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축
밤 일경(一更)에 객성(客星)이 천균(天囷)의 제2성(第二星) 북쪽에 옮기어 나타났는데, 형색이 점점 희미해졌다.
김한구(金漢耉)를 금위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는데, 그때에 육상묘(毓祥廟) 안에 장막을 도적질한 변괴가 있었다. 임금이 곧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포도 대장이 도적을 잘못 다스린 것으로 파직(罷職)를 하도록 명하고, 구선복(具善復)을 포도 대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도적을 염탐해 잡도록 하였으며, 수직(守直)하는 중관(中官)과 수복(守僕)은 해부(該府)와 해조(該曹)로 하여금 감단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구선행(具善行)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여 친히 고유제(告由祭)를 행하였다.
12월 2일 무인
객성(客星)이 희미하게 천균성(天囷星) 아래에 나타났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을 역림(歷臨)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러한 때에 이목(耳目)의 관원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홍준해(洪準海)를 대사간으로, 한필수(韓必壽)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을 잡는 것을 본 뒤에야 마땅히 환궁(還宮)하겠다."
하자,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힘껏 〈환궁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경(二更)에 가서야 환궁하였다. 사경(四更)에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중관(中官)인 현창(玄昶) 등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일차 형신(刑訊)을 하자 직초(直招)를 하였다.
정형복(鄭亨復)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삼았다.
12월 3일 기묘
객성(客星)이 천균성(天囷星) 위에 나타났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죄인 오무득(吳無得) 등을 국문하였다. 죄인 현창(玄昶)은 사형(死刑)을 감하여 섬에 유배(流配)하고, 민득성(閔得成)·이정익(李廷益)은 원배(遠配)하였으며, 오무득(吳無得)은 특별히 풀어주고, 오동(五同)은 거제부(巨濟府)의 노(奴)를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대신(臺臣)이 현창에게는 일률(一律)193) 을 쓰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4일 경진
밤에 객성(客星)이 희미하게 천균성(天囷星) 위에 나타났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12월 5일 신사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에게 권솔(眷率)을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2월 6일 임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에 나아가 재숙(齋宿)하고 밤에 납향 대제(臘享大祭)를 행하였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염탐하여 잡을 때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의 집에 한 개의 포장(布帳)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날 잃어버렸던 육상궁(毓祥宮)의 포장인 듯하며, 그 사람은 곧 김석태(金碩泰)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개문(開門) 후에 마땅히 친히 국문(鞫問)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7일 계미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죄인 김석태(金碩泰)를 국문(鞫問)하고, 현창(玄昶)을 다시 잡아다가 국문하여 진술을 들은 후에 풀어주었다.
12월 8일 갑신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김석태(金碩泰)·김수태(金壽泰)를 국문하였는데, 김석태는 2차 형문(刑問)을 가하자 낱낱이 직초(直招)하기를, ‘담장을 넘어 육상묘(毓祥廟) 안에 들어가 장막을 훔쳐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지난날 현창(玄昶)은 〈형장의 고통을 못이겨〉 거짓 승복(承服)함이 적실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현창과 민득성(閔得成) 등을 찬도(竄島)하라는 명(命)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12월 9일 을유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죄인 김석태 등을 국문하였다.
북도 암행 어사(北道暗行御史) 이담(李潭)이 장계(狀啓)하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익량(鄭益良)은 탐도(貪饕)하여 불법(不法)을 저질렀으니 우선 봉고 파출(封庫罷黜)하고 그 죄상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단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정익량은 병영(兵營)에 압송(押送)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신(帥臣)은 면간 교대(面看交代)194) 하는 것이 바로 전례(前例)이며, 또한 병영(兵營)에 압송(押送)하는 것은 곧 전례에 없던 일이니, 암행 어사 이담을 우선 추고(推考)하도록 하고, 병사 이은춘(李殷春)이 전례에 따라 수보(受保)한 것에 대하여서도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포졸(捕卒)에게 명하여 주금(酒禁)을 범한 자를 규포(窺捕)할 때에 현장에서 잡은 두 사람은 특별히 투비(投畀)의 율을 시행하고, 이 뒤로는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추적하여 잡도록 하되, 주금을 범하여 술을 빚은 자는 추조(秋曹)로 이송(移送)하도록 하였다.
12월 10일 병술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친히 죄인 김석태(金碩泰)·김수태(金壽泰)를 국문하였는데, 김석태는 물고(物故)되었고, 김수태는 진도군(珍島郡)에 유배(流配)하며, 민노미(閔老味)는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영가현(永嘉縣)의 일로써 어제(御製)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늘 흠탄(欽歎)을 하였다. 매양 이런 일로써 그 피곤함을 꺼리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친히 문초(問招)한 것은 흑백(黑白)을 가리고자 하는 데 뜻이 있었다. 이번에 현창(玄昶)이 맹랑(孟浪)하게도 자복을 하여 하마터면 정법(正法)을 할 뻔하였다. 비록 관전(寬典)을 베풀었지마는 그가 당초에 자복한 것은 형신(刑訊)을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형틀[桁楊] 아래서 무엇을 구한들 얻어내지 못하겠는가?’라는 것이니, 나도 모르게 두려워진다. 이번에도 자세히 조사하지 않아 김수태(金壽泰)·민노미(閔老味)·문임금(文任金)이 모두 곤장 아래서 물고되었다. 아! 항상 살피고 조심하여도 오히려 현창과 같은 일이 있는데, 외방(外方)에서의 동추(同推)195) 는 이것을 미루어 보아 더욱더 두렵다. 아! 여러 도의 도신(道臣)들은 나의 두려워하는 뜻을 체득하여 모든 중한 죄수들에게 십분 신중히 하도록 하라. 그리고 영장(營將)들의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 엄하고 혹독함이 특별히 심하니, 주리를 틀거나 곤장을 함부로 치는 것은 십분 의심이 없은 연후에야 시행하여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 죄에 걸리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정해
정언 한필수(韓必壽)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김석태(金碩泰)의 일은 그의 범한 죄상이 참으로 망측스럽습니다. 그가 연하(輦下)의 친병(親兵)으로서 감히 망측한 일을 행하였으니, 그 평상시 엄하게 잘 단속하지 못한 죄는 해당 장신(將臣)이 진실로 면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그런데 단지 파직(罷職)의 율만 시행하였으니, 비록 대조(大朝)께서 공로를 세워 속죄(贖罪)하라는 성스러운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잡아들인 공로가 마침내 그 검속(檢束)을 잘하지 못한 실수는 보상(報償)하기에는 부족하니 견책(譴責)하여 파직하는 벌은 너무 경헐(輕歇)한 데 관계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은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또한 죄인 김석태(金碩泰)가 전후로 도적질한 실상은 엄히 신문(訊問)하는 아래에서 모두 드러났으니, 장막을 훔친 한 가지 일만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대, 이번에 범한 바가 비록 자질구레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포도 대장이 도적을 잘못 다스린 실수는 여기에서 더욱더 드러났으니, 역시 파직만 하고 그칠 일이 아닙니다. 신은 전 금위 대장 구선복(具善復)에게도 역시 삭직의 율을 시행하여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과장(科場)이 엄하지 못한 것이 근래와 같은 때가 없었는데, 이동옥(李東玉)의 일에 이르러서 더욱 극심합니다. 이것이 단지 과적(科賊)의 가장 심한 자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망명(亡命)을 한 중죄(重罪)를 범하였는데도 그날 추판(秋判)196) 이 친히 연교(筵敎)를 받고서 즉시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나라의 기강에 관련되며 직무(職務)를 유기(遺棄)한 죄에서 모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신은 전 형조 판서 김상익(金尙翼)에게 파직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공조 참의 윤득징(尹得徵)은 나이가 많고 질병이 고질화되어 분주히 근무(勤務)하더라도 스스로 힘쓸 형세가 없으니, 신은 체개(遞改)하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태천 현감(泰川縣監) 조종렴(趙宗濂)은 서경(署經)을 한 뒤에 대신(臺臣)이 이미 인혐(引嫌)하였다면 그가 자처(自處)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단코 억지로 부임(赴任)하기 어려울 터인데, 염치를 무릅쓰고 부임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거리낌이 없으니, 신은 척파(斥罷)하는 율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무장 현감(茂長縣監) 고신겸(高信謙)은 탐욕이 많고 비루하여 염의가 없으며, 읍비(邑婢)를 두루 간음하고 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니, 신은 삭직하여 태거(汰去)하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두운(李斗運)과 함평 현감(咸平縣監) 전진상(田晉祥)은 탐욕이 많고 비루하며 불법(不法)을 저지른 실상이 지난번 대장(臺章)의 탄핵(彈劾)에서 이미 드러났는데도 옛 습성을 고치지 아니하고 더욱 방자하게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으니, 신은 두 고을 현감 역시 파출(罷黜)하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두 장신(將臣)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처분을 하였으니 진달한 바가 너무 지나치며, 추판(秋判)의 일은 진달한 바가 옳으니 그대로 시행하되 해조(該曹)에 엄히 신칙하여 기필코 체포하도록 할 것이며, 윤득징(尹得徵)의 일과 조종렴(趙宗濂)의 일은 진달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그 이외에 다른 수령(守令)에 대해서는 먼 지방에서의 풍문(風聞)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2월 13일 기축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새벽에 고안제(告安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환어(還御)하여 삼군(三軍)을 위유(慰諭)하고, 이어서 친히 향(香)을 전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12월 15일 신묘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황인검(黃仁儉)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친히 각도(各道)의 전최(殿最)를 개탁(開坼)하는 데 임하였다.
한림(翰林) 신익빈(申益彬)이 아뢰기를,
"근래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부당(不當)하게 들어간 자가 역시 많으니, 가을 방방(放榜)을 기다려 거행(擧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한림(翰林) 김재순(金載順)에게 묻자, 김재순이 말하기를,
"하번(下番)의 말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한림 권점이 한림의 천거가 되었단 말인가?"
하고, 모두 파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6일 임진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관서(關西)에 있는 별향고(別餉庫)의 돈 3만 냥과 무명 1백 동(同)과 전세(田稅)로 거둔 쌀 2만 석을 호조(戶曹)에 획급(劃給)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이후(李)가 전라 감영(全羅監營)으로 하여금 《소학(小學)》 및 기타 경적(經籍)을 인출(印出)하여 여산(礪山) 죽림 서원(竹林書院)에 보내 주어 사림(士林)을 흥기(興起)시키고 그것으로 강학(講學)을 하는 자료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王世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경기 암행 어사 김응순(金應淳)이 복명(復命)을 하였으니, 대개 주금(酒禁)을 살피는 일이었다.
12월 20일 병신
김범로(金範魯)를 충청 수사로 삼았다.
대사헌 이응협(李應協)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언사(言事)를 한 두 대신(臺臣)이 오히려 아직 고적(錮籍)에 실려 있고, 나이 많은 유신(儒臣)은 먼 남방의 거친 땅에 귀양을 갔으니, 말을 하면 시휘(時諱)가 되어 입은 교칠(膠漆)을 한 것과 같이 다물었고, 대단(臺端)에서의 한 걸음을 위태로운 함정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사에는 믿음직하고 곧은 사람을 간택[簡擢]하고, 충성으로 규정(規正)하는 자를 장후(奬詡)하며, 곧은 말을 다투어 올리게 하여 임금의 결흠(缺欠)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글의 내용이 사체가 매우 미안하다."
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12월 21일 정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영남 암행 어사 정광한(鄭光漢)이 복명(復命)하여 봉화 현감(奉化縣監) 이익주(李翊胄)를 파직하도록 명하니, 그가 옥사(獄事)를 안찰할 때에 매우 혼류(昏謬)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어사 김응순(金應淳)이 아뢴 바에 의하면, 김포 군수(金浦郡守) 김근행(金謹行)이 지성(至誠)으로 학문을 권장(勸奬)하였다고 하니, 《소학(小學)》 1부를 특별히 본군(本郡)에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용동(聳動)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3일 기해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2성(第二星) 위에 나타났고, 유성(流星)이 장성(張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를 행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글을 읽되 정신은 다른 데 있으니,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는 탄식이 있다. 이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욕심이니, 이른바 욕심이라는 것이 한갓 식욕과 색욕만은 아닐 것이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김응순(金應淳)이 말하기를,
"기쁨과 분노는 중도(中道)를 얻기가 어렵다고 하나,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분노가 더욱 심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분노를 내는 것도 사사로운 것이니, 이것도 역시 욕심이다."
하였다.
12월 24일 경자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2성(第二星) 위에 나타났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제도(諸道)의 각가지 오래 된 포흠(逋欠)을 특별히 정봉(停捧)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충청 감사(忠淸監司)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영진곡(營賑穀) 6천 석을 획급(劃給)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고, 김상로가 정조(正朝)에 진하(陳賀)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국 당상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균역청(均役廳)에서 일찍이 세미(稅米)를 거둘 때 무역(貿易)하여 얻은 모곡(耗穀)이 있으므로, 지금 호조(戶曹)에서 이것 중에 소미(小米)197) 2만 석을 얻으려고 청하였는데, 균역청에서는 곡식을 무역하여 관서(關西)에 머물러 두고 해마다 모곡을 취하는 것이 유익한 바가 없지 않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과 선혜청 당상에게 하순(下詢)한 뒤에 허락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2월 25일 신축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7성(第七星)에 나타났다.
12월 26일 임인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8성(第八星)에 희미하게 나타났고, 유성(流星)이 소미성(少微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지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신사철은 지난날의 구신(舊臣)으로 몇해 동안 기로소[耆社]에 있었는데, 지금 이 보고를 들으니, 슬픔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관재(棺材)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려 보내도록 하고, 무릇 여러 가지의 일들을 기로소 신하에게 하는 전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사철(申思喆)은 곧 상신(相臣) 신만(申晩)의 아버지인데, 젊어서 문과(文科)에 올라 평안 감사(平安監司)·호조 판서 등을 역임(歷任)하였다. 재서(才諝)와 문학이 비록 밖에 드러난 것은 없었으나 사람됨이 즐겁고 화평하여 타물(他物)을 해롭게 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나이 80을 넘었고 두 아들이 모두 공경(公卿)에 이르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완복(完福)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옛부터 나례(儺禮)198) 가 있었으니, 이것은 공자(孔子)께서 ‘시골 사람들이 나례를 〈행할 때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섬돌에 서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이 예(禮)는 주(周)나라 때부터 있었다. 지난 갑술년199) 에 제거하도록 명하였고, 또 춘번(春幡)과 애용(艾俑)200) 의 등속이 있어 그 유래가 오래 되었는데, 석년(昔年)에 역시 제거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그러나 단지 세말(歲末)에 행하는 정료(庭燎)201) 가 있는데, 한갓 공인(貢人)에게 폐단을 끼칠 뿐만이 아니라 푸른 대나무를 사용하였다가 일시에 태워버리므로 내가 역시 지나간 해의 성의(盛意)를 따라 그것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교년(交年)202) 과 경신(庚申)203) 같은 것은 본래의 일을 알지 못하여 승선(承宣)에게 명하여 상고(詳考)하도록 하였더니, 비록 고문(古文)에 있었으나 모두 정도(正道)에 어긋나 부엌신에게 아첨하는 데204) [媚竈]에 가깝다. 옛날에 조변(趙抃)205) 은 하루 동안 행한 바를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였다고 하는데, 혹 이런 뜻을 모방하여 일년 동안에 행한 바를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고 고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가하겠지만, 만약 날마다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옥루(屋漏)206) 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어찌 신(神)에게 기도한 일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비록 부엌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것은 복(福)을 구하기를 사특한 데 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신(庚申)에 이르러서는 주공(周公)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 뜻으로써 잠을 자지 아니한다면 어찌 특별히 경신일(庚申日)뿐이겠는가? 더러는 두려워하여 과실을 사뢴다 하더라도 역시 부엌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일 것이다. 설혹 그 밤에 고하여 면한다 하더라도 날마다 감림(監臨)함이 여기에 있으니 내 마음의 선(善)하고 불선(不善)함은 저 푸른 하늘 아래에서 도망하지 못할 것이며, 한갓 정도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성(誠)’의 글자에도 매우 흠이 되는 것이다. 아! 《주례(周禮)》에 있는 바의 나례(儺禮)도 지나간 해에 오히려 제거하도록 명하였는데, 더구나 삼대(三代) 이후의 오하(吳下)207) 의 풍속을 버리지 아니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이후로는 경신일에 촛불을 올리는 것과 교년일(交年日)에 거행하는 일은 모두 그만두게 하여 내가 정도를 지키며 지나간 해를 체득하는 뜻을 보이고 한결같이 오하(吳下)의 비루한 풍속을 씻어버리도록 하라. 그리고 현재 부효(浮曉)하고 조경(躁競)함이 이와 같으니, 이런 등속의 사람이 그 과실을 두려워하는 바가 어찌 특별히 이 두 날뿐이겠는가? 3백 60일이 모두 경신일일 것이다. 이 구속(舊俗)을 없애는 것도 또한 말세(末世)를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12월 27일 계묘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9성(第九星)으로 점점 옮겨 갔다.
12월 28일 갑진
객성이 헌원성(軒轅星)의 제9성(第九星)에 나타났고,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행하고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홍계능(洪啓能)을 지평으로, 김양행(金亮行)을 자의(諮議)로, 조중회(趙重晦)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선온(宣醞)을 하도록 명하고, 흥정당(興政堂)의 감회시(感懷詩)를 지어 내리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연구(聯句)를 하도록 하였다.
12월 29일 을사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10성(第十星)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영의정·우의정에게 빈청(賓廳)에 모여 복상(卜相)208) 을 하라고 명하고, 민백상(閔百祥)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당시에 김상로(金尙魯)가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유 판부사(兪判府事)209) 는 내일로 기로소[耆社]에 들어가고, 이 판부사(李判府事)210) 는 질병이 있어서 억지로 〈집무하기〉 어려우며, 조 판부사(趙判府事)211) 는 산림에 은거하는 고도(高蹈)의 선비와 다름이 없고, 조영국(趙榮國)은 몹시 쇠하였으며, 조상경(趙尙絅) 및 우상(右相)의 형은 내가 주의(注意)를 한 지 오래되었으나 서로 연이어 작고(作故)하였고, 영성군(靈城君)212) 은 혹여 조정의 의논을 진압하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대배(大拜)213) 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원경하(元景夏)는 기상(氣像)이 끝내 침정(沈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봉조하(奉朝賀)의 청을 허락하였으니, 경(卿) 등의 뜻을 차례로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상신(相臣)을 뽑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승지와 사관(史官) 이외에는 참문(參聞)이 부당(不當)합니다."
하자, 민백상(閔百祥)이 물러나왔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처지(處地)를 가리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사람됨이 통달(通達)하여 공심(公心)이 많고 업무를 잘 아니, 어찌 이 소임에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뜻도 영상(領相)의 뜻과 같은가?"
하자, 이후(李)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김상로가 탑전(榻前)에서 복상 단자(卜相單子)를 써서 올리니, 곧 민백상과 정휘량(鄭翬良)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고, 마침내 민백상(閔百祥)에게 낙점(落點)을 하였다.
12월 30일 병오
우레하고 번개가 쳤다. 객성(客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제10성(第十星)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이해에 경중(京中)에 오부(五部)의 원호(元戶)가 3만 6천 4백 67호이고, 인구는 17만 2천 1백 66명이며, 【남자가 8만 2천 2백 93명, 여자가 8만 9천 8백 73명이었다.】 팔도(八道)의 원호(元戶)는 1백 65만 4천 2백 48호이고, 인구는 6백 79만 6천 6백 90호였다. 【남자가 3백 33만 2천 4백 39명, 여자가 3백 46만 4천 2백 51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5책 94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7면
【분류】호구(戶口)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2월 (0) | 2025.10.08 |
|---|---|
|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1월 (0) | 2025.10.08 |
|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11월 (0) | 2025.10.07 |
|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10월 (0) | 2025.10.07 |
| 영조실록94권, 영조 35년 1759년 9월 (0) | 2025.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