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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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기해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일을 품(稟)하는 당상(堂上)을 인접(引接)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각 능관(陵官)이 보고한 것을 가지고 우러러 청하기를,
"능군(陵軍)에 대한 복호(復戶)106)  를 을해년107)  과 무인년108)  의 전례대로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급대(給代)하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옳다."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경옥(京獄)의 죄수가 50여 명에 이르니 분명하게 조사하여 빨리 완결하도록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결말(結末)을 빨리 내는 것은 좌기(坐起)를 자주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각별히 신칙함이 옳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차대(次對)를 행하지 아니하고 단지 대신과 일을 품하는 당상(堂上)만 입대(入對)하게 하는 것은 대체로 사례를 갖추지 않으려고 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성상의 하교를 우러러 받들려는 뜻 또한 그 가운데 있습니다. 연달아 강학(講學)하고 비국 당상을 자주 접견하여 현 사대부(賢士大夫)를 불러다 인접하는 때가 많게 되면 마음은 온화해지고 기운은 평안하게 되어 예후(睿候)가 점차로 차도가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위로 성상(聖上)께서 〈왕세자가〉 병이 날까 염려하는 마음을 느슨하게 한다면 저절로 진현(進見)하게 될 터이니, 진현하는 것을 조급히 여기지 마소서. 비록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었다 하더라도 강관(講官)과 비국 당상을 소접(召接)하기를 혹시라도 간단(間斷)하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진달한 바가 성실(誠實)하니, 마땅히 명념(銘念)하겠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 뒤로의 입대(入對)는 한 달 내에 형세로 보아 세 번 행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수(數)를 정한다면 편리하게 차대(次對)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10일이나 20일이나 그믐날로 규정을 삼지 않는다면 어찌 차대에 대한 혐의스러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특별히 신 등으로 하여금 간혹 자하(自下)하여 와서 모이게 하는 것도 방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자하하여 와서 모이는 것이 더욱 좋겠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비록 일차(日次)는 아니라 하더라도 당연히 제 의인(諸醫人)과 같이 입진(入診)하여 사대(賜對)하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좋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5월 2일 경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이어서 대신을 인견하고, 임금이 일을 품하는 당상(堂上)에게 입대 일기초(入對日記草)를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그날은 이미 절실하게 진계(陳戒)한 내용이 없어 기주(記注) 또한 매우 초초(草草)하고 소략(疎略)하였다. 가지고 들어오라는 명을 받듦에 이르러 홍봉한(洪鳳漢)이 비국(備局)의 서리(書吏)를 불러 마음대로 불러주며 쓰도록 하고는 제재(諸宰)를 돌아다보며,
"이것은 바로 변례(變禮)이니 모두 각자가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이 성실(誠實)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는가?

 

구윤옥(具允鈺)·정순검(鄭純儉)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에게 명하여 군주(郡主)의 제택(第宅) 값을 9백 냥(兩)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가 소조(小朝)에 구대(求對)하여 우러러 진달하기를,
"저하(邸下)께서 비록 대궐 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중외(中外)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여러날 동안 길을 떠난 경우이겠습니까? 서관(西關)은 길이 피경(彼境)에 접해 있는데, 그 전해지는 말이 장차 어느 곳까지 이르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내가 이미 후회하고 있는데, 명념(銘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5월 3일 신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경상 좌수사의 장본(狀本)을 가지고 앙청하기를,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영부(領付)는, 평상시의 경우는 그 조용(調用)한 것을 따라 수령(守令)이 영부하며, 함께 조련(操鍊)하는 시기와 같은 경우엔 수군의 경우는 수령이 영부하고, 육군의 경우는 좌수(座首)가 영부하도록 하며, 전선(戰船)은 3년에 한 번 고치도록 규칙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청하기를,
"영남(嶺南) 사람인 전 현감(縣監) 권정택(權正宅)은 견복(甄復)하고, 전 부제학(副提學) 정실(鄭宲)은 수용(收用)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윤득우(尹得雨)·이존중(李存中)은 수령으로 조용(調用)하고, 이석심(李錫心)은 흉역(凶逆)의 외손서(外孫婿)라는 것으로 서경(署經)109)  에 구애를 받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학유(學儒) 이명원(李命源)에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중 한 책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는데, 이명원이 황만석(黃萬錫)과 더불어 글을 올려 진달하고 입시(入侍)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그것을 가상(嘉尙)하게 여겨 이러한 시상(施賞)이 있었다.

 

5월 4일 임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5월 5일 계묘

검은 구름 한 줄기가 곤방(坤方)110)  에서 나와 간방(艮方)111)  을 곧장 가리켰는데, 너비는 한 자[尺]쯤 되었고 길이는 10여 장(丈)이었으며, 한참 있다가 없어졌다.

 

정언 서유원(徐有元)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념(睿念)이 갑자기 변하여 명지(名旨)를 환발(渙發)하시고 그날로 경연(經筵)을 열어 신린(臣隣)을 나아가 접견하시니, 대성인(大聖人)이 허물을 고치고 착한 데로 옮겨감이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빠름을 볼 수 있는데, 우리 나라가 거의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더욱 노력을 가하여 뜻을 세우는 경우는 화살을 과녁에다 맞히는 것처럼 하고 학문을 강론할 경우는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처럼 하여, 무릇 일욕(逸慾)이 싹트고 분노(忿怒)가 발할 때에는 반드시 산처럼 억눌러 버리고 못처럼 막아 버리며, 조용히 혼자 생활할 때에도 반드시 정치에 해로운 것이 무슨 일이며 마음을 고혹(蠱惑)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모두 버리고 물리치도록 힘을 써서 허물을 거듭하거나 자주 반복하는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우려하고 아끼며 힘쓰도록 진달함이 더욱 절실하고 극진하니, 더욱 깊이 유념하고 매우 반성하겠다."
하였다.

 

5월 6일 갑진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능군(陵軍)에 대해서는 이미 본관(本官)에서 대신 정하는 규정이 있으니, 보미(保米)는 본관에서 봉납(捧納)하도록 함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관(陵官)은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여, 수령으로 1년 동안 바치지 못한 자는 추고하도록 청하고, 2년 동안 바치지 못한 자는 해유(解由)에 구애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석강(夕講)을 명하였다.

 

5월 7일 을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통신사(通信使)가 갈 때에 소용되는 인삼(人蔘) 15근(斤)을 북도(北道)의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에 나누어 정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본 뒤에 그대로 따랐다. 홍봉한이 또 관서(關西)의 세소미(稅小米) 2만 석(石)과 별향고 전(別餉庫錢) 2만 냥(兩)과 무명[木] 1백 동(同)을 구획(區劃)하여 그것을 은(銀)으로 환산하여 본도(本道)의 인삼 값으로 내려 주게 하고, 그 나머지는 앞으로 편리함에 따라 북도의 인삼 값으로 옮겨서 보충하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옥당(玉堂) 김종정(金鍾正)이 전임지(前任地)였던 의성(義城)에 있을 때에 사옹원(司饔院)의 퇴목(退木)을 돈으로 바친 폐단을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해당 당상관은 파직하고 해당 낭관은 도태시켜 버리도록 명하였다.

 

운산군(雲山郡)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싸우다가 시어머니가 목을 매어 죽은 경우가 있었는데, 임금이 그 추안(推案)을 열람하고 별도로 김종정(金鍾正)을 파견하여 그 며느리와 아들을 엄중히 조사하여 형배(刑配)하도록 하였다가, 그 뒤에 어사(御史)가 떠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본군(本郡)의 수령으로 하여금 형배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어사의 엄중한 형벌을 염려해서이다.

 

이심원(李心源)을 승지로 삼았다.

 

5월 8일 병오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대사성(大司成) 서명응(徐命膺)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듣건대, 저하(邸下)께서 뉘우치고 깨달은 뒤에 여러 신하들이 유독 관서(關西)에 행차한 한 가지 일을 글에 올려서 적기를 감히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아! 지나칩니다. 지금 저하께서 깊은 궁궐 속에 생활하면서 개미 같은 미물도 밟지 않고 다니는 데 대하여 감격하며 떠받들지 않는 이가 없지만, 희극(戱劇)을 범(犯)하면서부터는 외방의 사람들이 미워하며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인심(人心)의 신령함은 속일 만한 것이 아니며 신의(信義)는 두렵게 여길 만합니다. 더구나 이번의 관서로 행차한 한 사건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인데도 유독 저하 앞에서만은 가리고 숨기니, 이것이 오히려 훌륭한 명예와 좋은 명성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저하께서 한번 뉘우치고 깨달은 뒤에 지난날의 허물 보기를 정말 하늘의 뜬구름같이 여기며 반드시 스스로 가소롭게 여기고서 오직 당연히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앞에서 외도록 하여 경계[箴儆]를 삼도록 하는 것이 더욱 뉘우치며 깨닫는 진실함과 간절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천리(千里)를 갔다가 돌아오는 예체(睿體)인데도 아직까지 지척(咫尺)에서의 진현(進見)하는 예(禮)를 행하지 못했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린 예후(睿候)인데도 약원(藥院)에서의 기거하는 의절(儀節)을 걷어치우지 못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이것으로 저하의 뉘우침과 깨달음이 미진(未盡)한 뉘우침과 깨달음이라고 의심을 합니다. 신이 아무리 저하를 위하여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변명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그 의혹을 풀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관서로 행차한 때에는 반드시 근신[近習]으로 종용하며 미혹되게 동요하도록 한 자가 있었을 것이며, 관서로 행차한 뒤에 반드시 내시로서 대궐에 있으면서 비답(批答)을 대신 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환관[刑餘]이 감히 스스로 한 번 죽는 것을 아껴서 예지(睿志)를 현혹시키고 조정(朝政)에 간예(干預)한 것은 그 죄가 구사량(仇士良)112)  보다 지나침이 있습니다. 저하께서 이미 뉘우치고 깨달은 실상이 있다면, 돌아보건대 어찌하여 이 무리들을 아깝게 여기십니까? 당연히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그 죄를 분명히 밝히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령하기를,
"내가 이미 뉘우치고 깨달았으니, 뉘우치고 깨닫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런데 서명응(徐命膺)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 또 어찌하여 글을 올렸는가?"
하였는데,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서명응의 글은 참으로 지나쳤습니다. 신이 대신으로 욕되게 있으면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저하의 심사(心事)를 알도록 하지 못한 신의 죄 만번 죽어야 합니다."
하였으며, 유신(儒臣) 김종정(金鍾正)·이석재(李碩載)·김노진(金魯鎭)과 헌신(憲臣) 이진형(李鎭衡)이 소조(小朝)에 구대(求對)하였다. 김 종정이 말하기를,
"지난 역사를 낱낱이 관찰하여 보면 인군(人君)의 미행(微行)은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였었는데, 더구나 왕세자의 지위[儲位]에 있으면서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된 데에 이르렀다는 것은 더욱 역사 책에도 없는 바입니다. 저하께서는 열성조(列聖朝)의 태평 성대를 계승한 나머지 마음대로 욕심나는 대로 드나들면서 실컷 놀기를 어찌 갑작스럽게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입니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거취(去就)와 향배(向背)의 기틀은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지금 다행스럽게 예지(睿旨)가 지극히 간절하게 깊이 뉘우치고 깨달으면서도 오히려 철저하고 통쾌하게 할 수 없으니, 군정(群情)이 어찌 마음속으로 뉘우쳤다고 믿겠습니까? 빨리 자신을 책망하는 영(令)을 내려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확실히 뉘우치고 깨달은 뜻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말은 옳다. 즉석에서 영(令)을 내린다 하더라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다만 여기에는 고집하는 것이 있으니, 한갓 말로서만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면 한갓 형식적인 데로 돌아갈 것이기에, 성실한 마음으로 고치려고 한다."
하자, 김종정이 말하기를,
"현 사대부(賢士大夫)는 날마다 소원(疏遠)해지고 좌우의 근신[近習]은 날마다 친근해지며 무뢰(無賴)한 부류들이 종용하고 말을 꾸며 이끌어서 지난날의 사건이 있도록 하였으니, 이런 등의 부류들은 의당 엄중히 배척을 더하여 뒷날의 폐단을 영원히 끊어버리소서. 지금부터 이 뒤로는 법가(法家)의 보필하는 인사(人士)를 조석(朝夕)으로 가까이하여 충성스런 말과 곧은 논의는 마음을 비우고 강연(講筵)에서 받아들이며, 지극한 뜻으로 빈대(賓對)에서 탐구하고 토론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물으며, 놀기를 좋아하고 게으르거나 오만한 행동으로 고혹(蠱惑)되는 바가 없도록 하고, 드나들며 실컷 노는 것에 마음이 끌리거나 동요되는 바가 없도록 해서 재물과 여색 좋아하는 것을 의리(義理)로써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바꾸며, 형벌하고 죽이는 누(累)를 천지(天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옮기도록 하여, 일마다 곳마다 통렬하게 사욕(私欲)을 이겨내고 사념(私念)을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요즈음 소대(召對)에서 발문(發問)한 바가 많았던 것 또한 잘못을 뉘우치는 하나의 단서이다."
하자, 김종정이 말하기를,
"며칠 전 열 세 사람의 비국 당상이 등대(登對)하였을 때는 잘못된 일이 있었던 초기였는데, 서로 돌아다보며 잠자코 있었으니, 그래도 조정에 인물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리고 삼도(三道)의 도신(道臣)·수신(帥臣)과 구경(舊京)113)  에 머물고 있는 신하들은 옛 사람의 단앙(斷鞅)의 의리114)  는 본받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는 척 모르는 척하는 사이에다 방치해 두고서 구차스럽게 임시 방편으로 둘러대고 모호(模糊)하게 받들었으니, 〈신하로서의〉 분수와 의리는 땅을 쓸어버린 듯합니다."
하니, 춘방(春坊) 이진형은 말하기를,
"이번 사건은 신이 차라리 죽어버려 몰랐으면 하는 심정이니, 지금으로서 편안하게 진정시키는 방법은 오직 뉘우치고 깨달음을 환하게 보이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저하(邸下)께서 결단코 스스로 법도가 아닌 데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임을 본래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근신[近習]과 무뢰배(無賴輩)로서 종용하여 인도한 자를 가려 유사(有司)에게 회부해서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고, 그 사이에 대소(大小)의 공사(公事)를 대신 집행하면서 달하(達下)한 자가 누구입니까? 청컨대 가려서 왕옥(王獄)에 회부하여 전형(典刑)을 명백히 밝히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관서(關西)로 행차할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통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혹시 나를 모를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자, 이진형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저하께서 잡희(雜戱)로 날을 보냈다고 하는데, 학문을 강론하고 정무를 부지런히 하는 외에 어떻게 다른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활쏘고 말을 달리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그것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한 사람 병사의 능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고, 김종정은 말하기를,
"대조(大朝)의 하교를 우러러 체득하여 강연(講筵)을 부지런히 열고 빈대(賓對)를 자주 행한 뒤에 예후(睿候)가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고 여겨질 경우 진현(進見)하는 예(禮)를 차례대로 거행한다면, 어찌 청(請)을 얻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가납(嘉納)하겠다."
하였다. 처음에 김종정이 맨 먼저 구대(求對)하는 논의를 발설하였으나 빈객(賓客) 윤급(尹汲) 및 여러 사람들과 끝까지 의사가 귀일(歸一)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종정이 다만 관료(館僚)와 헌신(憲臣)과 입대(入對)하여 의견을 충분히 말한 것이다.

 

5월 9일 정미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대신과 일을 품하는 당상(堂上)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차대(次對)를 자하 거행(自下擧行)하도록 청대(請對)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되, 진현(進見)하는 청을 얻기 전에 예를 갖추어 행하는 것은 실로 미안(未安)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품달할 일이 있으면 와서 대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0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황단(皇壇)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선무사(宣武祠)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효묘(孝廟)께서 한인(漢人)을 데리고 와서 본궁(本宮)의 담장 밖 한촌(漢村)에 살도록 명하셨는데,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이날을 당하여 어찌 풍천(風泉)115)  을 외기만 하겠는가? 한촌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특별히 식물(食物)을 지급하도록 하여 옛날을 추사(追思)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5월 11일 기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그리고 각사(各司)의 입직(入直)한 관원을 소견(召見)하여 관장하고 있는 직무에 대한 소회(所懷)를 하순(下詢)하였다.

 

5월 12일 경술

정하언(鄭夏彦)·이익원(李翼元)·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최성대(崔成大)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북한 산성의 군향(軍餉)은 감손(減損)할 수 없으니 총융청(摠戎廳)에서 장산(長山)과 임진(臨津)에 유치(留置)해 둔 곡식을 쌀로 환산하여 북한 산성으로 옮겨 저축하게 하고, 연천(漣川)의 곡식 2백 석(石)은 임진으로 옮겨서 넘겨 주게 하고, 마전(麻田)의 곡식 2백 석은 장산으로 옮겨서 넘겨 주도록 하여 그것을 전례대로 조적(糶糴)하게 한다면, 산성의 군량은 축(縮)이 나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백성들의 폐단은 조금 느슨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이석심(李錫心)이 서경(署經)에서 거리낌을 받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구애를 받지 않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 이석재(李碩載)에게 명하여 경기의 고을을 염찰(廉察)하도록 하였다.

 

5월 13일 신해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상채(謝上蔡)116)  가 땀이 흘러 등을 적셨다는 것은 대저 불의(不義)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외부에 발로된 것으로 이것 또한 자신을 반성하고 책망하는 것이며, 진소유(秦小游)117)  의 얼굴빛이 붉어졌지만 자신이 반성을 잘못했으니, 그 뉘우치고 깨달은 것은 동일하지만 이는 바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함께 행해지면서 정(情)은 다른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박성원(朴聖源)이 정세(情勢)를 가지고 공무를 집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경계하는 하교를 내리기를,
"비록 보통 사람이 어린아이를 남에게 맡겼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찌 끝까지 돌보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나라를 주장하는 자가 맡긴 것이겠는가?"
하였다. 심이지(沈履之)가 세손(世孫)에게 《사략(史略)》을 강독하게 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뜻으로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소학(小學)》 주석(註釋)을 강독하도록 명하였다.

 

5월 14일 임자

조명정(趙明鼎)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5월 15일 계축

장령 윤재겸(尹在謙)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대신은 초방(椒房)118)  의 지친[肺腑]으로서 대조(大朝)의 신임하는 중임을 맡았으면서도 이렇게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한마디도 바로잡아 구제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간혹 국사를 말한 자를 망령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대신에게 바라는 바의 일이겠습니까?
아! 관서로 행차한 한 가지 일은 이미 국자 장(國子長)119)  의 글에서 모두 밝혀졌는데, 그때 저하께서 오랫동안 세자궁[震宮]을 떠나 있었음은 바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인데도, 약원에서의 진후(診候)와 승정원[喉院]에서의 출납과 대신(臺臣)의 논달(論達)은 그전대로 거행하였습니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게 되자 대조(大朝)께서 승선(承宣)에게 성균관의 유생을 거느리고 입대하도록 명하여 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승지인 이영휘(李永暉)가 도리어 구윤옥(具允鈺)의 서본(書本)을 고치거나 바꾼 간사한 습관을 답습하였으니, 그의 간사하게 가리고 막은 죄를 추궁하면 대체로 구윤옥이 나쁜 전례를 처음으로 만든 데에서부터이니, 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한결같이 모두 크게 불경한 형률로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환관[閹竪]이 대내에 있으면서 대신 정무를 맡아서 정령(政令)을 수응(酬應)하고 동정(動靜)하는 때에 곁에서 모시면서 종용하며 아첨한 자에 이르러서는 죄악이 크고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천지[覆載] 사이에서 용납하기 어려우니, 그도 즉시 엄중한 주벌(誅罰)을 쾌하게 시행하소서. 그리고 기전(畿甸)과 양서(兩西)120)  와 삼도(三道)의 도신 및 송도(松都)의 수신은 곤외(閫外)를 지키는 그 직임이 자별하니, 오직 융성한 의식으로 경상(境上)에서 영접하고 전송하여 학가(鶴駕)121)  의 위엄을 갖추도록 해야 마땅한데도 심상하게 응접(應接)하기를 마치 관례를 따라 닥치는 사신을 공봉(供奉)하듯이 하였으니, 특별히 엄중한 주벌을 더하게 하소서.
그리고 춘방의 요속(僚屬)은 다른 신료와 다른 점이 있으니 당연히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울먹이든지122) 말고삐를 부여잡고 간(諫)해야 하며123)  , 간하여도 들어주지 않을 경우 모시고 따르겠다는 것을 청했어야 옳은데, 직숙하는 곳에서 누워 쉬면서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였으니, 신은 저하께서 대궐을 떠났을 때에 입직(入直)했던 궁관(宮官)에게는 불충(不忠)한 죄로써 처벌을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을 책망하는 글을 급히 내려 팔도에 사죄하고 인심(人心)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것은 유념(留念)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구대(求對)하였는데, 하령하기를,
"전후에 하령한 것이 한갓 성실한 말일 뿐만이 아니고 또한 나의 민망스러운 뜻을 보인 것이니, 나라의 세신(世臣)이 되어 거의 감동해야 할 터인데도, 가만히 요즈음을 살펴보면 오히려 믿지 않는 듯하니, 실로 나의 정성이 아랫사람들에게 미덥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부끄럽고 뭇 신하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서글프게 여긴다. 이미 지나간 허물을 말하면 저절로 부끄럽지만 마음에는 분명히 깨달아 요즈음에는 식음(食飮)을 제대로 못하면서 잇달아 강대(講對)를 여는 것 또한 진현(進見)하는 정성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며, 이는 모두 성상의 뜻을 받들어 계승하는 것이니, 오늘날 대대로 국록을 받는 신하가 된 이는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고 지나치게 의심하지 말고서 앞으로의 성과를 살펴보도록 하라. 내가 식언(食言)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서(臺書)가 나왔는데도 무릅쓰고 입대(入對)하였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지금이 어찌 인혐(引嫌)할 시기이겠는가? 오늘 이미 나의 뜻을 모두 털어놓았으니, 책임이 중대한 데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라, 그것 또한 나를 보전하는 길이다. 내가 음식을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이 이미 열흘이 넘었는데, 경(卿)이 만약 단지 사사로운 의리만 돌아보아 일이 엎치락뒤치락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어떠하겠으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하겠는가? 경은 나를 염려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을 위하는 것은 불가하니, 모름지기 깊은 밤에 마음을 열고 대면하여 유시하는 뜻을 체득하여 인입(引入)하지 말고 즉시 일어나서 정무를 본 연후에야 나도 조금은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5월 16일 갑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종신(宗臣)과 문무관으로 입직한 사람들의 전강(殿講)에 친림(親臨)하였는데, 문신(文臣)은 순통(純通)한 함사겸(咸士謙)이 수석을 차지하였고, 무신(武臣)은 이언충(李彦忠)이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아울러 말을 상(賞)으로 주는 은전은 베풀었다.

 

5월 17일 을묘

왕세자가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뒤에 이어서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진현례(進見禮)를 행하고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5월 18일 병진

예조 참의 송명흠(宋明欽)이 현도 상서(縣道上書)124)  하여 사면(辭免)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어제 왕세자가 진현(進見)했을 때에 성상께서 보신 바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용히 보았더니 작년과는 조금 달랐으며, 살이 찐 피부의 비대함이 지난날과는 같지 않았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소조(小朝)가 돌아가는 길에 기뻐함이 마치 무엇을 얻은 듯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진현하였으니, 차대(次對)를 20일에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것과 상참(常參)에 취품(取稟)하는 것은 전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우의정 홍봉한이 입대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어제 진현례(進見禮)를 행하였는데, 대조(大朝)의 옥색(玉色)이 그전보다 어떠하셨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쇠모(衰耗)하심이 그전보다 더욱 심하였으므로, 희구(喜懼)125)  하는 마음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차대(次對)를 설행(設行)하도록 저하께서 앞서 이미 영(令)을 내리셨습니다만, 또한 자신을 책망하는 뜻으로 분명히 유시한 연후에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비록 재계(齋戒)하는 일과 서로 공교롭게 마주친다 하더라도 모레는 오히려 멀게 여겨진다."
하였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빈객(賓客)으로 아직도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지 않은 것은 고집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니, 승지로 하여금 하령을 쓰게 하기를,
"빈객이 고집하는 바가 있어서 상견례를 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비록 대리(代理)하는 뒤라 하더라도 예모(禮貌)는 위와 같으며, 연전(年前)에 한두 사람은 그것을 행한 자도 있고 당시 빈객을 겸대(兼帶)한 사람 가운데는 역시 벌써 지난날에 행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살펴보면 상견례를 행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의미가 없는 데 관계가 된다. 조신(朝臣)이 만약 나의 지난날 허물을 우려한다면 지금 뉘우치고 고치는 시기에 이르러 또한 어찌 기꺼이 권강(勸講)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빨리 상견례를 행하도록 하는 일을 빈객에게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령하기를,
"나는 이미 진현례를 행하였는데, 빈궁(嬪宮)의 진현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내(大內)에서 우러러 청하는 것이 적합한 듯합니다."
하고, 또 맑은 마음으로 염려를 중지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방법을 대략 진달하며 경계하도록 권면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5월 19일 정사

빈궁(嬪宮)과 왕세손(王世孫)이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대조(大朝)께 진현(進見)하고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다.

 

5월 20일 무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이미 잘못을 뉘우쳤으니, 이 마음을 이루어 넓혀서 나아가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 예덕(睿德)의 빛이 어떠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영(令)을 내리고 대면하여 유시하였으니, 비록 한 시각이라 하더라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의당 명념(銘念)하겠다."
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이 뒤로 진현(進見)을 한 달에 세 차례로 정해야 하겠습니까? 옛날에는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로 한 사례가 있는데, 이것으로 마련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한 달에 두 차례하는 것은 매우 간격이 넓어서 마음에 대단히 민망스럽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한번 대조(大朝)께 앙품(仰稟)하여 규정을 정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뒷날 대신과 예당(禮堂)이 대조(大朝)께 입시(入侍)하여 잘 인도하고 진달하여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빈객(賓客)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를 추문(推問)하도록 청하니, 하령하기를,
"상견례(相見禮)는 내가 매우 부족하게 여기니, 내버려두는 것이 옳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아마도 정성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규정에 부족할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대간의 글이 올라간 뒤에 수라(水剌)를 폐(廢)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진실로 뉘우치고 깨닫는 실상이 있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승지가 기록한 것이다. 나의 허물은 내가 이미 뉘우치고 있으며 며칠 전 영(令)을 내리면서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는 신하는 거의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대간이 글을 올린 뒤에 인입(引入)하는 사람이 많다고들 하는데, 이는 모두 나의 허물이니, 여러 신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만약 나를 위한다면 어찌하여 엎치락뒤치락 일을 만들고 떠들썩하게 인혐(引嫌)하는가? 진현(進見)한 뒤에 기뻐서 먹거나 마실 수가 없었는데, 여러 대(代)를 국가의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운명을 같이한 집안의 신하로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대면하여 진달하는 것이 옳다. 인입한 사람 역시 공무를 집행함에 힘써야 할 것이며,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내 마음이 너그러워지도록 모름지기 체득하고 체득하여 나를 이해하고 이해하라."
하였다.

 

5월 21일 기미

윤동섬(尹東暹)·송형중(宋瑩中)·권도(權噵)를 승지로, 홍양한(洪良漢)을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부제학으로, 서지수(徐志修)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승지 한광회(韓光會)가 신을 보고서 그날 지방에 있었다고 갑자기 핑계를 대니, 사체(事體)가 한심스럽습니다. 청컨대 그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2일 경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기민(飢民)을 소견(召見)하였는데, 말라버린 보리를 가지고 온 자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가져다 보고 말하기를,
"정말로 참혹하다. 차마 좋은 음식[玉食]이 어떻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하고, 추모환(秋牟還) 중에서 4분의 1을, 춘모환(春牟還) 중에서 5분의 1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거기에다 환곡(還穀) 1만 석(石)을 나누어 주어 경기(京畿)의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으며, 또 삼남(三南)에도 일체(一體)로 거행하도록 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홍술해(洪述海)를 사간으로, 이성수(李性遂)를 지평으로, 곽진순(郭鎭純)을 정언으로, 유수(柳脩)를 장령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장전(帳殿)에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1만 석을 구분하여 나누어 주라는 명이 있으신데, 해서(海西)의 상정 대소미(詳定大小米) 2천 석, 관향곡 절미(官餉穀折米) 1천 5백 석, 진휼청 대소미(賑恤廳大小米) 1천 석,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각각 쌀[米] 2백 50석,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군향미(軍餉米) 1천 석, 대흥 향미(大興餉米) 5백 석을 옮겨다 조곡(糶穀)으로 지급하되, 해서의 곡식은 아마도 기한에 맞추어 운반해 오기가 어려울 듯하니, 호조(戶曹)의 콩[太] 1천 석과 진휼청의 콩 5백 석을 우선 밀어 주어 그 숫자를 채우게 하고, 그 대신 해서에서 보내오는 쌀로 도로 갚도록 하소서. 해서의 곡식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따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각기 쌀을 받아들이게 하되, 해서의 곡식과 진휼청의 쌀은 성상의 하교대로 고을에다 바치게 하여 유치(留置)해 두고 인해서 영진곡(營賑穀)으로 만드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서(司書) 이창임(李昌任)이 입대(入對)하여 윤재겸(尹在謙)의 글에 대한 답에 ‘유념(留念)’이라는 두 글자는 가납(嘉納)하는 뜻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하답(下答)을 고치도록 청하니, 왕세자가 마침내 ‘조목마다 가납한다.[逐條嘉納]’고 하답을 고쳐 뉘우치고 깨달음을 분명하게 보였다.

 

5월 23일 신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응교 심이지(沈履之)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의 허물은 뉘우칠 만한 것이 비록 단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병근(病根)이 가장 심하여 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동정(動靜)을 대조(大朝)로 하여금 듣고서 알게 하지 않으려는 바로 이것이니, 이는 자못 저하께서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지나친 데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일상 생활 속에서 천리(天理)에 합당하게 하고 인심(人心)에 순응하도록 함이 있지 못할 경우에, 간혹 그것이 대조께 알려져 갑자기 격앙된 번뇌를 이루게 될까 염려하여 미세(微細)한 과실을 우연히 한번 엄폐한 것이 엎치락뒤치락 익숙해져서 끝내는 일마다 숨기고 가리는 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하께서 이미 스스로 열거하며 스스로 책망할 수 없게 되었으니, 거듭 여러 신하들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렵게 임시 변통으로 수습하기는 하지만 마침내 한 세대로 하여금 속이고 가리는 구덩이로 빠지게 하고야 맙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은 인신(人臣)에게 있어서 극도로 악한 것인데, 여러 신하들에게 이런 풍습이 있다면 저하께서는 진실로 당연히 대단한 기세로 진노(震怒)하면서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로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참고 따라서 그것을 가르치십니까? 그리고 또한 들으니, 전후(前後)하여 여러 신하들이 경계를 올림에 있어 대체로 실정 밖의 엄령(嚴令)이 많았고 심지어 인신이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의 구대(求對)는 오로지 변함 없이 충성하고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그 글을 올려 극력 간(諫)하는 사람도 그 마음과 말은 균일하게 충성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하께 구대하는 경우는 노여워하지 아니하고, 글을 올릴 경우에는 번번이 듣기를 싫어하며 엄중히 책망하는 것은 역시 그것이 전파될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가리거나 숨기려고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러나 진달한 바는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5월 25일 계해

유정원(柳正源)을 대사간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다.

 

평안 감사 정휘량(鄭翬良)이 상서하기를,
"직무에 실수하고 분수를 무너뜨렸으니, 죄는 용서받을 수 없게 되었기에, 밤낮으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마음은 이미 재[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말이 있어도 천심(淺深)을 논할 수 없으며, 오직 죄상을 참작하여 처리하기만을 공손히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5월 26일 갑자

심이지(沈履之)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인견(引見)하였다.

 

5월 27일 을축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원경하(元景夏)가 졸(卒)하였다. 원경하의 자(字)는 화백(華伯)이며 흥평 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의 손자이다. 문벌과 집안이 존귀[隆貴]하였는데, 원경하가 젊어서부터 문사(文辭)를 좋아하였으며 몸단속하기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여 야윈 말에다 해어진 안장을 쓰고 의복을 소박(素朴)하게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도위(都尉) 집안의 손자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바르지 않고 험악하며 거칠고 사리에 어긋나 다른 사람과 뜻이 맞는 경우가 적었으며, 경대부(卿大夫)로서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는 기를 꺾고 험담하였으므로 〈그가 내뱉는〉 말에는 완전한 선비가 없었다. 익위사(翊衛司)에 들어가 부수(副率)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유(李瑜)가 빈객(賓客)으로서 익위사를 지나가자 이유가 이미 떠난 뒤에 원경하가 서리를 꾸짖으며 맑은 물로 이유가 앉았던 자리를 씻게 하면서 말하기를, ‘속자(俗子)126)  가 감히 내 자리를 더럽히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정보(李鼎輔)가 마음속으로 원경하를 기특하게 여겼었는데, 정시(庭試)의 대독관(對讀官)이 됨에 이르러 마침내 원경하를 발탁하여 제일(第一)로 삼았으므로 사간원을 경유하여 시독(侍讀)으로 진출하였다.
영조[英宗]가 일찍이 대제학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뽑아 독서당[湖堂]에서 휴가를 주며 글을 읽게 하였는데, 오원이 이천보(李天輔)·남유용(南有容)·황경원(黃景源) 세 사람을 추천하려 하였더니, 원경하가 그 몇 사람 가운데 끼지 못했다는 것으로 불평이 대단했다. 그러다가 임정(任珽)·정우량(鄭羽良)·오광운(吳光運)·윤유(尹游)를 따라 탕평책(蕩平策)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조정에서 주장하였으므로 빈객과 친구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서로 왕래하지 않았으며, 이천보는 이서(移書)하여 절교를 알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경하는 더욱 크게 분노하여 마침내 영조에게 낭천(郞薦)을 혁파할 것과 춘추관(春秋館)의 거대법(擧代法)을 개정할 것을 아뢰게 되었다. 그리고 원경하의 사인(私人) 민백창(閔百昌)이 원경하를 위하여 몰래 장령 이선태(李善泰)를 꾀어 이천보를 탄핵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이선태가 참소하고 무함하는 상황을 극력 말하고, 이천보를 추천하여 10년이 채 안되어 영의정이 되었으므로, 원경하가 마음에 늘 즐거워하지 않았고 치사(致仕)하기를 청원하였으며,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봉조하(奉朝賀)로 병을 얻어 졸하니, 나이 64세였다. 원경하가 만년(晩年)에는 이천보와 왕래하기를 그전처럼 하였으며 그가 졸함에 이르러서도 제문(祭文)을 지어 치전(致奠)하였다. 그리고 더욱 이천보와의 옛 정의를 못잊어 그의 아들 원인손(元仁孫)·원의손(元義孫)을 이익보(李益輔)에게 의지하도록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원경하는 글을 지을 때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일찍이 한 권의 책을 편찬하는 데에 하루도 걸리지 않고 차례대로 찬술(撰述)한 것이 책에 가득하였으므로, 조귀명(趙龜命)이 그의 작품에 대하여 평(評)하기를, ‘박옥(璞玉)127)  을 아직 다듬지 않은 상태이며, 신구(神駒)128)  가 넘어지기를 많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대체로 평하기를 잘한 것이었다. 임금이 은졸 전교(隱卒傳敎)를 쓰도록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해서(該署)에서 치제(致祭)하고 관[柩]을 만들 재목을 가려서 지급하도록 명하였으며, 인해서 별도로 더 돌보며 돕게 하였다.

 

5월 28일 병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앙청(仰請)하기를,
"새로 분급한 맥환(麥還) 가운데 3분의 1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선 정지하고 나리포(羅里舖)의 곡식 4천 석(石)을 특별히 설진하는 데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섬을 어찌 차마 심상(尋常)하게 보겠는가? 1천 석을 보태어 획급(劃給)하게 하고, 나리포에서 만약 부족하면 도내(道內) 모양(某樣)의 곡식으로 숫자를 채워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배로 운반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문관·무관·음관으로 일찍이 근밀(近密)129)  인 아경(亞卿)·아윤(亞尹)·장임(將任)을 지낸 사람 외에는 비록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호(諡號)를 감히 청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곤임(閫任)의 막비(幕裨)로 구전(口傳)130)  한 외에 만일 남솔(濫率)하는 자가 있으면 해당 수신(帥臣)은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131)  을 시행하며,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데리고 간 자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때그때 아뢰게 하여 즉시 그 도에다 정배(定配)하도록 하였다.

 

5월 29일 정묘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갔다.

 

관록(館錄)132)  을 행하도록 명하니, 부제학 조명정(趙明鼎), 응교 이미(李瀰)가 신록(新錄)을 권점(圈點)하여 정이환(鄭履煥) 등 25인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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