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760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8. 16:28
반응형

10월 1일 임신

임금이 소령원(昭寧園)172)  에 나아갔다가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참배하였다. 이에 앞서 소령원에 충재(虫災)가 있어서 사초(莎草)가 모두 말랐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거둥하여 친히 임하여 다시 사초를 고쳐 입혔다.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원소(園所)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였다. 승지(承旨) 한광조(韓光肇)의 아뢴 바로 인하여 대신(大臣)과 예조·호조·공조 판서로 하여금 같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10월 2일 계유

임금이 고유제(告由祭)를 행하고 역사(役事)를 마친 뒤에 또 고안제(告安祭)를 행하였다. 전 수봉관(前守奉官) 임찬주(任贊周)를 특명으로 과(窠)를 기다려 조용(調用)하게 하였으니, 일찍이 그 재이를 보고한 때문이었다. 부역(赴役)한 사람에게 저치미(儲置米)를 후하게 나누어 주었다.

 

10월 3일 갑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수봉관(守奉官)은 6품에 올리고 간역인(看役人)에게는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회란하여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어영 대장 정여직(鄭汝稷)에게 명하여 기고(旗鼓)로 영접(迎接)하게 하였다. 경기 감사와 각무 차원(各務差員)을 인견(引見)하고 농사 형편을 물었다.

 

임금이 영은문(迎恩門)에 이르자 한 사람이 길가에서 절하며 곡(哭)하는 자가 있어, 사람을 시켜 그 이름을 물으니 곧 김유선(金有宣)이었다. 좌·우 포장(左右捕將)에게 명하여 함께 앉아서 초사(招辭)를 받아 아뢰게 하니, 포장 오혁(吳)·구선복(具善復)이 공초(供招)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구선복이 말하기를,
"그 근각(根脚)을 자세히 탐지하니 본시 광역(狂易)한 사람인데, 초사 가운데, ‘전하의 명성(明聖)하심으로써 간(諫)함을 용납하지 못하신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깊이 핵실(覈實)할 뜻이 있었는데, 구선복이 ‘광역은 족히 취하여 믿을 것이 못된다.’는 말로써 아룀으로 인하여 임금의 뜻이 조금 풀어져서 해남현(海南縣)에 연한(年限)을 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기를 명하였다. 고훤 도사(考喧都事)를 파면하고 서리(書吏)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장(杖) 1백을 쳐서 놓아 보내게 하였다. 대저 김유선(金有宣)은 호조리(戶曹吏)의 아들인데 조정 신하가 감히 진언(進言)하지 못함을 분통히 여겨 이에 길가에 곡하여 호소함이 있었는데, 실상은 참으로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10월 4일 을해

한익모(韓翼謨)를 대사헌으로, 이최중(李最中)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명하여 충청도 결총(結摠)173)   밖에 여결(餘結) 7천 6백 결 말고 5천 결은 구환(舊還)174)  이 우심(尤甚)한 고을에 수봉(收捧)을 정지하기를 특별히 허락하였다. 대사성 서지수(徐志修)가 전재(錢財)를 대여(貸與)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자장(國子長)175)  은 바야흐로 학교를 일으킬 임무를 맡겼는데 이제 도리어 전복(典僕)을 위하여 구청(求請)하였으니, 중추(重推)함이 가하다."
하였다.

 

10월 5일 병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사간 이최중(李最中)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기를 요구하여 우러러 진달하기를,
"예후(睿候)가 편치 못하시어 정성을 오래 폐하셨으니, 저하의 민망하고 박절하신 마음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상참(常參)과 차대(次對)를 정지한 지 날이 오래이니, 생민(生民)의 휴척(休戚)과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비록 조섭하시는 중에 계실지라도 빨리 나아가 알현하는 예를 행하시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자주 접견하여 국가의 계책을 널리 물으시며, 또 춘방(春坊)의 여러 관료(官僚)를 와내(臥內)에 불러들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정사하고 학문하는 방법을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아니하시면, 반드시 시민(時敏)176)  의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은미(隱微)한 것이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저하께서 비록 궁중에 계실지라도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밖에 사람이 모두 알게 됩니다. 한가로이 계실 때에 반드시 정대 광명(正大光明)함으로써 마음을 삼고 매사(每事)를 소민(小民)에게 모멸을 나타냄이 없도록 하소서. 신은 또한 죽을 죄가 있습니다. 궁금(宮禁)177)  이 엄하고 깊은데 전하는 말이 적실한지는 알지 못하나, 엎드려 듣건대, 저하께서 일을 하시는 사이에 문득 대조(大朝)께서 듣고 아실 것을 두려워하사 지나치게 우려하신다.’고 하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과실이 없으시면 대조께서 들으시고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뒤로는 대조에 상문(上聞)될 것을 근심하지 마시고 오직 처사의 손실이 있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매사에 성상의 마음을 우러러 체득하지 못하여 마음이 항상 불안한 때문이다."
하였다.

 

10월 6일 정축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서, 원소(園所)178)  에 거둥할 때에 수가(隨駕)하여 동구에 들어간 군병(軍兵)에게 사방(射放)을 시험하였다. 임금이 천세필(千世弼)을 별군직(別軍職)으로 삼았다. 그 조부가 심양(瀋陽)에 호종(扈從)한 공이 있고 작년 거둥할 때 어승마(御乘馬)가 놀라 달아나서 임금이 거의 말에서 낙상(落傷)하는 환란을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천세필이 자못 여력(膂力)이 있어서 별감(別監)으로서 성상의 몸을 부호(扶護)하여 다행히 무사하였기 때문이었다.

 

10월 7일 무인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서 사방(射放)을 친히 시험하였다. 옥서(玉署)179)  에 역림(歷臨)하여 어제(御製)를 친히 써서 간인(刊印)하여 여러 유신(儒臣)과 일찍이 유신을 지내고 시위(侍衛)에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인하여 《강목(綱目)》을 뽑아 내어, 교리(校理) 이담(李潭)으로 하여금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내가 이를 즐거워하니 피로하지 아니하다.’라는 글을 읽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서 시험에 입격한 군병(軍兵)에게 시상(施賞)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찬품을 내려 주었다. 입직(入直)한 유신 이담(李潭)에게 명하여 홍문관 고사(弘文館故事)를 읽게 하였는데, 대저 영묘(英廟)180)   때 〈세자181)  가〉 밤에 홍문관에 임하여 성삼문(成三問)의 자(字)182)  를 부른 일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 봉조하(兪奉朝賀)183)  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조(先朝)께 일찍이 홍문관에 임어하시어 여시(女侍)에게 명하여 창문 사이로 촛불을 들이게 하였기 때문에 매연(煤煙)의 흔적이 오래 되어도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술편(述編)에 기록하게 하였다."
하였다.

 

10월 8일 기묘

황경원(黃景源)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차자를 올려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홍문관에서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올렸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불러 보고 다시 어필(御筆)로 ‘서궐임서 남두학사(西闕臨署南斗學士)’ 여덟 글자를 써서 내려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이십팔장(二十八將)에 비하였는데, 지금의 유신(儒臣)은 여섯 사람이기 때문에 남두(南斗) 여섯 별에 비한 것이다."
하니, 유신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써 우러러 진달하자, 임금이 남량(南樑)으로 고쳐 써서 사롱(紗籠)하여 하사하고 또 찬품을 내려 주었다. 어필(御筆)로 써서 내리기를, 정광한(鄭光漢)에게는 ‘동명의 방손으로 이름이 화현에 올랐다.[東溟傍孫名登華顯]’라고 하였고, 서명천(徐命天)에게는 ‘부자가 옥당이고 전후에 경악이다.[父子玉署前後經幄]’라고 하였으며, 김화진(金華鎭)에게는 ‘오늘날 전당(殿堂)에서 한자리를 하니 너희 아비를 추사(追思)하게 된다.[今日一堂追思爾父]’라고 하였고, 이담(李潭)에게는 ‘문정의 후손으로서 나의 학사가 되었다.[文靖之後 爲予學士]’라고 하였으며, 정원달(鄭遠達)에게는 ‘문충의 아들이요 정간의 손자가 된다.[文忠之子貞簡之孫]’라고 하였고, 정만순(鄭晩淳)에게는 ‘두 숙부를 계승하여 수조(守操)하는 마음이 가상하다.[能繼兩叔操心可尙]’라고 하였으며, 김응순(金應淳)에게는 ‘선원의 후손으로 그 충성을 계승하라.[仙源之後宜繼其忠]’고 하였고, 임준(任㻐)에게는, ‘전후의 홍문관이 한 집에 네 사람이다.[前後弘文一門四人]’라고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오늘의 일은 늙은 나이에 세 번 강(講)한 빚을 갚는 것이다. 이로써 찬품을 내리니 돌아가서 집에 가져다 주고 입직하는 자는 문한(門限)184)  이 되기 전에 도로 들어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또 부제학 정실(鄭實)에게 써서 주기를, ‘옛 정승의 아들로 염아함이 가상하다. 네가 시골에 있으나 일체로 반사한다.[古相之子恬雅可尙惟爾在鄕一體頒賜]’라고 하였다. 인하여 하유(下諭)하기를,
"사람됨이 개결(介潔)하여 이 뜻을 하유하면 스스로 마땅히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유 봉조하(兪奉朝賀)는 경자년185)   유신이니, 특별히 옥서 어제(玉署御製)를 간인하여 내려 주기를 명한다."
하였다.

 

10월 9일 경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한집(韓鏶)의 상달(上達)한 계본(啓本)을 보고서 하교하기를,
"대각(臺閣)이 고요한 가운데 그가 비록 가상하나 애석하게도 알직(訐直)186)  을 배척함에는 전혀 어두워서 독후(篤厚)한 기풍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효(浮囂)한 데에 동요되었다. 비록 그러하나 지나친 것은 허물이 되니, 서로 바로잡아서 부축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조 판서를 이미 체차하였는데 홍지해(洪趾海)는 받아들여 자신의 허물이라고 하였으니, 이도 아름다운 일이다. 대간의 요청에 따를 것이다."
하매, 대사간 이최중(李最中)이 아뢰기를,
"대신(大臣)은 몸을 나라에 바치고 재상(宰相)은 나라를 근심하기를 자기 집과 같이 하며 간관(諫官)은 언론을 극진히 하면 나라 일이 희망이 있을 것인데, 그 인도해 이끄는 방법은 성상께 있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이최중이 소조(小朝)에 구대(求對)한 일을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보(元輔)가 하지 못하는 바를 능히 행하였으니, 내가 미원장(薇垣長)187)  을 알아본 것이 이제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라."
하였다. 장령 신대수(申大脩)가 전후에 바른 말을 함으로써 죄를 입은 자를 모두 불러서 대각(臺閣)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대사헌 한익모(韓翼謨)가 상서하여 진현(進見)을 청하고, 이어서 근학(勤學)과 근정(勤政)에 힘쓰라고 하였는데,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10월 10일 신사

천둥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도기 관학 유생(到記館學儒生)188)  에게 전강(殿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형원(李亨元)과 진사(進士) 김훤(金煊)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0월 11일 임오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10월 12일 계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알과 같았다.

 

수어사(守禦使) 조영국(趙榮國)이 졸(卒)하였으므로, 이익보(李益輔)를 수어사로 삼았다.

 

10월 14일 을유

우박이 내렸는데, 작은 콩과 같았다. 유성(流星)이 누성(婁聖) 밑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승정원에서 연명(聯名)한 계달로 진계(陳戒)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산림(山林)의 선비가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은 본래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데, 나와서 조정에 벼슬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니,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애석해 합니다. 이제 만약 진실한 마음으로 불러 와서 연석(筵席)에 출입하게 하여 궐실(闕失)을 묻고 재이(災異)를 사라지게 할 계책을 강구한다면 그 도움과 유익함이 어찌 오직 신 등의 한갓 부서(簿書)와 사공(事功)의 말단에만 힘쓰는 것에 비할 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응교 정광한(鄭光漢)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의 뜻이 이미 교항(驕亢)하여 교태(交泰)189)  의 희망이 없으며 기강(紀綱)이 떨치지 못하고 상벌(賞罰)이 법도가 없습니다. 대관(臺官)의 방출(放黜)을 해가 지나도록 용서하지 아니하니 언로(言路)가 막히고, 원보(元輔)의 명소(命召)를 달이 넘도록 내리지 않으시니 대신의 예우(禮遇)가 허물어졌습니다. 곧 이 몇 가지 일은 이미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쓰는 데에 부족함이 있어서 중화(中和)를 이루고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전일 입시(入侍)한 유신(儒臣)에게 시관(試官)의 일로써 일찍이 하교한 것이 있었으나 이제까지 잠잠하고 나도 역시 묵묵(默默)히 있었는데, 오늘날 차자로 진달한 것은 비록 체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서로 힘쓰는 도리에 있어서 신칙함이 없을 수 없다. 그 뒤에 입직한 유신은 모두 체차(遞差)하겠다. 이같이 하교한 뒤에 비록 입직이 아니라 하더라도 또 장차 그 고집을 세울 것이니, 그 염의(廉義)로써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도리에 있어 한번 펴게 함이 마땅하다. 그 나머지 유신들도 특별히 현임(見任)을 해임하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사면을 허락하고, 하교하기를,
"비록 여러 신하들이라도 형식적으로 대우할 수 없는데, 하물며 대관(大官)이겠는가? 아! 영상(領相) 형제에게 나라 일을 맡긴 지 오래인데, 한결같이 조제(調劑)하는 마음은 저 하늘이 증명할 만하나, 애석하게도 간혹 연체(筵體)가 엄하지 못한 것은 그 기질(氣質)에 인한 것이다. 공묵합(恭默閤)에서 나라를 위해 강개(慷慨)하는 마음은 내가 일찍이 마음으로 감탄하였다. 이번 일은 마음이 국사(國事)에 피로하고 신기(神氣)가 쇠모(衰耗)하여 그러한 것이 아닌가? 전일에 심복(心腹)의 유시(諭示)는 하나는 나라를 위하는 것이고 하나는 잊지 못하는 마음인데 직책이 보상(輔相)에 있고, 또 그 사부를 겸하였으니 비록 하교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한번 구대(求對)해야 할 것인데, 눈물을 흘리며 하교한 뒤에도 오히려 중난(重難)하게 여기는 빛이 있으니, 이는 원보(元輔)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때 하교는 비록 우의정의 아뢴 바로 인하여 곧 정지하였으나 이로 해서 임금과 정성이 서로 버티니, 그 대신(大臣)을 옥성(玉成)190)  하는 도리로는 영상을 사면한 연후에 염우(廉隅)를 펼 수 있으므로 정승의 직무를 사임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김선행(金善行)에게 이르기를,
"영상이 연주(筵奏) 때에 웃음과 말이 서로 섞였으니, 이는 진실로 기질(氣質)의 소치이다. 이최중(李最中)의 무리는, 이 하교를 들으면, 반드시 ‘그 말이 적중한 데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날에 진면(陳勉)하지 아니한 것은 승정원도 일반이다. 여러 승지를 모두 체차(遞差)하라."
하고, 홍인한(洪麟漢)·윤방(尹坊)을 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듣건대, 이최중은 대신이 추고(推考)를 청하였다 하여서 물러가서 대명(待命)하고, 신대수(申大脩)는 전지(傳旨)가 내리지 아니하였는데 대신의 명소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었으니, 그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며, 대신(臺臣)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수수 방관(袖手傍觀)하고 있으니 신칙함이 없을 수 없다. 신대수는 전지를 답하(踏下)하고 이최중은 체차(遞差)하며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을 모두 답하하라."
하였다.

 

임금이 재이(災異)로써 6일 동안 감선(減膳)하고 왕세자도 일체로 거행하게 하였으며, 비국(備局)에 좌기(坐起)를 신칙하였다.

 

승정원과 홍문관에서 상달하여 진계(陳戒)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든 관직(官職)의 거취(去就)를 내가 알지 못하니 무릇 파직과 체차(遞差)는 모두 전지(傳旨)를 받아들이고, 비록 세 번 체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전지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김상중(金尙重)·유한소(兪漢蕭)·윤학동(尹學東)·이정철(李廷喆)을 승지로 삼고, 정홍순(鄭弘淳)을 대사헌으로, 이의철(李宜哲)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5일 병술

월식(月食)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재이(災異)로써 차자를 올려 사면을 청하니, 임금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장령 김영섭(金永燮)이 상서하여 진계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저번에 대조(大朝)께서 홍문관에 친림하시어 특별히 어제(御製)를 반사(頒賜)하시니, 여러 유신(儒臣)을 사랑하고 대우하시는 바가 천고(千古)에 드물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재이(災異)를 만나 진계할 때에 단지 형식으로 응답하는 것만 일삼고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바는 생각하지 아니하니, 장차 저 유신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0월 16일 정해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요즘 언로(言路)가 막혀서 성상의 궐실(闕失)을 규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외(京外)의 재직자(在職者)도 또한 서로 경계하는 도리(道理)가 없으며, 간혹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자기의 좋아하지 아니하는 곳에는 속박하고 또 속박한 다음에야 그만둡니다. 신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만일 규경(糾警)하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는 자의 말을 절하면서 받으려고 할 것이며, 비록 미진한 곳이 있을지라도 진실로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옳다."
하였다. 유신(儒臣) 이미(李瀰)가 말하기를,
"홍지해(洪趾海)의 연백(筵白)은 과연 잘못이며, 대신(臺臣)이 심성진(沈星鎭)을 논박한 것은 서로 맞서는 데에서 나온 듯하니, 또한 잘못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을 강직하다 여기고 오로지 의절(儀節)에 어둡다.’는 등의 말은 지나쳤으나, 이는 역시 백관(百官)이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할 것인데, 유신의 ‘서로 대립한다.’는 말은 또한 잘못이다."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 등이 과연 하나의 ‘당(黨)’자가 없고 모두 건극(建極)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유신의 ‘서로 대립한다.’는 말은 실언(失言)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고,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지금 ‘서로 대립한다.’고 이른 것은 유신의 가슴속에 아직도 ‘당’자가 남아 있어서 그러합니다."
하였다. 이미가 산림(山林)을 초치(招致)하여 재이(災異)를 막는 방법으로 삼기를 우러러 힘쓰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어떤 사람이 있는가?"
하자, 민백상이 말하기를,
"송명흠(宋明欽)은 본래 명성(名聲)이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동춘(同春)191)  의 후손인가? 내가 이미 그 사람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백정자(伯程子)192)  와 같다고 한다."
하였다. 명하여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유시(酉時)에 퇴근함을 신칙하고 또 당상관(堂上官)의 참석한 자를 써서 들이게 하였다.

 

10월 17일 무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지평(持平) 홍상직(洪相直)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참판 조명채(曹命采)는 남의 말을 염려도 하지 아니하고 시기를 이용해 모응(冒膺)하고 잠시 나왔다가 문득 들어가서 처신하는 도리가 괴이하며, 한성 우윤 이태화(李泰和)는 현직(見職)에 있으면서 비쇄(鄙瑣)함을 많이 행하였으므로 이예(吏隷)들이 침을 뱉고 욕하며 여리(閭里)에서 근심하고 원망하니, 아울러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전 응교 정광한(鄭光漢)은 이미 몹시 잔미(孱微)하고 겸하여 경천(輕淺)한데도 외람되게 청현(淸顯)의 벼슬에 통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겨 개정함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희원(李禧遠)은 성질이 본디 거칠고 외람한데다 오로지 탐하는 것만 일삼으며, 여주 목사 조제태(趙濟泰)는 장적(贓謫)에서 겨우 사면되자 곧 기읍(畿邑)에 목사(牧使)가 되어서는 일을 처리함이 교만하고 망령되어 원망과 비방이 떼 지어 일어나니, 견책하여 파면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백관(百官)이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이를지라도, 두 재신(宰臣)과 동벽(東壁)193)  을 비난하고 배척하여 말이 혼후(渾厚)하지 아니하고 뜻도 아름답지 아니하며, 이희원·조제태에 대해서는 지나간 일을 들어서 오늘날에 배척하니, 지나친 데 관련된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군(禁軍)은 실차(實差)와 예차(預差)를 계하(啓下)한 뒤에 만약 취재(取才)하지 아니하고서 사사로움에 따라 구차스럽게 채우거나 또 혹시 절목(節目)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마땅히 병조 판서로 하여금 교외(郊外)의 여러 군병들 앞에서 조리돌리고 변원(邊遠)에 충군(充軍)하여 비록 사유(赦宥)를 당하여 방면을 입을지라도 장망(將望)에 통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8일 기축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기사 당상(耆社堂上)194)  과 친공신(親功臣) 자손을 불러 보고 면식(麵食)을 내려 주었으며, 어제(御製)로 그 일을 기록하고 공신(功臣)의 이름을 낱낱이 들어서 총전(寵典)을 보였다. 기사 당상 정형복(鄭亨復)이 말하기를,
"예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의복과 음식을 맥구 노인(麥丘老人)에게 내려 주매, 노인이 ‘국중(國中)의 굶주리고 헐벗은 자에게 내려 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신도 또한 신 등에게 면식(麵食)을 내리는 뜻으로써 일국의 굶주리고 헐벗은 자에게 추급(推及)하도록 할 것을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고, 특별히 초모(貂帽)를 하사하여 가상(嘉尙)한 뜻을 보였다.

 

10월 19일 경인

유성(流星)이 천측성(天廁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달이 여귀성(輿鬼星)을 범하였다.

 

10월 20일 신묘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알과 같았다.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하교하기를,
"복선(復膳)하는 날에 만약 다시 제성(提醒)하면 그 나라가 흥(興)하겠는가? 차대(次對)를 하는가 입대(入對)를 하는가? 비국(備局)이 있는가 정원(政院)이 있는가? 칙교(飭敎)가 보람이 있는가? 오늘부터 또 찬품을 줄여서 10일에 준(準)하라."
하였다.

 

송문재(宋文載)를 대사간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승정원에서 연계(聯啓)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교리 이미(李瀰)와 부교리 심이지(沈履之)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한번 생각하시는 사이에 몸의 사사로움을 극복해 버리지 못하시어 채용하고 버림[用舍]에 있어서 치우침에 얽매이는 누(累)가 있고 듣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량이 없습니다. 중외(中外)의 거둥[幸行]은 진실로 전배(展拜)와 신감(伸感)에 말미암은 것이겠으나, 우모(羽旄)195)  를 자주 들고 화란(和鑾)196)  을 너무 빨리하여 후손에게 법을 끼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며, 크고 작은 저술(著述)은 비록 학문을 펴고 회포를 붙이는 데에서 나왔을지라도 사륜(絲綸)이 간략함을 잃고 문장이 지나치게 드러나서 실덕(實德)에 손상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잡된 말과 바르지 못한 사람을 천감(天鑑)이 밝게 보지 못하심이 아니지만 차마 드러내어 물리치지 못하시어 혹시 용서함에 이르시며, 어진 인재와 바른 의논을 뒤에 깨닫지 못하심이 아니지만 표장해 쓰지 아니하여 마침내 버리는 데 이릅니다. 이러하시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 나타나고 거조(擧措)에 베푸는 것이 모두 엄중 심원하고 강결 공명하지 못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한갓 사치하고 교만하며 물욕에 방탕함이 사사롭고 간사함이 되는 줄만 아시고, 동정(動靜)과 호오(好惡)의 즈음에 털끝만한 은미함이 모두 족히 천리(天理)를 저해하고 성덕(聖德)을 더럽히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왕세자가 진현(進見)하는 예(禮)를 넉 달이나 미루어 이제까지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예후(睿候)가 더욱 괴로울 것을 성상의 마음 으로 지나치게 근심하시어 조섭(調攝)에 전념하도록 아직 그만두라고 하신 데에 인연한 것입니다만, 다만 질환(疾患)은 작은 일이고 정성(定省)197)  은 떳떳한 예(禮)인데, 만약 세절(細節)에 구애되어 떳떳한 예를 오래 폐하면 동궁[銅闈]의 연모(戀慕)하는 정성을 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의 자애로우신 마음으로 생각하시는 심정을 반드시 스스로 억제하기 어려우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승정원의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재이(災異)로써 차자로 사면(辭免)하기를 진달하고, 또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간하는 말을 들어주는데 힘쓸 것을 우러러 청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0월 21일 임진

승정원과 홍문관에서 상달하여 힘쓰기를 진청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말로 답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이미 찬품을 줄였으니, 역시 찬품을 줄이라."
하였다.

 

10월 22일 계사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밑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서 유민(流民)에게 죽을 먹이고 또 보휼(保恤)하라는 뜻으로써 도신(道臣)과 유수(留守)에게 유시를 내렸으니, 대저 정형복(鄭亨復)의 ‘맥구 노인(麥丘老人)’이란 말에 감동한 것이다.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옷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제주(濟州) 사람으로 공물(貢物)을 들이는 자에 대하여 공시인(貢市人)으로 하여금 그 폐막(弊瘼)을 진달하게 하였으며, 이어 비국(備局)과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다시 품(稟)하게 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이창수(李昌壽)에게 이르기를,
"정방(鄭枋)의 말은 또한 경알(傾軋)이라고 이를 수 없는데, 이는 여대(輿儓)198)  의 말과 무엇이 다른가? 경은 지나치게 시애(撕捱)하지 말라."
하니, 이창수가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단지 한낱 마음뿐인데, 〈‘그 마음먹은 바를 진실로 알 수 없다.(其心所在誠未可知)’라는〉 여덟 글자의 말이 이미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니, 신이 죽고 싶어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목강(繆姜)199)  이 술을 부어서 어진 사람을 하례한 것은 장손 황후(長孫皇后)200)  가 위징(魏徵)201)  을 하례한 것과 같다. 그가 죄를 알아서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남자(南子)202)  의 음악(淫惡)함과는 차별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람 쓰기를 잘못하는데, 만약 재주 있는 이를 먼저 쓰면 어찌 옛사람과 같지 못하겠는가만은, 지금은 구하고 하고자 하는 자를 취해 쓰기 때문에 조경(躁競)이 심하다."
하였다.

 

10월 23일 갑오

좌의정 이후(李)가 차자를 올려 사면(辭免)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송(宋)나라용도각(龍圖閣)203)  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친히 문신(文臣)에게 책문(策問)하였으며, 또 음관(蔭官)으로 하여금 세도(世道)를 돌이키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을 상소로 진달하게 하였다. 또 군사를 다스리는 계책과 성을 지키는 책임을 무신(武臣)에게 묻고 또한 글로 진달하게 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심이지(沈履之)에게는 준직(準職)204)  에 제수하기를 명하고 나머지는 말[馬]을 상주는 은전을 시행하였다. 검열 강지환(姜趾煥)은 말함이 과중(過中)함으로써 하고(下考)205)  에 두었는데, 임금이 ‘마음에 강개(慷慨)함이 있어서 발설한 것이다.’라고 하여 특별히 지필묵(紙筆墨)을 내려주었다.

 

10월 24일 을미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밑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김양행(金亮行)을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삼았다. 김양행은 성품이 온화하고 자량(慈良)하며, 학문에 대한 조예(造詣)가 정밀하고 심오하여 처음에 초선(抄選)으로 자의(諮議)에 제수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음과(蔭窠)로 6품에 올랐다.

 

10월 25일 병신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유개(流丐)를 거느리고 진청(賑廳)에 넘겨주어 죽을 먹이게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0월 27일 무술

임금이 이담(李潭)·김화진(金華鎭)·정만순(鄭晩淳)·정원달(鄭遠達)이 관직(館職)을 시애(撕捱)함으로써 특별히 문겸(文兼)을 제수하였다. 유신(儒臣)에게 아침에 패초(牌招)를 내렸는데 저녁에 전지(傳旨)를 들임으로써 승지 유한소(兪漢蕭)에게 특별히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여 일체로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신집(申鏶)의 상소에, ‘노성(老成)한 사람을 임용(任用)하고 산림(山林)의 선비를 불러 쓰는 것으로써 세도(世道)를 돌이키는 일로 삼으며, 방백(方伯)을 반드시 골라서 쓰고 묘당(廟堂)에 옳은 사람을 얻는 것으로써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으로 삼으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자못 시정(時政)의 병폐에 적중하였다.

 

사재감 봉사(司宰監奉事) 이존성(李存誠)이 상소하여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 12조(條)를 극진히 말하였는데, 1은 저사(儲嗣)를 가르침이고, 2는 하정(下情)을 통하는 것이며, 3은 전적(典籍)을 닦는 것이고, 4는 사습(士習)을 바르게 함이며, 5는 과규(科規)를 정하는 것이고, 6은 음관(蔭官)을 고르는 것이며, 7은 자목(字牧)을 간발(簡拔)하는 것이고, 8은 군좌(郡佐)를 선택하는 것이며, 9는 대간(臺諫)의 선임을 신중히 하는 것이고, 10은 언로(言路)를 넓히는 것이며, 11은 녹봉(祿俸)을 올려 주는 것이고, 12는 이서(吏胥)들에게 후하게 하는 것이었다.

 

부사용(副司勇) 김경일(金敬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경현(聞慶縣)을 조령성(鳥嶺城) 안으로 옮겨서 관질(官秩)을 조금 높이고 군졸을 더 두며, 풍기군(豊基郡)을 죽령(竹嶺)으로 옮기고 금산군(金山郡)을 추풍령(秋風嶺)으로 옮겨서 역시 문경의 예와 같이 하며, 전라도 병영(兵營)을 장성(長城)으로 옮겨 설치하여 노령(蘆嶺) 밑 큰 관방(關防)을 만들고, 청남(淸南) 다섯 영(營)도 청북(淸北) 여덟 고을의 예와 같이 독진(獨鎭)을 만들며, 북도 친기위(北道親騎衛)는 감영(監營)·병영으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만들어 주게 하고, 크고 작은 배가 통영(統營)을 지나는 것은 통제사(統制使)에게 관유(關由)하게 할 것입니다. 도성(都城) 삼문(三門) 밖에는 외성(外城)을 쌓되 모화관(慕華館)에서 청파(靑坡)까지로 하여 강창(江倉)을 모두 그 안으로 옮기며, 금군[禁旅] 1번(番)은 중외 출신(中外出身)으로 재주를 시험하여 액수(額數)를 채우고 또 추천에 따라 내삼청 속오군(內三廳束伍軍)에 비의(備擬)할 것입니다. 비록 조련(操鍊)을 정지하는 때를 당할지라도 매양 수령이 겨울 달에 경상(境上)에서 조련하며, 전선(戰船)은 앞뒤의 치(鴟)206)  를 두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뒤의 치를 쓰고 뒤로 물러가려고 하면 앞의 치를 써서 머리와 꼬리를 서로 바뀌어 가고 오는 데에 편리하게 하며, 융복(戎服)207)  에는 반드시 두 활을 꽂아서 혹시 상(傷)할 것에 대비할 것입니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