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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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해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상참을 행하였다. 우의정 민백상이 대사간 송형중(宋瑩中)이 까닭 없이 패초를 어겼다는 이유로 파직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연희문에 나아가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소견하고 금천교(禁川橋)에 임하여 하교하기를,
"구궐(舊闕)의 남쪽 수구(水口) 아래 냇가에 지은 집을 준천소로 하여금 값을 쳐주도록 하라. 본궁(本宮)의 남쪽 담장 바깥은 지금 채전(菜田)으로 되어버려 임금이 탄생한 옛 궁궐이 마치 들판에 있는 것처럼 쓸쓸하다. 이러한 때에 인가(人家)를 권유하여 들여보내며, 성 안의 빈 집터를 사전(私田)으로 삼지 못하도록 하고 준천소에 소속시킨 다음, 한 점포를 동촌(東村)에 권유해 들여보내어 백성을 위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는데, 대개 홍봉한의 아룀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는데, 검토관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서 지성(至誠)에 도달하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현종께서 신독(愼獨)으로써 재명(齋名)을 지은 것도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한 것인데,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된다는 것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지경연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인군이 신하들을 인접할 적에는 저절로 단속을 하지만 연거(燕居) 때에 가서는 게을러지고 방종하기가 쉬우므로, 듣지 않고 보지 않는 데에서도 공구(恐懼)·계신(戒愼)을 하고 나서야 성(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는 방도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였다.

 

4월 2일 병자

임금이 인정전 월대에 나아가 서계(誓戒)를 받았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특별히 하유하여 사신(史臣)과 함께 들어오라고 하였다.

 

4월 3일 정축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동래 부사에게 명하여 재임 중에 일어난 신고(身故)가 아니면 나문 또는 삭직을 당하더라도 아직 교귀(交龜)027)  하기 전에는 변정(邊情)에 관한 장문(狀聞)의 거래를 전례대로 거행하고 도신(道臣)이 대리로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장령 황최언(黃最彦)이 아뢰기를,
"진서(陳書)의 길이 열려 있는 이상 진언(進言)할 계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생각건대, 여염집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남이 부형의 말을 그의 자제에게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지존(至尊)·지경(至敬)의 자리이겠습니까? 비록 충성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하여도 감히 그 말을 소조(小朝)께 다 말하지 못하고 소조께서도 역시 전하께 번거로이 여쭙기 어려우니, 전하께서 무슨 방법으로 직언(直言)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내용이 편당(偏黨)의 습성이 많으니, 편당의 버릇을 위하여 시비를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4월 4일 무인

윤동섬(尹東暹)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라도 유생 오시유(吳時裕) 등이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를 정읍(井邑)의 고암 서원(考巖書院)에 추배(追配)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선정(先正)의 학문과 행적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나, 사체가 중대하기 때문에 번거로이 품청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곤전(坤殿)의 책봉사(冊封使)가 들어왔는데, 상사(上使)에게는 구마(廐馬)를 내려 주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며, 또 차등 있게 각각 전민(田民)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4월 5일 기묘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영의정 김상로(金尙魯)를 인견하고 말하기를,
"경은 이득배(李得培)의 일을 어떻게 보는가?"
하였는데, 김상로가 말하기를,
"대간 거특(大奸巨慝)이라는 말이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는 몰라도, 끝마무리의 내용이 없는 것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대간의 말이 설혹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더라도 진실로 다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데 지레 처분을 하셨으니,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아량에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우의정이 천거한 두 사람은 참으로 좋습니다. 황인검(黃仁儉)은 이미 승탁(陞擢)되었고, 정실(鄭實)은 사람됨이 염정(恬靜)하므로 발탁하여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이최중(李最中)은 개결(介潔)하고 신조가 있어서 권장하여 쓸 만하며, 이유신(李裕身)이 쓸 만하다는 것은 전에 이미 앙달하였습니다. 만약 주상께서 발탁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수용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실은 당습(黨習) 내력이 있는 듯하고 이최중은 끝내 시원스럽지 못하며, 이유신은 너무 늙었다."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정실은 본래 당습의 내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이최중은 강명(剛明)하여 재간이 있어서 큰 일을 맡을 만하며, 이유신은 정력으로 보아 극무(劇務)도 맡을 만합니다."
하였다.

 

4월 6일 경진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의 체직을 허락하니, 대개 제수를 받고서 행공(行公)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안면도(安眠島)의 금송(禁松)을 베어낸 일로 해서 전 수사(水使) 장지풍(張志豊)을 10년을 한정하여 금고(禁錮)하고, 구병훈(具秉勳)은 5년을 한정하여 금고하며, 임시척(任時倜)은 고신 삼등(告身三等)의 율(律)을 적용하고, 당해 수령과 변장은 먼저 파직한 뒤에 나문을 하여 5년 동안 수령과 변장의 의망에 올리지 말도록 하였다. 또 장산곶(長山串)의 금송을 베어낸 일로 해서 수사 이관상(李觀祥)은 고신의 율을 적용하고 해당 변장은 3년 동안 정배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황최언(黃最彦)이 입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교하기를,
"헌신(憲臣)이 지난번에 ‘말은 황외(惶畏)함에 간섭되어 면주(面奏)가 진장(陳章)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오늘 입시하지 않은 것도 황외하여서 그러는 것인가? 파직하고 서용치 말라."
하였다.

 

4월 7일 신사

달이 헌원성(軒轅星)에 들어갔다.

 

김성우(金聖遇)를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유집(柳)을 삼척 영장(三陟營將)으로, 이찬휘(李纘徽)를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삼으니, 이는 호조 판서 홍봉한의 진달한 바로 인한 것인데, 그의 준천(濬川)한 노고에 보답한 것이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성생(省牲)을 하였다.

 

4월 9일 계미

대제(大祭)를 마친 후에 오간 수문(五間水門)에 임하여 준천 공사를 관찰하였다. 이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약원(藥院)·정원(政院)·옥당(玉堂)에서 청대하여 만류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응교 임준(任㻐)은 홀로 임금의 앞에 서서 청대에 가담하지 않았다가 뒤에 승지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4월 10일 갑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봉조하 유척기(兪拓基)를 소견하고 준천 공사가 잘하는 일인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유척기가 말하기를,
"준천을 하여야 한다는 의논은 신이 늘 주장하여 왔습니다마는, 다만 모래를 운반하는 공역이 너무 커서 이를 어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만 명의 인부와 만여 냥의 재정을 들인다면 모래를 운반할 수는 있겠으나, 지금 이 모래를 모두 천변(川邊)에 쌓아 두거나 길 위에 깔 경우, 모래는 흙과 달라 장마가 져서 냇물이 넘치면 천변에 쌓아 둔 모래가 저절로 무너져 내릴 수 있고 또 길 위에 깔아 놓은 것도 모두 내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이제 비록 준천을 하더라도 내가 금방 다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망연 자실한 모양으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보면 지혜롭다고 하고 어진 자가 보면 어질다고 하는 법인데, 경은 말하기를 좋은 일이 못된다고 하겠으나 나는 말하기를 좋은 일이라고 하겠다. 이 뒤로는 단 한 삽도 대지 않아도 백년을 안심할 수 있을 것인데, 경은 수작에 방해가 되니, 그만 물러가라."
하고, 이어 석강을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이 성주(星州)에 귀양가 있을 적에 의리로써 많은 교도를 하였기 때문에 무신(戊申)의 변란(變亂)028)   때에 성주의 한 경내만이 반란자가 없었다. 한 사람의 효과도 이러한데, 더구나 임금으로 있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4월 11일 을유

전라도 유생 나처대(羅處大) 등이 또 상서하여 선정신 권상하(權尙夏)를 고암 서원(考巖書院)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2일 병술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에게 시강(試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윤봉징(尹鳳徵)·김치항(金致恒)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4월 13일 정해

삼도(三道) 유생 구복규(具福奎) 등이 상서하여 이산(尼山)에 있는 공자(孔子)의 영당(影堂)에 사액(賜額)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사체가 난중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4일 무자

대제학을 권점(圈點)한 바, 김양택(金陽澤)이 뽑혔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를 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정심장(正心章)을 읽고 나서 유신들에게 이르기를,
"경(敬) 공부에는 네 조항이 있다고 하는데, 정제(整齊)·엄숙한 것과 항상 깨어 있는 법[惺惺法]과 그 마음을 수렴(收斂)하여 한 가지 사물(事物)도 끼어 있지 않은 것을 세 조항이라고 하니, 앞에 보인 각헌 채씨(覺軒蔡氏)029)  의 ‘주일설(主一說)’을 합쳐서 네 조항이 되는가? 일찍이 본 데가 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
하니, 다른 여러 유신들은 대답을 못하였고, 검토관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이연평(李延平)030)  은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정중(靜中)에서 희노 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동되지 않은 때의 기상이 어떠한가를 관찰하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정중에서 대본(大本)을 체인(體認)하라고 하였으나, 《성학집요》에는 ‘생각하는 바가 막 있고 나면 이는 벌써 발동한 것이고, 체인이라고 한 이상 이는 성찰(省察)이지 아직 발동되지 않은 상태의 기상은 아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그러합니다. 다만 그 밑에 가서 또 ‘정시(靜時)에 가벼운 마음으로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의 기상을 되돌아 본다면 진학(進學)과 양심(養心)에 반드시 보탬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함양(涵養)을 가리킨 말입니다."
하였다.

 

4월 15일 기축

임금이 휘령전의 망제(望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4월 16일 경인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준천소의 당상과 낭청에게 시사(試射)를 행한 뒤에 잔치를 베풀어 주고 이어 친정(親政)을 명하여 도청 허급(許汲)·원중회(元重會)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내준천 당상(內濬川堂上) 홍낙성(洪樂性)에게도 역시 가자하였으며, 행 사직(行司直) 정여직(鄭汝稷)은 후전(帿箭) 네 개를 맞혔다 하여 가자하였다. 이창의(李昌誼)·홍계희(洪啓禧)·홍봉한(洪鳳漢)은 품계가 보국(輔國)으로 주좌(籌坐)에 참여하기가 곤란하다고 사양을 하매, 임금이 그들의 말을 좇아 가자하지 않았는데, 당시 사람들 사이에 개천 당상(開川堂上)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이에 앞서 홍봉한이 부역온 군민(軍民)의 성책(成冊)을 연융대(鍊戎臺)에서 세초(洗草)하고 이어 잔치를 베풀 것을 청한 바, 임금이 윤허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또 시사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처음에 민백복(閔百福)에게도 가자하였는데, 대신과 준천 당상들의 말에 ‘민백복은 일시적인 수고가 있었을 뿐이므로 가자를 하는 것은 지나친 은전이라.’고 하기 때문에 임금이 특별히 그 명령을 그만두고 전조로 하여금 곤임(閫任)에 비의(備擬)하도록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원중회는 노모가 있어서 봉양하기 편리한 곳으로 부임(赴任)하기를 소원하는데, 영변 부사(寧邊府使)의 과기(瓜期)가 가까웠으며, 민백복은 곤임에 제수함이 급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어 개정(開政)을 명하고 이르기를,
"조화를 부려야 되겠다."
하고는 영변 부사 이방수(李邦綏)를 오위 장(五衛將)에 특별 제수하고 원중회가 끝내 그 대임이 되었다. 민백복을 전라 수사로 삼았는데, 민백상이 연주(筵奏)에서 서둘러 비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함으로 해서 부임하지 못하였다.

 

4월 17일 신묘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원점(圓點)받은 유생(儒生)을 강규(講規)에 따라 제술(製述)을 먼저 시험하도록 명하고, 수석을 차지한 생원 이영봉(李榮鳳)에게 급제를 내렸다.

 

임금이 준천 공역이 잘된 일인지의 여부를 여러 고관(考官)에게 물었는데, 성천주(成天柱)·서명응(徐命膺)만이 대답하기를,
"해마다 폐지하지 않는다면, 거의 막힘에 대한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유척기(兪拓基)에게 벌써 말하였다."
하였다.

 

4월 18일 임진

유성이 방성(房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 【지평 김양심(金養心)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풍헌(風憲)의 장관이란 지위와 명망이 아주 중대한 자리입니다. 전 대사헌 이득종(李得宗)은 천성이 우매하고 처신이 천루하여 종전 재임(在任) 때에 이미 많은 물의를 빚었고 지난번 연경(燕京)의 사행(使行) 때에도 비루하고 조잡한 짓을 많이 하여 탐욕스럽고 누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은 대사헌의 직임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도승지 구윤옥(具允鈺)은 사람됨이 경박하여 지신사(知申事)의 직임에는 본시 걸맞지도 않거니와, 하급의 동료가 승진을 하면 장관(長官)이 질병을 핑계로 사임하는 것은 전통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승진한 사람이 부적격한 사람이라는 핑계로 수모를 참고 버티며 해면(解免)할 뜻이 없으니, 염치를 망각하고 진신(搢紳)에게 수치를 끼침이 극단에 달하였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괴원(槐院)031)  의 제거(提擧) 역시 명선(名選)의 자리인데, 과분하게 새로 차출되어 물의가 더욱더 격렬합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고 승문원 제조도 개정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전 보덕 심익성(沈益聖)은 학식이 전혀 없는데다 또 우둔하고 용렬하며 전 문학 윤면동(尹冕東)은 본시 경망하고 교사스런 무리로서 권세에 따르는 것만을 일삼았으며, 이 직임을 맡게 되자 공론이 아주 울분해 합니다. 청컨대 함께 개정하소서. 이성억(李聖檍)의 비루함과 남언욱(南彦彧)의 용렬함으로도 연줄을 타서 함부로 천망되었으니, 인심이 온통 놀라와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는 아장(亞長)·납언(納言)의 천망에 올리지 말도록 하소서. 정문주(鄭文柱)의 비굴함과 김낙수(金樂洙)의 한미함과 권사언(權師彦)의 추잡함으로도 연줄을 타서 청탁을 하여 함부로 기주관(記注官)에 천망되었는데, 지난번 대간의 서계(書啓)에서 이 천망을 논평하면서도 정환유(鄭煥猷)만을 거론하였습니다. 정환유의 지벌(地閥) 범백(凡百)이 어찌 이 무리들만 못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논함이 유독 정환유에게만 미쳤으니, 인심이 놀라와 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들을 천망에서 삭제하고 천망을 주장한 사람 역시 견책하여 파직하도록 하소서. 정익량(鄭益良)·위흥조(魏興祖)가 어사의 문목(問目) 외에 무함하고 욕설을 한 것은 뒤따른 폐단이 적지 않은데도, 정익량을 수월한 땅에 가벼운 유배를 한 것은 오히려 말감(末勘)032)  이라 하겠고, 위흥조를 사적(仕籍)에서만 영원히 지워버린 것은 더욱 너그러운 치죄입니다. 청컨대 대조(大朝)께 앙품하여 위흥조를 속히 먼곳으로 유배하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따르지 않았고, 윤동면의 일은 상달한 대로 따랐다.

 

4월 19일 계사

홍낙성(洪樂性)·임준(任㻐)을 승지로, 서명응(徐命膺)을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교(驕)’의 한 글자는 실로 나라를 망치는 근본인데,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여서 아직 공부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겸연쩍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내가 《대학》을 강론한 횟수가 적지 않은데도 실효는 없다. 이제는 내가 유신으로 하여금 나에게 ‘아무 일을 실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게 하여, 내가 실행한 것이 있으면 ‘이미 실행하였다.’고 답하고, 만일 실행하지 못하였으면 ‘아직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답할 것이다. 무엇하러 꼭 구절 구절이 강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소공(召公)033)  이 여오(旅獒)034)  를 지어 성왕(成王)을 경계할 때 마치 어린이를 타이르듯이 하였다. 삼대(三代)035)  의 도유 우불(都兪吁咈)036)  이 어찌 성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고 한갓 외면으로만 한 것이었겠는가?"
하니, 지경연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유신으로 하여금 실행 여부를 묻도록 하신다는 하교는 참으로 좋습니다. 국가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용인(用人)과 용재(用財)에 달려 있으니, 인군이 만약 사심에서 좋아하는 것으로써 용인·용재를 한다면, 이는 백성이 좋아하는 바가 아니므로,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당연히 좋아하고 남들이 미워하는 바를 역시 미워하여야 됩니다. 감히 이것을 가지고서 전하께 이미 실행하셨는지의 여부를 우러러 묻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공도(公道)만 따랐다고야 하겠는가? 그러나 백성들이 좋아하고 미워함도 역시 똑같지 않다. 준천 공사로 말하더라도 아직 준공되기 전에는 경이 호조 판서와 함께 하는 말이, 반드시 백성들이 비난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백성들 역시 좋아하고 미워함에 있어 공과 사가 있겠으나, 필경에는 다 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준천 공사만 해도 처음에는 이론이 있었으나 끝내는 하나로 귀결되었으니,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에서 나왔다는 것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행 좌승지(行左承旨)가 여러 날 행공(行公)하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던 일인데, 이것을 가지고 배척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다. 그 의도가 지신사(知申事)의 말을 빌어 재신(宰臣)을 배척하자는 것으로서, 이는 한번 쏘아서 둘을 맞히자는 의도이니, 그 심사가 더욱 부정하다. 아! 들뜬 무리들이여, 《대학》의 혈구장(絜矩章)과 《서경》의 진서편(秦誓篇)을 세 번씩 읽어서 각자 힘써야 되겠다."
하였다.

 

4월 20일 갑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원경순(元景淳)이 강화부가 절수(折受)받은 옛 목장의 수세(收稅)를 1부(負)당 1두(斗)씩을 거두어 수성소(修城所)에 보내어 공용에 쓰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이, 심일진(沈一鎭)의 모자(母子)가 파양(罷養)의 일로 해서 혈서로 단자(單子)를 써 올린 것을 진달하고, 또 심일진의 아들 심익운(沈翼雲)이 손가락을 자른 일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익운의 인물로 보아 손가락을 자를 만도 하다. 그러나 심일진의 혈서를 썼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 밖이다."
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신주 파양(神主罷養)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광진(金光進)은 과연 훌륭했으니, 이는 단지 부자간의 윤리(倫理)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하매, 정휘량이 말하기를,
"김광진의 일이 비록 훌륭하기는 하나 그를 녹용하라는 하교가 아마도 국법이 아닐 듯합니다. 외손은 저절로 연좌(緣坐)가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렴(元景濂)의 일은 너무 잘못되었다.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에 영혼이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인륜(人倫)이란 한번 정하여진 뒤에는 다시 고칠 수 없다. 그런데 무신년037)   이후로 그 폐단이 이미 있었고, 을해년038)   이후에 와서 폐단이 한층 더 심하여졌다. 저번에 한 가지 사건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여겼더니, 이제 심사순(沈師淳)의 아내와 심일진의 혈서 소식을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이 뒤로는 부자나 부부 사이의 법을 벗어난 이러한 행위는 일체 엄금하고, 이런 등의 상언(上言)은 정원에서 절대 예하(例下)하지 말 것이며 혹시 등문(登聞)하더라도 단자를 올리는 것 역시 해조로 하여금 곧바로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저번에 김광진에 대한 하교도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련되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심일진은 바로 심사순의 양자이고, 심사순은 역적 심익창(沈益昌)의 손자로서 출계(出繼)하여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縣)의 적손(嫡孫)이 되었는데, 심씨 일가에서 역적 심익창의 누(累)로 인하여 심사순을 파양(罷養)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사순의 아내가 심일진과 함께 혈서를 쓴 것이다. 그 뒤에 김상복(金相福)·홍봉한(洪鳳漢)의 무리가 심일진의 부자를 애써 두둔하여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심사순을 파양하고서는 심일진의 망부(亡父)로 도위(都尉)의 적손을 삼고 심사순의 아내로서 심일진의 시양모(侍養母)를 삼았다. 대저 왕이란 아무리 명령을 내는 자라 하지만 주고받는 절차가 있는 연후에 주는 자는 왕명을 받들어 그의 아들로써 아무개의 아들을 삼게 하고, 받는 자는 왕명을 받들어 아무개의 아들을 받아서 제 아들을 삼는 것이 바로 예법이다. 심일진은 도위의 전지(田地)와 저택을 이롭게 여기고 또한 심익창의 연루를 숨기어 스스로 이미 죽은 아버지를 도위의 손자라 일컬으며 그 신주를 사당에 들여놓았는데, 저 뼈가 벌써 썩은 자가 누가 아버지로 되고 누가 아들로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사람으로서 윤리가 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원경렴은 이명언(李明彦)의 사위로서 이명언이 추탈(追奪)을 당한 뒤에 이미 죽은 아내를 이혼(離婚)하고 계처(繼妻)의 아버지로 전처(前妻) 자식의 외조부를 삼았으니, 역시 인륜을 너무 무너뜨린 행위이다. 아! 개탄스럽도다.

 

4월 21일 을미

화성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4월 23일 정유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각 군문과 준천소 군병의 시방(試放)에 친림(親臨)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승마(乘馬)에 있어 능행(陵幸) 때의 전례를 썼는데, 이에 앞서 삼공(三公)이 차자를 올려 시방을 하겠다는 명령을 도로 정침하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에서 또한 차자를 올려 도로 취소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하천을 서생(書生)의 붓으로 파낸다는 말인가? 오늘날 서생의 말들이 대개 이러하다."
하매, 지경연 이창수(李昌壽)가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도로 거두어 들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날이 저물어 말을 타고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4월 24일 무술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시방(試放)하였는데, 구선행(具善行)이 훈국(訓局) 군병의 사습(私習)도 금위영·어영청의 사례대로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최진해(崔鎭海)가 양서(兩西) 지방에 추가 군량미를 진휼청에서 3냥(兩)으로 값을 정하여 총융청으로 수송하고 쌀은 진휼청에서 가져다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날이 저물어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4월 25일 기해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시방(試放)하고 날이 저물어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4월 26일 경자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시방을 마친 뒤에 말을 타고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4월 27일 신축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친림하여 시방 입격자에게 상을 내렸다.

 

4월 28일 임인

양주(楊州) 유생 이수형(李修亨) 등이 상서하여 고 징사(徵士) 김창흡(金昌翕)을 석실 서원(石室書院)에 추가 배향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사체가 중대한 만큼 자주 품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답하였다. 대저 김창흡의 위대한 행적과 뛰어난 절조며, 고명한 문장과 깊은 학문은 세상에 드문 대유(大儒)라 할 만하다. 그의 아버지 그의 형과 함께 같은 사당에 향사(享祀)함이 마땅한데 지금까지 거행되지 않았으니, 사류(士類)들의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신만희(申萬熙)는 영남의 연해변으로 정배하고, 장제백(張齊白)은 북병영(北兵營)으로 보내어 군위(軍威)를 베풀고 삼군(三軍)에 조리돌린 다음 곤장 30대를 쳐서 종신토록 삼수부(三水府)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시사(試射)에서 부료 군관(付料軍官)으로 대신 시사한 자를 잡아 왔는데, 서도(西道)의 소임 신만희는 무고(誣告)하였음을 자복하고, 북도(北道)의 소임 장제백은 시종 속였다. 이 때문에 서북도의 별부료청(別付料廳)을 혁파하고 이어 두 사람에 대한 처분을 내린 것이다. 영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장천용(張天用)은 쓸 만한 사람이니, 변방에 수령으로 발탁해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방 방어사의 빈자리가 있으면 즉시 녹용하되, 그 이전에 먼저 내장(內將)에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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