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760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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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임신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으로, 황인검(黃仁儉)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윤봉구(尹鳳九)를 특별 제수하여 대사헌으로 삼고, 이최중(李最中)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에게 묻기를,
"영백(嶺伯)의 과기(瓜期)가 만료(滿了)되었는데, 그 대신(代身)은 누가 가합하겠는가?"
하니, 민백상이 이최중의 종핵(綜核) 강명(剛明)함과 황인검의 청백(淸白) 주상(周詳)함을 우러러 아뢰었는데, 이날 정사에 황인검을 경상 감사로 맨 앞에 의망(擬望)225)                  하여 하비(下批)하였고, 이어 이최중을 광주 부윤으로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에 대하여 선유(先儒)의 변설(辨說)이 많은데, 허(虛)는 이(理)에 속하고 영(靈)은 기(氣)에 속하기 때문에 천지 사이의 물건이 속이 빈[中虛] 것은 모두 신령한 것이니, 인심(人心)으로써 말하건대 밖은 둥글고 방촌(方寸)226)  은 비었기 때문에 능히 허령(虛靈)한 것입니다. 심지어 연적(硯滴)이 조석(潮汐)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밖은 둥글고 속이 빈 이치이니, 부옹(釜瓮)227)  은 뚜껑이 없기 때문에 조석을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유(先儒)의 학설은 오직 정(程)·주(朱)228)   외에는 모두 취할 것이 없다. 거개 이같은 이치만 강구하고 방심(放心)을 수습(收拾)하지 않는 자가 많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스스로 밝으나 물욕(物慾)의 찌꺼기가 모두 이에 섞여서, 비유하건대, 수정(水晶) 그릇에 물을 담으면 맑고 먹물을 담으면 검은 것과 같다. 오직 마땅히 그 방심을 수습하여 찌꺼기가 없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어찌 한갓 이기(理氣)의 심묘(深妙)한 것만 논하고 실공(實功)을 구하지 아니하겠는가? 부옹(釜瓮)이 뚜껑이 없어서 조석(潮汐)을 짓지 못한다고 한다면 바다는 어찌 일찍이 뚜껑이 있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바다는 하늘로 뚜껑을 삼습니다."
하자, 특진관(特進官)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그러면 동해(東海)는 어찌하여 조석(潮汐)이 없습니까? 이 이치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같은 것은 강구할 필요가 없고 인심의 어려운 것은 사욕(私慾)을 이겨 없애는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기를 명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충청 감사의 장본(狀本)으로써 재해가 우심한 열 세 고을과 그 다음 두 고을의 진휼곡(賑恤穀)은 영진곡(營賑穀)과 자비곡(自備穀) 8천 석을 먼저 획급(劃給)하기를 청하고, 전라 감사 장본으로써 영암(靈巖)·진도(珍島)·해남(海南)의 전선(戰船)의 저치미(儲置米)는 을해년229)  ·병자년230)   양년(兩年)의 미봉(未俸)이 6천 98석인데, 매년 징보(徵補)를 3백 석으로 표준하여 3백 석을 수봉하지 못한 수령은 해유(解由)에 구애(拘礙)하기를 청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2월 3일 계유

좌의정 이후(李)가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였으니, 시애(撕捱)하여 인입(引入)한 것으로써 칙교(飭敎)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서 황감(黃柑)을 나누어주고 선비를 시험하였다.

 

12월 4일 갑술

유성(流星)이 장성(張星) 밑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과차(科次)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이치중(李致中)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치중이 《서전(書傳)》을 강하다가 네 글자를 빠뜨렸는데, 임금이 훈고(訓詁) 몇 글자를 다시 외게 하고 이어 직부(直赴)하게 할 것을 명하니,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강경(講經)에 대하여 이미 규정을 정한 뒤에 강장(講章)에만 그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이번의 일은 비록 성상의 뜻한 바에서 나왔겠으나 이 뒤에 선비가 반드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뒤에는 마땅히 정한 법에 의하여 한 편(篇)을 전부 강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치중에게 묻기를,
"부효(浮囂)·조경(躁競)을 어떻게 그치게 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부효·조경은 비록 밑에 있는 자의 버릇이기는 하나, 역시 대신(大臣)과 위에 있는 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데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였다.

 

12월 5일 을해

황해 감사 정옥(鄭玉)이 졸하였다. 김선행(金善行)을 황해 감사로 삼고, 홍중효(洪重孝)를 특별히 제수하여 공조 참의로, 이수훈(李壽勛)을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삼았는데, 선택하여 의망(擬望)하지 않았다 하여 이조 판서 이익보(李益輔)에게 한 등(等)을 감봉(減俸)하였다.

 

12월 7일 정축

조명정(趙明鼎)을 대사성으로, 유한소(兪漢蕭)를 승지로, 채제공(蔡濟恭)을 경기 감사로, 송명흠(宋明欽)을 예조 참의로 삼았는데, 모두 특지(特旨)에서 나온 것이다.

 

하교하기를,
"늙은 나이에 세 번 강(講)할 때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치(招致)하려는 뜻이 또한 간절하다.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행하려는 것인데, 어찌 차마 멀리하는가? 곧 역마[馹]를 타고 올라와서 나의 은근(慇懃)한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예조 참의 송명흠(宋明欽)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는데, 대신과 비국 당상을 명하여 불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평안 병사 윤태연(尹泰淵)을 파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저 윤태연은 누비(縷緋)로 신[靴]을 만들어서 세궤(歲饋)231)  를 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조 판서 이익보(李益輔)가 근일의 정주(政注)에 혹시 치우침이 없지 않다고 하여 특명으로 파직하고 참판 박상덕(朴相德)은 그 정주에 같이 참여하였다고 하여 또한 체차(遞差)하였으며, 특별히 제수하여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직책이 전형(銓衡)에 있는 자가 무릇 사람을 쓰는 데에 있어 재기(材器)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피차(彼此)가 서로 호대(互對)하는 것을 탕평(蕩平)이라고 여겨 밖으로는 공평함을 넓히는 도(道)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총애(寵愛)를 굳게 할 꾀를 품으니, 유식 계급에서 그윽이 탄식한 지 오래였다. 이익보가 한두 벼슬자리를 비의(備擬)하는 즈음에 조금 형적(形迹)을 두자, 치우친 데 매었다는 죄과(罪科)에 돌려서 견파(譴罷)의 법을 가하였으므로, 그 위엄과 처벌이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였는데도, 대신(大臣)이 반일(半日)을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마침내 한 마디말로 건백(建白)함이 없으니, 내가 대신에게 그윽이 애석함이 있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2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231] 세궤(歲饋) : 선물.
사신(史臣)은 말한다. "직책이 전형(銓衡)에 있는 자가 무릇 사람을 쓰는 데에 있어 재기(材器)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피차(彼此)가 서로 호대(互對)하는 것을 탕평(蕩平)이라고 여겨 밖으로는 공평함을 넓히는 도(道)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총애(寵愛)를 굳게 할 꾀를 품으니, 유식 계급에서 그윽이 탄식한 지 오래였다. 이익보가 한두 벼슬자리를 비의(備擬)하는 즈음에 조금 형적(形迹)을 두자, 치우친 데 매었다는 죄과(罪科)에 돌려서 견파(譴罷)의 법을 가하였으므로, 그 위엄과 처벌이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였는데도, 대신(大臣)이 반일(半日)을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마침내 한 마디말로 건백(建白)함이 없으니, 내가 대신에게 그윽이 애석함이 있다."

 

윤급(尹汲)을 수어사(守禦使)로, 구윤옥(具允鈺)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사성에게 명하여 장의(掌議)와 색장(色掌)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유생은 누구인가?"
하니, 대사성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김영(金寧)인데, 바로 송명흠(宋明欽)의 제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춘(同春)232)  은 양정재(養正齋) 편액(扁額)을 썼고, 너희 스승의 이름도 들었다. 예전에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사마광(司馬光)의 말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광이 오지 아니하였는데, 내가 비록 정성이 없을지라도 늙은 나이에 세 번 강(講)하는 뜻을 체득하여 빨리 올라오기를 너의 스승으로 하여금 알게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문의(文義)를 끄집어내어 여러 유생들에게 물어 보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학문은 귀함이 이치를 밝히는 데 있다. 옛 사람의 말에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오늘 대사성에게 명하여 너희 들과 더불어 경(經)을 가지고 전석(前席)에서 어려운 곳을 밝혀 내게 하였는데, 대저 이 강설(講說)을 듣고서 나의 박한 덕을 돕게 하려는 것이니, 또한 어찌 국조(國朝)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조명정이, ‘은밀한 것에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莫顯乎隱]’라는 뜻을 유한경(兪漢敬)에게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의 한 마음이 비록 한 몸 가운데 간직하였으나 이치[理]의 지극히 드러난 것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또 네가 바야흐로 이 자리에 들어올 적에 한 생각의 발함이 혹시 조경(躁競)·부효(浮囂)한 뜻이 있었으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네가 스스로 알 것인데, 하물며 기상(氣像)에 나타난 것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는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황순(黃栒)이 군자중용장(君子中庸章)을 강(講)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으로부터 소인(小人)까지 말하였는데, 중간에 어찌하여 일체 현인(賢人)이 빠졌는가?"
하니, 황순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각 그 극(極)을 들어서 그 중간의 허다한 사람을 포괄(包括)한 것이다. 소인(小人)은 어찌하여 중용(中庸)에 반(反)하는가?"
하니, 황순이 말하기를,
"정욕(情慾)이 이성(理性)을 이겨서 그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중용을 말할 수 있다. 이 장(章)은 《대학(大學)》의 전(傳) 1장(章)과 같고, 앞의 1장은 《대학》의 경(經) 1장과 같으니, 알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중관(中官)이 임금 앞에 책을 올리니, 임금이 높은 소리로 몇 차례 꾸짖고 인하여 이르기를,
"예전에 장사숙(張思叔)233)  이 종[僕夫]을 욕설하며 꾸짖으니,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지 아니하는가?’ 하였기에 당시에 마음에 두고 잊지 아니하였다. 아까 중관이 잘못 서권(書卷)을 취한 것에 대하여 어찌 족히 사기(辭氣)를 쓸 것이 되겠는가마는 스스로 소리가 높아짐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하였다. 인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이 혁폐(革弊)를 논한 글이 심히 통쾌하여 제갈 양(諸葛亮)의 기상(氣像)을 그려 내었다."
하였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신이 ‘희(羲)·화(和)234)  에 명하였다.’는 일절(一節)에 대하여 그윽이 크게 의심스러움이 있었던 것은, ‘요(堯)임금 때의 희·화가 어찌 후세의 역관(曆官)에게 미치지 못하여 동서(東西)로 분주하고 남북(南北)으로 달리면서 이처럼 크게 수고로이 하였겠는가?’ 함이었는데, 《황명역법(皇明曆法)》을 상고한 뒤에 이르러 비로소 밤낮의 길고 짧음은 남북으로써 차(差)가 있고, 절기(節氣)의 이르고 늦음은 동서로써 차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신이 이에 희·화를 나누어 명한 것이 곧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야(晝夜)와 절기의 차이를 자세히 진달하라."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북극(北極)이 땅에 나온 것이 매양 2백 50리(里)마다 1도(度)의 차(差)가 있는데, 밤낮의 차가 이로 말미암아 생깁니다. 우리 나라 서울은 북극이 땅에서 38도가 나왔으니 서울 이북으로부터 매양 2백 50리마다 1도를 더하여 삼수(三水)·갑산(甲山) 땅에 이르면 북극이 땅에 나온 것이 꼭 40도가 되는데, 이 땅의 하지(夏至)에는 낮이 가장 길어서 60각(刻)이 되며, 서울 이남에서부터 매양 2백 50리마다 1도를 감하여 강진(康津)·해남(海南) 땅에 이르면 북극이 땅에 나온 것이 30도가 되는데, 이 땅에 하지의 낮이 가장 길어서 45각이 됩니다. 동서 절기(節氣)의 이르고 늦음은 역시 4분(分)으로써 번갈아 서로 가(加)하고 감(減)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역서(曆書)는 서울 3백 리 안에서만 쓸 수 있고 그 밖에는 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에서는 대통역법(大統曆法)을 쓰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본래 대통역법을 썼었는데 숭정(崇禎)235)   연간에 이르러 내각 학사(內閣學士) 서광계(徐光啓)가 새로운 법으로 수정(修正)하여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역서(歷書)에도 주(州)마다 그 주야와 절기를 반드시 나누지 아니하였으면 우리 나라도 어찌 주마다 측험(測驗)할 필요가 있는가?"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중국은 13성(省)으로 주야와 절기를 나누었으니, 우리 나라도 마땅히 8도(道)로써 주야와 절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신은 사람을 쓰는 방도를 강(講)하였으니, 마땅히 사람을 쓰는 의(義)를 진달하겠습니다."
하자,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은 구구(區區)한 법제(法制)236)  의 말단(末端)으로써 문의(文義)를 부연(敷衍)해 진달하였는데, 이제 상번(上番)이 사람을 쓰는 말을 진달하여 유신(儒臣)의 체통을 깊이 얻었으니, 신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보통 사람의 심정은 다른 사람의 말함이 자기의 말보다 나은 것을 들으면 칭찬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보다 낫다고 말하지 아니하는데, 부제학은 그렇지 아니하다."
하였다. 임금이 심이지에게 묻기를,
"세손(世孫)의 강학(講學)이 많이 진보한 보람이 있는가?"
하니, 심이지가 말하기를,
"신이 ‘인(仁)’자를 물으니, 각하(閣下)가 말하기를,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아름답게 하는 이는 인이 적다.[巧言令色鮮矣仁]」고 하였으니, 그러면 교묘한 말과 아름다운 얼굴빛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인(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인한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한 자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智者樂水]’는 뜻을 물으니, 답하기를, ‘인지(仁智)란 것은 덕성(德性)이고 동정(動靜)이란 것은 체단(體段)이며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효험(效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문의는 비록 노사 숙유(老師宿儒)라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이 이미 문구(文彀)에 들어갔으니, 이는 모두 박성원(朴聖源)의 공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산림(山林)의 사람으로는 송명흠(宋明欽)과 같은 이를 강관(講官)으로 삼으면 반드시 유익할 것이다."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림의 선비를 청선(淸選)의 직으로 처우하기 때문에 사양하여 이르지 아니합니다. 만약 위종사(衛從司) 등 음관(蔭官)으로 처우하면 어찌 오지 아니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심이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합니다. 비록 음관으로 처우한다 해도 오지 않는다면 어찌 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성상께서 지성으로 불러 오게 하시는 뜻이 있는 까닭에 감동하는 자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계방(桂坊)237)  에 문식(文識)이 있는 사람이 많았는데, 윤봉오(尹鳳五)도 그때 계방의 관리였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명응은 당시에 이른바 문학의 선비인데, 전석(前席)에서 강토(講討)한 것이 하나는, 동북해(東北海)에 조수(潮水)가 없다는 말이고, 하나는 역법(曆法)의 그릇됨을 논한 것이니, 이것이 과연 국가의 계책에 긴요한 임무와 성학(聖學)의 요도(要道)에 도움이 있겠는가? 한갓 장구(章句)의 학(學)으로 스스로 박흡(博洽)한 변론을 자랑하였으니 그의 본래 실득(實得)의 공부가 없음을 볼 수 있는데 또한 족히 유용한 재목이 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과학-역법(曆法) / 역사-편사(編史)


[註 232] 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註 233] 장사숙(張思叔) : 사숙은 정이(程頤)의 문인 장역(張繹)의 자(字).[註 234] 희(羲)·화(和) : 요(堯)임금 때 천문(天文)과 역상(曆象)을 맡았던 희씨(羲氏)·화씨(和氏) 두 신하.[註 235]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註 236] 법제(法制) : 역법.[註 237] 계방(桂坊) :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명응은 당시에 이른바 문학의 선비인데, 전석(前席)에서 강토(講討)한 것이 하나는, 동북해(東北海)에 조수(潮水)가 없다는 말이고, 하나는 역법(曆法)의 그릇됨을 논한 것이니, 이것이 과연 국가의 계책에 긴요한 임무와 성학(聖學)의 요도(要道)에 도움이 있겠는가? 한갓 장구(章句)의 학(學)으로 스스로 박흡(博洽)한 변론을 자랑하였으니 그의 본래 실득(實得)의 공부가 없음을 볼 수 있는데 또한 족히 유용한 재목이 되겠는가?"

 

12월 10일 경진

사서(司書) 원계영(元啓英)이 상서하여 자주 강관(講官)을 접견하여 경의(經義)를 토론하고 즉시 명가(命駕)하여 〈상에 대한〉 정리(情理)와 예의를 몸소 행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어저께 번개가 친 것은 역시 시기(時氣)가 절후를 잃은 소치입니다. 전하께서 경계하고 근심하시는 정성으로써 오늘 강연(講筵)과 빈대(賓對)를 명하심이 있었으니 전하께서 마땅히 몸에 돌이켜 스스로 살피시고 마음으로 이르시기를, ‘내가 선(善)을 좋아하는 정성이 없는가? 내가 간(諫)함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는가?’라고 하시고, 허물을 바로잡고 잘못을 밝히는 데에 이르러서도 즐거이 들으시고, 귀에 거슬리며 마음에 어긋날지라도 아름답게 받아들이시면 이는 족히 재이(災異)를 막는 도리와 후손을 편안하게 하는 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정령(政令)이 떳떳한 이치에 어긋남이 있기 때문에 시기(時氣)가 이와 같으니 마음에 개연(慨然)함이 있다. 참고 글을 읽는데 대신(大臣)이 들어오면 타이를 말이 있다."
하고, 임금이 특별히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불렀다. 우의정 민백상이 제주 목사의 장본(狀本)을 가지고 우러러 청하기를,
"노비 공미(奴婢貢米)와 균역미(均役米)는 한 말을 감하고, 산둔마 구점(山屯馬驅點)을 거행하며, 군병 조련(軍兵操鍊)은 명년을 기다려서 거행하고, 종자 콩[種太] 1천 5백 석을 본도 도신(本道道臣)으로 하여금 따로 차원(差員)을 정하여 명년 봄을 기다려서 포장해 보내며, 또 진휼청(賑恤廳)의 쌀 1백 석과 돈 5백 냥을 한성부(漢城府)에 획급하여 호적고(戶籍庫)를 중수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병조 참지(兵曹參知) 1원(員)을 더 내어 두 대궐에 윤번(輪番)으로 입직(入直)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옷감과 음식을 가지고 고(故) 봉조하(奉朝賀) 김재로(金在魯)의 아내 심씨(沈氏)에게 존문(存問)하게 하였는데, 고(故) 상신(相臣)을 추억(追憶)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차대(次對)를 앞당겨 정한 것은 긍척(兢惕)238)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좌의정이 다시 차자를 올렸으니 마음에 그윽이 개탄스럽다. 하교하려고 하나 바야흐로 《중용》을 강하면서 혹시 중도(中道)에 지나칠 것을 두려워하여 참고 이에 이른 것이다. 지금 이후로는 정유년239)   고사(故事)에 의하여 삼강(三講)만 행하고 차대를 폐할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만약 차대를 폐하시면 백성이 의앙(依仰)할 바가 없고 인심이 흩어질 것입니다."
하고, 입을 모아 힘써 다투고 성명(成命)을 정지할 것을 번갈아 청하였으며, 민백상(閔百祥)은 황겁(惶㥘)하여 몸둘 바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 거조(擧措)를 즐겨서 하겠는가만, 주인옹(主人翁)이 끝내 마음을 돌이켜서 들어주지 아니하니 듣기에 해괴하고 곤혹스럽다. 여러 신하들은 모름지기 물러가서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좌참찬 홍봉한(洪鳳漢)이 울면서 말하기를,
"성상의 마음에 지키는 바가 있어 이 하교를 말씀하셨는데 신 등이 도로 정지하라는 명령을 받들지 못하니 신하의 분의(分義)가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차마 신 등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무상(無狀)한 지경에 빠지게 하십니까?"
하였고, 민백상이 또 울면서 말하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데 홍봉한의 말이 진실로 몹시 슬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참찬의 말은 마음에 감동하는 바가 있다. 내가 만약 듣지 아니하면 어찌 군신의 의리가 있겠는가? 내일 마땅히 문에 임(臨)하여 조참(朝參)을 행할 것이니 시·원임 대신(時原任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함께 들어오면 경 등의 말에 따르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심수(沈鏽)를 특별 제수하여 도승지로 삼고, 임위(任瑋)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1일 신사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이후(李)에게 이르기를,
"주(周)나라에는 삼공(三公)·삼고(三孤)240)  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한 상신(相臣)이 있을 뿐이니, 이와 같고서도 과연 나라가 되겠는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비록 성상의 하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신이 어찌 신의 죄가 이에 이른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으로 된 것은 팔·다리와 귀·눈이 있어서인데 나라에 귀와 눈이 없으면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대각(臺閣)은, 크게는 극진한 말과 바른 의논을 다하지 못하고 작게는 관사(官師)가 서로 경계하지 아니하면서 조금만 견책(譴責)이 있으면 스스로 이르기를, ‘곧은 말을 하다가 견책을 입었다.’고 하니, 그 임금된 자가 어찌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경년(頃年)에 공묵합(恭默閤)에서 정기탕(正氣湯)을 복용할 때에 내가 말하기를, ‘국가의 일과 백성의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는데, 이 하교를 듣고서 옛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는 자는 하늘이 밝게 임할 것이다."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지금 세도(世道)가 비록 깊이 염려할 것은 없을지라도 그 싹이 나타나는 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싹이라는 것은 봄이 되면 반드시 자라는 것인데 어찌 염려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이조 판서를 가까스로 이미 처분하였는데 당(黨)을 없애는 방법은 오직 전관(銓官)을 칙려(飭勵)하는 데 있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싹이 나는 것은 정한 곳이 없으며 전관(銓官)은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바뀌는데 만약 오로지 전조(銓曹)에게 있으면 없애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집의 이수봉(李壽鳳)이,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치하여 주연(胄筵)과 세손(世孫)의 강학(講學) 때에 출입하도록 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비록 옳으나 전의 임무에 능히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고 앞 연석(筵席)에서 모호(糢糊)하고 구차한 짓을 하였으니 파직하라."
하였으니, 대저 이수봉이 이 전에 오래 궁료(宮僚)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평 이창임(李昌任)이 정언 홍상직(洪相直)을 체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저 이창임이 ‘오늘날 신하가 누가 당심(黨心)이 있겠느냐?’는 말로써 아뢰니, 임금이 여러 대간(臺諫)에게 물었는데 홍상직이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으므로 그 언의(言議)가 흐리멍덩함으로써 이창임이 체차하기를 청한 것이었다. 지평 남현로(南玄老)가, ‘이창임·오봉원(吳奉源)이 오늘 연중(筵中)에서 「음붕(淫朋)」 두 글자로 진달한 것은 사체가 미안하다.’는 까닭으로써 모두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가부(可否)를 정하게 하라.’고 말하자, 민백상이 남 현로의 말이 전후가 모순(矛盾)된다는 까닭으로써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모순된다는 배척을 입었으니, 대직(臺職)에 머물기 어렵다. 체차(遞差)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장령(掌令) 유서오(柳敍五)의 직(職)을 파면하기를 청하였다. 대저 유서오가 근수법(跟隨法)241)  을 거듭 엄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자질구레한 말이 많으므로 서명응이 외설(猥屑)함으로써 파직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명하기를
"부제학도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체가 그렇지 아니하니, 서명응을 파직하라. 일은 같은데 신칙함을 다르게 할 수 없으니 그 나머지 유신(儒臣)도 아울러 파직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창임(李昌任)에게 녹비(鹿皮)를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절실(切實)한 때문이었다.

 

영부사 이천보(李天輔)가 병으로써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못하여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였다.

 

김원행(金元行)을 좌권독(左勸讀)으로 삼았다.

 

12월 12일 임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석음각(惜陰閣)에 나아가서 좌의정·우의정을 불러 보았다. 종신(宗臣)과 중재(重宰) 여섯 사람을 파직하고, 또 병조에 입직한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아울러 태거(汰去)하기를 명하였으니, 그 근수(跟隨)242)  를 신칙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좌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전 영의정은 여러 해 임용(任用)한 신하인데 일체 오래 내쳐 버리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소관(小官)이라 하더라도 외면(外面)으로 대우할 수 없는데 하물며 대신(大臣)이겠는가? 바야흐로 《중용》을 강(講)하는데 어찌 정성이 부족한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에게 녹비(鹿皮)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으니, 근수법(跟隨法)을 준수한 때문이었다.

 

12월 13일 계미

집의 이기덕(李基德)과 지평 이적보(李迪輔)가 상서(上書)하여 힘쓰기를 진달하였는데 왕세자가 모두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이조 판서·형조 판서·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에게 이르기를,
"이 조정에서 어찌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을 골라 쓰는 것으로써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전후 판의금(判義禁) 이수빈(李守彬)·최수경(崔粹敬)을 파직하고 가자(加資)를 환수하며 당해 장문(狀聞)한 병사(兵使)는 삭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전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수빈(李守彬)과 전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수경(崔粹敬)은 군기(軍器)를 별달리 비치(備置)한 것으로써 병사(兵使)가 장문(狀聞)하여 가자(加資)하였는데, 그 후에 병사가 실상이 없음으로써 장문하니 의금부에서 헌의하여 장(杖) 80에 그친 때문이었다.

 

12월 15일 을유

이익원(李翼元)·김시묵(金時默)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포폄(褒貶)243)  을 개탁(開坼)하였다. 경상 도사(慶尙都司) 김광려(金光礪)가 제배(除拜)한 지 넉 달에 부임하지 아니한 까닭으로써 특명으로 바로 그 땅에 귀양보내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윤태연(尹泰淵)은 폄제(貶題)244)  에 ‘소가 죽은 것이 분명하지 않다.[牛死不明]’는 말이 있었는데, 하교하기를,
"막중한 전최(殿最)에 신기함을 힘써서 말이 내력이 없으니, 심히 교건(驕蹇)하다.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군직 문신(軍職文臣)이 전최(殿最)245)  에 불참함으로써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추고(推考)하게 하고 곧 개좌(開坐)하여 만일 다시 불참하면 양재역(良才驛)에 도배(徒配)하라고 하였다. 왕손 교부(王孫敎傅) 윤득관(尹得觀)이 전최에 불참함으로써 태거(汰去)하였다.

 

이윤성(李潤成)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좌의정 이후(李)와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입대(入對)를 구하여 우러러 아뢰기를,
"예후(睿候)가 편치 못하시어 진현(進見)의 예를 오래 행하지 못하시니 팔역(八域)의 백성들이 모두 억울해 합니다. 이 해가 바뀌기 전에 빨리 진현의 예를 행하시어 보고 들음에 감동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각별 조섭하여 마땅히 이해를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12월 19일 기축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밑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오봉원(吳奉原)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밀양 부사(密陽府使) 조재선(趙載選)과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재(李在)는 신병(身病)을 일컫고 가을 조련(操鍊)에 불참하고 좌수(座首)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였는데, 수신(帥臣)246)  이 예사로이 덮어 두었으니 일도(一道)가 놀라고 비웃습니다. 두 수령을 아울러 파직하고 병사 조위진(趙威鎭)을 삭직하소서. 청컨대, 각읍(各邑) 백성의 거사단(去思壇)247)  을 금하고 전 병사 윤태연(尹泰淵)은 각읍에서 규례에 의하여 바치는 베[布]를 가승(加升)248)  하여 독촉해 받았으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조재선(趙載選)·이재(李在)와 각읍에 신칙할 일은 모두 진달한 바에 의하고, 조위진(趙威鎭)·윤태연(尹泰淵)은 나처(拿處)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김상복(金相福), 참판 정홍순(鄭弘淳), 참의 정존겸(鄭存謙)과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이 참석하였다. 임금이 정 홍순에게 이르기를,
"판서는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아니할 것이지만 참판은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것에 마음을 쓸 뿐만 아니라 또한 모름지기 부조(父祖)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에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참의는 처음에는 내가 오히려 다 알지 못하였는데 요즘은 매우 가상(嘉尙)하다."
하였다. 조엄(趙曮)을 부제학으로, 홍계능(洪啓能)을 집의로 삼았다.

 

12월 20일 경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문신(文臣)에게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고,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전적(典籍) 오광태(吳光泰)에게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새로 제수한 수령(守令)을 불러 보고, 순천 부사(順天府使) 신대수(申大脩)와 구례 현감(求禮縣監) 문도환(文道桓)을 특명으로 체차(遞差)하였다. 임금이 신대수에게 묻기를,
"순천에 향전(鄕戰)249)  이 있는데, 네가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하니, 신대수가 말하기를,
"마땅히 그 옳고 그름을 살펴보고 영문(營門)에 보고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향전이 어찌 옳고 그름이 있겠는가? 이것도 당심(黨心)이다."
하고, 곧 체차하기를 명하였다. 문도환(文道桓)은 대답하는 바가 분명하지 못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친정(親政)하였는데 너를 보내면 백성이 반드시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고, 아울러 체차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시위(侍衛)에게 찬품을 내려 주었다.

 

12월 21일 신묘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무신 전강(武臣殿講)을 행하였다. 부장(部將) 김인서(金麟瑞)는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의 아들로서 능히 순통(純通)하니, 특명으로 6품에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해를 고심(苦心)하였으나 흰 머리 늙은 나이에도 풀지 못한다고 하더니만, 신대수(申大脩)가 평일의 당습(黨習)으로써 마음 속에 얽힌 것을 향전(鄕戰)에서 풀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통탄할 만하다. 서용(敍用)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고, 5년을 기한하여 세초(歲抄)250)  에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제 수령(守令)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이영휘(李永暉)가 감히 현탈(懸頉)251)  하고 불참하였으니, 그것도 또한 고의가 있다. 나는 마음을 속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노라. 이영휘가 전일에는 매우 똘똘하였으나 한 번 풍상(風霜)을 겪자 문득 흐리멍덩한 것 같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새로 제수한 외임(外任) 가운데 어제 외방에 있는 자 외에, 불참한 사람은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 가서, 국자장(國子長)과 반임(泮任)의 강학(講學)하는 여부를 알아서 아뢰게 하였다.

 

12월 22일 임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좌의정·우의정이 종신(宗臣)과 더불어 입시(入侍)하였는데, 하교하기를,
"필서(匹庶)도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임금이 된 자이겠는가? 저경(儲慶)252)  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예전 숙의(淑儀)인데 이 까닭으로 을해년253)  에 원(園)을 봉(封)할 때에 특별히 경빈(慶嬪)을 추증하고 친히 써서 비석을 세웠으니, 본사(本事)가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이 지은 순강원(順康園)254)   비문 가운데 있다. 의창군(義昌君)의 묘(墓)가 순강원 지척에 있기 때문에 그 절제(節祭)를 이미 구처하였으나 경빈의 묘는 단지 비석만 세우고 임시로 치제(致祭)하는 외에는 향화(香火)가 쓸쓸하여 도리어 나숙의(羅淑儀)의 이제까지 절제(節祭)를 지내는 이만 못하다. 이 뒤로는 경빈 묘에 식년(式年)마다 세수(歲首)에 내시(內侍)가 치제(致祭)하고 제물(祭物)은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소찬(素饌)으로 준비하게 하되 과일과 찬품(饌品)은 대여섯 그릇을 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창군(義昌君)은 목묘(穆廟)255)  의 왕자이며 낙선군(樂善君)은 장릉(長陵)256)  의 왕자인데, 예전에 대군(大君)으로써 대군의 뒤를 잇고 왕자로써 대군의 뒤를 잇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성조(聖祖)께서 낙선군으로 의창군의 뒤를 잇게 하셨는데, 을해년257)   이후로 두 왕자의 봉사(奉祀)를 안흥군(安興君)이 섭행(攝行)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오히려 신산(辛酸)하다. 안흥군이 이미 능창(綾昌)·인평(麟坪) 두 대군(大君)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일후에 다음 왕손(王孫)이 봉군(封君)되기를 기다려서 예전에 낙선군의 뒤를 잇는 성조(聖祖)의 뜻을 준수하면 세 왕자를 연달아 이어서 위차(位次)가 어긋나게 되는 단서가 없어질 것이다. 이 뒤에 지자(支子)를 논하지 말고 일체 지금 안흥군이 의창·인평의 뒤를 잇는 일에 의하여 그 집을 지키고 그 제사를 받들어서, 우리 성조의 세대(世代)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뒤를 세우는 성의(聖意)를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다.

 

12월 23일 계사

임금이 북도 감시 어사(北道監市御史) 엄인(嚴璘)의 장본(狀本)에 따라 ‘온성 부사(穩城府使) 유건(柳健)이 비쇄(鄙瑣)한 일을 많이 행하였다.’는 것에 몽롱(曚朧)하게 속아서 처음에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고 취초(取招)하여 품(稟)하게 하였는데, ‘군관(軍官) 최기조(崔起肇)가 또한 중간에서 거짓 꾸며 관장(官長)을 모함한 우려가 없지 않으며, 유건이 혹시 자신이 직접 범함이 없으면서 군관에게 농락을 당할 수도 있으니 또한 살피고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다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다.

 

12월 25일 을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이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예조 참의 송명흠(宋明欽)이 올라올 기약이 없음을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직명(職名)으로써 얽어매려는 것이 아니니, 이제 본직을 해임하여, 올라오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도 그가 오지 아니하면 흰 머리 늙은 나이에 장차 형식만 갖추는 것이 될 것이며, 그래도 뜻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聖賢)의 글을 읽어 성실(誠實)로써 스스로 기약하는 도리이겠는가? 내가 비록 정성이 옅을지라도 그 조부(祖父)를 생각하여 그를 보려고 하니 오로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다.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즉일(卽日)에 길에 오를 일을 전 참의 송명흠에게 하유(下諭)하고 올라올 때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말[馬]을 주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휘령전(徽寧殿) 과품(果品)의 그릇 수[器數]를 우러러 품(稟)하니, 임금이 휘령전·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의 약과(藥果)는 중계(中桂)258)  로서 대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익정이 왕세손(王世孫)의 자(字)를 정하는 일을 우러러 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세자의 자를 정하는 것과는 차등이 있어야 마땅하니, 단지 관각 당상(館閣堂上)과 예조 판서만이 거행하고 관례(冠禮)는 숭문당(崇文堂)에서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지금 이 신행(信行) 때에 들어가는 인삼(人蔘)이 자그마치 2백여 근에 이르니, 미리 강계(江界)에 복정(卜定)259)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만약 봄·여름에 복정(卜定)하면 민정(民情)이 반드시 놀라서 흩어질 것이니, 가을에 채집한 뒤에 복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7일 정유

임금이 봉안각에 나아가서 전배(展拜)를 행하였다. 윤음(綸音)을 지어 내리기를,
"명년부터 비롯하여 사맹삭(四孟朔)의 강(講)을 품(稟)할 때에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같이 품하고 그 나머지 일기(日記)에 대리(代理)로서 써서 메꾸는 것은 정지하라."
하였다. 봉안각(奉安閣)이 어의궁(於義宮)에 있는데 바로 인묘(仁廟)의 잠저(潛邸)이다. 임금이 중흥(中興)한 공덕에 감동이 일어나서 이 전배(展拜)가 있었고 이어 자강(自强)의 뜻을 보였다. 회란(回鑾)할 때에 화유 옹주(和柔翁主)의 집에 역림(曆臨)하였다.

 

12월 28일 무술

화성(火星)과 목성(木星)이 서로 범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 앉았는데,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2월 29일 기해

임금이 명하기를,
"오는 달 15일 전에 백성을 침해하는 크고 작은 정사를 정지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어깨를 쉬게 하라."
하였다. 또 각사(各司)에 명하여 패(牌)를 쓰지 말게 하고, 길 가운데 유민(流民)을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구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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