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6월 1일 기묘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이 말하기를,
"엊그제 황해 감사 정옥(鄭玉)을 외방에 보직(補職)하라는 하교는 진실로 지나칩니다. 만약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발탁했던 특이한 은전이 아니였으면 정옥이 어떻게 방백(方伯)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이 방백을 명한 것은 곧 승탁(陞擢)입니다. 외방에 보직한다고 의의(擬議)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당차(堂箚)가 있은 때에 유신(儒臣)이 동참(同參)했더냐?"
하매, 김응순이 말하기를,
"동참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자세히 들으니 차자의 말은 탄압(彈壓)하기에 부족(不足)하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가 부임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그러하니 외지로 보직하라는 하교는 마침내 과중(過中)한 데 관련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이번에 아뢰는 말은 속규(俗規)임을 면치 못하겠다."
하였다.
윤6월 3일 신사
이익보(李益輔)를 호조 판서로, 황인검(黃仁儉)을 이조 참의로, 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뜰에 가득해야 할 비국 재신(宰臣)들이 지금 5인에 그쳤으니 일이 한심(寒心)하기가 이보다 심함이 없다. 차대(次對)에 불참한 여러 재신은 정세(情勢)가 있겠으나, 실제로 병든 사람 이외는 한결같이 의금부(義禁府)에 내리어 추고(推考)토록 하라."
하였다.
윤6월 4일 임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윤6월 5일 갑신
이심원(李心源)을 승지로, 김시찬(金時粲)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예조 판서를 불러 보고 승지에게 하명(下命)하여 조참(朝參)078) 을 행하라고 한 윤음(綸音)을 쓰도록 명하기를,
"조참을 행한 지 대개 오래되었다. 담월(禫月) 뒤에는 곧 행하여야 하나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원량(元良)은 한달에 두번 상참(常參)079) 을 행해야 되는데도 시행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뭇 신하의 허물이겠느냐? 또한 내가 솔선 수범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인정문(仁政門)의 조참은 명일(明日) 행하도록 하라. 또 한 달에 세 차례씩 차대(次對)하던 것을 여섯 차례로 하게 한 것은 곧 무인년080) 전에 내린 특교(特敎)였다. 내가 마침 무인년에 한 달에 한 번씩 차대하던 것을 세 번씩 차대하는 것으로 고친 것은 어찌 우연(偶然)한 일이겠느냐? 정원(政院)이 매일 상참과 경연(經筵)을 품(稟)한 것은 곧 시사(視事)를 품한 것이다. 만약 한다고 명했다면 상참을 행한 뒤에 조강(朝講)과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의 3강을 하는 것이 예(例)이다. 만약 주강만을 명한다면 《정원일기(政院日記)》 중에 ‘상참을 정지하고 주강을 행했다.’고 쓸 것이다. 또 서늘한 기운이 생기기 전이나 날씨가 따뜻해지기 전에는 우선 멈추는 예가 있었는데, 융동(隆冬)과 성서(盛暑)에도 시사(視事)와 경연은 탈품(頉稟)하지 말고 길이 준행(遵行)토록 하라."
하였다.
다시 《소학(小學)》을 권(勸)하는 윤음(綸音)을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내가 지금 《대학(大學)》을 읽는데 그 근본이 무엇이냐 하면 곧 《소학(小學)》이다. 아! 쇄소(灑掃)와 응대(應對)는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니, 내가 비록 만학(晩學)으로 강(講)한 바가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직 지금까지 수용(受用)하고 있는 것은 곧 일부(一部)의 《소학》이다. 지금 사람들은 쇄소·응대의 절차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장성(長成)하기에 이르러서 근해(筋骸)가 이미 굳어지고 차서(次序)를 또 뛰어넘으니 가탄스럽다. 예조(禮曹)로 하여금 다시 칙려(飭勵)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아! 술편(述編)에 이미 이르기를, ‘스승이 배우지 못하고서 능히 제자(弟子)를 가르친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의 양덕(凉德)으로써 이미 군사(君師)의 도(道)에 모자라나, 모년(暮年)에 이를 신칙하는 것은 뜻이 깊다."
하였다.
윤6월 7일 을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일찍이 ‘거사(祛私)081) ’의 두 글자로써 앙달(仰達)하였습니다마는 법전(法典)이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사(私)’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전하께서 친한 자에게 사정을 보아주는 것도 이 또한 사(私)이니, 법을 쓰는 데는 마땅히 존귀(尊貴)하고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경책(警責)을 지나치게 자주하면 갈등(葛藤)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 때문에 나를 일러 사(私)를 한다고 하면 나도 또한 양보(讓步)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쇠세(衰世)의 말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분당(分黨)을 할 때는 반드시 사랑하고 미워함이 있으므로 이 폐단이 심하다. 당습(黨習)이 없어진 뒤로부터 옛적에 미워하던 사람도 지금에는 또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사사로운 뜻이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불법(不法)한 일은 세력 있는 자가 많이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피잔(疲殘)한 자도 그 본심(本心)은 진실로 잔인(殘忍)한 것이다."
하였다.
윤6월 8일 병술
하교하기를,
"관례(冠禮)와 혼례(婚禮)는 예(禮)의 소중한 것이니 하물며 국군(國君)의 혼례와 곤전(坤殿)의 관례이겠느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를 즉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엄교(嚴敎)가 내려진 것 때문에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6월 10일 무자
밤에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와 같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토성(土星)이 누벽성(壘壁星)으로 들어갔다.
김선행(金善行)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윤6월 11일 기축
필선(弼善) 김회원(金會元)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가만히 듣건대 하루에 세 번씩 차대(次對)하시고 하루에 두 번 경연(經筵)에 차예하신다고 하였는데, 매양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하시기 때문에 정폐(停廢)하는 때가 많습니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편안하고 방자함은 날로 엷어지고 씩씨하고 조심함은 날로 굳세어진다.’고 했습니다. 문득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저하께서 날로 굳세어지는 공부가 이르지 못한 바가 있고, 날로 엷어지는 뜻을 면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신이 듣건대 옛날에 명왕(明王)과 어진 임금은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으로써 자강(自强)의 계책을 삼지 않는 것이 없어서 무릇 성색(聲色)이 성품을 해치는 것과, 완호(玩好)가 뜻을 상실(喪失)하게 하는 것이며, 치빙(馳騁)과 익렵(弋獵)이 욕심을 방자하게 하는 것과 방벽(放僻)과 사치(奢侈)가 마음을 미혹케 하는 데에 관련된 것은 문득 모두 앞뒤를 징계하고 허물이 있으면 즉시 고쳐 호랑이의 꼬리와 봄날의 얼음을 밟듯이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간직하여 일신(一身)에 화평(和平)의 복이 있고, 만사(萬事)에 태기(怠棄)하는 근심이 없어서 국세(國勢)를 태산 반석과 같이 안정하게 하고 한 세대(世代)를 인수(仁壽)의 지역으로 오르게 하였으니, 이렇게 한다면 재려(災沴)가 혹 침로하고 영위(榮衛)에 손상이 있을 것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마음을 다스리고 병을 다스리는데 동일(同一)한 방법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근일(近日) 경연(經筵)과 차대(次對)에서 《주역(周易)》과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진강한다.’고 하니 이는 신명(神明)의 연고를 통하고 치란(治亂)의 자취를 상고하는 것입니다. 학문과 정치를 하는 대경(大經)·대법(大法)이 이책보다 더한 것은 없으니 여기에서 저하의 예학(叡學)의 고명(高明)함을 알겠습니다. 오직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는 인후(仁厚)로써 나라를 세우셨고, 대조(大朝)에 이르러서는 자애(慈愛)롭고 호생(好生)하는 덕(德)이 사람의 골수(骨髓)에까지 스며들었으니, 이는 바로 이른바, ‘천지(天地)의 대덕(大德)은 생(生)이다.’라는 것입니다. 4백 년 동안 연면(連綿)하게 전해 온 업적(業績)은 실로 여기에서 기인(基因)된 것입니다. 원컨대 저하께서는 열성조와 대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으시고 긍긍(兢兢)·업업(業業)하여 혹 안일(安逸)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여 대조를 대리(代理)하는 소중함을 보답하시고, 팔역(八域)의 학수 고대(鶴首苦待)하는 여망에 부응(副應)케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수위(首位)로 뽑힌 이조 좌랑 채위하(蔡緯夏)에게 말을 하사(下賜)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윤6월 12일 경인
중궁전(中宮殿)께서 수두(水痘)의 증세가 있으니, 약방(藥房)에서 직숙(直宿)하고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윤6월 13일 신묘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몸소 조참(朝參)의 예(禮)를 행하시어 백료(百僚)들을 전정(殿庭)에 나오게 하여 일을 자문(諮問)하셨으니, 그 뜻이 매우 거룩하셨습니다. 삼가 듣건대 그날 상하(上下)가 서로 면려(勉勵)함이 오직 ‘거사(祛私)’의 두 글자에 있었다고 하므로, 신은 병복(病伏) 중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궐연(蹶然)히 일어나서 ‘우리 나라가 희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사사로움이 해(害)가 되는 것을 어찌 이루 말하겠습니까? 백도(百度)가 좀먹고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이 날로 위란(危亂)의 지역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실로 한 개 ‘사(私)’ 자에 말미암아 빌미가 되었습니다. 우선 그 큰 것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임용(任用)에 있어 편벽된 것과 재정(財政)이 탕갈된 것과 언로(言路)의 막힌 것이 모두 사(私)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무릇 자질구레한 인척(姻戚)들을 후록(厚祿)의 관직에 두는 것은 고인(古人)이 경계한 바인데 조정의 위에는 태반(太半)이 인척의 신(臣)이요, 중비(中批)로 제수하는 것은 본래부터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청현(淸顯)의 반열에는 거의 친히 발탁하신 무리들입니다. 이러기에 사람들은 모두 인연(寅緣)의 마음과 요행(僥倖)의 희망을 품고 있으니, 공기(公器)082) 의 설만(屑慢)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궁방(宮房)의 절수(折受)는 혹 조종(祖宗)께서 정한 제한에서 넘쳐 나고 사여(賜與)의 은전은 아래로 궁속(宮屬)의 천류(賤流)에까지 미치니, 낟알 하나하나 농부의 고생으로 지은 곡식과 빈한한 집 부녀자가 짜서 낸 포백(布帛)이 거의 이런 데에 소모(消耗)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는 판국에 어찌 조금이나마 고려(考慮)하지 않습니까? 뭇 신하들이 이에 대하여 광정(匡正)할 생각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로 인하여 사람마다 서로 이끌어 각각 스스로 사(私)만을 영위(營爲)하니 이욕(利慾)이 횡류(橫流)하고 뇌물(賂物)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정사(政事)의 주의(注擬)가 남잡(濫雜)하고 과장(科場)이 엄숙하지 못한 데 이르니 폐속(弊俗)이 이에 휩쓸려 바로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전하의 영명(英明)으로써 어찌 그 정상(情狀)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바로 주자(朱子)의 이른바 ‘내가 이미 사정(私情)이 없을 수 없으니 저도 또한 그 사정을 이루려고 한다.’라는 말과 같게 되었으니, 군신(君臣)의 사이에 안정(顔情)이 점점 익숙해지면 조그만한 것은 용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언로(言路)가 막힌 데 있어서는 성지(聖智)가 무리에서 뛰어나시어 뭇 신하들를 굽어 보시고 홀로 위에서 운용하시니 이의(異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험해 생각하신다면 십수년(十數年) 동안 성의(聖意)의 향(向)하는 바를 신하의 말 때문에 저지(沮止)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또 성심에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신하의 말 때문에 행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더구나 장소(章疏)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소천(疎賤)한 자의 말은 더욱더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대소(大小)의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순종만 하여 기휘(忌諱)하는 데는 문(門)이 많고 봉승(奉承)하는 데에는 절도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윗 분의 뜻을 잘 탐지(探知)하는 것을 소인(小人)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아래위로 억측(臆測)하여 생각에 앞서서 뜻을 받드는 것을 유능(有能)하다 하며, 옛날에는 임금의 안색(顔色)을 거스려 거리낌이 없는 것을 충직(忠直)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제 뜻대로 망언(妄言)을 해놓고서 회호(回護)할 줄 모르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여, 익숙해짐으로 인해 습관을 이루어 염연(恬然)히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아! 풍속이 이와 같은데도 위망(危亡)에 이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이 세 가지는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요, 그 밖에 다른 백 가지 폐단이 모두 사(私)로 좇아서 나옵니다. 지금 이미 사(私)의 병통이 됨을 깨달았으면 상하(上下)가 서로 힘써 바로 마땅히 종일(終日)을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 단연(斷然) 여기에 힘을 써서 일체(一切)의 사의(私意)를 뿌리 뽑듯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으로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밖으로는 정사와 명령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따르고 오직 일호(一毫)의 사의(私意)도 그 사이에 참착(參錯)될 것을 두려워 한다면 장차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지고 다스리는 효험이 일신(一新)함을 볼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부제학 김시찬의 차자(箚子) 중에 정신(精神)은 오로지 조정(朝廷)에 있는 사람들을 경알(傾軋)하려는 데에 있으니, 곧 하나의 참서(讒書)이다. 그 첫머리에 ‘임용지편(任用之偏)’이라는 네 글자는 무한(無限)한 의사를 포함하였고, 조정의 위[朝著之上] 이하(以下)의 말은 첫머리에 얼버무려 은연(隱然)중에 빗대어 말했으니, 당심(黨心)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며, 그 밖에 다른 군더더기 말의 구차(苟且)스러움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 오늘 경연(經筵) 중에서도 이미 당(黨)의 근본은 사(私)라는 것임을 개유하였는데, 이는 바로 김시찬을 이르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마는 저가 비록 협사(挾私)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일 공평(公平)한 도리로서 수용(收用)한다면 신하로서는 협잡(挾雜)하는 태도를 모면할 수 없거니와 임금으로서는 스스로 포용(包容)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요요(寥寥)한 때를 당하여 어찌 깊이 다스리겠느냐? 그 차자 읽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에 떨어지는 것같다. 불효(不孝)·불초(不肖)로 3년을 참고 지냈으니 추모(追慕)하여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 가슴에 더욱 간절하다. 저도 또한 시종(侍從)의 반열에 속하는 한 사람이요 지위도 하대부(下大夫)에 있으면서 글로 쓴 차자에서 임금을 위로하는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그 목전의 방례(邦禮)에 어긋남을 어느 여가에 말하겠는가? 나라에 만약 기강(紀綱)이 있다고 하면 이러한 신절(臣節)은 없을 것이니, 어찌 이에 대한 법이 없겠는가? 그 마음을 묻지 않은 것도 또한 너그러운 은전(恩典)인데, 또한 직명(職名)이 아깝다. 김시찬을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부터 저군(儲君)의 덕(德)은 반드시 인후(仁厚)하고 온문(溫文)한 것으로써 일컬었으니 진실로 인(仁)은 만선(萬善)의 장(長)이 되며, 천지 만물(天地萬物)을 생(生)하는 마음인 때문입니다. 그리고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니 요순(堯舜)이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 예악(禮樂)으로 내외(內外)에 잘 닦아서 온윤(溫潤)하고 문아(文雅)한 기상(氣象)이 밖에 나타나 보이면 덕업(德業)의 융성(隆盛)함이 어찌 이보다 지나친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세손(世孫)께서는 아름다운 자질(姿質)을 하늘에서 품부(稟賦)하여 준수(俊秀)하고 숙성(夙成)한데 겨우 입학(入學)할 나이가 되어 덕성(德性)이 아직 정해지지 아니했으니, 일찍 깨우쳐 주어 의방(義方)으로서 가르침이 바로 시급합니다. 저하(邸下)께서는 여기에서 더욱 먼저 자수(自修)를 힘쓰시어 몸소 실천함으로써 교양의 방도로 삼으시며, 바른 사람을 가리고 바른 일로 인도케 하여 그 보양(輔養)의 술(術)을 다 갖추게 하소서.
아! 저하의 일신(一身)에는 위로 대조(大朝)를 받들어 비자(丕子)083) 의 책임이 있으며 앞서는, 4백 년 종사(宗社)의 소중한 부탁(付托)이 있고, 뒤로는 억만년토록 자손(子孫)에게 물려줄 어려운 업적이 있습니다. 이러니 전전 긍긍(戰戰兢兢)하여 오직 황추(荒墜)할까 두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신민(臣民)들이 목을 늘리고 우러러 바라는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간혹 좌우(左右)의 근습(近習)들이 봉승(奉承)하는 절차에 조심하지 않으며 액례(掖隷)와 궁속(宮屬)들이 거리와 저자의 사이에서 방자하게 횡행하니, 그들이 가탁(假托)하여 우러러 누(累)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저하께선 구중(九重)에 깊이 계시니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비록 혹 우탄(憂嘆)하며 각각 원충(願忠)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한번 앞서서 아뢰지 못하는 것은 어찌 저하를 아끼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지금부터 유사(有司)에게 밝게 영을 내리시고 금칙(禁飭)을 엄하게 가(加)하시어 저하의 청명(淸明)한 덕(德)을 밝게 나타내소서."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아뢴 바는 우애(憂愛)에서 나와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지금 부제학의 서본(書本)을 보니 근래에 궁속(宮屬)의 무리 및 궁속을 가탁(假托)하는 무리들이 여항(閭巷)과 시사(市肆)의 사이에서 혹 출입하면서 작폐(作弊)하는 일이 없지 않다고 하니, 일이 지극히 놀랍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각별히 무거운 법으로 죄를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윤6월 14일 임진
김상익(金尙翼)을 도승지로, 임위(任瑋)·김상구(金尙耉)·이봉화(李奉和)·안집(安𠍱)·이기경(李基敬)을 승지로 삼았다.
도승지 김상익(金尙翼) 등이 아뢰기를,
"곧 어저께 내리신 전교(傳敎)에서 삼가 구구(區區)한 우개(憂慨)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다함이 없는 효사(孝思)로써 부묘례(祔廟禮)를 겨우 마쳤는데, 지금에 신자(臣子)된 자로서 그 봉위(奉慰)하는 정성이 누구인들 감히 소홀하겠습니까? 저번에 김시찬(金時粲)의 차자(箚子) 중에서 감히 위로의 말씀을 드리지 않은 것은 다만 소(疏)와 차(箚)가 같지 않기 때문에 격례(格例)에 구애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하께서 이치를 살피시는 밝음으로써 말하는 자의 본정(本情)을 통촉하지 못하시고 심지어는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언로(言路)의 개폐(開閉)는 실로 나라의 흥체(興替)에 관계되는 것이니, 전하께서도 일찍이 중조(中朝)에서 탄식을 발(發)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국세(國勢)가 위급한데, 그 유지(維持)되는 도리는 오직 언로를 여는 한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 김시찬은 논사(論思)의 장(長)으로서 이런 침묵하고 머뭇거리는 날을 당하여 한마디 말을 겨우 올리자 준엄한 전교를 갑자기 내려 창황(蒼黃)히 염해(炎海)로 정배(定配)되어 경색(景色)이 참담(慘憺)하니 이것이 어찌 신 등이 성명(聖明)께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그 말이 혹 연충(淵衷)에 취할 것이 못된다고 하더라도 성인(聖人)이 세도(世道)를 근심하고 자손에 끼쳐 주는 계책에 있어서는 오직 사색(辭色)을 온화하게 하고 가부(可否)를 개시(開示)하여 앞으로 거리낌 없이 간쟁(諫諍)하는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최절(摧折)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설령 차자의 첫머리에 주착(做錯)된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일시(一時)에 소활(疎闊)한 실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하의 포용(包容)하시는 도량으로써 조금이나마 용서하지 않으시고 말한 자로 하여금 무거운 죄벌을 입게 하시니, 아마도 밝은 세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환수(還收)를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하교하기를,
"애닯도다! 백수(白首)의 모년(暮年)에 3년상을 참고 지나고도 남은 생각이 경경(耿耿)한데, 옥서(玉署)084) 의 장관(長官)이 글로써 차자(箚子)를 만들면서 소중(所重)한 것을 돌아보지 아니했기 때문에 어저께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시탕(侍湯)의 정성이 얕아서 선어(仙馭)를 더위잡지 못하였으니, 불효(不孝)하고 명연(冥然)한 속에 중월(中月)이 또 지났다. 그런데 몸이 옥서의 장관이 되고서도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것같이 하여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으니, 만약 무심(無心)하다고 이른다면 이는 정상적(正常的)인 마음이 없는 것이요 알고서도 쓰지 않았다고 하면 안중(眼中)에 고묘(高廟)의 태후(太后)가 없는 것이다. 어찌 불경(不敬)의 율(律)을 면하겠느냐? 흐리멍덩한 말을 하여 당심(黨心)을 시행코자 한 것은 저에게는 곧 자질구레한 허물이겠으나, 역적 유봉휘(柳鳳輝)의 소중(所重)함을 돌아보지 않는 버릇을 본받았고 역적 윤지(尹志)의 파측(叵測) 아랫 글귀의 글자를 주어 모았으니, 곧 이 한 가지 일은 저에게 있어서 단안(斷案)이었는데, 또한 덮어 두고 논(論)하지 않았으며 다만 중대한 것으로서 처리하였다. 그 마음을 묻지 않고 그 직명(職名)을 아깝게 여긴 것은 한갓 관용(寬容)만이 아니고 뜻이 깊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에게 북면(北面)한 자(者)로서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입을 열 것이며, 그 처분(處分)한 바의 소중함이 얼마나 한 것이기에 감히 영호(營護)코자 하느냐? 이는 그 마음가짐이 또한 하나의 김시찬이다. 오늘 면대(面對)를 구한 양사(兩司)의 장관을 먼저 체차(遞差)토록 하고, 지난 밤에 차자(箚子)를 올린 것은 뜻이 구차한 데에 관련되니 그 차자를 내어주고 차자를 올린 유신(儒臣)도 한결같이 체차토록 하라. 정원(政院)이 태후(太后)를 돌아보지 않고 동류(同類)에 따르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또한 무슨 마음이냐? 오늘 사진(仕進)한 승지도 모두 체차하여 임금의 임금다움과 신하의 신하다운 뜻을 보이게 하라. 그리고 이 뒤로는 김시찬에게 관계되는 장주(章奏)를 정원(政院)에서 호망(呼望)하지 말라."
하였다.
윤6월 16일 갑오
중궁전(中宮殿)의 수두(水痘)가 거의 다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약방(藥房)은 본원(本院)에서 직숙(直宿)하고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던 것도 하지 말게 하였다.
성천주(成天柱)를 승지로,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임집(任)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영춘 현감(永春縣監) 이경옥(李敬玉)의 상서 중에 본현(本縣)의 옛 환곡(還穀)과 군액(軍額)의 일로 인하여 가장 많은 1년 조(條)를 특별히 탕감(蕩減)해 주되 그 가운데 현재 생존한 자는 명년 가을을 한정하여 바치게 하는 것을 정지케 하고 허록(虛錄)된 2천여 석은 당해(當該) 수령(守令)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지명(指名)하여 현고(現告)하며 그 이름 아래에 허록된 실수(實數)를 또한 나누어 기록하고 빨리 장문(狀聞)하여 율에 의해 감죄(勘罪)토록 할 것이며, 군액(軍額)은 도신으로 하여금 사정을 상량(商量)하여 수를 나누어 참작해 도내(道內)의 다른 고을로 옮겨서 정할 것을 앙청(仰請)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하순(下詢)한 뒤에 하교하기를,
"현재 생존한 자는 명년 가을을 한정하여 바치는 것을 정지하도록 청한 데에 이르러서는 청한 바가 비록 계한(界限)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아! 저 품을 팔고 걸식하는 무리들이 어찌 유망(流亡)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본현(本縣)에 특별히 차임(差任)할 때에 내가 하교(下敎)한 바가 있었는데, 듣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들은 뒤이니 차마 차등(差等)을 두겠느냐? 일체(一體)로 탕감토록 하라. 지난번에 옛 부사(府使) 성천주(成天柱)의 말을 들으니 ‘청풍(淸風)의 백성들이 단양(丹陽)과 회인(懷仁)의 백성이 되기를 원(願)한다.[願爲丹懷氓]’고 하였는데, 그 다섯 글자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이와 같다면 현재의 부사도 동일한 시종(侍從)의 신하인데, 어찌하여 하나는 듣고 하나는 듣지 못하였겠는가? 지금 들으니 경계가 연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일시(一視)의 정사를 하지 아니하면 청풍의 백성들이 어찌 향우(向隅)의 탄식이 없겠느냐? 도신으로 하여금 옛 포흠(逋欠)의 다과(多寡)와 그 사이의 사상(事狀)을 실제를 따라 계문(啓聞)한 뒤에 등대(登對)하여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전 현감(縣監) 김선경(金選慶)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으니, 국구(國舅)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북평사(北評事) 이시건(李蓍建)이 이미 시역(試役)을 마친 뒤인데도 도임(到任)하지 않고 또 말미도 청하지 않고서 임의로 올라왔으므로 북병사(北兵使) 이주국(李柱國)이 장계(狀啓)로 파직(罷職)을 청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장군(將軍)의 막좌(幕佐)는 체통(體統)이 소중한 것인데, 하물며 변지(邊地)이겠느냐? 평상시에 군률(軍律)이 엄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불우(不虞)에 믿겠느냐? 북평사 이시건은 시역(試役)을 맡았으되 겸임(兼任)한 데에 지나지 않고 본직(本職)을 변방(邊方)의 좌막(佐幕)인데, 평사(評事)로서 내려가서 도임도 하지 않고 말미도 청하지 않은 채 임의로 서울에 올라왔다. 몸이 수신(帥臣)이 되어 군률(軍律)을 청하지 않고 다만 예(例)에 따라 장문(狀聞)했으니, 그것은 유약(柔弱)한 데에 관련된 것이다. 그 변지(邊地)의 소중함에 비추어 어찌 심상(尋常)하게 처리하겠는가? 북병사 이주국을 잡아 올려 추문(推問)하여 처리케 하라. 이시건은, 대신(大臣)이 파직시키지 말고 재촉하여 부임(赴任)시키라고 청하였는데, 그것이 비록 체통으로는 마땅하다고 하겠으나, 나의 생각에는 지금 강기(綱紀)가 해이(解弛)한 때에 이르렀으니 변지를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를 북병영(北兵營)으로 즉시 내려 보내어 북병사로 하여금 비록 군률을 시행하더라도 무엇이 지나치겠는가? 그리고 비록 군률을 시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중한 데 따라 곤장을 치는 것도 사리(事理)에 당연(當然)하다. 그러나 수신을 이미 잡아 올려 추문하라고 명하였으니 거행할 사람이 없다. 예를 따라 재촉해 부임시키는 것은 사체(事體)가 그렇지 못하니, 이 임무를 모면(謀免)하는 날에 만약 엄하게 징려(懲勵)를 가(加)하지 아니한다면 평사의 직(職)을 장차 혁파(革罷)하게 될 것이고 또한 예에 따라 처리할 수가 없다. 종성부(鍾城府)에 연한(年限)을 정하지 말고 충군(充軍)하도록 하라. 그리고 임의로 올라왔는데, 감사(監司)는 몸이 절도사(節度使)를 겸했는데도 수수 방관(袖手傍觀)하였은즉, 그도 또한 체통을 손상시킨 것이니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윤6월 17일 을미
구윤옥(具允鈺)을 도승지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구윤옥은 매양 주대(奏對)할 즈음에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아첨하여 영합(迎合)하고 승순(承順)하였으므로 5개월 안에 갑자기 경(卿)의 반열에 올랐으니,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비루(鄙陋)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3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구윤옥은 매양 주대(奏對)할 즈음에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아첨하여 영합(迎合)하고 승순(承順)하였으므로 5개월 안에 갑자기 경(卿)의 반열에 올랐으니,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비루(鄙陋)하게 여겼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에게 내구마(內廐馬)와 안구(鞍具)를 면급(面給)하고, 제조(提調)에게는 자급(資級)이 다하였으므로 말을 내리며, 부제조(副提調)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주서(注書)와 기사관(記事官)에게는 모두 6품으로 올리고 또한 녹비(鹿皮)를 내리며, 의관(醫官) 이하(以下)에게도 또한 후하게 상(賞)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윤6월 19일 정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에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이때에 곤전(坤殿)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었기 때문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유한 것이다.
윤6월 20일 무술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오수채(吳遂采)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았으니, 이때 곤전(坤殿)의 환후(患候)가 평복되었기 때문에 진하(陳賀)한 것이었다.
왕세자가 전정(殿庭)에 나아가 4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전문(箋文)을 올려 치사(致詞)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등이 전문을 올리고 유신(儒臣) 이복원(李福源)이 반교문(頒敎文)을 읽었다.
윤6월 21일 기해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정만순(鄭晩淳)이 말하기를,
"지난번 전교(傳敎) 중에 쾌(夬) 자를 명(明) 자로 고치신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일찍이 흠송(欽誦)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近日)에 처분(處分)하신 것은 쾌 자에 가까운 것이 많으니, 아마도 후손(後孫)에게 복록을 물려주는 도리가 아닌듯 합니다. 삼가 전교 중에 태복(太僕)의 글자를 보고 우개(憂慨)의 정성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김시찬(金時粲)이 평소에 흐리멍덩함을 알았는데 지금 소위를 보니 그의 마음은 곧 당(黨)이였다. 오늘날 유신(儒臣)이 만약 일호(一毫)라도 북면(北面)의 마음이 있으면 감히 쾌 자를 가지고 진대(陳對)하겠느냐? 먼저 파직(罷職)시키고 뒤에 잡아들여 추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준(任㻐)이 말하기를,
"정만순의 말은 속에 품은 바를 숨김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니, 처분이 과중(過中)합니다."
하니, 임금이 먼저의 하교를 거두고 다만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전교 중에 북면(北面) 등의 말씀은 신이 실로 황송(惶悚)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뽑아버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 어찌 의심하고 막힐 것이 있겠느냐? 사람들이 스스로 의심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전하의 광명(光明)하신 덕(德)으로써 모름지기 위에서 의심을 하지 않으면 신하들은 아래에서 저절로 의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허물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윤6월 22일 경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을 책봉(冊封)하였는데, 원인손(元仁孫)이 교문(敎文)을 읽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왕손(王孫)이 숙성(夙成)하고 준수했으니 바야흐로 무릎에 앉히는 기쁨이 깊었고, 원손(元孫)의 작호(爵號)를 봉(封)했으니 계체(繼體)의 뜻을 밝혔다. 이는 진실로 드물게 보는 경사인데, 어찌 널리 반포(頒布)하는 전례(典禮)가 없겠는가? 돌이켜 보건대 양덕(凉德)한 이 몸이 삼종(三宗)의 나머지를 이어받들었는데, 동궁(東宮)에서는 한 가닥의 길조(吉兆)를 얻었도다. 과인(寡人)은 아들이 있어 그가 아들을 낳았으니 열조(列朝)의 권우(眷佑)하는 아름다움을 힘입었고, 자성(慈聖)에 있어서는 손자의 아래에 또 손자를 보았으니 석년(昔年)에 기뻐하시던 뜻을 생각케 하였다. 특이(特異)한 자질(資質)을 하늘에서 내렸으니 엄연(儼然)히 성덕(成德)의 부합(符合)된 것 같고, 아름다운 덕이 날로 빛나니 진실로 양정(養正)의 효험이로다. 어려서부터 효우(孝友)가 이미 돈독했고, 학문을 배움에 미쳐서는 오직 공부에 부지런했다.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5척(尺)으로 자란 것을 기뻐했으니 하늘에서 도와주었고, 업적(業績)을 이어받아 만세(萬世)의 장원(長遠)함을 열었으니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종적(宗嫡)이 이미 귀정(歸正)되었으니 원손(元孫)의 작호(爵號)를 내렸는데, 전례(典禮)를 조금 기다린 것은 선왕(先王)의 규범(規範)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지금 교양(敎讓)할 나이가 찻고, 또 육덕(育德)의 공(工)이 드러난 것을 알았도다. 오장(五章)085) 의 몸에 맞는 옷을 내리니 예의(禮儀)가 매우 아름다웠고, 팔역(八域)의 목을 늘여 기다리는 여망(輿望)에 부응(副應)하니 국세(國勢)가 더욱 굳건하리로다. 이를 가사(家嗣)라 이르나니 큰 책임이 있는 바를 양지(諒知)하겠고, 충인(冲人)이라 이르지 말지니 도의(道義)의 계승(繼承)을 기약하리로다. 이에 진실로 정통(正統)을 세우고 조선(祖先)을 높이며, 대개 앞으로 아들을 도우고 손자를 편케 하리로다. 홍도(洪圖)를 어루만져 후손을 넉넉케 하리니 이는 공고(鞏固)한 기틀과 근본을 생각하는 데서 나왔고, 슬기로운 교화를 더위잡아 복을 연장(延長)했으니 부조(父祖)의 업적을 계승(繼承)하는 방도를 넓히리로다.
지난날에 종서(宗緖)가 고위(孤危)하여 항상 철류(綴旒)086) 의 두려움을 품었었는데, 지금은 자손(子孫)이 번연(繁衍)하니 깊이 반석(盤石)과 같은 안정을 굳혔도다. 휴상(休祥)087) 이 성해(星海)와 일월(日月)의 노래를 이어받았으니 문명(文明)이 잇달았고, 보록(寶籙)은 칠저 과질(漆沮瓜瓞)088) 의 가영(歌詠)을 점(占)쳤으니 본지(本支)가 면면(綿綿)하도다. 이에 청묘(淸廟)에 제사드리고, 넓은 전정(殿庭)에서 고유(告諭)를 반포(頒布)했노라. 혜택(惠澤)이 비와 같았으니 대소(大小)가 모두 함께 삶을 누렸고, 희기(喜氣)가 봄과 같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경사(慶事)에 참여했도다. 아! 영성(盈成)한 경운(景運)이 바야흐로 흡족했으니 겸손한 도(道)로서 자신을 간직하였고, 인도(引導)하여 몸으로 가르침이 엄격했으니 만년(晩年)에 들어 학문에 더욱 힘썼노라. 어찌 나라가 편안하다 하여 혹 방일(放逸)하겠는가? 덕화(德化)의 유신(維新)에 힘쓸 것을 바란다.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모두들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3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5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어문학-문학(文學)
[註 085] 오장(五章) : 다섯 가지 문채.[註 086] 철류(綴旒) : 면유관(冕旒冠)에 매단 구슬이 떨어질 것처럼 위험한 것.[註 087] 휴상(休祥) : 아름다운 상서.[註 088] 칠저 과질(漆沮瓜瓞) : 주(周)나라의 시조(始祖) 후직(后禝)이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의 연안(沿岸)에 기지(基地)를 잡아 자손이 번창함을 말한 것.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배례(拜禮)를 행한 뒤에 전내(殿內)에 들어와서 《소학(小學)》의 제3장(章)을 외우게 하고 임금이 가탄(嘉歎)하기를 마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이 어린데도 숙성(夙成)하여 부복(俯伏)하는 절조(節措)가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신이(神異)하다고 이를 만하다. 옛적에 주나라 무왕(武王)은 면복(冕服)을 입고 단서(丹書)를 사상보(師尙父)089) 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 나는 칠장복(七章服)을 입었고, 너는 오장복(五章服)을 입었다. 즉시 글을 써서 주고 얼굴을 맞대어 고유(告諭)하니, 너는 모름지기 사상보가 단서를 주는 뜻으로 대신하게 하라. 너는 나이가 어려 마땅히 천근(淺近)한 것으로써 가르치니 모름지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에게 공손하여 반드시 더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책례 도감(冊禮都監)의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주라고 명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원인손(元仁孫)과 익례(翊禮) 김면행(金勉行)과 도청(都廳) 조영진(趙榮進)·홍양한(洪良漢)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윤6월 23일 신축
좌권독(左勸讀) 김원행(金元行)이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니, 대답하기를,
"그 사양함은 한결같이 어찌 지나치단 말인가? 한결같이 어찌 지나치단 말인가? 책례(冊禮)가 겨우 지나가고 대신(臺臣)의 상주(上奏)가 있어서 그 글을 취하여 보았는데, 지금 어찌 고유(告諭)할 것이 많겠는가? 아!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다만 약간척(若干尺)인 세손(世孫)에게 있다. 만약 권독을 묻는다면 곧 할아버지의 손자요, 만약 그 할아버지를 묻는다면 사충신(四忠臣) 중에 한 사람이다. 아! 석년(昔年)의 자교(慈敎)를 외우고 금일(今日)의 세손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부르기를 기다리겠느냐? 하물며 직명(職名)으로써 불러 들였다면 사양함이 혹 옳다고 하겠으나 지금 너에게는 한 자급(資級)의 승진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양을 하는 것이냐? 세손이 행례(行禮)하는 날에 그의 동용(動容)을 본즉 주선(周旋)이 절도에 맞았는데, 이때에 보도(輔導)를 어떻게 한 시각인들 더디게 했겠느냐? 깊이 3백년의 종국(宗國)을 위하여 십여 년의 고심(苦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략 나의 뜻을 진술한 것인데, 오직 제 몸만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써 힘쓴다면 너의 자정(自靖)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비록 옳다고 하겠으나 다른날에 무슨 말로써 너의 조부(祖父)에게 말하겠느냐? 범인(凡人)도 자제(子弟)를 그 친구에게 촉탁(屬托)하였으면 비록 적(敵)의 이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성심(誠心)으로 두호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임금이 세손을 위하여 촉탁하는 것이겠느냐? 아! 애닯은 너의 할아버지는 신축년090) 건저(建儲)할 때에 사부(師傅)였었고 지금 너는 그 임금의 손자에게 권독이 되었는데, 다른 날 너의 할아버지가 만약 묻기를 ‘석년(昔年)에 다하지 못한 바를 네가 오늘에 잘 도았느냐?’라고 말한다면 너는 장차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 너의 형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지하(地下)에서 울분을 머금고 있을 것인데, 지금 네가 이 직무(職務)에 마음을 다한다면 너의 형이 구원(九原)에서 마음이 풀어질 것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의 마음이 창연(愴然)해진다. 너도 어찌 감동(感動)되지 않겠느냐? 네가 번연(幡然)히 올라온다면 나는 마땅히 세손과 더불어 근독합(謹獨閤)에서 너를 볼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법강(法講)할 때나 혹 차대(次對)할 때에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시좌(侍坐)하여 보도록 하고자 한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홀로 경(卿) 등을 접견(接見)하는 것은 곧 사사롭게 보는 것이다. 세손을 데리고 볼 때에는 뭇 신하들이 반드시 나의 허물을 직척(直斥)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게 하라. 뭇 신하가 만약 묵묵(默默)히 있으면 세손은 반드시 임금 노릇이 쉬운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백수(白首) 모년(暮年)에 나의 허물을 깊이 꾸짖어서 손자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또한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마는 실은 나라를 위하는 뜻이다."
하였다.
윤6월 24일 임인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윤6월 25일 계묘
밤에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환궁할 때에 의소묘(懿昭墓)에 들르셨다.
윤6월 26일 갑진
밤에 유성(流星)이 두성(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윤6월 27일 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서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백성을 위하는 일로써 세손(世孫)에게 보이려고 문밖에서 지영(祗迎)하라 명하고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친히 세손을 훈계하는 글을 지었다.
윤6월 28일 병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환궁(還宮)할 때에 어의궁(於義宮)에 들러서 친히 용흥구궁소지(龍興舊宮小識)를 지었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환어(還御)하여 각도(各道)의 차사원(差使員)을 불러 보고 민막(民瘼)과 농형(農形)을 하순(下詢)하였으며, 비 올 뜻이 막연(邈然)하므로 오늘부터 비가 올 때까지 감선(減膳)토록 명하고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에 죄수를 소결(疏決)하라고 명하였다.
윤6월 29일 정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경기(京畿)의 암행 어사(暗行御史) 이미(李瀰)가 복명(復命)하고 양지 현감(陽智縣監) 채응호(蔡膺祜)의 불법(不法)한 상황을 논(論)하니, 임금이 잡아 올려 추문하고 죄를 줄 것을 명하였다.
윤6월 30일 무신
정언 이현태(李顯泰)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책례(冊禮)를 거행하던 날에 우리 왕세손(王世孫)을 우러러 뵈었는데, 천자(天姿)가 영예(英睿)하고 의용(儀容)이 온화(溫和)하였으며 주선(周旋)과 진퇴(進退)가 옹용(雍容)하여 절도에 맞았으니 이는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억만년에 무강(無彊)한 복(福)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덕기(德器)가 성취(成就)할 희망(希望)이 전에 비(比)하여 현격하게 다르니 더욱더 날마다 정사(正士)를 가까이 하고 강학(講學)에 부지런히 힘쓰게 함이 마땅합니다. 만약 그 밀이(密邇)한 곳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법칙을 삼게 하는 것은 저하(邸下)께서 신교(身敎)로써 하시는 것 보다 절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학문을 부지런히 하시면 세손께서도 또 따라서 자자(孜孜)히 하실 것이요 저하께서 학문을 게을리 하시면 세손께서도 또 따라서 게을러질 것입니다. 한마디 말로 의(義)를 해치게 하고 한 가지 일로 인(仁)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러서는 유(類)에 부딪쳐 본받지 않는 것이 없어 그 기미(幾微)가 지중(至重)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목하(目下)에 또 한두 가지 말씀 드릴 일이 있습니다. 즉 황해 감사 정옥(鄭玉)은 사람됨이 본래부터 피잔(疲殘)하고 또 노혼(老昏)한데, 의외(意外)로 번임(藩任)에 발탁되었으니 온 세상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런데도 당차(堂箚)의 배척은 마음에 두지 않고서 염의를 무릅쓰고 보외(補外)의 명에 응했으니 염방(廉防)의 크게 무너지고 물정(物情)이 모두 놀랐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어떻게 안찰(按察)의 임무를 책임지우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정옥에게 견파(譴罷)의 율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정언 안겸제(安兼濟)는 위인이 간사(奸詐)하고 몸가짐이 비루(鄙陋)하여 발자취를 당로(當路)091) 에 두루하고 언의(言議)가 반복(反覆)했습니다. 처음에 대각(臺閣)에 들어왔을 때에 몸가짐이 표홀(飄忽)하였으므로 이미 온 세상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한장의 상서(上書)는 지적한 뜻이 섬홀(閃忽)하여 크게 대신(臺臣)의 체통을 어겨 많은 사람의 입술에 오르내리니 진신(搢紳)에 수치를 끼쳤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이목(耳目)의 반열(班列)에 둘 수가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안겸제에게 빨리 체개(遞改)의 율을 시행함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니, 대신(大臣)과 금오(金吾)·추조(秋曹)의 당상(堂上)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오래 적체(積滯)된 죄수를 소결(疏決)한 가운데 온전히 살려 준 사람이 십수인(十數人)이요 섬에 유배된 사람 김시찬(金時粲)도 또한 육지로 나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밤에 함인정(涵仁亭) 앞뜰에 노좌(露坐)하여 승지(承旨)를 불러보고 기억문(記憶文)과 도우문(禱雨文)을 불러 주어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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