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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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병자

유성이 낭위성(郞位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임금이 진전(眞殿)의 재실에 나아가 전교하기를,
"가까운 능에 친히 향을 전할 적의 복색은 당연히 갑오년012)   품정(稟定)한 바에 의하여 3월 알릉(謁陵) 때에 25일과 26일에는 다같이 아청사(鴉靑紗)의 융복(戎服)을 입고 27일에는 홍의(紅衣)를 입어야 하겠다. 어가(御駕)를 따르는 백관의 융복(戎服)은 3일을 다같이 상례(常例)대로 하라."
하였다.

 

2월 2일 정축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013)  를 거행하였는데, 사직제(社稷祭)의 재계로 해서 헌가(軒架)를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았다.

 

다음달 알릉 때 25일과 26일에 주정소(晝停所)의 삼취(三吹)를 포(咆)로서 나(螺)를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2월 3일 무인

유성이 삼성(參星) 밑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 월대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조(兩朝)의 기구 대신(耆舊大臣) 중에 유 봉조하(兪奉朝賀)만이 살아 있는데 지금 이미 치사(致仕)하였고, 재실(齋室)에서 사온(賜醞)할 때의 자교(慈敎)를 돌이켜 생각함에 나의 마음이 한 갑절이나 더하니, 어찌 상례(常例)를 따를 수 있겠는가? 내일 마땅히 인정전에 나아가 선교(宣敎)하겠으며 선교한 뒤에 이어 전정(殿庭)에서 진전 사은(進箋謝恩)하겠는데 복색은 마땅히 곤룡포를 입을 것이니, 승지 이하 모든 관원은 흑단령을 입고 입시하라."
하였다.

 

2월 4일 기묘

유성이 북두성 밑에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충청도 유생 정협(鄭愜) 등이 상서하여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두 선정(先正)의 문묘 배향(文廟配享)을 또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두 선정의 도덕과 학행은 내가 잘 알고 있으나,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가벼이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부사직 윤봉구(尹鳳九)가 상서하여 《주역(周易)》의 문의(文義)를 끌어대어 진계(陳啓)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누차에 걸쳐 간곡해 불러 보아도 초치(招致)할 길은 막연하고 사양하는 글만 올라오니, 나의 얕은 성의가 깊이 부끄럽다. 근래 연일 《주역》을 강론하고 있는 때인데, 산림(山林) 숙덕(宿德)의 선비가 아니고서야 미묘한 진리와 심오한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대는 세록지신(世祿之臣)이어서, 내가 그대를 버려 둘 수 없고 그대도 나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간절한 우국 애군(憂國愛君)의 진계는 참으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어떻게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장령 안복준(安復駿)이 상서하여 정환유(鄭煥猷)를 주서(注書) 추천에서 간정(刊正)할 것을 청하고, 이어 양관(兩館)의 제도를 대략 본떠 다시 권취(圈取)를 더해서 그 추천을 완전하게 한 다음 비로소 주의(注擬)를 허락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고 참판 구봉령(具鳳齡)과 고 사간 김영(金玲)에게 작호와 시호를 다시 내릴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정환유의 일은 그를 흐리멍덩하다고 배척한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다. 사람을 어찌 그렇게 논할 수 있겠는가? 주서 천거의 일은 제도를 고쳐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단정할 수 없다. 시호를 내리는 일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대신(臺臣)으로서 논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2월 5일 경진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는데, 시독관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 때에 해마다 천하의 전조(田租)를 삭감하였는데,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몸소 검은 색의 비단 옷을 입고 노대(露臺)를 건축하지 않은014)   효과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구중(九重) 안의 의복과 음식이 지나치게 검소하여 자못 한 문제의 미칠 바가 아닌데도 재정을 맡은 관원이 매번 경비가 다하였다고 걱정하니, 신은 전하께서 한갓 절약만 하시고 모르게 새어나가는 것은 금지하지 못하는 데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안복준(安復駿)의 글을 읽게 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시호를 청한 일은 참으로 오활하다. 이는 대신(臺臣)으로서 청할 일이 아니다."
하고, 이어 〈왕세자의〉 하답(下答)을 읽게 한 다음 임금이 말하기를,
"잘 하답하였고 정신이 담겨 있다. 내가 답변을 하더라도 다시 더할 말이 없겠다."
하였다.

 

2월 6일 신사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범월 죄인(犯越罪人) 6명을 정상을 이미 승복하였으니, 율문에 의하여 처단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본의는 고기를 잡으려는 데 불과하였으니 임자년015)  의 하교에 따라 사형을 감면하고 섬으로 유배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홍봉한이 말하기를,
"밀양(密陽)·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네 고을 백성들의 심정은 모두 작목(作木)016)  을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시행을 허락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황양목(黃楊木)017)  을 본래부터 많이 진배(進排)하는데도 공인(貢人)들은 전부 별무(別貿)를 한다고 원망합니다. 종전에 복정(卜定)한 수량과 회감(會減)한 값을 참고하여 매주(每株)의 값을 1석(石) 10두(斗)로 정하고, 50주를 작정하여 혜국(惠局)에서 값을 내어주도록 하며, 이 밖의 것을 종전대로 별무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시행을 허락하였다.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익량(鄭益良)을 멀리 유배하고, 어사 이담(李潭)의 관직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어사 이담이 정익량이 탐욕을 부리어 불법을 저질렀다고 장문(狀聞)하여 죄줄 것을 청한 바, 정익량이 바친 공사(供辭) 내용에 ‘횃불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내아(內衙)로 돌입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도리어 욕지거리를 한 말이 아주 패만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담의 일은 애당초 조사를 행하려다가 그 명분 때문에 비록 그만두기는 하였으나, 어사가 문서를 찾아낸 뒤에 봉고(封庫)를 하는 것은 그 뜻이 치밀을 기하자는 것이고 내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 금령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내아로 들어가서 나포하여 병영(兵營)으로 압송하였다는 것이 이담의 장계에서 이미 사실로 드러났으니, 만약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곳에서 사사로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다가는 앞으로 수령을 끌어내고 변장을 잡아 가두는 데까지 이르겠다. 임금이 임명한 관리를 욕보여서 듣는 이를 놀라게 한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하고, 이어 파직하여 서용치 말 것을 명하였다.

 

2월 7일 임오

하교하기를,
"심욱지(沈勗之)는 명령을 받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간 이상 공도(公道)를 따라 고시(考試)를 시행해야 되는데, 식견이 미치지 못하여 혹시 탈락자가 생기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심(私心)에서가 아니겠지만, 어찌하여 그 이름을 먼저 묻는다는 말인가? 이름을 먼저 물어보아서 기어코 찾아내려고 한 것은 그 사람을 위하여서이지 공사(公事)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사심인 것이니 장차 저러한 사람을 시관으로 쓸 수 있겠는가? 자신이 주시관(主試官)으로서 먼저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한 사람은 뽑고 한 사람은 빠뜨렸으니, 그 무슨 교사스런 짓인가? 성우주(成宇株)의 이름을 낙축(落軸)에서 찾아보는 것 역시 번거로운 일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이현급(李賢伋)이 험벽(險僻)하다.’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성우주를〉 낙방시켰던 것이 실로 숨길 수 없는 일인데, 〈이현급이 자신을〉 만나 보고 나서 웃으며 ‘험벽하다.’고 말을 하더라 하였으니, 어찌 그처럼 솔직하지 못한가? 이현급으로 말하면 을해년018)  의 일을 추사(追思)할 때 저절로 〈감회가〉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할 터인데 그가 과연 협사(挾私)를 하였겠는가? 나는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긴다. 이는 두 사람이 붙고 떨어지는 시점임을 저는 비록 모르고 대답한 것에 불과하겠으나, 한 사람은 붙고 한 사람은 떨어진 것이 저의 부추기고 억누른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어찌 뜬소문의 비방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른 땅에 말뚝을 박고 빈 배로 내를 건너는 것과 같아서 색출(索出)하여 말하고 싶지 않다.[軟地虛舟不欲索言]’는 등의 말로 은연중에 심욱지에게로 허물을 돌리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엄문(嚴問)하여야 되지만, 면질(面質)까지 하게 되면 과거(科擧)에 관한 일을 뒤따라 조사하여야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신(搢紳)에게 수치를 끼치게 된다. 머리가 흰 늙은 나이에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심욱지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방송(放送)하며 이현급은 삭직하여 방송하라."
하였다.

 

2월 8일 계미

임금이 명광문(明光門)에 나아가 허급(許汲)·원중회(元重會)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이때 도성의 시내와 도랑이 여러 해째 막혀 있었으므로, 판윤 홍계희(洪啓禧)·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준천(濬川)할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2월 18일에 공역을 시작하였는데, 도청(都廳) 허급과 원중회가 서로 좌차(坐次)를 다투기 때문에 곤장을 친 것이다.

 

2월 9일 갑신

이유신(李裕身)·한광조(韓光肇)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각사(各司)의 낭관(郞官)을 소견하고 나서 《대학》의 어제서(御製序)를 읽었다.

 

2월 10일 을유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경상 감사 조엄(趙曮)이 본도의 시노비(寺奴婢)를 지금 거의 사정하였는데, 허다한 탈대(頉代)를 비변사의 관문(關文)에 따라 시노의 입방(入防)한 자로 옮겨 충정(充定)한 다음에 옮겨 충정할 것과 여러 가지 탈대를 양정(良丁)으로 충정하여 노군(奴軍)을 없이할 것으로 한정할 일을 장청(狀請)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정의 명령이 내려진 만큼 그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2월 13일 무자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가고, 1경(一更)에서 4경까지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소대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탕(成湯)이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였다.[日新又新]’는 것과, 문왕(文王)이 ‘도(道)를 바라 보기를 아직 보지 못하였던 것처럼 하였다.[望道如未見]’는 것은 모두 감히 만족하지 못하는 뜻이다. 성인도 그러하였거든, 더구나 나 같은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영릉(英陵)의 향축(香祝)을 모시고 가던 서리(胥吏)가 중로에서 잃어버렸으니, 임금이 해부(該府)에 엄히 다스려서 섬으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기축

임금이 수진궁(壽進宮)에 거둥하여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유건(柳健)의 아뢴 바로 인하여 묵사동(墨寺洞)에 중묘(中廟)의 잠저(潛邸) 때 옛터가 있음을 알기는 하였으나, 분명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용흥(龍興)019)  의 옛터가 모두 있는데도 중묘의 옛터만을 알 길이 없어서 마음속에 늘 불안하였는데, 수진궁 도서(圖署)의 연월을 상고해 보니, 바로 성조(聖祖)께서 중흥하신 때이고, 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상고하여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문서를 통하여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부인(夫人)의 명문(明文)중에 쓰여진 ‘영릉(寧陵)’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고, 몇 장에 걸쳐 영릉의 잠저 구호(舊號)가 쓰여졌는데, 이것이 경조(京兆)의 장적(帳籍)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속에는 백성을 사랑한 성덕(聖德)이 종이 뒤에 애연(藹然)하였으니,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 더 간절하다. 지난해 명례궁(明禮宮)의 전례에 따라 수진궁에 나아가 친히 봉심하고 이어 성조(聖祖)의 탄생한 옛 궁에 나아가 계경헌(啓慶軒)에 〈그 문서를〉 봉안하리라."
하였다.

 

2월 15일 경인

왕세자가 휘령전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하였다.

 

2월 16일 신묘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북평사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북관(北關)에 역학(譯學) 한 명을 둘 것을 허락하였다.

 

2월 17일 임진

임금이 권농(勸農)의 일로 팔도(八道)·양도(兩都)에 하유하였다. 임금이 20일은 바로 청명절(淸明節)이기 때문에 준천(濬川)의 역사를 특별히 정지하고 선대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2월 19일 갑오

임금이 영희전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쌀 20석(石)과 감곽(甘藿) 6백 근(斤)을 준천소(濬川所)에 내주어 내일 역군(役軍)의 호궤(犒饋)에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2월 20일 을미

임금이 돌아오는 길에 흥인문에 들러서 말하기를,
"탐라인(眈羅人)과 공인(貢人)이 또한 모두 몸소 앞장서 부역에 나왔다. 재작년 능역(陵役)에 몸소 그 성의를 보았는데 이번에 또 이렇게 힘쓰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임금을 잊어버리지 않고 자식처럼 찾아와 일하던 옛날의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눈으로 직접 본 이상 어떻게 한 그릇 밥만 먹여서 돌려보내랴? 도청·낭청·패장(牌將)에게는 각기 궁시(弓矢)를 내려 주고 내하미(內下米) 15석을 나누어 주라. 오늘날 부역을 자원한 제주(濟州) 사람 6명에게는 회량(回粮)을 넉넉히 주고 갑주미(甲胄米) 6백 석을 본소(本所)에 더 내려주어서 부역에 온 도민(都民)들에게 더 나누어 주며, 집이 헐린 냇가의 인민은 진휼청에서 돌보아 주도록 하라."
하였다.

 

황인검(黃仁儉)을 형조 참판으로 승진시키고, 이경호(李景祜)를 좌윤으로 승진시켰으니, 대신의 천거로 인함이었다.

 

2월 21일 병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변치원(卞致遠)을 친히 국문하였다. 병조 참지 임사하(任師夏)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근장 군사(近仗軍士)가 생기(省記)에 적혀 있지 않은 어떤 사람을 붙잡았는데, 신이 낭청과 함께 달래어 물은즉 을해년020)   사건에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신이 숙위(宿衛)로서 검칙을 제대로 못하여 잡인이 금중(禁中)에서 밤을 지새게 한 것만도 벌써 한심스러운 일이며, 또 그가 할 말이 있었다면 의당 포도청에 송부하여야 함에도 사사로이 먼저 물어보았으니, 이는 뒷날의 폐단에 관련이 된다. 해당 당상 낭청을 파직하라."
하고, 이어서 변치원을 친히 국문한다는 명을 내렸는데, 변치원이 남을 무함하였다고 자복하자, 대사헌 이득종(李得宗)과 대사간 이의철(李宜哲)이 말하기를,
"죄인이 이미 남을 무함하였다고 자복하였는데, 혹시 지레 죽기라도 한다면 실형(失刑)하게 되기 쉬우니, 즉시 정형(正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아랫 조항의 흉언(凶言)을 끝까지 사핵하려 하였는데, 어찌 남을 무함한 죄만으로 감률(勘律)할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두 대관(臺官)을 파면한 다음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임위(任瑋)를 대사간으로, 홍지해(洪趾海)를 헌납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에, 이달 초엿샛날에 지진이 서쪽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울려 나갔다고 하였다.

 

2월 22일 정유

위흥조(魏興祖)에게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간삭(刊削)하는 율을 특별히 시행하고 원공(原供)에 해당하는 율은 집행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윤면동(尹冕東)이 어사가 되어 위흥조를 논죄(論罪)하였는데, 위흥조가 공술 사연에서 윤면동을 극도로 모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변치원이 나라에 불충하였음을 승복하자, 법에 따라 형을 집행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처자(妻子)는 외딴 섬의 노비로 삼았다.

 

2월 23일 무술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동성(東城) 밖의 큰 시내가 물길을 잃게 된 원인은 오로지 농민들이 밭을 일구면서 제방을 침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준천(濬川)을 하고 나서는 냇가 근처의 전답을, 장산곶(長山串)의 전답을 총융청에 소속시킨 예에 따라 어영청에서 구관하도록 하되, 공전(公田)인즉 대토(代土)를 주고 사전(私田)인즉 값을 쳐 주어 둔전(屯田)을 만들고서 전답 가에 나무를 심어 해마다 보수를 한다면, 성밖에 물길을 바로잡는 데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2월 25일 경자

유성이 관삭성(貫索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2월 27일 임인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해골을 묻어 주는 정치는 문왕(文王)도 행하였다. 내가 비록 탕왕(湯王)의 덕이 짐승에까지 미친 것에는 부끄러우나, 어찌 차마 해골이 노출된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준천(濬川)할 때에 오래 된 잔해(殘骸)가 더러 흙에 섞여 나오는 것이 있거든 베로 싸서 지대가 높고 깨끗한 곳에 묻어 주고 준천을 마친 뒤에 수문(水門)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사제(賜祭)토록 하라. 이로 인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굶주림 끝에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어서 거두어 묻지 못한 자야말로 어찌 여기에 견줄 수나 있겠는가? 그러한 해골을 생각할 때 나도 몰래 측은하여진다. 만약 노출된 해골이 있거든 즉시 베로 싸서 묻을 것을 비변사에서 오부(五部)와 제도(諸道)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넓은 집에 살면서 쌀밥을 먹는 것은 곤궁한 백성의 생활에 비교할 때 하늘과 땅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 제도의 관찰사는 진휼 정치를 펼 때 군주가 친림한 것이나 다름없이 착실히 거행하라."
하였다.

 

2월 28일 계묘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충청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주청하기를,
"회덕현(懷德縣)의 민간이 4년 동안 바치지 못한 돈 1천 3백냥과 무명[木] 26동 40필을 탕감하여 주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해당 수령은 먼 곳으로 유배하여 영원히 금고시키며, 그 후임 수령은 먼 곳으로 유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노비 10구(口)와 전지 10결(結)이 있을 경우 수령으로의 부임을 허락하지 않는 제도가 비록 법전에 실려 있기는 하나, 이는 도리어 피폐한 고을을 회피하는 묘방(妙方)이 되고 있으니, 마땅히 정식(定式)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구애받지 말고 시행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돈의문 안의 궐호(闕號)가 장릉(章陵)의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대신과 관각 당상에게 명하여 빈청에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여 들이도록한 바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송형중(宋瑩中)을 대사간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2월 29일 갑진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유신을 소대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권권(惓惓)한 뜻이 이 책 한 편에 실려 있어서 마치 친히 듣는 것과 같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석담 서원(石潭書院)에 치제(致祭)하고 제문도 지어 보내야 되겠다."
하였다. 원의손(元義孫)이 말하기를,
"고 상신 이의현(李宜顯)은 부자가 정승을 지내며 청백(淸白)함을 스스로 지켰는데, 자손이 영체(零替)하여 제사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고, 임준(任㻐)이 말하기를,
"일찍이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는 하명이 있었으나, 전조에서 여태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신칙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죄인 신후일(愼後一)·신후팽(愼後彭)을 국문하였다. 이때 사직(司直) 채제공(蔡濟恭)이 입대를 청하여 말하기를,
"저녁 무렵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려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봉서(封書) 한 통을 내놓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신귀중(愼龜重)의 아들 신후팽이고 그의 사촌 신후일도 이 일을 알고 있다며 같이 왔기에, 신이 붙잡아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봉서를 뜯어 보고 말하기를,
"말이 황당한 듯하니, 마땅히 국문을 하여야 되겠다."
하고, 즉시 친국을 명한 것이다.

 

2월 30일 을사

임금이 대간이 패초(牌招)의 명을 어기고 분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신응현(申應顯)은 대정현(大靜縣)에, 신사운(申思運)은 정의현(旌義縣)에, 이보온(李普溫)은 제주목(濟州牧)에 유배시켰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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