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묘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승지가 여러 의원을 데리고 입진하였다.
8월 2일 무진
김원행(金元行)을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입시하여 성후(聖后)께서 탄강(誕降)한 유지(遺址)를 그려서 올리니, 임금이 오늘부터 역사를 시작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입암(立巖)도 성후께서 어린 나이에 거처하셨던 유기(遺基)인데 지금 채소밭이 되어버렸으니 보기에 놀랄 일이다. 국구(國舅)의 후손으로 하여금 집을 짓고 들어가 살게 하되 또한 호조에서 돌보아서 도와 주고, 지금 비석을 세운 곳에도 또한 그 집에서 대대로 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고(故) 우상(右相)과 전 영상이 각각 재신(宰臣) 중에서 두 사람씩 천거하였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용되었으나 두 사람은 아직 발탁하여 등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이 천거하는 사람을 차례로 기용하려고 하였는데, 고 상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서지수(徐志修)를 형조 판서에 발탁하여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옛사람의 기상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자질구레한 염우(廉隅)를 돌아보지 않으니, 지난번 호조 판서에 궐석이 있을 때 내가 또한 그를 생각해 보았으나 만약 호조 판서가 되었으면 반드시 자주 추고를 받았을 것이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 결코 국사를 그르칠 사람이 아닙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형(銓衡)으로 삼아야겠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 추천한 가운데 한 사람은 재기(才器)와 문망(文望)이 또한 크게 임용하기에 적합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양택(金陽澤)은 그 아비에 비하여 부족하였는데 근래에는 은연 중 아버지의 기풍이 있기는 하지만 전형(銓衡)으로는 혹 쉽게 흔들릴 것 같고 호조에는 부족한 것 같다."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본래 지조가 있으니 결코 남에게 동요되어 뜻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며, 또 사무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전 참의 이존중(李存中)의 작고(作故)한 일을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놀라며 탄식하기를,
"지금 세상의 사람도 반드시 당색이 없지 않으니, 만일 이존중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흔쾌하게 여기는 자도 있을 것이다. 내가 놀라서 물었는데, 또한 나의 마음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이어서 조영순(趙榮順)을 쓸만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서용하는 것을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옹치(雍齒)를 봉(封)한 것185) 과 똑같이 할 것이다."
하고, 특별히 보덕(輔德)을 제수하였으며, 이어서 하교하기를,
"오늘 특별히 제수한 것은 진실로 꿈 밖이다. 숭현문 밖에서 듣는 자들이 반드시 모두 용동(聳動)할 것이니, 임금의 거조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3일 기사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4일 경오
홍계희(洪啓禧)를 홍문관 제학으로, 김양택(金陽澤)을 겸우유선(兼右諭善)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을 소견하고 황해도 관찰사로 대신 갈 사람을 하순(下詢)하니, 홍봉한이 이익보(李益輔)·한익모(韓翼謨)·이창수(李昌壽)로 앙대(仰對)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끝에 의망한 자가 더욱 좋다."
하였고, 임금이 또 함경도 관찰사로 대신 갈 사람을 물으니, 홍봉한이 정홍순(鄭弘淳)으로 앙대하였다.
이때에 서학동(西學洞) 여경방(餘慶坊)에 화경 숙빈(和敬淑嬪)이 탄생한 옛집이 있었는데, 임금이 내승(內乘) 최조악(崔朝岳)에게 명하여 형지(形址)를 그려 오게 하고 이어서 탁지(度支)186) 에 명하여 그 값을 주게 하였으며, 증(贈) 최 영상(崔領相)·증(贈) 홍 찬성(洪贊成)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살면서 전매(轉賣)하지 못하게 하였다. 증(贈) 최 영상은 곧 숙빈의 아버지이고 증 홍 찬성은 곧 숙빈의 외조(外祖)이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춘방(春坊)에서 책자(冊子)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라는 영을 들었는데 진실로 기쁩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어제부터 《숙야잠(夙夜箴)》을 진강(進講)하였다."
하였다.
8월 5일 신미
임금이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양한(兩漢)187) 의 사명(辭命)을 초록(抄錄)하여 편성하게 하고 그 서문을 어제(御製)하였다.
임금이 거동(車洞)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탄강한 옛터에 거둥하여 증(贈) 영상(領相) 민광훈(閔光勳)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내외 자손을 이곳에 거주하라고 명하고, 사복 판관(司僕判官) 김이장(金履長)은 특별히 승진시켜 서용할 것을 명하였으며, 고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김창집(金昌集)의 사우(祠宇)가 그 집에 있기 때문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그리고 서학동 숙빈이 탄생한 옛집에 거둥하여 기문(記文)을 어제(御製)하고 친히 써서 편액을 걸었다. 이때에 거주하는 사람 백용대(白龍大)에게 면천(免賤)하고 복호(復戶)하여 그 값을 돌려주었으며, 이어서 수직(守直)을 차출하고 또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6일 임신
임금이 여경방(餘慶坊)의 일로써 친히 육상궁에 고유제(告由祭)를 행하고, 환궁할 때에 효장(孝章)·의소(懿昭) 두 사당에 두루 들렸다가 돌아왔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7일 계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서학(西學)의 거재생(居齋生)을 소견하여 그들이 읽은 글을 외우라고 명하고, 붓·먹·종이를 내려주었으며, 이어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 달의 찬수(饌需)를 더 지급하게 하였으니, 대개 유생(儒生) 등이 어제 동가(動駕)할 때에 그 연(輦)이 서학을 지나가므로 문에 나가 지영(祗迎)했기 때문이었다. 반송방(盤松坊) 미전(米廛)의 계원과 여경방(餘慶坊) 및 서학동(西學洞) 사람에게는 특별히 모두 금년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선공 감역(繕工監役) 송재연(宋在淵)을 소견하고 비각의 역사를 하순(下詢)하다가 송명흠(宋明欽)의 종질(從姪)이 된다는 것을 들어 알고서 이에 하교하기를,
"내가 그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하니, 군함(軍銜)을 띠고 올라오라는 뜻으로 너의 숙부에게 돌아가 전해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8일 갑술
이창수(李昌壽)를 평안 감사로, 정홍순(鄭弘淳)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편차인(編次人) 홍인한(洪麟漢)에게 《어제추모기(御製追慕記)》를 교정(校正)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인현 성후(仁顯聖后)께서 복위(復位)된 것은 곧 내가 탄생한 해이다. 성후께서 자애하신 심정으로 덮어 주심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일찍이 어주(御廚)의 남은 반찬으로 나를 먹여 주셨다. 내가 깊이 성후의 은혜를 받은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우리 성후에게 향모(向慕)하게 된 까닭을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다 굽어 살피실 것이다. 신축년188) 사이에 한쪽 편 사람은 자성께서 본제(本第)에 대해 치우쳐 후하게 하는가 의심을 하는가 하면, 한쪽 편 사람은 그 너무 박하게 한다는 것으로 한탄하였다. 을해년189) 신치운(申致雲)의 사건이 있을 때 내가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처분한 뒤에 곧 자전(慈殿)께 나아가서 흉적 신치운의 흉언을 앙진(仰陳)하니, 자성께서 웃으면서 분부하기를, ‘내가 그때 올렸다는 것은 원래 진어(進御)한 일이 없었는데, 흉역의 무함이 이와 같음이 있구나.’고 하셨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다시는 천왕가(天王家)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한 것이 바로 나를 두고 이른 것이니, 황형(皇兄)의 지극한 우애와 지극히 인자함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내가 68세에 이르게 된 것도 다 우리 황형께서 주신 것이다.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190) 의 처한 위치는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었으나 을사년191) 에 한 소장에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민 봉조하(閔奉朝賀)는 갑진년192) 의 일에 대해서 진실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정석삼(鄭錫三)이 ‘위예(違豫)’ 두 글자를 가지고 감히 입에 내지 못할 말로 지척(指斥)을 하였으니, 대개 저 흉역의 마음은 사실 개도(開導)하여 깨우치게 할 술책이 없다. 때문에 을해년의 사건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찬집(撰輯)하게 되었던 바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9일 을해
홍인한(洪麟漢)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제주(濟州) 상인(商人)을 소견하고, 환곡(還穀) 운송(運送)의 형편을 하순(下詢)하였다.
이조 참의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양한사명(兩漢辭命)》을 읽게 하고 임금이 대략 비평(批評)을 가하였으며 이어서 영남 감영으로 하여금 간행(刊行)하여 올리게 하였다. 한(漢)나라 조서(詔書)에 노비(奴婢)를 죽인 데 대하여 감죄(減罪)할 수 없다는 글로 인하여 사대부로 하여금 노비에게 함부로 장형(杖刑)을 사사로이 시행하지 못하게 하고, 외방에는 원장(圓杖)193) 도 또한 금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0일 병자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경기 감사 채제공(蔡濟恭)을 소견하였는데, 진정(賑政)을 하문(下問)하고 이어서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비국 당상 홍계희(洪啓禧)는 길주 성진(吉州城鎭)의 방략도(方略圖)를 올렸다.
하교하기를,
"지금 한(漢)나라 장제(章帝)가 수필(手筆)로써 동평왕(東平王) 창(蒼)에게 ‘차마 붓을 댈 수 없다[不忍下筆].’라고 한 네 글자로 유시(諭示)한 것을 보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감회가 일어난다. 더구나 이 달이 어떠한 달인가? 증자(曾子)가 이른 바, ‘누구를 위하여 효(孝)를 하며 누구를 위하여 제(悌)를 할꼬?’ 한 것이 바로 나를 두고 이른 것이다. 아! 슬프다. 금년에 계제(季弟)와 더불어 자은(慈恩)을 받아 나는 이 달을 맞이하는데 계제는 어디에 있는가? 슬픈 감회가 갑절이나 된다. 이번에 능에 거둥한 뒤에 제문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어 금천(衿川)에 치제(致祭)하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의 아들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아들된 도리에 당연한 것이다. 어찌 감히 지나치게 청하며 임금은 어찌 지나치게 포장(褒奬)하겠는가? 그 가운데 더욱 근거할 수 없는 것은 동어(冬魚)·황작(黃雀)194) ·죽순(竹筍)195) 의 유(類)이다. 예조(禮曹)와 의정부(議政府)는 서경(署經)할 때에 일체 듣고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1일 정축
하교하기를,
"비록 여느 때 취라(吹螺)할 때라도 박석현(磗石峴)에 이르면 취라를 멈추고 신포(信砲)로 대신하는데 이번 행차는 능소(陵所)에 가까우니, 삼지(三枝)에 불을 일으키는 것으로 거행하되 만약 신포를 거행할 일이 있으면 또한 이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빈객(左賓客) 김양택(金陽澤)은 우빈객(右賓客) 이익보(李益輔)와 인척(姻戚)이 된다고 상서(上書)하여 사면(辭免)하였으나, 왕세자(王世子)가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가 입시할 때에 거동(車洞) 비각 영건 당상(碑閣營建堂上)인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에게 아울러 말을 하사하고, 낭청 조재선(趙載選)은 승급하여 서용하였으며, 감역(監役) 송재연(宋在淵)은 8품(品)에 승진시키고, 간역(看役) 이하 공장(工匠)들은 시상(施賞)하였으며, 여경방(餘慶坊)의 편액을 게시할 때에 배진(陪進)한 승지 조영진(趙榮進)은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사자관(寫字官) 이하 공장들에게 시상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2일 무인
전(前) 참의 윤면교(尹勉敎)를 특별히 동돈녕(同敦寧)을 제수하여 그로 하여금 명일에 어가(御駕)를 따르게 하였다. 윤면교는 곧 경은 부원근(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사위이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3일 기묘
임금이 명릉(明陵)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천담 융복(淺淡戎服)을 갖추어 입고 보연(步輦)으로 광달문(廣達門) 밖에 이르러 말을 탔다. 선전관(宣傳官)을 불러들여 영기(令旗)로서 작문(作門)196) 에 알리게 하여 말하기를,
"만약 시끄럽게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군률(軍律)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고, 궁을 지키는 종사관(從事官)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위내(衛內)에서 시끄럽게 하는 자는 수궁 대장(守宮大將)에게로 보내고, 위외(衛外)에서 시끄럽게 하는 자는 유도 대장(留都大將)에게로 넘겨주라."
하였다. 임금이 창릉(昌陵)의 점(店) 길 곁을 지나는데 구걸하는 아이가 호소하고 있으므로 임금이 보고 감동하여 특별히 쌀을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천담복(淺淡服)과 익선관(翼善冠)을 갖추고 능상(陵上)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이어서 난간석(欄干石)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는데, 때가 마침 따가운 햇빛의 정오(正午)였다. 여러 신하가 초조하고 민박(憫迫)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정성으로 우러러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전하의 이 거조는 성효(聖孝)의 만분의 일을 펴는 데에 부족할 뿐만 아니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께서 양양(洋洋)하게 척강(陟降)하시는 곳에 도리어 슬픔을 끼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일어나서 새 명릉과 익릉(翼陵)·경릉(敬陵) 두 능에 나아가 전알 봉심(展謁奉審)하고 봉현(蜂峴)을 들려 구선복(具善復)과 지관(地官) 안재건(安載建)을 소견(召見)하고 보토(補土)하는 데 대해 장(長)·광(廣)·고(高)·저(低)를 하순(下詢)하였으며, 도로 재실에 나아가 임금이 사지 겸사복(事知兼司僕)·보련 차비 별감(步輦差備別監)·호련대(扈輦隊)·근장 군사(近仗軍士)에게 각각 무명 1필(匹)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4일 경진
하교하기를,
"어제 유문(留門)197) 할 때에 마땅히 신전(信箭)198) 을 청했어야 하는데 잘못 표신(標信)199) 을 청하였으니, 해당 승지와 중관(中官)을 추고(推考)하고, 지금 신전을 내리니 인하여 유문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친히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제(忌辰祭)를 행하고 이어서 홍살문 판위(板位)에 나아가 사초(莎草) 위에 부복하여 날이 새도록 일어나지 않으니, 2품 이상 삼사(三司)가 청대하여 입시하였으며, 여러 신하가 번갈아 아뢰기를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도로 재실로 들어가 정중(庭中)에 지배(地排)를 설시하고 예조 판서와 옥당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쓴 친제문(親製文)을 내려 심이지(沈履之)로 하여금 재실에 편액을 걸게 하고, 고어(皋魚)200) 에게 감동된 글[感皋魚文]을 지어 내렸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5일 신사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친히 추석제(秋夕祭)를 행하였는데, 때는 곧 숙묘(肅廟)께서 탄강하신 절일(節日)이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천담복(淺淡服)을 갖추고 홍살문에 이르러 망릉례(望陵禮)를 행하고 이어서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의식대로 제사를 행하였으며, 제사가 파한 뒤에 능 위를 봉심(奉審)하고 난간석(欄干石) 앞에 부복하기를 잠시하였다가 도로 소차(小次)로 들어와 지의(地衣)201) 위에 앉았는데 도승지가 방석(方席)에 오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홍살문에 나아가 사릉례(辭陵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아청 융복(鴉靑戎服)을 갖추고 동구(洞口) 밖에 이르러 말을 탔다. 임금이 능관(陵官)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돌아가나, 마음은 상설(象設)에 달려 있다. 능 위 사초(莎草)를 연부(連附)한 곳에는 다시 파종(播種)하고, 봉현(蜂峴)이 몹시 긴절(緊切)하니, 자주 가서 봄으로써 금단(禁斷)하는 방도를 삼으라."
하였다. 임금이 주정소(晝停所)로 들어가 경기 감사에게 표피(豹皮)를, 차사원(差使員)·수령(守令)에게는 궁시(弓矢)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연서역(延曙驛) 앞길을 지나는데, 한 상복을 입은 자가 어가(御駕) 앞에 엎드려 스스로 전 무예 별감(武藝別監) 오정태(吳廷泰)라고 일컬으면서 추복(追服)202) 하며 무덤을 지키고 있다고 하니, 임금이 본군(本郡)으로 하여금 특별히 식물(食物)을 지급하게 하고 훈국(訓局)으로 하여금 복제를 마치기를 기다려서 집사(執事)로 조용(調用)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반송방(盤松坊) 비각(碑閣)에 두루 들렸다가 이어서 창덕궁으로 나아가 진전(眞殿)을 배알한 뒤에 환궁하였는데, 어가를 따라온 군병(軍兵)들에게 모두 활 쏘고 총(銃)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16일 임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예조 판서와 선혜청 당상·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홍봉한이 경기 감사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여주목(驪州牧)의 모곡(耗穀) 7백 석을 감하여 줄 것을 청하고, 또 경상 좌수사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선창(船倉)을 포이포(包伊浦)에 옮겨 설치하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우러러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고 상신(相臣) 서명균(徐命均)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그 아들 서지수(徐志修)의 자급(資級)이 승진된 해가 그 아버지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임금이 흥감(興感)되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며, 또 고 판서 민진후(閔鎭厚)에게 치제하라고 명한 것은 지난날 안국동(安國洞)에 친림(親臨)했을 때 옛 주인에게 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지금은 병이 조금 나으니 의관(醫官)은 본원(本院)에서 윤번(輪番)으로 숙직하되 하루 걸러 문안하라."
하였다.
8월 17일 계미
임금이 경현당 아래 소차(小次)에 나아가 승지에게 숭릉(崇陵) 향소(享所)를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숭릉의 기신(忌辰)인데 내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하여 친히 향을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차를 설치하여 동쪽으로 바라보고 앉아서 선조(先祖)의 존령에 사죄하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오래도록 냉습(冷濕)한 땅에 앉으시면 절선(節宣)하시는 방도에 손상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손된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엄린(嚴璘)에게 명하여 〈《시경》의〉 육아(蓼莪)·상체(常棣) 등 편(篇)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아! 육아편(蓼莪篇)에 이르기를, ‘어디를 믿고 어디에 의지할까?’라고 하였고, 상체장(常棣章)에 이르기를, ‘형제(兄弟)가 몹시 생각이 난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나를 두고 이른 것이다. 이미 고애(孤哀)가 된 데에다가 또 형제마저 없으니 매양 이 장을 외우매 마음이 내려앉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 지금 이 해를 만나고 또 이 달을 만나서 직접 기신제(忌辰祭)를 행하여야 할 것인데 불초(不肖)한 내가 성의가 얕아서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회가(回駕)하려 하니 잊혀지지 않아 마음은 상설(象設)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즈음에 의릉(懿陵)의 기신이 다만 수일(數日) 간격이니, 이로 인하여 심회를 더욱 가누기 어렵다. 먼저 우리 황형(皇兄)의 지극한 효성을 유시(諭示)하고 다음으로 우리 황형의 지극한 우애를 효유하겠다. 갑술년203) 이후로 황형께서 연세가 얼마 안되었는데도 지성으로 성후(聖后)를 섬겼으며, 중광(重光)204) 함에 이르러서는 이를 내가 찬미(讚美)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모께서 민 봉조하(閔奉朝賀)에게 유시하신 것이다. 아! 황형의 지극한 효성이 아니었다면 이때에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지난 사첩(史牒)을 두루 보건대 지극히 어려운 것이 이 자리이다. 황형의 지극한 우애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자교(慈敎)를 받들어서 나를 후사로 삼았겠으며, 내가 어찌 능히 오늘이 있으리라고 보장이나 했겠는가? 황형의 바다와 같은 은혜를 받고 황형의 올해의 심정을 생각하건대 만약 한번 위로함이 없다면 그 아우가 있다고 하겠는가? 더구나 능침(陵寢) 외에는 정례를 펼 곳이 없으니 25일 기신제는 마땅히 친히 행하되, 한결같이 기묘년205) 의 예에 의하여 무릇 여러 등등의 일을 서울에서부터 거행하겠다. 봉심 승지 유한소(兪漢蕭)는 속히 복명(復命)한 것으로써 특별히 녹비(鹿皮)를 하사한다."
하였다.
임금이 이조 참의 서명응(徐命膺)과 승지 이익원(李翼元)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조 판서와 이조 참판이 모두 유고하여 다만 참의 한 사람만이 있었으므로 수가(隨駕)를 당하여 서명응은 홍릉 헌관(弘陵獻官)에 차임(差任)되었으므로 이익원은 이조에서 수가 당상(隨駕堂上)이 없는 것은 일이 몹시 미안하다고 여겨 다시 채워 넣자는 뜻으로 누차 서신을 왕복하다가 다시 메꾸어 넣기에 이르러서는 서명응이 이익원의 형인 이섭원(李燮元)으로 채워 차임하였다. 그런데 이섭원은 마침 외방에 있었으므로 일이 몹시 군색하고 급박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서로가 힐책(詰責)하며 서로 진서(陳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엄인(嚴璘)이 두 사람은 한낱 사소한 일로 인하여 서로가 진서하고 말하는 것이 오로지 가리지 않고 발언하여 서로가 공경하는 기풍에 결함이 있다는 것으로 앙진(仰陳)하고 모두 추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근래에 이러한 습성은 억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특별히 파직을 명하고, 정존겸(鄭存謙)·정상순(鄭尙淳)·김기대(金器大)를 승지로 삼았다.
8월 18일 갑신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고, 비국(備局)에서 품사 당상(稟事堂上)이 같이 입대(入對)하였다. 하령하기를,
"지금 한성부(漢城府)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어제 밤에 여러 전(廛) 수백 칸이 불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도성 백성의 명맥(命脈)이 대부분 시장 생업에 달렸는데 이런 소실의 재해를 당하였으니, 몹시 놀라고 민망하게 여긴다. 비국으로 하여금 각별히 소상하게 돌보아 구휼하여 보존의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문학 이창임(李昌任)이 《심경(心經)》을 가지고 입대하여 경솔하게 말하기를,
"계방(桂坊)206) 을 불러들일 것입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이미 진연(診筵)도 아니고 또 승지와는 다른데 순서를 넘어서 아뢰었으니, 추고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8월 19일 을유
서지수(徐志修)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창의(李昌誼)가 우러러 청하기를,
"청파(靑坡)·노원(蘆原) 두 역참(驛站)에서 막 이틀 밤을 지냈는데, 능행(陵幸)의 인마(人馬)가 굶주리고 지쳐 있습니다. 전에 이와 같은 때에는 쌀과 콩을 지급한 규례가 있으니, 선혜청의 쌀과 호조의 콩 각각 50석을 규례에 따라 특별히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경기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우러러 진달하기를,
"경기(京畿)의 역(驛)이 조폐(凋弊)하여 능에 거둥할 때에 우졸(郵卒)이 서울에 머물게 되면 자량(資糧)을 진휼청에서 획급(劃給)하는 것이 전례(前例)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 의릉(懿陵)의 행행(幸行)은 곧 1년 동안 세 번째의 행행이니 규례에서 특출(特出)하게 고휼(顧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휼청의 쌀과 콩 각각 30석을 특별히 획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숙(經宿)에 대한 고유(告由)는 대신(大臣)을 헌관(獻官)으로 삼아야 함이 구례(舊例)에 밝게 나와 있는데, 예조에서 지휘하지 못하고 이조에서 흐리멍덩하게 거행하였으니 사체로 보아 한심하다. 나라가 나라다운 것은 사체이니, 절목(節目) 사이의 일로 취급하여 신칙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이조와 예조의 해당 당상을 모두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임금이 전의 망단(望單)을 보고, 말하기를,
"민진후(閔鎭厚)는 본래 이 직무를 하지 않았고 조 풍원(趙豊原)207) 이 행공(行公)하였는데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인친(姻親)이 되므로, 사체가 다름이 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간택(簡擇)은 성상의 생각에 있으니,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사람으로 하시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순(元景淳)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본래 혐의할 의의가 없고 또 동성(同姓)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원경순을 이조 참판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20일 병술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22일 무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비국 당상·평시 제조가 같이 입시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불에 소실된 세 전(廛)에 각별히 고휼(顧恤)하라는 일은 이미 특교(特敎)를 받들었습니다. 백목전(白木廛)에는 공·사채(公私債)를 3년을 기한하여 받지 말라고 이미 전교가 있었는데, 3년 후에는 7년을 한정하여 점차 도로 갚게 하고, 남아 있는 차장 백목(遮帳白木)은 현재 받아 주던 것 가운데 10분의 1과, 세폐 백목(歲幣白木) 1년조 가운데 10분의 1은 탕감하며, 세폐 값 1년조는 미리 내려 주고 이미 값을 받은 외에 3분의 1은 품귀(品貴)에 따라 마련하며, 차장 백목은 탕감한 외에 남은 수효는 별도로 기록하여 5년을 한정하고 계산하여 감해 주어야 하고, 면주전(綿紬廛)에는 공·사채를 백목적(白木廛)의 규례에 의거하여 남아 있는 상격주(賞格紬) 10분의 1을 탕감하며, 세폐 면주(歲幣綿紬) 1년조 값과 진헌(進獻)하는 방물(方物)인 면주는 한꺼번에 값을 마련하여 먼저 내려주어야 하고, 망문 상전(望門床廛)208) 에는 공·사채를 위 두 전의 규례에 의거하여 돈 3천 냥은 병조와 진휼청에서 반을 나누어 대여(貸與)하도록 허락하되, 7년을 한정하고 점차로 이자(利子)가 없이 돌려 갚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년 가을을 한정하고 모든 상격 면주와 백목은 거행하지 말게 하고, 면주·백목전 공채(公債) 3년 후의 연조(年條)도 또한 망문 상전의 규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며, 백목전에서 받아 준 지은(地銀) 1천 냥은 특별히 탕척(蕩滌)시키고, 면주전의 상격 면주는 내년 가을을 한정하여 거론하지 말며, 그 외에 특별히 3동(同)을 감해 주고 색주(色紬)는 임인년209) 의 예에 의거하여 값을 지급하며, 망문 상전은 그 절반만을 지급하고, 백목전에는 취련은(吹鍊銀) 1천 냥을 탕척한 외에 1년 조의 값을 지급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망문 상전에는 수효의 갑절을 대여(貸與)하라고 허락한 것은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이나 병조와 진휼청 외에 또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 세 영(營)으로 하여금 각각 1천 냥을 대여하여 6천 냥의 수효를 채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세 시전(市廛)의 백성을 위로하고 해당 순장(巡將)을 도태시켜 버리며, 해당 감군(監軍)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고, 해당 포장(捕將)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잡아들이게 하였으며, 종사관(從事官)은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쳐서 도태시키고 순라 포교(巡邏捕校)도 또한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집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세 시전의 소실된 것을 망연(茫然)히 알림이 없었고 행순 단자(行巡單子)를 포도청에서 전례에 따라 서계(書啓)하였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전 참의 송명흠(宋明欽)을 강서원 유선(講書院諭善)으로 제수하였고, 이어서 승정원에 명하여 하유(下諭)하고 그날로 길을 떠나 우리 세손(世孫)을 보필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비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행하기 위한 것인데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은 지난 사첩(史牒)에서처럼 세상사를 잊고 사는 선비로 하였던 것이 아니라 곧 대대로 녹봉을 먹는 신하였다. 내가 비록 부덕하나 늘그막에 스스로 힘쓰면서 마음을 백성과 나라에 허여(許與)하였다. 산야(山野)의 선비를 불러오고자 하면서 만약 외모만 꾸민다면 진실로 선영(先靈)을 저버릴 뿐더러 또한 저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그대를 보려고 하는 마음이 단지 어느 날뿐만 아니라 꿈 속에서도 또한 들려왔으니, 그대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는 그대의 조부를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 조부가 조정에 있던 일을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모르는 체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의 모든 일은 오직 글을 강론하며 보도(輔導)하는 데 있다. 비록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히 옛일을 생각지 않으며 또한 네 조부를 생각지 않겠는가? 아! 박성원(朴聖源)도 돌보아 줌이 이와 같은데 더구나 선발에 뽑힌 자이겠는가? 내 마음의 간곡한 유시(諭示)를 체득하여 즉일 길을 떠나는 일로써 승정원에서 강서원 유선(諭善) 송명흠에게 하유(下諭)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23일 기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대신과 호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유선 박성원(朴聖源)이 공무를 집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특별히 의금부에 내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손의 학업이 나날이 늘고 다달이 진보하니, 지금 내가 세손에게 바라는 것은 매사에 모두 아름답게 하려고 한다. 지금 약간 자란 세손을 부탁하였으니, 세손도 또한 유익한 벗으로 기대하여야 한다. 바야흐로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가 되었으니, 박성원(朴聖源)의 도리에 있어서는 매사에 마땅하게 하며 혹여나 예에 어긋날까 두려워하면서 촉탁의 뜻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인데 이제 고집을 지니고 있으니 어떻게 교회(敎誨)하고 어떻게 예로 훈도(訓導)하겠는가?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어 주는 것은 스스로 분수와 한계가 있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은거(隱居)하는 선비로 자처한단 말인가? 내가 비록 쇠모(衰耗)하였으나 또한 어찌 예를 넘어 나라의 체모를 휴손(虧損)시키겠는가? 결코 이미 처분하였다고 해서 묵묵히 있을 수는 없다."
하였다.
특별히 경상 우병사 장지항(張志恒)에게 자급(資級)을 더하여 금위영 중군(禁衛營中軍)으로 삼았으니, 우의정 홍봉한의 말을 인한 것이었다.
8월 24일 경인
임금이 의릉(懿陵)에 나아갔다. 임금이 아청 융복(鴉靑戎服)을 갖추고 숭현문에 나아가 말을 타고 종가(鍾街)를 지나면서 시장 사람에게 3년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능동(陵洞) 어귀에 이르러서는 보연(步輦)으로 홍살문 판위(板位)에 나아가 망릉례(望陵禮)를 행하고, 이어서 능소(陵所)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으며, 난간석(欄干石) 앞에서 부복하여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자 대신과 여러 신하가 번갈아 서로 우러러 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이때에 큰 비가 쏟아지자 우의정 홍봉한이 우산을 펼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이 어찌 우산을 펼칠 곳인가?"
하였다. 약원의 여러 신하가 모두 옷자락으로 옥체를 가리웠으나 입은 관복(冠服)이 모두 젖어버렸다. 임금이 비로소 일어나서 정자각으로 나아가 비각(碑閣)을 봉심한 뒤에 도로 재실로 들어가 영우(靈雨)210) 에 감사한 글을 불러서 쓰게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25일 신묘
임금이 정자각에 나아가 익선관(翼善冠)에 천담포(淺淡袍)를 갖추고 친히 기신제(忌辰祭)를 행하였다. 이어서 홍살문 판위(板位)에 나아가 사릉례(辭陵禮)를 행한 뒤에 부복하고 일어나지 않으니, 여러 신하가 청대(請對)하여 번갈아 초조하고 민박한 정성을 진달하여서야 임금이 곧 회가(回駕)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휘릉(徽陵)에 쓸 향(香)을 마땅히 길가에서 지영(祗迎)하여야 한다."
하고, 먼저 소차(小次)로 들어가 경기 감사와 양주 목사를 소견하고, 표피(豹皮)와 궁시(弓矢)를 하사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의 문안관(問安官)을 소견하여 세손이 사서(史書)를 읽는다 하는데 어떠한가 묻고, 이어서 세손에게 질문하는 글을 써서 문안관에게 명하기를,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 세손에게 전하고 내일 와서 기다리라."
하고, 세손에게 질문하는 글을 어제(御製)하기를,
"네가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능히 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는가? 한 달 내에 두 차례의 기제(忌祭)를 행하였으니 너도 또한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네 할아비가 비록 쇠모(衰耗)하였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왕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일로 너에게 묻는 것이니 너는 장차 어떻게 나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와 주겠는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곧 효(孝)도 오히려 하지 못하였고 제(悌)도 오히려 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미치지 못한 것을 도와 주겠느냐? 이러한 마음은 종국(宗國)을 위하여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문안관을 인하여 너에게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임어(臨御)하여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고, 어필(御筆)로 만고 충절(萬古忠節)·천추 의열(千秋義烈)이라고 써서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게시(揭示)할 것을 명하였다.
8월 26일 임진
홍봉한을 좌의정에 승진시키고, 정휘량(鄭翬良)을 우의정에 제수하였으며,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조엄(趙曮)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좌상(左相)에게 면유(勉諭)하고, 또 우상(右相)에게 수서를 내리기를,
"두 정승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내가 부탁할 것이 있다. 경은 언제나 정직함과 나라를 위하여 공평하고 편당이 없는 마음으로써 소자(小子)의 괴로워하는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경의 형(兄) 〈정우량(鄭羽良)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생각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유시를 전하였는데, 소조(小朝)에서 또 사관을 보내어 하유(下諭)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좌찬독(左贊讀) 윤면헌(尹勉憲)을 소견하고 하순(下詢)하기를,
"어제의 하교를 해석하여 진달해서 세손으로 하여금 환히 이해하게 하였는가?"
하니, 윤면헌이 말하기를,
"신이 과연 성교(聖敎)를 받들어 전하고 우러러 묻기를, ‘어떻게 우리 대조(大朝)께서 권면(勸勉)하는 성명의 뜻에 부응하겠습니까?’ 하니, 세손(世孫)이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말하기를, ‘침소(寢所)에 문안하고 수라상을 살펴보는 것을 예로써 하며, 또 대조(大朝)께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는다면 거의 부응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대답이 기특하도다. 기쁘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고 근심을 끼치지 않겠다고 하였다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8월 28일 갑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천광복(千光福)을 국문하여 정의현(旌義縣)에 정배(定配)하였다. 천광복의 집이 명릉(明陵) 봉현(蜂峴) 밖 산기슭에 있는데, 그 이웃 사람이 양주(釀酒)를 범한 자가 있어 금리(禁吏)에게 잡히게 되었다. 이에 천광복이 금리를 구타하여 그 이웃 사람을 피신(避身)하게 하고는 그 금리의 폐사(斃死)를 염려하여 금리가 봉현 막중한 곳으로 길을 경유하였다고 능관(陵官)에게 무고(誣告)하여 다시 예조에 보고하게 하고 이어서 또 격고(擊鼓)하였다. 임금께서 능침을 범하였다는 말씀으로써 진전(眞殿)에 구주(口奏)하고 친히 국문하여 유배하라는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다.
8월 29일 을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고 우상(右相)은 신(新) 우상과 취미(臭味)가 본래 아주 다르나 그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몹시 서로 같은데, 이제 또 한 사람을 얻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다시 임용할 만한 사람을 유의하여 미리 서로 알게 하는 것도 또한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솔히 지레 말하지 않는 것은 외간에서 알게 되면 반드시 그를 배척하려고 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서 한익모(韓翼謨)에게 하교하기를,
"침묵을 지키고 주밀하게 하는 것이 소란을 피우고 조급하게 경쟁하려는 부류를 진정시키는 데에 가장 좋은 것이니, 경은 나의 말한 것을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능행(陵幸)할 때에 호가(扈駕)하던 군병(軍兵)에게 시사(試射)하여 상을 반사(頒賜)하고, 궐내(闕內)에서 입직(入直)하는 관원을 소견(召見)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천(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98권, 영조 37년 1761년 10월 (0) | 2025.10.08 |
|---|---|
| 영조실록98권, 영조 37년 1761년 9월 (0) | 2025.10.08 |
| 영조실록98권, 영조 37년 1761년 7월 (0) | 2025.10.08 |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6월 (1) | 2025.10.08 |
| 영조실록97권, 영조 37년 1761년 5월 (0) | 202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