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3권, 영조 35년 1759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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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술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봉작(封爵)의 회갑 진하(回甲陳賀)를 받았다.

 

6월 2일 신해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일소(一所)에서 방(榜)을 내걸었다.

 

태학(太學)의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임금이 전문(箋文)을 환급(還給)한 것 때문에 권당(捲堂)하고 소회(所懷)를 써 올렸다.

 

6월 3일 임자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서 작헌례를 행하였다.

 

6월 4일 계축

정언 안겸제(安兼濟)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별시(別試) 문과(文科)의 일소(一所) 초시(初試) 시권(試券) 중에 ‘당금(當今)’이라고 말하면서 장황(張皇)하게 떠들어대어 놀랄 만한 말이 많았습니다. 과장(科場)의 문자(文字)에 심지어 불경(不敬)의 거조가 있었는데도 이를 분명히 조사하여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질 것이니, 즉시 잡아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여 들었으나 아직도 진문(陳聞)하지를 않으니, 당해(當該) 시관(試官)에게 아울러 견파(譴罷)의 율을 베풀게 하소서."
하였다. 승지가 가지고 들어와서 비지(批旨)를 받을 생각으로 소조(小朝)066)  에게 품(稟)하니, 즉시 입대(入對)를 허락하였다. 승지가 읽어서 아뢰니, 하령하기를,
"그 글이 어떠하기에 대서(臺書)가 이와 같으냐?"
하였다. 승지가 말하기를,
"과제(科題)는 가례(家禮)로써 발문(發問)한 것입니다. 아직 봉한 것을 열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떠한 유생(儒生)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그 글의 허두(虛頭)에 혼례(婚禮)를 말하였는데, 그 요긴한 말은 ‘아조(我朝)에 와서 간택(揀擇)한 것이 어느 세대(世代)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비루(鄙陋)하고 또 불경(不敬)하여 단지 용모의 예쁘고 누추함과 언어의 조용하고 우아함으로써 취(取)한다.’ 하였고, 끝에 또 ‘어색(漁色)067)  의 기롱[漁色之譏]’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습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이것은 과거(科擧)의 욕망(慾望)에서 나와 별다른 의견(意見)을 낸 데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신(臺臣)이 이미 이와 같이 성토(聲討)하였으니 내가 스스로 천단(擅斷)하는 것은 옳지 않다. 뒷날 입시(入侍)하여 대조(大朝)께 품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6월 5일 갑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에게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승지 홍준해(洪準海)가 안겸제(安兼濟)의 상서한 말로써 아뢰니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이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그때에 상시관(上試官) 오언유(吳彦儒)가 그 시권(試券)의 일로써 신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살피지 못하고 집에 가지고 왔으니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이미 범상(犯上)의 부도(不道)한 말이 아닌즉 청대(請對)하는 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안겸제가 틈을 타서 글을 올렸으니, 그 뜻을 궁구해보면 심히 아름답지 못합니다."
하매, 임금이 주서(注書)에게 그 시권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먼저 그 긴절(緊切)한 말을 아뢰겠습니다."
하고, 비루(鄙陋)하며 불경(不敬)하다는 것과 용모·언어·어색(漁色) 등의 구절(句節)로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완전히 간택(揀擇)의 법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색(漁色)’이란 두 글자는 적합하지 않으니, 그 당시의 시관이 잘 주선(周旋)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러한 문제를 출제한 것도 이미 지극히 요긴한 것이 못되고 비록 이러한 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하고(下考)에 부쳐 흔적(痕跡)이 없게 했더라면 모두 일이 없었을 것인데, 하필이면 열 번이나 깊이 싸서 집에 가지고 왔느냐?"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그 봉한 것을 열게 하니, 곧 통덕랑(通德郞) 이규위(李奎緯)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유생(儒生)이 스스로 별다른 의견(意見)을 내어 이렇게 한 것이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오로지 과거의 욕심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들은 뒤이니 신칙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규위를 영구히 유적(儒籍)에서 지워버리고 시관(試官) 서지수(徐志修) 등에게도 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안겸제도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옳다."
하고 체차(遞差)를 명하였다가 즉시 도로 환수(還收)하였다.

 

임금이 북도 어사(北道御史)의 서계(書啓)를 열람하였는데,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광익(李光瀷)의 치적(治績)이 제일이었으므로 특별히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이성 현감(利城縣監) 이덕로(李德老)와 영흥 부사(永興府使) 심봉휘(沈鳳徽)와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정수(李廷壽)를 모두 파직(罷職)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6일 을묘

영부사 유척기(兪拓基)를 대혼시(大婚時)의 정사(正使)로,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6월 7일 병진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집(任)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6월 9일 무오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여 유학(幼學)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정하고, 하교하기를,
"김한구의 딸로 정하였는데 첨의(僉議)는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좌의정        신만(申晩)·우의정        이후(李) 및 예조(禮曹)의 세 당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으니 진실로 신인(神人)의 소망(所望)에 합당합니다. 이는 실로 온 나라 신민(臣民)의 복이니, 흔변(欣忭)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혼(大婚)을 6월 22일 오시(午時)로써 택길(擇吉)하고 이날 정사를 열어 김한구를 돈녕 도정(敦寧都正)으로 삼았으니, 왕비(王妃)의 아버지에 대하여 전례(前例)대로 제수한 것이다. 김시찬(金時粲)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안집(安𠍱)과 유한소(兪漢蕭)를 분승지(分承旨)로 삼았다.

 

6월 10일 기미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돈녕부(敦寧府)에 들러서 보첩(譜牒)을 봉심(奉審)하였다.

 

6월 11일 경신

영춘 현감(永春縣監) 이경옥(李敬玉)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본현(本縣)의 환곡(還穀) 회안(會案)을 취하여 보니 두 창고에 회부(會付)한 영진(營賑)의 각곡(各穀)이 합해서 1만 4천 49석인데 을해년068)   이후에 회부곡(會付穀)의 미봉(未捧)이 3천 3백 72석 영(零)이 되고 미봉(未捧)을 이봉(已捧)으로 한 것이 2천 4백 90석 영이어서 통합하여 5천 8백 62석 영이 됩니다. 이것은 2천 3백여 호(戶)의 전성시(全盛時)에 분급(分給)한 것인데, 여러 번 참혹한 흉년을 겪으면서 백성이 흩어지고 도망하여 거의 다되었으므로 미봉한 수(數)가 이토록 많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놀라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급히 장적(帳籍) 및 전후(前後)로 분급(分給)하고 봉상(捧上)한 질책(秩冊)을 상고하여 그 진위(眞僞)를 사정(査正)한 즉 전가 몰사(全家沒死)와 물고(物故)된 자가 3백 48호였고 도망하고 유린(流離)된 자가 5백 4호인데, 위의 8백 52호의 2년 동안 받지 못한 곡식이 3천 6백 74석이니 이는 이미 지적(指的)하여 받아들일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 나머지 6백 98호에 받지 못한 것도 또한 2천 1백 88석인데, 비록 현재 살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혹은 집이 허물어져서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거나 혹은 바가지를 들고 도로(道路)에서 걸식을 하는 자가 그 절반을 넘으니, 받기 어려운 폐단이 유망(流亡)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군폐(軍弊)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자못 심한 바가 있습니다. 을해년과 병자년069)   이래로 민호(民戶)가 날로 줄어들어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고 작년과 금년에 돌아와서 모인 것을 통계(通計)하면 겨우 1천 2백 50여 호인데, 여기에서 공천(公賤)과 사천(私賤)·군교(軍校)·역속(驛屬)·수첩 군관(守堞軍官)·선무 마병(選武馬兵)과 잔독(殘獨) 9백 호를 제외하면 응역(應役)할 수 있는 나머지 홋수는 겨우 3백 호를 지날 뿐입니다. 이리하여 모든 상납(上納)할 미포(米布) 및 각 고을의 보인(保人)과 다른 고을에서 옮겨온 군병을 합하면 5백 90명이 되는데, 해마다 죽고 흩어지는 자가 또한 자그마치 2백 60여 명에 이릅니다. 이 3백 호의 백성으로써 6백 명에 가까운 군액(軍額)을 충당하기란 곧 밀가루가 없는 수제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세로 보아 아직은 장차 민호(民戶)가 차츰차츰 돌아와 모이기를 기다려서 오랜 세월을 끌어 가면서 그 궐액(闕額)을 보충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정(事情)이 위에 통하지 않고 과령(課令)을 어기기 어려우므로 마침내는 이웃과 친족에게 나누어 징수(徵收)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에 온 고을 백성들이 걱정하고 한탄하여 초상과 난리를 만난 것처럼 하여 소를 팔고 땅을 팔아 목전(目前)에 시급한 것만 면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외로운 잔민(殘民)들이 모두 짐을 꾸려 사방으로 흩어질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목전의 폐단을 구제할 방도로는 유맹(流氓)을 불러 모아 옛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환곡(還穀)의 포흠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온 경내(境內)에 안돈(安頓)될 날이 없을 것이요 수포(收布)를 멈추지 아니하면 돌아온 백성들이 도로 흩어질 형세에 있습니다. 6천 석의 받지 못한 것과 3백 군(軍)의 궐액(闕額)은 외면으로 보아 가볍게 의논할 것이 없을 듯하나 포흠을 받아들이고 궐액을 보충하기가 어려움이 위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만일 저하께서 민정(民情)의 궁고(窮苦)함을 진찰(軫察)하신다면 신의 이 글을 내리시어 묘당(廟堂)에 널리 물어서 좋은 방안에 따라 지교(指敎)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영돈녕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와 원풍 부부인(原豊府夫人) 원씨(元氏)에게 법전(法典)에 의하여 봉작(封爵)하였다.

 

6월 12일 신유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정사에서 내가 조영순(趙榮順)에게 광탕(曠蕩)한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하였으니, 대개 조영순은 지난해에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했기 때문에 여러해 동안 죄로써 금고(禁錮)되었던 자이다.

 

6월 13일 임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임어하여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정사(正使) 유척기(兪拓基)와 부사(副使) 조운규(趙雲逵) 등이 전정(殿庭)에서 4배(拜)를 행하고 채여(綵輿)를 따라서 나갔다.

 

6월 17일 병인

판부사 이천보(李天輔)가 교리 조영순(趙榮順)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글을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존(勢尊)’이란 한 귀절은 곧 인신(人臣)의 죄안(罪案)이니, 창황(蒼黃)히 성문 밖으로 물러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조영순에 관한 일은 해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에 성교(聖敎)가 지엄(至嚴)·지정(至正)하였음에도 고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아직까지 경을 헐뜯고 있으니, 진실로 통분하고 해괴한 일이다. 그 상서의 내용이 무엄(無嚴)함은 이미 알았는데, 경의 넓은 아량으로서 하필 입술에 올려 성문(城門) 밖으로 물러가는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더구나 막중(莫重)한 대례(大禮)의 기일이 박두한 때이겠는가? 더욱 대신(大臣)으로서 외방에 있을 시기가 아니니, 경은 모름지기 안심(安心)하여 다시는 정사(呈辭)하지 말고 즉일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원류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친림하여 납징례(納徵禮)를 행하였다.

 

6월 18일 정묘

빈궁(嬪宮)의 탄일(誕日)이므로 정원(政院)과 옥당(玉堂)이 뜰에서 문후(問候)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大臣)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앞서지도 않고 뒤지지도 않게 마침 검의(檢擬)하여 갈등(葛藤)을 빚어내게 되었다. 수령(守令)이 잘못 추천한 일도 스스로 그 율(律)이 있는 것인데 하물며 관직이 전형(銓衡)에 있으면서 간사한 당인(黨人)을 끌어올리는 일이겠는가? 당해(當該) 참정 당상(參政堂上)은 오천(誤薦)의 율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반가운 비가 내린 나머지에 장마를 이룰 징조가 있으니 백성을 위하여 마음에 걱정이 된다. 이러한 때에 풍성(豊盛)한 일은 더욱 절작(節酌)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감선(減膳)을 한다면 반상(盤床)과 봉과(封裹)070)  를 어느 겨를에 말하겠느냐? 그리고 이미 이 뜻을 보인 뒤에는 어찌 상례(常例)를 필요로 하겠느냐? 모든 행례(行禮)와 접대(接待)에 있어 유밀과(油蜜果)는 제하도록 하고 상화(床花)는 1반(盤)에 지나지 않게 할 것이며 대반(大盤)은 제하도록 하라. 이것은 대개 예(禮)를 궐(闕)할 수 없는 뜻에서이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승지(承旨)·도감(都監)의 당상(堂上)·낭청(郞廳) 밖에 내외(內外)의 반상(盤床)은 비록 봉명(奉命)한 중관(中官) 이하라 하더라도 일례(一例)로 제하도록 하라. 봉과에 이르러서는 예문(禮文)에 실려 있는 바에 의하여 정사·부사 외에는 일체(一體)로 제하도록 할 것이며, 이 밖에 안에서나 밖에서 만약 정식(定式) 밖에 징봉(徵捧)하는 일이 있으면 당해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엄중히 다스릴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써 신칙(申飭)하여 나가 백성을 위해 풍성한 것을 제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속자성편(續自省編)》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19일 무진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친림하여 고기(告期)하였는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고기한 뒤에 복명(復命)하였다.

 

6월 20일 기사

임금이 원류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친림하여 비(妃)를 책봉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는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비를 책봉한 뒤에 복명(復命)하였다.

 

6월 21일 경오

판부사 이천보(李天輔)가 사은(謝恩)하였다.

 

6월 22일 신미

임금이 어의궁(於義宮)에 나아가 친영례(親迎禮)를 거행하였다.

 

중궁(中宮)이 입궐(入闕)하여 동뢰례(同牢禮)를 거행하였다.

 

6월 23일 임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반교(頒敎)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삼기(三紀)동안 보위(寶位)에 있었으니 정사는 풍교(風敎)의 근본을 돈독히 하였고, 육례(六禮)를 이에 이루니 진실로 신인(神人)의 소망에 화합되었다. 나라의 경사를 밝게 드러내어, 팔방에 널리 반포(頒布)한다.
생각건대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은 실로 후비(后妃)의 아름다운 덕의(德義)에 달려있다. 우(虞)나라의 오교(五敎)071)  로 다스린 공적은 오로지 요녀(堯女)072)  가 가도(家道)를 바로잡은 데에서 말미암았고, 주(周)나라이남(二南)073)  의 풍속을 돈후하게 한 아름다움은 또한 태사(太姒)074)  가 교화(敎化)를 도운 데에 힘입은 것이다. 돌아보건대 과궁(寡躬)은 배필(配匹)을 잃었으니, 가만히 내조(內助)할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근세(近歲)에 상사(喪事)를 여러 번 겪어 궁실(宮室)에서 편안한 생각을 갖지 못했는데, 만년(晩年)에 정사(政事)의 궐유(闕遺)를 보충하지 못했으니, 중궁(中宮)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어이 하겠는가? 얼마나 다행스럽게 자지(慈旨)를 옷 상자[笴] 속에서 얻었으니 이에 다시 종묘(宗廟)에 제물(祭物)을 올리는 즈음을 생각하였다. 천도(天道)는 홀로 운행할 수 없으니 오직 박후(博厚)하고 광대(光大)함이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이요 곤직(壺職)은 잠시도 비우기를 용납하기가 어려우니 이러기 때문에 자나 깨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이에 고인(古人)의 덕(德)을 취하는 깨우침을 원용(援用)하여 먼저 어진 이를 선택하였고 성왕(聖王)의 근본을 바루는 다스림을 힘써서 내조할 사람을 구하고자 하였다. 왕후 김씨(金氏)는 교목세신(喬木世臣)의 가문(家門)에 태어나서, 옛날 증사(曾沙)075)  의 경사(慶事)가 다시 나타났다. 숙신(淑愼)하고 유화(柔和)한 품행(品行)은 진실로 양좌(良佐)에 합당하며,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성품은 휘음(徽音)을 이음에 마땅하다. 이에 길신(吉辰)을 가리어, 아름다운 전례(典禮)를 갖추었노라. 본년(本年) 6월 22일 신미(辛未)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내려 왕후(王后)의 위호(位號)를 바루었다. 위수(渭水)의 배로 만든 다리076)  [舟梁]을 아름답게 꾸미니 만백성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장추전(長秋殿)의 문빗장이 다시 열렸으니 아홉 빈궁(嬪宮)들도 모두 얼굴빛이 용동(聳動)하였다. 일월(日月)이 함께 빛나는 모습을 드리웠으니 엄연히 항려(伉儷)의 존귀(尊貴)함을 이루었고 종고(鍾鼓)는 서로 화합하는 소리로 아뢰었으니 정가(正家)의 법도를 이루었다. 이는 다만 한 사람만의 흔행(欣幸)이 아니고, 장차 팔방(八方)으로 더불어 유신(維新)할 것이다. 도(道)는 부부(夫婦)에서 발단(發端)되는 것이니 지금부터 다시 시작되겠고, 정사는 은혜를 베푸는 데에 힘쓸 것이니 군품(群品)을 사랑하여 고루 입히리로다. 본일(本日)의 매상(昧爽)077)   이전으로부터 잡범(雜犯)과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 아!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면 제가(齊家)를 먼저 할 것이니 어찌 위엄 있는 교훈을 조금인들 소홀히 하겠는가? 교화는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치게 하는 것이니 척약(惕若)한 마음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바란다. 새로운 계책으로 돈륜(惇倫)에 힘쓸 것이며, 연면(延綿)한 복록을 영세(永世)토록 누리기를 바란다.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모두들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擇)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3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2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071] 오교(五敎) : 오륜(五倫).[註 072] 요녀(堯女) : 순(舜)임금의 두 비(妃) 아황(娥皇)·여영(女英).[註 073] 이남(二南) : 주남(周南)·소남(召南).[註 074] 태사(太姒) : 주나라 문왕(文王) 비(妃).[註 075] 증사(曾沙) :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사록(沙麓)이 무너지니 복자(卜者)가 말하기를, "645년 뒤에 반드시 성녀(聖女)가 난다." 하였는데,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비(妃)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함.[註 076] 위수(渭水)의 배로 만든 다리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후비(后妃) 태사(太姒)를 위수(渭水)에서 맞이할 때 배로써 다리를 만든 일.[註 077] 매상(昧爽) : 동틀 무렵.

 

민백상(閔百祥)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정사(正使) 이하에게 차등(差等)을 두어 상(賞)을 내리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구윤옥(具允鈺)과 도승지 임집(任)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6월 24일 계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온 수령(守令)을 불러 보고 농사의 형편을 하순(下詢)하였다.

 

6월 27일 병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정언(正言) 홍양한(洪亮漢)이 아뢰기를,
"무릇 득실(得失)과 선악(善惡)은 반드시 소장(疏章)으로써 아뢰는 것인데, 한번 대리(代理)를 맡기신 뒤로부터 대조(大朝)에게는 소로(疏路)가 길이 막혔으니 이때문에 당언(讜言)을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소장을 허락하여 언로(言路)를 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관(臺官)의 말은 체통을 얻었으나 이는 내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또 진차(陳箚)하는 일이 있고, 또 차대(次對)할 때에 나아와서 아뢰는 길이 있는데, 어찌하여 진언(進言)의 길이 없음을 근심하는가?"
하였다. 홍양한이 부복(俯伏)하여 한동안 있다가 다시 아뢰기를,
"마침내 윤허(允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그 임금에게 강박(强迫)하는 것이냐?"
하고, 옥음(玉音)이 자못 준엄(峻嚴)하매, 교리(校理) 김응순(金應淳)이 대관의 말은 최절(摧折)할 수가 없는데, 성교(聖敎)의 이와 같음은 부당(不當)하다고 진계(陳戒)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6월 28일 정축

조명정(趙明鼎)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 이후(李)가 이르기를,
"전하께서 만약 조영순(趙榮順)의 조부(祖父)를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차마 조영순을 버리겠습니까? 조영순이 상서한 내용은 죄를 줄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전하의 처분이 과중(過中)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판부사(李判府事)의 거조(擧措)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나도 또한 따라서 처분이 과중하였다."
하였다. 이창수(李昌壽)가 말하기를,
"처분은 비록 대신(大臣)의 지나친 거조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여 태복(太僕) 등의 하교를 쓰십니까?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그날의 하교(下敎)를 멈추게 하였다.

 

6월 29일 무인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예천(醴泉)의 사창(社倉)이 불에 탔으므로 벼와 콩 모두 8백 80석(石)을 예(例)에 의하여 탕감(蕩減)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홍양한(洪亮漢)은 대조(大朝)께서 엄한 하교(下敎)가 있었으니 마땅히 인피(引避)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혐(引嫌)도 하지 않고 대각(臺閣)에 나아가서 행공(行公)하였고, 지금 차대(次對)에서는 마땅히 진참(進叅)해야 할 것인데 도 여러 사람을 따라 소패(召牌)를 어겼으니, 대신(臺臣)의 체통을 궤손(壞損)시킨 것이 심합니다. 청컨대 파직케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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