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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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병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서계(誓戒)를 받았다.

 

임금이 전 장령 이윤욱(李允郁)이 살림은 가난한데다 늙은 어머니가 있다 하여 본도로 하여금 먹을 것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영남 사람이기 때문이다.

 

3월 2일 정미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臺臣)의 배소(配所)를 옮기라고 명하였다.

 

신후팽(愼後彭)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신후팽은 바로 신후일(愼後一)의 종형(從兄)으로서 신후일이 상변(上變)하러 올라올 때 데리고 온 자인데, 임금이 그는 무식하여 더 물어볼 만한 것이 없다고 여긴데다 또 신귀중(愼龜重)의 아내가 그의 아들을 시켜 서울로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뜻이 가상하다며 이런 특명을 내린 것이다.

 

3월 3일 무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판의금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전 지평 이윤욱(李允郁)에게 되돌려 보낸 서본(書本)에 이현급(李賢汲)을 논한 공사(供辭)가 있는데, 비록 많은 발명을 하였으나 증거가 분명하여 그 자취를 감추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다시 사문(査問)하여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서본을 들여보내라고 명하였는데,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이윤욱은 이미 대간의 관직에서 체직되었으므로, 서본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판의금의 옷소매 속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읽어 보라고 명하였다. 이에 홍상한이 그 서본을 읽고 나서 아뢰기를,
"그의 아우 이현섭(李賢涉)이 본적을 영남으로 속이고 별시(別試)에 참방(參榜)하였는가 하면, 친인척 가운데서도 참방한 자가 많다고 하니, 이는 필시 무슨 내막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김상로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을 함문(緘問)한 뒤에는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저께 이미 처분하였으니,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상로가 아뢰기를,
"총융사가 이미 비국의 당상직을 띠었는데 또 병사의 관직을 겸하였으니, 일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하매, 임금이 여러 당상에게 물어본 다음 경기 병사는 빼라고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3월 4일 기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호조 판서를 소견하고 오부(五部)의 관원에게 각기 민간인 5, 6명을 거느리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민간인들이 차례로 계하에 늘어서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듣자니 방민(坊民)들이 공역을 거의 다 마치었다고 하는데, 임금이 백성을 부림에 있어 예전에도 3일을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하교를 하였는데 어떻게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고군(雇軍)을 쓰겠다."
하였다.

 

원인손(元仁孫)을 보내어 수원 부사(水原府使)와 함께 본부의 양전(量田)을 간심(看審)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군(雇軍) 역시 우리 백성이니, 고군이라는 이유로 채찍을 가해 독촉하여 내가 백성을 위하는 고심(苦心)이 형식으로 돌아가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3월 7일 임자

임금이 황단(皇壇)의 재실에 나아가 담장 밖의 호위군을 3초(哨)로 규정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망위례(望位禮)를 행하고, 마친 뒤에 제기(祭器)·희생(犧牲)을 살펴보았다.

 

3월 8일 계축

임금이 친제(親祭)를 행하여 삼헌한 뒤에 보궤(簠簋)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계하로 내려와서 부복한 채 낮은 목소리로 아뢰기를, ‘여러 집사의 불근(不謹)은 오직 신의 죄입니다.’ 하고, 이어 봉상시 도제조 김상로(金尙魯)·제조 유최기(兪最基)·예조 판서 조운규(趙雲逵)의 관직을 파면하고, 단사(壇司) 정석후(鄭錫垕)와 전사관(典祀官) 이의로(李宜老)는 귀양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3월 10일 을묘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가고 유성이 관삭성(貫索星)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흰색이었다.

 

임금이 육상궁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 돌아올 때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러, 금훤랑(禁喧郞)이 구경 나온 사람을 금지한 때문에 해당 낭관을 처벌하고, 병조 판서를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이어 수구문(水口門)에 이르러 준천 당상에게 음식을 내려 주었다.

 

좌의정 이후(李)가 아뢰기를,
"영상을 이미 처분하였으니, 신들이 어떻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대신의 잘못은 아니나 사체(事體)가 지중한 만큼, 아뢴 바는 체모를 얻었다."
하고, 이어 좌상과 우상을 면부(勉副)021)  하라고 명하였다.

 

3월 11일 병진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죄인을 국문하였다. 임금이 고치룡(高致龍)에게 묻기를,
"네가 신후일(愼後一)을 아는가?"
하니, 고치룡이 공술하기를,
"압니다."
하매, 또 묻기를,
"신후일의 말에 ‘네가 각골도(角骨島)를 알고 있으며, 윤서(尹嶼)·김호(金湖)·조담(趙潭)이 수만여 명의 사람을 모아 가지고 일본과 내통을 하였는데,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바른 대로 납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고치룡이 공술하기를,
"이는 모두 신후일이 조작한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호에게 묻기를,
"네가 신후일을 아는가?"
하니, 김호가 공술하기를,
"모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윤서를 아는가?"
하니, 김호가 공술하기를,
"모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각골도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하니, 김호가 공술하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네 이름자가 무슨 글자인가?"
하니, 김호가 공술하기를,
"바로 호(壕) 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잘못 잡았구나. 신후일은 죽어버려 대질할 곳도 없거니와, 각골도라는 섬이 어찌 있을 수 있으며, 세 사람이 다같이 물수[水]변의 글자로 된 이름인데, 또한 어떻게 서(嶼) 자의 이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湖) 자로 이름을 쓴 것은 필시 고치룡의 조작일 것이다."
하고, 김호는 특별히 석방하였으며, 고치룡은 두 차례의 형문을 가하고 나서 이어 본부로 내려 보내었다.

 

임금이 무겸(武兼) 정언형(鄭彦衡)의 사람됨이 분명하고 치밀함을 보고서 특별히 선전관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어사 김화진(金華鎭)을 소견하고 준천소(濬川所)에 민원(民怨)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으니, 김화진이 대답하기를,
"부역 나온 백성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달려 왔고 도청(都廳)들 역시 힘을 다하여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사헌 정상순(鄭尙淳)에게 이르기를,
"어사의 상주(上奏)에 ‘어떤 부자놈이 제 집이 철거당하였다고 퍽 원망을 하였다.’고 하였다. 저가 이미 금령을 어기고 집을 지었으며, 조정에서 또 집 값을 주고 재목을 주었는데도 감히 원망을 하니, 경은 마음에 있는 바를 진달하라."
하니, 정상순이 말하기를,
"어사가 직접 들은 말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윤면동(尹冕東)이 상서하여 자기 변명을 하였다. 처음에 위흥조(魏興祖)의 공사(供辭)에 ‘병든 첩을 결박하고 재물을 약탈하여 짐바리로 실어갔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름을 동(東)자로 고쳐서 명족(名族)에게 부탁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윤면동이 이때에 와서 변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위흥조가 윤면동을 경멸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공사가 어떻게 그처럼 해괴하고 패악할 수 있겠는가? 어사란 잘 가려서 임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황해도 서흥(瑞興) 총수참(叢秀站)에 불이 나서, 특명으로 대호(大戶)에게는 쌀 10두(斗), 중호(中戶)에게는 8두, 소호(小戶)에게는 7두를 그 고을의 모곡(耗穀)으로 내어 주게 하였다.

 

3월 12일 정사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윽이 예문관의 고사를 살펴보건대, 문형(文衡)의 관직이란 일찍이 한번 역임한 자를 더러 다시 제수하더라도 반드시 추천과 권점의 과정을 다시금 거친 뒤에야 비로소 하비(下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성법(成法)으로서 아주 엄격하여 3백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 아직 고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받은 은제(恩除)가 아무리 역임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천망(薦望)을 거치지 않고 곧장 특명으로 제수하신다면, 엄격한 격례(格例)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죄인을 친히 국문하였는데, 죄인 고치룡(高致龍)이 2차의 형문(刑問중)에서 공술하기를,
"청윤(淸潤)이라는 중과 이광필(李光必)이 말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국문을 우선 멈추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후일(愼後一)은 서면 납초(書面納招)의 조어(措語)가 오만하기 때문에 1차 엄형을 가한 바 그만 물고되었으니 불쌍하게 되었다. 해조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라. 신귀중(愼龜重)의 아내는 지난해 권두령(權斗齡)이 신후담(愼後聃)을 찾으러 왔을 때에 의리를 내세워 쫓아버렸고, 이제 신후일의 말을 듣건대, 그의 아들을 시켜 거느리고 오도록 하였다고 하니, 부인의 처사로서는 가상스런 일이다. 본도로 하여금 옷감을 후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원인손(元仁孫)에게 수원(水原)의 양전(量田)에 관한 일을 물었는데, 원인손이 말하기를,
"무인년022)   개량(改量)이 백징(白徵)의 폐단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김효대(金孝大)가 개량할 때에는 1천여 결(結)이 감해졌는데, 5백 결이 백징의 탕감에 들어 있었고, 윤동승(尹東昇)이 개량할 때에는 2백여 결이 남았는데, 더러는 신기(新起), 더러는 승등(陞等)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등은 지나친 일이다. 아래에 이익을 도모하려는 정책이 도리어 윗사람에게 이익을 더해 주는 방도가 되었으니, 사정(査正)만 하고 승등은 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윤면동(尹冕東)의 상서를 보고 말하기를,
"어사의 체통이 이담(李潭)·윤면동에게서부터 실추되었다."
하였다.

 

3월 14일 기미

간원 【정언 이정오(李正吾)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이현급(李賢汲)이 납공(納供)한 뒤에 헌신(憲臣)이 다시 글을 올렸는데, 증거가 분명히 있습니다. 글과 공술한 것이 서로 판이하게 다른 만큼 가벼운 감죄(勘罪)로 끝낼 수는 없으니, 청컨대 이현급을 나문하여 엄히 다스리소서. 죄수의 납공이 욕설로 나오고 대서(對書)로써 번갈아 가며 변명한 것만 하여도 이미 진신(搢紳)에게 수치를 주었는데 짐바리를 실어 갔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니, 윤면동이 과연 이를 범하였다면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율문(律文)이 있는 만큼 한번쯤의 분명한 사핵은 결단코 실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엄히 사핵하도록 하소서. 정언유(鄭彦儒)는 노쇠하고 혼암하여 의언(議讞)의 책임을 맡기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현급·윤면동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처분하였으니, 이처럼 사핵을 시행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체(事體)의 소관으로 보아서라도 따르지 않겠다. 정언유는 아직 기력이 좋은데, 사람을 어떻게 이처럼 논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범질(范質)023)  의 시를 외고 나서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오늘날 사람들의 약석(藥石)이다. 전관(銓官)이 나아가기에 조급한 사람을 쓰지 않는다면, 모두 제 분수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지경연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며칠 전 정언형(鄭彦衡)을 발탁하여 등용한 것은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이러한 일은 기필코 분수를 모르는 자들의 선망이 되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대개 위에서 뜻밖의 은전이 있으면 시위(侍衛)에 들거나 연석(筵席)에 오른 자들이 모두 바라고 넘보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말이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창수(李昌壽)에게 이르기를,
"대장(大將)을 문책한 뒤에 병부(兵符)를 환납하도록 명하였으면 경으로서는 합부(合符)의 문제로 쟁집(箏執)하여야 할 것인데 경이 친히 환납하였으니, 내가 볼 때 이것은 격식을 어긴 처사이다."
하고, 이어 일체 전례를 따르라는 전교를 내렸다.

 

임금이 관풍각(觀豊閣)에 나아가 관경(觀耕)하고 이어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내려 8도의 도신(道臣) 및 양도(兩都)의 유수(留守)를 신칙하였다.

 

3월 15일 경신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3월 16일 신유

이영휘(李永暉)·정상순(鄭尙淳)·홍인한(洪麟漢)·홍양한(洪良漢)·이사관(李思觀)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중 청윤(淸潤)을 친히 국문하였는데, 1차 형문에서의 공술이 고치룡(高致龍)의 공사와 서로 어긋나서 장적(帳籍)을 참고한 바, 청윤의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광필(李光弼)을 잡아 올 때까지 기다렸다.

 

전교하기를,
"정언유(鄭彦儒)가 늙고 혼암하다는 말은 너무도 가당치 않다. 이른바 ‘전착(顚錯)되었다.’는 말은 무슨 일을 가지고 지척한 것인가? 그러나 형편상 행공(行公)하기는 어려우니 체직하고, 그 대임에는 이태화(李泰和)를 제수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준천(濬川)의 대책은 역시 모색하기 어려운 일이더니,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 이미 조그마한 책자를 하나 만들도록 명하여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책이 완성된 뒤에는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만약 계속하여 신칙하는 방도가 없으면 전공(前功)이 아깝게 되니, 제언사(堤堰司)의 사례에 의하여 병조 판서·한성 판윤·삼군문 대장이 준천사(濬川司)를 예겸(例兼)하고 삼군문 참군(參軍)이 준천사 낭청(濬川司郞廳)을 예겸하되, 참군을 역임한 다음에 우선으로 도총부(都摠府)에 의망할 것을 전조에 신칙하라."
하였다. 임금이 홍봉한에게 묻기를,
"준천한 뒤에 몇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준천의 역사에 역민(役民)이 여러 십만 명이나 동원되고 경비(經費)도 십만여 전(錢)이나 소모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린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인가? 준천한 곳을 보건대 하나의 시내를 소통한 것에 불과한데도, 공사를 주관한 사람이 아첨하기에 급급하여 지나친 과장을 하였다. 홍계희가 사실을 기록하여 두자고 계청한 것과 홍봉한이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는 자가 많았다.

 

3월 17일 임술

김상로(金尙魯)·이후(李)·민백상(閔百祥)을 다시 정승에 제배하였다.

 

3월 19일 갑자

임금이 명정전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를 행하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별호이다.】  및 삼학사(三學士)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이다.】 의 자손으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을 전정(殿庭)에 동참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이 장전(帳殿)에만 참석하고 차대(次對)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하매, 홍지해(洪趾海)가 말하기를,
"대사간 황합(黃柙)이 연이어 장전에만 입시하고 차대에 입시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민백상이 말하기를,
"장관(長官)을 이미 처분한 이상 까닭없이 입시하지 않은 차관(次官)도 일체로 처분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함께 파직하라고 하였다.

 

송형중(宋瑩中)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승지 이영휘(李永暉)·이사관(李思觀)이 전라 감사의 장계에 이정석(李廷奭)이 무신년024)  의 잔당으로서 이름을 바꾸어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이제 와서 발각되었으니, 그를 나문하여 끝까지 캐어 내어야 된다고 한 일로 해서 입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석이 이장욱(李長郁)의 아들로서 박필현(朴弼顯)의 심복이 되었고 무신년에 태인(泰仁)의 초관(哨官)이 되어 삼천(三川)에 간 자인데, 이제 감히 양소(兩所)에서 이름을 바꾸고 제 아비의 본명을 속이어 불법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붙잡혔다니, 예사로 처리하여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장욱이 박필현의 편지를 가지고 정사효(鄭思孝)에게 왕래한 일은 다시금 그의 아들에게 묻지 않아도 된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결안(結案) 취초를 한 뒤에 군위(軍威)를 크게 베풀어 삼천에서 효시하도록 하고, 처자식은 해부로 하여금 연해 고을의 노비를 삼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협박에 못 이겨서 따른 자는 묻지 말 것을 무신년에 이미 하교하였으므로, 간혹 염탐을 통하여 찾아낸다거나 또 떠도는 비방의 말을 통하여 포착할 것 같으면, 임금의 명령이 당연히 믿을 수 없게 되어 사람들이 장차 발돋움하고 바라보면서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만일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당연히 감영에 가서 직접 의논하여 지휘를 기다려야 함에도, 한낱 겸관(兼官)이 지레 이런 일을 하였으니, 뒷날의 폐단을 막고 민심을 진정시키는 도리에 있어서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금구 현령(金溝縣令) 이명록(李命祿)을 특별히 파직하라."
하였다.

 

3월 20일 을축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는데, 원손(元孫)이 시좌(侍坐)하였다. 의금부의 초기(草記)에 이의로(李宜老)를 석방하여 보낼 것을 판하(判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망장(補亡章)으로 본다면 고서에도 역시 격물장(格物章)은 있었다.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은 ‘보망장이 없더라도 문리는 이어진다.’고 하였는데, 특진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선정의 생각은 문세(文勢)의 접속만 논한 것이므로, 이단들이 치지(致知)를 배척한 것과는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원손에게 묻기를,
"하루에 두 번씩 강학(講學)하는 것이 피로하지 않은가?"
하니, 원손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피로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감(敢)’ 자의 대답에 의미가 있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강학(講學)은 모름지기 이른 때에 하여야 되니,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의 이 말이 어찌하여 나왔는가? 네 마음에 밉지 않는가?"
하니, 원손이 대답하기를,
"그 말은 잘 성취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답이 완연히 변화하였다. 네가 이를 알고도 강학에 부지런하지 않는다면, 중신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역시 나를 저버리게 된다."
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고치룡(高致龍)을 한 번 형문하였다. 연(輦)이 강서원을 지날 적에 박성원(朴聖源)을 앞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문장의 뜻 외에도 가언(嘉言) 선행(善行)과 사물의 명수(名數)로서 알기 쉬운 것들을 때때로 반복 변론하여 원손으로 하여금 실제의 소득이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박성원이 말하기를,
"원손께서 ‘진선 폐사(陳善閉邪)’ 네 글자를 써 내리시기에, 신이 앙달하기를, ‘각하(閣下)께서 이 네 글자를 써 내리신 만큼, 소인이 이 네 글자를 가지고 사항에 따라 진간(陳諫)하겠습니다만, 각하께서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또한 이를 써 내리신 본뜻이 아닙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들어보니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마땅히 권강(勸講)의 자리에 오래 있도록 하리라."
하였다.

 

3월 21일 병인

전교하기를,
"고치룡(高致龍)은 남을 무함하지도 않았고 또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으니, 특별히 일률(一律)025)  을 용서하고 흑산도(黑山島)로 정배하라. 청윤(淸潤)은 말마다 거짓으로 꾸미는가 하면, 잡술(雜術)을 가지고 나쁜 무리들을 종용하였으니, 그냥 놓아 줄 수는 없다. 단천부(端川府)로 정배하라. 이광필(李光弼)은 잡류들과 교결하여 되지도 않은 말을 지껄여서 고치룡의 구실거리를 만들어 주었으니, 청윤에게 비교하여 볼 때 죄가 더 무겁다.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하라."
하였다.

 

3월 23일 무진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함경 감사가 장청(狀請)한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인삼 무역의 혁파에 대한 일을 가지고 아뢰기를,
"변경의 금방(禁防)을 소홀히 함에 관계된다면, 후환을 생각하는 방도에 있어 강제로 바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제거할 것을 허락하심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지평 이득배(李得培)가 소회(所懷)를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고 치체(治體)에 숙련되셨으면서도 어찌 우물쭈물 침묵만 지키다가는 기어코 나라를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여러 신하들은 지성으로 성심(聖心)을 개도(開導)하는 일이 없고, 성상께서는 옛 습속을 답습(踏襲)하여 떨치지 않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수십년 동안 풍속이 날로 저하된 나머지, 지금인즉 백관들이 서로 바로잡는 것마저도 도무지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유폐(流弊)는 공론을 꺼리지 않고 불법을 자행하는 데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은 아첨을 떨기에만 힘쓰고 단 한 사람도 힘을 내어 정론 직언을 펴는 자가 없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어찌 역대 범주(凡主)처럼 직언을 듣기 싫어하시겠습니까마는, 단지 행여 대신(臺臣)이 협잡하는 바가 있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른바 당론(黨論)이라는 것이 이제는 이미 여지없이 타파되었습니다. 대개 을해년026)   이전인즉 역적을 토죄하자는 논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위아래가 서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주상께서는 불신하는 마음이 있었고 신하들은 저절로 격의(隔意)가 있어, 대각(臺閣)에서 한번 탄핵을 하면 번번이 조제(調劑)하는 신하를 배격하고 탕평의 정책을 저지하는 것으로 의심하셨으나, 지금인즉 온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전하의 조제하는 신하 아닌 자가 없습니다. 이것으로써 대각을 의심하신다면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국가에는 반드시 가법(家法)이 있어서 나름대로 계승한 것은 대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몸소 실행하는 데 아주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금후에 사왕(嗣王)께서 전하의 고심하신 점은 모르고 오늘날의 규모만을 가지고 당연하게 보아 넘겨서 간언(諫言)을 거절하여 마지 않는다면 얼마 동안이나 망국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기색을 볼 때 오로지 작록(爵祿)만으로 부리어 뭇 신하들에게 잇속만 추구하는 마음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잇속을 탐내는 무리들이 제가 지킬 바를 버리고 다시는 고기(顧忌)하지 않아서 이에 잇속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고 의리는 가볍게 여기는 바가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달의 내용이 점점 사특한 길로 들어가고 있다. 흰 머리 늙은 나이에 또 작록으로 신하를 부린다는 말을 듣고 보니, 나의 마음에 부끄럽다. 특별히 체차하라."
하였다. 대사간 송형중(宋瑩中)이 말하기를,
"헌신(憲臣)이 처음으로 연석(筵席)에 올랐다가 금방 견책을 받고 체직된다는 것은 참으로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매, 임금이 유신 김화진(金華鎭)에게 이르기를,
"경도 소회를 진술하라."
하였다. 김화진이 말하기를,
"앞뒤로 진언(進言)을 한 신하들이 죄를 당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모두들 우려하고 민망해 합니다. 이번에 대신(臺臣)이 또 진언으로 죄를 얻는다면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신(兩臣)의 아뢴 말이 옳다. 앞서의 전교를 특별히 정침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3월 25일 경오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전배와 봉심을 하고, 이어 익릉(翼陵)과 경릉(敬陵)에도 나아가 전배와 봉심을 한 다음, 순회묘(順懷墓)를 들러서 재실로 돌아왔다.

 

3월 26일 신미

명릉에 친제를 거행한 뒤에 창릉(昌陵)으로 나아가 전배와 봉심을 하고, 이어 홍릉(弘陵)에 나아가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한 다음, 고양(高陽)의 주정소(晝停所)로 들어가서 수령(守令)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고 경기 감사와 지방 관리에게는 호피(虎皮)와 궁시(弓矢)를 내려 주었다. 또 고양의 죄수들을 중죄인 외에는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고, 고양·양주(楊州)의 대동세(大同稅)를 〈결(結)에〉 3두(斗)씩 특별히 감축하라고 명하였다. 또 북한산 총섭(北漢山摠攝)에게 명하여 내일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길가에 꿇어앉아서 영접하라고 한 다음, 이어 소녕원(昭寧園)으로 나아갔다.

 

3월 27일 임신

임금이 소녕원에 나아가 친제를 거행하였다.

 

3월 28일 계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경기 감사와 각무 차원(各務差員)을 소견하고 농사 상황을 물었다. 임금이 서북 지방 내지(內地)의 무사(武士)가 상언(上言)을 한 것은 바로 병조 판서가 인도하였기 때문이라 하며,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의금부에 내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3월 29일 갑술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강원 감사의 장문(狀聞)으로써 강릉(江陵)·평해(平海) 두 고을의 민가가 전소된 집이 2백 68호에 이르고 불에 타서 죽은 사람도 18명에 이르므로 그 납부할 전세와 대동미를 가을에 가서 바치도록 할 것을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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