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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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무신

왕세자(王世子)가 휘령전(徽寧殿)의 삭제(朔祭)를 섭행(攝行)하였다.

 

9월 2일 기유

이담(李潭)을 특별히 제수하여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이장(李彛章)이 사폐(辭陛)128)   때문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개시(開市)의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면 북평사에 적임자를 얻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담은 간국(幹局)과 기력(氣力)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뽑아서 제수하고 이어 일을 마친 뒤에 염찰(廉察)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팔도 유생 안형(安衡) 등이 상서하여 다시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송창명(宋昌明)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민백상(閔百祥)이 아뢰기를,
"지난날 심익운(沈翼雲)을 낭서(郞署)로 차하(差下)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지금 막 빈자리가 있어서 신(臣)이 봉행(奉行)하려고 하나 청환(淸宦)에 이르러서는 봉행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매, 민백상이 말하기를,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9월 3일 경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는데,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글 뜻으로 인하여 진계(陳戒)하기를,
"지난날 양사(兩司)에서 바로 진달을 정지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심지어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리셨으니, 성인(聖人)의 옹용(雍容)한 기상이 아닙니다. 여조겸(呂祖謙)이 젊었을 때에 조급하고 광포하여 가산(家産)을 타파(打破)하였는데, 얼마 후에 자기 자신에게는 책임을 무겁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책임을 박하게 하라는 글을 보고 통쾌하게 옛 관습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필부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인군(人君)이겠습니까? 또한 선조(先祖)를 받드는 절차는 사람의 도리를 스스로 다해야 할 처지이며, 성효(聖孝)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극진한 도리를 쓰지 않고자 하겠습니까마는 보산(寶算)129)  이 이미 정사(政事)에 게으를 때에 이르렀으니, 몹시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꼭 친히 제사(祭祀)를 행하려 하면 이것은 역시 중도를 쓰는 도리가 이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를 받드는 절차에 어찌 너무 지나친 데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억지로 힘써서 스스로 노력을 해도 또한 앞으로 천하 후세에 사람의 자식된 마음에 오히려 부끄러울 것이다."
하였다.

 

특별히 이은(李溵)을 제수하여 교리로 삼았다.

 

9월 5일 임자

채제공(蔡濟恭)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동지사(冬至使)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등이 피중(彼中)에 가서 정채(情債)로 쓸 전화(錢貨)를 얻으려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주청(奏請)한 것은 일의 체면이 매우 바르다마는 주선할 만한 일이 없으니, 만일 정채를 싸가지고 간다면 사체를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였다.

 

9월 6일 계축

밤에 우레하고 번개가 쳤다.

 

9월 7일 갑인

달이 남두(南斗)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임금이 때아닌 우레의 변괴로써 스스로 신칙하는 뜻을 보이고, 곧 소대를 명하여 《근사록》을 읽게 하였는데, 뜻을 세우려는 자는 지극한 정성으로 마음을 한결같이 가져야 한다[立志者至誠一心]는 대목과 서사와 공경은 날로 존귀하고 영화로운 데에 뜻을 두고[庶士公卿日志於尊榮], 농공과 상고는 날로 부자되고 사치스러운 데에만 뜻을 둔다[農工商賈日志於富侈]는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자주 칭탄을 더하며 말하기를,
"아름답다 그 말이여! 위에 있는 자가 진실로 능히 지극한 정성으로 마음을 한결같이 하고, 아래 있는 자가 혹시라도 날로 영화스럽고 사치한 데 뜻을 두지 아니하면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하고, 이어 승지에게 상단은 써 가지고 들여와 아침저녁으로 깨우치고 살피도록 하고, 하단은 써서 후원(喉院)130)   벽 위에 게시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돈독히 유시하도록 하고, 좌상·우상과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신만(申晩)·우의정 이후(李)가 때아닌 우레의 변괴로써 면직을 바라자, 임금이 유시하기를,
"이것이 어찌 보상(輔相)의 허물이겠느냐? 곧 내가 능히 정사에 공경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만이 기강(紀綱)이 해이한 것으로 진계(陳戒)하자, 윤음(綸音)을 내려 신공(臣工)을 신칙하도록 하였고, 정원(政院)에서는 우레의 변괴로써 달사(達辭)로 간략하게 면계(勉戒)하도록 진달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다시 복괘(復卦)131)  가 멀지 않아 회복된다는 말로 상서하여 면계하도록 진달하자, 왕세자가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9일 병진

우레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친히 원점 유생(圓點儒生)132)  을 시험하고 수석을 차지한 홍구서(洪九瑞)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9월 10일 정사

헌납 이홍직(李弘稷)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대리(代理)한 지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으며, 〈나라를〉 근심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 역시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질다는 소리가 마땅히 하늘을 감동시켰을 터인데, 재앙의 요기(妖氣)가 경계를 고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반드시 저하의 몸에 궐실(闕失)이 있거나 조정의 정사(政事)에 잘못된 하자(瑕疵)가 있는 까닭이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만히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니 역시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저하의 기후가 때로 미령(靡寧)함이 있었으니, 절선(節宣)에 그 도리를 다하였다고 이르겠습니까? 연묵(淵默)133)  이 한결같이 너무 지나쳤으니, 그래도 정지(情志)의 막힌 바가 없다고 이르겠습니까? 주연(胄筵)134)  에서의 강론(講論)을 하다가 말다가 하여 일정함이 없으니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이를 수 없으며, 빈대(賓對)의 인접(引接)하는 것도 폐지(廢止)할 때가 있으니 또한 정사에 부지런하다고 이를 수 없고, 연석(筵席)에서의 아룀과 공거(公車)135)  의 글에 이르러서는 간혹 충애(忠愛)한 말이 있는데 단지 유의(留意)하고 깊이 유념하겠다는 것으로 예사 비답할 뿐이니, 합하여 받아 힘껏 행할지라도 마땅히 실효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유신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한번 생각이 선(善)하면 찬란한 별과 상서로운 구름이 응하고, 한번 생각이 악하면 일찍 죽거나 병이 난다.’고 하였으니, 선과 악의 사이에 재앙과 상서가 서로 종류대로 응하여, 가지거나 버릴 즈음에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재빨리 판단되는 것입니다. 안연(顔淵)이 인(仁)을 물었는데 부자(夫子)가 사물(四勿)136)  로써 고하였고, 선유(先儒)가 마음 다스리는 법을 논하기를, ‘성품이 편협하여 극복하기 어려운 곳을 따라 극복해 나아가라.’고 하였으니, 저하께서는 만일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여 재앙을 돌이켜 상서가 되게 하려면 먼저 심술(心術)의 선악의 기미를 살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만일 본원(本源)을 맑게 하고 천리(天理)를 순연(純然)하게 하려면 부자(夫子)의 사물(四勿)의 교훈을 종사(從事)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만일에 능히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을 다스려서 비례(非禮)를 끊어 버리려고 하면 성품이 편협하여 극복하기 어려운 곳에 나아가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대저 이와 같이 하면 어찌 재앙이 소멸되지 아니하고 서정(庶政)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모두 개납(開納)할 뜻을 보였다.

 

임금이 재앙의 이변으로써 크게 경동(警動)함을 더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주사(籌司)137)  와 양전(兩銓)138)  에 신칙하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아! 삼대(三代) 이상에는 제요(帝堯)·제순(帝舜)과 하우(夏禹)·성탕(成湯)과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임금이 되고, 고요(皐陶)·기(夔)와 이윤(伊尹)·부열(傅說)과 주공(周公)·소공(召公)이 신하가 되었으니, 이것은 아! 태상(太上)의 경지이고, 비록 한(漢)나라·당(唐)나라 이후로 창업(創業)과 중흥(中興)을 이룰 때에도 반드시 〈밝은〉 임금이 있고 〈어진〉 신하가 있은 뒤에야 능히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영명(英明)함으로도 동자(董子)139)  를 강도상(江都相)에서 그치게 하였으니, 그 애석(愛惜)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재주는 다른 세대에서 빌려 올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임금이 만약 성심으로 국사를 행한다면 세상에 어찌 현재(賢才)가 없겠는가? 인군(人君)이 추향하는 바에는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신하가 있기 마련이니, 무덕(無德)하고 무능(無能)하면서 국사를 잘 다스리고 훌륭한 신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내가 무덕하고 무능한 자질로서 어렵고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30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그 마음을 바로잡지 못했는데 교화를 어찌 나라에 행할 수 있겠으며, 이미 자기의 몸도 수양(修養)하지 못하였는데 정사(政事)를 어찌 나라에 행할 수 있겠느냐? 나라의 기강이 해이되고 일백 관원이 태만한 것은 그 근본을 따지면 곧 한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곧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음양(陰陽)이 화협하지 못하고 비바람이 고르지 못하였다. 아! 그 형체를 보지 못하거든 그 그림자를 살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편전(便殿)의 차대(次對)에서 이미 이론(異論)이 없었는데, 오늘의 차대에 무슨 아름다운 계책이 있겠는가? 아! 옛날에는 5일 차대 이외에 본사(本司)의 좌기(坐起)140)  가 날마다 없는 날이 없었는데, 근세(近世)에는 당연히 해야 할 한번의 차대도 오히려 겨우 행하는데 더구나 본사에서 상례로 하는 좌기이겠는가? 삼가 두려워하며 스스로 힘써야 할 때에 어찌 동독(董督)하며 신칙하는 일이 없겠는가? 삼대(三對)141)  를 이미 행하였는데 어찌 말절(末節)을 지키겠는가? 이후로는 원량(元良)이 하순(下旬) 삼대에 나오고 나오지 아니한 단자(單子)와 본사의 좌기에 나오고 나오지 아니한 단자를 나에게 거치도록 하라. 조경(躁競)142)  하는 풍습이 근세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으니, 이것도 역시 흥망에 관계되는 바이고, 그 근본을 따져 볼 것 같으면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사(籌司)의 천망(薦望)과 전조(銓曹)의 의망(擬望)을 한결같이 공정함을 따르되 조경을 억제하고 염정(恬靜)을 장려할 것 같으면 비록 조경하는 마음이 뱃속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행하겠느냐? 이 폐단을 없애려고 하면 하나의 ‘공(公)’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 아! 주사(籌司) 및 양전(兩銓)의 신하와 그 나머지 신하들은 그대의 할아버지와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구습(舊習)을 씻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우레의 이변으로 계사(啓辭)를 올렸고, 옥당(玉堂)에서 역시 차자(箚子)를 올리자, 임금이 모두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관학(館學)143)  의 장의(掌議)를 소견(召見)하였다.

 

9월 11일 무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북도(北道)의 사조(四祖)144)   능·전(陵殿)을 봉심(奉審)하고 여러 능의 지형을 그려 올렸으니, 모두 임금의 하교를 받든 것이었다.

 

9월 12일 기미

임금이 차대(次對)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오지 않은 자가 많자, 임금이 몹시 진노(震怒)하여 정원(政院) 및 빈청(賓廳)에 하교하니 내용과 뜻이 매우 엄중하였고, 또다시 정유년145)  의 고사(故事)를 따르도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이에 좌의정 신만(申晩)·우의정 이후(李)가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빈계(賓啓)하였고, 정원과 옥당도 역시 청대(請對)하였으며,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은 차자(箚子)를 올렸고, 좌상과 우상은 금오(金吾)146)  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임금이 비로소 입시(入侍)하도록 허락하였는데, 대신(大臣)이 하교를 환수하도록 힘써 청하자 임금이 곧 허락하였으며, 신만이 옥당(玉堂)의 차자에 비답을 내리도록 청하자,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렸다. 그때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좌정하였는데 한 환관(宦官)이 촛불을 들고 시봉(侍奉)하였으니, 대개 대리할 당초에 숭문당(崇文堂)에서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한 예를 따른 것이었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13일 경신

번개가 치고 우레가 진동하였으며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홍계희(洪啓禧)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4일 신유

정원(政院)에서 우레의 이변으로 계사(啓辭)를 올렸고, 부제학 조명정(趙明鼎) 등은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啓)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왕세자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는데, 우레의 이변으로 몹시 경구(警懼)해야 함을 보여야 한다는 뜻으로 윤음(綸音)을 내렸다. 좌의정 신만(申晩)·우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신을 퇴척(退斥)시켜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역시 형식적인 말이다. 오늘은 원량(元良)도 또한 시좌(侍坐)하였으니, 군신 상하가 뜻을 같이하면 재앙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자, 신만이 말하기를,
"이같이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때를 당하여, 신칙하는 일은 먼저 수상(首相)으로부터 나와야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돈유(敦諭)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상로가 인질(引疾)하고 나오지 않았다. 신만이 윤급(尹汲)을 늙기 전에 진용(進用)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찌꺼기가 아직도 점화(點化)147)  하지 못하였다."
하자, 이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윤급의 소년 시절의 일을 지적하는 듯한데, 전하께서 윤급에게 의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지금 시좌(侍坐)하였으니, ‘의(疑)’ 자를 말하지 말라. 이것을 원량으로 하여금 듣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군(人君)이 되어 의심을 가지면 뭇 신하들이 어찌 그 수족을 놀리겠는가? 나는 실제로 신하를 대우함에 있어 의심이 없다. 이 사람이 결단코 악한 일을 하지는 않았으나 유순한 가운데 편협(偏狹)한 곳이 있다고 여겼는데, 지난 겨울 고문(考文)할 때에 비로소 그의 마음이 공평하고 인선(仁善)한 것을 알았으며, 이후로는 전일에 알았던 바가 너무 지나쳤음을 뉘우쳤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급(尹汲)은 간결(簡潔)하고 강직하며 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전조(銓曹)의 직임을 맡아 능히 간악한 자를 물리치고 어진이를 등용하였으며, 의리를 다툼에 엄중하여 사류(士類)들이 추중(推重)을 하였으나, 임금이 조제(調劑)를 힘썼으므로 그의 애협(隘狹)함을 싫어하여 진용(進用)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4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과학-천기(天氣)


[註 147] 점화(點化) : 종래의 물건을 고쳐서 새롭게 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급(尹汲)은 간결(簡潔)하고 강직하며 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전조(銓曹)의 직임을 맡아 능히 간악한 자를 물리치고 어진이를 등용하였으며, 의리를 다툼에 엄중하여 사류(士類)들이 추중(推重)을 하였으나, 임금이 조제(調劑)를 힘썼으므로 그의 애협(隘狹)함을 싫어하여 진용(進用)하지 않았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과거의 폐단이 매우 고질화되었다고 말하자, 임금이 강경(講經)에 실제로 효력이 있다는 것으로 윤음을 내리고 별시(別試)의 예에 의거하도록 법을 정하였다가 얼마 후에 정지하였다.

 

왕세자가 10일 동안 감선(減膳)하라고 명하였다.

 

9월 15일 임술

도승지 채제공(蔡濟恭) 등이 계달(啓達)하기를,
"인주(人主)는 역시 하나의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거조(擧措)하는 사이에 진실로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고 때에 순응하지 못하면 음양(陰陽)이 그 궤도를 잃고 사악한 여기(沴氣)가 그 사이를 범하여 재앙이 되고 괴변도 되어 각각 그 종류대로 응하게 됩니다.
그윽이 전하(殿下)께서 은상(恩賞)을 베푸시는 것을 보건대, 대체로 물(物)마다 은혜에 젖지 않음이 없도록 하려고 하므로 너무 넓어서 절차가 없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임금은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도 아낀다는 뜻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벌(威罰)을 대중들에게 베푸는 데에 있어 대체로 군공(群工)을 경계하고 신칙하려고 하면서도 간혹 말을 한 것으로 죄를 얻는 경우가 많으므로 도리어 청납(聽納)하는 도리(道理)를 넓히는 데에 손색이 됩니다. 그리고 정령(政令)을 고치기를 너무 빨리하는 것 같은 데 이르러서는 실제로 받들어 행하는 데 현혹되는 탄식이 있으며, 사기(辭氣)를 발할 때 간혹 공평을 잃은 것이 많으니, 성인(聖人)의 중화(中和)하는 덕에 매우 흠결(欠缺)이 됩니다. 시험삼아 엊그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죄가 있으면 그를 죄주고 물리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기에 곧 지나치게 자신을 손억(損抑)하고 심지어는 감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려, 상하가 서로 버티며 해가 지고 밤을 지새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다행하게도 전환(轉環)하는 아량으로 곧 반한(反汗)148)  을 허락하기는 하였지만 나라 체면의 손상과 보는 이들의 놀라고 의혹됨은 작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리고 백성의 근심과 시폐(時弊)같은 데 이르러서는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우며, 염치와 부끄러움이 쓸어내듯 없어져서 조정(朝廷)에는 집에 돌아와 식사함에 의젓한 절도가 없으며, 과거(科擧)는 비록 자주 시행하더라도 〈뽑힌〉 인사에게는 임금을 잘 모시고 편안하게 하는 아름다움은 부족하고, 나라에는 반년치의 식량 저축도 없고, 백성에게는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원성(怨聲)만 있으니, 비록 눈앞에 보이는 재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하가 모두 안연(晏然)히 하는 일이 없이 게을러 빠져, 재이 보기를 이미 안정이 되고 다스려진 것같이 여기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먼저 성덕상(聖德上)에 나아가서 통렬히 스스로를 더 가다듬어 정령(政令)과 사기(辭氣) 사이에는 어느 것이나 발하면 반드시 절차에 맞도록 하고, 은상(恩賞)과 위벌(威罰) 사이에는 반드시 그 시작을 신중히 하여 한 가지 생각의 미세한 것이나 한 가지 일의 일으키는 데도 하늘의 이치를 체득하여 행동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이것으로 여러 신료들을 동독하고 신칙하면 모든 법도가 바르게 될 터이고, 그것으로 실제의 정사를 강구하면 모든 일에 편안하게 될 것이며, 음양이 궤도에 순응하고 신인(神人)이 모두 화합할 것이니, 무슨 재려(災沴)가 있으며 어찌 우레의 이변을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제 이미 나 한 사람에게 말미암았다고 유시하였다. 그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더욱 더 깊이 더 반성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령(辭令)과 교지(敎旨)가 평정함을 잃어서 나랏일이 어그러지고 손상되는 탄식이 있고, 은상(恩賞)이 너무 넘쳐서 현명한 임금은 한번 웃거나 찡그림도 아낀다는 뜻에 어긋났으며, 언로(言路)가 막히고 끊어져서 사기(士氣)가 완전히 사라졌고, 재력(財力)이 떨어지고 다하여 백성들의 궁핍함이 매우 혹심합니다. 더구나 금년에는 곡식의 해충이 재상(災傷)을 알리고 여러 도(道)가 흉년이 들었는데, 묘당(廟堂)에서는 직무를 게을리 함이 버릇이 되어 오히려 한마디 말이나 하나의 계책을 세워 생민(生民)을 증제(拯濟)할 실상이 없으니, 이 몇 가지 일이 모두 족히 재상을 만드는 단서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이(轉移)할 바의 기미는 오직 전하의 한마음에 달렸으니, 진실로 마음의 바탕을 허명(虛明)하고 정일(靜一)하게 하며, 정령(政令)의 발표는 강의(剛毅)하고 중정(中正)하며, 자주 뭇 신료를 접하고 널리 그 다스리는 계책을 물어서 올바른 말을 받아들여 성총(聖聰)을 넓히고, 성신(誠信)을 미덥게 하여 실지 혜택이 아래에 미치도록 한다면, 국사(國事)를 구제하고 백성의 근심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엊그제 이미 재상(災傷)이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유시하였다. 그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더욱더 깊이 반성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때와 일을 하거나 그만두는 사이에 혹 한번 생각이 잘못되거나 한 털끝만큼의 실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니, 오직 마땅히 번연히 뉘우치고 깨달아서 선단(善端)을 미루어 넓혀 나가야 하며, 기쁘거나 화가 날 때 혹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함이 있으면 절차에 맞을 바를 생각하고, 말을 할 사이에 더러 그 공평함을 얻지 못함이 있으면 법도에 합당할 바를 생각하며, 겨우 알았으면 일찍이 그것을 고치지 않음이 없으며, 겨우 그것을 고쳤으면 다시 행하지 아니한 뒤에야 바야흐로 멀지 않아 회복된다고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친히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팔도 유생 오시유(吳時裕) 등이 상서하여 다시 선정신(先正臣)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7일 갑자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교리 이은(李溵)의 글을 본즉, 신이 저번에 직려(直廬)149)  에서 수작(酬酢)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인책(引責)하기를 매우 긴하게 하였으니, 아! 그것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이은은 대가(大家)의 아들로서 재주와 명망이 본래 드러났으므로 창명(唱名)하던 날 저녁에 신이 바야흐로 공도(公道)를 위하여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으나, 다만 그가 사적(仕籍)에 오른 지 이순(二旬)도 차지 않았고, 또 한번도 문반(文班)의 직임을 지내지 않았다면 영관(瀛館)150)  에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아마도 저양(儲養)의 도리에 흠이 될 것이므로 전석(前席)에서 한번 진달하려고 하였다가 과연 운운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날 입시(入侍)하였을 때는 마침 조용하지 못하였고, 또 생각하건대, 그가 만약 양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인책한다면 매우 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본의가 아니라서, 마침내 그대로 입을 다물고 물러나왔으니, 본래 이 일에 대한 곡절(曲折)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9월 18일 을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조명정(趙明鼎)의 차자 내용을 가지고 대신에게 하문하자, 여러 대신들이 마침내 결의(決意)하고 강경(講經)을 겸행하도록 하니,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과장(科場)의 폐단을 익숙히 들었는데, 나의 경우를 말한다면 비단 청금(靑衿)의 과실만이 아니라 부형된 자가 자제(子弟)들의 독서(讀書)하는 방법을 잘 가르치지 못한 소치이다. 시관(試官)은 공정한 도리로 선비를 선발하고 부형은 자제의 부정(不正)을 금한다면 또한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면시(面試)를 청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대비(大比) 이외에는 절대로 선비를 뽑지 말아야 한다고 운운하였는데, 이른바 면시한 것은 도곡(陶穀)의 아들 장석(張奭)151)   이외에는 내가 들은 바가 없다. 늙어가는 나이에 어찌 차마 악착한 짓을 행하였겠는가? 이것은 근본을 단정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경연(經筵)에서 간략하게 제도를 정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합문(閤門) 밖을 지나가기도 전에 홀연히 생각하니 한갓 광경만 아름답지 못할 뿐이 아니라 이것은 요행을 바라는 문을 열어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오늘날 많은 선비들이 한 과장 속에서 제술(製述)할 글을 생각하고 강시(講試)에 응할 경전을 외운다면 이것은 두 가지로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기에 반포하지 말도록 특별히 명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그것을 어찌 새로운 규칙이라고 하겠느냐? 이 뒤로는 명경과(明經科) 및 알성 시사(謁聖試士)와 관무재(觀武才) 유생 대거(儒生對擧) 이외에 증광 초시(增廣初試)를 행한 후에는 강(講)은 면제하고 삼경(三經) 중에서 한 책을 자원(自願)하게 하여 해석을 면제하고 배강(背講)하여 조(粗)152)   이상을 뽑고, 중시 대거 정시(重試對擧庭試) 역시 이 예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고, 이외에 추비록 경과(慶科)가 조첩(稠疊)되더라도 매양 그 해 늦가을에 정시와 별시(別試)를 합설(合設)하되 반드시 초시(初試)를 한 뒤에 강경(講經)을 하도록 하며 9월 이후에는 아무리 나라에 경사가 있어도 절대로 재설(再設)을 하지 말고, 다음해 9월에 설행(設行)하되 역시 정규(定規)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며, 알성시의 경우는 나라의 문물 제도(文物制度)를 보는 것이니 선비를 뽑되 5인에 지나지 않도록 하고, 관무재 유생 정시와 중시 대거 정시는 모두 3인에 지나지 않도록 한다면, 이것이 근본을 단정히 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인재를 등용함에 종핵(綜核)153)  을 하지 아니하면 요행을 바라는 문을 어찌 막을 것이며, 조망(躁妄)한 풍습을 어찌 중지할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방(榜)마다 추생(抽栍)154)  으로 그 재주를 시험하여 당연히 운각(芸閣)155)  에 분관(分館)156)  할 자 이외에는 비록 마땅히 괴원(槐院)157)  에 부속(附屬)할 자라 하더라도 능하지 못한 자는 마땅히 국자감(國子監)158)  에 부속시키고, 마땅히 국자감에 부속되었던 자라도 〈능한 자는〉 당연히 운각에 부속시키도록 할 테니, 이와 같이 하면 그 근본은 저절로 단정해질 것이고 그 조망함도 저절로 정지될 것이다. 이번의 하교는 명색은 비록 엄하나 그 뜻은 너그러운 것이다. 과장(科場) 중에서 효잡(淆雜)한 것 역시 세 글자의 제목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지금부터 뒤로는 제목(題目)을 써서 품지(稟旨)를 받되 특별히 잠(箴)·명(銘)·송(頌)은 제외하고 이 뜻을 일체(一體)로 하여 규식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9일 병인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숭문당(崇文堂)에 춘저(春邸)께서 시좌(侍坐)하였고, 경재(卿宰)가 모두 나왔으며, 하전(厦氈)159)  에서 밤늦도록 강론(講論)한 것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어리석은 마음이 스스로 격동하여 이에 감히 언로(言路)를 열고 과거 제도를 고치는 것으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급무(急務)라고 하였었는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마침내 시취(試取)한 뒤에 면강(面講)을 하는 것으로 법을 정하고 새로운 제도를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배제(陪祭)한 반열(班列)에서 경연의 신하가 전하는 바를 들으니, 강정(講定)한 바의 새로운 제도에 대하여 성교(聖敎)에 불편하다고 여겨 반포하지 말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아! 새로운 제도를 행함에 있어 경전에 밝은 부류들이 잡되게 대술(代述)을 할 것이니, 절과(竊科)할 마음을 내는 폐단은 진실로 성상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경유(經儒)의 무리들이 제술을 빌려서 과거 합격을 희망하는 것은 앞서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진실로 면강(面講)의 명령이 있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것은 아마도 근심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강경(講經)하는 법을 다듬으면서부터 남의 손을 빌려 대술하는 폐단이 진실로 역시 성상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거의 경우는 한 글자도 읽지 못하면서 백지(白地)에 대술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그 대술하는 경우는 같겠지만 그래도 경전(經傳)을 잘 익히는 데 착력(着力)하게 한다면 어찌 전혀 독서(讀書)를 하지 않은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성상의 생각이 미치는 바에 또 어떤 폐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위와 같은 몇 가지에 벗어나지 아니한다면 신은 아마도 성상의 생각이 혹 세 번 거듭 생각하는 데서 실수하는 것인 듯합니다. 과거 제도는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일이니,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넓게 꾀하여 지극히 합당한 데로 돌아가도록 힘쓰는 것이 해롭지는 않습니다만, 오직 새로운 제도가 비록 그 과조(科條)를 세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단연코 결행을 한다면 과장(科場)의 안에서 결코 모람되게 진출하려는 폐단은 없을 것이며 반드시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두어 해를 하고도 그 성과가 없으면 신은 삼가 망언을 한 것에 대한 처벌을 청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고 유중(留中)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상한(洪象漢)이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인삼(人蔘)을 무역하는 폐단을 진술하자, 임금이 영원히 제감(除減)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야대(夜對)를 행하고 유신(儒臣)에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9월 20일 정묘

번개가 쳤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신만(申晩)이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문(狀聞)을 가지고 우러러 청하기를,
"송화현(松禾縣)의 전결(田結)을 개량(改量)한 뒤에 〈그 결수가〉 줄어든 것이 5백여 결이나 됩니다. 특별히 그 절반인 2백여 결을 감하여 영원히 속전(續田)160)  을 만들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또 소과(小科)에 학례강(學禮講)161)                  의 일로써 우러러 진달하자, 임금이 마침내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자양 주부자(紫陽朱夫子)162)                  의 소학 제사(小學題辭)에 ‘사람에게 물뿌리고 쓸며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와,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친구와 친하는 도리를 가르치도록 한 것은 모두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바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근본은 곧 물 뿌리고 쓸며 응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학(小學)》을 강하도록 권장하는 하교에 일찍이 이미 유시한 것이 많았으나 그 성과가 막연하였다. 그러니 이때를 인하여 강(講)을 권장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이 뒤로는 대체로 소과(小科)의 초시(初試)를 본 뒤에는 조흘 예강(照訖禮講)163)                  을 없애고 대사성으로 하여금 초시(初試)를 볼 여러 유생들에게 시강(試講)을 하되 《소학》의 해석은 제외하고 배송(背誦)하여 조(粗) 이상을 뽑고, 한결같이 대과(大科)의 삼경(三經) 중에 한 책을 자원하여 강하는 예에 의거하도록 하라. 아! 사대부의 자식으로서 《소학》을 읽지 아니하면 어떻게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겠으며, 선비의 옷을 입고 유건(儒巾)을 쓰고서 한 권의 경서(經書)도 읽지 아니하고 또한 무슨 마음으로 청현(淸顯)에 뜻을 두겠느냐? 지금 이 대·소과(大小科)에 대한 윤음(綸音)을 늙어서 혼망한 말이라고 하지 말라. 그 의도는 실제로 근본을 단정히 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법이 오래되면 저절로 해이해지는 것이니, 법을 베푸는 처음에는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예조 판서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고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계하(啓下)164)                  하도록 하라. 그리고 대과(大科) 중에서 바로 승륙(陞六)되는 자에 대해서 분관(分館)할 때에는 간섭(干涉)하지 말고, 이 무리들을 친시(親試)할 때에 만약 잘하지 못하면 청현직에 천거(薦擧)하지 말도록 하는 것도 절목 중에 또한 더 보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필간(朴弼榦)이 소매 속에서 한 책자를 꺼내어 올렸는데, 이름은 《춘추대의(春秋大義)》라 하였고, 장주(莊周)165)                  와 왕통(王通)166)                  의 말을 잡되게 인용하였으며, 대체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임금이 진헌(進獻)하는 의리가 없다는 것으로 여겨 도로 돌려주도록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가 늙어서 정신이 혼미하였음을 비웃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새로 정한 과거 제도가 오히려 상세함을 다하는 데는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또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이후로는 절일제(節日製)167)  에 합격하여 수석을 차지한 자는 시관(試官)을 두지 말고 내가 마땅히 불러서 시험을 보이되 그 전경(專經)을 강(講)하면서 잘 외우는 자에게는 전례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불통(不通)한 자는 그전 예대로 직부 회시(直赴會試)하도록 하며, 만약 친시(親試)를 못할 경우에는 당연히 전례에 의거하여 하교할 것이나, 원점 유생(圓點儒生)에게 50점을 얻도록 한 것이 비록 옛 법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점수를 준거한 뒤에 역시 어찌 위열(慰悅)하는 도리가 없겠는가? 그렇지만 만약 근래의 예를 따른다면 독서(讀書)를 신칙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 뒤로 원점 유생을 시취(試取)할 때는 먼저 전강(殿講)에서 하나의 경서(經書)를 강하게 하여 조(粗) 이상을 뽑아 제술(製述) 시험을 본 뒤에 급제를 내려 주도록 하고, 도기 유생(到記儒生)으로서 스스로 불(不)이라고 하는 자가 많은 데 이르러서는 강경과 제술을 나누어서 시취하기 때문에 옛날에 2, 3인이 강경을 하고 직부하던 것이 지금은 1인이 되었으니, 한갓 옛날의 사례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글을 읽지 않는 문을 열어 주는 격이다. 이미 글을 읽도록 권장하고 나누어서 선비를 뽑는 것도 역시 근본을 단정하게 하는 뜻이니, 이 뒤로는 도기 유생의 전강은 곧 구례(舊例)대로 회복하고, 강경 유생의 시취도 역시 구례대로 회복하되 2인을 넘지 말게 하고, 순통(純通)을 받은 자가 많을 것 같으면 제술(製述)로 비교하도록 하라. 이것도 역시 명경과(明經科)의 초시(初試)를 보이는 뜻이니, 이것을 절목(節目)에 더 넣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대·소과(大小科)에 대한 윤음(綸音)을 예조(禮曹)로 하여금 활판 인쇄[活印]하여 1건을 궁내(宮內)에 들여놓고, 정부·예조·국자감 및 사처(四處)의 사고(史庫)와 팔도 및 삼도(三都)에 각각 1건씩 비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9월 23일 경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를 행하고 유신(儒臣)에게 《근사록(近思錄)》을 강하도록 하였다.

 

9월 24일 신미

달이 태미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9월 25일 임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도정(都政)168)  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민백상(閔百祥)·병조 판서 조운규(趙雲逵)의 정사(政事)였다.

 

홍계능(洪啓能)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초선(初選)하였고, 윤봉오(尹鳳五)를 대사헌으로, 홍약수(洪若水)를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심봉징(沈鳳徵)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9월 27일 갑술

임금이 교리 홍지해(洪趾海)를 교동 농형 순심 어사(喬桐農形巡審御史)로 삼으니, 당시에 교동에 충재(蟲災)가 매우 심하여 도민(島民)들이 떠나고 흩어지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9월 28일 을해

유성(流星)이 귀성(鬼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9월 29일 병자

이창수(李昌壽)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9월 30일 정축

임금이 의릉(懿陵)에 배알(拜謁)하고 돌아올 때에 각 군영(軍營)의 기고(旗鼓)로써 영접(迎接)하라고 명하고, 사하리(沙河里)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용호 대장 전운상(田雲祥)·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친히 숙마(熟馬)를 주었다.

 

임금이 관왕묘(關王廟)를 역림(歷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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