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760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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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임신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 돈의문(敦義門)에 역림(歷臨)하여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하여금 백성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여, 농사 형편을 물었다.

 

왕세자가 온천 행궁에서 출발하여 직산(稷山)에 도착하여 도신(道臣) 구윤명(具允明)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밭이 태반(太半)이나 묵었으니 마음이 몹시 가엾고 슬픈데, 한 가지의 은혜로운 정사가 없으니 내가 심히 겸연스럽다. 정봉(停捧) 등의 일은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연호(煙戶)의 잡역(雜役)을 견감(蠲減)하는 데 이르를 뿐이나 은혜를 입음이 지극히 적다. 다만 급재(給災)107)   한 가지 일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큰 절목인데 역시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여서 은혜를 받음이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다. 수령에게 분부하여 마음을 부쳐서 받들어 행하게 하라."
하니, 구윤명이 말하기를,
"마땅히 하령(下令)으로 여러 고을에 행관(行關)108)  하여 소민(小民)으로 하여금 저하(邸下)가 백성을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덕을 모두 알도록 하겠습니다."
하매, 하령(下令)하기를,
"이는 행관(行關)하여 효유(曉諭)할 일이 아니니, 편의에 따라 잘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8월 2일 계유

익선(翊善) 박성원(朴聖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윽이 보건대, 왕세손(王世孫)은 총명 인서(聰明仁恕)하고 안중 단장(安重端莊)하며 낭낭(琅琅)한 글읽는 소리가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읽은 글이 아직 심히 많지는 아니하나 문리(文理)가 점점 통달하여 우러러 묻는 말이 혹시 깊은 곳에 들어가더라도 대답해 응하심이 마땅하니, 진실로 능히 그 덕성(德性)을 확대(擴大)하고 그 재분(才分)을 충족하게 하면 높고 넓으며 오래고 큼[崇廣久大]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몽양(蒙養)의 방법은 옛 글을 외고 읽는 것뿐만 아니고 요는 한마디 말과 한가지 행동을 공경하고 삼가는 데 있습니다. 강관(講官)의 책임은 문의(文義)를 말로 해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귀중한 바는 사물(事物)에 따라 경계하는 것인데 궁료(宮僚)를 접견함은 단지 하루에 한 차례이고 토론하는 사이가 또한 잠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진대(進對)할 적에 덕용(德容)을 바라보면 단정히 앉아서 변두리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을 우러러 들으면 신중한 데서 나와 망령되지 않았습니다. 궤안(几案)과 의복의 정제하고 엄숙함과 배읍(拜揖)과 주선(周旋)의 안상(安詳)함은 강관(講官)이 비록 가혹하게 지적하고 깊게 규찰하려고 할지라도 조금도 빈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강(講)을 마치고 내전(內殿)에 들어간 뒤에는 그 가지는 바가 과연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은 항상, ‘안에 있을 적에도 밖에 있는 것과 같이하고 그윽한 곳에 있을 적에도 드러난 곳에 있는 것과 같이하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우러러 힘쓰게 하였으니, 영명(英明)한 자품(姿稟)으로 막연하게 듣는 데 이르지 아니하실 것은 진실로 아는 바이지만, 지혜와 사려(思慮)가 바야흐로 정하지 아니하였고 힘줄과 뼈를 아직 스스로 단속하기 어려우니, 설사 태만하고 방일(放逸)한 버릇이 있어 합전(閤殿)에 앉아 궁료를 대할 때와 판이함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이를 알 것이며 누가 금하겠습니까? 하물며 밤낮으로 친하고 믿는 바는 오직 근습(近習)들이며, 좌우에 나열한 것은 서책만이 아니고, 기교(奇巧)와 치미(侈靡)함을 눈에 접하고 음설(淫褻)하고 비패(鄙悖)함이 귀에 들어와서 점차로 물듦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그 양지(良知)·양능(良能)에 해로움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한가한 여가에나 새벽과 어두울 즈음에 항상 곁에 계시면서 거듭 가르침을 내리시고 혹은 학습한 글을 뽑아 보기도 하시며 혹은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외어서 말씀하기도 하시고 혹은 아침 저녁 진강(進講)하는 자리에 시좌(侍坐)하도록 하여 가정에서 가르치는 때가 홀로 있을 때보다 많게 하며, 경계하고 삼가는 생각이 태만하고 소홀함을 이기게 하며, 또 좌우(左右)를 엄하게 단속하여 혹시 일호라도 바르지 못한 일을 귀와 눈에 간예함이 없게 하면, 이는 곧 가법(家法)으로 가르치는 것이 신료(臣僚)가 때로 보는 데에 미칠 바가 아니며, 성상의 몸으로써 인도해 거느리심이 글로 써서 보이는 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잔약한 어린이를 부탁하여 억만년 기초가 되기를 바라니, 강관(講官)을 고르려고 하면 그대를 버려 두고 누구를 먼저하겠는가? 상소에 진달한 바는 글자마다 충곡(衷曲)109)  이요 글귀마다 절실(切實)하니, 깊이 가상(嘉尙)해 한다. 강학(講學) 때 시좌토록 하는 것은 진달한 바가 옳으니, 그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박성원은 어찌 《소학》에만 한정하겠는가? 그가 비록 구임(久任)110)  이 어려울지라도 강학의 책임을 이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연달아 신칙(申飭)하는 하교가 계셨고 세손(世孫)도 심히 권우(眷遇)111)  하였으니, 그가 비록 물러가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성원이 이에 이른 것은 또한 세손의 덕이다.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시골의 한낱 문관(文官)에 지나지 아니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대동법(大同法)112)  을 설립하기 전에는 모든 토산물(土産物)의 공납을 각읍(各邑)에서 곧바로 상납(上納)하여 여유가 있는 물종(物種)이 있으면 호조에서 쌀을 만들고 무명을 만들어 불시(不時)의 수요(需要)에 썼습니다. 대동법을 설립한 뒤에는 비록 그 즉시로 진배(進排)에 응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량을 참작하여 작공(作貢)하고, 만약 그 물종의 값에 초과분이 있다면 호조에 납부하는 것은 바로 예전의 예(例)와 같이 하였으니 바로 지금의 작목(作木)·작미(作米) 등과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 근년에 내려오면서 법의 뜻이 탕연(蕩然)히 없어져서 유재(遺在)는 문득 공인(貢人)의 사물(私物)이 되었는데, 정사년113)   이후로 탕감(蕩減)한 것이 40여만 석에 이르고 비용이 늘어감은 해마다 증가하여 수십년 사이에 또한 여러 백만 냥(兩)을 넘으니, 이로써 저것을 계산하면 거의 비슷한데 다만 유재(遺在)를 불문에 붙이기만 하고 한갓 가하(加下)114)  에 응하였으니, 경비(經費)가 탕갈(蕩渴)되어 수습할 수 없습니다. 혜청(惠廳)에서 또 호조를 접제(接濟)하는 까닭으로써 주객(主客)이 함께 곤궁함에 이르렀습니다. 저치미(儲置米) 1만 석과 세작목(細作木) 1백 동(同)을 균역청(均役廳)에 획급(劃給)하여 군문(軍門)의 급대(給代)115)  에 쓰게 한 것은 대개 창설할 때에 물력(物力)이 이어 나가기 어려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균역청이 비록 이 미목(米木)116)  이 없더라도 오히려 모양을 이룰 만하니, 이치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군문(軍門)에 나누어 획급하는 법은 비록 변경할 수 없을지라도, 그 원수(元數)에 대하여 경청(京廳)에서 마련하여 곧 바로 보상(報償)한다면 혜청에서는 호조에 의례적으로 보내는 3만 석을 이미 내지 않았고, 또 균역청의 미목을 얻으면 여유가 있을 듯하니, 적당하게 헤아려서 구획(區劃)하여 호조의 급함을 구제하는 것이 진실로 무방합니다. 작공(作貢)한 뒤에 차차로 감하여 혁파한 공가(貢價)가 1만 석(石)에 밑돌지 않으니, 법례(法例)로 논하면 호조에서 추심(推尋)하는 것이 마땅한데, 인순(因循)하여 추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에 재량(裁量)하여 8천 석으로 정하고 이번 이정(釐正)에서 남은 것과 함께 ‘경진작미(庚辰作米)’로 이름을 정하여, 매년 혜청에서 이미 받은 쌀로 실어 보낼 일을 법으로 정하고, 연례로 획송하는 3만 석의 수량은 이미 전교하신 대로 엄하게 막을 것입니다. 호조에서 만일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혜청과 균역청 두 청의 쌀 가운데 균역청에서 절가(折價)하여 서로 바꾸어 취해 쓸 일도 법으로 정해야 합니다. 상의원(尙衣院)의 의대(衣襨)와 관의(串衣)에 들어가는 향돈피(鄕獤皮)의 댓가를 전부 절사(節使) 때 오는 당돈피(唐獤皮)로 채워 주는 것은 비록 혹시 호조에는 유익함이 있을지라도 공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형세에 있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연전에 이정할 때 공가를 법으로 정하여 올리고 내렸으니, 이는 진실로 하민을 유익하게 하는 정치입니다. 대저 이 당돈피를 이미 공인에게 주지 아니하고 인하여 곳간에 버리는 물건을 만들었으니, 이는 경비를 아끼는 도리에 크게 어긋납니다. 신의 뜻은, 공가 마련할 때에 ‘당돈피’ 3분의 1을 참작하여 지급하면 상하가 함께 편리할 것입니다. 응사계(鷹師契)는 날마다 산 꿩을 공급하니, 이는 대동법의 원수(元數) 외에 산행 포수(山行砲手)의 역(役)을 대신 담당하는 것인데, 일이 심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만, 또한 상공(上供)에 관계된 것이므로 이제 의논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배의 원수 외에 더 마련한 것과 국기일(國忌日)에 진배하지 아니하는 값은 모두 올렸다 내렸다 하지 말고, 일체 정한 수량에 의하여 마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구선행(具善行)이 말하기를,
"궁성(宮城)이 심히 허술하니, 이는 대개 영선(營繕)을 맡은 자가 초솔(草率)하게 담장을 쌓은 소치입니다. 삼군문(三軍門)이 이미 도성(都城)을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궁성은 바로 내성(內城)인지라 역시 오영(五營)에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 장교(將校)를 정하여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면 실효(實效)가 있을 듯합니다. 신의 뜻은, 병조의 포군(舖軍)을 파하고 삼군문에서 각자 나누어 군포(軍舖)를 고치되, 한 포(舖)에 각각 다섯 사람을 쓰고 오영의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분배하여 수직(守直)하게 하며, 매포(每舖)에 다섯 사람이 돌려가면서 1경(更)씩 순찰하여 연락이 서로 잇달아서 밤을 마치도록 경비하고 지키며, 장관(將官)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담당 구역 안을 순회(巡回)하면 순법(巡法)이 전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모두 좋으니, 병조(兵曹)에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왕세자가 진위(振威)에서 유숙하였다.

 

지돈녕(知敦寧) 박필균(朴弼均)이 졸(卒)하였다. 박필균은 사무에 허술하고 성품이 자못 한소(寒素)하여 벼슬에 있으면서 치적(治績)의 영예가 없었고 죽음에 임하여 염빈(斂殯)할 준비가 없었다고 한다.

 

8월 3일 갑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10년을 행하지 못한 일을 이때에 다시 행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마땅히 용동(聳動)할 것인데, 이목지관(耳目之官)이 겨우 1원(員)만 갖추었으니 신하의 명분이 한심하여 이웃 나라에 듣게 할 수 없다. 승정원에서 미리 신칙하지 못하여 이런 구차한 일이 있으니, 여러 승지를 추고(推考)하라. 내일 마땅히 정문(正門)에서 조참(朝參)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이목지관(耳目之官)은 마땅히 언로(言路)를 여는 일로써 말해야 할 것인데 지금 소장(疏章)을 받아들임을 허락한 때를 당하여도 또한 하나도 말을 올리는 자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누구의 허물인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응당 참여할 인원이 글을 올리지 아니하니, 사체가 한심합니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한사득(韓師得)과 예조 참판(禮曹參判) 조돈(趙暾)을 아울러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하(都下) 백성의 위급함이 날마다 심하므로 문(門)에 임하여 물은 적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닌데, 말하기를 꺼려하는 바에 구애되어 모두 폐단이 없다고 말한다. 《육전(六典)》이 막혀 행하지 아니하니, 법이 아름답지 아니함이 아니라 사람이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수령(守令)의 이차(移差)는 전관(銓官)의 안면과 사정에 말미암았으니, 크게 민폐(民弊)가 됩니다. 중외(中外)를 물론하고 구임(久任)의 법을 거듭 밝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銓曹)를 엄하게 신칙하고 명관(名官)의 걸군(乞郡)117)  도 또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가,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경(躁競)118)  을 진정하며 분경(奔競)119)  을 억제하고 전관을 신칙할 것을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진실로 오늘날의 약석(藥石)이니, 내가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조명정(趙明鼎)이 바른 말[直言]을 널리 구하여 와서 간(諫)하는 길을 극진히 하고, 과거(科擧)를 드물게 베풀어서 분경의 근원을 막으며, 음사(蔭仕)를 한년(限年)하여 조급하게 승진하는 길을 막고, 사여(賜與)를 조절하여 미비(糜費)를 끊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음관(蔭官)의 연한은 일체 법으로 정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지평 정방(鄭枋)이 아뢰기를,
"전번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개간(改刊)할 때에 조태억(趙泰億)의 관작을 예사로이 박아 올렸습니다. 조태억은 이미 삭직(削職)한 가운데 있는데 종친 여러 당상들이 함부로 생각하여 뽑아 내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만 번 놀랄 만합니다. 간행한 뒤에 공의(公議)가 크게 발론하자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비로소 덮어 둘 수 없음을 알고 소조(小朝)에 상서(上書)하여 그 깎아 버릴 것을 청하였고, 대조(大朝)에 청대(請對)할 때에 이르러 또 깎아 없애기를 청하였는데, 제조(提調) 이창수(李昌壽)는 이미 진달하는 상서에 연명(聯名)하지 아니하였고, 또 청대할 적에도 같이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마음에 있는 바를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이 제방(隄防)이 점점 허물어질 때를 당하여 엄하게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창수를 사판(仕版)에서 깎아 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도 부효 조경(浮囂躁競)의 한 단서이므로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옥당(玉堂) 이담(李潭)이 말하기를,
"정방(鄭枋)이 하유(下諭)한 뒤에 또 새로운 계달을 발하여 대간(臺諫)의 체통을 손상함이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에만 그칠 수 없으니, 벼슬을 깎아 내치는 법을 시행하라."
하고, 인하여 조강(朝講)을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방이 마땅히 인피(引避)할 데에 인피하지 않고 양양(揚揚)히 전계(傳啓)하여 일편(一片)의 정신이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데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바로 내가 건극(建極)120)  하지 못한 소치이다. 일은 같은데 신칙(申飭)함은 다르게 할 수 없으니, 시종안(侍從案)에 부첨(付籤)121)  하고 일체 윤시동(尹蓍東)·유당(柳戇)·서형수(徐逈修)의 예(例)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홍준해(洪準海)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무신(武臣)·잡기(雜技)의 가자(加資)는 겸방어사(兼防禦使) 외에는 모두 기색(枳塞)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자가 과천(果川)에서 유숙하였다.

 

8월 4일 을해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서 조참(朝參)하였다. 승지(承旨) 심수(沈鏽)가 말하기를,
"정방(鄭枋)의 계사(啓辭) 가운데 능창군(綾昌君)의 입시(入侍)를 이미 청대(請對)한 것으로 말하였는데, 다시 입시한 것으로 글을 써서 보냈기 때문에 주서(注書)가 여러 차례 왕복하느라고 거조(擧條)를 아직 계하(啓下)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방이 아직 술이 취하여 그러한가? 인신(人臣)이 어찌 감히 음(陰)과 양(陽)으로 임금을 섬기는가? 해남현(海南縣)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이 조정에 벼슬한 지 수십년에 대간(臺諫)의 체통이 정방과 같은 이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정언(正言) 정창성(鄭昌聖)이 아뢰기를,
"근래에 언로(言路)가 막혀서 상하(上下)가 근심하고 민망스러워하는데, 정방이 죄를 입은 뒤에 거조 가운데 두 글자가 다름을 가지고 다시 투비(投畀)를 가하였으니, 율명(律名)이 너무 중합니다. 청컨대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방(鄭枋)의 논핵(論劾)이 비록 혹시 과중(過中)하였다 할지라도 이와 같 이 제방(隄防)이 점점 허물어지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때를 당하여 정방은 대간의 임무로써 한마디 말이 입에서 나오자 임금이 꺾어뜨리기에 여지가 없어 유신(儒臣)이 말하자 삭출(削黜)의 명이 있었고, 승지가 말하자 귀양보내는 율을 가하였으니, 정방은 비록 족히 아까울 것이 못되지만 그 관직을 돌아보면 어찌 개연(慨然)스럽지 아니한가? 대신(大臣)의 구해(救解)하는 소이(所以)가, ‘조정에 있은 지 수십년에 일찍이 보지 못한 바이다.’라고 하였으니, 더욱 우물에 떠밀어서 돌을 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창성(鄭昌聖)의 아뢴 바는 대간의 체통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3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방(鄭枋)의 논핵(論劾)이 비록 혹시 과중(過中)하였다 할지라도 이와 같 이 제방(隄防)이 점점 허물어지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때를 당하여 정방은 대간의 임무로써 한마디 말이 입에서 나오자 임금이 꺾어뜨리기에 여지가 없어 유신(儒臣)이 말하자 삭출(削黜)의 명이 있었고, 승지가 말하자 귀양보내는 율을 가하였으니, 정방은 비록 족히 아까울 것이 못되지만 그 관직을 돌아보면 어찌 개연(慨然)스럽지 아니한가? 대신(大臣)의 구해(救解)하는 소이(所以)가, ‘조정에 있은 지 수십년에 일찍이 보지 못한 바이다.’라고 하였으니, 더욱 우물에 떠밀어서 돌을 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창성(鄭昌聖)의 아뢴 바는 대간의 체통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왕세자가 과천에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도승지 이경호(李景祜)에게 이르기를,
"세자[元良]가 문안하기를 하령(下令)한 것은 진실로 도리에 합당하나, 온천에 목욕한 나머지에 여러 날을 달려 왔으니 만약 여기 와서 날을 마치면 조식(調息)하는 도리가 아니다. 또 서로 만나 보는 것이 마땅히 멀지 아니하여 있을 것이니 바로 돌아가서 휴식하고, 군사도 여러 날 수고하였으니 일찍이 파하여 보내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이로써 세자가 이르는 곳에 가서 전하라."
하였다.

 

임금이 온천에 배종(陪從)한 분승지(分承旨) 이심원(李心源)을 불러 보고 왕세자의 행리(行李)의 여러 가지 일을 묻고 배종한 장교(將校)와 군병을 불러서 노고를 물었다.

 

정언(正言) 원계영(元啓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반가(返駕)하시던 날에 바로 대조(大朝)에 면알(面謁)하여 온천에 목욕한 약효의 영험함과 예후(睿候)의 강화(康和)함을 갖추어 진달하시면, 대조의 근심하시는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기뻐하시는 바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대조께서 저하를 사랑하심은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으시고 저하를 염려하심은 극진하지 아니함이 없으시므로 먼 길에 오래 수고하심을 깊이 진념(軫念)하사 비록, 돌아와서 면알하는 떳떳한 예(禮)를 정지하게 하셨으나 그 그리워하고 근심하시며 염려하시는 심정은 능히 스스로 억제하실 수 없음이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명가(命駕)하여 우리 대조를 근알(覲謁)하시어 대조의 근심하시고, 그리워하시는 마음을 너그럽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제주(濟州)의 바다에 표류(漂流)한 사람이 유실한 공물(公物)을 탕척하게 하였으니, 판윤(判尹) 홍계희(洪啓禧)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다.

 

8월 6일 정축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서 온천에 배종한 군교(軍校)에게 사방(射放)122)  을 시험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藥房)에서 입대(入對)하였다.

 

8월 7일 무인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서 사방(射放)을 시험하였다. 판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명성 성모(明聖聖母)123)  께서 일찍이 수찰(手札)을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내렸는데, 이때는 숙종 초년입니다. 보도(輔導)의 책임을 유시(諭示)한 것인데, 그 뒤에 송주석(宋疇錫)이 감히 사가(私家)에 봉안(奉安)할 수 없다 하여 받들어 조정에 돌려보냈습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예문관에 봉안 하였던 바, 영남(嶺南) 사람이 한림(翰林)으로서 수사(修史)할 때를 인하여 사물(私物)로 삼았는데, 조가(朝家)에서 여러 번 관문(關文)을 보내었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하여 지금 누구의 집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였으니, 이때 조영진(趙榮進)이, 인현 성모(仁顯聖母)124)  가 그 어머니에게 준 어찰(御札)을 올림으로 인한 것이다.

 

8월 8일 기묘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서 사방(射放)을 시험한 뒤에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입격한 사람에게 반상(頒賞)하였다. 임금이 강봉철(姜鳳哲)을 교련관(敎鍊官)으로 조용(調用)하기를 명하였다. 이에 앞서 판윤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춘방리(春坊吏) 강수억(姜壽億)은 바로 강효원(姜孝元)의 현손(玄孫)인데, 강효원은 효묘(孝廟)를 호종(扈從)하여 심관(瀋館)125)  에서 절의(節義)를 다한 자입니다. 강수억은 대대로 춘방리가 되었고, 그 아들 강봉철은 별무사(別武士)의 역(役)에 편입되었으니, 군문(軍門)에 조용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불러 보고 진법(陣法)을 외게 하여 이 명이 있었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삼황(三皇)126)  의 성절(聖節)에 또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어 이미 편차(編次)에 넣었는데, 사가(私家)에서 만약 죽은 어버이의 생일에 전뢰(奠酹)를 행하면 선유(先儒)가 그 실례(失禮)를 비난하였으니, 삼황 성절(三皇聖節)에 망배례를 행하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편차 가운데서 뽑아 버리라고 명하였다.

 

8월 9일 경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승지 조영진(趙榮進)이 말하기를,
"근래에 모두 벼슬하여 진출을 매개로 삼는 마음으로 하나의 경알(傾軋)하는 장소가 되었으니, 몸을 깨끗하게 가지기를 스스로 좋아하는 자가 누가 섞여 들어가기를 즐겨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의심을 품어 한 투식(套式)으로 돌리니, 신은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그 경알하는 바는 스스로 그 구멍[竇]이 있으나 여러 신하들이 어찌 모두 참여해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구멍이 어디에 있는가?"
하자, 조영진이 말하기를,
"정방(鄭枋)의 일로써 보면 모두 이 뭇 신하들의 죄입니다. 이창수(李昌壽)는 평일(平日)에 항상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였는데, 이번 종부시(宗簿寺)의 일은 위절(委折)이 있는 듯하나 대간(臺諫)의 체통으로 논하면 발문(跋文)을 폐지하고 직호(職號)를 깎아 버리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한데, 단지 이창수의 삭판(削版)만 청하였으니, 이를 당한 자가 어찌 심복(心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그 경알을 혼동해 의심하시고 언로(言路)를 열지 않으시면 사람이 두려워함과 꺼림이 없을 것이니, 어찌 민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검열(檢閱) 윤사국(尹師國)이 어제(御製)를 서사(書寫)하였음을 가지고 녹비(鹿皮)를 하사하기를 명하였다.

 

8월 10일 신사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이번 온천 행차 뒤에 도로(道路)의 말을 들으니, 세자의 어진 명성(名聲)이 민심을 흡족하게 기쁘도록 하였습니다. 더욱 마땅히 예념(睿念)을 다시 더하사 이로써 확충(擴充)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8월 11일 임오

홍중효(洪重孝)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명류(名類)들이 신칙하는 것을 따르지 아니하여 군명(君命)을 업신여김으로써 능사(能事)로 삼는 때문에 변장(邊將)의 보외(補外)와 상례(常例) 외의 처분이 때로 혹시 있는데, 저들은 비록 이를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신(儒臣)의 직(職)에 있으니, 그 후곤(後昆)을 편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를 보이게 할 수 없다. 저들도 세록지신(世祿之臣)인데 어찌 형극(荊棘)의 길을 열 수 있겠는가? 또 석년(昔年)에 밤중 옥서(玉署)127)  에 찬품을 내린 어시(御詩)를 외니, 추모(追慕)가 갑절 더하다. 나처(拿處)한 여러 유신을 특별히 놓아 보내라."
하였다. 찰방(察訪)의 음과(蔭窠)128)  는 사대부(士大夫)의 늙은이의 음직으로 차견(差遣)하지 말며, 잡기(雜技)의 가자(加資)로서, 착호(捉虎)·포도(捕盜)·증활(拯活)과 같은 부류(部類)는 부사(府使)를 허락하지 말게 하였으니,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병으로 벼슬을 사면하였는데 임금이 대신할 만한 사람을 물으니,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말과 일이 적중(適中)한 자는 김치인(金致仁)과 김상복(金相福)이고 윤동도(尹東度)는 사람됨이 매우 청검(淸儉)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은 어찌하여 입을 열지 아니하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정경(正卿)을 올려 뽑는 것은 사체가 중대한데, 삼공(三公)이 어찌 각각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밖에 어찌 가합한 자가 없겠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김양택(金陽澤)·서지수(徐志修)는 모두가 진장(鎭長)으로 쓸 만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김양택이 나라 일을 하지 아니하면 누가 하겠는가?"
하였다. 승지(承旨) 심수(沈鏽)가 말하기를,
"정방(鄭枋)의 계체(啓體)와 의율(擬律)은 모두 말이 되지 아니합니다. 이미 삭출(削黜)하는 법을 입었는데 투비(投畀)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법을 후세에 드리우는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처음의 처분이 이미 엄하여 윤시동(尹蓍東)과 일체로 거행했으니, 본 사건[本事]에 대한 제방(隄防)은 엄하게 한 것이라고 이를 만한데, 끝에 한 바는 비록 그가 무상(無狀)할지라도 감률(勘律)이 본 사건보다 도리어 중하니, 나도 경중(輕重)이 전도(顚倒)되었다고 여긴다. 투비의 명을 특별히 정지하라."
하였다.

 

8월 12일 계미

한광조(韓光肇)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13일 갑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김선행(金善行)을 도승지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익보(李益輔)에게 입직(入直)하기를 명하였다. 이조 판서가 입직하는 것은 일찍이 없는 바인데, 뒤에 김선행(金善行)의 아뢴 바로 인하여 임금이 이를 가상히 받아들였다.

 

8월 14일 을유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서 추석 제사를 섭행(攝行)하였다.

 

8월 15일 병술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회가(回駕)하여 종가(鍾街)에 이르러 승지 심수(沈鏽)에게 명하기를,
"관광(觀光)하는 사람 가운데 만일 시골 사람이 있거든 가서 농사 형편을 물어 보라."
하니, 심수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한 용인(龍仁) 사람이 있어서 흉년든 정상을 진정하였습니다. 신의 선영(先塋)이 용인에 있는데, 흉년이 이와 같으면 신이 어찌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반드시 순문(詢問)하시는 밑에서 공동(恐動)하는 꾀를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소령원 수봉관(昭寧園守奉官)을 먼저 파면한 뒤에 나문(拿問)하고,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월봉(越俸)129)  하라 명하였다. 처음에 수봉관 임찬주(任贊周)가 가파현(加波峴)에 나무 베는 일로써 예조에 보고하니, 판당(判堂)130) 한익모(韓翼謨)가 전례에 따라 제송(題送)한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8월 16일 정해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금군(禁軍)은 마땅히 삼천(三薦)의 사람을 참용(參用)할 것인데, 구례(舊例)에 선천(宣薦)이 40명, 부수천(部守薦)131)  이 각각 15명으로 합하여 70명을 7번(番)에 분속(分屬)하였는데, 지금은 폐하여 행하지 아니합니다. 신의 생각은 삼천(三薦)을 각각 14명으로 하고 유엽전(柳葉箭)을 세 차례 취재(取才)하여 들어가기를 허락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였고, 훈련 대장 구선행(具善行)이 말하기를,
"금려(禁旅)의 수(數)가 많지 않았는데 효묘조(孝廟朝)께서 크게 증설(增設) 하였고, 현종(顯宗) 병오년132)  에 7백 명으로 정하여 사·서(士庶)를 물론하고 여력(膂力)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자를 골라서 뽑았습니다. 근래에는 비록 민간의 서민(庶民)이라도 또한 천박(賤薄)하게 여겨서 들어가지 아니하니, 사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를 미루어 알 만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무재(武才)로 출신(出身)한 자는 한번 금려를 거친 뒤에 벼슬길에 통하게 하면, 구례(舊例)를 회복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요약(要約)하다. 어찌 크게 경장(更張)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한소(兪漢蕭)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17일 무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8월 18일 기축

이익원(李翼元)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전에 창덕궁에 갔을 때에 생각하기를 세손(世孫)이 오늘은 강(講)을 정지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말을 들으니 이미 강(講)을 과(課)하였다고 하니, 대저 강관(講官)이 하루의 휴가를 주지 아니한 것이다."
하였다.

 

조덕상(趙德常)·박시좌(朴時佐)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으니, 경상 감사의 장계에, 조운선(漕運船)을 창설할 때에 도차사원(都差使員)의 노고가 있다고 함으로 인한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거처하시던 방 가운데, ‘정일 집중(精一執中)’이라고 썼는데, 내가 그 곁에 잇달아 쓰기를, ‘이는 심법을 전수한 것이다.[差傳授心法]’고 하였다. 대저 요(堯)의 〈정일 집중(精一執中)〉133)   네 글자 위에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 유 윤 궐(人心惟危 道心惟微 惟 惟 允 厥)〉 열 두 글자를 더한 것은, 비유하건대 양의(兩儀)134)  가 사상(四象)135)  이 되고 육십사괘(六十四卦)에 이르는 것과 같다."
하였다. 영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근래 사령(辭令) 사이에 공평하지 못한 뜻이 항상 많은데 일에 따라 적중함을 얻은 연후에야 만대(萬代)의 법이 될 만합니다. 사가(私家)의 일로써 말하면 자제(子弟)가 부형(父兄)의 좋은 것은 배우기 어렵고 나쁜 것은 본받기 쉽습니다. 전번에 이판(吏判)이 친히 생기(省記)136)  를 올리고 조방(朝房)에 입직(入直)한 것은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하를 예(禮)로써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승지가 진백(陳白)할 때에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석강(夕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정성[誠]으로써 아니하면 비록 학문의 이름을 얻을지라도 무엇이 국가에 유익하겠는가?"
하였다.

 

8월 20일 신묘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거둥하였다가 육상궁(毓祥宮)에 역림(歷臨)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말을 타고 창의문(彰義門)에 나가서 총융사(摠戎使)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갖추고 대성문(大城門) 밖에서 공경히 맞이하게 하고, 중군(中軍)은 행궁(行宮)밖에서 공경히 맞이하게 하였으니, 이때에 성(城) 지킬 계책을 의논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옛 해에 쓰던 포진(舖陳)137)  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총융사에게 궤(櫃) 안에 간직하라고 명하였고, 수가(隨駕)하는 군사에게는 건호궤(乾犒饋)138)  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지영(祗迎)하는 중군(中軍) 이하 표하군(標下軍)·승장(僧將)에게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사방(射放)을 시험하여 시상(施賞)하게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선혜청(宣惠廳)의 창곡(倉穀)을 적간하게 하였는데, 호서청(湖西廳)에 흠축(欠縮)이 있으므로 해당 낭관(郞官)을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8월 22일 계사

김성응(金聖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흥태문(興泰門)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북한산(北漢山)에 수가(隨駕)한 비국 당상을 불러 보고 북한산에 성(城)을 쌓는 것이 적당한지 아니한지를 물었고, 북한산 소남문(小南門) 산길을 닦기를 명하였다. 연융대(鍊戎臺) 백성을 불러 보고 폐막(弊瘼)을 물으니, 백성이, ‘세력가의 사나운 노예가 훈조가(燻造價)139)  를 주지 아니하고 정채(情債)를 강제로 받는다.’ 우러러 대답하니, 임금이 범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신칙하여 그 가장(家長)은 도년(徒年)의 율(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전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 한성 판윤 홍계희(洪啓禧), 전 판의금(前判義禁) 홍상한(洪象漢), 전 장령(前掌令) 이홍직(李弘稷)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저 백성이 고하기를, ‘거둥할 때 하례(下隷)들이 대가(大駕)를 인도한다고 핑계대면서 함부로 정채를 거두었다.’고 한 때문이다. 북한산의 부로(父老) 네 사람에게 미포(米布)를 내려 주기를 명하였는데, 숙종 임진년140)   거둥 때에 공경히 맞이한 자이기 때문이다.

 

8월 23일 갑오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8월 24일 을미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밑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8월 26일 정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총융사(摠戎使)를 불러 보고 북한 소남문(北漢小南門) 밖 치도(治道)를 하문(下問)하고 산성(山城)에 소속한 군총(軍摠)을 경기 구관 당상(京畿句管堂上) 김상복(金相福)으로 하여금 이정(釐正)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한 산성은 우리 나라 도성(都城)의 요해처(要害處)인데 대성문(大城門)의 길이 산등성이[山脊]에 나서 바라봄에 통하여 막힘이 없으니, 진실로 병가(兵家)의 꺼리는 바가 되었다. 전후 장신(將臣)이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임하여 보시고 비로소 길을 닦을 계책을 물으니, 대신과 장신이 임금의 계책을 받들어 평일에 익숙하게 계획한 것처럼 하였으니, 식자(識者)의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8월 27일 무술

강서원(講書院)에서 왕세손(王世孫)이 계속하여 《논어(論語)》를 강(講)할 것을 계품(啓稟)하였다.

 

8월 30일 신축

이조 판서 한익모(韓翼謨)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문정(問政)할 때 네 고을의 출대(出代)의 가부를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니, 대신이 평양(平壤)은 한 달이 준(準)하지 아니하였음으로써 어려워함을 가진 바가 있어서 인하여 신으로 하여금 대신의 뜻을 연석(筵席)에 우러러 품(稟)하게 하였습니다. 친정(親政)에 미쳐 입시(入侍)하여 어찌 일찍이 사실에 의거하여 진달해 아뢰지 아니하였겠습니까? 특별히 ‘대신(大臣)’ 두 글자를 아뢰지 아니하였고, 성명(成命)을 받음에 이르러서 오직 삼가 받들어 거행했을 뿐입니다. 신이 이미 하나도 그 지시하는 뜻과 같이하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죄를 삼으면 신은 진실로 할 말이 없습니다만, 김치공(金致恭)을 끝에 의망(擬望)한 것은 가령 신이 마음이 있어서 발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작은 일에 지나지 아니하니, 신은 꼬치꼬치 캐서 말하여 사체를 손상시키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의 장계로써 좌우 병영(左右兵營)의 습조(習操) 때 상격(賞格)의 예(例)에 의하여 수조(水操)에 당하여 사군목(射軍木) 5동(同)을 정식으로 획급(劃給)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가(貢價)를 이정(釐正)하는 것이 영의정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홍봉한(洪鳳漢)이 이정하려고 하는 것은 특히 공인(貢人)이 1년 안에 진배(進排)하는 바가 없으면서 다만 그 값만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절목(節目)을 정하였는데 다시 이리저리 고치면, 조정의 법령이 전도(顚倒)됨을 면치 못합니다."
하였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홍봉한의 이 일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니, 이는 창졸간에 경솔하게 작정할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영성(靈城)141)  과 더불어 개정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겨우 예(例)만 정하였다. 도성(都城)을 지키려고 하면 공가(貢價)를 감하는 것은 재정을 비축하는 것이고 민심(民心)을 얻는 것은 보장(保障)을 위한 것인데, 좌의정은 이에 대하여 이미 주인이 되었으니, 영의정·우의정의 뜻은 다시 어떠한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보장의 하교는 좋습니다. 신이 다른 의논을 할 수 있겠습니까만, 단지 조정의 법령이 거꾸러질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손하(損下)142)  하려는 것이 아닌데, 2천 석(石)을 혜청(惠廳)에 붙이는 것도 어찌 손하가 아니겠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는 방법에 힘씀을 더하는 것은 바로 신의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흰 무명 홋바지[白木單袴]를 입었는데 그 무명이 또한 가늘으니, 장차 굵은 베 옷을 입을 뜻이 있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검소함을 숭상하시는 덕은 누가 흠앙(欽仰)하지 아니하겠습니까만, 근래에 용도(用度)가 너무 넓어서 1년의 저축이 부족함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통(哀痛)할 만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2천 석의 남은 곡식이 백성에게 편리한가? 경비(經費)에 돌릴 것인가? 이제 비록 간략하게 개정하였으나, 일후에 신기(新奇)함을 힘쓰는 자가 만약 말하기를, ‘공가(貢價)의 고르지 못함이 한둘이 아니므로 크게 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 장차 도민(都民)에게 한이 없는 폐단을 열게 될 것이다. 전번에 청람계(靑藍契)는 바로 하나의 신설(新設)인데, 오히려 백성을 위한 것이나 하루를 지나지 아니하여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경비가 탕갈되면 굵은 베옷을 입을 수 있으나 결단코 백성을 괴롭게 할 수는 없다. 이번 공가 절목(貢價節目)을 특별히 정지하여 도성 백성으로 하여금 내 뜻을 밝게 알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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