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무진
밤에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으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의 삭제(朔祭)를 섭행(攝行)하였다.
6월 2일 기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경기(京畿)의 수령을 소견(召見)하여 비가 내린 혜택의 많고 적음을 하문하였다. 이어서 양천 현감(陽川縣監) 유덕신(柳德申)에게 상현궁(上弦弓)을 내려 주면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어사(御史)가 아뢴 바를 들으니, 그대가 정성을 다하여 다스린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전례(前例)가 없는 차왜(差倭)를 아직도 사리에 의거하여 쫓아보내지 아니한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명한(洪名漢)은 중추(重推)하고, 통역관[任譯]은 동래 부사로 하여금 곤장을 집행하게 하여 징계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고 판서(判書) 박사익(朴師益)의 시호(諡號)를 장효(章孝)로 낙점(落點)하였는데, 장릉(章陵)의 휘호(徽號)를 범함이 있으니,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호를 고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망(前望)한 것을 들여오도록 명하고, 그 당시 시호를 논의한 사람을 모두 중추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효장궁(孝章宮)·의소묘(懿昭廟)의 중삭제(仲朔祭)에 모두 울금주(鬱金酒)를 사용하면서 소현묘(昭顯廟)에만 사용하지 않으니, 일이 반박(斑駁)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장궁과 의소묘는 소현묘와 동일하니, 모두 쓰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홍봉한의 아룀으로 인하여 예조 참의 송명흠(宋明欽)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허락하고, 이어서 하유(下諭)하기를,
"오늘날 국사(國事)와 인심(人心)을 그 누가 믿겠는가? 글을 읽은 선비만 〈믿을 뿐이니〉 내가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어찌 한갓 그대를 위해서만이겠는가? 지금 상신(相臣)이 아뢴 바를 들으니, 그대의 할아버지인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도 일찍이 이 직임에 끝까지 명을 받들지 않았었다고 하니, 지금 그대가 굳이 사양하는 것이 고집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이렇게 서로 버티는 것이 한갓 정성을 이루는 데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문을 닫는 것에 가까운 것임을 안다. 특별히 본직(本職)을 체임하도록 하여 자신의 진출할 방법을 열게 하니, 보고 싶은 생각은 바로 마음에 말미암은 것으로 오늘날 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대의 할아버지가 옛날에 이미 부름을 받았으니, 그대 할아버지의 뜻을 본받아 어떻게 나를 한번 보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6월 3일 경오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세초(歲秒)133) 를 일찍이 진달하도록 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하지 않는가? 즉시 진달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홍준해(洪準海)를 승지로 삼았다.
6월 5일 임신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대신과 병조 판서를 소견(召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윤면동(尹冕東)의 사건은 참으로 원통하고 민망합니다. 그의 아비가 이름을 고친 사실이 없으며 대과(大科)·소과(小科)의 비봉(秘封)에도 모두 본명(本名)을 썼으니, 위흥조(魏興祖)가 터무니없이 일을 꾸민 것은 전혀 근거가 없고, 심각(沈殼)이 억지로 추잡스런 욕을 가하는 것은 더욱 그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베풀지도 말라.’는 것은 공성(孔聖)의 훈계이니, 한갓 독실하게 인정이 많은 데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풍속과 교화에도 관계가 되니, 이 뒤로 장주(章奏) 가운데 그 자식과 손자를 논하면서 그 아비나 할아비를 침해하여 언급하는 자는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고 청현직(淸顯職)에는 허락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계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에 들어갔으며, 유성이 천강성(天江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흰 색이었다.
구윤옥(具允鈺)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체로 그 이른바 ‘고쳤다’는 것은 바로 김시찬(金時粲)의 상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이 그때 지신(知申)134) 으로 대죄(待罪)하면서 그 글을 받아들여 진달하기 전에 신이 여러 동료와 전례대로 돌려가면서 보았으며, 되돌려 보내던 날은 마침 빈대(賓對)하는 날과 마주치게 되어,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 또한 모두 보았고 기주(記注)하는 신하가 일기(日記)에다 썼는데, 그것을 고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누가 보고서 누가 전한 것입니까? 만약 그 전본(全本)을 고쳤다고 말한다면, 이는 짧은 시간에 마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만약 글귀 내용을 고쳤다고 한다면 자획(字畵)을 바르거나 문질러야 할 터이니, 저절로 이것은 엄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 사건은 내가 이미 환하게 알고 있다."
하였다.
6월 7일 갑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6월 8일 을해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의식을 행하고, 휘령전(徽寧殿)에 전배(展拜)하였다. 지나는 길에 약원(藥院)에 들러 삼제조(三提調)에게 각각 호피(虎皮)를 내려 주고, 또 추모하는 뜻으로 무신년135) 에 대령(待令)했던 의관(醫官)에게는 말을 상(賞)으로 주었으며, 원역(員役)에게는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명릉(明陵)을 봉심(奉審)하고 급히 말을 달려 복명(復命)하니, 특별히 호피를 내려 주고 어제(御製)를 새겨서 약원에 게시(揭示)하도록 명하였다.
6월 9일 병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6월 10일 정축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고 하령하기를,
"진현(進見)하는 한 가지 절차는 앙청(仰請)하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초7일의 동가(動駕)로 할 수 없었으니, 며칠 안으로 행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자,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저께 지영(祗迎) 때에 그만두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개 날씨가 더운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혹시 앙청하였다가 또 한더위를 당하여 힘들게 움직이는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만두라는 명이 있게 되면 매우 민망스럽고 절박할 터이니, 우선 보름 뒤를 기다려 영(令)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지금 수가(隨駕)하며 문안(問安)하는 절차를 모두 할 수 없기 때문에 빨리 진현(進見)하려 하는 것인데, 어찌 보름 뒤를 기다리겠는가?"
하였는데,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휘령전(徽寧殿)의 망제(望祭)를 또 섭행(攝行)하려 한다면, 진현하지 않는 것은 미안(未安)할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바로 나의 뜻과 같다."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왕세자가 내일 진현(進見)할 것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지금 무더위를 당하여 한 마음이 삼군(三軍)에 있을 것이니, 잠깐 진현하는 일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진현(進見)에 관한 일을 저하(邸下)께서는 매번 영(令)을 내리지만 대조(大朝)께서 번번이 그만두라는 명을 내리시는데, 중외(中外)에서는 성상의 뜻이 한더위를 당하여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염려하여 이런 하교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이 뒤에는 대내(大內)에서 성상의 뜻을 우러러 탐지한 뒤에 앙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6월 11일 무인
약방(藥房)에서 사전(謝箋)을 올렸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삼제조(三提調)를 인견(引見)하고, 친히 ‘들어가 자세히 살피면서 옛날 일을 기억하라.[入審憶昔]’는 네 개의 큰 글자를 써서 약원(藥院)에 게시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어서 음식을 내려 주게 하고, 임금이 그대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청성묘(淸聖廟)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다. 해주(海州)에 수양산 형제동(首陽山兄弟洞)이 있는데, 해주의 유생(儒生)들이 일찍이 상소하여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므로, 숙종[肅廟]이 친히 청성묘(淸聖廟)라고 써서 사액(賜額)한 것이었는데, 올해가 바로 사우를 건립한 지 회갑(回甲)이 된 해이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6월 12일 기묘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으니, 예후(睿候)가 여름 감기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광주(廣州)와 양주(楊州)의 농사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6월 13일 경진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각사(各司)의 구임 관원(久任官員)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과 각사 관원의 입시(入侍)에 어찌하여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가? 비록 미관(微官)이기는 하지만, 옛날의 규정은 마땅히 폐할 수 없다."
하고, 자리를 마련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연령군(延齡君)의 회갑날[初度]이다."
하고,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충성과 의리 두 가지가 완전한 백이·숙제 두 사람의 절개[忠義兩全伯叔雙節]’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새겨서 청성묘(淸聖廟)에 게시하도록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안국동(安國洞)의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의 사제(私第)에 나아갔는데, 승지 조영진(趙榮進)이 말하기를,
"신이 어렸을 때에 신의 어미의 말을 들었는데, 지금 성후(聖后)께서 기거하셨던 방을 보니 들은 것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사년136) 이 갑술년137) 에 있어서는 바로 6년의 오랜 세월이었으나, 마치 제(帝)가 방주(房州)에 있었던 것138) 과 같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해에 〈인현 왕후의〉 수필(手筆)을 받들어 열람하고서 다시 6년 동안 거처하신 침실(寢室)을 보았으니, 거의 유감이 없다."
하고, 민씨(閔氏) 여러 사람과 성후(聖后)의 친속(親屬)을 불러 들이도록 명하고, 그 침실을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짓고 어필(御筆)로 그 편액(扁額)을 써서 새겨서 걸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것이 마침 갑술년이었는데, 바로 성후(聖后)께서 복위(復位)되던 해였다. 이런 일 때문에 신축년139)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부류들은 나에게 대해 감심(甘心)해 왔다."
하고, 임금이 조영진(趙榮進)을 특별히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제배하도록 명하고 여러 사람에게는 모두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으며, 고 현감(縣監) 민진영(閔鎭永)의 처(妻)에게는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내려 주게 하였다. 지나는 길에 육상궁(毓祥宮)에 전배(展拜)하였는데, 길가에 있는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집안의 정문(旌門)을 보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영진은 성후(聖后)의 가까운 족속(族屬)으로 그 고사(故事)를 안다고 하면서 스스로 앞장서서 인도하며 어느 방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성후가 거처한 곳이라고 말하였는데, 대개 민씨 집안에서 전해지는 말을 들으면 조영진이 가리키며 인도한 것과는 일체 서로 반대가 된다. 인신(人臣)이 임금에게 아룀에 있어 감히 거짓으로 속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감히 그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하면서〉 스스로 속이는 구덩이로 빠져드는 것을 달갑게 여기니, 비록 이것으로 연유하여 높은 직질(職秩)에 발탁되고 임금의 은총을 견고하게 하기는 하였지만, 그 한 세대에서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것은 유독 부끄럽지 않은가?"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8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윤리-강상(綱常)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註 13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137] 갑술년 : 1694 숙종 20년.[註 138] 제(帝)가 방주(房州)에 있었던 것 : 이는 당(唐)나라 고종(高宗)의 아들인 중종(中宗)의 모후(母后)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황제 노릇을 하면서 아들 중종을 균주(均州)와 방주(房州)에다 금고(禁錮)시켰던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숙종 15년(1689) 기사 환국(己巳換局) 때 숙종의 계비인 인현 왕후가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무고로 폐서인(廢庶人)되었다가 숙종 20년(1694) 갑술 옥사(甲戌獄事)로 복위(復位)된 일을 비유한 것임.[註 13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영진은 성후(聖后)의 가까운 족속(族屬)으로 그 고사(故事)를 안다고 하면서 스스로 앞장서서 인도하며 어느 방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성후가 거처한 곳이라고 말하였는데, 대개 민씨 집안에서 전해지는 말을 들으면 조영진이 가리키며 인도한 것과는 일체 서로 반대가 된다. 인신(人臣)이 임금에게 아룀에 있어 감히 거짓으로 속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감히 그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하면서〉 스스로 속이는 구덩이로 빠져드는 것을 달갑게 여기니, 비록 이것으로 연유하여 높은 직질(職秩)에 발탁되고 임금의 은총을 견고하게 하기는 하였지만, 그 한 세대에서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것은 유독 부끄럽지 않은가?"
6월 14일 신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조영진(趙榮進)은 순수하고 성실하니 기용할 만한 인재이기도 하지만, 이번의 특별한 은혜는 흥감(興感)한 성상의 뜻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요즈음에 와서 아경(亞卿)으로 승진하여 발탁되는 경우가 너무 잦으니, 그것이 세상을 힘쓰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간혹 어떻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德)을 힘쓰는 이는 벼슬로 힘쓰도록 하며, 공(功)을 힘쓰는 이는 상(賞)으로 힘쓰게 하라.’고 하였으니, 인군(人君)이 작록(爵祿)에 있어서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마는, 조영진·이은(李溵)과 같은 무리를 이와 같이 거두어다 기용함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도승지로 하여금 어제 상(賞)을 받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게 하고, 이어서 음식물을 내려 주게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왕세자가 감기가 들었다고 하여 조정에서 기거(起居)하는 절차를 앙품(仰稟)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6월 15일 임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전최(殿最)140) 를 개탁(開坼)141) 하는 데에 친림(親臨)하였다. 임금이 동몽 교관(童蒙敎官) 이상진(李商進)이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 성과가 있었다는 제목을 보고 하교하기를,
"늘그막에 스스로 힘을 썼으니, 어찌 사실의 본말을 종합해서 밝히지 않겠는가? 내일 그로 하여금 동몽(童蒙)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게 하라. 그리고 경상 도사(慶尙都事) 박효삼(朴孝參)은 자신이 좌막(佐幕)142) 이 되어 역마를 달리며 기생을 첩으로 삼았으니, 하고(下考)143) 로 그칠 수는 없다. 즉시 그 지역에다 투비(投畀)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6일 계미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 이상진(李商進)에게 동몽을 데리고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여러 동몽으로 하여금 글을 읽게 한 다음 붓·먹·종이를 내려 주었으며 이상진에게는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이날 밤에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새 명릉(明陵)에 사초(莎草)한 것이 빗물로 인하여 허물어진 상황을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이익정에게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달려가서 봉심(奉審)하도록 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어서 사초를 보완하게 한 초기(草記)를 지체시킨 해당 예조 낭관을 우선 도태시킨 뒤에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6월 17일 갑신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고, 걸어서 건명문(建明門)에 이르렀다가 이어 판위(版位)로 돌아가 하교하기를,
"송형중(宋瑩中)이, 어제 이황(李潢)의 어미가 〈인현 왕후의〉 사저(私邸)에서 곁에서 모실 때에 성후(聖后)께서 주신 수필본(手筆本)인 책자(冊子)를 가지고 우러러 주달하면서 간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지난번에 받들어 열람한 수찰(手札)과 사건이 각기 달랐으니, 설령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승지가 번갈아 가며 아뢸 일이 아니며, 성후의 수필(手筆)을 어찌 감히 간행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겠는가? 비록 집안의 일이라 하더라도 기억하기 어려운데, 홀기(笏記)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록을 펼쳐 읽으며 아뢰었는데, 또 이황을 모른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일을 알겠는가? 말이 군색하고 도망치는 듯 한 데에 관계되니, 특별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도록 하여 은혜를 구하는 길을 막도록 하라."
하고, 유한소(兪漢蕭)·임위(任瑋)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지었는데, 대개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세상을 경계하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6월 18일 을유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경기 감사(京畿監司)를 인견(引見)하였다. 금군(禁軍) 주경일(朱敬一)이 정축년144) 에 공사를 감독하는 부장(部將)이었는데, 지금 또 명릉(明陵)의 사초(莎草)를 보완하는 역사를 보살피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여, 특별히 첨사(僉使)로 제배하게 하고 즉시 사은(謝恩)하도록 하였다. 대신과 호조 판서·예조 판서·공조 판서·관상감 제조가 명릉의 사초 보완을 마친 뒤에 복명(復命)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김상로(金尙魯)·이창의(李昌誼)·홍계희(洪啓禧)는 모두 정축년에 돈장(敦匠)145) 한 신하로 이번 사초한 곳이 무너진 뒤에 황공하여 서명(胥命)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명(待命)하지 말게 하라."
하자, 홍봉한이 이어서 김상로에게 돈유(敦諭)하는 은전을 청하니, 임금이 마침내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오부(五部)의 관원에게 명하여 기민(飢民)을 데리고 들어오도록 하여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돌보며 구휼하게 하고 식량과 노자를 넉넉히 지급하여 각기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6월 19일 병술
왕세자궁(王世子宮)에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양남(兩南)의 도신(道臣)이 전최(殿最)를 엄격하고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처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중추(重推)하도록 명하였다. 홍봉한이 또 중인(中人)이나 서얼(庶孽) 출신의 능마아(能麽兒)와 가함(假銜)의 부류는 참봉(參奉)으로 검의(檢擬)하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복부(服部)에 왕래(往來)하는 기운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수의(首醫)가 입직(入直)하였다.
임금이 이황(李潢)·한용화(韓用和)·홍상간(洪相簡)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 주었는데, 인현 왕후(仁顯聖后)의 친속(親屬)이기 때문이다.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경기(京畿)에서 이전(移轉)할 3천 5백 석(石)을 다시 구획(區劃)하는 일에 대하여 하교(下敎)가 있었으므로 호조의 콩 2천 석과 진휼청의 대소미(大小米) 각 1천 5백 석을 분획(分劃)하였는데,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받아들일 때에는 모두 진휼청에서 관할하는 곡식으로 만들게 하고 호조에는 추후에 급대(給代)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의정은 물을 담아도 새지 않는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을해년146) 의 노비 감공 사목(奴婢減貢事目)에,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논하지 말고 남자는 한 필(疋)을 바치게 하고 여자는 반 필을 바치도록 규정을 정하되, 만일 그것을 어기는 자는 중률(重律)을 시행한다.’는 일을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고 책의 맨 앞에 서문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공천인 경우는 경외(京外)의 각처에서 거의 모두 준행(遵行)을 합니다만, 사천에 이르러서는 간혹 그전처럼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폐단이 없지 않다고들 합니다. 이 뒤로 암행 어사[繡衣]를 내보낼 때에는 이 한 가지 조목을 그들에게 염문(廉問)하게 하고 수령과 도신(道臣) 또한 책임을 따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을 반포하여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원(醫員)을 거느리고 삼시(三時)로 진후(診候)하였는데, 탕제(湯劑)를 오늘부터는 세 차례 달이도록 하고, 제조 한 명이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각사(各司)에서는 전례대로 개좌(開坐)하되 가을 보리[秋牟]와 새끼 꿩[兒雉]과 송이(松茸) 등의 물품은 대령(待令)하지 말도록 하여 기민(飢民)들의 폐단을 없애게 하고, 이 뜻을 또한 팔도(八道)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6월 20일 정해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삼시(三時)로 입진(入診)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하령하기를,
"성상의 환후(患候)가 어떠하기에 직숙(直宿)하기에 이르렀는가? 몹시 초조하고 민망스럽다."
하자, 제조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어제 명릉(名陵)에 사초(莎草)를 보완하는 일로 정전(正殿)을 피해 나가시어 밤낮 하루를 습기가 있는 곳에서 거처(居處)하셨으므로, 그 때문에 복부(腹部)에 불편한 증세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승지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조영진(趙榮進)에게 하문하기를,
"안국동(安國洞) 본제(本第) 담장 가의 나무는 경(卿)이 무슨 나무라고 대답하였는가?"
하니, 조영진이 말하기를,
"옥유수(玉柚樹)입니다. 이 나무에 대한 설명은 《천의소감(闡義昭鑑)》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고하여 보도록 명하였으나 과연 이런 설명은 없었다. 조영진이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의 집안에 하문하시면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조영진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원인손(元仁孫) 형제(兄弟)에게 가서 물어보았는가?"
하자, 조영진이 말하기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으며, 원인손은 옥유(玉柚)가 아니고 바로 옥매(玉梅)라고 하였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제(御製)에 옥매(玉梅)로 고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유신(儒臣)을 명소(命召)하여 《전한사(前漢史)》를 강독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양(張良)이 비록 지모(智謀)가 있다 하더라도 사호(四皓)의 일을 만들어 낸 것147) 과 같이 그 임금을 속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文帝)가 밤에 송창(宋昌)을 제배한 것148) 은 오히려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서인데149) , 이미 제위(帝位)에 오른 뒤에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어제 차대(次對)하면서 내가 너무 지나치게 참았었는데, 만약 아프다는 소리를 내게 되면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놀랄 것이기 때문에 참았던 것이다."
하고, 파를 붙여서 병구완하는 것[蔥慰]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6월 21일 무자
약방(藥房)에서 삼시(三時)로 입진(入診)하였다.
세자궁(世子宮)에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종익(李宗翼)이 그의 육촌(六寸) 형(兄)인 이득종(李得宗)의 아들을 계후(繼後)로 삼았기 때문에 전례대로 달하(達下)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득종의 집에서 정단(呈單)하여 애당초 허락했던 것은 그의 본뜻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종익은 바로 이광좌(李光佐)의 계후한 아들인데, 이광좌의 범한 죄가 대단히 중(重)하여 이미 추탈(追奪)을 시행하였으므로, 더욱 그 아들을 계후로 삼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합니다. 추탈한 죄인의 집안은 감히 그 후사(後嗣)를 보존시켜 계승하는 것을 의의(擬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방자하게 정단하여 감히 후사를 세우도록 청한 것은 너무나 놀랄 만하니, 계후 입안(繼後立案)은 즉시 효주(爻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시행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경기(京畿)에다 8천 석(石)을 획급(劃給)하고 남은 것이 5천 석이 됩니다. 이는 바로 일곱 고을의 곡식이니, 조정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백성들 입속의 물건인데, 더구나 보리가 다 떨어지고 식량이 끊어진 때를 당하여 백성들이 반드시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이겠는가? 만약 흉년이 들었다면 일곱 고을의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조적(糶糴)으로 지급하면 그 바치는 것이 어려울 터이니, 백급(白給)150) 하여 진휼하게 하라."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5천 석을 어떻게 모두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5백 석만 백급(白給)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백 석은 적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금 대신이 아뢰는 바를 들으니, 우선 진휼할 곡식을 획급(劃給)하고 남은 것이 5천 석이 된다고 하였다. 아! 토지가 있는 백성에게도 오히려 더 지급하여 구제하고 살려야 하는데, 더구나 의지할 데가 없는 기민(飢民)이겠는가? 1천 석을 특별히 경기 감영에다 지급하여 일곱 고을의 기민을 가을 추수 때까지 구제하여 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홍봉한에게 이르기를,
"지나간 해 윤동승(尹東昇)이 아뢴 바는 너무나 괴로웠다. 이는 승지 형제의 뜻이 같은가?"
하자, 윤동섬(尹東暹)이 말하기를,
"이른바 말과 의논은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치우치게 논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좋겠지만, 아주 없는 것도 괴로운 것이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이 늘 이종성(李宗城)과 수작(酬酌)하였었는데 이종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광좌(李光佐)에 대해서는 젊어서부터 그를 스승의 표본으로 우러러 보았는데, 을해년151) 뒤에 미쳐 관찰하면서 이광좌가 역적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비로소 인신(人臣)의 도리를 할 수 있었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종성이 평소 존신(尊信)한 입장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윤동승의 말은 그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하징(李夏徵)이 비록 역적이기는 하지만, 세도(世道)에 대해서는 공(功)이 있다고 할만하니, 이로부터 두려워 움츠리며 그 옛날의 견해를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심하면 괴로운 것이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것은 괴로운 것에 혐의스럽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윤동섬은 말하기를,
"군신(君臣)간의 의리와 부자(父子)간의 친함은 균등하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근본을 둔 것이니, 만약 군상(君上)에게 충성스럽지 못함이 나타났다면 그 마음에 미워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직하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일변인(一邊人)이 바른 길로 돌아온 뒤에 그 혼가(婚嫁)한 친구가 여기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어떻게 그 족속을 모두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석심(李錫心)의 일 같은 것은 민망스럽게 여길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심하다고 이르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 서경 단자(署經單子)에 그의 사조(四祖)를 쓴 것을 보게 되면 비록 내가 대신(臺臣)이 되었더라도 반드시 미워했을 터이니, 대신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사조(四祖) 또한 누(累)가 되지 않는데, 처외조(妻外祖)에 이르러 하필 누가 되는 경우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조 단자(四祖單子)에다 썼는가? 나도 기용하는 것이 옳다고는 여기지만 대신(臺臣)을 지나치다고 말한다면 괴롭다. 그리고 원경렴(元景濂)의 일은 잘못 되었다. 그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하였다면 오기(吳起)가 처(妻)를 죽이면서까지 장수가 되기를 구한 것152) 과 다름이 없다. 내가 기용하고 싶지만 인륜(人倫)을 위하기 때문에 항상 그를 그르게 여겼으며, 심익운(沈翼雲) 역시 그르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심사순(沈師淳)이 심정보(沈廷輔)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여, 심상운(沈翔雲)을 청평 위(靑平尉)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삼고 심사순을 그의 반부(班附)로 삼는다면 편이(便易)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주(公主)의 봉사(奉祀)가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인륜(人倫)은 지극히 중대하니, 이와 같이 처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문안(問安)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하(邸下)께서는 문안하지 말라는 영(令)이 없으니, 사리와 체면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문안하지 말라는 내용을 조지(朝紙)에 내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고 처사(處士) 장응기(張應起)에게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는데, 홍계희(洪啓禧)가, 그가 학문(學問)과 행의(行誼)가 있다는 것으로 우러러 진달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다 한사(漢史)를 강독하게 하였다.
6월 22일 기축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삼시(三時)로 진후(診候)하고 연달아 탕제(湯劑)를 올렸다. 임금이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을 소견(召見)하고 말하기를,
"작헌례(酌獻禮)라고 이름이 붙여지면 비록 지극히 중하게 하고 지극히 공경해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단헌(單獻)하는 것이 전례이다. 친제(親祭)에 삼헌(三獻)을 갖추는 것은 계승한 임금이 친제한다는 뜻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뒤로는 작헌례하고 이름이 붙여지면 단헌하게 하고, 그것이 친제인 경우는 삼헌을 갖추도록 하는 일을 규정으로 정하게 하라. 그리고 무릇 고유(告由) 때에 삭망제(朔望祭)가 서로 상치될 경우는 고유제(告由祭)를 겸해서 행하도록 하는 것도 규정을 정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3일 경인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삼시(三時)로 진후(診候)하고 연달아 탕제(湯劑)를 올렸다.
세자궁(世子宮)에 조정에서 정후(庭候)하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강서원(講書院)에서 아뢰기를,
"예후(睿候)가 여러 날 심하게 괴로운 가운데서 또 대조(大朝)의 환후(患候)가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하는 데에 이르렀는데도 진현(進見)하지 못하니, 더욱 초조하고 답답한 심정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 우러러 체득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현하는 예(禮)를 대신 행하여 공경히 성후(聖候)를 받들다가 돌아가 상세히 진달하여 병환(病患) 가운데서 애태우며 절박해 하는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진현하는 일을 하령(下令)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틀림없이 이것은 강관(講官)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인사상(人事上)에 너무도 명백하니, 충자(沖子)를 보필하고 인도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가?"
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어린 나이로 삼복 더위[三庚]를 당했는데 이제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진현하겠다는 데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겠다만, 감정을 누르고 쉬도록 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라. 이번의 초기(草記)는 그 문맥(文脈)을 관찰하니, 틀림없이 도운 바가 있을 것이다. 밤낮으로 너에게 바라기는 그 아름다운 자질을 지켜 어버이 섬기기는 실질로써 함이 마땅한데, 어찌 형식으로 꾸미려 하는가? 강관이 너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추문(推問)하지는 않겠다마는, 이 뒤로는 이런 등류를 절대로 따르지 말고 스스로 본바탕을 지켜 내가 기대하는 바를 쇠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박성원(朴聖源)이 한 짓인데 하교(下敎)를 듣고 정사(呈辭)할 터이니 관직을 해임하는 것이 옳다."
하고,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오래도록 비워 있던 나머지에 잠깐 희망이 보이더니 또다시 이와 같이 하며 강서원(講書院)의 대강(對講)도 그 또한 비워 두게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종묘와 국가에 어떠하겠는가? 하궐 승지(下闕承旨)로 하여금 이 하교를 가지고 원량에게 권강(勸講)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들으니, 김보순(金普淳)이 스스로 초기(草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박성원이 한 짓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에 이르러 내가 매우 부끄럽다. 평상시에 이 사람이 이와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그를 의심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내가 여러 신하들에게 정도에 지나치는 처분을 할 경우는 그것을 뉘우쳤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대신의 아뢴 바를 들으니, 세손(世孫)은 이러한 말이 없었고 강서(講書)하는 관원이 외부에서 글을 순서대로 적었으니, 어린 세손을 보도(輔導)함에 있어 어찌 감히 이런 꾀를 쓰려 하는가? 그 비답 가운데 ‘추문하지 말라.[勿推]’는 두 글자는 어린아이에게 항상 속임이 없음을 보여 차라리 엄중히 처분하지 않는 임금이 될지언정 결단코 손자를 속이는 할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니, 비록 엄중히 처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뜻은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좌찬독(左贊讀) 김보순(金普淳)이 글을 올리고 경출(徑出)하였다.
대사간 유정원(柳正源)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에 거행한 진현(進見)과 연대(筵對) 등의 절차는 바야흐로 그것을 행하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면 참으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는 흠궐(欠闕)이 되었지만, 그것을 이미 거행한 데에 이르러 말한다면 역시 이것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늘 해야 할 일이니, 어떻게 이것을 믿고서 ‘이미 이 일을 잘하였으니 다른 것은 고쳐야 할 과실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하(邸下)께서 지난 겨울부터 신료(臣僚)들의 면계(勉戒)에 대하여 으레 깊이 유념하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공정하게 그 뒤를 논하여 보면 일찍이 한 가지 일이라도 펴거나 시행하여 행동에 이른 것은 없었으니, 이는 ‘깊이 유념하겠다[體念]’는 두 글자가 단지 수응(酬應)하고 대답하는 좋은 제목(題目)일 따름임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유시(諭示)한 바 가상(嘉尙)하게 여기고 마음과 뼈에 새겨 두겠다는 등의 말 또한 지난날에 하던 것과 같지 않아 기필하지 못하겠으며, 마침내는 즐겁게 하되 계속하지 못하는 데로 돌아가도록 할 뿐이니, 저하께서는 한갓 허물을 고친다는 이름만 있고 허물을 고치는 실상은 다하지 않으며, 한갓 이미 지난날의 일을 부끄럽게 여길 줄만 알고 바야흐로 닥쳐오는 일이 근심스러움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계속해서 아첨하면서 뜻을 받들고 윗사람을 인도하면서 버릇없이 구는 자는 물리쳐서 멀리 배척해 버리고, 진기한 노리개나 기이한 의복으로 심지(心志)를 미혹되게 하고 어지럽히는 자는 엄중히 금지하고 통렬하게 끊어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4일 신묘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김상복(金相福)과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의 정사(政事)였다. 이섭원(李燮元)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령하기를,
"전교(傳敎) 가운데 미안(未安)한 하교가 있었는 듯하여 황송(惶悚)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대조(大朝)께서 말씀하신 뜻은 나를 시켜 세손(世孫)에게 강독을 권면하도록 하려는 것인데, 이렇게 성후(聖候)가 불편하신 때를 당하여 영(令)을 내리는 것은 미안하니, 대내(大內)에 권면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자, 이창임(李昌任)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삼시(三時)로 진후(進候)하고 연달아 탕제(湯劑)를 올렸다. 임금이 이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에게 하문[下詢]하기를,
"대간(臺諫)으로 통의(通擬)한 임의중(任毅中)·박대유(朴大有)는 누구인가?"
하자, 김상복이 말하기를,
"신은 어떤 인물인지 모릅니다. 임의중은 이조 참의가 알고 박대유는 이조 참판이 아는데, 시종(侍從)으로 적합하다고 하기 때문에 통의하였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인재를 기용하는 방법은 아무리 미관 말직(微官末職)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자세히 살펴서 알아야 하는데, 더구나 시종(侍從)하는 임무이겠는가? 전형(銓衡)하는 자가 어떤 모습의 인물인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아전(亞銓)153) 과 삼전(三銓)154) 이 그들을 안다는 것으로 앙대(仰對)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관인(官人)의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7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의약-의학(醫學)
[註 153] 아전(亞銓) : 이조 참판을 가리킴.[註 154] 삼전(三銓) : 이조 참의를 가리킴.
사신(史臣)은 말한다. "인재를 기용하는 방법은 아무리 미관 말직(微官末職)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자세히 살펴서 알아야 하는데, 더구나 시종(侍從)하는 임무이겠는가? 전형(銓衡)하는 자가 어떤 모습의 인물인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아전(亞銓)153) 과 삼전(三銓)154) 이 그들을 안다는 것으로 앙대(仰對)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관인(官人)의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는가?"
6월 25일 임진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삼시(三時)로 진후(診候)하고 연달아 탕제(湯劑)를 올렸다. 이창의(李昌誼)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고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도록 권면하고, 또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기(京畿) 백성들의 곤궁한 상황을 들으니, 마음이 몹시 슬프다. 그래서 충주(忠州)의 저치미(儲置米) 5백 석(石), 양진창 미(楊津倉米) 5백 석, 강도미(江都米) 5백 석, 남한 산성 미(南漢山城米) 5백 석을 특별히 더 지급하게 하고 그 구역을 넓거나 좁게 나누는 것은 대신과 도신(道臣)이 이미 하교(下敎)를 받았으니, 이것을 즉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장문(狀聞)한 것을 가지고 진곡(賑穀) 2천 석을 더 획급(劃給)하기를 앙청(仰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다 건너 있는 지역에 만약 혹시라도 부족하면 비록 후회한들 어떻게 미치겠는가? 2천 4백 석을 즉시 배로 운반하도록 하되, 신중히 하여 시기를 넘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문(狀聞)을 가지고 금천(金川) 등 여섯 고을의 봄보리와 가을보리를 한결같이 정퇴(停退)하게 하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벼로 환산하게 하는 일을 앙청(仰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봉한이 2천 냥(兩)을 오흥 국구(鰲興國舅)155) 의 제택(第宅)에 더 도와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6월 26일 계사
대사헌 윤봉오(尹鳳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부자(父子)란 자연의 이치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대상이며 사람의 정의로는 가장 친하고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피와 기운이 유통(流通)하며 아프거나 가려움이 서로 관계되니, 이것은 존귀한 사람이나 미천한 사람이 다르지 않으며 현명하거나 어리석다고 하여 구별되지 않습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聖上)의 마음은 바로 저하(邸下)의 마음이며 저하의 마음은 바로 성상의 마음이니, 두 마음이면서도 한 마음으로 융합함이 간단이 없어야 합니다. 성상에게 한 번의 기쁨과 한 번의 노여움이 있으면 저하께서 어찌 당연히 그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으며, 저하에게 한 가지 즐거움과 한 가지 근심이 있으면 성상께서 역시 어떻게 당연히 몰라야 하겠습니까? 저하께서 갑자기 마음을 돌려 뉘우치고 깨달았음은 참으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일대(一大)의 기회로서 모든 제왕(帝王) 가운데서 높이 뛰어나다고 말할 만한데, 어찌 우리 성상으로 하여금 굽어 들을 수 없도록 하겠습니까? 무릇 일을 행함에 있어 진실되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하면 항상 여유가 있고, 숨기고 돌아다보며 두려워 하면 항상 위축이 됩니다.
지금의 사정을 돌이켜 보건대, 어찌 저하의 본심(本心)이 그러해서이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구차하게 우선 편안한 것만 취하고 임시 변통으로 꾸려 나가다가 이에 이르렀으니,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부터 이 뒤로는 말마다 제지를 당하고 일마다 구차스럽게 되며 지나는 길마다 곤란해져 아마도 쾌한 시절을 열지 못할 듯하니, 어떻게 민망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은 문득 현실과 관계가 없는 옛날 일이 되어 버리는데, 지금 다시 무엇을 혐의스럽게 여기며 무엇을 의심합니까? 비록 지극히 작디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마침내는 반드시 드러나고 알려지는 법인데, 더구나 온 세상에서 함께 듣는 바 대단히 큰 경사스럽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연히 한결같이 사방의 사람이 보고 듣는 아래에 사무치게 되는데,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저하께서 일찍이 스스로 진술하지 못한 것이 비록 저하의 본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하의 불안(不安)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가리고 보호하는 것을 충성으로 여기지 말고 숨기지 않는 것을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여기지 마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권면하는 바를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분제조(分提調)에게 하령(下令)하기를,
"도헌(都憲)156) 의 글에 권면하도록 진달한 것은 좋지만 아래 항목의 말은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이며, 유정원(柳正源)의 글과는 달라서 위에다 알리려고 하는 뜻이 없지 않으므로 내가 매우 서글프게 여긴다. 심이지(沈履之)와 홍계희(洪啓禧)의 사건 뒤에 진심을 모두 보였었는데, 또 이런 글이 있게 되어 심이지의 글과는 내용이 서로 통하니, 마침내 위에다 알리는 데에 이르게 된다면 실로 깊이 염려가 되며, 이 때문에 마음을 쓰느라 밤에 잠도 이룰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후(診候)하고 탕제(湯劑)를 올렸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6월 27일 갑오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는데,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후하고 두 차례 탕제를 올렸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이번 도정(都政)에서 내삼청(內三廳)의 경우는 근무 일수가 4, 5일이 차지 않았는데도 으레 출륙(出六)하게 하여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다는 것으로, 병조 판서를 추문(推問)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8일 을미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진후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평강(平康) 등의 고을에 우박의 재해(災害)가 있었고, 진주(晉州) 등의 고을에는 충재(蟲災)가 있었다.
6월 29일 병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후하고 탕제를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은 찬성(贊成)을 추증(追贈)하고, 남연년(南延年)은 병조 판서를 추증하는 데에 그쳤다. 충민공은 비록 잠잘 무렵에 해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남연년이 세운 절개는 옛날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 난리 때의〉 장순(張巡)에게 양보하지 못할 정도이니, 추증하는 관직이 비록 찬성보다 지나치더라도 옳다."
하자,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남연년의 성(姓)은 〈당(唐)나라 때〉 남제운(南霽雲)과 같고 이름은 한연년(韓延年)과 같았으므로 당시에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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