷을 입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도 지금 늙었고 경도 또한 늙었다. 오래되지 아니하여 마땅히 나와 더불어 함께 기사(耆社)에 들어가야 할 것이니 어찌 별인(別人)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김상로(金尙魯)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인즉 옳지마는 일인즉 들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신의 나이 70에 박두하여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이 과명을 버린다면 살아서는 정결한 몸이 될 것이고 죽어서는 정결한 귀신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지금 진사(進士)가 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4월 14일 갑자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 새벽에 입직(入直)한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심경(心經)》을 강하고 장차 《속자성편(續自省編)》을 제술(製述)하려 하여 먼저 서문(序文)을 지었다.
임금이 담월(禫月)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오첩(端午帖)을 그만두도록 명하였다.
이날에 비가 내리니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 보내어 농사 형편을 살펴보게 하였다.
4월 15일 을축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서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농민(農民)을 불러 보고 농사 형편을 하순(下詢)하였으니, 가뭄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에 비를 얻게 된 때문이었다.
4월 17일 정묘
밤에 혜성(彗星)이 장수(張宿)의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불러 보고 8도(道)의 의옥 문안(疑獄文案)을 심리(審理)하였다.
문과(文科)의 식년시(式年試) 창방(唱榜)에서 이태정(李台鼎) 등 54인을 취(取)하고 이어 빈양문(賓陽門)에 친림하여 불러 보았다.
4월 18일 무진
밤에 혜성(彗星)이 장수(張宿)의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유성(柳星)의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장리(贓吏) 안상오(安相五)의 축낸 것이 누천 금(累千金)이었는데, 지만(遲晩)한 초사(招辭)가 오히려 실토정을 하지 않았으니, 정상(情狀)이 가증(可憎)스럽다 하여 이에 친히 선인문(宣仁門)에 나아가 군법(軍法)으로써 조리돌린[回示] 뒤에 다시 형신(刑訊)을 가(加)하여 결안(結案)차로 취초(取招)하고 계복(啓覆)047) 을 기다린 뒤에 법을 집행하게 하였다.
4월 19일 기사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20일 경오
밤에 혜성(彗星)이 장수(張宿)의 5도(度)에서 나타났는데, 북극(北極)과의 거리가 1백 9도(度)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4월 21일 신미
밤에 혜성이 장수(張宿)의 4도에서 나타났고 달이 떠올랐는데,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을 불러 보고 《자성편(自省編)》을 진독(進讀)케 한 다음 다시 1편(編)을 지었다.
4월 22일 임신
밤에 혜성이 장수(張宿) 4도(度)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4월 23일 계유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봉조하(奉朝賀) 원경하(元景夏)를 불러 보고 《속자성편(續自省編)》을 교정(校正)케 하였다. 탐리장(貪吏章)에 이르러 원경하가 말하기를,
"군용(軍容)은 삼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지난 번에 장리(贓吏)의 일 때문에 궐문(闕門)에 전좌(殿坐)하시어 군용을 설치하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자손에게 끼쳐줄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오랜 동안 급암(汲黯)048) 을 보지 않았는데, 지금 또 운운(云云)한 것은 내가 마땅히 명념(銘念)하겠다."
하였다. 다음 과폐장(科弊章)에 이르러서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은 과장(科場)에서 늙었기 때문에 자못 그 폐단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당시에 비교하면 아마도 심한 바가 있습니다. 면시(面試)의 의논도 모두 도움되는 말이 아니니 오로지 시관(試官)을 선택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관을 선택하는 말에 과연 의견(意見)이 있다."
하였다. 원경하가 인하여 소매 속에서 차자(箚子)를 내어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대학(大學)》을 강독(講讀)하신다고 했습니다. 선성(先聖)께서는 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써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을 삼았고, 주자(朱子)는 역책(易簀)049) 하기 나흘 전에 성의장구(誠意章句)를 고쳤다고 합니다. 무릇 성(誠)이란 한 글자는 성현(聖賢)의 대단히 요긴한 두뇌(頭腦)였으니 그가 고친 것은 곧 ‘필자겸(必自慊)’이라는 세 글자였습니다. 주자는 겸(慊) 자를 해석하여 이르기를, ‘쾌(快)하다.’·‘족(足)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신에게 쾌하고 만족할 것이지 구차(苟且)하게 밖을 따라 남을 위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성의와 정심은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하나라도 폐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마음에는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즐거워하고 걱정하는〉 네 가지의 작용이 있는데, 혹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면 마음이 움직여지고 정(情)이 이기어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할 수 없을 것이니, 맹렬히 반성함이 마땅합니다. 혈구(絜矩) 한 장(章)은 성왕(聖王)의 치평(治平)하는 대요(大要)입니다. 황명(皇明)의 각신(閣臣) 섭향고(葉向高)가 신종(神宗)에게 고하기를, ‘《대학(大學)》의 한 책에 치국·평천하를 논한 것은 오직 용인(用人)과 이재(理財)의 두 단서 뿐이니,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잘못 쓰고 이재를 잘못하고서 천하 국가를 잘 다스린 자는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지금 섭향고의 말로써 전하(殿下)를 위하여 외우는 것입니다. 옛적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논하기를, ‘걸음이 급하면 넘어지고 거문고 줄이 급하면 끊어지며 백성이 급하면 어지러워질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관용(寬容)함을 쓰되 절제가 있어야 하니 해이(解弛)함으로써 관용을 삼지 말며, 간소(簡素)함을 쓰되 절제가 있어야 하니 만이(慢易)함으로써 간소를 삼지 아니하여 적중(適中)하게 시행하면 폐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황제의 이러한 가르침은 만세(萬世)에 치법(治法)의 강령(綱領)이니, 신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우리 임금께 우러러 고하는 바입니다.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이 죽음에 임하여 유소(遺疏)를 올리기를, ‘선류(善流)를 등용하여 치도(治道)를 이룩하고 실덕(實德)을 잘 닦아서 대업(大業)을 회복(恢復)하여 우리 동방(東方)에 억만년(億萬年)의 끝없는 아름다운 기틀이 되게 한다면 신은 비록 구원(九原)에 있더라도 유한(遺恨)이 없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신(愚臣)이 하찮은 정성으로 선정(先正)의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시경(詩經)》 천보장(天保章)에 이른바 ‘달[月]이 점점 커져 밝아지는 것 같고 해가 떠오르는 것 같으며 송백(松栢)이 무성한 것 같다.’고 한 말을 거듭합니다. 신이 감히 이를 기려 성수(聖壽)를 축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펴보고 내가 마음으로 감탄하였다. 어찌 쇠모(衰耗) 했다고 일러 경의 이러한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마땅히 더욱더 힘쓸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에게 역과(譯科)에 참방(參榜)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을 경기 감사로, 이윤덕(李潤德)을 전라 수사로, 이경열(李景說)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진주 목(晋州牧)을 문음(文蔭)으로써 통의(通擬)하는 자리로 삼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4월 26일 병자
밤에 혜성(彗星)의 장수(張宿)의 위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황해도 유생(儒生) 신대관(申大觀)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4월 27일 정축
밤에 혜성이 장수(張宿)의 위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도감(都監) 3방(房)의 낭청(郞廳)과 미포 아문(米布衙門)에 입직(入直)한 낭청과 새로 차임한 수령(守令)을 불러 보았다.
경조(京兆)의 낭청(郞廳)에게 농민(農民)을 거느리고 와서 기다리라고 명하였으며, 영돈녕(領敦寧) 조재호(趙載浩)를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8일 무인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미포 공물 아문(米布貢物衙門)·군문(軍門)의 낭청(郞廳)을 불러 보았으며, 또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경과(慶科)의 별시(別試) 사목(事目)으로 삼경(三經)050) 중에서 1건을 자원(自願)에 의하여 추첨하여 1편(篇)을 전부 배송(背誦)토록 하되 한결같이 명경과(明經科)의 규정과 같이 하며, 사서(四書)는 그만 두게 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함안각(咸安閣)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정(情)은 비록 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禮)는 절도가 있는 것이다. 고례(古禮)에는 부묘(祔廟)하고 회가(回駕)할 때에 가요(歌謠)를 채택(採擇)하는 일이 있었으나,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이를 제(除)하셨고 전후부(前後部)의 고취(鼓吹)를 우리 성고(聖考)께서 또 진열(陳列)만 하고 주악(奏樂)은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옛날 등(滕)나라의 대부(大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도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나 등 문공(滕文公)은 결의(決意)하여 행하였다. 하물며 경자년051) 이후로 3년의 복제(服制)가 크게 갖추어진 일이겠느냐? 그리고 이미 고자(孤子)가 되었고 또 애자(哀子)가 된 사람으로서는 저 병오년과 임자년에 비교하여 더욱 다른 것이 있다. 조신(朝臣)들은 담월(禫月)이 지나면 종사(從仕)하는 것이 비록 근래에 예(例)를 이루었으나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내가 당해보니 지나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관계가 소중한 것 이외에는 어찌 차마 담월에 상복(常服)을 입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다음달 삼강(三講)을 초하룻날로 앞당겨 정했으니 그 뜻은 어떤 것인가 하면 하나는 추모(追慕)로 인한 것이니 어떻게 감히 1삭(朔)의 강(講)을 빠뜨리겠느냐? 하나는 곤의(袞衣)가 아니면 법강(法講)을 행하기가 어려우므로 그 당월(當月)에는 마음에 차마 할 수가 없어 그렇게 한 것이다.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3년의 복제를 마치고 부묘(祔廟)를 행한 뒤에는 육상궁(毓祥宮)에 배알(拜謁)함이 마땅하나 동가(動駕)할 때의 복색(服色)에 구애되어 오히려 다음달을 기다렸다. 저경궁(儲慶宮)에 봉안(奉安)한 뒤에 중삭(仲朔)052) 의 제향을 한번도 친행(親行)하지 못했으니, 정례(情禮)의 당연한 것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이러한 마음으로 전(殿)에 앉아 반사(頒赦)한다. 비록 소중함이 있더라도 고취와 헌현(軒懸)을 일례(一例)로 진열하고 주악한다면 분의(分義)에 있어서나 정리(情理)에 있어서 어찌하겠는가? 그 차마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은 내가 하고자하지 않는 바이니, 금번의 부묘하고 반사하는 때에는 고취와 헌현을 진열만 하고 주악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9일 기묘
혜성(彗星)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나아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를 불러 보았다. 김상로가 해서(海西) 금천군(金川郡)의 개량(改量)을 잘 거행하지 못하여 그때의 도신(道臣)을 파직시키고 지방관(地方官)을 잡아들여 추문(推問)케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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