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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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신축

임금이 태묘(太廟) 및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또 황단(皇壇)001)  의 망배례(望拜禮)를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행하였으며, 인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였다. 임금이 진선문(進善門) 밖에서 연(輦)을 멈추고 예조 판서 윤급(尹汲)에게 명하여 명릉(明陵)을 봉심(奉審)하도록 하였으며, 또 여양 국구(驪陽國舅)002)   및 부부인(府夫人)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또 금년에 한하여 헌가(軒架)·고취(鼓吹)를 설치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며, 사대부와 서인의 경우는 구애되지 말게 하였는데, 금년은 바로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승하(昇遐)한 해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한없는 효성[孝思]으로 예(禮)에 없는 예를 특별히 행하였다.

 

임금이 각 관사에 영(令)을 내려 15일 이전에는 패(牌)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고, 또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뜻으로 전교(傳敎)를 써서 팔도(八道)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였다. 나이 80세인 사람을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지주(知奏)하게 하여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하고, 일찍이 승지(承旨)·참의(參議) 및 곤수(閫帥)를 거친 사람의 아버지나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로 나이가 많은 이에 대한 가자를 즉시 거행하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나이가 94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후하게 내려 주도록 하였다.

 

1월 2일 임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하였다. 임금이 수령을 가려서 뽑고 생민(生民)을 보호하는 일로 전교를 써서 내렸다. 또 중외(中外)로 하여금 혼가(婚嫁)를 권하고 그들의 자장(資裝)003)  을 돕도록 하였으며, 먼 지방의 무사(武士)로 침체(沈滯)된 자에 대해서는 역시 서전(西銓)004)  에 신칙하여 서울의 문벌이 좋고 이름 있는 무사보다 우선하여 기용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제도(諸道)의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인재(人材)를 채방(採訪)하도록 청하였으며,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은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언로(言路)를 열도록 우러러 권면하였다. 임금이 곤룡포(袞龍袍)를 벗고 청의(靑衣)를 입은 채 임전(臨殿)하여 말하기를,
"내가 금년에는 강연(講筵)이 아니면 곤룡포를 입지 않겠다."
하고, 이어서 차대(次對)005)  를 명하자, 민백상이 호서 어사(湖西御史)의 계본(啓本)에 군향(軍餉)의 개색(改色)006)  을 조적(糶糴)007)  하는 사례에 의거하여 변통(變通)하는 일을 가지고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본 뒤에 1년만 개색하도록 허락하고 뒤에는 〈곡식이〉 썩고 상한 것을 가지고 번거롭게 아뢰지 말도록 하였다.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가 아뢰기를,
"왕세손(王世孫)의 입학(入學)008)  에 박사(博士)는 제학(提學)으로 〈임명하여〉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학(大提學) 또한 박사의 직임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박사가 천하의 유사(儒士)를 가르쳤으며 세자(世子)의 입학은 유생(儒生)들과 동렬(同列)에 서게 하는 것이니, 세손의 입학 때의 박사도 역시 다름이 없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뢰는 바가 의견(意見)이 있으니, 대제학으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3일 계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입직(入直)한 내금위 장(內禁衛將) 및 금군(禁軍)을 호궤(犒饋)009)  하고, 철원(鐵原)과 태안(泰安)의 호장(戶長)을 불러들여 농사를 권장하는 방법을 하순(下詢)하자, 태안 호장이 아뢰기를,
"군수(郡守) 및 호장이 가볼 만한 곳에 가서 농사를 권장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가 같은 군(郡)인데 어느 곳이 가볼 만한 곳이며 어느 곳이 가볼 수 없는 곳인가? 한 사람 호장을 경계하여 3백 60고을을 힘쓰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고, 전배(前排)를 들어오도록 하여 〈태안 호장에게〉 경계를 한 뒤에 끌어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완악한 백성을 추문(推問)하며 다스릴 무렵에 그의 부모와 형제 및 정처(正妻)를 잡아다 가두는 것은 인륜에 어긋남이 있다는 것으로 일체 엄격히 금지하게 하였으며, 그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대관(大官)이나 종척(宗戚)을 논하지 말고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고, 그 예속(隷屬)은 추조(秋曹)로 하여금 장류(杖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목(耳目)의 관원은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아 다스리되 잘못하는 자는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같은 율을 시행하도록 청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坐定)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월 4일 갑진

임금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대가[鑾]가 돌아올 때에는 세손(世孫)이 수가(隨駕)하였는데, 좌익선(左翊善) 박성원(朴聖源)·우익선(右翊善) 박상철(朴相喆)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에게는 그가 앞서 진현(進見)을 청한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말을 내려 주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고, 특별히 실직(實職)인 유선 한 자리를 설치하게 하고 박성원을 단부(單付)010)  하여 번갈아가며 입직(入直)하도록 하였다. 왕세손을 배위(陪位)한 중관(中官) 이하 각 차비(差備)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賞)을 베풀었다.

 

권도(權噵)를 대사간으로, 김양행(金亮行)을 지평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자, 좌의정과 우의정이 입대(入對)하였다.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진현례(進見禮) 뒤에 차대(次對)를 행하는 것이 더욱 좋겠습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봄 날씨가 추운 겨울보다 나으니, 당연히 진현하여야 한다."
하자, 또 말하기를,
"《통사(通史)》는 앞서 이미 낱낱이 열람하였지만, 근간에 또 열람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이후(李)가 말하기를,
"《사기(史記)》는 흥기(興起)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흥기시키는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징계(懲戒)하는 귀감(龜鑑)이 많이 있어, 더욱 좋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1월 5일 을사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지영(香祗迎) 예(禮)를 앞서 의식과 같이 하였으며, 임금이 헌관(獻官)을 가려 뽑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조의 해당 당상관을 의금부에 회부하여 추고(推考)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하며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세손에게 하문하기를,
"공(功)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사업(事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떤 것이 사(事)가 되고, 어떤 것이 공(功)이 되며, 어떤 것이 업(業)이 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사와 업은 모두 해야 할 도리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하늘의 도(道)만이 크고 오직 요(堯)임금만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하는데, 대체로 하늘은 높은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본받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요임금은 바로 성인(聖人)이며 성인으로서 극도의 경지에 나아갔기 때문에 하늘과 덕(德)이 합쳐졌으니, 스스로 그것을 본받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열 살된 아이의 견해로는 〈이 정도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아홉 사람이 있을 뿐인데, 부인(婦人)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아홉 사람 및 부인은 무왕(武王)의 십란(十亂)011)  으로 무왕의 정치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며 감탄하기를,
"우리 나라가 거의 희망이 있다. 그리고 이른바 부인(婦人)에 대해서 마씨(馬氏)012)  는 문모(文母)013)  라고 하고, 유 시독(劉侍讀)014)  은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가 없으니 읍강(邑姜)015)  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어느 학설이 옳은가?"
하자, 대답하기를,
"유 시독의 학설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많은 신하가 있은 뒤에야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신하가 비록 적더라도 임금이 훌륭하고 신하가 현명하면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인(婦人)도 정치를 도울 수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부인이라 하더라도 만약 현명하다면 정치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재(人才)를 얻기 어렵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재능[才] 또한 덕(德)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재능이 덕보다 낫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재(才)는 덕을 아울러서 말하는 것이고, 재능이 낫다는 재는 재능만 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진 이를 불러오게 하는 일이 쉽겠는가 어렵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몸소 어진 덕(德)을 행하면서 어진 이를 오게 한다면 쉬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순(舜)임금에게는 다섯 사람의 신하가 있었는데, 순임금의 성덕(聖德)으로 단지 다섯 사람만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다섯 사람만 말한 것은 가장 어진 사람만 열거하여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 늘 좌우에 있으면서 너에게 게을리하거나 하던 일을 버려두지 말라고 권면하면 고달프지 않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어진 이가 저로 하여금 어질게 하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야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순임금과 무왕은 하늘처럼 높아서 미칠 수 없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비록 높다고 하더라도 힘써 행하면 이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강관(講官)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하고, 이어서 면유(勉諭)하기를,
"기품(氣稟)을 잘 기르면서 감히 게을리하거나 하던 일을 버려두지 말고 거울 같은 마음을 더럽히지 말며 구슬처럼 맑은 자질을 더럽히지 말고서 내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만약 오늘 주대(奏對)한 말을 저버린다면, 이는 바로 너의 할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이며 저 하늘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밤낮으로 길이 좁아서 위사(衛士)가 열(列)을 이룰 수 없으니, 이후로 대가(大駕)를 움직일 때에는 큰 길을 따라서 행차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들으니, 지방 고을의 호장(戶長)을 잡아들이라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폐(殿陛) 사이에 전배(前排)를 자주 들어오게 하는 것은 아마도 후손을 넉넉하도록 하는 방법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모두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천보(李天輔)가 졸(卒)하였는데, 그의 유소(遺疏)에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지금의 한없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성궁(聖躬)을 보전하고 아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간혹 갑자기 발하게 되면 그 중정(中正)한 도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기혈(氣血)이 손상될 우려가 있으며, 시행과 조치가 간혹 격렬하거나 번뇌를 이루게 되면 교령(敎令)에 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소모되고 허물어지는 근심이 있게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중화(中和)하는 도리를 더욱 힘쓰시어 강녕(康寧)하는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천보(李天輔)의 자(字)는 의숙(宜叔)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젊어서는 사장(詞章)을 익혔는데,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이 그의 시가(詩歌)를 보고서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였었다. 영종(英宗)기미년016)  에 을과(乙科)에 합격하였으며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한 세대에서 명망이 높아 이조 참의와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일찍이 상소하여 조정(調停)을 넓히도록 청하니 영종이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에 대신(大臣)인 김재로(金在魯)·조현명(趙顯命)이 번갈아가며 말로 추천하자 바로 발탁하여 이조 참판 겸 예문관 제학을 삼았고, 얼마 있다가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또 이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다가 의정부에 들어가 우의정이 되었는데, 당시 나이 52세였고, 얼마되지 않아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처음에 홍계희(洪啓禧)가 균역(均役)에 대한 일을 건의하니, 임금이 이천보에게 명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홍계희와 균역에 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이천보가 끝까지 명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존중(李存中)이 김상로(金尙魯) 형제를 발탁하였다가 처벌을 받아 배척되고 기용되지 않았는데,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존중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바로 추천하여 승문원 부제조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홍봉한(洪鳳漢)은 지위가 높아 조정에서 위세를 떨쳤으므로 여러 대신(大臣)들이 함께 올리려고 하였는데 유독 이천보만은 불가하게 여겼으며, 임금이 복상(卜相)017)  하도록 명하였으나 이천보가 끝내 홍봉한을 복상하지 않았다.
이천보가 물러나 육화정(六化亭)에서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64세였다. 벼슬살이하면서 조심하고 조촐하였는데, 그가 졸(卒)함에 이르러서는 염습(斂襲)할 한 가지 의복도 없었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그의 청렴했음을 칭찬하였다. 하지만 공명(功名)을 차지하기에 급하여 상소하여 조정(調停)을 주청하였고, 조현명(趙顯命)에게 아부하여 크게 추켜 세워 추천해 줌을 얻어 마침내는 의정부의 정승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임금이 은졸(隱卒)018)  하는 전교(傳敎)를 내리어 해당 관서로 하여금 구재(柩材)를 가려서 보내도록 하고 모든 일은 다른 대신(大臣)의 예(例)에 의거 거행하게 하였으며, 인해서 3년 동안 월봉(月俸)을 지급하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치조(致弔)하게 하였다.

 

1월 8일 무신

임금이 이천보(李天輔)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로 하여금 가서 선유(宣諭)하도록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019)                  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가만히 관찰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사기(辭氣)가 간혹 화평(和平)이 부족하고 정령(政令)은 간혹 엄중하고 급박하니, 이것은 중용(中庸)의 도리가 아닙니다. 며칠 전에 정관(政官)이 재촉하자 심지어 수라(水剌)를 정지한다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것 또한 중도(中道)를 넘어선 하나의 단서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유선(諭善) 박성원(朴聖源)이 상서(上書)하여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면유(勉諭)하기를,
"3백 년 동안 이어 온 청구(靑丘)020)  의 혈맥(血脈)이 단지 세손에게 달려 있다. 일반적인 격식을 벗어나서 구임(久任)021)  하게 한 것은 그 자질의 성실함을 취한 것이니, 의도가 대개 깊은 것이다. 그 보답하려고 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감히 굳게 사면하겠는가? 마음을 가다듬어 학문을 권면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 참의 송명흠(宋明欽)에게 전유(傳諭)하도록 명하기를,
"그대를 군함(軍銜)으로 승진 발탁하여 부른 것은 그대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대의 할아버지를 생각해서이며, 글 잘하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 자질을 위해서이다. 독서하는 선비가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실행하는 도리에 있어서 또한 어떻게 세속을 따라서 지나치게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익선(翊善)으로 조영순(趙榮順)을 두 번째로 주의(注擬)한 전관(銓官)을 특별히 추고(推考)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배척을 당한 상신(相臣)이 이튿날 고인(故人)이 되었으니, 내 마음에 서글플뿐만 아니라 세손(世孫)을 위하여 좌우를 가리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경전(親耕田)에 갈고 씨를 부린 구곡(九穀)에서 당연히 자성(粢盛)022)  으로 쓸 것은 정밀하게 갖추어서 제공하도록 명하였으며, 부족한 것은 남은 전지의 바칠 것으로 더 보태도록 하고, 그 나머지 피당두태(皮唐豆太)는 종자(種子)를 제하고 봉진(封進)하게 하여 자성을 소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또한 그 풍년이 들 것과 흉년이 듦을 알게 한다는 것으로 보충해서 바치지 말게 하였다.

 

1월 9일 기유

밤 이경(二更)에 달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달무리 위에 흰 기운이 뻗쳐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없어졌다.

 

1월 10일 경술

사직(司直) 신사건(申思建)이 상서하여 《예경(禮經)》을 인용하며 물러나 쉬기를 바랬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고 이어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제대(諸臺)가 위패(違牌)한 것으로 특별히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감시 어사(監市御史)가 장문(狀聞)한 별단(別單)을 가지고 앙청(仰請)하기를,
"개시(開市) 때에 간혹 뇌물을 주는 잠상(潛商)이 현장에서 적발될 경우 수통사(首通事)는 효시(梟示)하는 형률을 시행하며, 5년을 기한하여 폐단이 없이 개시를 마치게 되면 수통사는 천인(賤人)의 신분을 면하도록 하는 일을 특별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고,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는 말하기를,
"도승지를 가선 대부 겸판사(嘉善大夫兼判事)로 하였다면, 겸보덕(兼輔德) 또한 가선 대부로 가려 임명하여 입직(入直)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에게 먼저 하도록 한다면 조명정(趙明鼎) 같은 자가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제(官制)는 매우 중요하니, 경솔하게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이익원(李翼元)이, 서지수가 대신에게 묻지도 않고 관제를 변경하도록 청하였다는 것으로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입시(入侍)하였기 때문에 아뢴 것이니,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그 마음은 귀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023)  의 집안이 매우 가난하게 되어 민망히 여길 만합니다. 서유호(徐有祜)가 조적(糶糴)에 관한 사건으로 지금 5년 동안 금고(禁錮)된 상태에 있습니다만, 사건이 전임(前任) 때에 있었으니 분간(分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법(國法)은 흔들리게 하기 어려우니, 그로 하여금 몇 년을 더 참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반유(泮儒)024)  의 강회(講會)하는 절차를 조명정에게 하문하자, 조명정이 말하기를,
"대사성이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주벽(主壁)025)  에 앉으면 장의(掌議)가 제 색장(諸色掌)과 거재생(居齋生)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한번 절을 하고, 좌우로 나누어 서로 읍(揖)을 한 뒤에 차례대로 앉게 합니다. 서안(書案)을 앞에다 설치하고 유생(儒生) 두 사람을 ‘직일(直日)’이라고 이름을 붙여 붓을 잡고 서안의 동서(東西)에 나누어 앉도록 하고서 그 강설(講說)을 기록하게 하며, 강생(講生) 한 사람이 서안 앞에 나아가 앉으면 대사성이 그로 하여금 강독(講讀)하게 하고 문의(文義)를 물으면 좌중(座中)의 제생(諸生)들은 그들이 생각한 바를 응대(應對)합니다. 제생이 또 간혹 먼저 문의를 질문하면 대사성이 거기에 대하여 답을 하는데, 제생은 또한 서로 묻고 답을 하며 강생 한 사람이 앞서 같이 나아가 강독하기를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모(禮貌)와 절차가 매우 정숙(整肅)하여 틀림없이 볼만한 점이 많을 것이다. 시행하기를 오래도록 하여 작성(作成)하는 효과가 있을 터인데, 형식적인 것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는가? 내가 조만간에 외우는 것을 시험하여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살피려고 하는데, 경(卿)의 부지런함과 게으름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니, 더욱더 면려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준(任㻐)을 대사간으로, 김시묵(金時默)·김시영(金始煐)·이익원(李翼元)·이심원(李心源)·박상철(朴相喆)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2일 임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고 말하기를,
"백정(伯程)026)  은 안연(顔淵)027)   같고 숙정(叔程)028)  은 맹자(孟子) 같은데, 우리 동방(東方)으로 말을 하면 나는 동춘(同春)029)  을 백정과 같다고 여긴다."
하였다.

 

교리 김종정(金鍾正)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예후(睿候)가 오래도록 평상시 절도를 어기게 되어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반적인 의식도 이 때문에 버려둔 채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 몇 차례 진현(進見)하겠다고 하신 영(令)은 진실로 예효(睿孝)가 독실하고 정성스러움을 우러를 만하지만, 성상(聖上)께서 허락을 아끼신 하교 또한 오직 〈세자의 병을〉 염려하는 지극한 생각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은 해가 이미 바뀌고 봄 절후[春令]가 처음으로 다가와 화창한 볕이 바야흐로 퍼지려 하며 만물이 새로워져 거의 뜻밖의 근심은 점차로 원기[天和]가 회복되는 데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성수(聖壽)가 더욱 높은데다 해주(海籌)030)  를 새로 더하셨으니, 가만히 상상하건대 저하(邸下)께서 깊이 즐거워하심과 간절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전일에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밤이 새도록 어가(御駕)를 재촉하여 빨리 새벽에 안부를 여쭙는 의식을 거행하셔서 한편으로는 대조(大朝)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한편으로는 저하의 정성을 펴신다면, 인정과 예의에 화합될 뿐만 아니라, 중외(中外)에서 바라는 마음을 크게 위로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가지로 보양(補養)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고 단지 마음을 단단히 가지는 것이 바로 주요한 법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마음을 다스리거나 병을 다스리는 것은 그 법이 동일합니다. 본원(本源)이 이미 견고하면 모든 몸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법이니, 그윽이 원하건대 유념하소서."
하였다.

 

1월 13일 계축

김시묵(金時默)·이익원(李翼元)·이의철(李宜哲)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갔다가 한학 문신 전강(漢學文臣殿講)에 친림(親臨)하여 하교하기를,
"순통인(純通人)에게는 각기 반숙마(半熟馬)를 내려 주고, 불통인(不通人)은 10일 안에 잘 읽도록 한 뒤에 시강(試講)하여 그날 만약 다시 불통하면 즉시 금추(禁推)하도록 하였다가 모두 읽은 뒤에야 방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월 14일 갑인

밤 이경(二更)에 달무리가 졌는데, 달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달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으며, 달무리 오른쪽에는 극(戟)이 있고 왼쪽에는 포(抱)가 있었다. 달무리 위에 흰 기운이 뻗쳐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없어졌다.

 

1월 15일 을묘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갔는데, 임금이 밤에 꿈속에서 절하고 모셨던 일에 감회가 일어나 전배(展拜)한 것이다. 대가(大駕)가 돌아올 때에 지나는 길에 선무사(宣武祠)031)  에 들러 관군(官軍)의 위판(位版)을 보고 말하기를,
"조선(朝鮮)이 명(明)나라를 잊지 않는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1월 16일 병진

한광조(韓光肇)를 승지로 삼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제용감(濟用監)의 정포(正布)로 원공(元貢) 가운데서 40동(同)을 덜어내어 지초(芝草)·홍화(紅花)·수주(水紬)·저포(苧布) 등 해마다 별무(別貿)하는 조목 및 양서(兩西)의 원공(元貢) 지초(芝草) 가운데서 참작하여 옮겨 온 것으로 숫자를 채워 환작(換作)하게 하고, 그 나머지 양서의 지초는 삼남(三南)으로 옮겨 정하여 일체로 마련(磨鍊)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장령 심각(沈殼)이 아뢰기를,
"이익보(李益普)는 무신년032)  에 관문(關文)을 전달한 흉적(凶賊)의 가까운 친척인데, 갑자기 대간(臺諫)에 통의(通擬)하였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는 것은 비록 옳다고 하겠으나, 탄핵한 바는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소대(召對)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었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정언 조태명(趙台命)의 상서를 가지고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는데,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날씨가 따뜻할 때는 당연히 먼저 침소(寢所)의 안부를 여쭙는 예(禮)를 행하고 이어서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하여 묘당의 계책을 재결(裁決)하며, 날마다 강연(講筵)을 열어 심법(心法)을 토론해서 예학(睿學)에 한폭(寒曝)033)  의 탄식이 없어지게 되고, 국가의 사업이 좀스러워지는 근심이 없게 되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한없는 다행함이, 돌아보건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충청 병사 심봉징(沈鳳徵)은 사람됨이 이미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되어 행정이 비루하고 잗단 것이 많은데, 17명의 편비(褊裨)를 금법을 무릅쓰고 외람되게 대동하고 도안(都案)을 마감(磨勘)하여 뇌물을 바치는 문을 크게 열었습니다. 그리고 석성 현감(石城縣監) 윤동주(尹東柱)는 나약하고 용렬하며 게을러서 사무를 살피지 않아 첨정(簽丁)과 봉적(捧糴)으로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신은 한결같이 파직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에 비변사 낭관인 이문섭(李文燮)이 충주(忠州)의 제언(堤堰)에 대하여 적간(摘奸)하면서 뇌물로 바치는 돈을 많이 받았으며, 광대 놀이를 푸짐하게 마련하고 첩지(帖紙)를 낭자(狼藉)하게 주었다고 전해지는 말이 떠들썩하며 심지어 어사[繡衣]가 조사하는 가운데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그가 왕명을 받듦이 무상(無狀)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승지를 시켜 높은 소리로 그 글을 읽게 하였으며, 읽기를 마치자 하령(下令)하기를,
"이문섭의 일은 어사가 어떻게 조처하였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처치를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이어서 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의당 깊이 유념하겠다. 심봉징·이문섭의 일은 먼 지방의 풍문(風聞)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마는, 비루하고 잗달게 뇌물을 받은 말이 이미 대간의 글에 올랐으니 거짓이든 사실이든간에 불분명한 가운데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윤동주에 대한 일은 논한 바가 지나치다."
하였다.

 

1월 17일 정사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읽었다.

 

임금이 준천 당상관(濬川堂上官)을 인견(引見)하고, 준천에 관한 일을 하문하였다. 이어서 준천 당상관 홍봉한(洪鳳漢)에게 이르기를,
"균역청(均役廳)은 시상(時像)과 마찬가지이니, 만약 2필(疋)로 회복한다면 나라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다. 단지 이것은 시렁[架]을 끌어당기어 새는 데를 보수하는 것이니, 고(故) 상신(相臣)의 대동(大同)과는 다른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신성군(信城君)의 궁장(宮庄)을 서로 소송하면서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앞서 궁가(宮家)에서는 먼저 사들인 뒤에 추명(推命)하도록 하였는데, 이 뒤로는 모든 전답(田畓)을 판결이 나기 전에는 수본(手本)으로 대신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내수사(內需司)에 분부하였다.

 

1월 18일 무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월 20일 경신

성천주(成天柱)·이심원(李心源)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2일 임술

전 현감 송명흠(宋明欽)이 상서하여 병을 끌어대며 취임하지 않으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나의 정성이 얕아 감동시켜 믿게 할 수가 없어 불러들일 기약이 없으니, 마음이 매우 부끄럽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聖上)께서 별유(別諭)를 여러 차례 내리셨으니 애연(藹然)하게 간측(懇惻)한 성의(盛意)가 아주 대단히 심상한 데서 뛰어났는데, 그대가 대대로 국록(國祿)을 먹는 신하로서 어떻게 척연(惕然)하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그대의 글을 보니, 더욱 나의 얕은 정성이 부끄럽다. 모름지기 성상의 은근한 성의를 체득하여 다시 굳게 사양하지 말고 즉일(卽日)로 길을 떠나, 성상께서 허심 탄회하게 기다리는 뜻에 부응하고, 내가 밤낮으로 목마르듯이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3일 계해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1월 24일 갑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에 친림(親臨)하여 단지 반유(泮儒)로 하여금 부거(赴擧)하도록 하였는데, 인일(人日)의 뜻으로 책문(策問)의 〈제목을 내어〉 수석을 차지한 생원 이장로(李長老)에게는 급제를 내렸다. 이보다 먼저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오늘의 과거는 전적으로 강독하는 반유(泮儒)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니, 성상께서 제생(諸生)을 불러 잠(箴)·명(銘)·송(頌)을 외우게 하여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시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차례대로 시강(試講)하고, 이어서 1년에 12차례 강독에 참여하게 한 뒤에 응제(應製)를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길주(吉州)의 김숙명(金淑鳴)은 76세의 나이로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잘 외우므로 특별히 《서전(書傳)》을 내려 주었으며, 이혁주(李爀胄)는 이수광(李睟光)의 후손으로 경학(經學)에 대한 공부가 높일 만하였으므로 특별히 종이·붓·먹을 내려 주었다. 삭주(朔州)의 박동집(朴東楫)은 《모시(毛詩)》 및 숙흥야매잠을 잘 외우므로 특별히 《시전(詩傳)》을 내려 주었으며, 대사성 조명정에게는 많은 선비들을 권과(勸課)하였다는 것으로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왕세손의 입학(入學)이 가까워졌는데, 장의(掌議)를 차출하여 서로 대면하도록 성상께서 엄중히 하교를 한 연후에야 치우치게 얽매이는 염려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아룀을 옳게 여겼다.

 

1월 26일 병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읽었다. 좌의정 이후(李)가 어영 대장 정여직(鄭汝稷)을 파면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그가 별시사(別試射)에 친림(親臨)하였을 때에 검칙(檢飭)을 잘하지 못하여 간교를 부린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28일 무진

밤에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위에서 나와 남방(南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사학 유생(四學儒生)에게 전강(殿講)하였다. 제술(製述)을 비교하여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남윤희(南允熙)에게 급제를 내렸다. 그런데 유생 박한유(朴漢維)의 시권(試券)에 남윤희가 지은 글을 옮겨다 베꼈으므로, 임금이 그 주객(主客)을 감별(鑑別)하여 남윤희에게는 급제를 내리고 박한유에게는 특별히 벌(罰)을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며, 대사성에게는 월봉(越俸) 1등(等)034)  을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월 29일 기사

최익남(崔益男)을 숭릉 참봉(崇陵參奉)으로 삼았는데, 판서 김상복(金相福)의 정사(政事)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최익남은 제법 문예(文藝)로 이름이 드러났지만, 경솔하여 천박하고 들뜬 사람이었다. 귀척(貴戚)과 교결(交結)하고 권문(權門)에 아첨하여 이름이 대궐[天門]에 알려지는 데에 이르렀지만, 사류(士流)에게서 버림을 당하였으니, 침랑(寢郞)035)  의 선임에 있어서 어찌 최익남이 그 의망에 참여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035] 침랑(寢郞) : 능참봉(陵參奉).
사신(史臣)은 말한다. "최익남은 제법 문예(文藝)로 이름이 드러났지만, 경솔하여 천박하고 들뜬 사람이었다. 귀척(貴戚)과 교결(交結)하고 권문(權門)에 아첨하여 이름이 대궐[天門]에 알려지는 데에 이르렀지만, 사류(士流)에게서 버림을 당하였으니, 침랑(寢郞)035)  의 선임에 있어서 어찌 최익남이 그 의망에 참여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또 박성원(朴聖源)을 소견(召見)하여 세손(世孫)을 성취시키는 책임에 힘쓰도록 하고 말하기를,
"옛날에 근보(謹甫)라는 자(字)를 부른 일036)  이 있었으니, 소견할 뿐만이 아니고 고요한 밤에 자주 소견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내가 세제[銅圍]로 있을 때에 야대(夜對)에 촛불을 밝혔는데 역시 부비(浮費)037)  함이 있었으니, 세손의 야대에도 의영고(義盈庫)로 하여금 진배(進排)하지 말게 하고 그 촛불은 대내(大內)의 것을 쓰도록 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비용을 아끼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고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의 화상(畵像)을 들여오도록 명하여 보고, 승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봉사손(奉祀孫) 또한 우직(右職)으로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지난날 한학(漢學)에 불통(不通)했던 사람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친시(親試)하고서 유환덕(柳煥德)·김봉저(金鳳著)는 잘 강독하였다고 하여 현궁(弦弓)을 내려 주고, 홍상직(洪相直)은 외우는 소리가 구차스럽다고 하여 앞서 하교한 대로 금추(禁推)하게 하였다.

 

1월 30일 경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였다. 임금이 《중용(中庸)》을 읽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장본(狀本)을 가지고 도내(道內)의 구포(舊逋)로 바치지 않은 것이 1천여 석(石)이나 되니 특별히 탕감(蕩減)을 허락해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시노비(寺奴婢) 각 15구(口)를 나누어 지급하였는데, 본도(本道)의 시노비는 겨우 1백여 구이며 관노비(官奴婢)는 1천여 구이니, 관노비를 이 수(數)에 준하여 나누어 지급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또 호조의 경비(經費)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관서(關西)의 세수미(稅收米) 1만 석과 목면(木綿) 3백 동(同)을 다시 옮겨서 나눌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는데, 목면은 그 절반만 허락하였다.

 

전 어영 대장 정여직(鄭汝稷)을 전임(前任)에 다시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심각(沈殼)이, 윤면동(尹冕東)이 아비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글에서 교묘하게 꾸며서 말한 것을 사람들이 모두 비웃는다는 것으로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근거없이 떠들며 비웃는 것을 또한 어떻게 준거(準據)하여 믿을 수 있겠는가?"
하며,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면동이 상서하여 그의 아비가 당초 이름을 고친 사실이 없으며 재작년 겨울 방목(榜目)038)  이 처음 이루어지자 이미(李瀰)가 동방(同榜)039)  이라는 것 때문에 실제로 그 일을 주관하였으며, 교정(校正)하는 역사(役事)는 호남 사람인 양학연(梁學淵)에게 위임하여 계하(啓下)한 원본(源本)을 참작하거나 준거하지 않고 바로 전각(傳刻)하는 본(本)에다 그의 아비의 이름 한 글자를 지워 버리고 ‘득(得)’ 자를 썼다고 말하였고, 이미의 편지에서도 저절로 입증(入證)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각의 이런 아룀이 있었다.

 

예조 판서 한익모(韓翼謨)가 백두산(白頭山)에 제사지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보고 아뢰도록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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