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8권, 영조 37년 1761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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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정유

심이지(沈履之)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탕제(湯劑)를 올렸다. 오늘부터 윤번(輪番)으로 숙직하되 부제조(副提調)를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키고, 주서(注書) 김이희(金履禧)는 6품으로 승진시키며, 의관(醫官) 이하는 간략히 상전(賞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평복(平復)157)  을 경하하는 것으로 고묘(告廟)의 의식을 행할 것을 청하고,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같은 소리로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일이 잗달고 번거로운 데 관계된다는 것으로써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자(王世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오위 장(五衛將) 안수장(安壽長)을 소견(召見)하였는데, 황조(皇朝)에서 가장(嘉奬)한 사람인 정봉수(鄭鳳壽)의 외손(外孫)이기 때문에 전조(銓曹)로 하여금 내외장(內外將)의 빈 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7월 2일 무술

박상덕(朴相德)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湯劑)를 올렸다.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조 참판 남태회(南泰會)가 어제 정사(政事)158)  에서 삼재(三宰)159)   한 자리를 신에게 문의(問議)하더니 결국은 그 자리를 보류(保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초에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물었고, 이미 묻고서 차출하지 않았으니, 또한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이는 바로 마음이 흔들리어 우물쭈물하면서 소신대로 하지 못한 소치이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성(大司成) 서지수(徐志修)를 파직하여 조명정(趙明鼎)으로 대신하고, 스스로 사퇴한 여러 장의(掌議)는 일체 모두 10년을 한정하여 청금안(靑衿案)160)  에서 빼어버리고 외방에 있었다고 일컫는 자는 5년간 〈청금안에서〉 빼어버릴 것을 명하였다. 대개 한 달에 세 번 강독(講讀)을 행하지 않았고 장의가 스스로 사퇴하여 칙교(飭敎)가 있었으나, 그 뒤에도 또다시 떠들썩하였기 때문이었다.

 

황경원(黃景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7월 3일 기해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湯劑)를 올렸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4일 경자

유성(流星)이 구진성(句陳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임금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재임(齋任)을 데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숙야잠(夙夜箴)》을 외우고 대사성과 더불어 문난(問難)토록 하였으며, 이어 다시 힘쓸 것을 신칙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국 제조(內局提調)를 내가 누워서 보았는데, 내가 이 쇠잔한 기운으로써 입자(笠子)를 쓰고 앉아서 너희를 보게 된 것은 예전에 선비를 대우하던 성의(聖意)를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이 장의(掌議)를 스스로 사퇴한 자는 규식을 정하여 엄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영원히 청금안(靑衿案)에서 빼어버리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재임(齋任)을 임명하는 일로 거듭 엄교(嚴敎)를 내리니, 여러 유생들이 겁을 먹고 대궐 아래 모여서 차출하여 아뢰었는데, 이는 바로 국조(國朝) 3백 년에 없던 일이라고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5일 신축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이수득(李秀得)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임금이 호조 판서를 소견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기강(紀綱)이 날로 실추(失墜)되고 습속(習俗)이 날마다 떨어져서 폐단을 따라 개혁하고 해이(懈弛)함을 따라 신칙하기 때문에, 법망(法網)은 점점 조밀하여지고 금령(禁令)은 점차로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시행된〉 뒤로 《수교집록(受敎輯錄)》이 있게 되었고 《수교집록》이 〈시행된〉 뒤로 또 승전(承傳)이 있어 더욱더 어수선해졌으므로, 《속대전(續大典)》의 제작이 이에 말미암게 되었다. 그 뒤에도 또한 신칙한 일이 있는데, 유사(有司)가 만약 이것을 모두 수교(受敎)로 삼는다면 어찌 ‘대강(大綱)을 들면 세목(細目)도 자연히 명백(明白)하게 된다.[綱擧目張]’는 뜻이겠는가? 그 뒤에 비록 혹시 처분하는 하교가 있더라도 이미 승전을 받들어 규식으로 정하라는 명이 없으면 수교로 유취(類聚)하지 말 것을 각 해사(該司)에 신칙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난날 이창임(李昌任)이 상서한 것을 특별히 돌려주게 한 것은 진실로 효(孝)로 다스리는 정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그때 하령(下令)하신 내용에 조선 신자(朝鮮臣子)라는 어구(語句)는 또한 사령(辭令)을 신중히 하는 도리에 흠결이 됩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원서를 들여 보내라[原書入之]는 네 글로써 답을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송명흠(宋明欽)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부자(父子)는 천성(天性)에 타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나 필서(匹庶)의 천민도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는데, 더구나 저하께서는 지극한 정성과 순수한 조행이 어렸을 때에도 나타나셨으므로 어찌 이에 미진한 바가 있겠습니까? 이는 대조(大朝)께서 잘못한다고 노여워 내리신 분부에 대하여 엄한 두려움을 갖고 소인들이 이간하는 말에 의혹을 갖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신(大臣)들은 한기(韓琦)161)  처럼 성·경(誠敬) 두 가지를 곡진하게 하지 못하였고, 언자(言者)는 주자(朱子)처럼 심성(心性)의 근본된 바를 밝히지 못하여 더욱더 의심하고 망설이게 되어 이에 이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더구나 성상께서는 인자하고 측은하신 마음이 백왕(百王)에 뛰어나셨는데 그렇고도 저하에게 처음부터 어찌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두었겠습니까? 오직 그 사랑함이 지나쳐서 하나의 일에서라도 혹 생명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고, 기대가 깊어서 혹시 하나의 행동에서라도 착함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셔서입니다. 비록 그 착한 일을 하도록 권하는 즈음에 간혹 사기(辭氣)가 지나치게 엄격한 데 이르게 되더라도 그러한 까닭을 따져보면 순전히 자애로운 본심과 교회(敎誨)하는 지극한 심정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저하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효경(孝敬)하는 마음을 일으켜 한결같은 마음으로 순종해 받들어서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며, 감히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생각을 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날로 쌓고 달마다 쌓아서 오랫동안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성상께서 자애하신 덕에 어찌 흔연히 기뻐하고 환연히 풀려서 다시는 조금의 간격도 없게 될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대저 하늘은 살리는 것으로 마음을 삼기 때문에 살리기를 좋아하면 기뻐하고 죽이기를 즐기면 노여워하며, 하늘은 건실(健實)한 것을 도(道)로 삼기 때문에 부지런하면 기뻐하고 게으르면 싫어하며, 천리(天理)는 정결(淨潔)하고 정미(精微)하기 때문에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와 더불게 되고 여러 모로 즐기며 놀기만 하면 그를 버리며, 하늘의 덕은 지극히 성실하여 망령됨이 없기 때문에 독실하고 순일(純一)하면 복을 누리게 되고 남이 보지 않는 곳과 남이 보는 곳을 구분해서 두 가지 행동을 하면, 그와는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사(前史)에 실린 것을 두루 고찰하고 귀와 눈으로 직접 경험한 바를 가까이 참고하건대, 비록 그 효응(效應)의 이르름은 늦고 빠른 다름이 있으나 그 결국에 가서는 요컨대,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상서롭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면 반드시 앙화(殃禍)를 받으며, 어질면 반드시 흥왕하고 포악하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군(儲君)께서는 구사(九四)162)  의 자리에 처하여 직분이 시선(視膳)163)  하는 데에 있으니, 상벌(賞罰)과 위복(威福)을 의리상 스스로 오로지 할 수 없고 동정(動靜)과 작위(作爲)는 반드시 품명(稟命)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에서 혹 능히 삼가지 못하고 천심(天心)을 거스르면 그 재앙을 부르고 허물이 이르는 바를 또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서를 아뢰자 우의정 홍봉한이 동궁(東宮)에게 구대(求對)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산림(山林)이 상서한 것은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몹시 개탄스럽다. 부자의 사이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바인데 말한 뜻이 마치 남들이 이간하고 있는 듯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내 병이 조금 낫다가 이를 인하여 다시 더하니, 또한 무슨 마음으로 탕제를 먹고 수라를 들겠는가? 글의 뜻이 대부분 요점(要點)을 빠뜨렸고 또한 좋지 못한 곳이 있다. 만약 위에 올려 전해지면 반드시 말썽을 빚게 될 것이니, 내가 어찌 마음을 쓰지 않겠는가?"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이 서울의 소식을 자세히 얻어 듣지 못하고 이런 글이 있었으나, 결코 위로 대조께 전하여 질 이치가 없으니, 바라건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성상께서 돈소(敦召)하신 사지(辭旨)가 정중하여 미물의 돈어(豚魚)까지 감읍(感泣)시킬만 한데 경(卿)의 사양하는 소장이 또 이르렀으니, 마음에 실로 놀래고 잇따라 나의 성의가 얕은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경은 대대로 녹을 받는 신하로 어찌 차마 편안하겠는가? 권면하는 바가 간절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아뢴 바에 따라 원서(原書)는 궁중에 머물러 두겠다."
하였다.

 

7월 6일 임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자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 드실 것을 청하니, 임금이 세 번 맛보고 엎어버렸다. 여러 신하가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향소(享所)에 참여하지 않고 누워서 약을 먹는 것이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이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유신(儒臣)을 불러 《봉주강감(鳳洲綱鑑)》을 읽게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7월 7일 계묘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堯)·순(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내가 옛날에 효·제를 능히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비록 뒤쫓아 하려고 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조금이나마 작은 정성을 펴는 것은 오직 사전(祀典)에 있는데, 봄과 여름이 이미 지나고 초가을이 거의 반이나 되었는데도 한번도 몸소 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를 효라 하겠는가? 그 비록 섭행(攝行)하라고 명하였으나 마음은 단문(丹門)164)  에 걸려있다. 이번에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執事)는 반드시 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난도(鑾刀)165)  로 모혈(毛血)을 취하고 여러 축사(祝史)가 솥을 받들어 올리는 것도 또한 친히 제사를 지내는 예(例)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 아닌가? 대종백(大宗伯)이 희생(犧牲)을 살펴보고 소종백(小宗伯)이 제기(祭器)를 살펴보는 것은 예가 지극한 것인데 형식에 지나지 않게 하고 있다. 서계(誓戒)166)  의 글은 귀로 비록 듣고도 마음으로 능히 행하지 못하니, 이와 같이하면 비록 종고(鍾鼓)를 아뢰더라도 어찌 강림함이 있겠으며 비록 옥백(玉帛)을 드리더라도 어찌 흠향하기를 바라겠는가? 또한 내가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은 마음을 본받아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이 말을〉 본서(本署)의 향대청(香大廳)에 써 붙이고 각기 스스로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우의정 홍봉한이 구대(求對)하였다.

 

7월 8일 갑진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칠석제(七夕製)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한 유생(儒生) 이약채(李若采)를 소견(召見)하고, 〈《서경》 주서(周書)의〉 소고편(召誥篇)을 외우도록 명하고 급제(及第)를 내렸다. 차석(次席)인 서호수(徐浩修)가 외우지 못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늘이 하는 것이다. 너는 그 할아비와 아비의 자손으로 과제(科製)에 어비(御批)가 있어, 능히 강(講)을 하였으면 급제를 내리려 하였는데 너는 그리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경기 감사의 장본(狀本)으로써 우러러 청하기를,
"창고에 유보된 군향미(軍餉米)와 회부모(會付牟) 절반을 다시 가분(加分)167)  하고, 피조(皮租) 역시 절반을 분급(分給)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 쌀로 만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강원 감사의 장본(狀本)으로써 우러러 진달하기를,
"각 진관(鎭管)으로 하여금 매양 해마다 8월에 각각 시(詩)와 부(賦)로 인재를 뽑은 뒤에 도사(都事)가 주관하여 처음에 뽑힌 유생(儒生)을 모두 모아 과시(課試)하게 하소서."
하니, 한결같이 3남(三南)의 규례에 따라 정식으로 삼게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유(高裕)는 소년 등과(少年登科)한 지가 지금 몇 년이 되는데 한 낭관(郞官)과 한 현령(縣令)에 이르러 그치고 있으니, 그 어찌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하고, 전조(銓曹)에 신칙하였다. 대개 급제를 준 사람 이약채(李若采)는 곧 영남(嶺南) 사람이기 때문에 임금이 이로 인하여 고유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유신(儒臣)을 불러 《봉주강감(鳳洲綱鑑)》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을사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유신(儒臣)을 불러 《봉주강감》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왕세자의 환후(患候)가 점점 쾌차하여 가자 기축년168)  의 규례에 의하여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에게 상전(賞典)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서계(書啓)를 들여보내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0일 병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군자창(軍資倉)·광흥창(廣興倉) 두 창고에 전부터 매양 흠축(欠縮)의 폐단이 있기 때문에 가승(加升)169)  의 법을 내어 흠축을 보충하여 왔고, 계유년170)   이후로 흠축이 이미 보고된 것을 일체 모두 별도로 기록하여 왔는데, 금년 6월부터 시작하여 만약 흠축이 있으면 해당 창관(倉官)을 해유(解由)171)  에 구애(拘碍)하게 한다면 거의 폐단을 혁신시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중신(重臣) 민진후(閔鎭厚)는 지성으로 공무를 받들었는데도 또한 탕척(蕩滌)하기를 청하였으니, 흠축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창관(倉官)의 해유는 스스로 전례가 있으니, 그 또한 일체의 법으로 삼아서 준엄하게 막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서 《봉주강감》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홍봉한이 구대(求對)하여 안후(安候)를 받들고는 분노를 삼가하고 도량(度量)을 넓게 가지라는 것으로 우러러 힘쓰게 하였다.

 

7월 11일 정미

진휼청에서 상달하기를,
"제주(濟州)에서 내보낸 양대(涼臺)와 감곽(甘藿)이 대양(大洋)에서 치패(致敗)되었으니 법전에 의하여 탕감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균역청 당상(均役廳堂上) 홍계희(洪啓禧)가 아뢴 바로 인하여 김종정(金鍾正)을 북도 어선세(北道漁船稅) 이정 어사(釐正御史)로 삼고 창원(昌原)·김해(金海)의 염전세(鹽田稅)도 또한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7월 12일 무신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진찰하고 탕제는 오늘부터 한 첩만을 올린다고 하였다. 숙직을 파하여 도제조 이하에게 모두 시상(施賞)하고 정시(庭試) 일체를 합하여 설행하며 망제(望祭)에 겸하여 고묘(告廟)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이달 15일에 함께 경축(慶祝)하는 뜻으로 8도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고 16일에는 대신과 의금부와 형조 당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옛 규례를 따라 방면할 만한 자를 서계(書啓)하게 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함경 감사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우러러 진달하기를,
"경흥 개시(慶興開市)에 관하여 본부(本府)로 하여금 대동포(大同布)는 다른 예에 의하여 이식(利殖)을 취하고 그 남는 이자를 더 획급(劃給)하여 우가(牛價)의 부족한 숫자를 보충하게 하고 삼아문(三衙門)의 정곡(正穀) 80석을 획급하여 백성에게 거두는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3일 기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진찰하고 탕제를 올렸다. 소조(小朝)께서 평복(平復)된 경사로 인하여 분제조(分提調) 이하에게 모두 상전(賞典)을 베풀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 약원 숙직은 10일이 차지 않도록 할 것이며, 무릇 제반 일을 모두 기축년172)   구례(舊例)를 좇아 외람되고 잗단 데 이르지 말게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한소(兪漢蕭)를 승지로 삼았다.

 

7월 14일 경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고, 이어서 약방에서 진찰하고 탕제를 올릴 것을 명하였으며, 유신(儒臣)을 소견하여 《봉주강감》을 읽게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사서(司書) 홍낙순(洪樂純)은 누차 특령(特令)을 내렸는데, 도리가 이와 같을 수는 없다. 시강원(侍講院)으로 하여금 신칙하는 것이 옳겠다. 전에 이미 춘방(春坊)에 체직(遞職)을 허락하였으니, 그에게 이미 염우(廉隅)를 편 것이다."
하였다.

 

7월 15일 신해

홍낙순(洪樂純)을 세 번이나 패초(牌招)하였는데 나오지 않으니, 하령하기를,
"소관(小官)을 하루에 세 번이나 패초하는 것은 그 또한 드문 일이다. 신자(臣子)의 도리에 결코 이와 같이 할 수는 없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진찰하고 오늘부터는 탕제를 다려서 드리며 문후(問候)는 3일을 일차(日次)로 삼는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6일 임자

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소결(疏決)하는 일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류안(徒流案) 가운데 혹 계모(繼母)를 박대하거나 혹은 부모를 박대하며, 심지어는 그 어미를 꾸짖어 내쫓는 무리가 매우 많다. 그전 소결에서 모두 거론하지 않았으니 석방할 기약도 없다. 인륜(人倫)이 얼마나 중한가? 이런 죄목으로 사람에게 경솔히 시행할 수는 없다. 그자들이 비록 무상하나 이런 것으로 단안(斷案)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이다. 이런 일에도 진짜와 가짜가 서로 섞여 있으니 그 진짜라면 이 형률도 오히려 가볍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한갓 억울할 뿐만 아니라 형정(刑政)은 결코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차후로 이와 같은 자는 장문(狀聞)하여 처리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통쾌한 필법(筆法)으로 감률(勘律)하여 풍화(風化)를 떨어뜨리지 말라는 뜻으로 여러 도에 신칙하라."
하였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도류안 가운데 만약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 문안(文案)이 너무 지나치면 한 번 그대로 두어 소석(疏釋)할 기약이 없게 되니,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배소읍(配所邑)에 분부하여 죄인에게 초사를 받고 해당 읍에 문서로 왕래하여 만약 그 죄상(罪狀)이 이와 같으면 형률에 의하여 감단(勘斷)해 처리하고 만약 그 문안이 너무 지나치면 그 죄목(罪目)을 정하고 도류안에 고쳐 기록하여 알려주어 시행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옳으니, 이로써 여러 도에 분부하라."
하였다.

 

유언민(兪彦民)·박사눌(朴師訥)·이익원(李翼元)·이의철(李宜哲)·심발(沈墢)·이영휘(李永暉)를 승지로 삼았다.

 

형조 판서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이종인(李宗仁)은 추탈 죄인(追奪罪人) 이광좌(李光佐)의 얼자(孼子)로서 도성 아래에서 버젓이 있으면서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니 지극히 방자합니다. 청컨대 도배(島配)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관(刑官)이 동궁에 진서(陳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처음에 이광좌의 계자(繼子) 이종익(李宗益)이 아들이 없자 그의 아내가 이득종(李得宗)의 아들로 후사를 삼기를 청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성급히 회계(回啓)하였으므로, 대개 모두가 이종인이 지휘하고 주선한 힘에서 나온 것이다. 이익정이 마침내 경솔하게 지레 회계한 것으로써 상서하여 스스로 인책하고 이어서 그 문장(門長) 이사좌(李師佐)가 문권(文券)에 서명(署名)한 죄를 청하여 심지어 잡아다 처치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남태제(南泰齊)가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하고 홍봉한이 또 이종인의 무엄한 죄상을 진달하여 징집(懲戢)할 것을 청하였다.

 

남태제(南泰齊)가 아뢴 바를 인하여 영성 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가 금리(禁吏)를 장타(杖打)한 것으로 특별히 파직을 명하였다. 홍봉한이 아뢴 바로 인하여 전 현감 정심(鄭杺)의 죄를 감등하여 육지로 내보냈다. 홍봉한이 전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을 용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만약 김시찬을 석방하면 내가 지하(地下)에 돌아가서 선왕(先王)께 배알할 낯이 없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7일 계축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추전알(秋展謁)을 행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백성을 데리고 들어오게 하고 농사의 형편을 하순(下詢)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8일 갑인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헌관(獻官) 이익보(李益輔)가 향축(香祝)을 받들어 모시는 데 조금도 정성스러운 뜻이 없으므로 파직하라고 명하고 약방 제조 김상복(金相福)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어서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오부 관원(五部官員)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여염집을 탈입(奪入)한 것을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찾아내어 아뢰게 하였다. 제주도(濟州島) 사람을 불러 들여서 진휼청으로 하여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주게 하고, 하교하기를,
"경자년173)  에 능침(陵寢)을 역사할 때 저 섬 백성들이 지성으로 힘을 다하였기 때문에 자성(慈聖)께서 또한 상을 내려 주셨으니, 내가 주는 것도 또한 옛날 일에 감동한 뜻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19일 을묘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및 오부 관원(五部官員)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전라 감사의 장본(狀本)을 인하여 우러러 청하기를,
"장흥(長興) 금당도(金塘島)는 본래 양향청(粮餉廳)에 소속된 둔전(屯田)인데, 경작(耕作)하기에 적합하고 양송(養松)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이 뒤로는 도로 양향청에 소속시켜서 백성에게 경작을 허락하여 군수(軍需)를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오부 관원을 나오라고 명하여 여염집을 탈입(奪入)하는 데 대한 금령을 범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하순(下詢)하였는데, 중부 도사(中部都事) 김시눌(金時訥)이 유독 없다고 앙대(仰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부만이 어찌 홀로 없겠는가? 이미 단속하지 못하고 또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먼저 태거하되 연도를 한정하지 말고 직임을 제수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전후 한성부 당상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범금할 때 해부 당상(該府堂上)은 월봉(越俸) 1등174)  을 하며, 그때 부관(部官)은 모두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175)  을 시행하고 범금한 자는 본 형률 외에 3년 정배(定配)를 더하며, 이 뒤로 만일 범금된 자가 있으면 또한 낱낱이 자수(自首)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약방에 입진을 명하였다.

 

이달 21일에 친히 태실(太室)에서 기우제(祈雨祭)를 행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같은 날 사직단(社稷壇)에서 섭행(攝行)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며, 친히 기우제문을 지었다. 윤동섬(尹東暹)이 오열(嗚咽)하며 말하기를,
"전하께서 여러달 동안 정섭(靜攝)한 나머지에 이런 하교가 계시니 어찌 자신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니 내 마음이 편치 않다. 만약 한번 친히 기도한다면 내 마음의 번거롭고 답답함이 조금은 나아질 것 같다."
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어찌 차마 이런 하교를 하십니까? 백성은 생각하시면서 성궁(聖躬)은 유독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약간의 비야 저절로 내릴 것인데 하필 성체(聖體)를 수고스럽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친히 행하지 않으면 내 마음의 불안함이 마땅히 갑절이 될 것이니, 어찌 친히 행하여 마음이 편안한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윤동섬·조명정이 말하기를,
"신 등은 참으로 받들어 거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선위(禪位)의 명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니 경 등은 부녀자나 환관의 충성이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윤동섬이 말하기를,
"신 등의 말로는 마음을 돌려 듣도록 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나가 대신과 여러 신하를 불러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당장 친히 따가운 햇빛에 드러내고 있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미 이와 같으시니 신 등은 다만 마땅히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그치고 하교하기를,
"이제 중관(中官)이 적간(摘奸)한 단자(單子)를 보건대, 중부 도사(中部都事) 김시눌(金時訥)이 더욱 형편 없는 사람이다. 잡혀온 사람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우선 수금(囚禁)하였다가 제사를 지낸 뒤에 영남(嶺南)의 연안(沿岸)에 감률(勘律)할 것이며, 김성우(金聖遇)는 곤수(閫帥)의 신분으로서 첩(妾)을 위하여 범금하였으니, 제사를 지낸 뒤에 해부로 하여금 회령부(會寧府)에 3년간 투비(投畀)를 더하게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0일 병진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망묘례(望廟禮)를 행하였는데, 전(殿) 안에 들어와 제기(祭器)를 살피고 전 밖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폈다. 그런데 하나의 희생이 체구가 작다는 것으로 봉진(封進)한 목사(牧使)를 해부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고 해서(該署) 제조(提調)는 파직하며, 배진(陪進)한 낭청(郞廳)은 일이 지난 뒤에 해부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였다. 조신(朝臣)으로서 관직이 1품(品)에 있으면서 조복(朝服)을 입지 않은 자와 경재(卿宰)로서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배반(陪班)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모두 파직을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1일 정사

임금이 친히 태묘에서 기우제를 행하였다. 임금이 홀(笏)을 잡고 친림하자 비가 주룩주룩 내려 곤의(袞衣)가 다 젖어 옥체(玉體)가 훤히 내비치었으나 밤새도록 밖에 서 있자, 약방 도제조 한익모(韓翼謨) 등이 소차(小次)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 내리기를 기도하면서 비를 피하면 어찌 친히 기도하는 뜻이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번 거조는 반드시 하늘에 계시는 우리 선왕의 영혼에게 슬픔을 끼치는 일입니다."
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파제(罷祭)한 뒤에 보연(步輦)으로 환궁하였는데, 반항(班行)에 자리를 펴놓고 있는 자를 보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 군주(君主)는 백성을 위하여 비 내리기를 기도하는데, 신자(臣子)가 되어 어찌 감히 편안함을 취한단 말인가?"
하고, 이어서 옥교(玉轎)에서 내려 몇 걸음 걷다가 말하기를,
"이는 하늘에 계신 선조(先祖)에게 우러러 사례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대신 이하에게 걸어서 따라 오도록 하령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모든 관료(官僚)를 동독(董督)하여 신칙하지 못한 것으로 궐하(闕下)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경기의 백성을 불러 비가 내린 것이 많은가 적은가를 묻고 도로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며,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2일 무오

형조 판서 남태제(南泰齊)와 참판 김시묵(金時默)이 상서하여 이광좌(李光佐)의 얼자(孼子) 이종인(李宗仁)을 정배(定配)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남태제가 소결(疏決)할 때에 이종인이 방자하고 무엄하다는 것으로써 정배(定配)할 것을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형관(刑官)은 동궁(東宮)에게 상서하라고 하교하였기 때문에 이에 이르러 연명(聯名)하여 상서한 것이었다.

 

임위(任瑋)를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3일 기미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환가(環駕)할 때에 반열의 의식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자연히 백관의 죄이니 동칙(董飭)하고 견벌(譴罰)한들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그런데 천승(千乘)의 존귀함을 강굴(降屈)하여 친히 옥지(玉趾)의 행보를 수고롭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어찌 일찍이 예로부터 성제 명왕(聖帝明王)이 뭇 신하의 유죄(有罪)로 인하여 스스로 낮춤이 이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았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정순검(鄭純儉)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그저께 법강(法講)에 참여하지 않은 유신(儒臣)은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오늘을 승패(承牌)176)  의 여부를 물론하고 소패(召牌)를 기다려 참여하지 않은 유신은 우선 파직하였으며, 김노진(金魯鎭)은 변명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않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이조 당상과 낭관 및 병조 당상과 낭관을 입시(入侍)하게 하고 친정(親政)하였는데, 이조 판서가 늦게 들어왔으므로 파직하라고 명하고,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판서로, 조영진(趙榮進)을 도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4일 경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간 정순검(鄭純儉)이 말하기를,
"오직 그 만년(晩年)의 정무에서 분려(奮勵)에 급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혹 사교(辭敎)하시다가 중도를 잃은 것이 있으니, 다만 성인(聖人)의 중화(中和)한 덕에 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노령(老齡)에 몸을 조섭하는 방도에도 손상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지금부터 더욱 함양(涵養)의 공부에 뜻을 더하여 성학(聖學)이 더욱 높아지고 옥체(玉體)에 손상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포용하고, 이어서 조강(朝講)하여 《대학》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정순검이 박치륭(朴致隆)의 패초(牌招)를 어긴 것으로써 파직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기에게 있으면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인군(人君)의 일이지만, 자기에게는 없으면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인군의 일이 아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장령 신근(申)이 북영(北營)에서 각읍(各邑)으로 하여금 해물(海物)을 무역하여 바치게 한 일로써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여 처치할 것을 청하니,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진실로 의견이 있으면 일에 따라 곧바로 청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이에 묘당에 하순하라는 것으로써 위곡(委曲)하게 말을 하였으니, 대간의 체모에 손상됨이 있습니다. 청컨대 중추(重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과 관계되는 바 때문에 이런 청이 있었던 것인데, 부제학의 말은 지나치다."
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이 말씀 드린 바는 체통이나 규례에 대한 일에 지나지 않았는데 성상의 하교는 언로(言路)를 부식(扶植)하는 데 두셨으니, 신이 마땅히 지나치다고 함을 달갑게 받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5일 신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헌부(憲府) 【장령 신근(申)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금천 현감(衿川縣監) 이사국(李思國)은 오디[桑葚]를 민호(民戶)에서 나누어 받아들였으니 진실로 이미 해괴한 데에다가 진휼미를 획급(劃給)하면서 직접 점검하지 않고 오로지 하리(下吏)에게 위임하여 나누어주게 하여 원성이 길에 뒤덮혀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공초(供招)하게 하라."
하고, 임금이 삼사(三司)의 함구 묵언(緘口默言)한 것으로써 사간 이수덕(李壽德)을 체차(遞差)하고,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은 추고(推考)하며, 시강원(侍講院)·강서원(講書院)의 주서 겸춘추관은 죄다 일산(日傘)을 펼친 것으로써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홍지해(洪趾海)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헌납 홍지해(洪趾海)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국사(國士)로 대우하면 국사로 보답한다.’고 하였으니, 그 임금이 국사로 그 아비를 대우하면 그 자식된 이는 마땅히 국사로서 그 임금에게 보답할 것이다. 작년 연백(筵白)할 때에 곧바로 정방(鄭枋)의 죄를 청하였으니, 일로 보아서는 명쾌하였다."
하니, 특진관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그때에 유신(儒臣)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되는 대로 지껄였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6일 임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대사간 정순검(鄭純儉)과 장령 신근(申)에게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는데, 언관(言官)들이 조용하던 까닭으로 3일을 연달아 소회(所懷)를 아뢰어 가상함에 관계되므로 이런 상전(賞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순검은 거듭 징채(徵債)를 금할 것을 청하였고, 신근은 각 영문(營門) 조곡(糶穀)에서 전체 모곡(耗穀)을 회록(會錄)하는 것에 대해 일체 엄금할 것을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문신(文臣)으로 시종신(侍從臣)인 하대부(下大夫) 이상과 삼사(三司)의 신하와 무신(武臣)으로 일찍이 곤수(閫帥)를 지낸 이상과 음관(蔭官)인 판결사(判決事) 이상이 불법에 관계된 외에 해부(該府)의 결안(結案)한 말에 이미 지만(遲晩)177)  한 것은 수교(受敎)에 의하여 조율(照律)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일에 대하여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守令)을 가리는 것은 생재(生財)의 도리를 위한 것이니, 수령을 잘 가리지 못하면 얼마의 취렴(聚斂)하는 신하를 만들지 모를 일이다. 아 대부(阿大夫)178)  는 탐욕스럽기 때문에 〈임금의〉 좌우(左右)를 잘 섬기어 그 탐욕스러운 것을 숨기고자 한 것이다."
하니,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제(齊)나라 선왕(宣王)은 하나의 즉묵 대부(卽墨大夫)179)  를 봉하고 아 대부를 삶음으로써 제나라가 크게 진작(振作)하였으니, 인군(人君)은 단지 한두 사람을 주선함으로써 문득 조정의 기강을 옮기어 심는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또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용(中庸)》은 무성 무취(無聲無臭)로써 끝을 맺었는데, 이 책에 이것으로 끝을 맺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중용》에 성찰(省察)을 먼저 하고 다음으로 함양(涵養)에 대하여 말을 하여 무성 무취에 들어간 것은 하늘에서 명한 성품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바요, 《대학》에 이재(理財)를 먼저 하고 다음으로 용인(用人)에 대하여 말을 하여 의리(義利)에 들어간 것은 신독(愼獨)의 기미가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이사국(李思國)을 석방하였으니, 선전관과 어사가 돌아와 아뢴 것을 인하여 사실을 알고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승지가 여러 의원을 데리고 입진하였다.

 

7월 27일 계해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승지가 여러 의원을 데리고 입진하였다.

 

7월 28일 갑자

영암(靈巖) 등 고을에 해일(海溢)과 벌레와 게[蟹]가 재해를 입혔으며, 삼화(三和) 등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7월 29일 을축

이정철(李廷喆)·심이지(沈履之)를 승지로,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참의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이길보(李吉輔)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생복(生鰒)에 대해 복정(卜定)180)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민폐(民弊)가 있다는 것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한 마리의 말에 싣는 것이 무슨 민폐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건복(半乾鰒)을 규례에 의하여 진상(進上)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황해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수사 심의희(沈義希)를 파직하였으니, 그가 요망장(暸望將)을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 때문이었다. 북도 어사 김종정(金鍾正)이 균역청 당상 홍계희(洪啓禧)와 더불어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이정(釐正)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관상(李觀祥)이 일찍이 수사를 지낸 것은 사체(事體)가 무엇한 것 같다는 것으로써 특별히 체개(遞改)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자(世子)의 중자(衆子)의 봉작(封爵)은 적서(嫡庶)를 물론하고 취부(就傅)181)  하는 나이로 한정을 삼으라."
하였다.

 

선혜청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강원 감사의 장문(狀聞)을 인하여 우러러 청하기를,
"본도(本道) 이맥(耳麥)182)  의 받기 어려운 것은 절반을 한정하여 돈으로 바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승지가 여러 의원을 데리고 입진하였다.

 

7월 30일 병인

한광조(韓光肇)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갔다.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태추문(泰秋門)을 경유하여 나아가 단소(壇所)에 봉심(奉審)하고, 황단의 수복(守僕) 황선(黃繕)을 소견하였으며, 군문(軍門)에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황선이란 자는 황조(皇朝)의 전당지부(錢塘知府) 황공(黃功)의 5세손이다. 임금이 요금문(耀金門)을 열고 여(輿)에서 내려 문지방을 넘은 지가 두 번이었는데,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성모(聖母)께서 일찍이 이곳을 두 번 넘으셨을 것이다."
하였다. 환궁할 때에 한천동(寒泉洞) 입암(立巖)의 여양 국구(驪陽國舅)가 살던 옛 터를 역림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趙榮進)에게 하교하기를,
"인현 성후(仁顯聖后)께서 탄강(誕降)한 유지(遺址)를 알아서 들이라."
하니, 조영진이 반송방(盤松坊) 입암의 밑이라고 앙대(仰對)하였다. 어가(御駕)가 한천동 입구에 임하니, 한성 우윤 이경호(李景祜)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길이 좁고 또 험준하니 만약 보여(步輿)로 나가시면 거의 다니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조영진은 또 아뢰기를,
"신이 다시 민범수(閔範洙)의 말을 듣건대, 성후(聖后)의 탄강(誕降)은 실로 거동(車洞)에 있었다고 하는데 또한 준신(準信)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어느 곳인가 상세히 알아보기를 기다린 뒤에 어가(御駕)로 왕림하여 보시는 것이 아마도 신중히 살피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한참 동안 연(輦)을 머물자 대소 여러 신하가 모두 험준하고 좁아서 나가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추모(追慕)하는 일로 왔는데 보지도 않고 돌아간다면 아들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보여(步輿)를 타고 나아가니, 여러 신하가 따르다가 간혹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임금이 입암(立巖)에 임하여 우의정 홍봉한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형국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참으로 사록(沙麓)183)  에 경사스러운 일이 모인 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환궁하니 밤이 거의 삼경이었다. 임금이 한천동에 비석을 세우라고 명하고 손수 비액(碑額)을 썼는데, ‘인현 성후 탄강 구기(仁顯聖后誕降舊基)’라 하고 ‘영모비(永慕碑)’라고 이름하였다. 이튿날 국구(國舅)의 집에서 저 지난 기유년184)  의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냈는데 곧 거동에 거주하였었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승지가 잘못 알고서 여러 신하로 하여금 공연히 크게 피곤하게 하였다."
하고, 곧 거동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세워서 유지(遺址)를 표시(表示)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과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에게 명하여 살펴보고 형지(形址)를 그려서 올리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영진(趙榮進)은 성후(聖后)의 가까운 친속으로서 그가 예전의 일을 안다고 하면서 앞에서 난여(鑾輿)를 인도하였는데 이미 손위(遜位) 때 사제(私第)에 대해서 잘못 알았고, 재차 탄강(誕降)한 옛터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으니, 이때에 사람들이 그 주착(做錯)의 실수를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한 분노하여 꾸짖는 자가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67책 98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74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예술-미술(美術) / 주생활-택지(宅地)


[註 183] 사록(沙麓) :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춘추 시대 때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해에 애제(哀帝)가 죽은 후 섭정(攝政)하였던 것임.[註 184]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영진(趙榮進)은 성후(聖后)의 가까운 친속으로서 그가 예전의 일을 안다고 하면서 앞에서 난여(鑾輿)를 인도하였는데 이미 손위(遜位) 때 사제(私第)에 대해서 잘못 알았고, 재차 탄강(誕降)한 옛터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으니, 이때에 사람들이 그 주착(做錯)의 실수를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한 분노하여 꾸짖는 자가 많았다."

 

왕세자(王世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승지가 여러 의원을 데리고 입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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