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갑진
일식이 있었다.
5월 2일 을사
좌의정 이후(李)가 차자를 올려 서북도의 별부료청을 혁파하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의 사태는 저들이 빚어낸 것인데, 국가의 체모로 보나 국가의 기강으로 보나 지금 경의 이 차자는 경을 위하여 개탄스럽다."
하였다.
5월 6일 기유
심발(沈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곤전(坤殿) 책봉 칙사가 들어왔는데,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칙서를 맞이하여 인정전으로 돌아와서 연향례(宴享禮)를 거행하였다. 연향례를 파한 뒤에 전정(殿庭) 월대(月臺)까지 전송을 나가서 세 번 읍양(揖讓)한 다음 소차(小次)로 들어갔다가 다시 인정전으로 나아가 하례를 받고 반교(頒敎)하였는데, 그 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곤의(坤儀)가 정위(正位)에 있으매 그 광휘가 궁궐 안에 뻗치고, 고명(誥命)을 봉(封)하매 기쁨이 온 나라에 넘치도다. 거룩한 경사를 공손히 받들어 삼가 존호를 올렸노라. 생각건대, 미열한 몸으로 열조(烈祖)의 대업을 이어받았는데, 만년에 훌륭한 비(妃)의 내조를 받게 되었도다. 문모(文母)의 침전에 아름다운 소식을 아뢰매 곧 대륜(大倫)이 바로 서고, 소고(昭考)의 묘정에 효도 다할 것을 고하매 법도에도 잘 맞도다.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하고서 덕음(德音)의 경계 말씀을 번갈아 기다렸고, 의복을 단정히 하고서 함께 제사를 받들겠도다. 양휘(陽輝)가 이를 힘입어 영원히 빛날 것이고, 유교(柔敎)가 이를 따라 크게 빛날 것이로다. 상금(床琴)의 소리가 응문(應門)039) 에 고요함으로부터 육궁(六宮)040) 에서 제자(帝子)의 성탄(聖誕)을 기다리더니, 광조(筐藻)의 예의로 청묘(淸廟)에 알현하매 구복(九服)041) 이 천매(天妹)의 인자함을 노래하도다. 삼가 상전(常典)을 준수하여 드디어 고명(誥命)을 주청하였노라. 궤총(繢總)으로 주헌(珠軒)의 꾸밈을 갖추매 명수(名數)가 이미 융숭하고, 자정(紫庭)에서 금책(金冊)의 영광을 맞으매 행사가 매우 바쁘도다. 중국의 사신이 가까이 와서 황제의 말씀을 멀리 반포하였다. 금채(錦采)가 찬란한 채함(茝函)042) 을 받들매 화기로운 은책이 마냥 흡족하고, 빛나는 새서(璽書)의 지니(芝泥)043) 를 열매 찬란한 구름이 와서 내리도다. 근간하게 호소를 한 바 온 나라가 고대하던 보람이 이루어졌고, 은총이 멀리 내려지매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나오는 은혜를 입었도다. 영광이 미치는 곳에 만물이 다 기뻐하도다. 팔방의 방방곡곡에 다같이 광대한 온공을 입혀서, 백군(百郡)의 모든 과오를 탕척하여 주는 은혜를 내리노라. 아! 욕례(縟禮)인즉 시종 모두 길조(吉兆)에 맞았으니 아마 원근(遠近)이 같은 기쁨을 맛볼 것이고, 휘유(徽猷)인즉 내외가 잘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선령(先靈)의 보우를 힘입게 될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하노니, 마땅히 자세히 알 것이라 생각한다." 【예문관 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지어 올렸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3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註 039] 응문(應門) : 궁정(宮廷)의 정문.[註 040] 육궁(六宮) : 후비(后妃)의 여섯 궁전.[註 041] 구복(九服) : 주(周)나라 시대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사방 천 리 밖 백 리마다 차례로 구역을 정한 지역. 즉 후복(侯復)·전복(甸服)·남복(男服)·채복(采服)·위복(衛服)·만복(蠻服)·진복(鎭服)·번복(蕃服)임.[註 042] 채함(茝函) : 교명함.[註 043] 지니(芝泥) : 붉은 봉인.
하였다.
5월 7일 경술
임금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칙사를 접견하고 환궁하는 길에 휘령전에 들렀다.
초열흘날의 황단(皇壇) 망배례를 임시 중지한다고 명하였다.
5월 8일 신해
임금이 명정전 월대에 나아가 저경궁·육상궁의 전향례(傳香禮)를 거행하였다.
5월 9일 임자
정원에서 아뢰기를,
"별세초(別歲抄)에 대한 전지 중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된 송유(宋瑜)가 급첩(給牒) 대상에 들어 있는데, 송유의 죄범은 관계가 매우 중대합니다. 역괴(逆魁)를 처단한 뒤에 버젓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정상이 망측(罔測)한데, 급첩 대상에 뒤섞여 들어간 것은 엄히 방비하여 뒷날을 징계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속히 정침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따랐다.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사를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의소묘(懿昭廟)에 들렀다.
5월 10일 계축
호조 판서 홍봉한이 아뢰기를,
"관모자(官帽子)의 무역을 변통하는 것은 바로 피폐한 역관을 소생시키는 길입니다만, 간교한 무리가 청나라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누설하여 값을 높게 조종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 뒤로는 청나라 사람들이 만약 값을 올릴 생각이 있다면 사행(使行) 중의 비용을 곧바로 관은(官銀) 중에서 5, 6천 냥을 내어주고 모자는 다시 사들이지 않아서 그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만약 혹시라도 값을 더 높여 주고 매매할 것 같으면 사신은 논죄하고 수역(首譯)은 해당 율문(律文)을 적용하여, 저 사람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절목(節目)의 준엄함을 알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행이 저쪽에 가 있을 경우 공용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역관들에게서 거두어들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변사에서 절목을 작성하여 사행이 가지고 가는 관은(官銀)을 공용에 쓰고 역관들이 모자를 무역하는 것은 절대 금지하며, 쓰다 남은 관은으로 모자를 도매값에 사들인 다음 값을 매겨 시장에 내다 팔아서 그 이익을 용도에 보태어 쓰도록 한 바, 오히려 쓰고 남은 돈이 있었다. 홍봉한이 비록 역관에게 이로움을 주었다고 하지만 저 사람들이 더러는 조선 국왕의 모자라고 일컫기까지 하였으니, 국가에 큰 오욕을 끼쳤다 하겠다.
5월 11일 갑인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고, 또 어제 중용서문(御製中庸序文)을 강하였다.
5월 12일 을묘
윤봉오(尹鳳五)를 대사헌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초열흘날에 황단의 망배례를 행하려고 하였으나, 그때 차마 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어가며 예식을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그만둔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서울에 와 있는 서북도 변방의 무사를 병조 판서로 하여금 모레 시취(試取)하게 하되, 서북도 각기 40명씩을 하여 도합 80명을 뽑고, 입청 요과(入廳料窠)인즉 서북도 각기 10명씩을 하여 도합 20명씩을 뽑으며, 구근(久勤)인즉 도목 때마다 서북도 각기 1명씩 뽑고, 친림 관무재(親臨觀武才) 및 시사(試射) 때의 부료 군관(付料軍官)은 초시를 면제하고, 비록 입청(入廳)하였더라도 아직 부료(付料)가 아닌 자는 기예별로 초시를 보이는데, 호위 군관의 준례대로 거행하고, 소임 군관(所任軍官)은 서북도를 통하여 1명을 뽑되, 병조의 당상 군관 15명 외에서 방어사를 지낸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가려서 차정하여 영솔(領率)하게 하고, 내시사(內試射) 때에 다만 부료 군관만으로 거안(擧案)하되, 원액 중에 결원이 있을 것 같으면 종전처럼 서울에서 차출하지 말고 서북도의 병마사에게 지시하여 일체 금군을 초상(抄上)하는 준례에 따라 취재(取才)를 거쳐서 병조에 보고한 다음 보충하며, 시사를 거행한 뒤에 탈락되어 돌아가는 자는 서북도 병마사에게 분부하여 요과(料窠)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되, 서북도 각기 40과(窠) 중에서 20과는 출신(出身)으로, 20과는 한량으로 하고, 부료 20과에 있어서는 각기 그 재주대로 뽑되, 내시사 때에 출신 가자(加資)와 한량 직부(閑良直赴)를 막론하고, 수위(首位)인 자만을 뽑도록 하라. 내지(內地)의 무사로서 다년간 서울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도태되어 돌아가는 자는 모양이 아름답지 않다. 훈련·어영 양 대장으로 하여금 이들 역시 모레 합좌하여 시취하도록 하되, 양 대장이 10명씩 뽑아서 별도로 군관에 부쳐 두어 요(料)를 주도록 하고, 요과인즉 양영(兩營)이 각각 2명씩 정하되, 결원이 생기더라도 보충하지 말고 이 10명으로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어제 중용서문을 강하였다.
5월 13일 병진
임사하(任師夏)·신응현(伸應顯)·신사운(申思運)·이보온(李普溫)을 석방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경상 감사의 장계로 해서 영남 패선(敗船)의 증렬미(拯劣米)를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종신(宗臣) 권(權)은 인엽(人燁)의 삼촌숙으로서 소(炤)의 사례에 따라 전리(田里)로 쫓아 보내었는데, 갑자년044) 그의 아들 안풍군(安豊君)을 봉할 적에 권에게도 증직을 내렸습니다. 이미 연좌되어 전리로 쫓아 보낸 이상 그 아들의 봉군(封君)으로 해서 그에게도 봉군을 증직하였다는 것은 사체가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증직이 비록 잘못되었다 치더라도 이제는 햇수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내가 종결되지 않은 안건으로 삼아서 그냥 두려고 한다."
하였다.
5월 16일 기미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의 계묘년045) 발문은 바로 추탈 죄인(追奪罪人)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것입니다. 국가의 체모에 있어 그대로 수록할 수 없겠기에 마땅히 당장 품재(稟裁)하여 뽑아버려야 되겠는데, 일찍이 을해년046) 보첩 개수 때에 앙품한 바 이미 뽑지 말라는 하명을 받들었으므로 감히 다시금 번거롭게 앙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삼가 듣자니, 작년에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을 수정할 적에 죄적(罪籍)에 이름이 들어 있는 사람이 지은 글은 그 직질(職秩)을 일체 삭제해 버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선원보략》의 사체가 중대하여 다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갑자기 수록한 것은 일이 일관성이 없는 듯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일찍이 을해년에 하교가 있었고, 또 이미 배진(陪進)을 하였으면 사체가 중대하게 되었다. 내가 어찌 감히 번거롭게 여쭈어 개정을 청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5월 18일 신유
평안 감사 이성중(李成中)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성중은 자질이 아량(雅亮)하고 재주가 통민(通敏)하여 기대한 바가 이 자리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고인(古人)이 되었으니, 옛날 ‘친구의 아들이라’는 하교는 이제 꿈속의 말이 되어 버렸구나. 이 슬픔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아들이 복(服)을 마치는 대로 곧바로 조용(調用)할 것을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성중의 자는 사득(士得)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서 연소배의 추대를 받았고, 을묘년047) 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는데, 윤급(尹汲)이 상소하여 한쪽 사람을 배척하여 〈세자(世子)의〉 대리(代理)를 원수처럼 여길 때 한쪽 사람들이 이를 반박하는 소장을 올리자 이성중이 가담하였으므로, 임금이 달갑지 않게 여겼다. 어느날 이성중이 전정(殿庭)에 입시하러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다가 넘어졌는데,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성중이 당론에는 용감하면서도 전정에서의 종종걸음은 용감하지 않구나.’ 하였다. 이성중이 정우량(鄭羽良)에게 빌붙어서 이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이조 판서에 올랐다가 평안도 관찰사에 나가게 되었다.
정휘량(鄭翬良)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5월 20일 계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남태제(南泰齊)는 문장이 아담하고 재식이 있으며 마음가짐이 공평하여 벼슬에 임하여서는 청렴 검약한데다 또 경력이 가장 오래 되었으므로, 승탁(陞擢)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승탁을 명하였다.
임금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긴 나머지 형조의 삼당상(三堂上)으로 하여금 본조에 숙직하면서 미처 입계(入啓)하지 못한 것일지라도 문안(文案)을 자세히 상고하여 의심가는 데가 있으면 아뢰도록 하고, 정광한(鄭光漢)을 경기 심찰 어사(京畿審察御史)로 임명하여 도신과 한자리에 모여서 녹계(錄啓)하였거나 미처 녹계하지 못한 도내의 문안들을 모두 가져다가 자세히 상고하여 의심가는 것은 상주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교외에 사는 아주 곤궁한 자가 있음을 알았으니, 종신(宗臣)으로서 곧 대은감(帶恩監)과 완창령(完昌令) 형제이다. 이 밖에도 이 같은 자가 또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는데, 구족(九族)을 돌보지 않고 사민(四民)만 돌본다면, 이것이 어찌 〈군자(君子)의〉 혈구지도(絜矩之道)048) 이겠는가? 지금 종친으로서 막 친진(親盡)049) 이 되어 굶주리고 헐벗은 자와 그 자녀로서 나이 지나도록 결혼하지 못한 자를 특별히 초계(抄啓)하여, 해조로 하여금 옷감·식물과 혼수감을 넉넉히 내어주도록 하라. 만약 나이 서른이 넘도록 부부를 이룰 도리가 없다면, 그러한 정령(政令)에 있어서 또한 가뭄을 부른 단서가 아니겠는가? 중외에 분부하여 혼기를 넘긴 자를 듣는 대로 돌보아 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1일 갑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재차의 기우제를 용산강(龍山江)에는 재신(宰臣)을 보내고 저자도(楮子島)에는 중신(重臣)을 보내어 설행하도록 하명하셨습니다만, 어제 내린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고 아직도 개일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거행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전례대로 하라고 하교하였다.
5월 23일 병인
하교하기를,
"첫 번째에도 두 번째에도 비가 잠깐 내리다가는 금방 개었다. ‘마음은 나에게 있는 것이지만 신명(神明)이 굽어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는 바로 신명이 불초한 나의 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옛사람의 말에 ‘성의가 없으면 물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물건도 그러하거든 더구나 신명을 섬김이겠는가? 일차(日次)에 구애하지 않은 것은 이미 전례가 있는 만큼, 오늘에도 만약 비가 쏟아지지 않는다면 3차의 기우제를 몸소 태실(太室)에 거행하려 한다. 친히 거행할 적에는 제관을 임명하여 같이 거행할 것이며, 영녕전의 제문도 지어 내려야 될 것이다."
하였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기우제는 반드시 삼각산(三角山)과 목멱산(木覓山)에 먼저 지내고 나서 용산강·저도에 지내고, 그 다음에 산천(山川)과 우사단(雩祀壇)에 지내며 그 다음에 북교(北郊)와 사직단(社稷壇)에 지내고, 마지막으로 종묘에 지내게 되어 있으며, 제관 역시 반드시 먼저 3품의 종정(從正)을 차정하며, 그 다음에 근시(近侍)를 차정하고 그 다음에 의정을 차정하며, 마지막으로 친행(親行)을 하는데, 이는 대개 경전(經傳)의 내용을 참고하여 정한 것입니다. 지금 사산(四山)과 삼강(三江)에 겨우 한 번 제사하였고, 3품관과 2품관이 겨우 한 번 거행하였는데, 곧바로 옥지(玉趾)050) 를 수고롭혀 태묘에 제사를 올린다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2품관을 우사단과 북교에 보내고 대신을 사직과 종묘에 보내어 오방(五方)의 토룡제(土龍祭)와 경회루(慶會樓) 연못 가의 석척제(蜥蜴祭)의 설행도 하나같이 전서(典序)를 따라 하여 보아서, 이렇게 하고도 감응이 없으면 친행의 예(禮)를 의논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은탕(殷湯)의 기우제도 차례가 있었던가? 아조(我朝)의 친행 역시 차례를 따지지 않은 사례가 있다. 이번의 일은 이뿐만 아니라, 선왕을 추모하고 백성을 위하는 뜻을 태실(太室)에 호소하고자 하여 이미 대신에게 하유한 것이다. 이 마음이 이미 신명에게 전달되었는데, 만약 대신에게 섭행(攝行)을 명한다면 애당초에 성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또 친행을 하고자 하면서 태실에 먼저 하지 않는다면 이 마음도 속일 수 없거든, 더구나 신명이겠는가? 이 일을 세 번이나 하유하여 스스로 불만족스럽다는 뜻을 내보였다. 비록 삼척 동자라 할지라도 나의 마음을 다 알 터인데, 더구나 경전의 뜻을 끌어다 대는 옥당의 장관이겠는가? 평상시의 언행이 믿음을 받았다면, 오늘의 전교에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이는 나의 과실이다."
하였다.
형조 당상이 입시하여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임창주(任昌周)와 살인을 한 죄인 이석삼(李碩三)·홍하택(洪夏澤) 등 세 사람을 참작하여 섬으로 유배할 것을 계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감기 증상이 있은 지가 이미 여러 날째인데, 약원에서 어찌하여 문안을 하지 않는가? 지신사(知申事)에게 말하라."
하였다.
5월 25일 무진
임금이 태묘에 나아가 전교하기를,
"소가(小駕)의 의장으로 하되, 부련(副輦)은 그만두고, 정련(正輦)만 뒤를 따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봉심(奉審)과 성기(省器)를 한 뒤에 영녕전(永寧殿)으로 나아가 전배를 하고 돌아와서 성생(省牲)을 한 다음 재실로 들어갔다.
5월 26일 기사
친제(親祭)의 초헌을 마치고 나서 임금이 판위(板位) 밖에 부복을 하고 있는데,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습기가 올라오니, 삼가 바라건대, 도로 판위로 나아가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의가 신명을 감동시키기 쉽지 않아서 비가 내릴 징후가 전혀 없으니, 마땅히 성의를 다해 이곳에 부복하여 종헌을 기다리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올려야 하는데, 대축(大祝)이 칭탈(稱頉)을 하였으니, 어찌 너무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약방 제조 홍계희(洪啓禧)가 탕제를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어찌 탕제를 들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환궁할 적에 흥인문에 이르러서 가교(駕轎)를 타고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서 농민을 불러 농형(農形)을 묻고 성 위를 들러서 오간 수문(五間水門)의 물길을 살펴보았다.
5월 27일 경오
하교하기를,
"추모하는 마음을 펴기는 하였으나 미약한 정성이 믿음을 받지 못하여 아직도 큰 비가 내리는 은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 선왕의 영혼이 어찌하여 백성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 까닭을 궁구해 보면, 참으로 나 한 사람 때문이다. 만약 이 달을 넘긴다면 초복(初伏)이 멀지 않은데 사방의 들판이 다 갈라질 판이니, 비가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마음이 더욱 초조하다. 29일에는 남단(南壇)에서 네 번째의 기우제를 마땅히 친행할 것이니 소가(小駕)의 의장으로 거행하도록 하고, 마땅히 보련(步輦)을 탈 것이니, 부련(副輦)은 그만두라."
하였다.
지평 이세효(李世孝)가 아뢰기를,
"지난번 간직(諫職)에 있을 적에 황급히 올린 몇 조항의 주달은 역시 미진한 감이 있사온데, 그중 안상오(安相五)·이은춘(李殷春)·김성우(金聖遇)는 탐욕스럽고 간사함이 더욱 심한 자라서 공론이 있는 바를 논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때의 간장(諫長)이 가부도 논하지 않은 채 모두 정계(停啓)하였습니다. 안상오 등의 처지를 두둔해 주는 일은 극진하면서도, 유독 간관의 체통만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안상오인즉 그 뒤 어사의 계사로 해서 마침내 유배의 형벌을 받았으나, 이은춘과 김성우는 거의 징계함이 없어서 도리어 기를 돋구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개탄스럽습니다. 직임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말이 위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다시 동료들에게 경멸을 당하였으니, 수치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습니까? 도승지 이응협(李應協)은 본래 〈성질이〉 미친 듯이 거칠다고 세인(世人)의 지목을 받아 왔으며, 지난날 헌장(憲長)이 되었을 적에도 물의가 떠들썩하였는데, 항차 근밀(近密)한 자리의 관직을 어찌 잠시라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처신도 할 줄 모르면서 염치없이 그대로 쭈그리고 있으니, 참으로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빨리 체차하여 파직시키고, 이어 헌장의 천망에서 지워버려야 된다고 여깁니다. 전 지평 강필리(姜必履)는 허패(虛悖)함이 특별히 심하고 조행이 전혀 없으며, 겉보기에는 근후(謹厚)한 듯하나 속마음은 실로 음험하니,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합니다. 전 정언 노성중(盧聖中)은 일찍이 낭서(郞署)에 있을 적에 이미 비루하고 조잡한 행위가 많았고 부유한 고을로 부임하자마자 오로지 사복을 채우는 것만 일삼았는데, 게다가 다시 뇌물을 너무 많이 증여하여 천오(賤汚)함을 제 스스로 초래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모두 개정함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지신사에 대한 말은 참각(慘刻)함을 모면할 수 없다. 사람을 어찌 이렇게 논할 수 있는가? 이같이 정도를 벗어난 말은 내가 취택할 수 없다. 강필리의 일 역시 너무 지나치며, 노성중이 사복을 채우고 뇌물을 보냈다는 말은 이미 대간의 소장에 올라 있는데, 허위이든 사실이든간에 애매한 채로 둘 수는 없으니, 해부로 하여금 사핵하여 처치하도록 하라. 김성우·이은춘의 일은 이처럼 단단하게 하니, 나로서는 그러한 습성은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승지가 입시하였을 때 승지 홍양한(洪良漢)이 말하기를,
"도승지 이응협(李應協)이 지평 이세효(李世孝)에게 탄핵을 받아서 행공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억지로 핍박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홍낙성(洪樂性)으로 대신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응협이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대신(臺臣)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는데, 이것으로 말한다면 그래도 가하거니와, 지금 미친 듯이 거칠다고 지목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경기 어사가 입시하였을 때 살인 죄인 상봉(尙奉)과 만석(萬石)을 감형하여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였다.
5월 28일 신미
임금이 남단(南壇)에 나아가 재숙(齋宿)하려고 궁궐을 나설 적에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일산을 드는 것이 비가 오고 안 오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일산을 버리시니, 참으로 속이 타도록 절박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마음속으로 맹세하였으니, 결코 따르기 어렵다."
하였다. 이사관(李思觀)이 내취타(內吹打)를 연주할 것을 품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관풍(觀豊) 때에도 취타를 정지하였는데, 기우제를 지내러 가는 길에 어찌 다시금 품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전관을 태거(汰去)하라."
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이르기를,
"이언충(李彦忠)을 지난번에 《선원보략(璿源譜略)》으로 인하여 듣고 알게 되었는데, 종전에 말망(末望)에 들었었다고 하니, 선전관의 대임에 그를 수망(首望)으로 올리라."
하였다. 이언충은 바로 종신(宗臣) 해창군(海昌君)의 아들이다. 임금이 명정전 계하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비를 내리고 안 내리는 것은 오직 나의 정성에 달려 있으니, 조금 전에 영의정이 아뢴 말은 잘못이다. 이처럼 만홀(慢忽)하기 때문에 오던 비도 오지 않는 것이다."
하고, 이어 수레에서 내려 뜰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말하기를,
"비를 얻고 난 뒤에야 궁전을 나가겠다."
하니, 김상로가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의 아룀으로 해서 오던 비도 오지 않는다는 전교까지 하시고 또 습기 있는 진흙에 서 계시니, 신은 마땅히 법관에게 몸을 맡겨 처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말은 잘못되었으나 이렇게 한다면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단제(壇祭)에는 성기(省器)·성생(省牲)을 하는 사례가 없다고 하나 이번만은 시행하여야 되겠다."
하고, 이어 월대로 걸어 올라가서 진흙 위에다 홑자리만을 깔고 전(殿)을 향하여 부복하였다. 판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비가 올 징조가 점차 더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속히 단으로 나아가서 기다리셔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옳다. 이미 하늘에 사과한 이상 일어나 단으로 가야 되겠다."
하고는, 곧장 보련(步輦)을 탄 다음 명하기를,
"태묘의 친제 때에 불참한 사람은 수가(隨駕)하지 말도록 하고, 제사에도 참여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종묘 앞에 이르러서 수레에서 내려 부복하고 구주(口奏)를 한 다음, 단 위로 나아가서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교사단(郊祀壇)의 제례를 소홀히 한 것이 첫째 잘못이요, 늙어서 정성이 얕은 것이 둘째 잘못이요, 아랫사람을 검속하지 못한 것이 셋째 잘못이요, 강학에 독실하지 않은 것이 넷째 잘못이요, 정치가 이완되어 백성이 곤궁한 것이 다섯째 잘못이요, 사치가 극성하여 재정이 궁핍한 것이 여섯째 잘못이요, 진취를 너무 서두르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이 일곱째 잘못이요, 경망한 행위를 고치지 못한 것이 여덟째 잘못이요, 기강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 아홉째 잘못이요, 공의(公義)를 실추시킨 것이 열째 잘못이다. 잘못은 다 나에게 있는데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마음이 떨린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비가 올 때까지 감선(減膳)을 하겠다. 의금부와 형조의 경수(輕囚)를 모두 석방하라."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러하니, 자못 성탕(成湯)이 비를 빌 적에 여섯 가지의 잘못을 열거하여 자신을 책한 일과 같습니다."
하였다.
5월 29일 임신
친제를 거행한 뒤 환궁할 적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러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 나아가서 신실(神室)을 봉심하고 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 원병(援兵)으로 나왔다가 전사한 명(明)나라 관군의 신위판(神位板)을 보고서 선무사(宣武祠)로 옮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아! 어찌하여 이처럼 보기가 늦었던가? 병자년051) ·정축년052) 에서 2년을 넘어서야 이것을 보니, 나의 마음이 갑절 더 감개스럽다. 저 관군은 명장(明將)을 따라서 나왔다가 우리 나라에서 전사하였으니, 한결 더 슬프다. 내일 노량진에 제단을 설치하여 이태상(李泰祥)으로 헌관을 삼아서 치제(致祭)하되, 대축은 이훤(李萱)으로 하라."
하였다. 이태상은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손자이고, 이훤은 바로 〈명나라〉 제독(提督)053) 의 후손이었다. 하교하기를,
"몇 백년 뒤에 원병으로 나왔던 관군의 위판을 태상시의 신실에서 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 갑신년054) 과 지난날에 유사가 아뢰지 않은 것은 너무 무식한 소치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생각인즉 선무사에 배식(配食)시키거나, 아니면 선무사의 동쪽 뜰에다 사우(祠宇) 한 칸을 세워서 선무사의 제삿날에 일체로 제사를 거행하였으면 하는데, 한편으로는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되고 한편으로는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된다. 배식하는 것과 사우를 세우는 일을 예조 판서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시임 대신에게 문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선무사는 바로 임진 왜란 때 원병나왔던 장사(將士)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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