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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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기유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간으로, 이기경(李基敬)을 강원 감사로, 이이장(李彛章)을 함경 감사로, 김원택(金元澤)을 지의금부사로, 이은춘(李殷春)을 북병사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현태(李顯泰)의 상서(上書)에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깊이 유념하겠다. 해백(海伯)092)  의 일은 그 당시 대조(大朝)께서 특별히 하교하여 제수한 뒤에 또 당상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대조께서 특별히 입시(入侍)하도록 하라고 명하여 이어서 사조(辭朝)하였으니, 이것은 곧 대조의 처분이지 염의를 무릅쓰고 응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감히 염방(廉防)을 무너뜨리고 물정(物情)을 놀라게 했다는 등의 말로써 배척한 바가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당선(唐船)의 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도신(道臣)에게까지 미치도록 하겠는가? 그리고 안겸제(安兼濟)의 일은 소회(所懷)가 있으면 문득 아뢰는 것이 원래 대간(臺諫)의 체모인데, 개정하라는 청은 역시 놀랄 만하다."
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대간의 글 가운데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답(下答)하였으나, 그 아래 두 가지 일은 협잡(挾雜)이 없지 않으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다. 정언 이현태(李顯泰)를 먼저 체차하고 뒤에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는데, 세손부(世孫傅)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왕세손(王世孫)의 강하는 규칙과 범절은 춘방(春坊)의 예를 모방하여 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춘방에서는 한 달에 두 차례 회강(會講)하는 규칙이 있는데, 강서원(講書院)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兩司)를 제외하고는 전례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일 경술

정존겸(鄭存謙)·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삼았다.

 

헌납 박기채(朴起采)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 이현태를 파직하라는 명령은 간함을 용납하여 언로(言路)를 여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같이 이목이 요요(寥寥)한 때를 당하여 용납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곧 그것을 최절(摧折)하였으며, 헌부의 신하가 연명하여 올린 차자의 답에 이르러서도 한심하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평일에 저하(邸下)에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빨리 전후의 엄한 비답을 고쳐서 대간의 체면을 소중히 여기고 내간(來諫)하는 자의 길을 열어 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고 ‘한심(寒心)’ 두 글자만 도로 거두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자, 삼대신(三臺臣)이 헌부에 합좌(合坐)하여 윤리를 범한 죄인 강거복(姜巨福)을 장살(杖殺)하도록 명하였으니, 강거복은 강상(江上) 사람으로서 몰래 이웃에 사는 처녀를 강간하고 그 자취를 엄폐하려고 아들을 위해 구혼(求婚)한다 하므로, 그 처녀가 실정을 토로하여 헌부에 올린 것이었다.

 

7월 3일 신해

임금이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 경기 감사에게 농민을 거느리고 들어오라고 명하고,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경기 감사와 형조 당상을 소견하고, 경기 감옥의 문안(文案)을 읽어 아뢰도록 한 뒤에 참작하여 처결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임자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5일 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강필리(姜必履)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에 박치원(朴致遠)의 글은 신이 비록 그 전서(全書)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대략 큰 줄거리를 들으니, 우리 저하(邸下)를 지극히 착하고 허물이 없는 지경에 들어가도록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연을 표현할 때에 과격한 말이 없지 않았는데, 저하께서 특별히 온화한 비답을 내리시고 오직 죄를 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청납(聽納)하여 주셨으며, 오직 잘못을 삼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칭상(稱賞)을 더하여,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다[有則改之無則加勉]’는 여덟 글자로 예답(睿答)을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옹용(雍容)하고 의도가 관화(寬和)하여 애연(藹然)히 대성인(大聖人)이 두루 감싸주는 도량이 있으므로, 신이 이에 장엄하게 외우고 흠앙하며 찬탄하였습니다.
다만 삼가 들으니, 추후에 영을 내려 원서(原書)는 그대로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고 비지(批旨)는 조지(朝紙)093)  에 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하니, 신은 의심스럽고 의혹됨을 견디지 못하며 실로 저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옛부터 총명하고 호걸스러운 임금은 간혹 과실이 있어도 한번 바른 말을 들으면 번연(幡然)히 깨달아 깨우치고 혁연(赫然)히 고치기를 도모하며, 혹시 털끝만큼이라도 숨기거나 덮어두는 저의(底意)가 있지 않아 한 세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개과 천선(改過遷善)을 빨리 한다는 인식을 환하게 알도록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이미 지난날의 결점을 가지고 오늘날의 명덕(明德)에 손상이 있도록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옛사람의 착한 것을 보면 옮기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바람과 우레의 빠름과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듯이 한다는 것에 비유하였던 바입니다.
지금 우리 저하께서 과연 언자(言者)의 진달한 바와 같은 것이 없다면 오직 저 박치원(朴致遠)의 글은 저절로 미치고 망령된 데로 돌아갈 것이니, 예덕(睿德)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만일 혹시라도 언자의 진달한 바에 조금이라도 근사한 것이 있다면 이것은 저하께 약석(藥石)이며 정침(頂針)입니다. 마땅히 박치원의 글을 밝게 뭇 신하들에게 보이고 ‘아무 일 아무 일은 나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니 근거 없는 말로 부치고, 아무 일 아무 일은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당연히 스스로 용감하게 개혁하겠다.’고 한다면, 거조(擧措)가 명백하고 처치가 광대(光大)해져 바로 한 점의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가 지나가자 하늘이 혼연하게 티가 없이 맑은 것과 같을 터이니, 대소 신민들이 모두 박치원의 글은 광직(狂直)하여 숨기지 않는 충언(忠言)이 되고, 저하의 비답은 간함을 따라 어기지 않는 성덕(聖德)이 됨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저하께서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조지(朝紙)를 반포해 보이는 것을 금지하고 구차하게 미봉(彌縫)하여 혹시라도 사람이 아는 자가 있을 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하시니, 어찌 우리 저하의 탕탕하고 밝은 덕(德)에 크게 어그러짐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깊이 유념할 것이며, 그 원서(原書)는 자리 오른쪽에 붙여 놓고 조석으로 관람하며 깨우치고 반성할 것이니, 비답을 써서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
하고, 왕세자가 지사(知事) 박치원(朴致遠)의 글에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허실(虛實)을 의논할 것 없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겠다. 경은 기로(耆老)의 신하로서 말이 걱정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왔으니,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7일 을묘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어제 어떤 일을 빙자하여 폐단을 만드는 무리를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라는 일로 하령하였으나, 근래에 기강이 점점 해이되니 이 뒤로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을 알 수 없다. 지금부터 뒤로는 다시 이와 같은 폐단이 있으면 유사(攸司)로 하여금 즉시 잡아들여 법에 의거하여 엄중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7월 9일 정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별시(別試)의 강경(講經)에서 입격(入格)한 유생 여섯 사람을 불러서 시강(試講)을 하였다.

 

윤동섬(尹東暹)·정상순(鄭尙淳)·이만종(李萬宗)을 승지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만종은 역적 이관징(李觀徵)의 지친(至親)으로 잘못 은제(恩除)를 받았으니, 아무리 버릴 사람이 없다는 성상의 뜻에서 나왔으나 물정(物情)이 모두 놀랬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만종은 역적 이관징(李觀徵)의 지친(至親)으로 잘못 은제(恩除)를 받았으니, 아무리 버릴 사람이 없다는 성상의 뜻에서 나왔으나 물정(物情)이 모두 놀랬다."

 

7월 10일 무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7월 11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7월 12일 경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서 《근사록(近思錄)》을 읽게 하였다.

 

7월 13일 신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예조 판서를 소견하고, 유신에게 《근사록》을 읽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사성(四聖)094)  과 육현(六賢)095)  의 휘(諱)는 이미 똑같이 휘를 하니, 육현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사성이겠는가? 아! 나이 칠십을 바라보며 성묘(聖廟)를 배알함이 옛날 사첩(史牒)에 어찌 있었겠느냐? 금번 문묘(文廟)의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에는 사성(四聖)에게도 함께 전작(奠酌)을 하고자 하나, 일이 의식(儀式) 절차에 관계가 되니, 입시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4일 임술

좌의정 신만(申晩)이 처음으로 사직서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5일 계해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니 중궁전(中宮殿)이 함께 묘현례(廟見禮)를 행하였고, 임금이 인하여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자, 중궁전 역시 전배례를 행하였다.

 

7월 17일 을축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과 이정청 당상(釐正廳堂上)을 소견하여 소대(召對)를 행하고, 유신에게 명하여 《근사록》을 읽게 하였다.

 

7월 18일 병인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7월 19일 정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利)로 이익을 삼지 말고 의(義)로 이익을 삼으라는 말이 좋다."
하자, 이복원(李福源)이 말하기를,
"그 당시에 풍습의 숭상함이 이와 같았고, 또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말기를 당하였기 때문에 문장 끝에 이런 신신(申申)한 교훈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윤방(尹坊)에게 이르기를,
"승지의 할아버지가 써 올린 것이 과연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이었는가? 지난해에 올린 것은 내가 벌써 원량(元良)에게 내려 주었으니, 승지는 다시 써서 병풍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위로는 노경(老境)에 스스로 힘쓰는 자료를 삼고 아래로는 너의 할아버지의 베껴 올린 뜻을 이으려고 한다."
하였다.

 

7월 21일 기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흑원포(黑圓袍)를 갖추어 입고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이날이 신종 황제(神宗皇帝) 기신(忌辰)인 때문이었다.

 

7월 22일 경오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홍문관 제학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과 별시(文科別試)의 전시(殿試)를 행하고 이만영(李晩榮) 등 12인을 뽑았다. 임금이 문무과의 신은(新恩)096)  을 거느리고 명정문(明政門)을 거쳐 궐내(闕內)로 돌아왔다.

 

7월 23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최중(李最中)은 사람됨이 자상(慈詳)하고 가정에 있어서는 검소하고 질박함을 숭상하였으며, 나라의 일에는 정성과 근면(勤勉)에 힘썼으므로 방금 수원 부사(水原府使)의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최중이 꼭 큰 일을 감당할 것인지 알지 못하나 경이 이미 알고서 천거하였고, 또 요(堯)임금의 먼저 능한가 능하지 아니한가를 시험해 보고 취사(取捨)한다는 훈계가 있으니, 내가 이최중에게 우선 능숙한 사람인지를 시험해 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7월 25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밤에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곧 계성사(啓聖祠)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한 뒤에 비천당(丕闡堂)에 나아가 어제문(御製文)을 내리고 대사성 서명응(徐命膺)에게 정서(正書)하여 벽에 걸도록 하였으며, 돌아와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097)  를 행하고, 유생을 시험하여 신익(申熤) 등 여섯 사람을 뽑았다.

 

7월 26일 갑술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고 친히 ‘근수고풍(謹守古風)’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판자에 새겨 한원(翰苑)098)  에 걸고 본원(本院) 영사(領事)에게 기문(記文)을 짓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7월 27일 을해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를 행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의로, 심수(沈鏽)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찬(饌)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제주 사람 김후련(金厚鍊)에게도 찬을 하사하도록 하였으니, 섬사람이기 때문이었다.

 

7월 28일 병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고 응제(應製)에 합격한 사람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내렸다.

 

7월 29일 정축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였다.

 

전 지사(知事) 권상일(權相一)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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