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경오
구선복(具善復)에게 명하여 명릉(明陵) 꾀꼬리봉[鶯峰]에 보토(補土)하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호조의 쌀 3백 석(石)과 병조의 무명[木] 2동(同)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전 행 대제학(行大提學) 윤봉조(尹鳳朝)가 졸(卒)하였다. 윤봉조의 자(字)는 명숙(鳴叔)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총명하고 민첩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태학사(太學士) 김진규(金鎭圭)가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면 곧 다스려진다.[亂極當治]’는 제목으로 제생(諸生)에게 책문(策文)으로 시험을 보였는데, 윤봉조가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제(賜第)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응교(應敎)가 되었다. 영조[英宗] 원년(元年)에 승지가 되었는데, 임금이 숙종조(肅宗朝)의 구신(舊臣)을 등용하려고 하자 윤봉조가 상언(上言)하여 아무개는 아무 벼슬을 할 만하다고 하였으므로, 영조가 이것 때문에 윤봉조를 부족하게 여기고 점차로 그를 소원하게 여겼다. 윤봉조가 이조 참의가 되어서는 방만규(方萬規)의 상소(上疏)에 참여하고 연좌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삭주(朔州)로 귀양을 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홍문 제학으로 추천하였으나, 임금이 기용하지 않았다. 그 뒤에 대제학으로 수천(首薦)하였지만 임금이 또 기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광좌(李光佐)가 국가의 정치를 마음대로 할 때는 윤봉조가 정의현(旌義縣)으로 귀양을 갔고 오래 있다가 석방되었으며, 여러 차례 홍문관 제학에 제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조관빈(趙觀彬)이 졸(卒)하자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그전에 추천했던 조관빈과 윤봉조는 대제학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하니, 그제야 전망(前望)으로 대제학을 삼았지만 윤봉조가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며, 또 남유용(南有容)을 추천하여 대제학으로 삼도록 상소하였다. 윤봉조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기사(耆社)088) 에 들어가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82세였다. 윤봉조는 글을 지음에 막히지 않고 써내려 갔으며 상소문과 차자에 뛰어났다.
4월 2일 신미
왕세손(王世孫)이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유신(儒臣)과 승지를 불러 《당감(唐鑑)》을 강독하게 하고, 선전관(宣傳官)을 시켜서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의 농사 상황을 가서 살피도록 하였다.
4월 3일 임신
하교하기를,
"왕세손이 직숙(直宿)의 철수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학문을 강독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여러 신하들이겠는가? 내일부터 전례대로 개좌(開坐)하도록 하라."
하고, 유신에게 《당감》을 강독하도록 명하였다.
4월 4일 계유
유신을 불러 《당감》을 강독하게 하였다.
4월 6일 을해
매상(昧爽)089) 에 상기(霜氣)가 있었다.
정축년090) 《하성일기(下城日記)》를 들여오도록 명하여, 승지로 하여금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는 계해년091) 《반정일기(反正日記)》를 읽도록 하였고 오늘은 정축년 《하성일기》를 읽도록 하여,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는 것은 대체로 깊은 의미가 있어서이다. 이미 반정을 하였고 또 하성을 하였으니, 성조(聖祖)에게는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탄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에 있어서 의당 정축년의 사건을 잊지 않고 오직 황하(黃河)가 맑아지기를 바랐었지만 장차 초목(草木)과 마찬가지로 썩어버리는 존재가 될 터인데, 이런 상태로 국사(國事)와 민심(民心)을 다시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스스로 힘써야 마땅하다."
하였다.
4월 7일 병자
안윤행(安允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특별히 내국 제조(內局提調) 남태제(南泰齊)에게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자급(資級)을 더하고, 부제조 조명채(曹命采)에게는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자급을 더하게 하였는데, 약원(藥院)에서의 노고 때문이었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임금의 환후(患候)가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는 것으로 위로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아래로는 반포하도록 청하니, 하교하기를,
"아! 대소(大小)의 신공(臣工)과 방백(方伯)·수재(守宰)는 〈열성(列聖)의〉 신명(神明)이 오르내리는 덕의(德意)를 우러러 체득하고 또한 과궁(寡躬)의 고심(苦心)함을 생각하여, 아주 깨끗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 나라를 보필하고 부지런히 힘써 무휼(撫恤)하여 우리 백성을 보호하도록 하라. 번문(繁文)을 생략하고 선포 유시함에 있어 심복(心腹)을 다해 면려하고 신칙하노니 이 뜻을 공경히 체득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이 내용을 초10일에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게 하라."
하였다.
이심원(李心源)을 승지로 삼았다. 이조 판서 한익모(韓翼謨)를 특별히 파면하였는데, 전임 이조 판서의 일로 자기 주장을 고집하였으며, 이미 명을 사절(謝絶)하였고 또 위패(違牌)하였기 때문이었다.
4월 8일 정축
매상(昧爽)에 상기(霜氣)가 있었다.
홍계희(洪啓禧)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제도(諸道)의 장문(狀聞)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앙청(仰請)하기를,
"동래(東萊)에 허위로 기록되어 전해 오는 공목(公木)092) 15동(同) 15필(疋)과 공작미(公作米)093) 5천 2백 50석(石)에 대하여 바로잡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특별히 건명문(建明門)에서 권정례(權停禮)로 반교(頒敎)하도록 명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게 하였는데,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청한 것으로 인해서였다.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4월 9일 무인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앞서 일식(日食)이나 월식(月食)이 하늘가에서 나타날 경우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았습니다. 다가오는 4월 15일 갑신일(甲申日)의 새벽에 월식을 바라보는 일은 해와 달이 뜨는 시간과 서로 가까워 궐정(闕庭)에서 바라보는 것은 실제로 상세히 살펴보기가 어려우니 별도로 관원 두 사람을 정하여 남산(南山)에 올라가서 살피도록 하고, 달이 질 무렵에 만일 이지러지는 형상이 있으면 화전(火箭)을 쏘아 서로 알리도록 해서 구식(救食)하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당감(唐鑑)》을 강독하게 하였다.
연천현(漣川縣)에 우박의 재해가 있었는데, 두 살난 어린아이가 우박에 맞아 다쳤으며 그로 인해 죽었다.
4월 10일 기묘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권정례(權停禮)로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처럼 회복하였다는 대유(大諭)를 선포하였다.
헌부 【지평 이재현(李載顯)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대정(大庭)에서 선유(宣諭)하던 날에 참석하지 않은 시종(侍從)에 대하여 초선(抄選)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그리고 만경 현령(萬頃縣令) 이익보(李益普)는 벼슬하기 전부터 본래 광패(狂悖)하다고 일컬어졌으며, 벼슬아치의 명부에 기재됨에 이르러서는 비루하고 잗닮이 더욱 드러났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그리고 여주 목사(驪州牧使) 조제태(趙濟泰)는 본래 탐욕스러운 자로 금고(禁錮)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인데 여태까지의 대평(臺評)이 그가 옛날의 습성(習性)을 고치지 않았는데도 공의(公議)가 있지 않아 지금까지 모람되게 버틴다고 하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는데, 조제태에 대해서는 지나간 일은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논한 바가 지나치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임금이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상량(金相良)을 교동부(喬桐府)에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조련(操鍊) 때에 황주의 속오군(束伍軍)094) 으로 점검에 빠진 자가 많이 있다고 하면서 파직하도록 장청(狀請)하였고, 황해 감사(黃海監司)는 잘 다스린다는 것으로 유임[仍任]시킬 것을 장청하니, 임금이 군사 행정[戎政]은 엄격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명이 있었다.
우의정이 겸임하고 있던 선혜 당상직(宣惠堂上職)을 특별히 체임을 허락하도록 명하고, 홍계희(洪啓禧)를 차하(差下)하였는데, 홍봉한(洪鳳漢)이 추천하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꿈 속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보고 그의 봉사인(奉祀人)을 채용하도록 명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기송(起送)하게 하였다.
4월 11일 경진
한광조(韓光肇)를 이조 참의로, 최진해(崔鎭海)를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의 특별 하교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판서 김상복(金相福)의 정사로 제배한 것이다.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인 고신겸(高信謙)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삼략(三略) 및 진법(陣法)을 외우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나의 감회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충렬(忠烈)과 의백(毅魄)이 백세(百歲)토록 서로 감동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전조(銓曹)로 하여금 우선 선전관(宣傳官)으로 복직(復職)시키고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하게 하였으며, 봉사손(奉祀孫) 전 참봉(參奉) 고제(高晢)도 전조로 하여금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즉시 조용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익보(李益普)에 대한 일은 원량(元良)이 이미 〈아뢴 대로〉 따랐으므로, 내가 논할 것이 없다. 그리고 조제태(趙濟泰)에 대해서는 말이 비록 지나치다 하더라도 두 차례나 탄핵을 받았으니, 행공(行公)하기는 어렵다. 우선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늘부터는 약방(藥房)에서 윤번으로 직숙(直宿)하도록 명하였다.
4월 12일 신사
임금이 새로 임명한 병사(兵使)와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사성 서명응(徐命膺)에게는 특별히 월봉 1등(越俸一等)을 하도록 하고, 장의(掌議) 성덕조(成德朝)에게는 3년 동안 과거 시험을 정지하게 하며, 도승지 조명채(曹命采)는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대사성이 강회(講會)를 시행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경계하는 하교를 내리자 조명채가 병(病)이 있다는 것으로 정단(呈單)하여 우러러 고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종신(宗臣)인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졸(卒)하였다.
4월 13일 임오
용인 현령(龍仁縣令) 유한갈(兪漢葛)에게 아마(兒馬)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선전관(宣傳官)이 적간(摘奸)했을 때 속오군(束伍軍)에 빠진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당감(唐鑑)》을 강독하게 하였다. 종신(宗臣)·훈신(勳臣)·기사신(耆社臣)으로 나이 70세인 사람에게는 특별히 의자(衣資)를 내려 주도록 하고, 봉조하(奉朝賀) 원경하(元景夏)에게는 약물(藥物)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낙창군(洛昌君)에 대한 은졸 전교(隱卒傳敎)를 쓰게 하고 해서(該署)로 하여금 널 만들 재목을 즉시 가려서 보내도록 하였다.
4월 14일 계미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과 선혜 당상(宣惠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영휘(李永暉)·이은(李溵)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5일 갑신
월식(月食)을 하였다.
4월 16일 을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의 제향(祭享)에 사용하는 시목(柴木)095) 은 파주 시장(坡州柴場)을 혁파한 뒤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해마다 돈으로 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그런데 사재감(司宰監)의 소목(小木)의 원공(元貢) 가운데 해마다 남는 것이 거의 10만 근(斤)이 넘으니, 이것으로 넉넉하게 마련하여 진배(進排)하도록 하게 하고, 호조와 선혜청에서 대신 보내던 돈은 보내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안윤행(安允行)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은 한번 나오게 되면 성실히 이행하기를 금석(金石)처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작년 이어(移御)하는 처음에는 3개월로 기한을 정하였습니다만, 지금 벌써 한 해가 지났으며, 지난번 동궁(東宮)이 진현(進見)하도록 하라는 영(令)이 있었으나 성상(聖上)께서 오직 〈동궁의〉 병이 날까 우려하는 마음으로 또 정지하도록 하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신은 그윽이 염려스럽고 민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비록 거꾸로 뒤집힌다 하더라도 천하에 어찌 아비가 가서 자식을 보는 이치가 있겠는가? 인군(人君)의 동정(動靜)을 신자(臣子)가 어떻게 감히 지휘(指揮)하는가? 엄중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김노진(金魯鎭)·이상지(李商芝)가 말하기를,
"대간(大諫)096) 이 진달한 바가 비록 잘못한 데에 관계되기는 하지만 언자(言者)가 죄를 얻음은 아마도 포용(包容)하는 도리에 흠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그 명을 정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4월 17일 병술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에게 아울러 시호(諡號)를 내렸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주청(奏請)하기를,
"이천보(李天輔)의 처(妻) 정경 부인(貞敬夫人)의 상사(喪事)에 조정에서 〈상비(喪費)를〉 조급(助給)하도록 특별히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지평 이재현(李載顯)이 황해 병사(黃海兵使) 이한흥(李漢興)을 파직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그 본목(本牧)의 군액(軍額)에 빠뜨려진 액수(額數)가 많았는데도 자신이 수신(帥臣)이 되어 단속을 잘못했기 때문이었다. 홍봉한(洪鳳漢)이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문원(文苑)097) 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혐의스럽게 여긴다는 뜻으로 앙달(仰達)하니, 체임(遞任)하도록 허락하였다.
4월 19일 무자
우박이 내렸다. 밤에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안윤행(安允行)이 당연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입장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면서 도리어 이같은 해괴한 일을 하니, 비록 그 임금에게는 부끄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유독 이최중(李最中)에게도 부끄럽지 않겠는가? 만약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지 않으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장차 무너질 터이니, 전해지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수부(水部) 외에는 검의(檢擬)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교서(敎書)를 베껴서 반포(頒布)하도록 이미 규정을 정하였다면, 비록 대관(大官)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없애도록 청하기가 어려울 터인데, 더구나 소관(小官)이겠는가? 전 수찬(修撰) 이상지(李商芝)를 금천현(衿川縣)에다 투비(投畀)하고 삼경(三經)098) 을 모두 외우게 한 뒤에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강경(講經)에 능통(能通)한 사람에 대해서는 정시(庭試)에 응시를 허락하도록 하고, 방목(榜目)을 입계(入啓)하여 모두 친시(親試)099) 한 뒤에, 잘못하는 자는 해당 시관(試官) 및 거자(擧子)에게 사정(私情)을 쓴 형률(刑律)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京畿)의 고을에는 우박의 재해가 있었고, 호서(湖西)에는 서리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다.
4월 20일 기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경기 고을의 종량(種粮)은 진휼청(賑恤廳)과 경창(京倉)의 쌀 2천 석(石)을 획급(劃給)하게 하고 그것을 균역청(均役廳)에서 구관(句管)하도록 하며 남도[南中]에 있는 군작미(軍作米)를 그 숫자대로 운반하여 진휼청에 도로 갚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진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동궁(東宮)의 진현(進見)하는 것에 대한 일입니다. 며칠 전에 안윤행(安允行)의 아뢴 바에 무슨 주착(做錯)100) 이 있었기에 죄를 얻는 데에 이른 것입니까? 그리고 양궁(兩宮)이 따로 거처하는 것은 전대에 없었던 바이며, 동궁에서 진현하지 못한 지가 지금 몇 달이 되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뭇 신하들에게는 효제(孝悌)하는 도리로써 가르치지 않음이 없으면서 유독 소조(小朝)에만 진현하는 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홍계희의 말이 단단(斷斷)한 혈성[血忱]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면(裏面)을 모르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홍계희가 말하기를,
"신 등이 바야흐로 소조에 구대(求對)하려고 하면서 어리석은 충정(衷情)이 격동하는 바가 있어 우선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에게 진달할 바가 아니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이 바라는 것은 단지 송(宋)나라를 복되게 할 하늘에 있으니101) , 전하께서도 그것을 장차 어떻게 하겠으며 신 등 또한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4월 21일 경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무장(武將)과 능마아 당상(能麽兒堂上)을 인견(引見)하고, 대내(大內)에 입직(入直)한 무신(武臣)을 친시(親試)하였다.
임금이 거듭 주금(酒禁)을 엄중히 하면서 하교하기를,
"각 궁(各宮)과 내수사(內需司)에서 만약 범(犯)하는 바가 있으면 차지 중관(次知中官)에게는 월봉(越俸) 3등을 하고, 누룩[麴]을 맡은 궁노(宮奴)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장(杖) 백 대를 집행하게 하며, 내사(內司)의 차지(次知)는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가장(家長)을 다스리는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2일 신묘
박사해(朴師海)·홍준해(洪準海)를 승지로 삼았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무릇 추증(追贈)은 계하(啓下)한 뒤에 해조(該曹)에서 번번이 의정부와 양사(兩司)에 통보하게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관학 유생(館學儒生) 안형(安衡)·이헌(李)·원계하(元啓夏) 등을 인대(引對)하였다. 이때 임금이 정원에서 떠들썩한 것으로 인하여 유생들의 글이 정원에 이르렀음을 물어서 알고는 이어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또 대신(大臣)의 입시를 명하였으며, 즉시 하궐(下闕)102) 의 입직 승지(入直承旨)로 하여금 유생을 거느리고 입대(入對)하여 답(答)을 받게 하자, 승지 홍준해(洪準海)가 유생의 상서(上書)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춘방(春坊) 정창성(鄭昌聖)이 말하기를,
"관학 유생의 글은 〈저하(邸下)께서〉 유람하러 드나드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여항(閭巷)에서 근거없이 지껄이는 말이 있어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고, 춘방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아무리 근거없이 지껄이는 말이라 하더라도 저하께서 불러들임이 있게 되었으니, 지금 〈그러한 말들을〉 없어지게 하는 도리는 오직 날마다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고 날마다 비국의 재신(宰臣)을 접견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바가 매우 훌륭하니, 소견(召見)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유생(儒生)의 글에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 강독을 치워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궁료(宮僚)를 접견하지 않은 지도 역시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 좌우(左右)에서 모시는 자는 오직 환관(宦官)이나 액속(掖屬)들이니, 반드시 말을 타고 달리며 사냥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재화(財貨)를 늘리며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드나들며 유람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4월 23일 임진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北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안윤행(安允行)이 아뢴 바는 놀라운 일일 뿐만이 아니고 중외(中外)의 의혹(疑惑)을 열게 하였다. 홍계희(洪啓禧)가 원량(元良)에게 청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에게 아뢰었으니,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었다. 아! 비록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어찌 깊이 헤아리지 않았는가? 이렇게 한 것 때문에 장의(掌議) 이준상(李駿祥)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억지로 떨쳐버리고 나에게 청하려고 이론(異論)을 내세우며 이어서 행공(行公)하지 않는다. 요즈음 장의가 머뭇거리는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았으니, 안윤행은 삭출(削黜)하고, 홍계희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못하게 하며, 이준상은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여 중외의 의혹을 풀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갑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사족(士族)의 부녀(婦女)가 주금(酒禁)을 범(犯)했다는 것으로 정배(定配)하는 것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길 만하다고 우러러 진달하니, 한국증(韓國曾)의 처(妻)에 대하여 특별히 분간(分揀)103) 하도록 명하였다.
구선복(具善復)이 명릉(明陵)의 벌고개[蜂峴]를 보토(補土)한 뒤에 돌아와서 아뢰니, 간역(看役)인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 및 능관(陵官) 이하에게 모두 상전(賞典)을 베풀었다.
어제 권학문(御製勸學文) 한 편(篇)으로 청금(靑衿)들에게 효유(曉諭)하고 또 한 장(障)을 써서 당중(堂中)에 걸도록 명하였다.
4월 26일 을미
이심원(李心源)을 대사간으로, 윤급(尹汲)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4월 28일 정유
장령 이보관(李普觀)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들으니, 요즈음 저하(邸下)께서 자못 노는 것을 일삼으며 자주 세자궁[震邸]을 떠난다는 시끄러운 말들이 있어 이루 들을 수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감히 떠도는 말을 가지고 그것을 모두 믿을 만하다고 말하지 못하겠지만, 또한 감히 모두 근거할 바가 없다는 데로 돌려 버리지도 못하겠습니다. 아! 저하 한 몸에 관계된 바와 부담한 것이 어떠합니까? 주창(主鬯)104) 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국사를 대리(代理)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3백 년 동안 이어온 큰 기업(基業)을 부탁받은 처지이며, 억만(億萬) 백성들이 우러러 의지하는 것으로 운명을 삼아야 하니, 한번의 동정(動靜)과 운위(云爲)의 득실(得失)에서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의 기틀이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바입니다. 저하께서 아무리 스스로 경솔히 하고 염려하지 않으려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하답하기를,
"나의 고질병으로 인하여 성후(聖候)에 문안도 못드리고 나라의 경사(慶事)에도 참여하지 못하여 마음이 매우 초조하고 민망스러워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금 권면하는 바를 보니 충정(衷情)에서 나온 것이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고치고 없었으면 더 힘을 써서 더욱 경계하고 반성하겠다."
하였다.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황만석(黃萬錫) 등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셔서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하는 장소를 옮기고 대소(大小)의 관원이 초조하게 애를 태우며 중외(中外)에서 놀라고 허둥대는데도 유독 저하(邸下)께서만 〈어버이의 환후 중에 자식이〉 약(藥)을 맛보는 예(禮)를 빠뜨렸습니다. 대저 하늘이 종팽(宗祊)105) 을 도와 성상의 옥체(玉體)가 편안하게 회복되어서는 신인(神人)이 서로 기뻐하며 팔도[八域]가 함께 경사스러워하는데, 유독 저하께서만 하례(賀禮)를 드리는 의식을 빠뜨리셨습니다. 모르기는 합니다만, 저하께서 무슨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대저 인자(人子)의 직분은 오직 마땅히 효도하는 도리에 이르도록 할 따름이고 부모(父母)가 자신의 몸을 염려한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예(禮)를 편리하게 폐기하며 단지 부모의 명이라고 하여 어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신 등의 어리석음으로 가만히 오늘날의 일을 생각하건대, 저하께서 대조(大朝)의 명을 얻지 못했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면서 오직 저하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여김은 부당하니, 품명(稟命)을 기다리지 말고 빨리 진현(進見)하는 예를 행함이 옳습니다.
아! 삼공(三公)은 사보(師保)의 임무를 겸하였지만 팔짱을 낀 채 남보듯하며 바로잡아 구제하려고 하지 않으며, 지위가 재상(宰相)의 열에 있으면서 진언(進言)하는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대각(臺閣)은 직임이 말을 해야 하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이는 맹자(孟子)가 이른바, ‘말을 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벽을 뚫거나 담을 뛰어넘는 좀도둑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고질병으로 인하여 약(藥)을 맛보는 의식과 하례를 드리는 의절(儀節)을 모두 잘 행하지 못하였다. 이는 나의 불효(不孝)와 불초(不肖)함 때문이니 초조하게 애를 태우며 송구스럽고 민망히 여기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데, 지금 장보(章甫)의 글을 보니 내용이 매우 절실하고 극진하여 가상(嘉賞)하는 가운데도 실로 마음에 부끄럽다. 어떻게 마음과 뼛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유생이 상서한 글 뜻을 가지고 의금부에서 명을 기다리니, 하령하기를,
"대신은 입대(入對)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면유(面諭)할 일이 있으니, 대신은 입대(入對)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입시(入侍)했던 입직 유신(入直儒臣) 김노진(金魯鎭)·이석재(李碩載)가 유생의 글 가운데 ‘벽을 뚫거나 담을 뛰어넘는 좀도둑과 같은 부류라.’는 등의 말로써 글을 올려 진달하고 앞질러 나갔다. 홍봉한(洪鳳漢)이 입대(入對)하여 빈대(賓對)와 강학(講學)과 진현(進見) 등의 말을 가지고 우러러 권면하니, 하령(下令)하기를,
"현재로서의 진현은 한 시각이라도 매우 급박하지만 나의 고질병으로 인하여 대조(大朝)께서 병이 날까 우려하는 것으로 간측(懇惻)하게 하교(下敎)하셨고 또 개강(開講)하고 빈대하라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진현하는 도리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받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비록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었다 하더라도 우선 억지로라도 춘방(春坊)을 불러 강독(講讀)을 하되 모름지기 증세(症勢)를 관찰하여 그 예모(禮貌)를 정성스럽게 할 터이니, 대신 및 당상(堂上)가운데 품달(稟達)할 사람이 있으면 하령을 기다려 입대하도록 하라."
하매, 홍봉한이 입대 한 뒤에 돌아와 대조께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진현과 강대(講對)로 구속(拘束)한다면 혹시라도 은미한 것을 격동시켜 풍자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강관(講官)을 불러 《당감(唐鑑)》을 강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6월 (1) | 2025.10.08 |
|---|---|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5월 (0) | 2025.10.08 |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3월 (0) | 2025.10.08 |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2월 (0) | 2025.10.08 |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1월 (0) | 202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