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760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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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계묘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대보단(大報壇)070)  에 나아가서 전배(展拜)하였다. 인하여 단소(壇所)를 봉심(奉審)하고 숭절사(崇節祠)071)  를 역림(歷臨)하였다.

 

7월 2일 갑진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숙묘(肅廟)께서 하번(何蕃)·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우(祠宇)를 세우기를 명하신 것은, 진실로 세상에 드물게 있는 거사(擧事)입니다. 또 고금에 향사(享祀)할 만한 자를 같이 향사하라는 명이 있어서 곧 상신(相臣)이 동양(董養)을 아울러 향사하라는 요청을 허락하였는데, 유사(有司)가 머뭇거리고 천연하여 마침내 성명(成命)을 시행한 것은 선왕께서 승하(昇遐)한 뒤에 있었고, 성명을 시행하기를 청한 것은 바로 태학생(太學生) 윤지술(尹志述)입니다. 대저 윤지술의 죽음은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이 화(禍)를 당한 것보다 더 심하니, 진실로, 고금(古今)의 같이 향사하는 데에 합당합니다. 을사년072)  에 사현(四賢)073)  의 묘(廟)에 배향[腏享]하였다가 정미년074)  에 유정(柳綎)의 상소로 인하여 드디어 철향(撤享)에 이르렀으나, 이제 성상의 마음이 옛 해의 감상이 일어나심을 당하여 역림(歷臨)하시는 명령까지 내렸으니, 이미 배향하였다가 곧 철향한 윤지술의 옛 배향을 도로 회복하는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윤지술은 태학생으로서 사생(死生)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마음에 품은 바를 글로 아뢴 것은, 그 높은 충성과 외로운 절개는 구양철(歐陽澈)·동양(董養)과 더불어 일찍이 같지 아니함이 없고, 그 죽음의 원통함도 이미 같은데 어찌 또 그같이 향사함을 철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 절개는 비록 동생(董生)075)   등과 비등하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 사우에 추입(追入)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에 같이 배향한 것은 이제까지 후회하니, 옛 해의 성교(聖敎)에 따를 따름이다."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7월 3일 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 영녕전(永寧殿)076)  에 나아가 처음과 같이 예를 행하였다. 종묘령(宗廟令) 이제해(李濟海)를 불러 보고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기를 명하였으니, 종묘령을 선택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에게 하유(下諭)하여 수가(隨駕)하게 하였으니, 이때 민백상이 차자(箚子)의 비답이 미안함으로써 단지 지영(祗迎)077)  만 한 때문이었다. 숭절사(崇節祠)에 역림(歷臨)하여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대성전(大成殿)을 바라보니, 마음에 저절로 공경함이 일어난다. 신문(神門) 밖에서 망배(望拜)하려고 하는데 예에 어떠한가? 그리고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영외(楹外)에 전배소(展拜所)가 있는데, 어찌 문 밖에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면복(冕服)으로 예를 행하는 것은 예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렇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면복을 아까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하고, 드디어 대성전에 나아가서 전배(展拜)한 다음 이어 대성전 안을 봉심(奉審)하고 나와서 남문(南門) 밖 소차(小次)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오늘 숭절사 집사 제생(執事諸生)에게 먼저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며, 내일 춘당대(春塘臺)에서 유생(儒生)은 제술(製述)을 시험하고 시위 장사(侍衛將士)는 일체로 시사(試射)하도록 하라."
하였으며, 대사성(大司成) 서지수(徐志修)에게 명하여 윤음(綸音)을 읽게 하여 유생들에게 유시를 선포하였다.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체차하고 홍계희(洪啓禧)로 이를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병오

지평(持平) 박사해(朴師海)가 상서(上書)하여, 평양 서윤(平壤庶尹) 정극순(鄭克淳), 배천 군수(白川郡守) 심빈(沈鑌), 진보 현감(眞寶縣監) 임정호(林正浩)는 역사(歷辭)078)  하지 아니하고 갔으니, 마땅히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비를 시험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장전(帳殿)에 충의(忠義)가 두 사람인데 하나는 정국 공신(靖國功臣) 유순(柳洵)의 10대손(十代孫)이고 하나는 임진 왜란 때 효절(效節)079)  한 사람 이억기(李億棋)의 7대손이니, 의소묘 수위관(懿昭廟守衛官) 두 과(窠)080)  에 아울러 특별히 차임(差任)하게 하라."
하였다.

 

7월 5일 정미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서 과차(科次)081)  하여 서울의 수석을 차지한 유운익(柳雲翼)과 시골의 수석을 차지한 정택(鄭擇)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7월 6일 무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제학에게 문신(文臣)의 응제(應製)를 과차(科次)하라고 명하였다.

 

7월 7일 기유

지평(持平) 박사해(朴師海)가 상서(上書)하여, 우윤(右尹) 유건(柳謇), 포천 현감(抱川縣監) 조중정(趙重鼎), 순천 영장(順天營將) 조세구(趙世逑)를 아울러 개차(改差)하고, 후릉 참봉(厚陵參奉) 한상묵(韓尙默)을 태거(汰去)하며, 전(前) 필선(弼善) 민숙(閔塾)을 개정(改正)하고 김성우(金聖遇)를 삭직(削職)하며 위흥조(魏興祖)를 투비(投畀)082)  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모두 시행하기를 허락하고 김성우와 위흥조의 일은 대조(大朝)의 처분이 성의(聖意)가 있음으로써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충청 감사(忠淸監司)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상진 모미(常賑耗米)083)   4백 석을 한정하여 해마다 홍주목(洪州牧)에 획급(劃給)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판(吏判)이 정사(政事)084)  를 물을 때에, 평양 서윤(平壤庶尹)은 비록 오고(五考)를 거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과기(瓜期)085)  가 단지 한 달이 남았음으로 대임(代任)을 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臣)이, 수령의 과한(瓜限)은 《속전(續典)》에 실려 있으니 대임(代任)을 낼 수 없으며, 만일 연품(筵稟)을 하려고 한다면 대신(大臣)이 근지(靳持)086)  하고 있다는 뜻으로 앙달(仰達)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더니, 전석(前席)에 오름에 미쳐서는 전혀 사실을 빠뜨리고 전례(前例)에 따라 범연히 품(稟)하였습니다. 정관(政官)이 제멋대로 천단하는 버릇을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조 판서 한익모(韓翼謨)를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진실로 체통을 얻었으니,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전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는 박시좌(朴時佐)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수망(首望)으로 추천하여 하비(下批)를 받은 뒤에 그대로 유임하기를 청하였으니, 자못 정관(政官)의 체통을 잃었으므로 중하게 추고(推考)함이 마땅합니다."
하자,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곤임(閫任)은 가함(假銜)의 직(職)이 아닌데 지척(咫尺)의 친정(親政)에서 자신이 의망(擬望)하였다가 자신이 그대로 유임하기를 청하여 하나의 곤임(閫任)을 가지고 이처럼 수단을 부림이 많으니, 정격(政格)087)  의 구차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일체로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문묘(文廟)는 사체가 가볍지 아니하니 마땅히 날을 골라서 알성(謁聖) 한 뒤에 역림(歷臨)하는 것이 마땅한데, 편리함을 인하여 전알(展謁)함은 자못 미안합니다. 선비를 시험함에 이르러서는 단지 관광 거안(觀光擧案)만 받으니, 구차하고 간략함을 모면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묘에 전알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바이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 앉았는데,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7월 8일 경술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에 앞서 하교하기를,
"밤중에 느낌이 일어난 것이 있어서 단지 내전(內殿)과 더불어 경희궁에 나아가서 두어 달을 머물다가 오겠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어하니 중외(中外)에서 이를 근심하였다.

 

7월 9일 신해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7월 10일 임자

임금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왕세자의 기후(氣候)를 물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부(脚部)의 습창(濕瘡)으로 여(輿)를 타기 어렵기 때문에 이번에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 외간에서는 이런 줄 알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번에 목욕 가는 요청을 금한 것은 뜻이 대개 깊으나, 만일 훈세(薰洗)가 유익하다면 어찌 하지 아니하겠는가?"
하매,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훈세가 습질(濕疾)에 좋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신 등이 여러 의관(醫官)과 더불어 달려가서 입진(入診)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진(往診)한 뒤에 와서 품(稟)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온천에 행차한 뒤에는 궐내(闕內)가 빌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빈궁(嬪宮)과 세손(世孫)을 곧 데리고 오는 것이 좋겠다. 세자[元良]가 저쪽에 있기 때문에 데리고 오지 아니하였는데, 듣건대, 세손이 중관(中官)을 보고 나의 안부를 묻는다고 한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기내(畿內)의 찰방(察訪) 가운데 장달성(張達星)은 조금도 남기법(濫騎法)088)  을 굽히지 아니함으로써 일컬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벼슬이 갈렸으니 애석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탕척(蕩滌)하여 전조 낭관(銓曹郞官)으로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한성부 당상과 낭관을 먼저 파직하고 뒤에 나문(拿問)하게 하였다. 이때 어영군(御營軍)이 신성(申姓) 사람과 서로 송사(訟事)하였는데 한성부에서 어영군을 구류(拘留)하여 다리를 찔러 치사(致死)하게 된 때문에, 대장(大將) 정여직(鄭汝稷)이 아뢰어 이뒤로 향군(鄕軍)의 하번(下番)하는 자는 법사(法司)에서 추치(推治)하지 못하게 할 일을 법으로 정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우윤(右尹) 유건(柳謇)의 공사(供辭)089)  를 보고는 해남(海南)으로 귀양보내고, 하교하기를,
"유건의 일로써 보건대, 한성부 관원을 잘 고르지 아니할 수 없으니, 홍인한(洪麟漢)을 우윤으로 특별히 제수하라."
하였다.

 

임금이 석음재(惜陰齋)에 나아가서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를 인견(引見)하고 이후(李)에게 묻기를,
"경이 동궁(東宮)을 친히 보았는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신이 비로소 종처(瘇處)를 보니 혹은 종(腫)을 이루었고 혹은 곪아 터졌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의관(醫官)들은 무엇이라고 이르던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온천에 목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효과가 있을지라도 종종 다시 재발하니, 장차 어떻게 계속할 것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어제 온천 목욕을 금하는 교시를 내렸는데, 이제 내 아들임으로써 문득 허락하면 백성들이 나를 믿는다고 이르겠는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세자[元良]가 아직 조섭(調攝)하는 중에 있으니 마음에 간절히 민망스러운데, 들은즉 여러 의원들이 모두 온천 목욕을 청한다고 한다. 이 뜻은 내가 이미 있었고, 혹시 효력이 있는데 허락하지 아니하면 이는 어찌 아비가 된 도리이겠는가? 이로써 빙탄(氷炭)이 마음속에 섞여서 음식이 맛이 없고 잠자리도 편치 않다. 여러 의원의 말이 이와 같으면 무릇 어찌 버티고 어려워하겠는가마는, 이제 한더위를 당하여 조섭하는 중에 어떻게 말을 몰고 달리겠는가? 군병(軍兵)의 노상(勞傷)과 농민의 대후(待候)는, 아픔이 몸에 있는 것과 같다. 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처서(處暑)가 지나고 생량(生凉)한 뒤에 날을 가려 거행하라."
하였다.

 

7월 11일 계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무신 전강(武臣殿講)을 행하였다.

 

김상철(金尙喆)을 승지로,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세자가 온천 행차 때에 협련군(挾輦軍)은 훈국군(訓局軍) 1백 20명으로 체운(替運)하고, 전후 상군(廂軍)090)  은 금위(禁衛)·어영(御營) 두 영군(營軍) 각 2백 명으로 하며 영기(令旗) 3쌍(雙), 흑호의(黑號衣), 흑기(黑旗), 홍자 주장수(紅字朱杖手) 2쌍은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금 체운하게 하고, 전도(前導)·개폐문 육각(開閉門六角)은 각각 그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대령하게 하며, 삼취(三吹)는 포(砲)로 대행하되 군기시(軍器寺)에서 대령하며, 배위(陪衛)는 일체 상례(常例)에 의하여 분승지(分承旨), 분도총부(分都摠府), 분병조(分兵曹), 분오위 장(分五衛將)을 차하(差下)하며, 배종(陪從)은 단지 해당 도신(道臣)만 경상(境上)에서 대후(待候)하고 수신(帥臣)091)  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2일 갑인

황인검(黃仁儉)을 부제학으로, 임위(任瑋)·이심원(李心源)을 분승지(分承旨)로 삼았다.

 

예조에서, 왕세자가 온천에 나아갈 때에 온정제(溫井祭)는 전례에 의하여 설행할 것을 계달하였다.

 

7월 13일 을묘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7월 17일 기미

김시묵(金時默)을 대사간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병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왕세자가 온천 행차 때에 군호(軍號)는, 능행(陵幸)의 경숙(經宿) 때에 궁성 군호(宮城軍號)를 동궁(東宮)이 달하(達下)하는 예(例)에 의하여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다고 하였다.

 

7월 18일 경신

임금이 영빈방(寧嬪房)에 거둥하였다가 귀인방(貴人房)에 역림(歷臨)하였다.

 

왕세자가 온양(溫陽)에 행차하였다. 이때 예후(睿候)가 습종(濕瘇)으로 편치 못하였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온천에 목욕하기를 의논해 정하니 대조(大朝)께서 이를 허락하였다. 진시(辰時)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출발하여 한강 가에 도착하니, 이때 강물이 크게 불어서 선창(船艙)을 정돈해 기다리지 못하여 용주(龍舟)092)  가 건너지 못하였는데, 경기 감사(京畿監司) 윤급(尹汲)이 꾀를 써서 큰 배 수십 척으로 돛을 달고 선도(先導)로 하여, 굵은 동아줄 수십 개로 용주를 여러 배에 매어, 오후에 다행히 잘 건너 과천(果川)에서 유숙하였다. 병조 좌랑으로 하여금 각사(各司)를 적간(摘奸)하여 공해(公解)에 머물러 자게 하고 민가(民家)에 주접(住接)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부(師傅)·빈객(賓客)이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7월 19일 신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공조 당상이 왕세자가 강위[江上]에 도착하였을 때 대령하지 못한 때문에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부관(部官)에게 명하여 채전(菜田)을 호소한 사람을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성(城) 안에 경작을 금한 것은 옛 법을 지키려 한 것인데, 그 채전은 모두 사부(士夫) 집 물건이고 이 백성은 작자(作者)093)  가 아니니 반드시 청탁을 받고 온 것이다. 십백(十百)의 백성이 모두 도롱이와 삿갓을 착용하였으니, 그것도 공동(恐動)하는 꾀이기 때문에 대령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 듣건대, 장두(狀頭)094)  는 바로 수어군(守禦軍)인데 군복(軍服)을 버리고 농의(農衣)를 입었으니, 그 버릇이 무상(無狀)하다. 수어사(守禦使)를 추고(推考)하고 장두를 결곤(決棍)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이 나를 떠난 지 이미 오래이므로 때로 눈물이 나며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내일 데리고 와서 보고자 한다."
하고, 이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소대(召對)095)  하였다.

 

왕세자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7월 20일 임술

왕세손(王世孫)이 경희궁에 나아가 진현(進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세손을 머물러 자게 하려고 하였으나 창덕궁에는 단지 빈궁(嬪宮)만 있으니, 세손을 위하여 효(孝)를 지도하는 도리에서는 돌아가서 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야대(夜對)096)  하였다. 《숙야잠(夙夜箴)》을 읽으며 말하기를,
"이를 지은 이는 도(道)를 아는 이다. 몸으로 행하여 마음에 얻음이 없으면 말을 만듦이 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왕세손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있으니, 보도(輔導)하는 방법을 더욱 근신(謹愼)해야 할 것입니다. 환시(宦侍)에 있어서는 충직(忠直)하고 순실(純實)한 자를 골라서 한가로이 있을 때에 기교(機巧)의 물건을 보이지 말도록 하면 이것도 또한 보도하는 요도(要道)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학문이 진실로 우리 세손을 지도해 가르칠 수 없으나 강독(講讀)하는 신하에게 바라는 바는 깊다. 여러 신하들이 이미 강독의 명을 받았으니, 우리 세손을 보도하여 현철(賢哲)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지 못하면, 남의 밝은 구슬을 받아서 티끌속에 던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일 이 글을 가지고 세손궁(世孫宮)에 가서 입대(入對)하여 강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세손에게 써서 보이는 글을 지어서 내렸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왕세자가 진위(振威)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밤에 천총(千摠)으로 하여금 군병(軍兵)을 점검(點檢)하고 민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시척(任時倜) 등이 피리[笛]를 불어 점군(點軍)하였는데, 배종(陪從)하는 여러 신하가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숙위(宿衛)의 사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환위군(環衛軍)을 피리를 불어 부르니, 일이 지극히 놀랠 만합니다. 군율(軍律)로써 처단할 것이니,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군율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나 신칙함이 없을 수 없으니, 잡아들여 각각 결곤(決棍)하라."
하였다.

 

경상도 비안(比安)·선산(善山)·성주(星州)·인동(仁同)·금산(金山)·개령(開寧) 등 고을에 지진(地震)하였다. 금산·선산 등 고을과 함경도 문천군(文川郡) 백성이 벼락에 죽은 자가 무릇 네 사람이다.

 

7월 21일 계해

하교하기를,
"입직(入直)한 금군(禁軍)에게 말[馬]을 주어 온천 행차에 수행한 승지(承旨)에게 보내어 주서(注書)의 일기(日記)를 내일 안으로 봉해 올리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직산(稷山)에 이르러 유숙하고, 충청 감사 구윤명(具允明)을 접견하여 하령(下令)하기를,
"원근(遠近)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사람과 말이 복잡한 가운데 반드시 넘어지고 쓰러질 염려가 있을 것이다. 적간(摘奸)하여 수색해 물어서 각별히 존휼(存恤)하고 구경하는 사람을 구타해 쫓지 말며 전곡(田穀)을 손상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2일 갑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예문 제학 황경원(黃景源)에게 명하여 문신의 응제를 과차(科次)하게 하고, 황경원으로 하여금 칠률(七律), 어비(御批) 한 구(句)를 지어 올리게 하여 표피(豹皮)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어제 세손과 문답한 것을 자세히 진달하게 하니,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신이 입직관(入直官) 박성원(朴聖源)과 더불어 근독합(謹獨閤)에 같이 들어가 보니, 세손(世孫)이 한 가운데 서안(書案)을 설치하고 일어나서 어제(御製)를 맞이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신 등으로 하여금 다시 읽고 진달하게 하였는데, 신이 익우(益友)와 손우(損友)의 글귀097)  를 가지고 우러러 물으니, 세손이 답하기를, ‘「익우」는 좋은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박성원이 말하기를, ‘어제(御製) 가운데 있기를, 「나라의 흥망[興替]이 오로지 너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흥하고 어떻게 하면 망합니까?’ 하니, 세손이 답하기를, ‘착하면 흥합니다.’ 하였습니다. 박성원이 말하기를, ‘어떤 일이 착한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오직 효도가 착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박성원이 말하기를, ‘효도는 뜻을 기르는 것과 구체(口體)를 기르는 것의 다름이 있는데, 각하(閣下)께서는 어떤 효도를 하려고 하십니까?’ 하니, 세손이 답하기를, ‘뜻을 기르는 것이 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성원이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각하에게 무슨 도(道)를 바라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뜻을 기르는 효도를 바라십니다.’ 하였습니다. 박성원이 말하기를, ‘대조께서 힘써 신칙하심이 이와 같으시니 받들어 행하는 것이 바로 뜻을 기르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습니다. 박성원이 말하기를, ‘어제 관광(觀光)하는 백성이 구름처럼 모였는데 각하에게 바라는 것은 장차 어떤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인도(仁道)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도착하였다.

 

7월 23일 을축

하교하기를,
"밤낮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오직 군민(軍民)에 있다. 온양(溫陽)에 들어가는 날 밤 비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같이 하늘이 푸름은 삼영(三營)의 5백 60 군사를 권고(眷顧)하는 뜻이다. 벌떡 일어나 하늘의 뜻을 체득하여 힘써 고휼(顧恤)을 더함이 마땅하다. 승정원에서 분승지(分承旨)와 이도(二道)의 도신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길가 백성들을 매질하여 쫓아내지 말 것을 금오랑(金吾郞)에게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머물렀다.

 

7월 24일 병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세 사신(使臣)을 인견하고,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에게 글을 내리기를,
"주청사(奏請使)·사은사(謝恩使)를 곤계(昆季)098)  가 먼저하고 뒤에 하였으니, 경의 조부(祖父)를 추억함에 내 마음이 갑절 더하다."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에게 찬품과 약물(藥物)을 내려 주었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머물러 있었다.

 

7월 25일 정묘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학동(學童)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여 《소학(小學)》을 읽게 하였다. 잘 대답한 자 아홉 사람에게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내려 주고 동몽 교관은 칙려(飭勵)한 공이 있음으로써 또한 각각 녹피(鹿皮)를 내려 주기를 명하였다. 또 대사성 서지수(徐志修)에게 명하여 서재(書齋)의 유생을 거느리고 서로 논난(論難)하게 하였다. 이어 여러 유생들에게 수박[西瓜]과 제호탕(醍醐湯)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서지수에게 이르기를,
"세손(世孫)은 의젓함이 성인(成人)과 같으니, 보도(輔導)하는 방법에 더욱 뜻을 더함이 마땅하다."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세손이 명덕장(明德章)099)  을 강(講)하였는데, 신이 그 뜻을 우러러 물으니, 답하기를, ‘나의 덕을 밝혀서 다른 사람의 덕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신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사관(史官) 윤사국(尹師國)의 아뢴 바를 인하여 어제서(御製書)의 ‘세손에게 보이는 글[示世孫文]’을 훈유(訓諭)의 예(例)에 의하여 첩(帖)을 만들어 사관(史館)에 봉안(奉安)하였다. 망배례(望拜禮) 때에 어제(御製)를 판(板)에 새겨 예문관(藝文館)에 걸었는데, 대개 예문관은 바로 성상이 거려(居廬)100)  할 때에 다섯 달을 거처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있었다. 이날 밤에 군마(軍馬)가 탈출하여 전곡(田穀)을 많이 다쳤으므로 병조로 하여금 말주인[馬主]을 결곤(決棍)하게 하고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쌀 한 섬을 밭 주인에게 주게 하였다.

 

7월 26일 무진

홍봉한(洪鳳漢)이 호조에 경비(經費)가 구간(苟簡)101)  함으로써 관서(關西)의 쌀 3만 석과 무명 3백 동(同)을 취해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쌀만 취해 쓰기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늘에서 받은 본성(本性)은 같은데, 단지 공부에 힘쓰고 힘쓰지 아니한 데에 있을 뿐이다. 진(晉)나라 때 어둡고 더러운 시대를 당하여 동양(董養)은 능히 대의(大義)를 알았으니, 이로써 보면 시세(時世)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하였다.

 

정광한(鄭光漢)을 응교(應敎)로, 이경옥(李敬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에 머물러 있었다.

 

7월 27일 기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훈련 대장        구선행(具善行)을 불러 보고 능마아(能麽兒)102)                  의 당상·낭청에게 《병학지남(兵學指南)》을 강하게 하였는데, 초관(哨官)        윤심항(尹心恒)이 강에 능함으로써 우직(右職)103)                  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에 머물러 있었다.

 

7월 28일 경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이문 제술(吏文製述) 시험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이담(李潭)에게 말[馬]을 내려 주고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대(絛帶)는 바로 명(明)나라        선종(宣宗)이 하사하여 영묘(英廟)104)                  께서 받으신 것인데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한 것과 같은 특별한 은혜이다. 중주(中州)105)                  가 육침(陸沈)106)                  한 뒤에 망의(蟒衣)를 이제까지 진전(眞殿)의 동변실(東邊室) 가운데 봉안(奉安)하였는데, 이 조대(絛帶)는 전함이 없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에 머물러 있었다.

 

7월 29일 신미

훈국 장관(訓局將官)에게 명하여, 협련군(挾輦軍)을 거느리고 천천히 가서 교체(交替)해 오게 하되 만약 노비(路費)가 없으면 역시 저치미(儲置米)를 나누어 주게 하고, 온양(溫陽)에 있는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하번군(下番軍)은 매우 불쌍하니, 장관(將官)이 신번군(新番軍)을 거느리고 가서 교체하되 또한 저치미를 후하게 주어 회정(回程)의 양식을 삼게 하고 그곳에서 바로 놓아 보내게 하며, 수어군(守禦軍)도 일체로 교체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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