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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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정미

객성(客星)이 희미하게 천균성(天囷星) 위에서 나타났다.

 

11월 2일 무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준천 도청 낭청(濬川都廳郞廳)을 소견(召見)하고 소회(所懷)를 물었다.

 

소대(召對)를 행하라고 명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형조 판서를 소견하고 살옥인(殺獄人)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11월 3일 기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11월 4일 경술

조정(朝廷)에서 동지 정후(冬至庭候)를 행하였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陽)은 아래에서 올라오고 해는 위에서 길어져 하늘의 운행이 다시 시작되는데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지(冬至)의 아름다움을 맞이함은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윽이 들으니, 이연(离筵)180)  에서 《주역(周易)》을 강하여 예심(睿心)을 개발(開發)하면서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반복하기를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양(陽)이〉 다시 소생하는 날에 복괘(復卦)의 뜻을 강하겠으니 저하(邸下)께서 시험삼아 듣도록 하고서 대저 오음(五陰)이 바야흐로 사라져 가고 미미한 양이 비로소 생겨나니 이것은 천심(天心)이 회복되는 것이고, 모든 욕심이 가라앉거나 물러나고 선단(善端)이 처음으로 싹트니 이것은 인심(人心)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천심의 회복은 비바람으로써 윤택하게 하고 이슬과 서리, 생물(生物)하고 성물(成物)하는 것이 모두 한 기운에서 시작이 되니, 문왕(文王)이 이른바 〈양(陽)이〉 와서 회복이 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인심의 회복은 보존하면 인의(仁義)가 되고 발산(發散)하면 충신(忠信)이 되어, 제몸을 다스리고 타인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한 생각에서 단서(端緖)가 되는 것이니, 주공(周公)이 이른바 멀지 않아 〈양이〉 회복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천심은 망령됨이 없으나 인심은 하고자 함이 있기 때문에 〈양(陽)이〉 와서 회복되는 경우는 출입을 할 때에 질병(疾病)이 없고 친구가 와도 허물이 없는데, 멀지 않아 〈양(陽)이〉 회복되는 경우는 잃기를 자주 하여 마침내 자주 회복하는 위태로움이 되는 것이니, 상하(上下)를 부앙(俯仰)하고 동정(動靜)을 관통(貫通)함에 있어서 한 덩어리 자연(自然)의 《주역(周易)》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서(易書)》에 기재된 바의 회린(悔吝)과 휴구(休咎), 우우(憂虞)와 득실(得失) 같은 데 이르러서는 특별히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점(占)괘에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저하께서 한 생각의 착한 것은 곧 자시(子時) 반쯤에서 처음으로 생겨나는 양(陽)과 같은 것이니, 저하께서 앞으로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일에 합당하게 하는 자연의 역리(易理)를 구할 것인지, 그렇지 않고 단지 그 명의(名義)만 알려고 하고 훈고(訓詁)만을 깨달아서 점을 치는 역리만을 구할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뒤의 설을 경유할 경우에는 이것은 옛사람의 조박(糟粕)181)  이지 《주역》의 깊은 뜻이 아니며, 앞의 설을 경유할 경우에는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생각하거나 말하며 행동하는 사이를 반성하며 관찰하여 《주역》의 이치를 체득하는 방법에 뜻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주역》의 이치를 체득하는 데는 법도가 있으니 먼저 이치를 밝혀야 하며, 이치를 밝히는 데는 법도가 있으니 먼저 인(仁)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을 구할 것인가?’ 하면 곧 《주역》의 괘(卦)된 자체가 인(仁)뿐입니다. 괘획(卦畵)의 삼효(三爻)는 목(木)의 생수(生數)이고 괘위(卦位)의 팔괘는 목의 성수(成數)이니, 그 삼효를 두 번 하여 육효가 됨에 이르러서도 역시 목의 생수이고, 팔괘를 여덟 번 곱하여 육십 사괘가 되는 것 역시 목의 성수입니다. 그래서 목은 시기로 보면 봄이 되고 덕(德)에 있어서는 인(仁)이 되며, 천지에 가득찬 것이 생물의 봄이 아닌 것이 없고, 온 괘효(卦爻) 역시 생물의 인(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에 인이 있은 뒤에야 괘효의 인을 알 수 있습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황종(黃鍾)182)  은 토성(土聲)이니 토덕(土德)은 후하기 때문에 오직 덕성(德性)이 깊고 후한 자라야 황종의 소리를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인한 연후에야 역리를 아는 것도 그 이치가 역시 이런 것을 말미암은 것입니다. 저하께서 만일 괘효의 인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인을 저하의 밝은 마음에서 구하여, 안정이 된 경우 욕심을 막기를 땅이 닫힌 것같이 하고, 움직일 경우 만물을 기르기를 하늘이 열린 것같이 하여, 앙연(盎然)히 정성을 다하고 온연(溫然)히 화하게 되면 포희(庖犧)183)  를 말하고 공자(孔子)와 주공(周公)을 이야기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곧 일신(一身) 속에서 《주역》의 묘리(妙理)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매우 절실하니,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6일 임자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종부시(宗簿寺)에 나아가 선원각(璿源閣)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이어 종친부(宗親府)에 나아갔다가 환궁(還宮)하는 길에 고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의 집을 바라보고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효장묘(孝章墓)184)  ·의소묘(懿昭墓)185)  ·연령군방(延齡君房)·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집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11월 8일 갑인

황경원(黃景源)을 대사헌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대사간으로, 김선경(金選慶)을 호조 참의로, 박도원(朴道源)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이사관(李思觀)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박재하(朴載河)를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문(狀聞)을 가지고 급재(給災) 1천 5백 결(結)을 더하여 주도록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신만(申晩)이 병조(兵曹) 분금위(分禁衛)의 예(例)에 의거하여 광주 부윤(廣州府尹)과 수어사(守禦使)를 각각 설치하고 정경(正卿)으로 택차(擇差)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김상로에게 물은 뒤에 그대로 따랐다.

 

고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에게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시호(諡號)의 은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이윤성(李潤成)을 통제사로, 윤태연(尹泰淵)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임상원(林象元)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사관(李思觀)은 사람됨이 용렬한데 외람되이 도백(道伯)의 책임을 맡겨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손상이 있게 되었으니, 가히 애석하지 않겠는가? 윤태연(尹泰淵)은 무변(武弁) 중에도 탐도(貪饕)하여 불법(不法)을 저지른 사람이니, 서토(西土)의 백성들이 어찌 피해를 당하지 않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5책 9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사관(李思觀)은 사람됨이 용렬한데 외람되이 도백(道伯)의 책임을 맡겨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손상이 있게 되었으니, 가히 애석하지 않겠는가? 윤태연(尹泰淵)은 무변(武弁) 중에도 탐도(貪饕)하여 불법(不法)을 저지른 사람이니, 서토(西土)의 백성들이 어찌 피해를 당하지 않았겠는가?"

 

왕세자(王世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해서(海西) 지방에서 우심하게 재상(災傷)을 당한 고을의 결전(結錢)은 특별히 탕감하고, 그 다음 고을은 절반을 감할 것이며, 경기(京畿) 고을에도 절반으로 감하고, 교동(喬桐)에는 전부를 감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0일 병진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므로 백관(百官)이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진하(陳賀)하였다.

 

11월 11일 정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가 충장위 장(忠壯衛將)과 충익위 장(忠翊衛將)의 두 장수는 오위 장(五衛將)의 예(例)로써 앞으로는 당연히 내금위 장(內禁衛將)을 삼을 자이니, 공궐 위장(空闕衛將)에 의차(擬差)하여 체아직(遞兒職)을 삼도록 규식을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3일 기미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장문(狀聞)으로 나리포(羅里浦)에 저축한 쌀 3천 석을 한정하여 특별히 획급(劃給)하도록 하고, 종자 콩 1천 석도 또한 구획(區劃)하도록 앙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하교하기를,
"나리포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본도(本島)를 위한 것인데, 어찌 남은 것을 아낄 것인가? 모두 장청(狀請)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고, 금년 세공마(歲貢馬)186)  를 바치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황경원(黃景源)이 소회(所懷)로써 진면(陳勉)하자,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말하기를,
"신이 며칠 전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능(陵)에 행행(幸行)했을 적에 말을 타신 일로 진계(陳戒)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의릉(懿陵)을 전배(展拜)할 때에 전하께서 관왕묘(關王廟)에 들려 갑주(甲胄)를 갖추어 군례(軍禮)를 행하고 돌아왔는데, 바야흐로 안으로 위급함을 알리는 경보(警報)가 없거늘, 인주(人主)가 몸소 갑주를 입은 것은 친히 실천하여 동궁(東宮)을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을 의금부(義禁府)에서 추문(推問)하도록 한 것을 원량(元良)에게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으로 하교하였습니다. 아!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전하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으로 의칙(儀則)을 삼는데, 전하께서 스스로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고 군려(軍旅)에 종사(從事)함을 기뻐하여 심지어는 갑주를 입고 말을 달리니, 무엇으로 동궁과 세손(世孫)에게 〈모범을〉 보이겠습니까? 또 관우(關羽)가 아무리 충의(忠義)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위가 한(漢)나라 제후(諸侯)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관우로 하여금 친히 전하를 뵈옵는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빈주(賓主)의 예(禮)를 쓰는 것이 합당할 터인데, 전하께서 어찌하여 갑주를 갖추어 입고 관 우 앞에서 군례를 행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당시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가 한 사람도 그것을 불가하다고 의논한 자가 없었으니, 신은 진실로 개연(慨然)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일전에 종친부(宗親府)에 들렸을 적에 지나는 길이 아주 좁아서 시위(侍衛)가 제대로 대열(隊列)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마땅히 해부(該部)로 하여금 길을 깨끗이 치우게 한 뒤에 행행(幸行)을 하였어야 옳았습니다. 어찌 지극히 좁은 길로 갑자기 들른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근년(近年) 이래로 성상의 마음이 폭발(暴發)하는 것이 전날보다 더 심하고, 또 아무리 중대한 조정(朝廷)의 대사라 하더라도 대신들에게 물어 보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행하는 일이 왕왕 있으니, 진실로 전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여 천하의 의리(義理)를 열력한 것이 역시 이미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서전》 상서(商書)의〉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의(義)로써 일을 재제(裁制)하고 예(禮)로써 마음을 재제해야 후손(後孫)들에게 남겨 줄 복이 넉넉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성심(聖心)이 발하는 바를 반드시 예로써 재제한 뒤에야 움직이고 고요하며 말하고 일하는 사이에 하나도 도(道)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후손들에게 남겨 줄 것이 넉넉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마땅히 마음에 두고 척려(惕慮)하겠다."
하였다.

 

사간 이후달(李厚達)이 아뢰기를,
"언로(言路)의 막힘이 요사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언로는 나라의 혈맥인데, 혈맥을 막고서도 나라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청컨대, 언로를 열고 와서 간하는 자를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후달이 말하기를,
"유당(柳戇)과 윤시동(尹蓍東)에게 부첨(付籤)187)  을 한 것이 해가 벌써 오래 되었는데, 어찌 참작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청컨대 환수(還收)하도록 하여 청화(淸化)를 빛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의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으로 점하(點下)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봉조하 김재로는 굳이 문임(文任)을 사양하였으니, 내가 이미 수말(首末) 두 끝 글자로 점하하여 숭상(崇尙)하는 뜻을 이루도록 하였다. 이것도 역시 지우(知遇)하는 뜻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박상철(朴相喆)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11월 14일 경신

헌납 박치륭(朴致隆)이 상서하여 김시찬(金時粲)을 방면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5일 신유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의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11월 17일 계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감귤을 나누어 주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이택수(李澤遂)·홍검(洪檢)을 뽑아 모두 급제(及第)를 하사(下賜)하고, 이튿날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하였다.

 

간원 【정언 홍술해(洪述海)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고 부사(府使) 심익창(沈益昌)은 유독 법망(法網)에서 벗어났으나 손형좌(孫荊佐)와 심정옥(沈廷玉)의 공초에서 정절(情節)이 모두 드러났고 공안(公案)이 이미 갖추어졌는데 큰 괴수만 홀로 누락되었으니, 청컨대 빨리 추탈(追奪)하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 참판 오수채(吳遂采)는 그의 아들로서 한세량(韓世良)의 손서(孫婿)를 삼았으니, 청컨대 관직(官職)을 삭탈하소서. 그리고 청컨대 김시찬(金時粲)을 특별히 귀양에서 방면(放免)하소서. 설서(說書) 홍낙순(洪樂純)은 젊어서 무뢰한이었는데 장성하여 더욱 흉악하고 강퍅하여 병든 아우를 물리쳐 내쫓고 근거없는 말을 주장(譸張)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전 지평 고몽성(高夢聖)은 등연(登筵)하여 주대(奏對)할 적에 대간(臺諫)의 체면을 손상시켰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익창(沈益昌)의 일은 그 죄가 역률(逆律)에 관계되며, 오수채(吳遂采)의 일은 경솔히 율을 적용할 수 없으니, 이런 등속의 일을 내가 품달하지 않고 어찌 가볍게 허락하겠는가? 그리고 김시찬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처분을 내렸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진실로 매우 놀랍다. 고몽성의 일은 상달한 것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을축

대사헌 황경원(黃景源)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간신(諫臣)이 설서(說書) 홍낙순(洪樂純)의 일로써 새로 달사(達辭)를 발(發)하여 심지어 사판(仕版)에서 삭거하기를 청하고, 언행(言行)의 크고 작은 본말(本末)로부터 심술(心術)의 미세한 데까지 미쳐서 논열(論列)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반드시 깊이 헐뜯은 뒤에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홍낙순의 사람 됨됨이가 충신(忠信)하고 돈후(敦厚)하며, 문장(文章)의 아름다움은 당세(當世)에 뛰어났고 풍채의 준수(峻秀)함이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탁월(卓越)하여 일찍이 사림(士林)의 영예(令譽)를 걸머졌고 우뚝히 나라에 그릇이라는 명망이 있었으니, 진실로 훌륭한 선비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간신(諫臣)이 극구 나무라고 헐뜯어서 한 가지도 선행(善行)이 없다고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요사이 조정에서는 기상(氣象)이 아름답지 못하고, 진신(搢紳)들 사이에서는 의심하고 어그러짐이 점점 깊어져서, 노여움이 미치는 바에는 외롭게 행하는 자가 더러 그 후욕(詬辱)을 받고 울분을 가하는 바에는 청수(淸修)한 자도 더러 그 꾸짖음을 당하니, 한낱 홍 낙순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조차 없고, 신의 깊이 염려하는 바는 세도(世道)입니다. 그 경책(警責)하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조금 재억(裁抑)을 가하여 세도를 진정(鎭定)하여야 하겠습니다. 청컨대 정언 홍술해(洪述海)에게 빨리 파직하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요사이 언로(言路)가 적막하고 고요할 때에 홍술해의 말이 지나치거나 지나치지 않는 것을 논할 것 없이, 어제 겨우 대직(臺職)에 나아갔는데 오늘 또다시 이와 같이 차자(箚子)를 진달하니, 내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겠다."
하였다.

 

11월 20일 병인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갔는데, 평시서(平市署) 제조(提調) 홍봉한(洪鳳漢)이 시민(市民)을 인솔하여 들어오자, 하교하여 위로하고 유시(諭示)하였으니, 대개 내를 파는데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자가 무려 1만여 인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제주(濟州)에서 유자(柚子)를 진상한 사람을 소견(召見)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도록 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11월 21일 정묘

객성(客星)이 정수(井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낭성(狼星) 위에 나타났는데, 빛깔은 누런 색이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유신(儒臣) 정광한(鄭光漢)을 보내어 안동(安東)의 살옥(殺獄)을 안핵(按覈)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2일 무진

객성(客星)이 참수(參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나서 옥정성(玉井星)을 범하였는데, 북극성(北極星)과의 거리가 98도였으며, 5경에 천원성(天圓星)을 따라 서쪽으로 잠겨버렸다.

 

간원 【사간(士諫) 이수덕(李壽德)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충청 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앞서 곤임(閫任)에 있을 때 탐도(貪饕)하여 불법(不法)을 저지른 정상은 전후로 감사(監司)를 지낸 신하들이 이미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진실로 범연(泛然)한 풍문에 비교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금번에 옛 자리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라는 명(命)이 비록 때를 씻어 주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재신(宰臣)들의 말이 연중(筵中)에서 거듭 나왔고 서전(西銓)의 장(長)188)  이 주의(注擬)에 대하여 어렵게 여겨 공의(公議)가 불울(拂鬱)하니, 청컨대 개차(改差)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23일 기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189)  을 행하였는데, 형조 판서 김상익(金尙翼)이 말하기를,
"주금(酒禁)을 범하여 술을 빚은 자로서 갇혀 있는 죄수가 지금 무려 1백여 인에 이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정성이 백성들에게 믿음직하지 않기 때문이니, 어찌 심상한 것으로 보겠는가? 3일 동안 감선(減膳)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임금이 감선을 하니, 법관(法官)은 월봉(越俸) 3등을 하고, 오부(五部)의 관원은 잡아다가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4일 경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술해(洪述海)는 무엇 때문에 체차(遞差)하였는가?"
하자,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언사(言辭)가 맞지 않다는 것으로 헌부의 신하들이 체차하도록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이었던가?"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고 부사 김익창(金益昌)을 추탈(追奪)하려는 것과 전 참판 오수채(吳遂采)를 삭탈 관직하려는 것과 홍낙순(洪樂純)을 사판에서 삭거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관(諫官)의 언사(言事)는 이를 써서 반드시 품달을 한 후에 반포(頒布)하도록 하는 것이 곧 정해진 법식인데, 승지가 덮어두고 품달하지 않았으니, 사체가 한심스럽다. 해당 승지를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고, 다시 임금이 말하기를,
"간신(諫臣) 홍술해는 홍계희(洪啓禧)의 아들이다. 쓸 만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말한 바는 협잡(挾雜)이라고 이르겠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고, 이어 삭출(削黜)하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것은 부효(浮曉)하고 조경(躁競)함이 각기 그 주장한 바가 있는 때문이었다.

 

김양택(金陽澤)을 대제학으로, 신사건(申思建)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홍봉한(洪鳳漢)의 진달한 바로 인하여 호남(湖南)의 진상·보미(進上保米) 1천 석을 본도로 하여금 양감(量減)하도록 하라고 우러러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영의정 김상로(金尙魯)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조경(躁競)하여 사람을 탄핵하는 일이 많으니, 이것은 역시 나의 정성이 믿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10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자, 김상로가 환수(還收)하도록 힘써 청하였는데 밤중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니, 당시에 홍술해(洪述海)가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홍낙순(洪樂純)을 논핵(論劾)하였기 때문이었다.

 

심발(沈墢)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5일 신미

객성(客星)이 옮기어 위수(胃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름성(天廩星) 아래에 나타났는데, 빛깔은 황백색이었다.

 

안집(安𠍱)과 이복원(李福源)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홍술해(洪述海)의 대비(臺批)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심익창(沈益昌)·오수채(吳遂采)의 일은 상달한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는 것으로 개하(改下)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지어 내리고 주금(酒禁)을 신칙하도록 하였다.

 

11월 26일 임신

객성(客星)이 위수(胃宿)의 도내(度內)에 있는 천균성(天囷星) 안에 나타났다.

 

설서(說書)        홍낙순(洪樂純)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사적(仕籍)에 오른 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홍술해(洪述海)에게 원한을 맺을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그 원한을 맺었다고 하는 단서만은 온 세상에 시끄럽게 전파된 바입니다. 그러나 신의 경우는 스스로 떠 있는 빈 배[虛舟]와 같이 효효(嘵嘵)한 데 부쳐서 저 풍랑(風浪)이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소멸되도록 맡겨 두었는데, 꾸며서 무함(誣陷)하고 독(毒)을 피우기를 이와 같이 혹독하게 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몇해 전에 박지원(朴志源)이 홍술해의 부자(父子)를 논핵(論劾)한 후에 의심나고 분노함이 크게 확산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묘하게 꾸며대면서 박지원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안면이 익은 자는 그를 원수로 보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신도 역시 박지원과 서로 아는 사이라서 그 중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문객(門客)으로 하여금 말을 퍼뜨리고 공갈을 치며 전설(傳說)이 자자한 데 이르렀지만, 신은 단지 그가 분한 김에 발설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그 정상을 애처롭게 여겨 족히 노여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홍술해가 몸소 앞장서서 마땅히 의심하지 아니할 사람에게 육박(肉博)하여 스스로 마음을 드러내기를 이와 같이 기탄(忌憚)함이 없었습니다. 또 자사(子舍)가 비패(鄙悖)하다고 하는 것 같은 데 이르러서는 지목하는 바가 무슨 일이며, 강규(講規)를 헐뜯었다고 하는데 그 말 역시 사실과 어긋납니다. 다른 사람이 데리고 사는 기첩(妓妾)을 빼앗았다는 말은 신이 본래 데리고 산 기첩이 없었으니, 대체로 그런 사람이 있는 연후에야 빼앗았는지 빼앗지 않았는지를 바야흐로 의의(擬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아우를 내쫓았다는 한마디 말은 윤상(倫常)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가 아무리 신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신이 타고난 운명이 험하고 궁박하여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의지하여 목숨을 도모한 것은 오직 편모(偏母)와 두 아우뿐인데, 불행하게도 둘째 아우는 일찍이 괴질(怪疾)에 걸려 병이 때없이 발작을 하므로 백방으로 침을 맞고 약을 써도 끝내 효험이 없었습니다. 한 의원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깊은 강물을 마시면 격담(膈痰)이 소탕(疏蕩)되어 거의 만에 하나 효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강가에 있는 집으로 옮겨 살게 하여 조섭하고 치료할 계책을 삼았으니, 이와 같은 사실은 한갓 친당(親黨)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온 세상이 모두 함께 듣고 아는 바입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효우(孝友)하는 정성이 위로 통하지 못하여 병든 아우로 하여금 다시 완인(完人)이 되도록 하지 못하고 노모(老母)의 심중에 근심을 끼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이런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저들이 차마 하지 못할 바의 일을 가지고 원한을 갚으려는 구실(口實)을 만들었으니, 홍술해도 역시 부모가 있는 사람으로 하늘로 머리를 두고 땅을 디디고 섰으면서 어찌 차마 이런 등류의 말로 입을 놀리어 다른 사람에게 덮어 씌우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저하께서는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신과 홍술해를 모두 법사(法司)에 내려 허실을 엄히 조사하고 그 죄를 바르게 처단하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입이 닳도록 말해가며 공교롭게 허영(虛影)을 꾸며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나라를 흉하게 하고 가정을 해친다는 말로 끝을 맺었으니, 아! 또한 너무 심합니다. 이런 제목은 옛날에 이른바 거간 대특(巨奸大慝)에게 견준다면 거하거니와, 신은 사적(仕籍)에 오른 지 3년 만에 벼슬이 일명(一命)190)                  을 더하였고, 형세가 고단하여 의지할 장벽(墻壁)도 없는데, 이런 말을 만드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진달하여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홍술해의 아버지는 중신(重臣)인데, 조좌(稠坐)191)                   중에서 수삼(數三) 경재(卿宰)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를, ‘홍낙순이 만약에 대간(臺諫)의 지위에 들어간다면 우리를 탄핵할 말이 낭자할 것이기 때문에 내집 아이가 부득이 먼저 이러한 거조(擧措)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홍술해가 신을 논핵한 것은 대개 근거 없는 말에 동요되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먼저 발동하려는 계획에서 나왔으니, 그 말이 오로지 무함을 일삼은 것이 여기에서 더욱더 드러나 엄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중신을 논핵하였다고 운운한 것은 신이 일찍이 마음에서 싹틔우지도 않았고 입에서 발설(發說)한 적도 없는데, 중신이 어떤 사람에게 얻어듣고서 이러한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교구(交構)192)                  의 무리가 있어서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려 신을 몰래 중상할 계획을 삼으려는 것이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신(臺臣)의 과중(過中)한 말은 내가 벌써 알고 있었다. 마음에 비록 매우 원통하다 하더라도 대간(臺諫)의 체면이 매우 중한 것이니, 어찌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실상을 조사하도록 청할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온당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1월 27일 계유

객성(客星)이 위수(胃宿) 도내(度內)에 있는 천균성(天囷星) 안에 나타났다.

 

11월 29일 을해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성천주(成天柱)를 대사간으로, 윤급(尹汲)을 예문관 제학으로, 민백상(閔百祥)을 호조 판서로, 서지수(徐志修)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승지에게 홍계희(洪啓禧)·홍낙순(洪樂純)의 상서(上書)를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교구(交構)’ 두 글자는 아마도 진신(搢紳)들의 부끄러움이 된다. 비록 함문(緘問)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홍낙순은 나이 젊은 명관(名官)으로서 교구의 설(說)로써 장주(章奏)에 올리고, 홍계희의 경우는 교구의 설로써 도리어 홍낙순을 꾸짖었으니, 모름지기 중신(重臣)의 체모에 흠이 된다."
하고, 모두 파직(罷職)을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30일 병자

전 전라 감사 홍인한(洪麟漢)이 상서하여 서노수(徐魯修)의 선치(善治)한 상황을 변론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고,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신칙(申飭)하는 아래에 양사(兩司)에서 한 사람도 입대(入對)하지 않았으니, 모두 삭직(削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과천현(果川縣)에 공해(公廨)를 수보(修補)할 때에 본현(本縣)의 상진곡(常賑穀) 중에 1백 석을 획급(劃給)하도록 우러러 청하자,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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