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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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무인

우레하고 번개가 쳤으며, 우박이 내렸다.

 

왕세자(王世子)가 익선관(翼善冠)에 흑삼포(黑衫袍)를 갖추어 입고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간관(諫官)은 단지 전달(前達)을 전달(傳達)하였고, 동·서(東西) 반열에서는 한 사람도 당(堂)에 올라 일을 아뢰는 자가 없자, 승지가 그들을 추고(推考)하도록 청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청한 대로 하라."
하였다.

 

집의 박기채(朴起采)가 상서하여 경계에 힘쓰도록 하라고 진달하자,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2일 기묘

도승지 채제공(蔡濟恭) 등이 아뢰기를,
"아! 오늘날의 형세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외면으로 보건대 변경(邊境)에 급박한 경보(警報)가 없고 여역(癘疫)이 유행하지 않으니, 비록 다소 평온하고 무사(無事)하다고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공평하게 상고해 보면 임금은 수고로운데 조정(朝廷)에서는 날로 더욱 게을러지고, 위에서는 명령을 하여도 그 풍습이 좀처럼 크게 변하지 아니하며, 산림(山林)에 있는 선비들은 조정에 서지 못하고 부옥(蔀屋)169)  의 근심은 임금에게 전달되지 못하며, 언로(言路)가 막히어 끊어지고 강기(綱紀)가 무너지고 해이하며, 조경(躁競)이 풍습을 이루고 사치가 방자하게 행하여지니, 조종조(祖宗朝) 수백 년에 쌓아 놓은 기반(基盤)이 날로 늠철(懍綴)하는 형세가 있는데도 구원할 양책(良策)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해 보니, 이는 신하의 죄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으나, 다만 그 근본을 단정히 할 도리를 강구한다면 성상(聖上)의 몸에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총명(聰明)이 뛰어났고 문리(文理)를 세밀히 살펴,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이 이미 성상의 마음에 합당한 자가 없으니, 이에 성상의 마음이 스스로 성인이라고 하는 조짐이 있어서 중조(中朝)의 탄식을 발(發)하였고, 겉으로는 비록 사색(辭色)을 빌려서 우용(優容)함을 보이려고 힘쓰나, 실제로는 지극한 정성으로 도움을 구하는 마음과 자나 깨나 현준(賢俊)을 잊지 못하는 뜻도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진정하고 절실한 말이 성상 앞에 진달되지 못하고, 참으로 쓸 만한 재주가 조정에 등용되지 아니합니다. 이러한 도리를 따라서 하루가 다시 하루가 되며, 걱정하고 탄식하다가 그치며 끌어다 보충하면서 지나간다면, 신은 아마도 하늘의 깨우침을 보이는 것이 이에 그치지 않으리라고 여깁니다. 오늘 한 기강이 무너지고 내일 한 정령(政令)이 추락하여 기필코 수습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른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두렵고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高明)한 데 이르렀다고 하지 말고 마음을 겸손한 데 두며, 여러 신하들의 말이 비록 진부(陳腐)한 데 가깝더라도 가까이하여 살피는 데 뜻을 더하고, 재주가 쓸만하면 아무리 성글고 멀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반드시 천직(天職)을 주어 함께 하도록 하며, 말이 채택할 만하면 아무리 귀에 거슬리더라도 반드시 올바른 도리에서 구하여 그것으로 나의 병통에 이롭게 할 것입니다. 귀하고 가깝다고 하여 그 죄를 용서하지 말고 소절(小節)에 구애되어 대체(大體)를 상하게 하지 말며, 번거로운 형식을 버리고 재용(財用)을 절용하며 염정(恬靜)을 장려하고 명기(名器)를 아낀다면, 강기(綱紀)가 서지 않는 것을 어찌 근심하며 사유(四維)170)  가 펴지지 않는 것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조경(躁競)의 기풍은 저절로 안정될 것이며 탐욕을 내고 사치스러운 풍습은 즉시 고쳐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삼가고 두려워함이 더욱 간절한 뜻으로 겨우 이미 하교(下敎)하였는데, 직책이 후원(喉院)에 있어 그 진면(陳勉)함이 절실하니, 마음에 매우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스스로 면려(勉勵)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채제공(蔡濟恭) 등이 상달하기를,
"저하(邸下)께서는 오늘의 책임이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학문과 정사는 비록 두 가지 일이나 진실로 그 실상을 구한다면 학문은 근본이 되고 정사는 그 다음이 됩니다. 대개 학문이란 것은 입으로 읽기만 하고 그만두며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만두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황권(黃卷)171)  을 대하면 엄연히 성인(聖人)에게 친자(親炙)를 받는 것같이 하고, 법어(法語)를 보면 척연(惕然)히 몸소 성인의 훈계를 받드는 것 같이 하며, 의리(義理)가 정미(精微)하게 쌓인 것과 보고 들으며 말하고 행동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는 내 몸에 돌이켜 체험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 한마디 말을 하면 경전(經傳)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는가를 생각하며, 하나의 일을 실행하면 의리에 위배됨이 없는가를 생각하여, 분노가 폭발하면 이것으로 재단하고, 욕심을 막기 어려울 때면 이것으로 억제하며, 미루어 나아가 제왕(帝王)들의 흥하고 망한 자취와 천인(天人)의 복종하고 배반하는 기미에 이르러서도 반복하여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오늘에 있어서의 말과 행동이 과연 옛날 선대의 현철한 임금과 부합되는가 부합되지 않는가를 생각하여 만일에 부합이 되면 한 뜻으로 나아가 반드시 성인으로서 표준을 삼고, 만일 혹 털끝만큼이라도 이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이는 곧 성광(聖狂)의 판단이며 치란(治亂)의 기미이니, 척연히 두려워하고 혁연히 감동하여 한 하자도 두지 아니하면 모든 이치가 함께 이르러서 순수하게 밝고 넓은 지경에 이를 것이니, 요(堯)임금이 요임금 된 바와 순(舜)임금이 순임금 된 바가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서연(書筵)은 저하의 학문을 나아가게 하는 곳인데, 강(講)하고 강하지 않는 것이 떳떳함이 없으며, 빈대(賓對)는 치도(治道)를 강구(講究)하는 곳인데 강확(講確)의 실상이 없으며, 심지어 일전의 상참(常參)은 정폐(停廢)된 나머지 겨우 행한 것인데도 동·서(東西)의 반열(班列)에서 한 사람도 나와 아뢰는 자가 없었고, 경연(經筵)에 오른 대신(臺臣)들도 한마디 말도 진면(陳勉)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뭇 신하들의 실수이나, 저하께서 만약에 지극한 정성으로 도움을 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스림을 도모한다면, 또한 어찌 충성을 다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인하여 차대(次對)를 행하였는데,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출사(出仕)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밖에 있는 두 대신(大臣)을 성심으로 돈유(敦諭)할 것 같으면 마땅히 성내로 들어올 듯하니, 어찌 국가에 한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척기(兪拓基)의 경우는 조당(朝堂)에 맞지 아니하고, 조재호(趙載浩)의 경우는 어찌 일찍이 행공(行公)한 일이 있었던가?"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산림에 처해 있는 선비들을 초치(招致)하여 주연(胄筵)에 참여하게 하면, 진실로 보도(輔導)에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림에서 비록 더러 초치한다 하더라도 곁에서 쫓아내는 일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근래에는 은상(恩賞)이 너무 넘치니 승전(承傳)으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가장 삼가고 아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장단(將壇)에서 갑옷을 갖추는 것이 비록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어버리지 않는 성의(盛意)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환궁(還宮)할 때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체모에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인심이 모두 화평(和平)한 데 이르렀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한 점의 칠염(漆染)도 하루아침에 씻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는 말하기를,
"어찌 사람마다 이런 마음이 있다고 이르겠습니까?"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저 중신(重臣)은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전부터 본래 염칠(染漆)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가서 치제(致祭)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승지 성천주(成天柱)가 우레의 이변으로 간략하게 면계(勉戒)를 하도록 진달하자, 하령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10월 3일 경진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지평 이시정(李蓍廷)이 상서하여 우레의 이변으로 진계(陳戒)하자,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상(三相)이 재상(災傷)의 이변으로 진계(陳戒)하고 사직(辭職)하자,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4일 신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는데,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친히 ‘도봉 서원(道峰書院)’ 네 글자를 쓰고 치제(致祭)할 때에 게판(揭板)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영어(囹圄)에 달려가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겨울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0월 5일 임오

하교하기를,
"6개월 동안에 동궁(東宮)이 상참(常參)을 단지 두 차례만 행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역시 내가 힘쓰기를 게을리해서 그런 것이다. 내일은 마땅히 명정문(明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할 것이니, 오부(五部)의 관원들은 유식(有識)한 민인(民人)을 거느리고 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김효대(金孝大)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6일 계미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와 도랑이 막혀서 더러운 것이 샘에 들어가 풍토병(風土病)을 나게 하는 폐단이 있으니, 오늘 조참(朝參)에는 이런 일들에 대하여 물으려고 한다."
하니, 좌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미처 하지 못한 바가 바로 이 일입니다. 내와 도랑은 비유하건대, 사람의 혈맥(血脈)과 같은 것이니, 막히면 어찌 국맥(國脈)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성교(聖敎)가 진실로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와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에게 각각 생각한 바를 진달하도록 명하자, 모두 내를 파내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하였는데, 유신(儒臣) 김응순(金應淳)은 말하기를,
"이것은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니, 지금 만약 정심(正心)하는 공부를 더 힘써서 그것으로 하여금 만민을 바르게 하는 공효(功效)가 더욱 드러나게 된다면, 내와 도랑이 개통되거나 개통되지 아니하는 것은 족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으며, 인하여 승지에게 《성학집요》의 소지(小識)를 불러 주면서 쓰도록 명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교동부(喬桐府)에 신포(身布)·환상(還上)·전세(田稅)·대동(大同) 및 잡색(雜色) 신공(身貢)의 유(類)를 명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정지하라고 하였으며, 시임(時任)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 남정오(南正五)를 먼저 파면을 한 뒤에 잡아들이고, 권일형(權一衡)을 수군 절도사로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어사(御史) 홍지해(洪趾海)의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홍봉한(洪鳳漢)·이창의(李昌誼)·홍계희(洪啓禧)를 준천 당상(濬川堂上)으로 삼고, 그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7일 갑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경기 수군 절도사 권일형(權一衡)을 소견하고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와 관향곡(管餉穀) 중에서 쌀 1천 석과 잡곡(雜穀) 2천 석을 바닷가로 운반하기 쉬운 고을에서 성엣장[流氷]이 흐르기 전에 차원(差員)을 정하여 교동(喬桐)으로 운송(運送)하라고 명하였으니, 진휼(賑恤)하는 자료를 삼기 위한 것이었다.

 

10월 8일 을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준천 당상(濬川堂上) 및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을 준천(濬川)에 관한 일을 회유(誨諭)하였으며, 구선복(具善復)을 좌윤(左尹)으로 삼고 우윤(右尹) 박상덕(朴相德)과 함께 가서 형지(形止)를 살펴보고 아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기경(李基敬)을 체임(遞任)하고 김효대(金孝大)로 대신하도록 명하였으니, 이기경에게 신칙(申飭)하도록 하였으나 곧 명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0월 9일 병술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유성이 다시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을 소견하였는데, 한성부 당상(漢城府堂上) 구선복(具善復)이 준천도(濬川圖)를 올렸다. 임금이 인하여 소대(召對)를 행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목(耳目)의 관원이 벙어리가 되면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하니, 김응순(金應淳)은 말하기를,
"전하의 한마디 말씀이 족히 나라를 일으킬 만합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말이 비록 반드시 모두 공정하지는 못하더라도 매양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면 임금께서 문득 먼저 의심하고 최절(摧折)하였으니, 이 뒤로는 반드시 화평한 마음으로 성찰(省察)하도록 하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공경(公卿)과 재신(宰臣)은 중요한 임무인데 판서(判書)와 참판(參判)이 요사이같이 많은 때는 있지 않았으니, 이것은 오로지 뭇 신하들을 갑자기 등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명기(名器)를 아끼는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전에 대신(大臣)이 이유신(李裕身)을 교동 수군 절도사에 올려 뽑으려고 하였으나,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올려 뽑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이기경(李基敬)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10월 11일 무자

서명응(徐命膺)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10월 13일 경인

우의정 이후(李)가 신병(身病)으로 사직서(辭職書)를 올리자,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答)하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송명흠(宋明欽)을 집의로 삼았으니, 송명흠은 곧 송동춘(宋同春)의 후손인데 경학(經學)으로 초선(抄選)된 사람이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인하여 차대(次對)를 행하였는데, 대간(臺諫)이 한 사람도 입참(入參)하는 이가 없자, 모두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김응순(金應淳)은 과제(科制)를 소상(消詳)히 하기를 청한 것으로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고, 이상지(李商芝)는 김응순을 신구(申救)하였기 때문에 역시 파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5일 임진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준천 당상(濬川堂上)과 오부의 방민(坊民)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도랑을 파내는 일절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니 한번 호령하여 시행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나, 이런 등속의 큰 역사는 즉위(卽位)한 뒤에 처음 있는 일이다.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한 후에 음식이 달갑지 아니하고 잠자리도 편치 못하였으니, 역시 너희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사의 행진(行陣)하는 것과 달라서 비록 친히 판삽(版鍤)172)  을 잡고 여러 사람을 용동(聳動)하려고 하나,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년 봄에 비록 시역(始役)을 하더라도 지금 미리 정리한 뒤에 이 일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미리 성책(成冊)을 받을 것 같으면 부예(部隷)와 임장(任掌)들이 반드시 임의로 조종할 것이니, 너희들이 먼저 임장과 부예에게 곤욕을 받을 것이고 다음으로 나라의 역사(役事)에 곤욕을 받을 것이다. 만약 분명히 깨우쳐 효유(曉諭)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한갓 백성들을 저버리는 것일 뿐이 아니라 역시 오르내리시는 영령을 저버리는 것이다. 너희들은 역시 석년(昔年)의 유민(遺民)이니, 이 말을 들으면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너희들이 일하러 가고자 하는 자는 자원하여 해당 부(部)에 성책하고 나에게 아뢰면 그 많고 적은 것을 보고 그 임금의 정성스럽고 정성스럽지 못한 것과 그 백성의 즐거워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각기 생각한 바를 진달하고 억지로 따르거나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하니,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어찌 불편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자원하여 성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듣고 매우 놀라고 슬퍼하며 성성각(惺惺閣)에서 승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봉조하 김재로는 지난날의 구신(舊臣)인데, 30년 동안 원보(元輔)173)  로 있다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으니, 슬프고 애석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4일 동안 성복(成服)한 뒤에 원량(元良)을 거느리고 친히 그 집에 친림(親臨)할 테니, 이로써 분부(分付)하라. 월름(月廩)은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도록 하며, 대신(大臣)의 부인(夫人)은 사체가 다른 사람보다 다르니, 기력이 다하여 지쳤음을 알 수 있다. 원기를 붙드는 약제를 약원(藥院)으로 하여금 수송(輸送)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재로의 자(字)는 중례(仲禮)이고, 청풍(淸風) 사람으로, 고 상신(相臣) 김구(金構)의 아들이다. 젊어서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였는데, 청렴 검소하고 박람(博覽)하였으며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사우(士友)들의 추중하는 바가 되었다. 해서(海西)와 영남(嶺南)의 감사(監司)를 역임하였고, 양전(兩銓)을 거쳐 마침내 태부(台府)에 들어갔으며, 융성(隆盛)한 때를 만나 30년 동안 원보(元輔)로 있다가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다. 집에서는 부지런하였고 나라의 일을 잠시도 잊어버리지 않았으니, 재상(宰相)의 기풍이 있다고 이를 수 있다. 단지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과 함께 탕평(蕩平)의 주인(主人) 노릇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로써 기롱을 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민백상(閔百祥)이 여러 번 해직(解職)을 바라므로, 특별히 체직(遞職)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김 봉조하(金奉朝賀)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으니 지난날의 구신(舊臣)은 단지 유척기(兪拓基)·조재호(趙載浩) 두 대신(大臣)만 남았는데, 강교(江郊)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즉시 입성(入城)하라는 일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諭示)를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6일 계사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임위(任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의 상(喪)에 임하려고 하자, 대신(大臣) 및 약원(藥院)·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정섭(靜攝) 중에 친림(親臨)하여 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다투어 간하므로, 임금이 그 명을 정지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 제사하도록 하였다. 초토(草土)174)   중에 있는 신하 김치인(金致仁)이 상서하여 대조(大朝)께 도달(導達)하고 친림(親臨)하겠다는 명을 정지하도록 하라고 청하자, 임금이 이를 취하여 보고 인하여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경(卿)의 글을 보니, 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상심하고 슬퍼하던 중에 경의 부친을 보는 것과 같다. 아! 30년이 지금은 한 꿈과 같으니, 옛날을 추억하건대, 창회(愴懷)가 더욱 간절하다. 정성껏 진달한 바는 특별히 따르도록 힘써서 구원(九原)175)  에 있는 경의 부친을 위로하고, 효자의 지극한 정성을 펴도록 한다. 특별히 경의 글에 답(答)하여 친림하여 보는 것을 대신하니, 글과 친림하는 것이 어찌 다르겠는가? 모름지기 이 답서와 수서(手書)를 가지고 경의 부친이 염습(殮襲)하기 전에 나아가 고유(告諭)하도록 하라. 아! 이 회포가 비록 간절하나 구원에서는 다시 살아나기 어렵다. 그가 이미 고종명(考終命)을 하였으니, 거의 유감이 없겠구나!"
하였다.

 

10월 18일 을미

임금이 극수재(克綏齋)에 나아가 강서원(講書院)의 관원(官員) 박성원(朴聖源)을 소견하고 말하기를,
"여항(閭巷) 사이에 민사(民事)의 질고(疾苦) 같은 것은 문의(文義)로써 언급(言及)하여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강학(講學)이란 저절로 이것이 여사(餘事)이니, 먼저 일신상의 행동 거지에 나아가 일을 따라서 규정(規正)하는 것이 제일의 의(義)가 될 것이다. 만일 〈머리에〉 쓴 모자가 조금이라도 바르지 아니하면 역시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호주집(湖洲集)》176)  에 대한 소지(小識)를 짓고, 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쓰도록 명하였다.

 

10월 20일 정유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정언 한필수(韓必壽)가 오늘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을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청하자, 하령(下令)하기를,
"모두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무술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으며, 달은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고, 또 석강(夕講)하였다.

 

임금이 오부(五部) 관원을 불러서 자원하여 부역에 나아가겠다는 사람의 성책(成冊)을 들여오도록 하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름을 내시(內侍)라고 하며 동부(東部)에 사는 자는 한 사람도 자원하는 자가 없었다. 교화(敎化)가 중관(中官)177)  에게는 행하여지지 않았으니, 마음이 스스로 부끄럽구나."
하였다.

 

10월 23일 경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도랑파는 일에〉 자원한 자의 다소를 묻자, 구선복(具善復)이 말하기를,
"지금 7, 8천에 이르렀으니 얼마 안가서 1만 명을 넘을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25일 임인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고 봉조하(奉朝賀) 〈김재로가〉 30년 동안 원보(元輔)로 있다가 지금 이미 작고(作故)하였으니, 경(卿)을 보면 더욱 슬픔을 깨닫겠다."
하였다. 김상로가,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장문(狀聞)으로 재상(災傷) 10만 결(結)을 가하기를 청하였고, 충청 감사(忠淸監司)의 장문으로 재상 7천 결을 가하기를 청하였으며,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문으로 재상 4천 결을 가하기를 청하였고,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장문으로 재상 3백 결을 더 지급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다시 교동 수군 절도사(喬桐水軍節度使)의 장문으로 경진청(京賑廳)의 쌀 1백 50석(石)과 본사(本司)에 있는 바 부조목(赴操木) 10동(同), 돈 3백 냥과 기내(畿內) 부근 고을의 상진곡(常賑穀) 5백 석을 특별히 획급(劃給)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0월 27일 갑진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지평 고몽성(高夢聖)이 상서하여 귀양간 죄인 김시찬(金時粲)을 방면(放免)하도록 청하고, 또 논하기를,
"이조 참판 윤동도(尹東度)를 주의(注擬)할 때에 물정(物情)이 만족해 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견책(譴責)을 시행하도록 하고, 전주 판관(全州判官) 서노수(徐魯修)는 탐람(貪婪)한 일이 많았으니, 파직하도록 청합니다."
하니, 지나치다는 것으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동지(冬至) 삼사신(三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청(河淸)178)  의 보고를 듣고자 하였으나 아득히 소식이 없고, 저 삼전도(三田渡)를 바라다보니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고몽성(高夢聖)을 입시하도록 명하자, 교리 임준(任㻐)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으로 언사(言事)한 자에 대하여 꼭 입시(入侍)하도록 하여 견책(譴責)하는 것은 대각(臺閣)을 우대(優待)하는 도리에 흠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내가 죄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어떠하였는가를 물으려고 한 것이다. 말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최절(摧折)을 할 것 같으면 와서 간(諫)하는 길을 막는 것이다."
하였다. 고몽성이 입시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서노수(徐魯修)는 무슨 일이었던가?"
하니, 고몽성이 말하기를,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만, 감사(監司)가 이방(吏房)을 여러 번 다스려서 그로 하여금 올라가도록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네가 자현(自現)179)  하는 것이다."
하자, 고몽성이 말하기를,
"황공함이 막심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공함이 막심하다면 대각의 체면을 무너뜨리고 손상시킴이 여지(餘地)가 없으니 조선(朝鮮)은 망한다고 이를 만하다. 서노수를 해부(該府)에 명하여 잡아다 문초하고 공초한 내용을 가지고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8일 을사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겸하여 제술(製述) 시험을 행하였으며, 윤승렬(尹承烈)·홍귀서(洪龜瑞)·최경유(崔慶裕)에게 급제를 내렸다.

 

부수찬 정광한(鄭光漢)이 아뢰기를,
"고몽성이 대간(臺諫)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무너뜨렸으니, 청컨대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서용(敍用)하지 않는 율(律)을 시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사헌부의 신하가 본래 쇠로(衰老)한 사람으로서 등연(登筵)하여 주대(奏對)한 것이 대간(臺諫)의 체모에 손상이 되었으니, 직책이 유신(儒臣)에 있어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는 것이 정히 사리에 합당하다.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언사(言事)한 대신(臺臣)을 파직하도록 청하였으니, 이것은 언관(言官)의 체모에 손상이 되지 않을 수 없고 한두 번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광한은 본래 명민한 사람인데 어찌 언관을 우용(優容)하는 도리를 모르겠는가마는, 도리어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윤동도와 더불어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며, 사사로움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5책 9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사헌부의 신하가 본래 쇠로(衰老)한 사람으로서 등연(登筵)하여 주대(奏對)한 것이 대간(臺諫)의 체모에 손상이 되었으니, 직책이 유신(儒臣)에 있어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는 것이 정히 사리에 합당하다.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언사(言事)한 대신(臺臣)을 파직하도록 청하였으니, 이것은 언관(言官)의 체모에 손상이 되지 않을 수 없고 한두 번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광한은 본래 명민한 사람인데 어찌 언관을 우용(優容)하는 도리를 모르겠는가마는, 도리어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윤동도와 더불어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며, 사사로움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10월 29일 병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소견(召見)하고 봄이 돌아온 후에 역사(役事)를 시작하되 삼공(三公)으로써 구관(句管)하도록 하고 다섯 곳으로 도청(都廳)을 나누어서 무신(武臣)으로써 택차(擇差)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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