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무인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고 친히 영화당(映花堂)에 대한 명(銘) 한 구절을 짓고 시신(侍臣)에게 연구(聯句)를 갱진(賡進)하라고 명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승지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 시소(試所)의 시관(試官)을 파면하라고 명하였으니, 응사(應射)한 사람들이 불099) 을 호소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승지 정상순(鄭尙淳)에게 호피(虎皮)를 하사하라고 명하였으니, 내일이 곧 육상궁(毓祥宮) 추향 대제(秋享大祭)의 재일(齋日)인데 임금이 창방(唱榜)을 행하도록 명하자, 정상순이 재일(齋日)로 우러러 고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8월 2일 기묘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입격(入格)한 사람에게 상(賞)을 나누어 내려 주었다.
8월 3일 경진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방방(放榜)을 하고, 친히 소회에 대한 기문(記文)을 지었다. 임금이 문무과(文武科)의 신은(新恩)을 거느리고 명정문(明政門)을 거쳐 궐내(闕內)로 돌아왔다.
8월 4일 신사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의 환후가 편치 못하자 도승지는 동벽(東壁)에 입직(入直)하고, 두 수의(首醫)는 내국(內局)에 입직하였으며, 오적산(五積散)을 달여 들였다.
8월 5일 임오
오적산 두 첩을 다시 달여 들였다.
신은(新恩)들의 유가(遊街)100) 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고, 《자성편(自省編)》을 읽으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대내(大內)에 누웠으니 마음이 매우 무료하여 글 읽는 소리를 듣고자 한 것이다."
하고, 글 뜻을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이명환(李明煥)이 말하기를,
"이 편(篇)에 대신을 공경하라는 훈계가 있는데, 대신이 세 번 정사(呈辭)함에 대하여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는 것은 곧 선조(先朝)의 구례(舊例)입니다. 지금 좌상(左相)에게 내린 비답이 비록 중관(中官)101) 의 잘못 내린 데 연유되었으나, 역시 성상께서 평일에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에 흠결이 있었기 때문에 곧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는 진실로 옳다. 내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
하였다.
8월 6일 계미
특별히 이명환을 훈국(訓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差下)하도록 한 명령을 거두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경악(經幄)의 신하는 책을 끼고 등연(登筵)하여 아침저녁으로 임금을 가까이 하는데, 한마디의 말이 뜻을 거슬렀다고 하여 화증(火症)을 내어 처단하는 것은 이미 신하를 예우하는 의리에 흠결이 되며 또한 포용(包容)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마침내 그 명을 정침하도록 하였다.
8월 7일 갑신
임금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병중에 간혹 별미(別味)를 먹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늘 힘써 억제하였으니, 대개 한 움큼의 풀이나 한 마리의 생선(生鮮)이 비록 지극히 미미한 것 같으나 백성의 힘이 미치는 바이니, 역시 용이하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동래 부사 심발(沈墢)·울산(蔚山) 전 부사(府使) 조경(趙擎)을 모두 잡아다 조처하도록 명하였으니, 당시에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담(李潭)이 돌아와서 울산에 양씨(梁氏) 여자가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을 끌어들인 것이 무망(誣罔)한 데서 나왔는데도 그 당시에 부사로서 혼미하고 잘못하여 옥사(獄事)를 이루었고, 동래부에 잠상(潛商)이 다시 성행하는데도 부사가 능히 금단(禁斷)하지 못하였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이담이 또 기장 현감(機張縣監) 이광후(李匡垕)는 불법(不法)한 일이 있었고, 또 역옥(逆獄)에 간련(干連)된 자를 돌보고 우대하였다고 아뢰자, 임금이 거제도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울산 부사 안윤행(安允行)·선산 부사(善山府使) 서인수(徐仁修)·경주 부윤(慶州府尹) 윤학동(尹學東)·영천 군수(永川郡守) 심구(沈銶)는 먼저 파직하고 뒤에 잡아들이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며, 양산 군수(梁山郡守) 이현급(李賢伋)은 가장 잘 다스렸으니 특별히 새서 새서 표리(璽書表裏)102) 를 하사하였고, 칠곡 부사(漆谷府使) 장천용(張天用)은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담의 아룀으로 인하여서였다.
8월 8일 을유
홍명한(洪名漢)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8월 9일 병술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려 경향(京鄕)에서 과거를 보러 온 유생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삼대(三代) 이후에는 사도(師道)가 있었다. 나는 덕(德)이 얇고 무능한 사람으로서 군도(君道)에도 오히려 능하지 못한데 더구나 사도이겠는가? 아! 30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방기(邦畿)103) 에는 양양(洋洋)한 명성(名聲)이 없었고, 현관(賢關)104) 에서는 제제(濟濟)한 효험이 없었으니, 늘 너희들을 대하면 마음이 먼저 부끄럽다. 내가 비록 정성이 얕으나 청금(靑衿)105) 을 위하는 마음이 자나 깨나 어찌 해이(解弛)하겠느냐? 장보(章甫)106) 를 북돋아 기르는 것은 곧 열성조(列聖朝)의 융성한 덕인데도 능히 계술(繼述)하지 못하였다. 알성(謁聖)하는 날에 수레를 머무르고 시골 선비들이 오는 것을 물었는데 간혹 도착하지 않은 자가 있었으니, 곧 날짜를 앞당겨 정한 때문이었다. 엊그제 태학(太學)107) 에 물으니, 지금 이미 모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6일 동안 세 번이나 탕약(湯藥)을 먹은 것은 역시 너희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는데, 어제 오늘 조금 나았으니 어찌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 나의 도리에 너희들을 불러놓고 그 얼굴을 보지 않으면 마음에 어찌 결연하지 않겠으며, 너희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또한 임금을 보지 못하면 마음에 어찌 창연(悵然)하지 않겠느냐? 어찌 특히 시골 선비뿐 이겠느냐? 서울 선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덕이 없고 무능하여 심히 군사(君師)의 의리에 부끄러우나 내일은 마땅히 몸소 나아가 우리의 많은 선비들을 위로하고 또 무사(武士)와 군병(軍兵)에게도 선유(宣諭)할 것이다."
하였다.
8월 10일 정해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시사(試士)하고 심익운(沈翼雲) 등 16인을 뽑았다.
8월 11일 무자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전석조(田錫祚)를 국문(鞫問)하였으니, 곧 예산(禮山) 사람이다. 〈전석조가〉 시험장에 들어와 땅에 엎드려서 스스로 국가 성쇠의 이치를 안다고 말하고, ‘나라가 앞으로 흥할 때에는 반드시 정상(禎祥)이 있다[國家將興必有禎祥]’는 여덟 글자를 써서 올렸으며, 또 한 권의 책자를 올렸는데, 임금이 열람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을해년108) 〈5월에 토역 정시(討逆庭試) 시권(試券)을 변서(變書)한 심정연(沈鼎衍)의〉 남은 요얼(妖孽)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친히 국문을 하였는데, 전석조가 꿈꾼 것을 핑계대고 말하는 바가 허황하고 망측(罔測)하였으며, 나중에 가서 바로 흉언(凶言)을 토로해 냈으니,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그 근본은 무신년109) 의 잔당이고, 그 글은 심정연과 같은 종류이니, 이 무리는 끝내 감화(感化)할 뜻이 없다."
하고, 전석조에게 묻게 하기를,
"지금 이 신문(訊問)은 무신년 이후의 서로 전하는 근저(根抵)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하니, 전석조가 공초하기를,
"고향 사람 김용조(金龍祚)도 그 책자를 보았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체포하도록 명하고 우선 친국을 파하였다.
8월 13일 경인
경기 암행 어사 정원달(鄭遠達)이 돌아와 아뢰기를,
"하리(下吏)들이 감히 댓가 없는 역사(役事)로 백성을 부리지 못하니, 전하의 은택이 젖어든 민정(民情)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8월 15일 임진
임금이 명릉(明陵)을 배알(拜謁)하고 이어 익릉(翼陵)·휘릉(徽陵)·경릉(敬陵)을 배알하자, 왕세자가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인정문(仁政門) 밖에서 지송(祗送)하였다.
사복시(司僕寺)의 일제조(一提調) 김상로(金尙魯)를 파직하고 이제조(二提調) 이익정(李益炡)을 삭직하였다. 당시에 어승마(御乘馬)가 놀라서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달아났으므로, 옥당(玉堂)에서 말을 잘 길들이지 못하였다 하여 두 제조를 추고(推考)하도록 청하였는데, 회란(回鑾)할 때에 임금이 말하기를,
"어승마가 놀라 달아났으니, 매우 놀라고 두려웠다. 그것을 신칙하고 격려하려면 먼저 대관(大官)에게 특별히 파직(罷職)의 법을 시행해야 마땅하다."
하니, 유신 이담(李潭)이 청하기를,
"일제조를 이미 파직하였으니, 이제조에게도 삭직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우상(右相) 이후(李)의 청한 바로 인하여 두 내승(內乘)110) 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감처(勘處)하도록 하고, 이마(理馬)111) 이하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장령 임경관(林鏡觀)을 체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임경관은 회란할 때에야 비로소 내승 이하에게 형률을 더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즉시 논청(論請)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특별히 체직한 것이었다.
8월 16일 계사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김용조(金龍祚)를 국문하고, 그 일가 김용철(金龍鐵)·김용채(金龍彩)도 역시 포도청(捕盜廳)으로부터 잡아 가두도록 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두 형신(刑訊)을 하였으나 별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고, 전석조(田錫祚)에게 형장을 더하니, 그 공초에 ‘공을 세우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8월 17일 갑오
다시 김상로(金尙魯)를 제배하여 영의정으로 삼았다.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죄인을 국문하였는데, 전석조는 장형으로 물고되었고, 김용조는 4차례 형신(刑訊)을 가하자 비로소 말하기를,
"과연 책자를 보았는데 망령되고 허탄(虛誕)하므로 도로 전석조에게 주었으며, 그 정절(情節)을 알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정현(大靜縣)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고, 김용철·김용채는 특별히 석방(釋放)하고, 책자는 금부(禁府)로 하여금 불에 태우라고 명하였다. 대간(臺諫)과 대신 및 여러 신하들이 다시 형신을 더하여 기필코 실정을 얻어내자고 힘껏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18일 을미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8월 19일 병신
경상도 유생 채경침(蔡景沈)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노강 서원(鷺江書院)에 추배(追配)하도록 청하였고, 경기·충청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7도 유생 이헌(李)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자, 왕세자가 모두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번거롭게 품의하지 못하겠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또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결안(結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정법(正法)112) 하거나,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효시(梟示)하거나, 전지(傳旨)하여 정법하거나,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는 법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지난날 친국(親鞫)을 할 때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결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정법하는 것은 법의 뜻이 아니다. 내가 전후로 여러 흉적들을 정법함에 있어 일찍이 결안을 받지 않음이 없었고, 결안을 받은 것 역시 일찍이 명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또 경연(經筵)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 신축년113) 에 윤지술(尹志述)은 결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죽였는데, 그 당시 계방(桂坊)114) 의 윤봉오(尹鳳五)가 주연(胄筵)115) 에서 진계(陳戒)로 인하여 이 일을 언급하자, 빈객(賓客) 홍만조(洪萬朝)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으니, 홍만조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이 옥사(獄事)를 안핵(按劾)하였기 때문이다. 이 법을 개혁하지 아니하면 후세의 폐단이 어찌 한정이 있겠느냐? 또 군문으로 하여금 효시하거나, 전지하여 정법하거나, 역률을 추시하는 법을 내가 모두 개혁하려고 한다."
하니, 특진관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축년에 이 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그 뒤에 박상검(朴尙儉)의 무리를 국문할 때에 역시 이 예를 인용하여 결안을 받지 않았으니, 이렇게 한 뜻은 대체로 서둘러 멸구(滅口)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만약 상세히 조사하였다면 어찌 무신년116) 의 난을 양성(釀成)하였겠습니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박(薄)한 데서 법을 만들었는데도 그 폐단은 오히려 탐욕을 부리는 것인데, 더구나 임금이 법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면서 만약에 혹시라도 내 뜻에 따라 저앙(低昻)한다면, 사람이 어떻게 수족(手足)을 쓸 수 있겠느냐?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한나라와 당나라에서 중간 정도의 임금인데도 육형(肉刑)을 없애고 태배(笞背)의 법을 제거하였으니, 내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없애게 한 것도 대체로 이런 뜻에서이다. 을해년117) 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느냐? 정절(情節)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이 어찌 분하고 놀랍지 않았겠는가마는, 마침내 다시 이런 형벌을 쓰지 않은 것은 뜻이 대체로 깊다. 대저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법은 하나는 《대명률(大明律)》이고, 하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며, 그 뒤에 혹 일시적으로 수교(受敎)한 것이 있는데 법사(法司)에서 그대로 적용하였으므로, 율관(律官)이 이것으로 인하여 저앙(低昻)하여 공사(公私)의 활협(闊狹)을 한결같이 아랫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권세가 있는 자는 아무리 중한 죄라도 잘 모면하고 권세가 없는 자는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형벌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속대전(續大典)》이라는 것이 이 때문에 만들어졌다. 대저 일률과 정법은 곧 유사(有司)의 일이고,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는 것은 진중(陣中)에서 행하는 일이다.
아! 저 무신년의 사건은 지난 사첩(史牒)에도 없었던 바이니, 밖에서는 군사를 동원(動員)하고 안에서는 호위(扈衛)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이 법을 썼는데, 그 뒤에 그대로 사용하는 자가 많았다. 또 결안을 기다리지 않고 정법하는 일은 곧 경자년118) 이전에는 없었던 일인데, 한번 행하고는 그대로 전례가 되었다. 그래서 한갓 결안을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의 전지(傳旨)로써 정법하였으니, 이것이 《대명률》에 기재된 바이었던가? 오늘 이후로 임금이 된 자가 기세 부림을 인하여 이 법을 사용하고, 신하된 자가 당(黨)을 인하여 이 법을 사용한다면, 아! 그 전해지는 폐단은 곧 내가 인도한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겁이 나고 두려움을 깨닫지 못하겠다. 그리고 또 승관(承款)119) 을 받지 아니하고 물고(物故)한 것뿐만이 아니라, 결안에 미치지 아니하고 물고에 이른 자는 예전에는 추율(追律)한 일이 없었다. 무신년과 을해년에는 인심이 울분(鬱憤)하게 여겨 그 청한 바가 비록 윤리(倫理)를 지킬 도리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이런 따위의 폐단이 심지어 결안을 기다리지 않는 데까지 이르니, 결안을 기다리지 않는 것을 어찌 아름답다고 하겠느냐? 결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추율을 함에 이르러서는 간혹 소인이 사심을 끼고 논계(論啓)하는 일이 있으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는 일이 왕부(王府)120) 나 추조(秋曹)121) 에 관계되는 것은 결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정법하는 것과 군문에서 효시하는 것과 전지하여 정법하는 것과 역율(逆律)을 추시하는 것은 하나같이 모두 제거할 것이다. 이 뒤로 인군(人君)이 된 자가 이러한 거조가 있으면 유사(有司)로서 법을 집행하는 신하는 이 교령(敎令)을 가지고 간쟁(諫爭)하고, 아래 있는 신하가 이 교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영합(迎合)하여 임금을 돕고 승순(承順)하기를 일삼는 사람은 간사한 소인(小人)으로서 아유 구용(阿諛句容)122) 하는 무리이며, 달가운 마음으로 교령을 어기고 협잡하여 자기의 뜻을 쾌하게 하는 사람은 곧 가장 큰 간특(奸慝)한 사람이니, 나라의 흥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다. 그러니 이 교령을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앞으로 이 하교를 왕부와 추조 및 양사(兩司)로 하여금 크게 써서 새겨 두고 영원히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잇달아 진달하였는데, 추율(追律)하라는 진달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입시한 대신(臺臣)에게 명하기를,
"이미 윤음(綸音)으로 정한 규식이 있으니, 헌부와 간원에서 전달(前達)한 중에 추시(追施)를 청한 것은 곧바로 정지하는 것이 합당하다. 대신(臺臣)은 이 윤음을 가지고 동궁(東宮)에게 구대(求對)하여 정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니, 사간 이수봉(李壽鳳)·장렬 구수국(具壽國) 등이 말하기를,
"이 법은 이미 개혁하여 제거하였으니 오늘 이후로는 진실로 준행(遵行)하는 것이 마땅하니, 헌부와 간원에서 전달한 것은 개혁하기 전에 발단(發端)된 것이므로 신 등이 감히 봉승(奉承)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비록 법을 지킬지라도 오늘의 개혁은 뜻한 바가 있는데 〈행하기〉 어렵다고 도로 반려(返戾)하여 아뢰는 것은 진실로 잘못이다."
하였다. 이수봉 등이 드디어 입대(入對)하여 김주천(金柱天)·민후기(閔厚基)·이항(李杭)123) ·송시택(宋時澤)·김경약(金景躍)·임서호(任瑞虎) 등과 김윤(金潤)·조동성(趙東星)·소상교(蘇尙轇)·신근(申慬) 등을 추시(追施)하라는 진달을 모두 정지하였다.
형조 판서 김상익(金尙翼)이 태복시(太僕寺) 이마(理馬) 이하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입시하자, 임금이 모두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처단(處斷)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영진(趙榮進)을 시켜서 왕세자에게 전유(傳諭)하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타인의 침모(侵侮)를 당하였는데, 궁중에 들어온 뒤에 그 사람을 추조(秋曹)에 이송(移送)하여 장차 죄를 처단하려고 하자, 황형(皇兄)이 나에게 〈죄의〉 가벼운 쪽을 따르도록 하라고 경계하므로 내가 그 가르침을 써서 벽에 걸어놓고 흠휼(欽恤)의 성덕(聖德)에 깊이 감복하였으니, 지금 이 태복시 하속(下屬)들의 죄를 처단하는 데서 나의 뜻을 볼 수 있다. 이 뒤에 양사(兩司)에서 혹시라도 죄를 더 주도록 청한다면 이것은 오늘 윤음(綸音)한 뜻이 아니니, 일체 허시(許施)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조영진이 입대하여 우러러 진달하자, 왕세자가 말하기를,
"내가 당연히 명심할 것이나 혹시 잊어버릴까 염려되니, 성교(聖敎)를 한 권의 책자에 써서 나로 하여금 관람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도승지로, 김면행(金勉行)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양사(兩司)에서 입대하였다.
8월 20일 정유
임금이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 명릉(明陵)에 수가(隨駕)한 군병(軍兵)을 호궤(犒饋)124) 하였다.
8월 21일 무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함경도 전 감사(監司) 서명신(徐命臣)을 파직하도록 명하자 우의정 이후(李)가 아뢰기를,
"함경도 전 감사 서명신의 장본(狀本)에 ‘공조(工曹)에서 새로 포백척(布帛尺)을 나누어 주었는데 새 자가 옛날 자보다 짧아, 이 개시(開市)하는 때를 당하여 새 자를 사용하기도 어렵고 또한 옛날 자를 사용하기도 어려우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당초에 공조에서 자를 나누어 준 것은 일이 경솔한 데 관계되니, 개시할 때에 새 자를 사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세(事勢)가 그럴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조에서 갑자기 하송(下送)한 것은 흐리멍덩하여 살피지 못한 것이니 해당 당상(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도신(道臣)은 유정지공(惟正之供)125) 을 논하지 않고 단지 개시하는 날에 말썽이 발생할 것만 염려하여 경중을 알지 못하였으니,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진주(晉州)와 울산(蔚山)은 음과(蔭窠)126) 를 만들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우의정 이후(李)의 진달한 바를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고, 유신에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도록 명하였다.
8월 22일 기해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8월 23일 경자
이태화(李泰和)·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윤동도(尹東度)를 이조 참판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경상도 유생 조협(趙浹)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나,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4일 신축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8월 25일 임인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니, 우의정과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선혜청 당상이 입시하였다. 그때에 비국 당상으로서 나오지 않은 여러 사람들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8월 26일 계묘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유신에게는 〈《시경》의〉 비풍장(匪風章)을 읽고 승지에게는 실솔장(蟋蟀章)을 읽도록 명하였으며, 또 진풍(秦風)과 회풍(檜風)을 읽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좌의정 신만(申晩)에게 더욱 힘쓰도록 하라고 유시하였다.
8월 27일 갑진
경상도 유생 곽지후(郭之垕)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노강 서원(鷺江書院)에 추배(追配)하도록 청하자, 왕세자가 이미 유시(諭示)한 것으로 하답하였다.
8월 28일 을사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8월 29일 병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무신 전강(武臣殿講)을 행하고 수석(首席)을 차지한 선전관(宣傳官) 손상룡(孫相龍)에게 숙마(孰馬)를 하사하였다.
8월 30일 정미
좌의정 신만(申晩)·우의정 이후(李)가 상서하여 면직(免職)을 바라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하답하여 유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수찬 김화진(金華鎭)이 빈연(賓筵)에서 아뢰기를,
"지난날 비국(備局)의 좌기(坐起)에서 강구(講究)한 일이 없었고, 오늘의 빈대(賓對)127) 도 때가 늦은 뒤에야 모였으니, 나라 일이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신만 등이 이로써 인구(引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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