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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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갑술

임금이 숭릉(崇陵)에 나아갔다.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을 배현(拜見)하고 되돌아 나오면서 종묘(宗廟) 앞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잠시 부복(俯伏)하였다. 이어서 주정소(晝停所)에 나아갔는데, 취타(吹打)를 정지시키고 세 차례 연주는 포(砲)로써 대행(代行)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사를 지낼 때의 거자 저치미(炬子儲置米)를 회감(會減)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숭릉(崇陵)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능상(陵上) 및 비각(碑閣)·정자 각(丁字閣)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040)  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그리고 승지 김시묵(金時默)에게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더하게 하였는데, 청풍 부원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수가(隨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휘릉(徽陵)·건원릉(建元陵)·목릉(穆陵)·현릉(顯陵)·혜릉(惠陵)에 나아갔으며, 의릉(懿陵)에 나아가 처음 의식과 같이 하였다. 강릉(康陵)과 태릉(泰陵)에는 승지를 보내어 봉심하도록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대궐로 돌아왔다.

 

2월 5일 을해

서명응(徐命膺)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였는데, 임금이 《중용(中庸)》을 읽었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여 금년 봄과 여름에 한하여 기전(畿甸)의 36고을에 대하여 주민을 사역(使役)시키는 모든 행정은 절대로 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하교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수가(隨駕)한 관원인 행례반(行禮班)과 도성에 머문 사람인 지영반(祗迎班)은 모두 한심(寒心)스러운 데에 관계되니, 2품(品) 이상의 관원으로서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라."
하자, 승지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대신으로 기사신(耆社臣)041)  도 포함이 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어버이를 위하는 뜻이기는 하지만, 승지의 경우는 혐의스러운 입장이니 말을 하는 것이 불가하다. 승지를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저 한광조의 아버지가 바로 기사신이었다.

 

2월 6일 병자

유성(流星)이 태미 단문(太微端門)에서 나와 남방(南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유건(柳謇)을 서용(敍用)하게 한 것은 참작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며칠 되지도 않아 아경(亞卿)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정관(政官)을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7일 정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각 관사의 유사 당상관(有司堂上官) 및 석채(釋菜)042)  의 정위(正位)·배위(配位)·종향(從享)의 집사 유생(執事儒生)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유생으로 하여금 차례로 《중용(中庸)》을 읽게 하고 삭서 3등례(朔書三等例)043)  에 의거하여 시상(施賞)하도록 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어용장(魚用壯)이 그의 아비 어석구(魚錫耉)가 그의 삼촌숙(三寸叔)인 어유기(魚有琦)의 뒤를 잇게 되었는데 을해년044)   뒤에 문중의 장로(長老)가 어석구는 김요경(金堯鏡)의 외손(外孫)이 된다고 하여 예조에 파양(罷養)할 것을 정고(呈告)하였다가 지금 다시 계승하게 하기를 청한다고 하니, 임금이 매우 근거가 없는 일이라는 것으로 유사(有司)로 하여금 중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상언(上言)을 해조(該曹)에 회부한 승지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강가의 주민들이 상언(上言)하기를,
"김진휘(金振輝)는 본래 효행(孝行)으로써 칭찬을 받았으며, 정축년045)   인산(因山) 때에는 80여 명의 여사군(轝士軍)을 모집하였고 기타 수백 명에게 양식을 보냈으니, 청컨대 가자(加資)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특별히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삼수 부사(三水府使) 이방엽(李邦燁)에게는 특별히 말을 내려 주는 은전을 베풀게 하고, 갑산 부사(甲山府使) 김광려(金光礪)는 파직하도록 하였으며, 북청 부사(北靑府使) 신이복(愼爾復)은 체직(遞職)하게 하고, 정평 부사(定平府使) 서혁수(徐赫修)는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오도록 하였는데, 북도 어사(北道御史) 엄인(嚴璘)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임금이 도승지는 체차(遞差)하고 형방 승지(刑房承旨)는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번의 상언(上言)에 외람된 점이 많이 있었는데도 퇴각(退却)할 수 없었던 것 때문이었다.

 

2월 8일 무인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승지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신은 들으니, 마음이 화평하면 기운이 화평하고, 기운이 화평하면 얼굴이 화평하여 천지(天地)의 화기가 응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에게 있는 모든 병은 한 마음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으니, 만약 마음을 청명(淸明)하게 하여 혈기(血氣)가 궤도를 제대로 순환하게 한다면 그 병은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2월 9일 기묘

윤동섬(尹東暹)·한광회(韓光會)·유한소(兪漢蕭)를 승지로 삼았다.

 

2월 10일 경진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2월 11일 신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예조 판서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상고하니,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에 성상께서 정전(正殿)에 나아가면 백관(百官)이 먼저 네 번 절을 한 뒤에, 빈찬(賓贊)이 교서(敎書)를 받아 정전의 문을 나가면 백관이 또 네 번 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왕세손의 관례 때에도 역시 이에 의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왕세자가 당연히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을 행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듯한데 근거할 만한 의절(儀節)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조섭(調攝)하고 있으니, 백관을 거느리는 절차는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그전부터 칙사(勅使)의 행차 때에 피인(彼人)이 으레 조우(雕羽)를 청구하였었기 때문에 군기시(軍器寺)에서 구하여 주었는데, 그 뒤에 조우값[雕羽價]이라고 이름을 붙여 각도(各道)에다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나누어 징수하였습니다. 삼남 제도(諸道)의 경우는 무명[木]을 징납(徵納)하게 하고 함경도의 경우는 포(布)를 징납하게 하는데, 그 수효가 거의 누백(累百) 필에 이릅니다. 10여 년 전에 역관(譯官)의 무리가 통관(通官)과 서로 약속하여 조우를 청구하는 일을 영원히 혁파하도록 하였는데도 매번 칙사가 행차하는 때를 당하면 본시(本寺)에서의 징포(徵布)는 그전대로 하고 있습니다."
하고, 김성응(金聖應)은 말하기를,
"당초에 영원히 혁파하도록 서로 약속한 일은 없었지만, 근년(近年) 몇 차례의 칙사 행차에서 구해 가지 않았던 것은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니, 엄인이 말하기를,
"정축년046)                   이후로 세 차례 칙사의 행차에 모두 청구한 바가 없었는데도 포(布)는 번번이 모두 징납(徵納)하게 하였으니, 지금 만약 공물가(貢物價)를 미리 받는 사례에 의거하여 칙사의 행차가 세 차례 〈청구한 것에 대하여〉 구해서 준 것을 계산하게 한 뒤에 비로소 다시 징납할 것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御史)가 아뢴 대로 시행하되 세 차례 〈주기〉 전에는 다시 나누어 징납하게 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북도(北道)와 남도(南道)를 다르게 할 수 없는데 그 수효가 많다고 들었다. 이정청 당상(釐正廳堂上)으로 하여금 다시 사정(査正)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은(李溵)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3일 계미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춘향(春享)을 친행(親行)하였다.

 

2월 14일 갑신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2월 15일 을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졸(卒)하였다. 민백상의 자(字)는 이지(履之)이니,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며 풍채와 거동이 시원스럽게 뛰어났으므로, 문충공이 일찍이 빈객(賓客)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나의 훌륭한 손자이다.’라고 하였다. 영종(永宗)경신년047)  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여 홍봉한(洪鳳漢)·김상복(金相福)과는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서로 잇달아 정승의 지위에 들어갔으므로, 세상에서 세 정승의 친구[三台之友]라고 말하였다. 민백상이 우의정으로 발탁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는데, 나이 51세였다. 그 뒤에 홍봉한이 수상(首相)에 임명되자 마침내 김상복을 추천하여 우의정을 삼도록 하였다. 민백상이 영남(嶺南)·호남(湖南)·관서(關西) 세 도(道)를 안절(按節)하였지만 청렴하다는 명성은 없었으며, 부유(富裕)하기가 경사(京師)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의 동생 민백흥(閔百興)의 아들 민홍섭(閔弘燮)을 데려다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민홍섭이 적신(賊臣)인 홍계능(洪啓能)과 서로 결탁을 했다가 민홍섭이 죽자 역절(逆節)이 발각되어 민씨(閔氏) 집안이 마침내 망하였다.

 

2월 16일 병술

하교하기를,
"우의정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신하된 자로서 외경(畏敬)하는 마음은 저 하늘에 질정할 만하다. 이와 같은 정승을 얻어 뒷날을 믿을 만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이런 비보(悲報)를 들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18일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석음각(惜陰閣)에 나아가 좌의정 이후(李)를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염우(廉隅)를 한 번 펴는 것 또한 사유(四維)048)  를 중히 여기는 도리이다. 공조 판서 이지억(李之億), 우윤 이규채(李奎采), 도승지 김시묵(金時默), 승지 이은(李溵)은 우선 그 직임을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개 일전에 연석(筵席)에서 이후가 수일(數日) 안에 승진하여 발탁하는 것이 너무 잦다는 것으로 우러러 힘쓰도록 했었는데, 네 사람 모두 이 일로 인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결정짓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남태회(南泰會)·이중호(李重祜)를 승지로 삼았다.

 

2월 18일 무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안연(顔淵)의 극기(克己)는 단지 바로 보고서 분명히 깨닫는 것인데, 일반 사람은 이욕(利慾)에 골몰하게 되면 작은 길을 큰 길로 여기고 가시나무를 좋은 나무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였다.

 

2월 19일 기축

좌유선(左諭善)에 서지수(徐志修)를, 우유선(右諭善)에 김양택(金陽澤)을 단부(單付)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영중추부사(李領中樞府事)049)  와 민 우상(閔右相)050)  의 시장(諡狀)을 재촉하여 절혜(節惠)하는 전례(典禮)를 3월 안으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장본(狀本)을 가지고 청하기를,
"온성(穩城)의 주민으로 무산(茂山)에 유입(流入)한 자에 대하여 그중 2, 3백 명에 한하여 도로 온성의 군액(軍額)으로 정하고, 해부(該府)에 전지가 없는 데 대한 세금은 5년을 기한하여 특별히 면제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변방을 실(實)하게 한 사례가 있었으니, 특별히 시행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이후가 아뢴 것으로 인하여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와, 따르게 하고 보호하는 도리를 팔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여 봄을 함께 맞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으며, 감옥[囹圄]에서의 원통하고 억울함도 역시 캐물어서 아뢰게 하고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를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2월 21일 신묘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의 입학(入學)이 가까워져 일시에 거듭 경계하는 이때에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지방에 있음을 칭하였으니, 매우 한심스럽다. 전 대제학 김양택을 금추(禁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2일 임진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내외 입직 장관(內外入直將官)의 무경 전강(武經殿講)에 친림(親臨)하여 수석을 차지한 도감 파총(都監把摠) 윤필덕(尹弼德)에 대하여 전조(銓曹)로 하여금 영장(營將)으로 현주(懸註)하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2월 23일 계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갔다. 대신(大臣)이 회권(會圈)하여 김양택(金陽澤)이 5점(點)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는데, 김양택은 다섯 차례 문형(文衡)을 맡은 셈이다. 정휘량(鄭翬良)은 4점, 이정보(李鼎輔)·윤급(尹汲)·황경원(黃景源)은 3점, 윤봉조(尹鳳朝)는 2점이었다.

 

임금이 특별히 조돈(趙暾)을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보임(補任)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돈이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연달아 차대(次對)에 참석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돈이 어떠한 의리로 처신하는 것인가? 스스로 정성을 했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일찍이 행공(行公)을 한 때가 있었을 것이고, 행공을 했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이름만 있고 실제는 없다고 말할 만하다. 부제거(副提擧)가 비록 대단한 의망이기는 하지만 이미 하답(下答)을 받들었으니 역시 끝을 맺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금추(禁推)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등류의 고집은 내가 보지를 못하였다."
하고, 이어서 이 명이 있었으며, 즉시 사조(辭朝)하도록 하였다.

 

예조 판서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에는 사부(師傅)·빈객(賓客)과 서로 향하여 두 번 절하는 의식이 있고 또 사부가 교서(敎書)를 받드는 절차가 있는데, 왕세손의 관례 때에도 역시 의당 여기에 의거하여 마련하고 유선(諭善)으로 대행(代行)하게 하는 것이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한익모가 말하기를,
"왕세자의 관례 때에는 사옹원(司饔院)의 부제조(副提調)를 작례 집사(酌禮執事)로 삼았는데, 이번에는 어느 관원을 작례 집사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옹원의 첨정(僉正)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을 간행한 뒤에 오영(五營)이 지금의 오위(五衛)가 되었는데, 친열(親閱)과 상조(常操) 때의 인기(認旗)와 수기(手旗)는 아직도 이정(釐正)하지 않고 있다. 이 뒤를 오군문(五軍門)에는 각기 해영(該營)의 인기를 비치하고, 병조 판서가 오군문의 상조 때에는 납음 인기(納音認旗)를 소지하게 하며, 일반적으로 입시(入侍)나 동가(動駕) 때, 그리고 친열 때에는 해영의 수기를 소지하게 하는 규칙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4일 갑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2월 25일 을미

정언 김한로(金漢老)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대정(大政)에서 본조(本曹)의 참판 정홍순(鄭弘淳)의 매서(妹婿) 조윤적(曹允迪)이 별제(別提)에 의망(擬望)되었는데도 정홍순은 끝까지 스스로 인책함이 없이 마치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그가 염치없는 줄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하여 방자하고 거꾸로 됨이 심합니다. 신은 그를 견책하여 파면시키는 처벌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안성(李安性)의 손자가 모렴(冒廉)되게 안성(安城)에 부임하였습니다. 한 글자의 〈음(音)은〉 높고 낮음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세 글자의 칭호(稱號)가 서로 같다면 후손이 된 자의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고 편안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성모(李聖模)에 대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함이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예조 판서를 인견(引見)할 때에, 왕세손(王世孫)의 입학(入學) 때의 복색(服色)은 구례(舊例)대로 두건(頭巾)을 쓰고 청삼(靑衫)을 입고서 행례(行禮)하도록 하는 일을 하교(下敎)하였다. 이어서 소대(召對)를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임금이 수문 향군(守門鄕軍)을 불러 영남(嶺南)의 농사 형편을 하순(下詢)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자, 승지가 김한로(金漢老)의 글을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바람을 쏘일 수 없어 문을 열 수 없으니, 승지가 높은 소리로 그 글을 읽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읽기를 마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고 옳으니, 마땅히 깊이 유념할 것이다. 그러나 정홍순(鄭弘淳)에 대한 일은 지난날 도정(都政)하느라 분주하였을 때에 잘못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논한 바가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그리고 이성모(李聖模)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6일 병신

예조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말하기를,
"왕세손의 관례(冠禮) 때에 아청 직령(鴉靑直領)과 도대(絛帶)를 처음 나갈 때의 옷으로 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갔다. 임금이 승지를 시켜 김한로(金漢老)의 글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한 편(篇)의 글에 실린 심술(心術)이 역시 옛날 풍습 그대로이니, 그가 배치한 어구(語句)가 공변된 것인가, 개인적인 것인가? 한유(韓愈)051)  의 휘변(諱辨)에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조정(趙侹)의 후손은 음(音)이 같다는 것으로 조정(朝廷)에 벼슬하지 못한단 말인가? 더구나 6대조(代祖)의 이름과 음이 같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원량(元良)의 하답(下答)은 바야흐로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자는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둘 수 없으니, 한결같이 정방(鄭枋)을 다스린 형률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사성 조명정(趙明鼎)의 관직을 특별히 파면하게 하고, 장의(掌議) 임면주(任冕周)는 햇수를 기한하지 말고 과거 응시를 정지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명(將命) 이하의 집사(執事)는 차사원(差使員)이 채워져 들어오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 윤동섬(尹東暹)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장의(掌議)는 누구 누구인가?"
하자, 윤동섬이 말하기를,
"임면주(任冕周)·이홍재(李洪載)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의 소론(少論)으로 어찌 한 사람도 장의로 차출할 만한 자가 없던가? 왕세손이 입학(入學)하는 때에 이와 같은 자를 감히 〈차출한〉 것은 자(字)를 보이고 이름을 정하는 두 가지 뜻이 아니다."
하고, 이어서 조명정은 파직하고 임면주는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서명응(徐命膺)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특별히 임명하여 즉시 사은(謝恩)하게 하고, 본관(本館)에 나아가 장의와 모든 집사(執事)를 차출하고, 이름을 적어 들이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청금(靑衿)052)  이 그 임금의 명을 잘 따르지 않는다면,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어린 세손(世孫)을 가르치는 도리에 있어서 국상(國庠)053)  에서 나이를 따져 사양하는 예를 따를 수가 없겠으니, 입학(入學)을 18일로 물려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7일 정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예조의 세 당상관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예조 판서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입학(入學) 날짜를 이미 팔방(八方)에다 반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비상(非常)한 하교(下敎)를 들었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고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또 극력 주청하니, 임금이 그제야 〈세손의 입학을〉 물려서 행하라는 전교(傳敎)를 도로 거두었다. 석강(夕講)을 행하고 대사성에게 입학 때의 집사 유생(執事儒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사성의 아들 및 유언호(兪彦好)의 아들로 숫자를 채웠으니, 극도로 구차스럽다."
하였다.

 

2월 29일 기해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갔다가 황단(皇壇)에 친림(親臨)하여 친히 제사를 지내고, 서계(誓戒)054)  를 받았으며, 아침에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갔다. 약원(藥院)에서 입진할 때에 대사성 서명응(徐命膺)이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전 대사성이 아뢴 바는 그 분경(紛競)하는 폐단을 막으려고 한 것인데, 많은 선비들이 이것을 가지고 인혐(引嫌)하며 모두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비록 그 고집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하더라도 이미 의(義)로써 조처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렇게 유관(儒冠)을 예의로 대우하는 때를 당하여 처음부터 조심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덕음(德音)을 널리 공표하여 진출하는 길을 열도록 한다면, 실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개석(開釋)하도록 하교하고 이어서 전후(前後)의 집사(執事)를 융통하여 차출해서 채우도록 하였으며, 왕세손의 입학 때의 산선 시위(繖扇侍衛)는 모두 전문(殿門) 밖에서는 중지하도록 하는 일을 신칙(申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조(聖祖)의 입학 때에 성균관의 하리(下吏)가 잘 거행하지 못한다고 하여 시강원(侍講院)에 분부하여 그들을 현벌(懸罰)하게 하였었는데, 그때 장의(掌議) 또한 시강원의 서리(書吏)를 현벌하였다고 하였다. 성조의 일은 참으로 성대하였으니 그 당시의 사기(士氣)를 알 만하며, 이것 역시 학교를 일으키는 한 가지의 단서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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