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760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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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축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교리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분치(忿懥)·공구(恐懼)·우환(憂患)·호요(好樂)를 각각 그 때에 알맞게 하면 가하나, 하나라도 분수에 지나침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이 네 가지로써 드러내어 말하였으니, 진실로 나타나기 쉬운 곳에 경계함이 간절하다."
하였다. 부수찬 이미(李瀰)가 말하기를,
"한결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만약 ‘편(偏)’자가 있으면 저절로 한쪽으로 돌아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편’자는 바로 말세(末世)의 당습(黨習)이다. 만약 좋아하면서도 그 악함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좋음을 알면 어찌 당습이 있겠는가?"
하매, 좌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진실로 당습을 가지고 말하건대, 그 당(黨) 가운데 들어가면 비록 그 악함을 알지라도 따라서 이를 덮어주고, 뭉쳐서 당을 이루고 있으니, 일월처럼 밝으심으로서 마땅히 이런 곳에 밝게 비추어 분석해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후가 인하여 병으로써 사면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에게 이미 사면을 허락하였으니, 내가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그때의 하교는 경이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닌데, 경의 체직을 청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이후가 외방에 있는 대신(大臣)을 불러 이르게 하는 뜻으로써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약방 도제조의 임무를 허체(許遞)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후(李)는 내국 제거(內局提擧)로 경연(經筵)에 같이 들어와서 유신(儒臣)의 진강(陳講)을 마치지 아니하였는데, ‘뭉쳐서 당(黨)을 이룬다.’는 말로써 급급히 진달한 것은 이미 경연의 체통이 아니고, 그가 천청(天聽)을 의혹하게 하고 임금의 마음을 공동(恐動)하게 한 것은 자못 대신이 세도(世道)를 진정하는 도리가 아니다. 성상이 만약 혹시 뭉친 사람을 묻는다면 장차 어떤 사람으로써 대답할 것이며, 온 세상에 화(禍)를 전가(轉嫁)시키기에 이르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0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후(李)는 내국 제거(內局提擧)로 경연(經筵)에 같이 들어와서 유신(儒臣)의 진강(陳講)을 마치지 아니하였는데, ‘뭉쳐서 당(黨)을 이룬다.’는 말로써 급급히 진달한 것은 이미 경연의 체통이 아니고, 그가 천청(天聽)을 의혹하게 하고 임금의 마음을 공동(恐動)하게 한 것은 자못 대신이 세도(世道)를 진정하는 도리가 아니다. 성상이 만약 혹시 뭉친 사람을 묻는다면 장차 어떤 사람으로써 대답할 것이며, 온 세상에 화(禍)를 전가(轉嫁)시키기에 이르지 않겠는가?"

 

11월 2일 임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밑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동지사(冬至使) 세 사신(使臣)을 인견하고 찬품을 하사하였다.

 

11월 3일 계묘

유성(流星)이 성성(星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하교하기를,
"제주에서 진상하는 물건이 또 올라오거든 가지고 온 사람에게 옷을 지어서 주고 내려갈 때에 경유하는 고을로 하여금 양식을 주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에게 이르기를,
"좌의정의 말에, ‘오늘날 세도(世道)가 전일과 같지 아니하다.’고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좌의정은 세도(世道)를 가다듬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고심(苦心)인데, 신과 좌의정은 마음은 같으나 일은 다릅니다. 좌의정은 드러내는 것으로 주장을 삼고, 신은 진정시키는 것으로써 주장을 삼습니다."
하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다. 좌의정이 조 영돈녕(趙領敦寧)을 불러 이르게 하는 뜻을 진달하였는데, 경은 여러 원임(原任)을 열거할 때에 어찌하여 조상(趙相)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르도록 하기가 어려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을해년208)   후로 찌꺼기가 깨끗이 다 없어졌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마음은 진실로 알지 못하나 외면은 모두 씻어졌습니다. 마땅히 이은(李溵)의 두각(頭角)이 조금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주인으로 삼을 만한데, 두세 재신(宰臣)이 신에게 말하기를, ‘세도(世道)는 이은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재(重宰)를 말하지 아니하고 홀로 이은을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마음이 곧은 자는 마땅히 곧은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신의 말하는 바는 그 마음을 이름입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사람을 쓰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진실로 대신(大臣)의 책임인데, 추천한 사람이 적당하지 아니하면 아호(阿好)의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은(李溵)은 하찮은 신진(新進)으로서 일찍이 말할 만한 재덕(才德)이 없는데, 갑자기 세도(世道)의 책임을 칭탁하여 우러러 아뢰니, 이는 무슨 뜻인가?" 임금이 민백상(閔百祥)의 아뢴 바로 인하여 각 아문(衙門)에 공물(貢物)의 예매(預買)를 엄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0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재정-공물(貢物)


[註 208]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사람을 쓰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진실로 대신(大臣)의 책임인데, 추천한 사람이 적당하지 아니하면 아호(阿好)의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은(李溵)은 하찮은 신진(新進)으로서 일찍이 말할 만한 재덕(才德)이 없는데, 갑자기 세도(世道)의 책임을 칭탁하여 우러러 아뢰니, 이는 무슨 뜻인가?"
임금이 민백상(閔百祥)의 아뢴 바로 인하여 각 아문(衙門)에 공물(貢物)의 예매(預買)를 엄금하였다.

 

11월 5일 을사

유성(流星)이 옥정성(玉井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

 

11월 6일 병오

임금이 육상궁에서 동향(冬享)을 친히 행하고 회란(回鑾)할 때에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우의정·금위장(禁衛將)·총융사(摠戎使)를 인견하였다. 호조(戶曹)와 총융청(摠戎廳)에 명하여 북한 산성의 태고사(太古寺) 뒤에 비각(碑閣)을 짓게 하였으니, 태조(太祖)의 어휘(御諱)가 있기 때문이다.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종가(鍾街)209)  의 거지 아이를 적간(摘奸)하여 거느리고 선혜청(宣惠廳)에 넘겨주어 죽을 먹이고 안접(安接)하게 하였다.

 

11월 7일 정미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예조(禮曹)와 춘추관(春秋館)·당상관(堂上官)에게 명하여 채여(彩輿)·세장(細仗)·고취(鼓吹)를 갖추어 태조·정종·태종·단종·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 9조(朝)의 시호(諡號)·휘호(徽號) 단자(單子)와 현종·숙종·경종 3조의 어휘(御諱)·어자(御字) 낙점 단자(落點單子)를 모셔 오게 하였다. 임금이 공경히 맞이하여 봉심(奉審)한 뒤에 어필(御筆)로 표(標)를 써 붙여서 휘호 단자는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심도(沁都) 사각(史閣)에 봉안(奉安)하게 하고 휘자 단자는 예조 당상과 춘추관 당상으로 하여금 선원각(璿源閣)에 봉안하게 하였다.

 

11월 8일 무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석강(夕講)을 행하였는데, 《대학》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자(赤子)가 부모를 부르는데, 사랑할 줄을 모르면 부모의 도리가 아니며,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하지 못하면 어찌 임금이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과 재정(財政)을 다스리는 것이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이른 바, ‘일개신(一介臣)’이란 것은, 독립하여 기대지 아니함을 볼 수 있는데, 그 마음이 너그러우면 재주가 비록 부족할지라도 덕량(德量)이 심히 넓은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 진실로 마땅히 덕을 먼저 하고 재주를 뒤에 해야 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이와 같으면 어찌 부효(浮囂)와 조경(躁競)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심이지가 말하기를,
"‘취렴(聚斂)하는 신하를 두는 것보다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것이 낫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진실로 격절(激切)합니다. 취렴하는 폐단은 생민(生民)이 곤궁하게 되는 근본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아래 백성에게 손실을 입히고 윗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무리이다."
하였다. 심이지가 말하기를,
"비록 이익이 나라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오히려 하지 아니할 것인데, 하물며 오로지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당시의 조정 신하가 스스로 국가를 운영(運營)하면서 오직 취렴만 일삼아 공(公)을 빙자하고 사(私)를 경영하여, 백성이 참으로 해(害)를 받는데, 심이지의 말은 진실로 시대의 폐단에 적중하다. 그러나 극진히 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11월 9일 기유

황인검(黃仁儉)을 대사헌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충청도 생원 이의보(李義輔) 등이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를 청주(淸州) 화양 서원(華陽書院)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무릇 각사(各司)에 진배(進拜)하는 지품(紙品)은 지나치게 두꺼운 것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시전 도고(市廛都庫)의 폐단으로써 엄금하기를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전번에 대신(臺臣)이 홍문관의 고요함을 심히 배척하였는데, 삼사(三司)도 마땅히 다름이 없습니다. 그 스스로 하는 것이 도리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면서 ‘장차 저들을 어디에 쓰겠느냐?’는 말까지 있었으니, 말의 내용이 자못 긴박하고 뜻을 씀이 아릅답지 못합니다. 김영섭(金永燮)을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명흠(宋明欽)을 수령(守令)에 비의(備擬)하여 내가 한 번 보려고 한다."
하였다.

 

11월 11일 신해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이담(李潭)을 특별히 제수하여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정원달(鄭遠達)을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김화진(金華鎭)을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정만순(鄭晩淳)을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삼았으니, 관직(館職)으로서 시애(撕捱)한 때문이었다.

 

11월 12일 임자

윤동섬(尹東暹)을 승지로 삼았다.

 

수찬 이은(李溵)이 차자를 올려 네 유신(儒臣)을 외방에 보직(補職)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부제학 조명정(趙明鼎)도 또한 차자를 올려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이 《중용》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읽고 이어 말하기를,
"삼가 서문의 대의(大意)를 보건대, 성학(聖學)의 조예(造詣)가 이미 지극한 경지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자 겸퇴(謙退)하시는 뜻이 있으심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윽이 보건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나이가 이미 팔십에 이르렀으나 소공(召公)이 여오편(旅獒篇)210)  을 지어 부지런히 진계(陳戒)하여 오직 성인(聖人)임에도 더욱 성인이 되기만을 바랐으니, 신자(臣子)의 힘쓰기를 권하는 도리가 어찌 성수(聖壽)의 더욱 높으심으로써 그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나이가 더욱 높을 수록 덕이 더욱 높아진다.’는 것은 바로 성인(聖人)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나는 본래 깨달은 바가 없으니, 오늘 사관(史官)이, ‘우리 임금은 《중용》·《대학》에서 얻음이 있다.’고 대서 특서(大書特書)하면 유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여대 하천(輿儓下賤)도 모두 명덕(明德)을 가졌는데, 자신의 양심을 속임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어둡고 어지러운 데에 이를 뿐이다."
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민백상(閔百祥)과 비국 당상을 특별히 불러서, 육조(六曹)를 신칙하여 《육전(六典)》을 밝게 익히게 하되, 만일 게으르고 해이하는 자가 있으면 진달해 아뢰게 하였다. 민백상이 배천군 대흥산성(大興山城)의 군량[軍餉]을 송도(松都)에 옮겨 붙일 일을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두루 물은 다음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말에 따라서 이전대로 배천에 붙이고 그 조적(糶糴)의 수량을 감하게 하였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조명정이, ‘신집(申鏶)이 성지(聖旨)에 응하여 말을 올린 것은 의견이 없지 아니하나 두루 경재(卿宰)를 찾아 보고 극구 변명하였으며, 심지어 맹세하는 말까지 있었으니, 늙은 음관(蔭官)이라고 하여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면서 그 관직을 도태(淘汰)하라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신집이 강개(慷慨)하여 말을 올린 것인데, 만약 그 벼슬을 도태한다면 봉황(鳳凰)이 오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민백상이 말하기를,
"신이 본디 부제학의 충후(忠厚)함을 아는데, 지금 이 아뢴 바는 진실로 지나칩니다. 하관(下款)의 말은 더욱 연석(筵席)에서 진달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세도(世道)를 부호(扶護)하는 뜻으로써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하니, 특별히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부제학을 이미 처분하였으니, 신집도 자처(自處)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김응순(金應淳)이 복명(復命)하였다. 금천 현감(衿川縣監) 신희(申暿)가 치적(治績)이 제일임으로써 승서(陞敍)하였고, 죽산 부사(竹山府使) 이석유(李碩儒)는 치정(治政)이 하(下)에 있음으로써 파직하였으며, 광주 부윤(廣州府尹) 원경렴(元景濂)은 환곡[糴]을 대신 돈으로 받았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윤병연(尹秉淵)은 죄수를 사역한 것으로써 모두 나처(拿處)를 명하였으니, 암행 어사의 아뢴 바에 인한 것이었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1월 17일 정사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었다. 수찬 이은(李溵)이 말하기를,
"《성학집요》 가운데, 세자를 가르치는 방법이 나라의 급선무인데, 그 근본은 몸으로 도솔(導率)하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판부사(判府事) 조재호(趙載浩)에게 전유(傳諭)하여 길을 떠나 올라오라고 면려하였다.

 

11월 18일 무오

임준(任㻐)을 승지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간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필선(弼善) 이수봉(李壽鳳)이 상서하여, 복괘(復卦)211)  를 인하여 진계(陳戒)하였다.

 

11월 19일 기미

유성(流星)이 수위성(水位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누런 색이었고, 달이 헌원성(軒轅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계복(啓覆)212)                  하였다. 특명으로 고원군(高原郡) 열녀(烈女)인 전덕수(田德守)의 아내 윤조이(尹召史)를 정려(旌閭)하고 중[僧] 간상(簡相)을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였다. 애초에 고원군 상발산사(上鉢山社) 쌍산리(雙山里)의 양녀(良女) 윤소사가 시집가서 전덕수의 후처(後妻)가 되었는데, 밭 머리에 막(幕)을 짓고 외를 팔아서 호구(糊口)하였다. 이해 9월에 양천사(梁泉寺)의 중 간상이 마침 전덕수가 출타(出他)한 때를 당하여 방에 들어와서 끌어안고 겁간(劫奸)하려고 하자 윤소사가 칼을 가지고 혈전(血戰)하다가 간상이 방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윤 조이가 그 옷자락을 잡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그 지아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에 간상이 낫으로 그 손과 팔과 가슴을 마구 찔러서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는데, 본도 감사(監司)        이이장(李彛章)이 장계(狀啓)하여 정포(旌褒)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조이의 정렬(貞烈)은 나도 모르게 늠연(凛然)해진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입절(立節)한 곳에 비석(碑石)을 세워 정표(旌表)하게 하고 본군(本郡)으로 하여금 특별히 제사를 지내어 넋을 위로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신집(申鏶)의 상소는 묘당(廟堂)을 힘써 공격하고 시폐(時弊)를 신랄히 논하였는데, 조명정(趙明鼎)을 체차(遞差)할 때에 ‘그가 자처(自處)함이 마땅하다.’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듣건대, 이미 정순(呈旬)213)                  하였다고 하니, 이 뒤에 누가 감히 묘당의 일을 논하겠습니까? 후폐(後弊)를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본직(本職)을 그대로 유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주달을 가하다고 하였다.

 

11월 22일 임술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살인 죄인 장후남(張厚男)·신후진(申後辰)을 삼복(三覆)하고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하세중(河世中)을 특명으로 작처(酌處)하자, 대신(臺臣)이 법을 가지고 쟁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옳으나 작처한 것도 뜻이 있다."
하였다.

 

11월 23일 계해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밑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에게 전강(殿講)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전적(典籍) 김재옥(金載玉)과 학유(學諭) 배성유(裵聖兪)에게 모두 말[馬]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형조의 세 당상을 소견하였다. 형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정심(鄭杺)의 동생 정삼(鄭槮)이 격쟁(擊錚)한 공사(供辭)를 가지고 우러러 아뢰기를,
"정심이 정방(鄭枋)과 더불어 정방의 조카 집에 같이 있었는데, 정방이 예궐(詣闕)할 적에 계초(啓草) 가운데 능창군(綾昌君)의 일을 언급한 것이 있었으나 그 이름자를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여 그 조카 정우환(鄭羽煥)으로 하여금 탐지하여 써서 예궐한 뒤에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사헌부 하례(下隷)가 형조의 엄문(嚴問)에 겁을 내어 ‘계초(啓草)를 금구쉬(金溝倅)에게서 받아 왔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지금 정삼이 격쟁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하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계초는 진실로 정심이 대신 지은 것이 아닙니다. 듣건대, 그 사람됨이 청백하고 정직하여 결코 속이고 숨길 이치가 없다고 합니다. 또 홍지해(洪趾海)가 비록 ‘만 사람이 함께 본 바이다.’고 하였으나, 신이 이미 보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이 합(閤)에 나아간 자들도 또한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등문고(登聞鼓)를 방자히 친 일은 정배(定配)함이 마땅하나 한 일로 인하여 형제를 처분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 공사(供辭)를 물시(勿施)하라."
하였다.

 

11월 24일 갑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송창(宋昌)214)  으로 하여금 남북군(南北軍)215)  을 거느리게 하였으니, 또한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지 못하다."
하니,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부열(傅說)216)  이 상(商)나라 고종(高宗)에게 경계하기를, ‘벼슬을 친밀한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제왕(帝王)이 가장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나라의 일로써 논할 것 같으면 오왕(五王)217)  의 참란(僭亂)은 오로지 그 임금이 능히 작은 기미(幾微)와 조짐을 막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바가 한갓 그 화(禍)를 일으키게 하였을 뿐이니, 후세의 임금이 마땅히 경계하여 생각하고 엄하게 살필 곳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니, 법강(法講)은 비록 행하지 못하더라도 와내(臥內)에서 소대하여 그 체모(體貌)를 간략히 하고 자주 인접(引接)하시면, 이는 신의 바라는 바입니다. 오래 추운 정전(正殿)에 계시면 〈옥체(玉體)에〉 손상되는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와내에 불러서 접견하시면 신 등의 불안한 마음이 풀어질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노쇠하였으니,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와내에 불러서 접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후일의 폐단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다. 법강(法講)과 아울러 와내에서 행하겠다."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제요(帝堯)의 ‘모자 토계(茅茨土階)218)  ’와 마후(馬后)219)  가 ‘몸소 두껍고 거친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躬服大練]’ 등의 글자를 써서 들이게 하여 벽에 붙이고 스스로 경성(警省)하였다.

 

11월 25일 을축

임금이 좌의정 민백상(閔百祥),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 종묘 제조(宗廟提調)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에 나가서 조묘(祖廟)를 더 세울 곳을 봉심(奉審)하고 모양을 그려서 오게 하였다. 이어 어제 태묘기실(御製太廟記實)을 내리어, 망묘루(望廟樓)에 간직하여 후일 더 세울 때에 참고로 하도록 대비하게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장원서(掌苑署)로 말하면 숙종께서 등극하신 후에 세자궁(世子宮)에 진배(進拜)하는 물품은 즉시 감하(減下)하였는데, 경종께서는 등극하신 후에 세제궁(世弟宮)의 진배하는 물품은 감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체로 감하하라."
하였다.

 

11월 26일 병인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를 읽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명(西銘) 주(註)에 ‘이 백성을 보기를 형제와 같이하라.’는 글귀가 있는데, 임금과 백성은 하늘과 땅 같으니 임금이 된 이가 오직 능히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보면 이 일의 반(半)은 지나가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은 연후에 〈나라 일을〉 할 수 있는데, 신하가 능히 그 신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신하는 한 사람이 아니므로 오히려 할 수 있으나 임금이 능히 임금 노릇을 못하면 어찌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11월 27일 정묘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1월 28일 무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비부(鄙夫)는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비부는 비록 크게 간특(奸慝)한 자와 다를 것 같으나 그 해(害)는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므로 신이 연중(筵中)에서, ‘작록(爵祿)을 가볍게 여기고 명절(名節)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쓸 것.’을 누누이 우러러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당론(黨論)도 벼슬의 득실을 근심하는 데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다."
하였다. 심이지가 말하기를,
"목묘(穆廟)220)  께서, ‘주자(朱子)를 본받으려고 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黨)에 들어가겠다.’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이로써 국시(國是)가 크게 정하고 삼간(三奸)221)  을 물리쳐 내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룩하시다."
하였다. 심이지가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유정(留正)222)  에게 준 글에서 당(黨)의 해를 없애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신하가 위태로운 말과 과격한 논의를 하는 것은 어찌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하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처음에 비록 비위에 거슬려서 견벌(譴罰)을 가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만약 공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살피시면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단지 나를 사랑하는 뜻을 인정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하면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말이 들리지 않는다."
하였다.

 

임금이 기호(畿湖)의 재해가 우심한 고을은 결전(結錢)을 전감(全減)하고 그 다음 고을은 반감(半減)하며, 호서(湖西)는 옛 포흠(逋欠)의 수봉(收捧)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9일 기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선정(先正)223)  의 《성학집요》를 강하고 감동을 일으킨다.’는 것으로써 명제(命題)를 삼아 어제(御製)를 불러서 쓰게[呼寫] 하였다. 대저 스스로 힘쓰는 성상의 뜻으로써 전벽(殿壁)에 붙이고 이어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옥당 고사(玉堂故事)에 싣게 하였다.

 

형조(刑曹)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북도 감시 어사(北道監市御史) 엄린(嚴璘)이 장계(狀啓)로 청하기를,
"이번 개시(開市)에 있어 관(館) 안과 밖을 물론하고 혹시 금하는 물건을 몰래 장사하는 자와, 각 차비(差備) 가운데 동정(同情)하여 사사로이 숨기는 자와, 징색(徵索)을 견디지 못하여 사사로이 뇌물을 주는 자와, 사리(私利)를 엿보아 차지하려고 비밀히 종용(慫慂)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효시(梟示)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의 말에 따라, 죄범이 가벼운 자는 조리돌려 곤장(棍杖)을 치고, 심히 중한 자는 격식을 갖추어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임금이 경상 감사 조엄(趙曮)의 장문으로써 여러 신하에게 물은 다음 왜관(倭館)의 잠상(潛商) 현상정(玄尙楨)은 차율(次律)224)  에 의하여 거행하고 관련된 여러 사람도 또한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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