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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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임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대제학과 대사성이 집사 유생(執事儒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는데, 장명(將命)은 홍용한(洪龍漢)이었다. 임금이 여러 유생의 성명(姓名) 및 차출된 바 임무에 대해 하순(下詢)하고, 하교하기를,
"오늘은 모래를 일어 금(金)을 단련시킨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3월 4일 계묘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좌참찬과 대사성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순 왕후(定順王后)055)  가 예척(禮陟)056)  한 해가 바로 신사년057)   6월 초4일이다. 그날에는 특별히 숭품(崇品)의 중신(重臣)을 보내어 제사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해야 하겠으며, 제문(祭文)은 의당 지어서 내리겠다."
하자, 승지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기신제(忌辰祭)는 이미 조천(祧遷)한 능(陵)에는 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예(禮)입니다. 인정은 비록 다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의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회(感懷)가 일어나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조신(朝臣)들이 예(禮)를 너무 괴로울 정도로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소녕원(昭寧園)을 봉(封)함에 있어 몇 해 동안 뜻을 품고서도 그것을 이루기가 어려웠는데, 오직 이천보(李天輔)와 원경하(元景夏)가 찬성한 힘으로 이루었다."
하고, 이어서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이후(李)가 졸(卒)하였다. 이후의 자(字)는 후옥(厚玉)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음관(蔭官)으로 진출하여 목사(牧使)가 되었으며 태학사(太學士) 조관빈(趙觀彬)에게 종유(從遊)하였었는데, 조관빈이 큰 그릇으로 여겼으며 〈조관빈이〉 고시(考試)를 주장함에 이르러 이후가 과거에 합격하였다. 고 상신 신만(申晩)과는 친하게 지냈는데, 신만이 이조 판서가 되자 이후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추천하였고, 이후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통현(通顯)058)  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병조 판서에서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역신(逆臣) 김상로(金尙魯)가 그를 극력 추천한 것이었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우의정이 되었으나 이후가 평소 홍봉한(洪鳳漢)이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에 수찬 이형규(李亨逵)가 이후를 탄핵하며 개정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형규를 바다 가운데로 귀양보냈다. 이후가 병으로 졸하니, 나이 68세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예조 판서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가 망한〉 갑신년이 멀지 않은데 황하(黃河)는 맑아지지 않으니, 멀리 중주(中州)를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이번 황단(皇壇)의 제사에는 단지 정성이 얕은 것을 연우하여 생각 밖에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우리 황제에게 정성을 다한 것이겠는가? 비록 친행(親行)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스스로 편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내일 흥화문(興化門)에서 향(香)을 지영(祗迎)하겠다."
하고, 이어서 소차(小次)에 머물렀으며, 이튿날 아침에 봉심(奉審)할 승지를 들어오게 하여 인견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3월 6일 을사

임금이 흥화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한 뒤에 그대로 소차(小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승정원에서 신칙(申飭)하지를 못하여 황단(皇壇)의 제소(祭所)에서 떠드는 일이 있었다고 하여 새로 임명한 승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체차(遞差)하고, 구윤옥(具允鈺)·한광조(韓光肇)·윤득양(尹得養)·안집(安𠍱)·임위(任瑋)를 승지로 삼았다.

 

3월 7일 병오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갔다가 그대로 진전(眞殿)과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으며, 지나는 길에 효장묘(孝章廟)에 들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자(臣子)로서 충효(忠孝)를 하였다고 하겠는가? 정결(淨潔)하게 하려고 하다가 친향(親享)을 하지 못하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이미 신실(神室)에 아뢰었으니, 어떻게 그 허물을 속죄하겠는가? 지금부터 3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심이지(沈履之)·이상지(李商芝)를 파직하도록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이 졸서(卒逝)한 것으로 친향(親享)하는 가부(可否)를 하문하자, 심이지가 말하기를,
"전례(前例)는 없습니다. 다만 섭행(攝行)할 경우 사람들의 수효가 친향할 때와 비교하여 크게 줄어들기는 하지만, 깨끗이 하는 데는 부족한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섭행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그가 대답한 바가 너무나 귀착됨이 없으므로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입은 것은 바로 황조(皇朝)에서 내려 준 구장복(九章服)이다. 망의(蟒衣)를 입고 선왕(先王)을 뵙는 뜻을 취하였으니, 이 옷을 입고 진전(眞殿)에 나아가는 것이 적당하다. 여러 신하들도 조복(朝服)을 입고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8일 정미

자서록(自敍錄)을 어제(御製)하였는데, 성궁(聖躬)의 평생을 낱낱이 서술한 것이었다.

 

3월 9일 무신

승지 유정원(柳正源)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이산두(李山斗)의 근력(筋力)에 대해 하문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90세를 바라보는 사람을 어찌 분주(奔走)하게 할 수 있겠는가마는, 내가 한번 보고 싶으니 힘을 헤아려서 올라오도록 하라는 뜻을 승정원에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3월 10일 기유

임금이 원인손(元仁孫)에게 명하여 어제(御製)인 열천편(冽泉篇)과 자서록(自敍錄)을 《열천자서합록(冽泉自敍合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언해서(諺解書)를 만들어 두 건(件)을 바치도록 하였다.

 

왕세손이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는데, 입학 반교문(入學頒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기명(基命)을 후손에게 공고히 하여 크게 거듭 빛이 날 운수를 따르게 하고, 훌륭한 범절을 치주(齒胄)059)  에게 주시어 이에 삼대(三代)060)  의 법을 가다듬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보거나 듣고서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에 큰 이름을 드날리어 여러 곳에 알리노라. 생각하여 보면 우리 나라는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다스리므로, 임금의 후사(後嗣)를 상서(庠序)에 나아가게 하여 가르쳤었다. 열성조(列聖朝)에서부터 번거로운 의식을 모두 거행하였으니, 황조(皇朝)의 아름다운 법을 준수함이요, 과궁(寡躬)에 이르러서도 장세(壯歲)에 역시 시행하였던 것은 대체로 영릉(寧陵)의 옛일을 계승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단지 스승과 친밀해지고 공부에 민첩해지는 도리일 뿐이겠는가? 그것 또한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이 이루어지게 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우리 세손(世孫)은 일찍이 아름다운 명성이 드러나서 단응(端凝)하고 기의(歧嶷)한 의표는 남몰래 덕용(德容)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인후(仁厚)하고 온량(溫良)한 자질은 틀림없이 학업이 날마다 발전할 것이다. 왕통(王統)을 계승하여 저사(儲嗣)를 잇는 단서를 소중히 여겨야 할 바가 여기에 있으며, 주자(胄子)061)  를 가르치어 자손에게 계책을 물려주는 일이 예(禮)에 있어서도 옳도다. 어린 나이에 외부의 스승에게 배우러 나아가서 성대한 예로 맨 먼저 선사(先師)를 뵈었도다. 연(輦)에서 내려 교문(橋門)062)  으로 들어가니 공손하게 도(道)를 준행하겠다는 생각이요, 스승이 앉은 자리로 조심스럽게 나아가서 부지런히 학문에 진취하는 정성에서이다.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공경하는 모습은 엄연하기가 성인(成人)의 법도와 같고, 경전(經傳)을 끼고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는 말은 뜰에 가득한 금신(衿紳)063)  의 마음을 용솟음치게 하였도다.
육예(六藝)064)  의 시서(詩書) 공부는 여기에 갖추어져 있고, 팔조(八條)065)  의 〈국가와 천하를〉 다스리고 화평케 하는 공부는 여기에서 근본하니, 소자(小子)가 아끼고 공경하는 행실은 이미 물뿌리며 청소하는 작은 것에서부터 미루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우리 나라의 정일(精一)한 공부는 박약(博約)066)  을 좇아 이루도록 힘쓰라. 문손(文孫)067)  을 치학(齒學)에 두었던 것은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조그마한 네가 복유(服儒)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이 일은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 드물게 보는 경사(慶事)인데, 어찌 대정(大庭)에서 선포(宣布)하는 글이 없겠는가? 아! 한 세대의 효도를 일으키는 방법을 열어 삼선(三善)068)  을 모두 얻었으니, 만년토록 근본을 튼튼히 하는 업적을 수립하면 모든 복록이 여기에 모일 것이므로, 이에 교시(敎示) 하노니, 의당 모두 알기를 바란다."
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지어서 올렸다.】  왕세손이 작헌례(酌獻禮)를 마치고 이어서 학생복(學生服)을 갖추고 나아가면, 익선(翊善)이 인도하여 명륜당(明倫堂)의 대문(大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선다. 백비(帛篚)에 담은 저포(紵布) 3필(疋), 예주(醴酒) 2말[斗], 수안(脩案)에 올려놓은 다섯 가지의 정(脡)069)  을 진열한다. 박사(博士)가 공복(公服)을 갖추면 집사자(執事者)가 인도하여 명륜당의 동계(東階) 위에 서쪽을 향하여 선다. 장명자(將命者)가 동쪽을 향하여 감히 일을 청한다고 말하면, 왕세손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아무개가 선생(先生)에게 수업(受業)하기를 원합니다.’ 하면, 장명자가 들어가 고하는데, 박사가 말하기를, ‘아무개가 덕(德)이 없으니, 청컨대 왕세손은 욕되게 하지 마소서.’ 한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세 번에 이르면 왕세손이 마침내 뵙기를 청하는데, 박사가 말하기를, ‘아무개가 사양하여도 명을 얻지 못하여 감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면, 왕세손이 광주리를 잡는데, 박사는 동계 아래로 내려가 기다린다. 왕세손이 꿇어앉아 광주리를 올리며 두 번 절을 하면, 박사가 답배(答拜)를 한다. 왕세손이 꿇어앉아 광주리를 가져다 바치면 예주(醴酒)와 수(脩)를 받든 자가 따라서 박사 앞에 바치는데, 박사가 꿇어앉아 광주리를 받아 집사자(執事者)에게 주면 집사자가 꿇어앉아 예주와 수를 가지고 물러난다. 왕세손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을 하고 편차(偏次)로 나아가면 박사도 평상복으로 고쳐 입고 당(堂)에 올라 자리로 나아가는데, 명륜당 동벽(東壁)에서 서쪽을 향하게 한다. 그러면 왕세손이 박사 앞에 나아가 글을 강독하고 뜻을 해석하는데, 그것을 마치면 집사가 안(案)과 책[書]을 치우고 왕세손은 편차로 나아간다.
임금이 입학 제집사(入學諸執事)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세손의 사부(師傅)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전(賞典)을 내렸는데, 좌익선(左翊善) 이인배(李仁培)에게는 준직(準職)070)  을 제수하고, 집사 유생(執事儒生)에게는 각기 붓과 먹과 종이를 내려 주었으며, 수복(守僕)에게는 쌀과 면포를 제급(題給)하도록 하였다.

 

3월 11일 경술

승지를 보내어 고 좌의정 이후(李)의 집에 치조(致弔)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에 친림(親臨)하여 제목을 걸게 한 뒤에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3월 12일 신해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시관(試官)이 입시(入侍)하였는데, 과차(科次)가 향시(鄕試)에서는 목조수(睦祖洙)가 수석을 차지하였고, 경시(京試)에서는 홍낙인(洪樂仁)이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3월 13일 임자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여 하교하기를,
"모든 산선 차비(繖扇差備)에 있어 대전(大殿)에는 바로 적장(嫡長) 출신인 충의위(忠義衛)가 사모를 쓰고 관대를 띠며, 중궁전(中宮殿)과 빈궁(嬪宮)에는 모두 내시(內侍)로 사모를 쓰고 관대를 띠며, 세자궁(世子宮)과 세손궁(世孫宮)에는 충찬위(忠贊衛)에서 지모(紙帽)를 쓰고 흑의(黑衣)를 입는 옛날의 사례가 명백하다. 그리고 또 사금(司禁)의 주장 차비(朱杖差備)와 대전(大殿)·훈련원(訓鍊院)·중궁전의 주장 차비 및 빈궁의 오장 차비(烏杖差備)는 모두 내시로 하고, 세자궁과 세손궁의 오장 차비는 모두 충찬위로 하며, 제빈(諸嬪)도 모두 그렇게 하여, 이 뒤로는 한결같이 구례(舊例)를 준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4일 계축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 홍봉한(洪鳳漢)으로 하여금 공시인(貢市人)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는데,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와 한성 판윤 남태제(南泰齊)도 참여하였다. 임금이 공시(貢市)의 폐단[弊瘼]에 대하여 하순하고 모두 이정(釐正)하게 하였다. 이어서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고 유사 당상인 홍인한(洪麟漢)으로 하여금 각도(各道)의 장본(狀本)을 아뢰도록 하였는데,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군향미(軍餉米) 1천 석(石)을 영남(嶺南)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배로 운반하여 보내도록 허락하였으며,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장청으로 인하여 잡곡(雜穀) 2백 석을 영월(寧越)의 관해(官廨)를 수리하는 밑거리로 돕게 하였고,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청으로 인해서 인삼(人蔘) 15근을 북도(北道)에다 나누어 정하도록 하였다. 통영(統營) 사람 이만삼(李萬森)이 북을 쳐서 사정을 하소연한 것으로 인하여 어세전(漁稅錢) 1만 냥(兩)을 10년 동안 기한하여 정퇴(停退)하도록 하였으며, 〈세금을〉 징수할 길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탕감(蕩減)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에 만약 긴급한 일이 있으면 유사 당상이 구대(求對)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체로 당시에 삼공(三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월 16일 을묘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정순검(鄭純儉)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최경악(崔景岳)을 조용(調用)하도록 청했는데, 최경악은 바로 최진형(崔鎭衡)의 아들이다. 그런데 어리석고 식견이 없어 취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는데도 홍봉한이 육상궁(毓祥宮)071)  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여 이렇게 진청(陳請)하였으니, 〈임금의〉 비위를 맞춘다는 비난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형조의 살옥 문안(殺獄文案)을 읽도록 한 뒤에 형관(刑官)이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고 하여 특별히 전임과 후임의 형조 당상을 파직하도록 명하고, 승지를 시켜 고 좌의정 이후(李)에게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3월 17일 병진

왕세손이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갔다.

 

3월 18일 정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왕세손의 조알례(朝謁禮)를 받았다. 왕세손이 삼가례(三加禮)072)  를 행하였는데, 초가(初加)에는 곤룡포(袞龍袍)를, 재가(再加)에는 강사포(絳紗袍)를, 삼가(三加)에는 면복(冕服)을 입었다. 빈(賓)인 행 의정부 좌참찬(行議政府左參贊) 서명빈(徐命彬)이 반교문(頒敎文)을 선포하였는데, 반교문에 이르기를,
"왕세손에게 좋은 날에 원복(元服)073)  을 하는 것은 옛법을 따라서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예(禮)는 관(冠)을 쓰면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니, 관을 쓰는 것은 성인(成人)의 예(禮)를 권하는 것이다. 무릇 이륜(彛倫)은 오로지 여기에서 닦는데, 의복을 갖추고 예를 갖추는 일은 일반 서민들도 오히려 그렇게 하거늘, 더구나 너는 나라와 총손(冡孫)074)  으로 〈왕실의〉 대통(大統)을 계승해야 하니, 그 의식이 중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너 세손은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타고난 자질과 성품이 순수(純粹)하니, 키는 얼마 되지 않지만 좋은 명성은 중외(中外)에 알려졌다. 그래서 일찍이 위호(位號)를 정하여 우리의 기업(基業)과 대명(大命)을 튼튼하게 하였는데, 덕기(德器)가 크게 드러나 백성들이 모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니 날마다 글을 강독하고 외우기를 부지런히 하여 지식과 행동이 모두 발전해서 궁묘(宮廟)에 알현(謁見)할 때에는 단정하고 엄숙함을 스스로 유지하고 태학(太學)에 끼어서는 기거와 동작을 법도에 맞도록 하여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다함이 없도록 힘쓰라.
너의 나이가 점점 장성하여 아름다운 일이 빨리 닥쳐 이에 삼가(三加)와 관복(冠服)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너의 몸을 가리도록 하라. 너에게 예주(醴酒)를 권하게 하며 너에게 자(字)를 지어 주어 축하하고 경계하니, 공경히 아름다운 명을 받들면 사람으로서 도리가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너 소자(小子)가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행동이 있지만 효도하고 공경함이 근본이 되며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실 때 예의(禮義)가 바로 수립되고, 성인(聖人)의 교훈을 공경히 마음에 두고서 때때로 그 자신을 가다듬어 그것을 넓게 미루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같이 되는 것이니, 그 방법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다. 거동을 신중하게 하여 안일한 데에 해이되지 말고, 마음을 단속하여 욕심을 멋대로 부리지 말고, 공경스럽게 하고 정성스럽게 하기를 잘하며, 늘 학문에 종사하면서 날마다 부지런히 하라. 그리고 만약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하며, 만약 먼 곳을 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하라. 이제 너에게 관(冠)을 씌워 처음부터 끝까지 힘쓰도록 하니, 의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영원토록 국가의 근본이 된다.
아! 면불(冕黻)을 내려 주는 것은 너를 호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실하게 힘쓰도록 도모하는 것이니, 그 옷에 맞게 행동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알도록 하라. 네가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오히려 큰 책임이 있으니, 우리 국가의 어렵고 큰 기업을 생각하고 선왕(先王)의 정일(精一)한 훈계를 살펴서 밤낮으로 공경하며 두렵게 여겨 감히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말며, 현명한 이를 가까이 하고 자신을 경계하며 큰 덕(德)을 밝히는 데에 힘써서 하늘이 내려 주는 경사(慶事)를 영원토록 끝이 없게 받도록 하라. 때문에 이를 교시(敎示)하니, 의당 상세히 알기를 바란다."
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지어 올렸다.】  삼가(三加)하기를 마치매, 예주(醴酒)를 술잔에 따라 축하하고 자(字)를 형운(亨運)이라고 부르니, 왕세손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아무개가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감히 공경스럽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두 번 절하기를 마치자, 왕세손은 대내(大內)로 돌아가고 궁관(宮官) 및 집사관(執事官)도 물러났으며, 이어서 회빈객례(會賓客禮)를 행하였다. 예를 행하기를 마치자, 주인(主人)인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과 빈(賓)인 좌참찬 서명빈(徐命彬), 찬(贊)인 참판 박상덕(朴相德)에게는 모두 말을 상(賞)으로 주는 은전을 시행하였으며, 전교관(傳敎官)인 우승지 윤득양(尹得養)은 가자(加資)하게 하고, 이하 여러 집사관(執事官) 및 강서원(講書院)·위종사(衛從司) 관리에게는 차등이 있게 상을 주도록 하고,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하였다.

 

3월 19일 무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권정례(權停禮)075)  로 행하였다.

 

왕세손의 관례(冠禮)에 반교(頒敎)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자손을 편안케 하는 계책을 후손에게 물려 주어 영화로운 명이 이미 베풀어지고 의복이 갖추어져 성인(成人)으로서의 책임을 지워 아름다운 일을 다시 거행하게 하였도다. 의식은 하루만에 행하였지만 즐거움은 사방이 들썩하도다. 돌아보건대 총손(冡孫)의 현명함은 오래도록 많은 백성들의 소망에 관계가 된다. 아들을 낳을 꿈[態夢]이 세자(世子)에게 들어맞아 내가 늘그막에 〈손자를〉 무릎에다 앉히는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으며, 큰 복을 종조(宗祧)에다 뻗치게 하여 네가 어린 나이인데도 왕통(王統)을 정하는 호(號)를 내려 주었다. 더구나 너는 영특하고 지혜로움이 특별히 뛰어나니, 아! 온화하고 문아함이 날마다 빛이 났도다. 말을 배우면서부터 강연(講筵)을 열 수 있게 되어서 기억하고 외우며 질문하고 답변함에 어긋나지 않았고, 스승에게 나아가기에 미쳐서는 요속(僚屬)을 더 설치하였으니 조석(朝夕)으로 항상 친근하게 하였다. 훈계하고 유시함에 네 할아버지의 마음을 체득하게 하여 가법(家法)을 서로 전수(傳授)하였고, 응대(應對)함에 대인(大人)의 뜻을 보이더니 덕기(德器)가 일찍 이루어졌도다.
이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여 〈선비들과〉 섞이게 하는 의식을 이제 막 행하매 바로 대(代)를 나타내는 뜻이 더욱 급박함을 알게 되도다. 하(夏)나라 때 쓰던 수(收)076)  로 제도를 정하였으니 전성(前聖)이 남긴 글을 징험할 수 있고, 춘관(春官)이 의식을 익혀 속편(續篇)으로 된 새로운 규정 또한 갖추어졌도다. 그래서 올 3월 18일에 헌(軒)에 나아가 교문(敎文)을 선포하고 원복(元服)을 더하니, 면류관과 보불(黼黻)이 빛나서 성대함이 마치 연(筵)으로 오를 듯한 모습이며, 빈(賓)과 사(師)가 반열에 있으니, 술을 따라 올리도록[晉醮] 하는 내용이 질서가 정연하도다. 자(字)를 지어 주는 것은 그 이름을 높이려는 것이며, 축하를 해주는 것은 그 복을 돈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의범(儀範)은 바라보고서 본받을 만하니 어린아이 적의 뜻을 버릴 것이고 덕업(德業)이 따라서 더욱 높아지니 아름다운 천명(天命)은 오직 영원할 것이다. 안으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밖으로는 어른에게 공경하여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비로소 이루어지도록 권면하며, 아래로는 체통을 잇고 위로는 조종(祖宗)을 계승하니 나라의 기반이 더욱 튼튼해짐을 기쁘게 여기도다.
신손(神孫)을 일찍 세우니 열성조(列聖祖)의 융성한 규정이 아님이 없고, 관례(冠禮)하는 의식을 처음으로 가다듬어 비로소 과궁(寡躬)이 직접 보게 되었도다. 아름다움을 모든 백성과 함께 경사스러워하면서 오직 삼대(三代)처럼 오래도록 편안하기를 도모하도다. 이미 인(禋)에 고하고 거듭 여러 사람에게 유시한다. 아! 20년 안에 빈(賓)을 고르는 예를 거듭하니, 문자(文子)와 문손(文孫)의 일이요, 만년토록 도록(圖籙)이 이어지는 아름다움을 받았으니 열성조에서 하던 사업을 계승하게 하려한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의당 모두 알기를 바란다."
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61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76] 수(收) : 한나라 때의 관명(冠名).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3월 20일 기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결(疏決)하였다. 장령 이택징(李澤徵)이 대정(大庭)에서의 반교(頒敎) 때와 친림(親臨)하여 소결할 때에 참석하지 않은 대간(臺諫)은 한결같이 파직(罷職)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정보(李鼎輔)·형조 참판 이제화(李齊華)는 소결할 적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하고, 이창의(李昌誼)를 판의금부사로, 이규채(李奎采)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21일 경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비국 당상이 입시하였다. 죽산(竹山)·안성(安城)·이천(利川)·음죽(陰竹)·적성(積城)·삭녕(朔寧) 등 고을의 보리로 환상(還上)한 것을 적당하게 헤아려 팥[小豆]으로 바꾸도록 하고, 양성(陽城)·금천(衿川)·과천(果川) 등 고을의 밀[小麥]은 절반을 벼[租]로 바꾸도록 명하였는데, 채제공(蔡濟恭)이 아뢴 바로 인해서였다.

 

도류안(徒流案) 가운데 금산(金山) 사람 백상준(白尙俊)의 죄목(罪目)에 내용이 당목(黨目)에 언급되었고 심지어 국가에서 금지하는 법을 범하는 등의 말이 있었고, 하대관(河大觀) 또한 영남(嶺南) 사람인데 그의 죄목에 우계(牛溪)077)  와 율곡(栗谷)078)  을 모욕(侮辱)하고 흉당(凶黨)을 존모(尊慕)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을해년079)   이후로 국시(國是)가 해와 별처럼 분명한데, 어떻게 감히 나라에 금지하는 두 글자를 가지고 하단(下段)에서 맺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하대관에게는 드러나게 우계와 율곡을 부호하거나 억제하는 두 글자가 있어 이미 수상한 데에 관계되니 해당 감사(監司)인 조엄(趙曮)에게는 관직을 삭탈하는 율을 시행하고, 금산 군수(金山郡守) 민백순(閔百順)을 잡아다 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 향전(鄕戰)할 경우 도신(道臣)은 갑을(甲乙)을 따지지 말고 세 차례 엄중히 형벌하여 징계하고 면려하도록 하라."
하였다.

 

각사(各司)의 입직(入直)한 관원을 소견(召見)하여 관장하고 있는 직무에서 마음에 품은 바를 하문하자 모두 앙대(仰對)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유신으로 하여금 《심경(心經)》을 강독하도록 하였다.

 

3월 22일 신유

한광조(韓光肇)·송명흠(宋明欽)을 승지로, 윤봉오(尹鳳五)를 대사헌으로, 조영진(趙榮進)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3일 임술

대사성 서명응(徐命膺)이 상서(上書)하여 청하기를,
"널리 서적(書籍)을 태학(太學)에다 모아 문교(文敎)의 근원을 열게 하고, 의조(儀曹)로 하여금 팔도(八道)에 행관(行關)하여 모든 각 고을에 소유하고 있는 판본(板本)을 낱낱이 인장(印粧)하여 본관(本館)으로 수송(輸送)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영중추부사(李領中樞府事)의 발인일(發靷日)이 내일이라고 하니,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해야 하지만 승지 송명흠(宋明欽) 또한 등대(等待)하도록 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예조 참의로 임명하게 하라. 그리고 지금 만약 벼슬에서 떨려나 고향으로 내려가게 한다면, 먼 지방의 사람을 불러들이는 뜻이 아니다. 그러니 유정원(柳正源)을 특별히 판결사(判決事)로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4일 계해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좌승지가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날씨가 이와 같아 담(痰)이 또한 일어났기 때문에 먹지 못한 지가 거의 3주야(晝夜)가 되었다. 자신이 약원 제조(藥院提調)가 되어 경중(輕重)을 알지 못하였으니, 제조 김상복(金相福)은 파직하고 부제조는 체차(遞差)하며 수의(首醫)는 의금부에 회부하여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게 하라. 이러한 시기에 춘방(春坊)의 관원이 비록 기거(起居)하지 말라고 하는 영(令)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보도(輔導)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날 입직(入直)한 관원에게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번(下番)이 연달아 궐직(闕直)하였다고 하는데, 뒤돌아보는 것인가, 편한 대로 하는 것인가? 아무리 강학(講學)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강관(講官)이 없겠는가? 이는 바로 공자(孔子)가 양(羊)을 보존하여 예(禮)를 아끼는 뜻080)  인 것이다. 그러니 패초(牌招)하여 입직하게 하되, 만약 혹시라도 위패(違牌)하거든 곧바로 투비(投畀)081)  하는 휘지(徽旨)를 받들게 하라. 양궐(兩闕)에 분주하게 문후(問候)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니, 분제조(分提調) 1원(員)을 계하(啓下)하도록 하라."
하고, 남태제(南泰齊)를 〈분제조로〉 삼았으며, 이규채(李奎采)·박사눌(朴師訥)을 승지로, 한익모(韓翼謨)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중건공탕(理中建功湯)을 날마다 두 번씩 달여서 들이도록 명하고 인삼(人蔘) 두 돈중[錢重]에 좁쌀을 넣어 마실 수 있도록 달여서 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본청(本廳)에는 입시 의관(入侍醫官) 두 사람이 입직(入直)하게 하되 한 사람은 별생기(別省記)082)  로 하고, 의약청(議藥廳)에는 입시 의관 한 사람이 입직하며 도승지는 본원(本院)에서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다.

 

김종정(金鍾正)이 위패(違牌)하였다 하여 즉시 투비(投畀)하라는 휘지(徽旨)를 받들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해현(寧海縣)으로 투비하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후에 이규채(李奎采)가 아뢴 바로 인하여 특별히 방면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3월 25일 갑자

김상익(金尙翼)을 분제조(分提調)로 삼도록 명하였다. 일차(日次)가 이미 지났으므로 그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하교(下敎)한 뒤에도 역시 문후(問候)하지 말도록 하라는 영(令)이 없었는가? 내가 하교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지금은 제조(提調)가 대궐 아래서 대령(待令)하고 있으며 세 차례 탕제(湯劑)를 올리니, 원량(元良)의 일차 문후(日次問候)는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3월 26일 을축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부터는 닭기름[鷄膏]을 달여서 들이도록 하되, 전인(廛人)에게 분부하여 알을 품고 있는 닭은 가져다 바치지 말도록 하라. 옛날에 병시중[侍湯]을 들 때에 머리가 푸른 오리를 들여보내도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알을 품고 있는 오리를 가지고 와서 바치지 말게 하였다."
하고, 전교(傳敎)를 써서 수의(首醫)를 방면하여 보내도록 명하였으며, 전교를 써서 현관(賢關)에서의 강회(講會)에 대해 신칙(申飭)하고, 강서원(講書院)에 신칙하여 전례대로 잇달아 강서(講書)하도록 하였다. 지방에 있는 대신(臺臣)을 체임(遞任)하도록 허락하고, 유관현(柳觀鉉)을 장령으로 삼았다.

 

3월 27일 병인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자 약방(藥房)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파[蔥]를 따뜻하게 하여 들여오도록 명하여 잇달아 복부(腹部)에다 붙이게 하고, 세 도위(都尉)에게 명하여 직숙(直宿)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약방의 관원에게 유문(留門)083)  하도록 하여 들어와 직숙하게 한 하교 또한 이미 너무 일찍하였다면 조정(朝廷)의 정후(庭候)를 해가 높이 솟은 뒤에 기거(起居)하도록 하는 영(令)을 내게 한 신하는 특별히 파직하게 하고, 정원에서 분부를 잘하지 못하여 정후 또한 너무 늦은 데에 관계되었으니, 부제조를 제외한 여러 승지는 일체로 체차(遞差)하게 하라."
하고, 김상중(金尙重)·심발(沈墢)·이수득(李秀得)·유한소(兪漢蕭)·이정철(李廷喆)을 승지로 삼고, 왕세손에게 진현(進見)하도록 명하였다.

 

분제조(分提調) 김상익(金尙翼), 승지 박사눌(朴師訥), 사서(司書) 이창임(李昌任)이 소조(小朝)에 구대(求對)하여 예후(睿候)가 더욱 심해졌는가를 우러러 물으니, 하령하기를,
"치통(齒痛)과 두통(頭痛) 및 복부(腹部)가 당기어 기동(起動)을 할 수가 없다."
하자, 김상익과 박사눌이 말하기를,
"약원(藥院)의 관원과 도위(都尉)가 아울러 직숙(直宿)하고 있으니, 저하(邸下)께서 진현(進見)하는 의절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면 군사들을 초기(草記)084)  하여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이창임이 말하기를,
"절차에 구애받을 것은 없지만, 단지 시위(侍衛)로 빨리 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박사눌은 말하기를,
"만약 초기를 들여보낸다면 대조께서 〈소조의〉 병을 근심하여 아마도 허락하지 않을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고, 김상익은 말하기를,
"신이 보호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예후(睿候)가 억지로 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연(輦)을 타고 떠나려 하는데, 누울 수 있겠는가?"
하자, 김상익이 말하기를,
"모장(毛帳)으로 가리면 반드시 바람에 닿을 염려가 없을 것이며, 누워서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니, 이창임이 말하기를,
"신이 진현 초기(進見草記)를 정원에 올려야 하는데, 내용 구성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하령하기를,
"단지 진현(進見)하겠다는 뜻을 정원의 〈승지로〉 하여금 은미하게 품(稟)하게 하되, 더디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정원에서 진현하겠다는 하령(下令)으로써 품계(稟啓)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리(調理)한다고 하면서 오는 것은 내가 더욱 마음이 쓰인다. 승지는 가서 즉시 유시하여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므로, 승지가 전교로써 소조에게 우러러 진달하니, 하령하기를,
"지금은 병을 말할 시기가 아니지만 대조께서 이미 마음이 쓰인다는 하교가 계셨다. 그런데 억지로 거행하다가 만약 혹시라도 〈병이〉 더 심해진다면 대조께서 어떻게 더욱 마음을 쓰시지 않겠는가?"
하자, 이창임이 말하기를,
"신이 승여(乘輿)가 이미 궁(宮)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으로 대조께 은미하게 품(稟)하였으니, 지금은 도로 정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문학(文學)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대조께서 마음이 쓰인다고 하신 하교는 〈소조의〉 병을 염려하는 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금 예후(睿候)가 조금 낫다는 것으로 진현하는 예를 거행한다고 청한다면 대조께서도 틀림없이 아름답게 여기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만약 엄인의 말을 따른다면, 이는 대조를 속이는 것이다."
하자, 엄인이 말하기를,
"비록 예가(禮家)로써 말한다 하더라도, 부형(父兄)의 병중(病中)에 자제(子弟)에게 병이 있어 부형이 그로 하여금 휴식(休息)하도록 할 경우 자제 또한 임시 방편의 말로 병이 나았다고 핑계대면서 병시중[侍湯]들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법입니다. 저하께서 초조하고 박절한 마음으로 진현(進見)하려고 한다면, 지금 비록 임시 방편의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돌아보건대, 무슨 방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속인다[欺]’는 한 글자로 의심하거나 우려를 두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내가 한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고, 병이 만약 더 심해져서 다시 대조께서 마음을 더 쓰시게 된다면, 어떻게 염려하며 민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자, 엄인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한 해가 지나도록 진현하지 못한 나머지 또 대조의 환후(患候)를 당하여 직숙(直宿)하는 때에 진현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民情]에 답답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이러한 때에 어찌 백성의 마음을 말하는가? 내가 지켜보는 바가 아니니, ‘백성의 마음[民情]’이란 두 글자는 매우 잘못이다. 추고(推考)하는 것이 옳다."
하고, 하령하기를,
"진현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두통(頭痛)으로 혼미하고 어지러워 바로 앉아 있기가 어려우니, 태복시(太僕寺)에 분부하여 의자(椅子)를 대령(待令)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바야흐로 조리(調理)하는 가운데 있으니, 공자(孔子)가 맹무백(孟武伯)에게 일러준 말085)  을 체득하는 데에 있어서 진현은 지금 논할 수 없는데도 지금 강관(講官)의 말을 들으니 단지 입직(入直)한 당상관과 낭청을 거느리고 왔다고 하는데, 행동이 또한 이상스러운 데에 관계된다. 장차 도하(都下)의 인심(人心)을 소란스럽게 하려는 것인가? 승지와 춘방(春坊)에서 한 차례도 제기하거나 품(稟)하지 아니하고 흐릿하게 영(令)을 받아들였으니, 승지 박사눌과 사서 이창임은 파직하도록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소조(小朝)에 치전(馳傳)하게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내가 진현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니, 자제(子弟)된 도리에 있어서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현하는 영(令)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공조 정랑 이종명(李宗明)이 겸사(兼史)로 창덕궁(昌德宮)에 입직(入直)하면서 글을 올려 진현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였지만 가끔 가리지 않은 부분이 많았으므로 정원에서 올리지 않았다.

 

3월 28일 정묘

조정에서 조석 정후(朝夕庭候)를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탕제(湯劑)를 하루에 세 차례 달여서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원에서 초기(草記)를 가지고 왕세자의 진현(進見)을 앙품(仰稟)하니, 하교하기를,
"세자로서의 도리가 어찌 한갓 어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겠는가? 나로 하여금 마음을 쓰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자식의 도리인 것이다. 어제 이미 하교하였으니, ‘진현’이란 두 글자로 매번 고요하게 조섭(調攝)하는 마음을 부추긴다. 어김이 없도록 하라고 말한 것 역시 어떻게 아비의 명을 따르는 도리이겠는가? 보도(輔導)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초기(草記)를 적어 올렸으니, 직무를 제대로 집행했다고 할 만하다. 조용히 조리(調理)하도록 하는 일을 전백(轉白)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창임(李昌任)은 앞에서 너무 경솔하고 정창성(鄭昌聖)은 뒤에서 너무 상세하게 하니, ‘어김이 없도록[無違]’ 하라는 두 글자가 어찌 원량(元良)을 위하여 꾸미는 말이겠는가? 보도하는 직책을 맡고 있으니 비록 하령(下令)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대조(大朝)의 뜻을 체득하여 전백해야 하는데도, 어제 품하여 아뢴 것과 오늘의 초기(草記)는 나로 하여금 심기(心氣)를 허비하도록 하여 경솔하고 상세함이 저절로 드러났으니, 경계가 없을 수 없다. 정창성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그리고 조리(調理)할 것을 권면하여 비국 당상이 진대(進對)하는 날이나 강학(講學)하면서 책을 펼 때 아무리 신음(呻吟)하는 가운데서라도 저도 모르게 아픔이 저절로 몸에서 제거되는 것이 어찌 진현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 임금이 소조(小朝)에서 구대(求對)할 때의 기주 초책(記注草冊)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고, 보기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세자가 이와 같이 〈병이〉 더함이 있다니, 그로 하여금 오지 말게 한 것은 내가 정말 옳았다. 그리고 의약청(議藥廳)에서는 단지 도기탕(導氣湯)만 그전대로 지어서 들이도록 하라. 오늘날은 문구(文具)의 세계(世界)라고 말할 만하다. 분제조(分提調) 김상익(金尙翼)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초책(草冊) 가운데는 원래 ‘더함이 있다[有加]’는 두 글자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이규채에게 그 초책을 읽도록 명하였는데, 머리 부분이 엉긴 듯 무겁다는 내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더함이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돌아다보고 두루 가리려 하니,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다. 오늘 도승지는 잠자코 가만히 있는 것이 가하거늘, 무슨 마음으로 미봉(彌縫)하려 드는가?"
하고,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또 주서(注書) 황박(黃樸)이 전혀 기초(記草)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히 조처하게 하고, 승지 이심원(李心源) 또한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주원(廚院)086)  으로 옮겨서 직숙하게 하고,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김상로(金尙魯)가 강교(江郊)에 있으면서 아득히 동정(動靜)이 없다고 하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정승으로 제배하고 그대로 호위 대장(扈衛大將)과 약원 도제조를 겸임하게 하였다. 다시 기강(紀綱)을 진작시키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이를 기용하며, 시끄러운 풍습을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공정한 마음을 한결같이 하고,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기를 함께 하라는 여섯 가지 조목을 가지고 힘쓰도록 유시하였으며 특별히 이장오(李章吾)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에 제배하였다.

 

3월 29일 무진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글을 올렸다가 비답을 받은 뒤에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였는데, 임금이 갓을 쓰고 앉아 〈홍봉한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병이 났는데도 억지로 이렇게 하는 것은 원량으로 하여금 〈몸가짐을〉 무겁게 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卿)의 반열에 있으면서부터 이미 경의 충성을 다하는 정성을 알았지만 오늘날에야 경의 충성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3월 30일 기사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당감(唐鑑)》을 읽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건성(建成)에게 태종(太宗)을 제거하도록 권한 것087)  은 매우 잘못이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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