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760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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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임인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후(李)가 말하기를,
"저하께서 비록 작은 병환이 계실지라도 매양 입대(入對)를 어려워하시기 때문에 의관(醫官)을 데리고 입대하기를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입대의 영(令)이 있음을 들었기 때문에 이미 입대할 뜻을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稟)하느라 밤이 깊었기 때문에 방금 와서 기다립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 15일에 대조(大朝)께서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실 때에 대내(大內)에서 나아가 알현(謁見)하신 것을 신 등도 들었는데, 온천에 행차하신 후로 진현(進見)하는 예(禮)를 오래 궐(闕)하였으니 예후(睿候)가 조금 나으시면 13일에 진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온천에 행차한 뒤뿐만 아니라 진현하지 못한 것이 벌써 석 달이 지났는데, 병이 만일 나으면 어찌 13일까지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묻기를,
"13일의 진하(陳賀)하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하는 것인가? 환어(還御)하실 기미도 또한 계시는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진하는 권정례(權停禮)로 하기를 하교하셨고 환어는 아직 하교가 없습니다."
하였다.

 

9월 2일 계묘

전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물(貢物)의 일은 으레 마땅히 혁파할 것인데 미루고 그대로 둔 것이 있고, 전연 쓰지 아니하면서 남아 있는 것도 있는데, 합하여 1만 1천여 석이 됩니다. 이는 대동법(大同法)을 설치할 때에 이른바, 쓰지 아니하는 물품을 때에 따라 재정(裁定)하는 조(條)인데, 신이 간략하게 환정(換定)한 외에 할수 없이 바로 감한 것은 수천여 석에 불과합니다. 이것도 단지 10여 사(司)의 값을 받은 가운데에 넓히고 좁힌 것만 취하였고, 그 나머지는 명색(名色)이 근거가 있고 사세(事勢)가 구애가 많은 것은 두고 논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로써 감한 수천 석은 각사(各司)에 응하(應下)할 33만여 석에 비교하면 백분의 1도 못되며, 또 20으로 나누어서 20사에 남아 있는 것을 탕감한 43만여 석에 비교하면 역시 2백분의 1도 못됩니다. 하물며 근래 여러 공물을 더 정하여 3만 5천여 석에 이르니, 비록 약간의 감한 바가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 득실의 서로 크게 다름은 또 수십분의 한둘이 될 뿐만이 아니니, 더욱 무엇이 족히 백성을 병들게 하는 단서가 되겠습니까? 만약 ‘가(加)함은 있고 감할 수는 없다.’고 이른다면, 선조(先朝)에 일을 맡은 신하가 어찌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정성이 없어서 전후에 삭감함이 7천여 석에 이르겠습니까? 진실로 쓸 것이 있으면 값을 주고 쓸 것이 없으면 값을 주지 아니하는 때문인데, 사리가 당연합니다. 신의 한결같은 고심(苦心)은 거의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에 양해를 얻었는데, 이제 대신이 심지어 미포(米包)를 얻고 도하(都下) 뭇 백성의 인심을 잃는 것으로써 대조(大朝)의 연중(筵中)에서 앙진(仰陳)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함을 이루게 하였으니, 대신이 그 본사(本事)의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이 나라를 위하는 지나친 염려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말하기를, ‘비록 미려(尾閭)143)  의 새어 나감과 부고(府庫)가 공허함이 있더라도 이때를 당하여 무릇 극감(剋減)하는 정사에 매인 것은 원망을 부르는 것이 두려우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의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물(貢物)을 쓰면 값을 주고 쓰지 아니하면 값을 주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규례(規例)이다. 홍봉한의 탕감(蕩減)하자는 논의가 근거가 없지 아니한데, 이후(李)가 도성 백성의 떠도는 의논에 요동(撓動)하여 여러 번 연석(筵席)에 진달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하였으니, 어찌 옛 대신(大臣)의 나라를 깊이 유념하는 도리이겠는가?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일전에 공가 절목(貢價節目)을 도로 정지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도하(都下)의 백성은 먼 시골 백성의 근심과 원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민폐(民弊)는, 좌상(左相)이 도성 백성의 폐단을 진달한 것처럼 한 자가 없으니,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원인손이 말하기를,
"공물의 환작(換作)은 의거한 바가 없지 아니하나, 삼수량(三手粮)144)  은 임진년145)   도감(都監)을 설치할 때에 유성룡(柳成龍)·이덕형(李德馨)·조경(趙儆)이 창시한 것으로, 역위전(驛位田)은 애초에 삼수량을 공납(供納)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은 궁방(宮房)의 면세전(免稅田)도 모두 삼수량을 내는데 역위전만 빠뜨릴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절목 가운데 들어 있으니, 역졸(驛卒)이 마땅히 억울함을 일컫는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 호조 판서는 삼수량을 역위전에 징수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하니, 승지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역위전의 삼수량은 급대(給代)한다는 말이 있었고 몇 해 전 결전(結錢)을 마련할 때에 통동(通同)의 역(役)은 비록 역위전이라 하더라도 홀로 빠뜨릴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결전을 징수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비로소 크게 깨달았다. 전 호조 판서의 뜻은 대개 아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9월 4일 을사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색이었다.

 

좌의정 이후(李)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 위에서 가부(可否)를 서로 다툼은 해로움이 없으며, 취하고 버림의 마땅함은 오직 성명(聖明)의 재택(裁擇)을 기다릴 뿐이니, 당초에 고집하고 기필하는 뜻이 없으며 또한 강하게 다투는 꾀가 아닙니다. 곧 중신(重臣)의 서본(書本)을 삼가 보건대, 말함이 매우 자세하고 분석함이 심히 명백하니, 신이 시의(時宜)에 어두워서 그릇되고 망령되게 발하는 실수를 스스로 덮을 수 없습니다. 중신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나라의 계책을 위하여 깊게 염려한 것이나 신의 어리석음에 있어서는, 들은 바에 따라 숨기는 바가 없음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중신이 이로써 스스로 인책(引責)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주행(周行)146)  에 있겠느냐?’고 한 것은, 한결같이 어찌 지나치게 하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창수(李昌壽)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죄인의 작질(爵秩)을 추탈(追奪)하였는데 이제까지 아직 선원 발문(璿源跋文)에 그대로 두었으니, 국법으로 헤아리건대, 만 번 한심합니다. 전번에 종신(宗臣)이 상소로 진달하여 깎아 버리기를 청한 것은 왕복(往復)이 사리에 합당하여 진실로 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신(臺臣)이 연명(聯名)하지 아니한 것으로써 죄를 삼으니, 대신이 이 일의 곡절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선원보(璿源譜)》를 수개(修改)하는 임무는 종신(宗臣)이 오로지 주관하였으며, 일이 품재(稟裁)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요의(僚議)가 모두 같음을 기다린 뒤에 비로소 진달하니, 이는 사례(事例)가 그러한 것입니다. 종신의 상서는 특히 오로지 주관하기 때문이며, 신이 이미 처음에서 끝까지 힘써 주장하였으니, 깎아 버리는 논의는 신과 종신이 한가지인지라 어찌 연명하고 아니하는 것으로써 대의(大義)를 잡는 엄한 도리에 더하고 덜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 5일 병오

번개가 쳤다.

 

9월 6일 정미

번개가 쳤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창처(瘡處)는 이미 아물었으니, 침의(針醫)는 그만두라."
하였다.

 

9월 7일 무신

번개가 쳤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스승이 배우지 아니하고서 능히 그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내가 아직 듣지 못하였다. 내가 이미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박사수(朴師洙)가 일찍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을 두지 아니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옳다. 지금의 대간은 창갈(唱喝)하여 인도해 들어오면 반드시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저이가 무슨 일이 있어서 들어가는가?’라고 한다. 어리석은 정방(鄭枋)과 같은 자는 우연히 들어왔다가 곧바로 벌(罰)을 받았다."
하니,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은 관사(官師)가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고 단지 사람을 그물과 함정 속에 몰아넣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그사이에 죄를 입는 자가 있어서 언로(言路)가 이로 좇아 막히니, 신은 그윽이 민망스러워합니다."
하였다. 김상로가 북한산의 사찰(寺刹)이 퇴락하고 재력(財力)의 다함으로써 공명첩(空名帖)147)  을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3백 50장을 내려 주기를 명하였다. 김상로가 서산(瑞山) 성암 서원(聖巖書院)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성암 서원은 바로 고려조(高麗朝) 문희공(文僖公) 유숙(柳淑)과 아조(我朝)의 문정공(文貞公) 김홍욱(金弘郁)을 아울러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대저 김홍욱은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먼 조상인데 기해년148)  에 창건하여 신축년149)  에 이미 사액(賜額)하였으나, 신유년150)  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갑오년151)   이후에 사액하지 아니한 사원(祠院)을 훼철(毁撤)할 때 그 가운데 섞여 들어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중(筵中)에 아뢰어 향사(享祀)를 회복하였다. 수십년 동안에 어찌하여 한마디 말이 이에 미친 적이 없었다가 이제 비로소 이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9월 8일 기유

번개가 쳤다.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9월 9일 경술

유성이 남두성(南斗星) 밑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이 붉은 색이었다.

 

9월 10일 신해

유성이 실성(室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화성(火星)이 헌원성(軒轅星) 밑에 들어갔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금월 13일이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이므로, 왕세자가 진현(進見)하겠다는 영(令)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바야흐로 문후(問候)하는 중에 있으니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강서원(講書院)에서 아뢰기를,
"왕세손이 진현(進見)하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날을 만나니, 네 할아버지의 마음이 갑절 더하다. 이미 내가 배례하지 못하였는데 무슨 마음으로 너로 하여금 와서 절하게 하겠느냐? 너를 본 지 오래이므로 한번 불러 보고싶다. 마땅히 일후(日候)를 보아가며 부를 것이니, 이날은 고요히 있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이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할 것을 명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 나아가서 선비를 시험하게 하였다.

 

9월 11일 임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과차(科次)에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송재중(宋載中)을 입시(入侍)하게 하여 《시전(詩傳)》을 강(講)하게 하였는데, 능히 외지 못하니, 직부 회시(直赴會試)152)  하게 하였다.

 

어제(御製)의 ‘세손(世孫)에게 보이는 글[示世孫文]’은 대개 면계(勉戒)하는 뜻이었다. 겸익선(兼翊善) 심이지(沈履之)와 겸찬독(兼贊讀) 이미(李瀰)를 불러서 세손의 강학(講學)이 장차 진취(進就)될 효과를 물으니, 이미가 말하기를,
"신이 본디 입이 어눌(語訥)하여 문의(文義)를 우러러 진달하는 즈음에 나이 젊은 협시(挾侍)들이 모두 돌아보며 웃었는데, 세손은 의젓하여 얼굴빛이 움직이지 아니하니, 이는 진실로 천자(天資)가 도(道)에 가까운 것이며 또한 학문에 힘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진실로 잘 보았다. 세손으로 하여금 날마다 나아가고 달마다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사실 나의 고심(苦心)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9월 12일 계축

번개가 쳤다.

 

9월 13일 갑인

천둥하고 번개가 쳤으며, 우박이 내렸는데, 형상이 작은 콩만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상달(上達)하여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부지런함으로써 진달해 힘쓰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9월 14일 을묘

정실(鄭實)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정원에서 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신민(臣民)이 우리 전하를 만난 것은 진실로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이를 만한데, 다스림이 뜻과 같지 아니하여 백 가지 법도가 함께 허물어져서 정치의 하자(瑕疵)와 교화의 폐단이 위징(魏徵)이 말한 십점(十漸)의 경계153)  에 비할 뿐만 아닙니다. 군덕(君德)으로 말하면 성상의 뜻이 근래에 더욱 약해지시어 매양 기운이 쇠하다는 하교를 내리시고, 천심(天心)이 조금 격뇌(激惱)하심이 있으시면 문득 비상한 전지(傳旨)를 내리시며, 사람을 씀이 질서가 없어서 높은 관직에 뛰어 올리는 은혜가 여러 해 계속되었고, 은전(恩典)이 너무 설만(屑慢)하여 사제(賜祭)와 녹자(錄子)의 혜택을 사람마다 모두 얻음을 입었으며, 머뭇거린다는 탄식을 여러 번 발하였으나 과감히 말하는 선비가 나아가지 아니하고, 항상 강직하고 방정(方正)한 도(道)를 장려하였으나 손순(巽順)하는 말이 간혹 행합니다. 조정으로 말하면, 백성의 근심이 매우 급한데 실지의 혜택이 아래에 미침을 듣지 못하였고, 재력(財力)이 이미 다하였는데 소비로 몰래 새어 나감이 더하며, 사사로운 뜻이 횡행하고 벼슬에 오르기를 다툼이 점점 심하며, 뇌물을 주고받음이 함부로 행해지며, 탐하고 사치함을 경쟁하며, 염치(廉恥)와 예양(禮讓)의 풍습은 거의 땅에 떨어졌고, 거짓 꾸미고 속여서 파는 술책이 날마다 점점 성행하고 있습니다. 만백성이 이로써 더욱 곤궁하고 습속(習俗)이 이로써 더욱 야박하니 위태롭고 어지러운 기틀이 조석(朝夕)에 닥쳐 있는데, 대소(大小) 관원은 편안하게 즐기면서 놀이로 날을 보내니 하늘의 경고(警告)가 어찌 이와 같이 정녕(丁寧)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승지 김선행(金善行) 등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답하기를,
"그 몸을 보고자 하면 그림자를 살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크게 효유함을 이미 자세히 하였으니, 내가 만약 그대로 머뭇거리면 정원에서 일에 따라 바로잡기를 힘쓸 것이다."
하였다.

 

옥당(玉堂) 정광한(鄭光漢)·이미(李瀰)·정만순(鄭晩淳) 등이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재이(災異)로써 차자를 올려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일은 반드시 시초에 잘 계획해야 하며 사람을 쓰는 데는 반드시 처음에 잘 살펴야 합니다. 관작을 아껴서 세상을 가다듬는 용구(用具)로 삼고, 명절(名節)을 권장하여 교화를 세우는 근본을 삼으시며, 사람에게 실상에 지나치는 표창을 가하지 마시고, 공(功)이 없는 상(賞)을 베풀지 말며, 언로(言路)를 열어서 총명(聰明)을 넓히시고, 사령(辭令)을 삼가서 후손에게 법을 삼게 하며, 부비(浮費)를 줄이고 사여(賜與)를 절약하며 정성으로 하늘을 대하시고 스스로 힘쓰기를 쉬지 아니하시면, 거의 재앙을 바꾸어서 상서로움이 되게 하고 위태로움을 돌이켜서 편안함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 온천에 목욕하신 이후로 기거(起居)가 편안하지 못하시면 절선(節宣)154)  이 마땅함을 잃을까 신이 진실로 염려하고, 빈대(賓對)를 오래 궐(闕)하시고 인접(引接)을 끊고 드물게 하시면 기무(機務)에 장애가 많을까 신이 진실로 민망스러우며, 서연(書筵)을 오래 폐하시고 궁료(宮僚)를 접견함이 드물면 외유(外誘)가 학문을 방해할까 신이 진실로 이를 근심합니다. 저하께서 두려워하사 몸을 반성하시고 돌이켜서 뉘우쳐 고치시며, 이로써 뜻과 생각을 맑게 하시고 사물(事物)을 물리쳐서 천화(天和)를 두루 회복하시면 대조(大朝)의 기뻐하심이 이에 있게 되며, 강문(講問)을 힘쓰시고 부지런히 자문하시어 정사와 학문을 폐함이 없으시면 대조의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조는 저하께 하늘입니다. 일마다 이치에 맞고 사건(事件)마다 바름을 얻어서 저하의 마땅히 할 책임을 다하여 대조의 마음을 기쁘게 하시고 희망을 만족하게 하시면, 하늘의 마음이 저절로 화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곧 그날 대조에 나아가서 정례(情禮)를 몸소 행하시면 진실로 국가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도 상서(上書)하여 진계(陳啓)하였는데, 왕세자가 아울러 답하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없는 해가 없으니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근심함이 간절한 중인데, 이제 오늘의 재이는 또 놀라고 두려워함이 간절하다. 진달한 바를 깊이 유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응교(應敎) 정광한(鄭光漢)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동궁께서는 청컨대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고 자주 빈대(賓對)를 행하여 전대(前代)의 득실(得失)을 강(講)하고, 일을 행하는 데 체험하여 내 마음이 하늘에 대함을 극진히 하며, 그윽하고 홀로 있을 적에 삼가서 나의 스스로 닦는 참마음으로 하여금 천심(天心)에 족히 부합함이 있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스스로 자강(自强)한다고 이르면서 일이 실효(實效)가 없고, 기강(紀綱)을 세우려고 하여도 정치가 실효가 없으며, 부박(浮薄)을 신칙하려고 하여도 전혀 실행이 없고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여도 백성에게 참 혜택이 없다. 늙은 나이에 추모(追慕)하여 한 달에 비록 세 번 강(講)할지라도 몸으로 가르침이 막연하여 보람이 없고 힘써 그 청함에 따라 억지로 세 번 입대(入對)를 행하였으나 풍행(風行)의 교화(敎化)가 또한 들리는 바가 없다. 비국(備局)의 문이 그 열림을 들을 수 없고 세 차례 차대(次對)는 탈품(頉稟)으로 규례를 이루었다. 나라에 이목(耳目)이 있어야 바야흐로 나라가 될 수 있는데 한번 제지(除旨)가 있으면 문득 외방에 있음을 일컬으며, 혹시 행공(行公)155)  을 힘쓰면 영패(令牌)가 서로 잇따르며, 비록 혹시 일을 말할지라도 심한 자는 사람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가벼운 것은 무른 땅에 말목을 박듯이하니, 이와 같으면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겠는가? 위로는 그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백관에 이르기까지 공경하고 꺼리는 일이 없으며, 외방에는 수령이 또한 기탄함이 없다. 아! 저 소민(小民)은 띳집[蔀屋]에서 원한을 품었는데 그 혹시 비난하고 배척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사사로운 뜻에 따라 행하니, 참 탐리(貪吏)는 아중(衙中)에서 의기 양양하고 세력이 없는 사람은 문득 탄핵을 받는다. 경알(傾軋)하는 무리와 제함(擠陷)156)  하는 무리를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한번 반포한 뒤로 이에 감심(甘心)하는 자는 어찌 부드러운 말과 웃는 얼굴로 해결하겠으며 또한 어찌 간척(干戚)을 쓰겠는가? 이러므로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경계를 삼으면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능히 바르고 곧은 말로써 공심(公心)으로 서로 경계하면, 내가 어찌 차마 편배(編配)로써 대접하겠는가?"
하였다.

 

9월 16일 정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였다. 옥당(玉堂) 홍지해(洪趾海)가 말하기를,
"저번에 정방(鄭枋)이 논계(論啓)할 때에 부리(府吏)가 예합(詣閤)한 뒤에 계초(啓草)를 가져와서 전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눈으로 함께 보고 많은 사람이 전하는 말이 같더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연석(筵席)에 오르지 아니하였으면 그만이지만 유신(儒臣)이 이미 반행(班行)에 전치(傳致)하여 증명하였다고 하니, 이 일이 과연 있었는가?"
하자, 옥당 임준(任㻐)이 말하기를,
"정방의 일은 신도 들었는데, 유신이, ‘많은 사람의 입으로 떠들어 전파하였다.’고 말하면서 몸이 경연(經筵)의 임무를 띠고 이제 주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였고, 홍지해가 말하기를,
"신이 이를 앙달(仰達)하는 것은, 진실로 언로(言路)를 여는 실상입니다. 이창수(李昌壽)를 논박하는 것이 무엇이 방해롭기에 역적으로 모는 것은 신이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할 바가 아니며 오직 대간(臺諫)만이 말할 수 있는데, 이제까지 아직 말이 없으니 이는 어찌 3백 년에 있는 일인가?"
하였다. 옥당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정방이 이창수를 논박하기 위하여 바쁘게 들어온 것은 한바탕 웃음이 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부탁을 받은 것은 폐간(肺肝)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다. 비록 사실(私室)에서 서로 부탁한다 하더라도 이미, ‘셋을 속일 수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남을 모함하는 꾀를 많은 사람이 앉은 가운데서 전하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이나, 정방을 영어(囹圄)157)  에 가두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부리(府吏)는 형조(刑曹)의 삼당(三堂)158)  에게 명하여 구문(究問)하고 등대(登對)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김화진이 말하기를,
"이는 풍문(風聞)과 다름이 없는데, 하인(下人)을 추문(推問)하는 즈음에 대각(臺閣)이 스스로 낮아짐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핵실(覈實)하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한데 도리어 영구(營救)하니,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형조 삼당(刑曹三堂)을 인견(引見)하였다. 금구 현령(金溝縣令) 정심(鄭杺)을 파직하고 이어 해부(該府)로 하여금 성문(城門)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나문(拿問)하고 구초(口招)하여 남간(南間)에 가두고 가쇄(枷鎖)를 씌우지 말며, 만일 이미 시골에 내려갔거든 나장(羅將)을 보내어 길을 갑절로 재촉하여 압령해 오라고 하였으니, 대저 부리(府吏)의 공사(供辭)에 말하기를, ‘정방(鄭枋)의 계초(啓草)는 정심이 내어 주어, 합외(閤外)에 전치(傳致)하였다.’고 한 때문이었다. 형조 판서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정방이 비록 무상(無狀)하다고 하더라도 그 관직을 돌아보면 대간(臺諫)인데, 이제 모시는 노예로 하여금 그 사실을 증거하게 하여 지주(指嗾)159)  한 것을 나타내면, 실로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파직하기를 명하였다. 참판(參判)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신의 얕은 생각은 진실로 후폐(後弊)의 무궁함에 있습니다. 아까 수당(首堂)과 더불어 같이 진달하기를 약속하였는데, 수당이 이미 죄를 입었으니 신이 편안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일체로 파직하기를 명하였다. 참의(參議) 이중호(李重祜)는 홀로 묵묵히 있다가 물러갔다. 승지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이를 만약 그대로 두면 부효(浮囂)한 버릇이 장차 반드시 점점 커지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하여, 넌지시 천청(天聽)을 공동(恐動)하는 뜻이 있었다. 정심에게 말미를 주어 서울에 올라오게 하고, 본도 감사(本道監司)로 하여금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9월 17일 무오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는 비록 대신(臺臣)에게 바로 묻는 것과 사체가 다르지마는, 대신(臺臣)의 배리(陪吏)로 인하여 대신의 밀혜(密蹊)160)  를 구문(鉤問)하는 것은 대신을 직접 신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 길을 한번 열면 후일의 염려가 무궁합니다. 정심(鄭杺)은 이 일로 인하여 또 구문(究問)하기를 명하고 헌리(憲吏)를 수핵(囚覈)한다면 오히려 그 처분이 혹시 지나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이에 지나쳐서 사단(事端)이 점점 거듭 생기는 것이겠습니까?"
하였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도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방(鄭枋)은 스스로 계초(啓草)를 만들지 못하고 남의 손을 빌어서 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구차스러우나, 그 벼슬은 대간(臺諫)이고 글은 대계(臺啓)입니다. 이제 부예(府隷)와 친족(親族)에게 근저(根柢)를 엄핵(嚴覈)한다면 진실로 전고(前古)에 없는 일입니다. 비록 대간을 바로 가두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이는 대간을 구문(究問)하는 것과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 18일 기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석음각(惜陰閣)에 나아가서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정심(鄭杺)이 만약 누가 사주(使嗾)하였다고 하면 그 일이 반드시 만연(蔓延)함에 이를 것이니, 어찌 민망스럽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정심은 자못 글을 알고 정방(鄭枋)은 명경과(明經科) 출신인데, 정방과 친족이 되며 또 같이 사니 정심의 글씨를 빌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듯하며, 사실(私室)에서 상의하여 계초(啓草)하는 것은 선배(先輩)도 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형극(荊棘)이 한번 열리게 되면 후일의 폐단이 고민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당(秋堂)161)  의 뜻도 경 등의 뜻과 같은데 부리(府吏)의 앞에서 묻지 말고 바로 입대(入對)를 요구하는 것이 가한데 이를 하지 아니하여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었으니, 경 등도 부리(府吏)의 앞에서 묻지 말고 진품(陳稟)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밤이 깊은 뒤에 비로소 듣고 알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정심이 과연 이를 한 것을 알았으나 정방이 미처 가져오지 아니한 때문에 부리(府吏)가 그 뒤에 와서 바쳤는데, 정방의 뜻은 이창수(李昌壽)를 쫓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승지 김선행(金善行)이 말하기를,
"종반(宗班)의 소장(疏章)에는 외조(外朝)에서 연명(聯名)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을해년162) 《선원보(璿源譜)》를 간행할 때 서종급(徐宗伋)도 참여하지 아니하였고 이창수도 이 예(例)에 의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방이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이로써 핵문(覈問)하면 후일의 폐단을 돌아봄이 마땅하기 때문에 정방을 놓아 두고 부리(府吏)에게 물은 것이다. 계제(階梯)가 이미 정심에게 이르렀으니 처음에는 엄하게 처치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정심에게 물어서 만약 바로 공초(供招)하지 아니하며 신문(訊問)에 이르면 또한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므로 사문(査問)의 명령을 특별히 정지하고 남해현(南海縣)에 정배(定配)하며, 정방은 지엽(枝葉)이므로 단지 시종안(侍從案)에만 제거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김보순(金普淳)이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하고 인하여 정심(鄭杺)의 일을 논하기를,
"이제 만약 점점 사단(事端)이 생겨서 정심에게 묻는 데 이르면, 신은 두렵건대, 뒤에 사람들이 이는 사람을 함정에 떨어뜨리는 술책으로 볼 것입니다. 무릇 말하는 자는 그 거짓과 참을 묻지 아니하고서 비록 하찮은 서찰이라 하더라도 모두 사주(使嗾)를 받은 바가 있다고 핑계댈 것이니, 얼마나 가서 대관(臺官)을 구문(究問)하는 데 이르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鄭枋)이 다른 사람에게 대초(代草)를 받았는데, 홍지해(洪趾海)가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눈이 함께 보았다.’고 하였으나,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과연 누가 보고 누가 전하였는가? 홍지해가 또 말하기를, ‘언로(言路)를 여는 실상이라’고 하였는데, 부리(府吏)를 구핵(究覈)하고 대간(臺諫)의 친족을 사문(査問)하는 데 이른다면, 이것이 언로를 여는 실상이라고 이를 수 있는가? 만약 정심으로 하여금 마침내 추국(推鞫)을 입었다면 화(禍)를 전가(轉嫁)한 책임을 홍지해가 어찌 면할 것인가?

 

9월 19일 경신

번개가 쳤다.

 

응교(應敎) 정광한(鄭光漢) 등이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전 참의(前參議) 김선경(金選慶)이 졸(卒)하였다. 중궁전(中宮殿)께서 거애(擧哀)하였고, 임금이 고(故) 동돈녕(同敦寧) 어사형(魚史衡)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기를 명하였으니 대저 중궁전의 조고(祖考)인 때문이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왕비가 그 조부모(祖父母)의 상(喪)에 성복(成服)하는 절차가 없고 거애조(擧哀條) 아래의 주(註)에, ‘오직 최복(衰服)은 시속에 따라 추포대(麤布帶)로 하고 30일에 벗는다.’는 글이 있으니, 진어(進御)할 추포대는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오늘 거애할 때에 맞추어 만들어 들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가하다고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정원(政院)에서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정무에 힘쓰지 아니하려는 것이 아니나 병환으로써 힘쓰지 못하시며, 학문에 부지런하지 아니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병환으로써 부지런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대조(大朝)께 나아가 알현하시는 것은 성효(誠孝)의 간절하고 시급한 바인데 병환으로써 오지 말라는 하교가 계시며, 탄신(誕辰)의 배알(拜謁)도 정례(情禮)로 마땅히 행할 바인데 병환으로써 정지하라는 명이 계시니, 이는 모두 예후(睿候)가 바야흐로 조섭(調攝) 중에 계시므로 저하의 오늘날 급무는 병환을 근신하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신이 어저께 진계(進戒)한 것은 말이 너절하고 뜻이 옅어서 진실로 족히 채용할 것이 못되지만, 대소(大小) 여러 신하의 잇따라 힘쓰시기를 바라는 것은 궐실(闕失)을 지적해 진달하고 절실(切實)한 말이 많았으니, 혹 저하께서 겸허하게 받아들여서 몸으로 행하시면 변동하는 한 단서가 될 만한데, 모두 예사로운 답을 내려서 한 종이에 박은 것과 같으니, 과연 바른 말을 듣기를 즐거워하는 뜻이 있으십니까?"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재이(災異)가 거듭 발생하니 놀람이 더욱 간절하여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는데, 진달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명심하지 아니하겠는가? 방금 질병이 고통이 심하여 정신이 어지러우니, 만약 조금 차도가 있으면 시일(時日)을 불구하고 마땅히 불러 접견하겠다."
하였다.

 

9월 20일 신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조영국(趙榮國)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9월 21일 임술

천둥하였다.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한집(韓鏶)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예조 판서 심성진(沈星鎭)은 의절(儀節)에 전연 어두어서 유식(有識)한 이가 속으로 탄식하는데, 또 동료 당상(堂上)과 세상에서 함께 아는 혐의로움이 있어서 동료 당상이 인혐(引嫌)하고 들어가서 나오지 아니하므로 견책하여 파면을 입었으니, 그 사체에 있어서 또한 마땅히 인혐하고 들어가서 염우(廉隅)를 가져야 할 것인데, 안연(晏然)히 행공(行公)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어저께 교리(校理) 홍지해(洪趾海)가 정방(鄭枋)의 해괴한 거사(擧事)로써 전석(前席)에 앙달(仰達)하여 성명의 지나친 거조를 이루게 하여 온 나라의 보고 들음을 놀라게 하여 후일의 무궁한 폐단을 끼쳤으니, 이것이 어찌 유신(儒臣) 경연(經筵)의 책임입니까? 고알(告訐)과 부효(浮囂)의 버릇을 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응교(應敎) 정광한(鄭光漢)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청컨대 즉일(卽日)에 명가(命駕)하여 떳떳한 예(禮)를 빨리 닦고 비록 조식(調息)하라는 성상의 하교를 받았을지라도 반드시 정성과 예식의 마땅히 행할 도리로써 반복해 도달(道達)하여 천청(天聽)을 돌이키기를 기약하여 유우(惟憂)163)  의 생각을 너그럽게 하시고 취양(就養)의 방법을 극진히 하시며, 이어서 주연(胄筵)164)  을 열어 경의(經義)를 문난(問難)하고 빈대(賓對)를 인견하여 서무(庶務)를 자방(諮訪)하면, 하늘에 대응하는 실상과 재이(災異)를 그치게 하는 계책은 다른 데에 구함을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이에 있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재이(災異)로써 3일의 감선(減膳)을 명하고 또 동궁(東宮)에도 일체로 거행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석음각(惜陰閣)에 나아가서 대신(大臣)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진 하늘의 경고(警告)가 마치 직접 가르치는 것과 같은데, 저쪽 지경[彼境]165)  과 우리 강역(疆域) 안에 무슨 연고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분야(分野)가 저쪽 지경과 같습니다. 신이 요행(僥倖)을 바라는 바는, 타국에 근심이 있어서 그러하다면 무엇이 방해롭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관(官)에 일이 없은 연후에 마을에도 일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신(大臣)이 된 자는 마땅히 재이를 만나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는 계책으로써 극진히 말하고 숨김이 없어서 성상의 도움을 구하는 거룩한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인데, 이에 분야(分野)의 말로써 구차히 미봉(彌縫)하니, 예전에 허경종(許敬宗)166)  이 살아 있어서 이제 다시 이 꼴을 본다면, 식자(識者)의 비난을 능히 면하겠는가?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사직을 허락하였다가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그 명을 도로 정지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김상로에게 묻기를,
"세자[元良]가 수응(酬應)하지 못한 것이 지금 몇 달인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연달아 조섭하는 중에 있으므로, 차대(次對)를 행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이 우연하지 아니하다. 경 등이 만약 입대(入對)를 요구하여 우러러 힘쓰게 하면, 세자가 반드시 척연(惕然)히 감동함이 있을 것이다. 전에 공묵합(恭默閤)에서 경이 자청하여 가서 입대를 요구하였고, 전 좌의정도 따라가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경이 어찌 기운이 쇠하여서 그러한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요즘 약원 제조(藥院提調)의 말을 듣건대, 예후(睿候)가 조금도 차도가 없어서 수응(酬應)이 어렵다고 하니, 신 등이 비록 입대할지라도 만약 앉고 누움이 불편스러우면 어찌 민망스럽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민백상이 김상로를 돌아보며 사사로이 말하기를,
"오늘 달려가서 입대를 요구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김상로가 불응하였다. 인하여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부비(浮費)를 경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발락(發落)167)  이 없었다. 민백상이 요판(料販)을 금하고 체옥(滯獄)을 소결(疏決)하기를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김상로가 공시인(貢市人)의 일로써 거조(擧條)를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경(四境) 안이 다스려지지 아니함을 말하자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것을 말하였는데, 나는 마땅히 겸손하게 사양하여 이를 하지 아니하겠다. 돌아보건대, 이제 음양(陰陽)이 고르지 아니하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지 못하니, 그 까닭을 헤아리면 모두 내게 있다. 차대(次對)와 강학(講學) 같은 것은 비록 경에게 책(責)하지 아니하더라도 경은 원보(元輔)에 있고 또 보부(保傅)168)  의 임무를 가졌는데, 일체 입대(入對)를 요구하지 아니하니, 경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세자가 비록 조섭 중에 있을지라도 경이 만약 거듭거듭 권하고 힘쓰게 하면 반드시 깨우치고 두려워하는 바를 생각할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았으니 내가 참으로 개탄스러워 하며 경이 잘못이라고 여긴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우매한 아들을 타이르는 것과 같으시니, 신이 비록 물러가서 구학(丘壑)169)  에 쓰러져 죽을지라도 또한 유감이 없습니다. 비록 많은 하교가 계셨으나 신이 죽음에 가까운 늙은 지경에 어찌 능히 우러러 체득하겠습니까? 내쳐 물러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이는 재이(災異)를 만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전일에 이미 정승을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니, 이제 반드시 고집할 것이다. 특별히 정승을 사직하게 한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몸이 보부(保傅)의 임무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어찌 정승을 사직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만 번 죽음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잊지 못하는 남은 회포가 있습니다. 성상께서 요즈음 처분이 혹시 지나침이 많으시니 행여나 촉격(觸激)하지 마시고 사기(辭氣)를 지나치게 하지 않으시기를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민백상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사면을 이미 허락하였으니, 신은 비록 보부(保傅)의 임무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신(大臣)은 한가지이니, 역시 같이 죄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의 사면을 이미 허락하였는데 경이 또 물러가기를 요구하니, 나랏일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오늘 경 등을 불러서 도리어 갈등을 이루게 하였으니, 영상을 사면하는 명을 도로 정지한다."
하였고, 이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유시(諭示)를 전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재이(災異)가 여러 번 경고(警告)하니, 전하께서 경척(警惕)하시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재이를 만났을 때에 밑에 있는 자가 매양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학문과 정사에 부지런하는 것으로써 우러러 힘쓰게 하였는데 저하는 재물을 쓸 만한 곳이 없으시니 우러러 힘쓰게 할 바가 아니나, 한 물건의 작은 것이라도 절대로 허비해 버리지 말고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으로 삼으시며 잘 조섭(調攝)하여 빨리 천화(天和)를 회복하여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하시고 자주 강연(講筵)을 열어서 하늘의 경고에 응하는 실상의 도리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삼가 마땅히 명심하고 체득하겠으나 병세(病勢)가 이와 같으니 대조(大朝)의 탄신에도 문후(問候)하는 절차를 펴지 못하였고, 중궁전(中宮殿)도 중복(重服)170)  을 당하였는데 또 문후의 예(禮)를 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큰 관절(關節)이 된다. 재이를 만나 놀라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이것이 더욱 민박(悶迫)한 일이다."
하였다.

 

9월 22일 계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였고, 좌의정 이후(李)도 또한 직무를 잘못함으로써 일체로 대명하였다.

 

9월 23일 갑자

천둥하였다.

 

9월 25일 병인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9월 26일 정묘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9월 27일 무진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9월 28일 기사

번개가 쳤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거둥하여 장차 이틀을 경숙(經宿)할 것이다. 내일 창덕궁에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배례하고, 초1일에는 먼저 육상궁(毓祥宮)에 배알하며, 길은 창의문(彰義門)을 경유하겠다."
하였다.

 

9월 29일 경오

임금이 창덕궁에 거둥하였다.

 

이익정(李益炡)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9월 30일 신미

우박이 내렸다.

 

하교하기를,
"내일 주정소(晝停所)에 도착하면 북한 승장(北漢僧將)은 승전배(僧前排)를 거느리고 남문(南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회란(回鑾)할 때에는 신지(信地)171)  에 있게 하며, 총융사(摠戎使)는 지영(祗迎)한 뒤에 북한 산성 서문(西門)에 이르러 대가(大駕)를 인도하고 서문 밖에서부터 바로 도신(道臣)이 대가를 인도하게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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