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5권, 영조 36년 1760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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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유

하교하기를,
"아! 신사년055)  에는 나의 나이 겨우 8세여서 최마(縗麻)056)  의 절차를 예식대로 하지 못하였다. 비록 사서인(士庶人)들이최마를 입는 것처럼은 못한다 하더라도 수묘(守墓)하는 예절이야 어찌 차마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명년 8월 13일에는 명릉(明陵)에 나아가 재실에서 재숙(齋宿)하고 기제사를 거행할 것인데, 복색은 금년 3월의 것에 따르겠다. 명년에는 연초에서 연말까지 국가에 하의(賀儀)가 있을 경우, 정악(庭樂)을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말 것이며, 8월부터 12월까지는 모든 예식에서 음악을 일체 철폐하라. 아! 한(漢)·당(唐) 이후로 삼년상(三年喪)의 제도가 다시 우리 나라에 와서 밝아졌으니, 이는 경자년057)  의 유교(遺敎)를 준수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부덕한 내가 왕위를 이어받아서 유지를 계승한 것은 하나도 없으나, 기년복(朞年服)의 제도는 이미 고례(古禮)를 복원하였다. 68세에 이해를 만났는데 어찌 이런 절차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사년은 바로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세상을 뜬 해이다. 성상께서 이해를 다시 만나서 마땅한 예식을 성충(聖衷)으로 단정한 것은 매우 거룩한 일이라 하겠다.

 

6월 2일 갑술

임금이 사직단에 나아가서 재숙하고 단소를 봉심한 뒤에 이어 성기(省器)와 성생(省牲)을 한 다음 전교하기를,
"옛날 친향(親享) 뒤에 달포 동안 쇠고기를 들지 않는 것을 내가 우러러 본 적이 있다. 지금 제기를 봉심하려고 신주(神厨)의 문에 들어서니 희생이 이미 올라와 있는데, 소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고 뭇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이는 희생을 도살(屠殺)하려고 그러한 것이니 보기에 불쌍하기가 제 선왕(齊宣王)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불쌍히 여긴 심정 정도가 아니었다. 번육(膰肉)을 받는 것도 중대한 예식인 만큼 희생을 빼놓을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양육(羊肉)만 올려서 지난날의 성덕(聖德)을 본받겠다는 나의 뜻을 내보이라."
하였다.

 

임금이 태상시의 원역(員役)을 본시(本寺)의 전복(典僕)으로 쓰지 않고 외방 사람을 차출하였다 하여, 장악원과 함께 외방 사람의 차출을 일체 엄금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떤 백성이 모록(冒錄)으로 해서 겁을 먹었는데, 판윤의 말이 묘맥(苗脈)이 있다고 하여 공연히 소요를 일으켰다."
하니,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민간이 극도로 소란스럽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방역(坊役)을 면하려고 그러는 것이므로, 마땅히 한번쯤의 사정(査正)은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민백상이 말하기를,
"경중(京中)의 사람들 중에도 한 필(疋)씩의 신역(身役)이 있으니, 만약 이를 초출(抄出)할 때가 되면 경조(京兆)의 하리(下吏)들이 어찌 민간을 시끄럽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긴요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나, 어찌 소요가 일어나도록 하여서야 되겠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은 생각건대, 방민(坊民)이 하나같이 유고하다고 핑계를 대고 있으니, 마땅히 시정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판윤 홍계희(洪啓禧)가 영상 김상로와 상의하여 모록한 사실을 초출한 일이 있기 때문에 민간이 극도로 소란스러워서 심지어는 임금의 행차 앞에서 호소를 하는 자가 있었다.

 

6월 3일 을해

임금이 사직단의 북쪽 신문(神門)으로 걸어가서 부복하고 구주(口奏)하기를,
"신명께서 은택을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한 사람에게 잘못이 있어서이므로 우선 구저(舊邸)로 나아가서 기다리겠습니다만, 한낮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을 머금고 돌아가서 나로서 할 도리나 닦겠습니다."
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들러서 주강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환궁할 적에는 종묘 앞에 이르자 연에서 내려 한참 부복하였다가 명정전 월대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가 황해 감사의 장계를 가지고서 대현(大峴)·구월(九月)·장수(長壽)·수양(首陽) 네 산성(山城) 소속의 각 고을에서 수납하는 환미(還米)를 1석(石)의 이식[耗米] 중에서 도로가 조금 먼 곳은 3분의 1을 특별히 감면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또 평안 감사의 장계를 가지고서 화재를 당한 은산(殷山) 민가 1백 80여 호의 당년 신공(身貢) 미포(米布)를 일체 탕감하고 본도의 군량곡 2백 석(石)을 내주어서 고루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홍봉한의 진달로 인하여 수원부(水原府)에서 바친 결전(結錢) 1천 2백 냥(兩)을 내주어서 본부의 〈전지〉 개량(改量) 때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주강(晝講)과 차대(次對)를 한 것은 실로 의도가 있어서였는데, 양사(兩司)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하고, ‘정백일심 시국여가(精白一心視國如家)’ 여덟 글자를 써서 내려 주며 비변사에 걸어 두라고 하였다.

 

승지 홍낙성(洪樂性)이 관군(官軍)의 위판에 대한 일로 인하여 아뢰기를,
"명조(明朝) 때부터 모화관 동쪽에다 충민단(忠愍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선묘(宣廟)신사년058)  에도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사실이 예조 등록(禮曹謄錄)에 실려 있고, 형 군문(邢軍門)059)  을 선무사(宣武祠)에 제향한 사실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선무사에 배향함에 있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고, 예조에 명하여 날짜를 가려서 거행하도록 하고 제문은 지어서 내리겠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이창수(李昌壽)의 아룀으로 인하여 처음 하교대로 선무사의 왼쪽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서 가뭄을 너무 걱정하신 나머지 피정전(避正殿)·감선(減膳)·철악(撤樂)의 명령까지 내리셨으니, 나도 마땅히 오늘부터는 피정전·감선을 하여야 되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좌상(左相)의 차자에 대한 하답을 다시 써 내렸는데도 원 차자를 여태까지 섞어 두었으니, 해당 중관(中官)의 녹봉을 한 등급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초에 이후(李)가 가뭄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으로는 용도를 절약함에 더 앞서는 것이 없고 농사를 해치는 원인으로는 재정을 낭비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대저 오늘날의 탁지(度支)가 1년의 용도도 지탱할 수 없는데, 해마다 보내 오는 선혜청 쌀 3만 석과 관서 지방의 쌀·무명을 환산한 돈 10여 만으로도 오히려 각 아문에 칭대(稱貸)하기가 모자라서, 선혜청의 신봉(新捧)으로도 지급하지 못하고 구저(舊儲)를 취하여 보충을 하다 보니 구저 역시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재부(財賦)의 수입이라고 일컫는 것은 반드시 호조와 선혜청을 손꼽는데 오늘날 이와 같고, 병조와 군문(軍門)은 가까스로 각자 조달하고 있으며, 이 밖에 각사의 창고에는 남은 비축이 없습니다. 외방에는 비축하여 둔 군량미와 상진곡(常賑穀) 등 각양 명색(名色)이 있고, 감영과 병영에는 또 돈이 있는데, 장부를 조사하여 보면 넉넉하고 많아도 실제로는 그 수량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어쩌다 불행하여 흉년이 들거나 덧붙여서 전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여기에는 내어줄 수 있는 곡식이 없고 저기에는 변통할 만한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니, 모르기는 하나, 조정에서 앞으로 어떻게 대책을 세울 작정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민생이 피폐하여지는 것은 오로지 세력이 조금만 있는 자이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서는 학생(學生)을 자칭하며 활보(闊步)와 장읍(長揖)을 하고 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놀면서 파정(把定)된 신역(身役)은 도리어 고할 데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로 넘겨 버리는 데에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외방은 이미 이러하고, 경성(京城)의 소민(小民)에 이르러서는 각전(各廛)의 계(契)가 널리 설치된 이후로 백물(百物)에 다 주인이 있어서 죄다 독점하여 폭리를 남기며, 신설하였다는 구실로 박해를 하고 난전이라는 이유로 강탈을 하니, 시장의 물가가 갑절로 뛰는 것과 백성들의 용도가 곤궁한 것도 다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범연히 보기에는 다급한 정상[焦眉]이 아닌 것 같으나, 깊이 캐어 보면 실로 백성을 착취하는 장본이 되는 것입니다. 청컨대 중외(中外)에 분명히 효유하여 재용을 아끼고 낭비를 억제하도록 하는 한편, 이조로 하여금 수령을 잘 선발하도록 하고, 또 시서(市署)에 신칙하여 잗단 시전의 계를 없애도록 하소서."
하고, 또 옛 제도를 다시 천명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헛되이 늙어가는 인재들을 공정하게 뽑아 올리도록 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임금이 보지도 않은 채 기우제의 친행을 그만두라고 계청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르기를,
"하늘이 이미 내려다 보고 있고 선왕의 영혼에게 이미 아뢰었으니, 섭행(攝行)하는 한 가지 절차를 내가 어떻게 다시 유시하겠는가?"
하고, 답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너그러운 비답으로 고쳐서 내렸다.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평안 감사 정휘량(鄭翬良)을 소견하고는 강계 부사(江界府使) 박창윤(朴昌潤)을 체차하고 그 대임을 각별히 택차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정휘량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오늘부터 정전(正殿)에 나아가지 않고 음악을 철폐하는 등의 일을 전례에 따라 거행하겠는데, 정전에 나아가고 음악을 복구하는 것은 으레 추수 이후로 하고 감선 역시 전례에 의하여 가을을 한정해서 거행하겠다."
하였다.

 

6월 5일 정축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결(疏決)을 할 때 임금이 말하기를,
"이응협(李應協)의 일에 대하여 동궁의 비답은 어떠하던가?"
하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논박한 바가 너무 참각(慘刻)하다. 사람을 논평함에 있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일은 내가 취할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잘 처리하였다고 말하였다. 조금 물러나 있다가 여러 신하들이 다시 입시하니, 임금이 자리도 깔지 않은 채 뜰에 엎드려 있으므로, 대신이 그 연유를 물었는데, 임금이 일어났다가는 엎드려서 말하기를,
"지난날 선화문(宣化門)의 일입니다. 신이 선화문 안으로 들어가자, 자성(慈聖)께서 문 안에 앉아서 신에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거조인고?’ 하시므로, 신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렇게 하고 나서야 신의 형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자성의 하교가 간곡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하교를 애써 받들어 안으로 들어가서 뵈었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자성께서 또 하교하기를, ‘네가 다시는 이런 거조를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라. 내가 마땅히 전하께 아뢰리라.’ 하시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진술하고 옛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때 자성께서 이 전(殿)에 임하셨었는데, 오늘의 소결을 구례(舊例) 그대로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자식된〉 성의이겠습니까? 또 붕당의 버릇이 여기까지 온 것은 그 본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때 《가례원류(家禮源流)》로 인하여 올린 장주(章奏)가 이 마루 밖에까지 쌓였었는데, 자성께서 하교하실 적마다 ‘성상의 안질은 오로지 이때 장주가 하도 복잡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을해년060)  에 이르러 한쪽은 크게 깨닫고서 소장을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으나, 다른 한쪽은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었다는 말인가?’ 하며 소장을 올려 수선을 떨기 때문에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서 또 아뢰기를, ‘조정에 들어온 여러 신하 가운데 다시 붕당을 하는 자가 있다면 진신(搢紳)의 반열에 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었는데, 이존중(李存中)의 무리는 득의 양양하여 제재를 받지 않았고, 윤시동(尹蓍東)의 무리 역시 배소(配所)에서 풀려났습니다. 김시찬(金時粲)으로 말한다면 근시(近侍)의 신하로서 관직이 부제학이었으니, 정성 왕후(貞聖王后)에게는 위로를 못 드린다 치더라도 어찌 자성께도 위로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작년에 대신이 건백(建白)하고 지신사가 울면서 아뢰었으므로 그를 이미 유배에서 풀어주었으니, 이것 역시 불초한 일입니다. 뭇 신하들이 비록 청하였다 하더라도 신이 굳이 고집하지 못하고 특별히 석방한 것을 이에 감히 뜰에서 고두 사죄를 합니다. 뒷날 마땅히 전상(殿上)에 다시 앉아서 김시찬을 다시금 유배할 것입니다."
하였다. 구주(口奏)를 마치고 나서 임금이 일어서려 하다가 다시 엎드려 관을 벗자, 영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들을 불러서 조용히 하교하신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매번 이처럼 지나친 거조를 하시니, 절박하고 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나치다는 말을 받아들이겠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시찬은 본래 죄줄 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전정(殿庭)에서의 구주 내용이 실로 지난날의 문적에 없는 것이고 보면, 대신이 된 자로서 바른말로 바로잡아 주어서 군상(君上)이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자리만 채운 신하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5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출판-인쇄(印刷)


[註 060]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사신은 말한다. "김시찬은 본래 죄줄 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전정(殿庭)에서의 구주 내용이 실로 지난날의 문적에 없는 것이고 보면, 대신이 된 자로서 바른말로 바로잡아 주어서 군상(君上)이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자리만 채운 신하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임금이 형조 당상에게 명하여 문안(文案)을 읽게 한 다음 혹은 석방도 하고 혹은 그대로 두기도 하였다. 김상로가 전관(銓官)이 비국 당상을 수재(守宰)에 수의(首擬)한 자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기강을 실추시킨 일의 일단이다."
하고, 이조 참판 서지수(徐志修)와 청풍 부사(淸風府使) 윤동도(尹東度)를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6월 6일 무인

전교하기를,
"내일은 명릉(明陵)에 나아가 기신제를 친히 거행할 것이니, 제문은 친히 짓겠다."
하였다. 정원과 옥당에서 청대하였는데, 허락하지 않고 모두 체직시키라고 명한 다음, 이경호(李景祜)·윤동섬(尹東暹)·이유신(李裕身)·안집(安𠍱)·홍인한(洪麟漢)·심수(沈鏽)를 승지로 삼았다.

 

6월 7일 기묘

임금이 명릉에 나아가서 망배례를 행하고 이어 능 위와 정자각·비각을 봉심한 다음 익릉(翼陵)과 경릉(敬陵)에 나아갔다가, 명릉의 재실로 돌아와서는 불근(不謹)하였다는 이유로 통례(通禮)를 태거하였다. 새벽녘에 제사를 거행하고 나서 환궁하였는데, 모화관에 들러서양 경리(楊經理)061)  의 비문을 읽어 보았다.

 

6월 9일 신사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이번에 승지와 옥당이 무슨 딴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옥체에 손상이 올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럼에도 엄교를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신은 그 엄교를 거두어 들이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마땅히 하여야 될 일인데도 안된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대신과 약방에서는 청대하는 것이 가하겠으나, 승지에 있어서는 이미 전교를 받아 나가서 반포까지 하여 놓고서 또 남의 이목을 위하여 청대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근래 옥당이 청대를 하지 못한 일을 겸연쩍게 여기면서 당연히 할 일도 오로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같은 신하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하였다.

 

각 궁가(宮家)의 경외(京外) 면세 조항 중에서 이른바 ‘삼수량(三手粮)062)  ’은 면세를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호조 판서 홍봉한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임금이 우사단(雩祀壇)에 나아가서 보사제(報謝祭)를 거행하고 선농단(先農壇)에도 대신을 보내어 같은 날에 보사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수표교를 거쳐서 연(輦)이 열녀 정경 부인 민씨(閔氏)의 정문(旌門)을 지났다. 민씨는 바로 고 판서 이주진(李周鎭)의 아내이고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의 딸인데,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짓고 승지를 보내어 이주진과 민씨에게 치제하였으니, 명부(命婦)에 대한 치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보사제를 고례(古禮)에 따라 입추 후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14일 병술

〈선무사(宣武祠)에 들러서 윤음을 내리기를,〉
"회가(回駕) 때에 선무사(宣武祠)에 들러서 배례를 하는 것이 옳을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은 바, 읍(揖)만 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 전례에 따라 하였으나, 끝내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다.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만례(慢禮)인데, 적(敵) 이하에게도 이미 답례의 절이 있었으니, 사신을 보낼 적에 문에 절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다. 이제 황화(皇華)에게 절할 길은 다시 없으나 양공(兩公)063)  의 사당이 그래도 우리 나라에 있는데, 그 사당에 들어가서 절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황은(皇恩)을 생각하고 황화를 대접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지난날 관왕묘(關王廟)에 절을 한 선왕의 뜻을 따라서라도 오늘부터는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겠다. 근자에 어첩(御帖)을 유독 양공에게만 쓰지 않았는데, 예의에 있어 어떠하겠는가? 또한 비풍(匪風)·하천(下泉)064)  의 뜻이 아니다. 이 뒤로는 축문에 어휘(御諱)를 쓰라. 세월이 오래 되었다 하여 이같이 하지 않는다면 존주(尊周)의 의리가 장차 우리 나라에서 흐려지게 될 것이다. 이번의 두 가지 일은 깊은 뜻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6월 15일 정해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경외(京外)의 전최(殿最)065)  를 개탁할 때 친림(親臨)하였는데, 호조 판서 홍봉한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낭관에서 나왔다.[出自郞官]’는 등의 말로 폄제(貶題)를 삼아서 감사를 파직시킨 일도 있었는데, 이제는 유독 전최에 발탁해 쓰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일의 체모가 아닙니다. 통제사 이윤성(李潤成)은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6일 무자

조명채(曹命采)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시독관 서명천(徐命天)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여러 신하들이 청대를 일체 받아들이지 않고 사기(辭氣)마저 지나침이 없지 않았습니다. 거둥 때에 청대한 것은 사전(祀典)을 앙품하려는 것이었던 것인데, 혹시 성상의 생각에 맞지 않을 것 같으면 불러 보고서 꾸짖는 것이 실로 모자라는 면을 가르치는 뜻일 것인데도 애당초 인접(引接)조차 하지 않으셨고 사기마저 지나치셨습니다. 이 뒤로는 성상의 생각을 더욱 깊이 하시어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써 남의 모자라는 면을 가르쳐 주는 의리에 힘쓰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품고 있던 생각을 숨김없이 말하는 것은 내가 실로 가상히 여긴다. 나는 중립 불의(中立不倚)로써 스스로 힘쓰겠지만, 유신 역시 화이불류(和而不流)로써 스스로 힘쓰는 것이 좋겠다. 나의 공부가 부족한 때문에 사기의 불평함이 있게 되었으나, 남방 사람의 강강(强剛)함에 있어서는 내가 배우고 싶지 않다."
하였다. 시독관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앞뒤로 내려진 엄교는 만만 황송합니다. 지금 비록 입시는 하였으나, 문의(文義)는 감히 개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연의 사체가 지엄하니,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또 석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6월 17일 기축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가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장계로 해서 이번에 수송한 종태(種太)066)   9백 석(石) 영(零)을 본도의 상평창에 회록하여 조적(糶糴)에 붙여 이식을 취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민백상이 말하기를,
"지난번 묘에 기우제를 거행할 때 구주(口奏)를 하신 일이 있습니다만, 태묘는 진전(眞殿)이나 황단(皇壇)과는 경우가 다르고 보면, 사체는 더욱 다르니, 구주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말은 옳다고 하였다. 민백상이 말하기를,
"전배(前排)가 전정(殿庭)에 들어오는 일은 열성조(列聖朝)에서 없었던 일이며, 또한 후손을 위하는 계책에도 흠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마땅히 명심하겠다고 하였다.

 

김환(金煥)의 관작을 복구시키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김환의 손자가 상서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자, 임금이 판의금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판의금 홍상한(洪象漢)·영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모두 말하기를, ‘당초 김환의 염찰(廉察)은 김익훈(金益勳)의 지휘에서 나온 것이므로, 김익훈이 신원된 뒤에 김환만이 복관(復官)되지 않은 것은 불공평함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이런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6월 18일 경인

하교하기를,
"내일은 상신의 집에 문병을 가야 한다. 약방의 입진(入診) 일차(日次)를 오늘로 하라."
하니, 좌의정 이후(李)가 이 전교를 듣고서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였다.

 

6월 19일 신묘

하교하기를,
"〈이후가〉 명소패(命召牌)를 들여오면 친히 전하려고 한다."
하였는데, 유신 엄인(嚴璘)·김화진(金華鎭)이 차자를 올려 하교를 거두어 들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비록 대신·유신이라 하더라도 역시 집법(執法)하는 관리인데, 그럼에도 바로잡지는 않고 한갓 형식에만 힘쓰니, 그 차자를 도로 내어주라."
하매, 이후가 소명을 받들고 입시하였다. 이후가 만년에 급제하여 10년 사이에 정승에까지 뛰어올랐다. 일찍이 정승의 제수를 개정하라는 지척을 받았으나 연줄을 타고 다시 나왔는데 물의에 용납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고서 질병을 핑계로 면직을 빌었기 때문에 임금이 이 거조가 있은 것이다.

 

6월 21일 계사

강서원(講書院)에서 계품하기를,
"왕세손이 《소학(小學)》의 강독을 이미 마쳤으므로 《대학(大學)》을 이어서 강독하되, 《사략(史略)》 책자도 가져다가 그 줄 수를 헤아려서 고적(古蹟)을 토론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학》은 주석을 빼놓고 하되, 많이 하려고 애쓰지 말고 쉬는 날이나 임강 전에는 혹 《소학》도 읽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청람계인(靑藍契人)이 낮은 값으로 사다가 높은 값으로 파는 행위를 엄히 신칙하였다. 청람계란 바로 준천(濬川)을 한 뒤에 홍봉한이 어의궁(於義宮)에다 창설하여 인가(人家)를 모아들이는 계획을 삼은 것인데, 무뢰배들이 이것을 도고(都庫)로 삼음으로 해서 도성 백성들이 매우 시달렸다.

 

6월 22일 갑오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밑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교리 이담(李潭)이 상서하여, 정익량(鄭益良)이 반대로 매도한 공사(供辭)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왕세자가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6월 23일 을미

임금이 청람계를 특별히 혁파하라고 명하였으니, 호조 판서 홍봉한과 판윤 홍계희의 아뢴 바로 인함이었다. 전교를 다시 내려 두 사람으로 하여금 계인(契人)들을 찾아가서 타이르라고 하였다.

 

6월 25일 정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도목정(都目政)067)  을 행하였는데, 서지수(徐志修)를 좌유선(左諭善)으로,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서지수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사습(士習)이 날로 퇴색되어 가고 있다 하여 대사성을 선택할 것을 생각한 나머지, 이조에 명하여 대신에게 물어서 차출하도록 한 바, 묘당(廟堂)에서 서지수·조명정(趙明鼎)·이최중(李最中)으로 답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순실(純實)함을 취할 것 같으면 수망자가 좋겠고, 근간(勤幹)함을 취할 것 같으면 부망자가 좋으며, 말망자는 소견이 좁은 듯하니 좁은 소견으로 선비를 가르친다면 어려운 일이다."
하고, 이어 수망에 낙점한 것이다.

 

6월 26일 무술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새로 제수한 수령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형조에 명하여 이문순(李文淳)을 1차의 엄한 형장(刑杖)을 가한 뒤에 대정현(大靜縣)으로 정배(定配)하라고 하였다. 이문순은 곧 이천해(李天海)의 사촌으로서 침술로 의원 행세를 하며 서울의 사대부 집을 드나들며 출세의 수단을 삼으려 하였는데, 임금이 호조 판서 홍봉한의 아뢴 바를 듣고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6월 28일 경자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의릉(懿陵)의 전향례(傳香禮)를 거행하고 돈화문까지 따라갔다가 환궁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사현(四賢)의 일에 있어서 나도 모르게 감회가 인다. 아! 당(唐)나라의 태학생 하번(何蕃)과 송(宋)나라의 태학생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일을 지난날 한유(韓愈)068)  의 문집과 《송사(宋史)》에서 보고 세상에 드문 감회가 일어 특별히 성균관 곁에다 사우(祠宇)를 짓도록 명하였고, 글을 지어서 기록을 남기라고까지 하였으나, 유사가 아직 사우를 세우지 못하였다. 만약 어제(御製)의 간행이 없다면 표창한 성의(聖意)가 장차 후세에 가서는 묻혀버릴 것이다. 동양(董養)069)  에 있어서는 대신의 헌의로 인하여 한 사우[崇節祠]에 향사(享祀)하여야 되겠는데, 사우를 세우는 근본 취지가 이미 지난날에 있었던 만큼 선왕을 추모하여 지업(志業)을 계승하려는 뜻에서 이번 알성(謁聖)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땅히 들를 것이니,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리라."
하였다.

 

6월 30일 임인

춘당대에 나아가 무신 당상관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는데, 시관 심성진(沈星鎭)이 말하기를,
"김성우(金聖遇)의 화살 기록이 봉전(封箭)과 서로 틀리기 때문에 차비관(差備官)을 시켜서 물어보았더니, 처음에는 4시(矢)라고 말하다가 신이 청대하여 죄를 논하겠다고 말하자, 비로소 1시를 맞혔다고 자복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무관이기는 하나 직책이 아장(亞將)이고 보면, 막중한 친시(親試)에서 화살의 수를 잘못 기재하여 4시를 맞히지 못한 죄를 면하려고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과실을 기록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유신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이 밖에도 필시 이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 자수(自首)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승지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이미 발각된 자는 엄히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자를 자수하도록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 사람의 이러함을 알았으니, 오늘의 아뢴 바는 가상하다."
하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렸다. 이어 김성우를 잡아들여 신칙한 다음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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