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8권, 영조 37년 176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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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인

유성(流星)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약방에서 동궁에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이렇게 초조하고 황급한 때를 당하여 어떻게 진찰을 허락하겠는가? 물러가라."
하였다.

 

10월 2일 정묘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소조(小朝)께서 노좌(露坐)·철선(輟膳)하던 것을 비록 바꾸어 감선(減膳)으로 하였으나 신 등이 초조하고 민박하여 몸둘 바를 모르는 정성이 감히 잠시도 늦추어지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사람답게 되는 방도를 지시(指示)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단문(丹門)226)  에 들어가기 전에 문득 방편(方便)의 명을 내린다면 선왕께서 반드시 굽어보실 것이다. 내가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러면 우선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지낸 뒤에 신 등이 마땅히 다시 소조(小朝)에게 우러러 청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약방에서 동궁에게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어찌 매일 입진을 청하는가? 물러가라."
하였다.

 

김양택(金陽澤)을 겸 대사성으로 삼았다.

 

10월 3일 무진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가려다 좌의정 정휘량(鄭翬良)이 도성 밖에서 대명(待命)한다는 것을 듣고, 수서(手書)를 승지에게 보내어 전유(傳諭)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의 마음을 이미 살피고 이제 면유(面諭)하여 염우(廉隅)를 펴게 하려고 하는데 오늘을 놓아두고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는가?"
하고, 임금이 숭현문에 나와서 향(香)을 지영(祗迎)한 뒤에 연(輦)을 타면서 말하기를,
"좌상(左相)의 거취(去就)를 기다려서 마땅히 단문(丹門)으로 나가겠다."
하였는데, 정휘량(鄭翬良)이 숙명(肅命)하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손을 잡고 면유(勉諭)하면서 특별히 상직(相職)의 해면(解免)을 허락하여 염우를 펴게 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단문(丹門) 밖에서 부복하여 구주(口奏)하고 드디어 도보(徒步)로 들어가서 면복(冕服)을 갖추고 봉심한 뒤에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이어서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처음의 예와 같이 하였다. 단상(壇上)에 서서 희생(犧牲)을 살펴보았는데 양(羊) 한 마리가 가지런하게 되어 있지 않자 해서(該署)의 제조(提調)를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10월 4일 기사

임금이 친히 태묘(太廟)에서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행하고 섬돌 아래에 엎드려 구주(口奏)하였다. 이어서 동쪽 신문(神門) 밖으로 나아가 승지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을 회유(誨諭)하는 글을 써서 춘방(春坊)의 문안관(問安官) 이진형(李鎭衡)을 시켜서 동궁에게 전하게 하였다. 임금이 판중추(判中樞) 정휘량(鄭翬良)에게 선유(宣諭)하기를,
"염우(廉隅)를 이미 폈으니, 곧 서추(西樞)의 임명에 대하여 숙배 사은(肅拜謝恩)하라."
하였고, 다시 우의정 윤동도(尹東度)를 돈면(敦勉)하였다.

 

약방에서 동궁에게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지금 오히려 황공하여 〈몸둘〉 곳을 모르고 있는데 어찌 진찰할 것을 허락하겠는가? 물러가라."
하였다.

 

10월 5일 경오

유성(流星)이 군시성(軍市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상소하여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돈면(敦勉)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우장사(右長史) 이양원(李養源)을 강석(講席)에 같이 들어와서 문의(文義)를 토론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양원이 감히 감당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오래도록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강하였으나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였으니, 어찌하여야 할꼬?"
하니, 이양원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병통인 줄로 아신다면 이와 같이 않는 것이 바로 약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양원에게 이르기를,
"네가 우리 세손(世孫)을 보필(輔弼)하는데 어떻게 개도(開導)하였는가?"
하니, 이양원이 말하기를,
"신(臣)은 성인(聖人)을 희망하는 것으로써 뜻을 세우는 방도로 삼을 것을 우러러 청하였습니다. 신이 들은즉, 이인배(李仁培)가 진강(進講)하는 당(堂)에 이인배가 차양(遮陽)할 것을 청하자 세손(世孫)이 말하기를, ‘좋다.’고 하였다가 그가 임퇴(臨退)하기를 당하여 세손이 말하기를, ‘그만두라.’고 하면서 ‘대조(大朝)에게 아뢰지 않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하니, 이에서 또한 한없이 성취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약방에서 동궁에게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니, 하령(下令)하기를,
"비록 온종일 구대(求對)하더라도 이렇게 초조하고 민망한 때를 당하여 진찰을 허락할 수가 없다.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6일 신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문과와 무과의 신은(新恩)을 소견(召見)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판부사 정휘량(鄭翬良)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애당초 영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정휘량(鄭翬良)과 더불어 그 거취(去就)를 같이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정휘량이 상직(相職)에서 해면(解免)되기에 미쳐 홍봉한도 또한 인입(引入)하였다가 이에 이르러 명을 받들었다. 이에 앙진(仰陳)하기를,
"지난날 동신문(東神門) 밖에서 동궁을 회유(誨諭)한 문자는 지의(旨意)가 간곡하고 측은하여 그 소조(小朝)의 마음에 있어 진실로 감동됨이 있을 것인데도 오히려 지금까지 대죄(待罪)하고 있으니, 신 등의 초조하고 황급한 정성은 우러러 아뢸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도 대죄하고 있는가?"
하였다. 정휘량이 말하기를,
"지금은 일의 체면이 다른 때와는 다릅니다. 성교(聖敎)가 있지 않으면 감히 나가 뵈올 수 없으니 이것이 더욱 마음 조리며 민박한 일입니다."
하였고, 홍봉한은 말하기를,
"만약 성교(聖敎)가 없으면 비록 해를 지난다 하더라도 나아가 뵈올 길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경 등의 말과 같다면 내가 마땅히 생각해 보고 처리하겠다."
하매, 정휘량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번뇌(煩惱)하지 마시고 조용하게 진정(鎭靜)시킨 뒤에야 경중(京中)과 외방(外方)에 소요(騷撓)의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홍봉한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경기 감사가 반드시 한 번 염우(廉隅)를 펴게 하고 싶다."
하고, 이어서 채제공(蔡濟恭)에게 내직에 의망(擬望)할 것을 명하였으니, 정휘량(鄭翬良)이 아뢴 것을 인한 것이었다. 새로 급제(及第)한 홍낙인(洪樂仁)을 승륙(陞六)시켜 특별히 부수찬을 제수하였으니, 홍낙인은 곧 홍봉한의 아들이다. 새로 급제한 윤숙(尹塾)의 5대조(五代祖) 윤경(尹絅)은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에 절의(節義)를 세웠고, 그 아들은 다시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숙의 조부(祖父) 윤식(尹植)은 품계가 2품(品)에 이르렀는데도 추증(追贈)의 은전(恩典)이 없었으니, 대개 교지(敎旨) 가운데 차마 청국 연호(淸國年號)를 써서 그 선인(先人)의 의범(懿範)을 더럽힐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윤숙이 급제에 오르자 홍봉한이 청국 연호를 쓰지 말고 추증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하도록 명하여 이치중(李致中) 등 19인(人)을 뽑았다. 임금이 윤사국(尹師國)을 구갈파지(舊乫坡知) 권관(權管)으로 제수하였으니, 윤사국이 한림 권점할 때를 당하여 정환유(鄭煥猷)가 무신(武臣)의 아들이란 것으로써 이의(異議)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10월 7일 임신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호남(湖南)의 별도로 모아 놓은 벼 4천 석(石)을 개성부(開城府) 칙수고(勅需庫)에 획급(劃給)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우러러 청하기를,
"이번 사행(使行) 때에 호조에서 전례에 따라 무역가(貿易價)를 내주는 것이 있는데, 피중(彼中)에 유치(留置)한 백면지(白綿紙) 1천 9백 권으로써 바꾸어 무역해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상순(鄭尙淳)을 승지로, 김시묵(金時默)을 경기 감사로, 조영진(趙榮進)을 황해 감사로, 윤동섬(尹東暹)을 충청 감사로, 구윤옥(具允鈺)을 도승지로 삼았다.

 

10월 8일 계유

이현중(李賢重)을 승지로,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하교하기를,
"이번 농사는 처음에 생각한 것과 크게 어긋나니 또한 진휼(賑恤)을 설시할 곳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연분(年分)227)  할 때에 진·위(眞僞)를 상세히 살펴서 혼잡된 폐단이 없게 하고, 그 진휼을 설시할 고을에는 진휼할 곡식을 미리 대비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구렁텅이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할 뜻으로 여러 도(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검덕(儉德)으로써 서로 전하여 왔었는데 근자에는 사치하는 풍조가 날로 성행하고 있다. 마땅히 왕공(王公)으로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3백 년 종사를 이을 사람은 곧 세손(世孫)이니 먼저 검덕을 보인 뒤에야 바로 열성조(列聖朝)의 검소함을 숭상하던 덕의(德意)를 본받을 수 있다."
하고, 세손의 가례 정례(嘉禮定例)를 가져오라고 명하여 수서(手書)로 재감(裁減)하여 이르기를,
"풍성하고 사치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예문(禮文)에 있다."
하였다.

 

10월 9일 갑술

왕세자가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갔다. 흑립(黑笠)과 도포(道袍) 차림으로 소여(小輿)를 타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니, 약방 분제조(藥房分提調) 이득종(李得宗)이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매, 하령(下令)하기를,
"비록 진현(進見)하란 명을 받들었으나 지난 일을 추념(追念)하면 오히려 송구함이 많은데, 어떻게 진찰할 것을 허락하겠는가?"
하고, 경희궁홍마목(紅馬木)228)   밖에 이르러 도보(徒步)로 들어가서 현모문(顯謨門) 밖에서 부복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그 복착(服着)한 것을 묻고 또 내시(內侍)를 시켜서 진현할 것을 명하였다. 왕세자가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영상 홍봉한을 시켜서 힘써 효유하여 들어오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이미 진현(進見)하였으니 상참(常參)·차대(次對)·주연(胄筵)을 규례에 의하여 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원량이 돌아갈 때에는 현모문에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興化門)에서 연(輦)을 타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환궁(還宮)하니, 홍봉한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상하가 초조하고 황급한 겨를에 다행히 진현의 예를 이루었으니 기쁜 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전의 허물을 추억(追憶)하면 스스로 용납될 곳이 없었는데 천안(天顔)을 뵈온즉 사기(辭氣)가 온화하고 순수하시니, 다시는 여한이 없고 더욱 황공한 감회만 더하여진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내에서 진현할 즈음에 성교(聖敎)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종사(宗社)를 위하고 신민(臣民)을 위하라는 것으로써 하교하시고, 다시 거(莒) 땅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229)  는 것으로써 정령(丁寧)하게 힘써 신칙하셨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제 이미 진현하였으니 복선(復膳)하고, 당(堂)에 거처하는 것을 의식과 같이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어떻게 감히 성급하게 당에 거처하고 복선하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상의 마음이 남김없이 확 풀리셨는데도 오히려 다시 이와 같이 하시면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러면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이득종(李得宗)이 또 5일마다 일차(日次)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만약 조금만 병이 있으면 마땅히 의관(醫官)을 소견할 것인데, 어찌 일차를 쓰겠는가?"
하였다.

 

지돈녕 이춘제(李春躋)가 졸(卒)하였다. 이춘제는 사람됨이 경망하고 천박하며, 일을 행함이 야비하고 잗달아서 길거리의 아이와 여졸(輿卒)들이 그를 보면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면서 춘제 대감이라고 지칭하였으니, 그가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을 알 만하다.

 

10월 10일 을해

김상철(金尙喆)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경상 우병사의 장달(狀達)로 인하여 우러러 청하기를,
"전라 병영과 본도 좌병영의 예에 의하여 본영(本營)의 곡식이 각 고을에 흩어져 있는 것에서 1만 석을 특별히 덜어 주어서 조적(糶糴)230)  에서 모곡(耗穀)을 취하게 하고 쌀과 벼를 분배(分排)하되 비국에서 마땅히 헤아려서 분배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국구(國舅)인 김한구(金漢耉)가 바야흐로 거상중(居喪中)이오니, 청컨대 액례(掖隷)를 시켜 규례에 의하여 존문(存問)하게 하소서."
하니, 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복부(腹部)에서 치밀어 오르는 증세(症勢)로서 약방에서 의관(醫官)을 데리고 3차(次) 진후(診候)하고 탕제(湯劑)를 올리니, 또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달여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10월 11일 병자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의관(醫官)을 데리고 3차 입진(入診)하고 잇따라 탕제를 올렸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도당록(都堂錄)231)  에 대해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조만간 마땅히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만, 신이 일찍이 문학에 우수한 자를 앙달(仰達)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장차 입선(入選)되지 못하게 되어 이것이 애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구인가?"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바로 김상익(金相翊)인데 바야흐로 적소(謫所)에 있어 신이 감히 석방을 청할 수는 없습니다만 인재는 아깝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당록을 할 때에 또한 가입(加入)할 자가 있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근래에 홍문록(弘文錄)232)  에서도 인원이 매우 많았으니 이것이 또한 민망스럽습니다. 지난번에 권극(權極)의 대책(對策)을 보건대, 대간(大諫) 60여 인에 시종(侍從)이 4백여 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과연 다시 상고하여 보았더니 대간이 과연 90여 인이고 시종 또한 4백여 인이 넘었으니, 이것은 정관(政官)이 공의(公議)는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안면과 사정으로 통청(通淸)하였기 때문에 남잡(濫雜)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통(掌通)233)  을 막은 뒤로 지평(持平)과 정언(正言)의 통청에 대한 남잡함이 도리어 장통보다 심하니 한심한 일이라 하겠다."
하고, 하교하기를,
"신방(新榜) 장원 권극(權極)은 그 글을 보건대 경륜(經綸)의 논의가 있고, 그 사람을 본즉 결코 경박하거나 조급하게 구는 무리가 아니니 유독 근자에 지평이나 정언에 통청한 사람만 같지 못하겠는가마는 창방(唱榜)234)  한 지 몇 일이 되도록 한번도 검의(檢擬)하지 아니하여 임헌 책사(臨軒策士)하는 뜻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동중서(董仲舒)235)  가 강도 상(江都相)에 머무는 것을 비웃는다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전관(銓官)은 중추(重推)하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2일 정축

약방에 답하기를,
"요즈음의 증세(症勢)는 오로지 마음에 달려있는데, 이 또한 늦긴하나 그 곧 치유(治癒)된 것이 또한 이상하다. 그런데 이 마음은 언제 낫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거의 신서(臣庶)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니 이는 내가 스스로 한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갔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외방에 있는 양상(兩相)을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삼공(三公)이 모두 갖추어진 뒤에야 서로 의논할 수 있고 건극(建極)236)  의 다스림에는 표준을 세울 사람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주인 자리를 양보하는 것인가? 삼공이 자리를 갖추는 것은 조만간의 일이고 표준을 세운다는 말은 좋은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의 계책은 신이 반드시 원임(原任)에게 사양하지 않으나 표준을 세우는 것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이원임의 집안에 서로 전하여 오는 업적이니 이를 놓아 두고 그 누구이겠습니까? 반드시 시임(時任)을 둔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또한 경의 뜻을 안다."
하고, 임금이 유신(儒臣) 이휘중(李徽中)·홍낙인(洪樂仁)을 명하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이휘중은 말하기를,
"신이 과시를 보기 전부터 익숙하게 읽고 상세히 익히기를 경전(經傳)과 같이 하였는데, 이는 곧 성학(聖學)의 공부에 필요한 서적입니다. 성상께서 비록 신에게 도움을 구하시나 신은 재주와 학문이 텅 비고 소략한데 장차 어떻게 책임을 다한다고 하겠습니까?"
하였고, 홍낙인은 말하기를,
"《자성편》 한 편은 곧 성학으로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얻어야 할 것이니, 전술(傳述)하고 창작(創作)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동궁에게 구대(求對)하니,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인접(引接)하고, 하령하기를,
"대신이 진연(診筵)에 같이 들어온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성상의 기후에 대한 모든 일을 알려고 하여 아까 입대(入對)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13일 무인

임금이 북도 감시 어사(北道監市御史) 김종정(金鍾正)에게 명하여 온성(穩城)의 백성이 편히 모여 사는 정사를 겸행(兼行)하게 하였다.

 

10월 14일 기묘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상(領相)과 삼남(三南)을 구관(句管)하는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같이 입시하니 삼남 환곡(還穀)의 모곡(耗穀) 절반을 특별히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경상 감사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아주 심한 고을에 진휼(賑恤)을 설시함에 있어 2만 석을 허급(許給)해 줄 것을 우러러 청하였고, 또 충청 감사 장본으로 인하여 아주 심한 고을의 환곡(還穀)에 대해 절반은 정봉(停捧)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아주 심한 고을은 장청(狀請)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허락하고, 그 다음으로 심한 고을은 3분의 1을 수봉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집영문(集英門)에 나아가 휘령전(徽寧殿)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형조 포청(捕廳)의 문안(文案)에 아들이 아버지를 증거대고, 종이 주인을 증거하였다는 것으로써 특별히 그때의 당상과 포도 대장을 파직하였다.

 

10월 15일 경진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하였다. 임금이 소조(小朝)가 행제(行祭)할 때 기주(記注)한 것을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왕세자의 동정(動靜)은 온화하고 조용하다고 이를 만 하겠다."
하였다.

 

10월 16일 신사

월식(月食)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을 읽도록 명하고, 임금이 오열(嗚咽)하며 말하기를,
"삼락(三樂)237)   가운데 첫째 낙은 이미 따를 수가 없고, 둘째 낙은 과연 부끄러운 일이며 셋째 낙은 또한 본받을 수가 없다. 옛날에 양성(養性)으로서 헌호(軒號)를 명하고 이어서 시(詩)를 짓기를, ‘존양의 뜻을 알려고 하면[欲知存養義] 진심편을 깊이 익히라[深玩盡心篇].’고 하였다. ‘정일(精一)’ 두 글자는 곧 우리의 가법(家法)이며, ‘존양(存養)’ 두 글자도 역시 우리의 가법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 일을 해 나가는데 도리에 합당하게 되면 마음에 만족하여 기뻐하는 뜻이 있게 되는 것이 문득 이 낙(樂)자의 뜻이고, 성인(聖人)의 글을 가끔 읽으면 기뻐서 손뼉을 치며 날뛰고자 하는데 이런 것이 진짜 낙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17일 임오

이규채(李奎采)를 대사헌으로 삼고, 김양택(金陽澤)을 발탁 제수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으며, 김상철(金尙喆)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오늘부터 3일을 일차(日次)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10월 18일 계미

정순검(鄭純儉)을 승지로, 홍준해(洪準海)를 대사간으로, 이봉상(李鳳祥)을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성으로, 정실(鄭實)을 유선(諭善)으로, 이사선(李思先)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은(李溵)을 성상께서 특별히 발탁하심으로 우러러 성의(聖意)의 소재(所在)를 알았습니다. 지금 이은과 등대(等對)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시급히 승진시켜 임용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구인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정원달(鄭遠達)이고 이밖에 조영순(趙榮順)·이담(李潭)·서명천(徐命天)도 차서대로 승진하여 임용할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례대로 하는 것이 매우 공평하며, 이담은 비록 나라를 저버리지는 않겠으나 약간 기승(氣勝)을 부리며 조영순은 이제 과연 잘 변화되었는가? 생각건대 이미 〈당심(黨心)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의 전일(前日) 상소는 신도 또한 불가하다고 여깁니다만 이것으로써 영원히 저지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이는 고가(故家)의 사람이니 신의 생각에는 먼저 외방(外方)에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의주 부윤은 과만(瓜滿)이 멀지 않고 이기경(李基敬)은 병으로 잇따라 사장(辭狀)을 올리고 있으니, 특별히 체임(遞任)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으로 하여금 압록강에서 마음의 더러운 점을 씻게 하는 것이 더욱 좋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홍낙인(洪樂仁)은 비록 글을 많이 읽었다고 하나 오히려 이휘중(李徽中)에게는 미치지 못하니, 경(卿)은 모름지기 글을 읽도록 권면(勸勉)하는 것이 옳겠다. 근래에 사대부가 글을 읽지 않는 폐단이 심하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글을 읽는 데 흥미를 얻은 자 이외는 누가 능히 글 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한 나라의 원보(元輔)로써 이런 말을 하는가? 글 읽기를 싫어하는 자는 반드시 ‘대신(大臣)의 말이 이와 같다.’고 하면서 더욱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 집의 김원행(金元行)은 산림(山林)에서 덕을 길러 일찍이 사림(士林)에 중한 명망을 지고 있으므로 지난번 송명흠(宋明欽)을 가자(加資)할 때에 고 상신 민백상(閔百祥)이 일체 자급을 승진시키라는 뜻으로 앙달(仰達)하려 하였으나, 실천하지 못하였으므로 신이 감히 고 상신의 뜻으로써 진달하여 성상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시는 정성을 도와드리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매우 좋다. 그리고 말이 고 상신에게 미치니 내 마음이 더욱 감동하여 특별히 가자(加資)한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청하기를,
"호적고(戶籍庫)를 개조(改造)할 때에 호조에서 빌려 온 돈은 탕감하고, 병조의 목면(木綿) 2동(同)과 돈 1백 냥을 덜어 주게 하여 그것으로 역사를 완공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이성(李晟)이 사사로이 쓴 재결(災結) 92결(結) 때문에 거제부(巨濟府)에 연한(年限)을 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되, 그 자신에게만 한정하여 금고(禁固)하게 하였다.

 

도당록(都堂錄)의 권점(圈點)을 행하여 정이환(鄭履煥) 등 17인을 뽑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여 소대(召對)하였다.

 

10월 19일 갑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이명운(李明運)을 황해 병사로, 이미(李瀰)를 응교로, 서명천(徐命天)을 부응교로 삼았다.

 

10월 20일 을유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양연(兩筵)에 다만 좌우 궁관(左右宮官)만 입참(入參)시킬 것이 아니라 또한 빈객(賓客)으로 하여금 인원을 갖추어서 돌아가면서 등대(登對)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비국 당상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가장 어려운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반수(盤水)는 받들 수가 있지만 뜻은 지탱하기 어렵고, 6마(馬)는 조련시킬 수가 있으나 기(氣)는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한결같이 하시고 게을리하지 말아서 이러한 것으로 학문을 강마하고 이러한 것으로 정사를 들어서 새롭게 하고 더욱 새롭게 하시며 힘쓰고 또 힘쓰시어 우러러 대조(大朝)의 성심(聖心)을 본받고, 굽어 신민(臣民)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여 주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진달한 바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아끼는 데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각 군문(軍門)의 아병(牙兵)에 대한 보미(保米)를 돈으로 대신 받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전(前) 헌납 장정(張淀)을 단천부(端川府)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채제공이 앙진(仰陳)하기를,
"장정이 두루 감사를 지낸 자의 분묘(墳墓) 10여 보(步) 거리의 땅에 그 자부(子婦)를 투장(偸葬)하였기에 법전(法典)에 의거하여 그로 하여금 파서 옮기게 하였으나, 장정은 조금도 동념(動念)이 없이 세월만 끄는 것으로 일을 삼고, 신이 체직되어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더욱 불미(不美)한 데에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를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백성이 어떻게 수족(手足)을 놀리겠는가?"
하고, 곧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대(召對)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시독관 서유량(徐有良)이 말하기를,
"요즈음 전하께서 정휘량(鄭翬良)을 제배(除拜)하여 정승으로 삼으신 것은 비록 그 건극(建極)의 정치를 하기 위한 것인 줄 알겠습니다만, 주인(主人)은 바로 조재호(趙載浩)이니 마땅히 조재호를 불러 써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처음 연석(筵席)에 올라 말할 기회를 얻었음을 빙자해서 이와 같이 혼돈되게 말을 하는구나. 그 뜻은 옳다 하겠으나 우리 나라 사람은 하나의 당(黨)이 없어지면 하나의 당을 또 만들어 낸다. 조재호는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 등용하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마음에 다른 점이 있어서 ‘반드시 세상에 당이 없어지기를 기다린 뒤에야 조정에 나오겠다.’고 한다니, 한(漢)나라 때의 노(魯)나라 두 유생238)  이라 하겠다."
하였다. 시독관 홍억(洪檍)이 말하기를,
"조정에 비록 당심(黨心)이 있다고 하나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동일하게 보아서 엄정하게 처분하신다면 누가 감히 당심을 두겠습니까? 마음을 수양하고 몸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곧 건극의 한 가지 일인데, 하필 조재호가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 건극의 정치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외에 또한 어찌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매, 서유량이 말하기를,
"조재호는 실지로 현재의 제일가는 인물입니다."
하고, 승지 이익원(李翼元)은 말하기를,
"건극(建極)을 만약 지나치게 하려고 하면 도리어 건극하는 데에 지나칠 염려가 있습니다."
"이 말이 과연 옳다."
하였다.

 

10월 21일 병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무신(武臣)에 대하여 빈청(賓廳)에서 강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 궁시(弓矢)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손빈(世孫嬪) 초간택(初揀擇)을 마땅히 광명전(光明殿)에서 행하려 하니 단지 익장(翼帳)을 설시하고 큰 차일(遮日)과 보계(補階) 등의 일은 그만두도록 하라. 갑자년239)  의 칭상(稱觴)을 추억(追憶)하면 이 궁전에서 무슨 마음으로 크게 떠벌리겠는가? 가례청(嘉禮廳)의 도제조는 없애버리고, 당상 2원(二員)은 호조 판서와 예조 판서가 겸하게 하라. 도청(都廳)은 정식(定式)에 의하여 대신에게 물어 계하(啓下)하되 낭청 2원은 호조 낭관과 예조 낭관이 겸하게 하고 감조관(監造官) 2원은 각사 참하관(各司參下官)으로 메꾸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일 소시(召試)에 친림(親臨)하겠으니, 제학(提學)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김상복(金相複)을 예문관 제학으로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상철(朴相喆)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조영순(趙榮順)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으니, 묘당(廟堂)에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세손빈(世孫嬪) 간택일을 다음 달 그믐날로 정하였는데 처자(處子)의 복색(服色)은 풍성하고 사치하게 하지 말고 근본을 단정하게 하는 뜻을 본받게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정해

달이 헌원성(軒轅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240)  를 행하였는데, 유언호(兪彦鎬)·김용(金容)·윤승렬(尹承烈)·정택(鄭擇)이 전정(殿庭)에 들어오지 않자,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묻기를,
"무슨 까닭에 시애(撕捱)241)  하는 것인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강지환(姜趾煥)이 등철(登徹)하지 못한 글 가운데 한권(翰圈)이 외잡(猥雜)하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네 사람이 버티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구서(洪九瑞)·이형원(李亨元)은 남들이 이미 그 부조(父祖)를 끌어대었으니 인혐(引嫌)하는 것이 족히 괴이할 것이 없지만, 네 사람에 이르러서는 관계가 없는 일로써 너무 지나치게 버티고 있다."
하고, 재촉해 들어오도록 명하였는데, 윤승렬(尹承烈)이 유독 들어오지 않자,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그가 신진 소관(新進小官)으로써 감히 군부(君父)와 더불어 서로 버티고 있으니, 만약 들어오지 않으면 그 아비를 마땅히 해읍(海邑)에 투비(投畀)할 것이며, 홍구서(洪九瑞)·이형원(李亨元)도 또한 모두 재촉하여 〈들어오게 해서〉 내가 장차 그들이 처신하는 분의를 보겠다."
하니, 세 사람이 모두 뜰에 들어왔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한림의 추천이 변하여 권점이 된 것은 대개 인재를 널리 뽑으려는 것인데, 한 번 시험하고 그친다면 두 가지의 폐단이 있습니다. 비록 문장(文章)과 재화(才華)가 우수한 사람이라도 한 번 낙방(落榜)하는 것은 족히 괴이할 것이 없는데, 영원히 난대(蘭臺)242)  에 저지(阻止)를 당하는 것은 몹시 애석한 일입니다. 그리고 모면을 도모하려고 하는 자는 한 번 억지로 시험을 치루고는 다른 길을 따라 승륙(陞六)하니, 그 또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부터 첫 번에 입격(入格)되지 않은 자는 새로 권점할 때에 다시 동일하게 권점하여 그로 하여금 시험에 나가게 하되, 세 차례 탈락이 된 사람은 다시 권점을 허락하지 말고 또 경책(警責)의 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굽어 물은 뒤에 하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꾀하는 바가 이미 같으니, 이에 의하여 규식을 정하라."
하고, 정택(鄭擇) 등 6인을 뽑았다.

 

하교하기를,
"세손빈(世孫嬪)의 문안패(問安牌)와 삼마패(三馬牌)는 하나에서 세 개까지 정원(政院)에서 만들어 들이도록 하라. 빈궁(嬪宮)에서 비록 휘지(徽旨)가 있더라도 세손(世孫)과는 다른 점이 있으며, 내지(內旨)243)  가 군문(軍門)에 행해지는 것은 그 길을 넓힐 수가 없으니, 의지(懿旨)한 절차는 거행하지 말라. 만약 해엄(解嚴)244)  할 일이 있으면 세손궁(世孫宮)에 의지로써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에는 자교(慈敎)가 있고 내전(內殿)에는 내교(內敎)라 일컬으며, 빈궁(嬪宮)에는 내령(內令)이라 일컫는다. 이에 만약 도서(圖署)하게 되면 세손빈에도 마땅히 그 표시가 있어야 하니, ‘내음(內音)’이라고 하여 체제를 백자(白字)245)  와 같이 하고 궤짝과 흑통(黑筒)을 갖추되 정원에서 만들어 들이게 하라. 어제와 오늘에 하교한 서인(書印)은 《세손책봉의(世孫冊封儀)》 하편에 첨부(添附)하고, 편집(編輯)은 양관 제학(兩館提學)이 주관하며, 도승지·예방 승지가 교정(校正)하되 《세손책빈의속람(世孫冊嬪儀續覽)》이라 이름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마땅히 차등을 두어야 한다. 국초(國初)에 빈궁 효부인(嬪宮孝婦印)은 곧 은인(銀印)이었으니 이번에 세손빈인(世孫嬪印)은 귀두 은인(龜頭銀印)이며, 죽책(竹冊)은 다만 내갑(內匣)만 하고 장식은 기화(起花)하지 말고 주복(紬袱)을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3일 무자

달이 헌원성(軒轅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선혜청 낭관과 균역청 낭관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왕세손빈의 간택하는 의식을 강정(講定)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의 기후가 평탄치 않아 사현합(思賢閤)으로 이어(移御)하여 다시 입시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균역(均役)·선혜(宣惠) 두 청(廳)에 쌀과 포목(布木)·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유언현(兪彦鉉)·이휘지(李徽之)에게 물으니, 각각 실지의 수효를 들어서 대답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김치일(金致一) 이후로 이 두 낭관이 가장 잘 직임을 거행하였으니 결단코 옮겨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휘지는 또 성질이 꼼꼼하고 자세하며 모두 쓸 만한 사람이다."
하고, 하교하기를,
"황해 도신(黃海道臣)이 세 번이나 체임(遞任)되고 수신(帥臣)이 네 번이나 체임되었으니 그 모양을 이루기 어려운 정상은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이제 대신이 아뢴 바를 인하여 비록 궤유(饋遺)를 금하였으나 일찍이 지나간 적을 우러러 본즉 만약 흉년을 만나면 진헌(進獻)을 특별히 감하였으니, 현재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서는 삼명일(三名日)246)  에 올리는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내년 가을을 기한하고 받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0월 24일 기축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탕제(湯劑)를 하루에 세 번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번이면 된다."
하였다. 임금이 교리 서유량(徐有良)에게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져 오라고 명하고 왕세손빈(王世孫嬪)의 조현례(朝見禮)를 강론(講論)하였는데, 서유량이 말하기를,
"《대명회전》에 명(明)나라 성조(成祖)와 선종(宣宗) 때 황태손비(皇太孫妃)의 조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읽으라 명하고 읽기를 마치자 《오례의(五禮儀)》를 가지고 들어와서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왕세손의 조현례는 마땅히 팔배(八拜)를 하여야 합니다. 한 번 사배(四拜)하는 것은 군신례(君臣禮)가 되고 한 번 사배하는 것은 조현례가 됩니다. 그리고 대조(大朝)께 이미 사배하였으면 동궁(東宮)에게는 의당 재배(再拜)를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조현례 거행하는 조항을 쓰라고 명하였다. 교리 홍억(洪檍)이 말하기를,
"지난번 성교(聖敎)에서 석담 서원(石潭書院)을 그림을 그려서 오라고 하셨는데, 이제 막 올라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올리라고 명하여, 펼쳐 재삼(再三) 구경하고 말하기를,
"이 또한 경의(敬意)를 흥기(興起)시킬 곳이다."
하였다. 임금이 함경 감사 조명정(趙明鼎)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제 70세인데, 지금 멀리 보내는 일을 당하니 늙은 감회가 서글퍼진다. 북관(北關)은 다른 때에라도 오늘의 간곡한 마음을 잊지 말고 반드시 마음을 써서 직무를 거행하되 서로 저버림이 없게 하라."
하고, 호서 감사 윤동섬(尹東暹)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남북으로 송별하는 것이 모두 내가 70이 되는 해에 있게 되었으니, 바로 이른바, ‘아! 그대는 9만 리를 간다.’는 격인데,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김기대(金器大)는 마땅히 한 번 시험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너무 부드럽고 착하기만 하지 않은가?"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루 시신(侍臣)에게 물었는데, 모두 홍봉한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찰사는 체모가 중대한 것인데 요즈음에 제수되는 것은 모두가 내비(內批)에서 나왔으니, 희기(希覬)하는 자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다. 비유하건대 물건을 체[篩]로 치다가 찌꺼기가 남아서 반드시 모이게 되어 마침내는 털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필연(必然)한 형세이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전하께서 넓히고 좁힘을 재제(裁制)하시는 데에서 그 요점이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오례의(五禮儀)》에서 조현례(朝見禮) 권(卷)을 가져다 승지 이이장(李彛章)으로 하여금 의주(儀註)에 쓰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예의(禮儀)가 상세하게 갖추어져 물을 부어도 새지 않겠다."
하고, 이어서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입으로 부르면서 이이장에게 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례의보편(五禮儀補編)》 삼의주(三儀註)는 나라의 중요한 법이다. 내일 대신과 예조 당상이 모두 모여서 중초(中草)하여 아뢰고, 《세손빈책봉의(世孫嬪冊封儀)》에 첨보(添補)한 것은 내일 홍문관·예문관 두 제학(提學)이 교정(校正)하면 승지가 정원에 모여서 중초하여 아뢰라."
하고, 하교하기를,
"예는 마땅히 상세하게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종전에 갖추어지지 않은 의절(儀節)을 일체 써서 내렸으니, 모든 규례는 예관(禮官)이 의주(儀註)를 소상하게 강정(講定)하여 《오례의보편》 끝에 첨입(添入)시키고 이번에 마땅히 광명전(光明殿)에서 같이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세 조항의 조현례를 쓰게 하였다. 자전(慈殿)을 받들고 세자빈의 조현례(朝見禮)를 받는 의식에 이르기를,
"자전(慈殿)의 자리를 전중(殿中) 북벽(北壁)에 설치하되 남향(南向)하여 의자를 설치하고 보안(寶案)을 설치하며 시위(侍衛)는 여느 때와 같이 하고, 전하의 자리는 전동(殿東)에다 설치하되 서향(西向)하여 욕석(褥席)을 설치하고 다만 시위는 동쪽 기둥 밖에 동쪽을 가까이하여 설치하며, 왕비의 자리는 전서(殿西)에다 설치하되 동향(東向)하여 욕석을 설치하고 다만 시위는 서쪽 기둥 밖에 서쪽을 가까이하여 설치하고, 세자빈(世子嬪)의 자리는 정중(庭中)에 설치하되 북향(北向)하여 먼저 사배(四拜)를 행하고는 단수반(腶脩盤)을 받들어 자전에게 올리고 【여관(女官)이 도와서 들고 정문(正門)에서 들어온다.】  다음으로 조율반(棗栗盤)을 전하에게 올리며, 【여관이 미리 전중(殿中)에 받든다.】  다음으로 단수반을 왕비에게 올리고는 【여관이 미리 전중에 받든다.】  뒤에 사배를 행하면 상의(尙儀)가 전중(殿中)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예가 끝났다[禮畢]고 아뢴다. 자전께서 내전으로 돌아가는데 시위는 여느 의식과 같이 하고 무릇 여러 의식과 절차는 《오례의》를 모방하여 마련한다."
하였다. 【이는 다만 대전과 중전이 조현을 받는 것과 다름이 있어, 잔[爵]을 받고 찬(瓚)을 받는 것을 본문(本文)에는 남쪽을 먼저하고 북쪽을 뒤로 하였는데, 여기서는 다 전중(殿中)에서 남쪽을 가까이하여 북향하였다.】  전하·왕비와 세자·세자빈이 세손빈의 조현례를 받는 의식에 이르기를,
"전하·왕비의 자리는 전중 북벽에다 설치하고는 남향하여 의자를 설치하고 보안(寶案)을 설치하였는데 시위는 여느 때와 같이 하고, 왕세자의 자리는 전동(殿東)에다 설치하는데 서향하여 욕석(褥席)을 설치하고 시위는 뜰 동쪽에 멈추게 하며, 빈궁의 자리는 전서(殿西)에 설치하는데 동향하여 욕석을 설치하고 시위는 뜰 서쪽에 멈추게 하며 세손빈의 절하는 자리는 뜰 가운데 두 곳에 설치하되 북향하여 하나는 동쪽을 가까이하고 하나는 서쪽을 가까이하였는데 먼저 사배례(四拜禮)를 전하에게 행하고 조율반(棗栗盤)을 받들어 【여관(女官)이 도와서 든다.】 정문(正門)으로 들어와 전하에게 올리고는 동문(東門)으로 나가 절하는 자리에 나간다. 다음으로 왕비에게 사배례를 행하고 단수반(腶脩盤)을 받들어  【여관이 도와서 든다.】  정문으로 들어와서는 왕비에게 올리고, 서문(西門)으로 나간다. 조율반을 받들어 동문으로 들어가서 왕세자에게 드리고는 인하여 동문으로 나가 단수반을 받들어 서문으로 들어가서 빈궁(嬪宮)에게 드리며 인하여 서문으로 나가서 먼저 동쪽의 절하는 자리로 나가 사배하고, 다음 서쪽의 절하는 자리에 나가 사배하면 상의(尙儀)가 전중(殿中)에 나가서 끓어앉아 예가 끝났다고 아뢴다. 전하·왕비는 내전으로 돌아가고 세자·빈궁은 자리 앞에 서 있는데 시위는 올 때와 같이하며, 세자·빈궁이 위차(位次)로 돌아간다. 무릇 의절 문법(儀節文法)과 중엄(中嚴)·내엄(內嚴)·외판(外辦)·내판(內辦)·외비(外備)·외정(外整) 등 절차는 각각 의절을 따르는데 《오례의(五禮儀)》를 모방하여 마련한다."
하였다. 【또한 본문(本文)과 다름이 있으니 잔[爵]을 받고 찬(瓚)을 받는 것을 다 전남(殿南)에서 서쪽을 가까이하여 북향(北向)한다.】  또 자전이 왕비의 존현례를 받는 데 대해 쓰라고 명하였으니, 이르기를,
"왕대비의 자리를 전중(殿中) 남향(南向)에 설치한다. 만약 대왕 대비와 왕대비가 같이 조현을 받는 경우에는 대왕 대비는 전중에서 남향하여 의자를 설치하고 왕대비는 전중에서 서향하여 욕석을 설치하며 왕비가 절하는 자리는 남쪽 기둥 밖에서 중앙을 당하여 북향하고 다만 전후로 사배를 하는데, 정문으로 들어가 동문으로 나와서 단수반을 먼저 대왕 대비전에 올리고 다음으로 왕대비전에 올리며, 의장(儀仗)이 동쪽 뜰에 멈추면 상의(尙儀)가 예가 끝났다고 대왕 대비전에 아뢰고 각전(各殿)에 중엄과 외판을 예와 같이 한다. 보안(寶案)은 다만 대왕 대비전에만 하고 전정(殿庭)의 의장은 다만 대왕 대비전의 의장만 설치하며, 자전(慈殿)·대전(大殿)·중전(中殿)이 빈궁의 조현을 받을 때에는 다만 자전의 의장만 설치하고, 자전·대전·중전이 조현을 받을 때에 만약 두 자전을 받들 경우에 있어서는 대왕 대비의 좌석은 북쪽에서 남향을 하여 설치하고, 왕대비의 좌석은 전동(殿東)에서 서향을 하여 설치하며, 전하의 좌석은 기둥 밖에 서쪽을 가까이하여 동향에서 설치하고 왕비의 좌석은 기둥 밖에 동쪽을 가까이하여 서향으로 설치하며, 세자의 좌석은 첨계(簷堦) 위에 설치하는데 서쪽에서 약간 물려서 하고, 빈궁의 좌석은 첨계 위에 설치하되 동쪽에서 약간 물려서 하는데 남은 의식은 모두 같으니 이 한 조항은 다 현주(懸註)한다. 무릇 삼의주(三儀註)에
1. 자전께서 왕비의 조현을 받는 의식.
1. 자전과 대전·중전이 빈궁에게 조현을 받는 의식.
1. 자전과 대전·중전·세자·세자빈이 세손빈의 조현을 받는 의식이다."
하였다. 【이 삼의주(三儀註) 가운데 만약 두 자전을 받드는 경우에 있어서도 의주(儀註)가 모두 같다.】


【태백산사고본】 67책 98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8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의약-의학(醫學)

 

10월 25일 경인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손빈을 삼간택(三揀擇)할 때에 강서원(講書院)의 관원(官員) 2원(員)을 나누고 위종사(衛從司)의 관원 2원을 나누며 도총부(都摠府)를 나누고 병조 낭청 각 2원을 나누어서 윤번으로 입직(入直)한다. 무겸(武兼) 2원과 내금위 10원은 다만 배위(陪衛)하는 것으로 계하(啓下)하였으며, 그 후 왕래할 때에 강서원 1원과 위종사 1원은 군함 실직(軍銜實職) 가운데서 더 계하 하였다가 일이 지난 뒤에는 감하(減下)한다. 오장 차비(烏杖差備) 15인(人)에서 5인씩 좌우로 나누고 귀유치(歸遊赤) 10인에서 5인씩 좌우로 나누되 병조 도총부 낭청 각 1원과 무겸 2원과 내금위 10원과 전후 패군(前後牌軍) 1백 명으로 거행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왕세손의 옥대(玉帶)는 검소함을 따라 수정(水晶)을 쓰는데 지금 재상가(宰相家)에서 수정으로 도서(圖暑)를 만든 자가 많아 많이 얻지 못할 근심은 없으니 멀리 경주(慶州)에서 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의 집 도서를 모두 빼앗아 쓰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정대(正帶)는 금번 동지사(冬至使)가 마땅히 얻어오게 될 것이고 가례대(嘉禮帶)는 남양옥(南陽玉)을 쓰려고 하는데, 후일의 옥을 채취하는 폐단을 열어놓을까 두렵다. 대내에 옛날 보관한 것이 있으니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 가례(嘉禮)의 일로 전지(傳旨)를 쓰라고 명하고, 그 끝에 말하기를,
"육례(六禮)에 친림(親臨)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금년에는 정전(正殿)에 나가고 싶지가 않다. 헌함(軒檻)에 임하여 초례(醮禮)에 보내는 데에 이르러서는 정월에 있으니 내가 장차 친림(親臨)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초사(醮辭)에 ‘경(敬)으로써 삼가 거느리라.’고 되어 있는데 국례(國禮)에 ‘엄한 것으로써 삼가 거느리라.’는 것으로써 고쳤으니, 엄(嚴)자의 뜻이 실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의 육례(六禮)247)   때에는 대혼(大婚)에 비하여 절반을 감해서 검은 비단 세 가지와 분홍 비단 두 가지로 하였다. 이번에는 비록 차등을 두려고 하여도 다시 감할 것이 없으니, 이제 또한 이 규례에 인하여 납징(納徵)248)  을 하되 말[馬] 1필(匹)을 감하는 것은 국혼(國婚)에 정한 규례이니 이에 의하여 이정(釐正)하라. 정사(正使)가 빈부(嬪父)에게와 빈부가 그 선대에 고유하는 것을 이번에는 모두 왕세손궁이라 일컬으며 반상(盤床)과 면폐(面幣)에 대하여 신칙한 하교는 세손빈 의궤(儀軌) 말단에 싣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 대해 이미 감하였으니 세손빈 집에 반상과 면폐는 다만 삼간택하는 날과 빈(嬪)을 책봉하여 친영(親迎)하는 날에 본궁(本宮)에 나아가 궁인(宮人)과 내시(內侍)가 거행하되 일체 능단(綾緞)은 사용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내음 전자(內音篆字)를 들이라고 명하고 보고나서 전획(篆劃)으로 내음(內音) 두 글자를 써서 내리고, 하교하기를,
"이 본(本)으로 하되 그 위에 어필(御筆)로 쓸 것이다."
하였다.

 

10월 26일 신묘

하교하기를,
"마땅히 처음에 법을 정해야 할 것이다. 세손빈궁에 다만 강서원(講書院)·위종사(衛從司)만 문안하고 승정원·옥당(玉堂)·종반(宗班)은 그만둘 것이며, 종신(宗臣)이 가자(加資)하거나 말미를 받아 문안하는 것도 또한 그만두도록 하라. 봉두성(鳳頭聲)은 궐내(闕內)에서는 그만두고 궐외(闕外)에서는 마땅히 소리를 낮추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시배(侍陪)는 상궁(尙宮)은 그만두고 다만 5쌍(雙)으로 하며, 당의(唐衣)를 입고 함(函)을 이고 갈 여종[婢] 3쌍과 함을 지고 갈 충찬위(忠贊衛) 1쌍으로 거행하라."
하였다.

 

정원달(鄭遠達)을 공조 참의로 삼았으니, 홍봉한이 아룀으로 인해 전조(銓曹)에 명하여 대신에게 물어서 당하(堂下)로서 의망(擬望)하여 갖추게 한 것이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빈궁(嬪宮)에는 조정의 전정에서 문안 정후하는 일이 없는데, 세손궁에게 하는 것은 일의 관계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제 절목(節目)의 이정(釐正)으로 인하여 생각건대 세손궁에게 조정 문안하는 것은 지나치니 이 뒤로는 하지 말게 하고, 사은(謝恩)에는 다만 세손 사부(世孫師傅)·유선(諭善), 강서원의 실직을 겸한 관원과 위종사(衛從司)의 관원만 하게 하며, 혹 말미를 받은 자가 있으면 시강원의 규례에 의하여 일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임진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수찬 홍낙순(洪樂純)·홍술해(洪述海)에게 패초(牌招)하여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였다. 《맹자(孟子)》를 읽으라고 명하고, 이어서 홍술해로 하여금 홍낙순의 옆에 옮겨서 부복하여 서로 문의(文義)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또 오늘 밤 입직(入直)은 두 유신(儒臣)으로 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전일과 같이 시애(撕捱)하지 말게 하려는 것이다. 선조(先朝)에서 김만채(金萬埰)·윤덕준(尹德駿)을 조제(調劑)한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도 또한 나의 뜻을 본받아 지난 일로써 가슴 속에 담아 두지 말라."
하니, 홍술해(洪述海)가 말하기를,
"신은 본래 평탄(平坦)하였었는데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니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홍낙순(洪樂純)은 말하기를,
"신은 조행(操行)이 보잘것 없어 남의 말썽을 많이 초래하였으니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남을 탓할 뜻이 없었습니다. 성교가 이와 같으니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처음에 홍술해는 박지원(朴志源)이 그 부자(父子)를 논척(論斥)한 상소가 홍낙순이 사주한 데에서 나왔는가 의심하였는데, 간직(諫職)이 됨에 미쳐 참혹하게 홍낙순을 논박하고 두 집을 원수처럼 보아오다가 같이 옥당(玉堂)이 되어서는 서로가 시애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조석우(趙錫愚)를 지평(持平)에 제수한 명이 신사(身死)한 뒤에 내려졌으므로 그 집에서 관교(官敎)를 감영(監營)에 환납(還納)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하교하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관교를 그 집에 보내어 즉시 제주(題主)하게 하고, 부조(賻助) 등의 절차를 도신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주서(注書) 조석목(趙錫穆)에게 말하기를,
"내가 영남 사람을 수용(收用)하는 까닭은 이를 남에게 자랑하여 빛내자는 것이 아니라, 그 추로(鄒魯)의 고장이기 때문에 수용한 것이니, 너도 또한 나의 뜻을 본받으라."
하였다.

 

10월 28일 계사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금사령(禁奢令)을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금번 가례를 위시하여 연여(輦輿)의 장식은 금(金)을 쓰지 말고 주석[錫]으로 대신하며, 이 뒤로 각전(各殿)에서 연여를 새로 만들거나 수리 보수할 때에 이 규례를 적용하여 주석으로 장식하고 무릇 의복에 딸린 패물도 옛날 순금으로 사용하던 것을 모두 도금(鍍金)을 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갑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심경(心經)》을 읽으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심경》에서 의심나는 곳이 매우 많다. 내가 30세부터 이 글을 공부하였으나 마음을 본다는 설(說)은 마침내 환히 깨닫지를 못하였다. 대개 남이 모르고 자신만이 혼자 아는 곳에 먼저 그 마음을 기른다면 외물에 유혹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써 사물을 보게 되니, 곧 사물의 이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씨(佛氏)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본다는 것은 그 상도에 반대되고 이치에 어긋남이 심하다."
하였다.

 

초간택(初揀擇)에는 경기 감사 김시묵(金時默)의 딸과, 부사직 윤득양(尹得養)의 딸과, 유학 민정렬(閔鼎烈)의 딸과, 참의 서명응(徐命膺)의 딸과, 부사과 유언현(兪彦鉉)의 딸이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引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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