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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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정미

객성(客星)이 성수(星宿)의 궤도 안인 헌원성(軒轅星)의 제10성 위에 나타났다.

 

임금이 태묘에 나아가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이어 육상궁(毓祥宮)으로 가서 예식을 거행하였다. 돌아올 때에 교동(校洞)의 옹주(翁主) 집과 계동(桂洞)의 옹주집에 들렀는데, 유신(儒臣)들이 어가(御駕) 앞에서 청대(請對)를 하니, 임금이 모두 체차(遞差)할 것을 명하였다가 승지 홍인한(洪麟漢)의 진주(陳奏)로 인하여 도로 취소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의 삭제(朔祭)를 섭행(攝行)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농사란 나라의 근본이므로 밤낮으로 이 마음이 전야(田野)에 가 있으니, 이 뜻을 본받아서 권농의 정책을 힘써 거행하고 곡식 종자(種子)와 양식을 착실히 마련할 것을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하라."
하였다.

 

1월 2일 무신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전배(展拜)하였으며,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돌아와 궐내의 출·입번(出入番)하는 군병(軍兵)들을 호궤(犒饋)하였다.

 

1월 3일 기유

객성이 헌원성(軒轅星)의 제10성 위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1월 4일 경술

구윤옥(具允鈺)을 도승지로 삼았다.

 

1월 5일 신해

지평 이윤욱(李允郁)이 상서하여 기강이 진작되지 않음과 언로가 확장되지 않음과 재용이 넉넉지 못함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광국(金光國)은 가문이 한미(寒微)한데다 또 성격이 교녕(巧佞)하여, 걸양(乞養)001)  한 글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등의 말을 쓰기까지 하여 인자(人子)로서 차마 하지 못할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회양(淮陽)의 큰 부(府)도 족히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데, 무엇이 박하다고 부임하지 않고 해서(海西)의 큰 고을을 눈물 흘리며 애걸하여 제 하고 싶은 대로 저곳은 버리고 이곳을 취하였으니, 신은 생각하기를 간삭(刊削)의 형률을 빨리 시행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금산 군수(金山郡守) 정지호(鄭志浩)는 사람됨이 패망(悖妄)한데다 또 혼미하여, 기쁨과 노여움이 일정하지 않고 형장(刑杖)이 너무 지나치니, 신은 견책 파직을 빨리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이현급(李賢伋)은 지난해 별시 감시(別試監試)의 시관으로서, 겉으로는 사정을 두지 않는 뜻을 여러 선비들에게 방시(榜示)하여 놓고 출방(出榜)하기에 미쳐서는 인척이 아니면 서로 친밀한 사람만을 방에 올렸습니다. 응시자의 시권(試券)을 상고하여 보면 사정을 둔 행적이 덮을 수 없이 환히 드러났으니, 신은 특별히 과장 용정(科場用情)의 율을 시행하여야 된다고 봅니다."
하니, 왕세자가 우악(優渥)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윤음(綸音)을 읽게 하여, 경망한 행동을 하여 조경(躁競)하는 행위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1월 6일 임자

임금이 인정전 월대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황주 목사(黃州牧使) 이사관(李思觀)을 소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이때 이사관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는데, 지난날 옥당의 차자를 혐의하여 승응(承膺)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황주 목사로 견책하여 보임한 것이다.

 

윤봉오(尹鳳五)를 대사헌으로, 김시묵(金時默)을 대사간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예문관 제학으로, 구윤명(具允明)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우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인군이 작록(爵祿)을 가지고 사람을 부리게 되면 인재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작록은 역시 세상을 권려하고 무딘 자질을 연마시키는 도구이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탁무(卓茂)002)  를 포덕후(褒德侯)에 봉한 것도 바로 집정 초의 일인데, 먼저 이러한 사람을 쓴다면 조경(躁競)하는 습성이 저절로 그칠 것이다"
하였다.

 

각도에 공도회(公都會)003)  를 10월로 정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70세 이상의 당상관 및 그 아내에게 차등을 두어 세찬(歲饌)을 내렸다.

 

1월 9일 을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고 유성(流星)이 태미원(太微垣)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채제공(蔡濟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시독관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세수(歲首)에 내리신 선유(宣諭)는 매우 간절하였으나, 아직도 죄를 입고서 석방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천시(天時)에 순응하는 의의에 흠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중용》에 비록 능하지 못하나,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법이다."
하였다. 엄인이 말하기를,
"조경(躁競)하여 경망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꼭 박절한 말씀을 하실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약을 먹어서 아릿하지 않다면 질병이 낫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주자(朱子)는 대승기탕(大升氣湯)을 가지고 말하기를, ‘이러한 약을 쓴 다음에야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였다.

 

지중추부사 이철보(李喆輔)에게 치사(致仕)할 것을 명하였다. 이철보가 신축년004)   위과(僞科)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말썽이 많았으나 근래에 와서는 총애가 더욱 두터웠는데, 이때에 와서 지사(知事)로서 강연(講筵)에 들어와 나이를 이끌어 휴퇴(休退)를 원하니, 임금이 특별히 그 청을 허락하고, 드디어 손수 어제(御製)를 써 주었다.

 

1월 10일 병진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005)  를 행하였는데, 수석을 한 조중첨(趙重瞻)은 강(講)을 제대로 못하매 회시(會試)에 응시하도록 명하고, 차석을 한 이익선(李益烍)은 강을 잘하여 급제를 주었다.

 

1월 11일 정사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왕세손에게 《소학(小學)》을 시강(侍講)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세손에게 묻기를,
"쇄소(灑掃)란 무슨 뜻인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어른에게 먼지를 날리면 불경(不敬)하게 되기 때문에 물을 뿌리고 나서 바닥을 쓰는 것입니다."
하였다.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경(敬)’ 자로써 대답을 하시니, 이미 《소학》의 큰 뜻을 터득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쇄소의 조항을 설정한 것은 어릴 적부터 노고를 익혀서 방종하거나 안일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인데, 제왕가(帝王家)일수록 더욱더 방종과 안일에 빠지기가 쉬우니, 너는 잘 알아서 경계하여야 된다."
하였다.

 

1월 13일 기미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사은(謝恩)을 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였다. 민백상이 말하기를,
"중비(中批)006)  란 좋은 일이 아니므로 역시 신중을 기하고 아껴서, 넘보는 생각을 끊도록 하여야 합니다. 정실(鄭實)과 황인검(黃仁儉)은 조경(躁競)하는 습성에서 벗어났으니, 이 두 사람을 기용한다면 인심이 진정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실인즉 그의 이력으로 볼 때 나는 너무 준엄함을 염려한다."
하였다. 민백상이 또 김시찬(金時粲)의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의 마음가짐이 좋지 않다고 본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신(大臣)이 처음 출사(出仕)할 때에 반드시 훌륭한 계책을 마음속으로 강구하여 궐내에 들어가서 고하는 것은 예전부터의 선례가 그러하였다. 민백상을 배상(拜相)한 자체는 시망(時望)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없겠으나, 탑전(榻前)에서 아뢴 내용은 진담 부설(陳談腐說)에 불과하다. 황인검은 얼굴이 검어도 마음은 깨끗하다. 그러나 부마 황인점(黃仁點)의 형으로 해서 임금의 사랑을 받았고, 정실인즉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수양을 하였다. 그러나 고(故) 상신(相臣) 정호(鄭澔)의 손자로 해서 민백상과는 대대로 좋게 지낸 사이이다. 이 두어 사람 외에 어찌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안타깝게도 민백상은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아첨함을 면치 못하였다. 지난 가을 김시찬의 차자 내용은 매우 절실하였으니, 참으로 권장할 일이지 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임금이 이미 당초의 처분을 잘못하였고 또 상신(相臣)의 상주에도 발락(發落)007)  하지 않았으니, 아! 민 백상의 경륜이 비록 임금의 마음에 감동이 있도록 하지를 못하였다 하더라도 임금 역시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에 흠을 남겼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8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006] 중비(中批) : 임금의 특명에 의한 인사 발령.[註 007] 발락(發落) : 결정하여 끝냄.
사신은 말한다. "대신(大臣)이 처음 출사(出仕)할 때에 반드시 훌륭한 계책을 마음속으로 강구하여 궐내에 들어가서 고하는 것은 예전부터의 선례가 그러하였다. 민백상을 배상(拜相)한 자체는 시망(時望)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없겠으나, 탑전(榻前)에서 아뢴 내용은 진담 부설(陳談腐說)에 불과하다. 황인검은 얼굴이 검어도 마음은 깨끗하다. 그러나 부마 황인점(黃仁點)의 형으로 해서 임금의 사랑을 받았고, 정실인즉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수양을 하였다. 그러나 고(故) 상신(相臣) 정호(鄭澔)의 손자로 해서 민백상과는 대대로 좋게 지낸 사이이다. 이 두어 사람 외에 어찌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안타깝게도 민백상은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아첨함을 면치 못하였다. 지난 가을 김시찬의 차자 내용은 매우 절실하였으니, 참으로 권장할 일이지 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임금이 이미 당초의 처분을 잘못하였고 또 상신(相臣)의 상주에도 발락(發落)007)  하지 않았으니, 아! 민 백상의 경륜이 비록 임금의 마음에 감동이 있도록 하지를 못하였다 하더라도 임금 역시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에 흠을 남겼다 하겠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1월 15일 신유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호칙(胡勅)008)  을 맞이하고 돌아와 인정전에서 칙서를 선포하였다. 당초 회부(回部) 소속의 추장 대화탁목(大和卓木) 파라니도(波羅泥都)와 소화탁목(小和卓木) 곽집점(霍集占)이 준이(準夷)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청(淸)나라에서 구제해 주어 제 소굴에서 추장 노릇을 그대로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도리어 청나라를 침략하므로, 청나라에서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섭이기목(葉爾奇木)과 합십합(哈什哈) 같은 등지에까지 추격하였다. 이에 별부(別部) 발달산(拔達山) 등은 모두 항복을 하고, 마침 곽집점은 상처를 입고 죽었으며, 파라니도는 그 부하들에게 살해되어 서변(西邊)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에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보국 장군(輔國將軍) 종실(宗室) 종복(鍾福)과 내각 학사(內閣學士) 부덕(富德)을 보내와 칙서를 반포(頒布)하였는데, 말하기를, ‘거리를 따져 본즉 변경에서 다시 2만여 리나 더 개척하였고 시일을 꼽아 본즉 군사를 일으킨 이래 5년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대략이었다.

 

1월 16일 임술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였다. 먼저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례(殿拜禮)를 행한 뒤에 이어 관소에 거둥하여 칙사를 접견하고 연향(宴享)을 베풀었다.
사신은 말한다. "이에 앞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릎을 어떻게 칙사의 영접에 먼저 굽힐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황단(皇壇)에 전배례를 행하였는데, 이날 또 하교하기를, ‘저경궁이 관소와 아주 가까워서 이 마음이 한 갑절 더한다.’ 하고 전알례를 먼저 행하였으니, 임금이 충효에 독실하기가 대개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8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에 앞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릎을 어떻게 칙사의 영접에 먼저 굽힐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황단(皇壇)에 전배례를 행하였는데, 이날 또 하교하기를, ‘저경궁이 관소와 아주 가까워서 이 마음이 한 갑절 더한다.’ 하고 전알례를 먼저 행하였으니, 임금이 충효에 독실하기가 대개 이러하였다."

 

조엄(趙曮)을 대사헌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18일 갑자

이날은 바로 임금이 〈연잉군(延祁君)으로의〉 봉작(封爵)에 사은한 지 60주년이므로 조정에서 정후(庭候)를 하였다.

 

임금이 연향대(宴享臺)에 거둥하여 칙사를 전송하였다. 먼저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배례를 행하고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소견한 다음, 승지·사관·시위 제신 및 기사 당상에게 각각 말을 하사하고, 그 중 67세에 해당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하였으니, 이에 이태화(李泰和)·유건(柳謇)·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가 모두 자급이 올라갔다. 이어 연향대에 거둥하여 칙사를 전송하고, 돌아올 때에 선무사(宣武祠)에 들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다."
하고, 이어 치제(致祭)를 명하였다. 임금이 인정전 월대(月臺)로 돌아와서 2품 이상의 문무관 및 오부(五部)의 기민(耆民)을 불러다 놓고 전정(殿庭)에 서서 선유(宣諭)를 한 다음, 전정에 들어온 67세 이상의 기민에게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판서 김성응(金聖應)의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특별히 옷감과 식물(食物)을 하사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92세였다.

 

이태화(李泰和)·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0일 병인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명정전 월대에 나아가 기사 당상과 훈신(勳臣)에게 선찬(宣饌)하였다. 임금이 손수 어제시(御製詩)를 써서 기사(耆社)·훈부(勳府)의 여러 신하들에게 주고,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려서 작첩(作帖)하고 어제시를 상면(上面)에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한 벌씩 하사하라."
하였다.

 

임금이 사직(司直) 홍중징(洪重徵)에게 치사(致仕)할 것을 명하였다. 홍중징이 기사 당상으로서 입시하였는데, 선찬한 뒤에 나아가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누차 휴치(休致)의 글장을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신이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는 길은 오직 치사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뜻이 가상하니, 특별히 그 소청을 윤허한다."
하고, 손수 글을 써서 포장(褒奬)하였다.

 

1월 21일 정묘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무장(茂長) 지역에 표류해 와 있는 저쪽 사람에게 옷도 즉시 만들어 입히지 않았고, 분실한 물건도 즉시 추환(推還)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현감 고신겸(高信謙)은 나처(拿處)하고, 수사 심봉징(沈鳳徵)은 파직하며, 감사는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당 수령과 수신(帥臣)은 먼저 파직한 뒤에 나처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 봉조하(金奉朝賀)009)  는 기사(耆社)의 대신으로서 이제 옛사람이 되었으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그 부인은 나이 80에 가까웠고, 또 밀창군(密昌君)의 부인도 왕가의 현손부(玄孫婦)로서 나이 60이 넘은 숭품(崇品)의 아들이 있으니, 옷감과 식물을 후하게 제급하라."
하였다.

 

1월 22일 무진

동지(同知) 이천구(李天球)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적을 방어할 지역으로서는 실로 도성(都城)만한 데가 없습니다.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이고 재물을 쌓아 둔 창고가 있는 곳이며, 사녀(士女)와 인민이 살고 있는 곳이니, 이러한 근본이 되는 곳을 버리고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도성은 하도 넓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 지형을 헤아려보고 험조(險阻)함을 따져 보면 실로 넓은 데 대한 우려는 없습니다. 돈의문(敦義門)에서 북쪽으로 동소문(東小門)까지는 실로 천험(天險)의 지역이고, 동소문에서 남쪽으로 동대문까지 역시 험조한 지역이며, 동대문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가 조금 평탄하기는 하나 성첩이 두텁고 완벽하니 족히 방어할 만합니다. 수구문에서 남대문까지 역시 기어오르기 어려운 절험(絶險)한 곳이며, 남대문에서 돈의문까지가 비록 평이하다고는 하나 성을 쌓은 기지(基地)가 모두 단단한 돌로 되어 있는데다 또 높이 쳐다보는 지역입니다. 삼가 조목별로 나열하겠습니다.
1. 남산의 남쪽 상봉에서부터 어영청(御營廳) 경계까지는 본성(本城)과의 거리가 4, 50발[把]이 되는 사이에 규봉(窺峰)이 잇달아 있으므로, 네 곳에다 돈대(墩臺)를 쌓아서 적이 넘보는 것을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1. 도성이 비록 완벽하다고는 하나 동쪽과 서쪽에 규봉이 많이 있으니, 외곽에 토성을 또 쌓아서 더욱 견고한 기반을 삼는 것이 역시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서쪽은 안현(鞍峴)에서부터 쌓아서 대현(大峴)을 거쳐 곧장 청파(靑坡) 석우(石隅)에 닿게 하고 동쪽은 남산 석수대(石水臺)의 산등성이에서부터 쌓아 청파 노여리(盧閭里)를 거쳐 석우에 닿게 하여 두 끝이 마주치는 곳에다 석문(石門)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석우와 노여리에 시내가 있어서 성을 쌓기가 어려우니, 수문(水門)을 만들 경우 버드나무와 잡목을 많이 심어서 빽빽한 삼림을 조성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1. 토성의 꼭대기는 너비를 열 길[丈]로 하고 성 안팎으로 상수리나무와 밤나무를 세 줄로 빽빽히 심어서 세월이 오래 되어 나무가 자라게 되면, 전란을 당하였을 때 세 길 정도만 남겨 두고 그 윗 줄기는 가로로 묶고 그 아래를 촘촘하게 울타리 같이 방패 모양으로 그 사이에 줄줄이 세워 두면 의거할 곳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고, 또 그 사이에 숨어서 조총(鳥銃)과 시석(矢石)을 쓴다면 견고함이 석성(石城)보다도 더 나을 것입니다.
1. 전선(戰船)의 체제가 무겁고 또 크며 높아서 혹시 얕은 물이나 큰 바람을 만나게 되면 사람의 힘으로서는 진퇴(進退)시키고 돌릴 수가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별도로 비선(飛船)을 건조하는 것이 마땅한데, 본판(本板) 석 장[立]을 길이가 일곱 발[把] 되게 하고, 협판(挾板)에는 다섯 개의 도리(都里)를 얹은 다음, 배 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걸쳐서 판옥(板屋)을 만들고 판옥 안에는 열 개의 노(櫓)를 설치하여 배를 운행할 경우 열 사람이 앉아서 노를 젓도록 하며, 또 고물(高勿)010)  에는 대포(大炮)를 실은 다음 칸칸이 문을 내어 여닫으면서 방포(放砲)하는 곳을 삼는다면, 이 배는 아주 가볍고 또 빨라서 큰 바다에 들어가서 하늘에 닿는 파도를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북[飛梭]처럼 재빨리 좌우로 출몰하여 전복될 우려가 전혀 없을 것이고, 비록 얕은 물을 만나더라도 두어 자[尺] 남짓한 깊이이면 운행하기에 충분하여 방해가 될 염려가 없습니다. 수군이 육군의 보루에 머물러 있고 육군이 수군의 진영에 머문 자는 색목(色目)을 막론하고 일체 그 머물러 있는 곳에 따라서 그 복역을 서로 바꾼다면, 수군 진영 근처에서는 모두 수군이 되고 육군 진영 근처에서는 모두 육군이 될 것이니, 위급한 상황을 당하였을 때 사용에 어찌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대조(大朝)께서 보고 비변사에 내려보냈다.

 

1월 23일 기사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밑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월 24일 경오

왕세자가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였다.

 

1월 25일 신미

임금이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집에 거둥하였다가 화유 옹주(和柔翁主)의 집에 들렀다.

 

1월 27일 계유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충청 병영(忠淸兵營)에 환곡(還穀) 1만 석(石)을 획급(劃給)하여 해마다 그 절반은 창고에 남겨 두고 모곡(耗穀)을 받아서 용도에 쓰도록 할 것을 청하고, 또 광주부(廣州府)에 군량미 2백 석을 획급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 본 다음 허락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대저 이목(耳目)의 즐거움을 취할 즈음에 있어 조존(操存)의 공부가 없으면 온갖 일의 절도가 다 무너져서 그 폐해가 민생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려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잘 살피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진술한 바가 더없이 절실하다."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주(人主)란 숭고함이 극단에 달하였으므로 힘써야 될 것은 진리를 탐구하여 마음을 바르게 갖는 일인데, 지난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성학(聖學)을 닦은 군주는 보기 어렵다."
하였다.

 

1월 28일 갑술

임금이 휘령전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전작(奠酌)이 었었으니, 이 뒤로는 〈작헌례를〉 전작으로 이름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 야대(夜對)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고, 전 충청 감사 김상철(金尙喆)을 소견하였다.

 

1월 29일 을해

김상철을 이조 참의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이의철(李宜哲)을 대사간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경기 감사·수원 부사·북도 어사(北道御史)를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수원의 전지(田地)를 측량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김효대(金孝大)가 이 일을 담당하고 있기는 하나, 온 경내(境內)를 두루 답험(踏驗)할 수 없어서 부득불 임장(任掌)의 손에 맡겨야 하는데, 사람을 잘 얻으면 측량이 잘되고 사람을 잘 얻지 못하면 측량이 잘못될 것이므로, 도신도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온 고을을 통틀어서 의심 가는 곳이 있을 경우에 조사를 하여 바로잡고 인하여 마감하도록 한다면, 분란스런 폐단을 끊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특별히 고원 군수(高原郡守) 위흥조(魏興祖)·문천 군수(文川郡守) 김귀상(金龜祥)을 먼저 파직한 뒤에 나문(拿問)하도록 명하였으니, 어사의 서계(書啓)에 그들이 금령(禁令)을 범하였다고 논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치사(致仕)하였다. 유척기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 고사(故事)에 익숙하고 매우 충후하여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고 지론(持論)이 매우 준절하면서도 모난 언동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근래의 재상으로서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재차 상신(相臣)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큰 기대를 걸었는데, 건백(建白)한 바가 없었고 마침내 임금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사면하고 돌아갔으니,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재상의 기량은 인정하였으나 업적에 대해서는 대단치 않게 여겼다. 미호(渼湖) 위에 물러가 있으면서 이 해에 이르러서 나이를 이유로 사퇴하며 글을 올린 것이 세 번이고, 또 아들 유언현(兪彦鉉)을 시켜 영의정 김상로에게 전언(傳言)하기를,
"기어코 소청을 이룩하고야 말 것이니, 원컨대 그대는 〈이 뜻을〉 연석(筵席)에 도달하도록 하시오."
하였다. 김상로가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봉조하라 하더라도 역시 대신이 아닌가? 만약 성 안에 내왕이라도 하겠다면 내가 허락하리라."
하였다. 유척기가 이 소식을 듣고 그날 당장 성 안으로 들어와서 면대(面對)하여 간청을 하매, 임금이 어필(御筆)로 글을 써서 내렸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아! 경은 지난날의 구신(舊臣)으로서 넓고 넓은 도량과 나라를 위한 정성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성의가 부족함으로 해서 30년 동안 이 자리에 있으면서 몇 년이나 경을 임용하였던가? 지난해 사온(賜醞)하는 날 내리신 자교(慈敎)를 매양 외우면서 또한 스스로 슬퍼하였다. 어언간 경의 나이 벌써 일흔에 이르러서 또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아! 선왕의 신하로서 오늘날까지 나를 섬긴자는 경 한 사람뿐인데, 옛날 뜻을 되새기고 백발 기구(白髮耆舊)에게 자문(諮問)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차마 휴직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의 괴로운 마음 또한 깊이 알고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광무제(光武帝)가 아니고서는 자릉(子陵)011)  의 뜻을 이루어 줄 수 없다.’고 하였기에, 특별히 경의 소청을 윤허하기는 하나 마음이 매우 서운하다. 아! 경의 직접 대답이 없다면 내가 어디에 자문을 구하겠는가? 지금 비록 휴치(休致)한다 해도 대관(大官)의 명목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안심하고 도성 안에 편안하게 살면서 지난날의 자교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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