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을미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요즈음 양연(兩筵)과 삼대(三對)250) 를 차례로 설행(設行)하고 또 상참(常參)을 행하였으니, 학문상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를 더욱더 힘씀이 마땅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어떻게 해서 진익(進益)하는 공부라고 말하는가?"
하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힘쓸 것은 진덕(進德)·수업(修業)하는 공부이니, 몸소 행하고 마음에 얻은 연후에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가 거의 실효(實效)를 얻게 될 것입니다. 겨울밤이 정히 기니 밤 기운이 청명(淸明)한 때에 옛사람의 잠계(箴戒)를 진강(進講)하여 마음에 머물러 두고 몸소 행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각별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이육(李堉)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오늘 참여하지 않은 여러 사(司)의 수당상(首堂上)을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답(答)하기를,
"상달한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2일 병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게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인배(李仁培)가 말하기를,
"충(忠)과 서(恕)가 도(道)에 어김이 멀지 않다는 것은 학자(學者)의 충과 서요, 천도(天道)로써 말하건대,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바로잡는 것은 성인(聖人)의 충과 서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 심원(深遠)하여 마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의 충과 서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평안 감사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앙진(仰陳)하기를,
"금년에 마땅히 사야 할 85근(斤)의 삼가(蔘價)에 대해 다시 9천 5백 20냥(兩)을 더 계획하여 고르게 배정(排定)해서 첨급(添給)하고, 명년에는 마땅히 전과 같이 거행할 것입니다. 미삼(尾蔘)에 있어서는 원래 정해진 매 근(每斤)마다 70냥의 값이 이미 적지 않으며, 전에 체삼(體蔘) 값 가운데 본도(本道)에서 가감(加減)하려는 뜻에 분부한 바가 있고 이제 또 이렇게 더 첨급한 것이 있으니 더욱 논할 것이 없습니다. 또 북도(北道)에 분정(分定)한 삼은 바로 이 관서(關西)에서 옮겨 사온 것으로 금년에 마땅히 15근을 사올 값을 관서의 값 원수(元數) 가운데 본도에서 마련한 데 의하여 우선 수송(輸送)해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사신이 이미 삼 무역을 물려서 양년(兩年)에 나누어 하게 되었으니, 일시에 모두 첨가(添價)를 허락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더 계획한 가운데에서 먼저 금년에 마땅히 사야 할 수효를 조처하여 주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우선 내년 가을을 기다려서 다시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봉한이 조돈지(趙暾之)를 외방에 보직(補職)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는 것으로써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내직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교리 이인배(李仁培)에게 묻기를,
"세손(世孫)이 지난번에 병중(病中)에 진강(進講)하였다고 하는데, 어떤 옷을 입었는가?"
하니, 이인배(李仁培)가 말하기를,
"망건(網巾)을 벗고 중의(中衣)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건(巾)을 쓰지 않고 신하에게 임하는 것은 몹시 불경(不敬)한 일이니, 보도(輔導)하는 절차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이 뒤로 기운이 불평스러울 때는 강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서 좌정하여 소대(召對)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1월 5일 기해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재실(齋室)에 들어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어소(時御所)는 마땅히 궁(宮)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인데, 근래에 하궐(下闕)을 수궁(守宮)이라 일컫고, 이 궐(闕)을 유원(留院)으로 일컫는 것은 잘못이다. 이 뒤로는 이 궐을 수궁이라 일컫고 하궐을 유원으로 일컫는 것이 옳겠다."
하니,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하궐을 유원으로 일컫는 것은 친착(襯着)하지 않은 것 같으니, 창덕궁 입직(入直)이라고 일컫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따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11월 6일 경자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재실(齋室)로 돌아왔는데, 환궁할 시각 단자(單子)를 미리 들여왔으므로 여러 승지를 모두 체차(遞差)하고, 한광회(韓光會)·채제공(蔡濟恭)을 임명하였으며, 서명천(徐命天)은 상궐 수직 승지(上闕守直承旨)로서 어가(御駕)를 따라왔으므로 오위 장(五衛將)을 임시 차출하여 수직하게 하였다. 환궁할 때에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 두루 들렀다.
11월 7일 신축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홍자(洪梓)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문신 제술(文臣製述)에 친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國) 자가 원(圓) 가운데 혹(或) 자를 둔 것은 보아 올수록 두렵기만 하니 실로 인군이 경계로 삼을 곳이다."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영순(趙榮順)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처음으로 사모(紗帽) 쓴 것을 보고 네 조부를 추억(追憶)하여 마음이 매우 서글펐다."
하니, 조영순이 말하기를,
"신이 전번에 망령된 말을 하여 성심(聖心)을 개운하게 해 드리지 못하였으므로 신을 부효(浮囂)하고 조경(躁競)하는 부류로만 아실 것이니, 죄송하고 위축됨이 간절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부효하고 조경하는 것을 비록 자신이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앉아 보기만 하고 금하지 않은 것도 또한 잘못이다."
하였다. 조영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누구를 보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의 본정(本情)은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앙달(仰達)하려고 하였으나 매진(媒進)하는 데 가깝기 때문에 지금까지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진(媒進) 역시 유익함이 없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그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본다.’고 하였는데, 나 역시 그 행실을 볼 것이니, 힘쓰고 힘쓰라."
하였다. 과차(科次)를 끝내고 수석을 차지한 김보순(金普淳)에게 반숙마(半熟馬)를 내려주었다.
11월 8일 임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는데, 대신과 비국 당상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유신(儒臣) 이재협(李在協)이 문의(文義)를 인하여, 말이 지난번 여러 승지가 모두 체차(遞差)된 일에 미쳐 말하기를,
"마침내 대성인(大聖人)이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는 나의 괴로운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난날의 일이 있었던 것인데, 유신(儒臣)이 감히 제기(提起)하니 추고(推考)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재협(李在協)이 말하기를,
"신은 승지가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담(李潭)은 엄교(嚴敎)의 아래에서 감히 변명을 하였으니, 청컨대 중추(重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체차(遞差)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시독관 이인배(李仁培)가 체차하는 것이 중도에 지나치다는 것으로써 앙진(仰陳)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번(下番)에서 또한 감히 영호(營護)하고 변명하니, 체차하는 것이 옳다."
하고, 뒤에 가서 체차하지 말고 다만 추고하라고 하교하였다. 임금이 두 정승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차대(次對)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먼저 법강(法講)을 행하였는데 현재 세도(世道)가 과연 어떠한가?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 여덟 글자에 대하여 내가 몹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의 세계(世界)가 당(黨)에서 비롯하여 반역이 되니 여러 신하가 만약 그러한 것을 안다면 반드시 당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경이 아뢴 바 수삼인(數三人)을 한결같이 물리쳐서 복직(復職)하지 못하게 한 것은 내가 다른 뜻이 없고 나라를 위한 괴로운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조영순(趙榮順)을 어제 처음 보니 그 조부만 못하고, 조관빈(趙觀彬)은 그 사람이 착하고 좋다. 지금 조영순 그가 ‘매진(媒進)’ 두 글자를 말하였는데, 나는 무심히 말한 것을 그는 곧 의도를 두고 말하였다. 그가 비록 옛날 경악(經幄)의 신하였으나 지금은 한 변방(邊方)의 신하가 되었는데, ‘전하가 누구를 보았느냐?’고 하는 말을 어찌 감히 한단 말인가? 진실로 방자하다. 곧 처분하려고 하였으나 지난번에 서지수(徐志修)가 승진 발탁된 지 오래지 않아서 문득 멀리 유배되는 데 이르렀으니, 내가 이제 뒤좇아 생각하면 부끄럽다. 이제 만약 또 조영순을 배척하면 무엇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느냐는 것과 같음이 있기 때문에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였으나 2품(品) 직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변지(邊地) 당상(堂上)에 제수하려고 한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전하께서 누구를 보았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은 진실로 방자하다. 당폐(堂陛)251) 가 엄격하지 못하여 분의(分義)가 실추되고 어긋난 것이다. 엄중히 처분함이 마땅하나 옛날에 서용한 것을 느꼈고 한번 등용하였다가 다시 내쫓는 것도 왕자(王者)가 사람을 임용하는 방도가 아니다. 그 비록 참작을 한다 하나 그 옛 습관을 징계하고 군신(君臣)의 도를 엄격히 하는 데에 있어 규례에 따라 처분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대신에게 효유(曉諭)하고 오늘 차대(次對)에서 하교하는 것이다. 의주 부윤 조영수는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제수하여 오늘 사조(辭朝)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어저께 대답의 실수는 연석(筵席)에 생소한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진(媒進)’ 두 글자는 없어진 제목(題目)이 되었으니 오늘 여러 신하가 만약 ‘매진’의 제목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몹시 즐겁겠다. 그리고 무신(武臣) 장지항(張志恒)과 문신(文臣) 조영순(趙榮順)은 크게 최절(摧折)을 가한 뒤에야 그 객기(客氣)가 저지될 것이다."
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유신(儒臣)에게 《숙야잠(夙夜箴)》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1월 9일 계묘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1월 10일 갑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천둥의 변괴로써 인구(引咎)의 차자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정원에서 면려(勉勵)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진달하기를,
"그윽한 데 홀로 있어 태만을 부리기 쉬운 곳이나 정령(政令)을 시행 조처하는 즈음에 공경하고 성실하게 진실한 공부를 쌓아 성실한 마음을 미루어 나가고, 실지의 은혜를 행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편히 삶을 얻게 하며, 지나친 비용을 경계하고 범람한 용도를 절약하여 재화(財貨)가 부족함이 없게 하고, 말이 비록 개운하지 않더라도 한결같이 모두 개납(開納)하여 포용하여 받아 들이는 덕에 부족함이 없게 하며, 정상이 용서할 점이 있으면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허락하여 광대한 천지에 유감이 없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허다한 유신(儒臣)으로 어찌 다만 4인(人) 뿐이며, 어젯밤 입직(入直)한 사람이 이제 또 어디에 있는가? 임금이 노쇠하고 옥서(玉署)가 또 쇠하였으니, 어찌 능히 푸른 하늘에 우러러 보답하며 그 임금을 권면(勸勉)하겠는가?"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상달(上達)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근일(近日) 연중(筵中)에서 빈료(賓僚)가 우러러 질문함으로 인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으로써 예답(睿答)하셨다 하니, 위대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참으로 우리 저하(邸下)께서 화기(和氣)에 이르는 하나의 큰 기회(機會)입니다. 저하께서 이미 노여움을 옮기는 것이 병통이 되는 것인 줄 아신다면, 과연 능히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 것이 약이 된다는 것에 공부를 더하시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바야흐로 경계하고 두려워함이 간절한 가운데 진달한 바가 간절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옥당에서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저하께서 비록 날마다 주연(胄筵)252) 을 열어 경전(經傳)을 토론하시나 환첩(宦妾)과 설어(暬御)가 나옴이 궁료(宮僚)를 인접(引接)할 때보다 항상 많으며, 비록 자주 차대(次對)를 행하여 서무(庶務)를 자문(咨問)하시나 완호(玩好)253) 와 음식의 욕심이 궁중의 심수(深邃)한 곳에서 쉽게 타고 들게 됩니다. 인심은 지극히 위태롭고 익숙한 곳은 잊기 어려운 것입니다. 염려하는 사이에 잠시라도 혹 약간 어긋나거나 그윽이 혼자 있을 즈음에 하나라도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으면 구인(九仞)의 공력이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254) 천리의 어긋남이 호리(毫釐)에서 비롯되게255) 되니, 이는 신 등이 크게 두려워 하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바야흐로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간절한 가운데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11일 을사
이담(李潭)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이경호(李景祜)를 대사헌으로, 김원행(金元行)을 좨주(祭酒)로, 홍계희(洪啓禧)를 경기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재이(災異)로써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의 말이 지나치다. 옛날 육수부(陸秀夫)256) 는 배 안에서도 오히려 그 임금과 더불어 나라를 구제하려고 하였다. 이제 비록 망하려한다 하더라도 임금과 신하가 더욱더 힘쓴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영남(嶺南) 외에 여러 도의 그 다음으로 심한 고을에 옛 포흠(逋欠)은 절반을 정봉(停捧)한 것에서 나머지에도 또 그 절반을 정봉하고, 3분의 2를 정봉한 것에서 나머지에도 또 그 절반을 정봉하며, 옛 포흠은 특별히 절반을 정봉하고, 관동(關東)은 그 분등(分等)이 있으니 그 분등에 따라 그 절반을 정봉하여 내가 옛날 휼민(恤民)하던 뜻을 본받음을 보이라."
하였다. 전라 감사 원경순(元景淳)과 황해 감사 조영진(趙榮進)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자가 일찍이 교화(敎化)의 근본되는 정사에 유의(留意)하지 않으니 이것이 민망합니다. 민심(民心)이 비록 지극히 미련하나 오히려 일단(一端)의 통하는 곳이 있으니, 관장(官長)이 된 자가 진실로 그 본연(本然)의 착함을 개발(開發)하면 또한 반드시 점차로 연마(硏磨)되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정령(政令)과 형벌(刑罰)을 내릴 즈음에 항상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풍속을 인도하는 뜻을 그 가운데에 비춘다면 백성이 어찌 날로 착한 데로 옮겨 가지 않겠습니까? 수령이 그 직임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또한 방백이 동독하고 통솔하는 데에 달려있으니, 방백이 진실로 능히 자신을 단속하기를 청렴하고 근엄하게 하면 수령이 자연히 두려워하고 꺼려할 것입니다. 입시하는 두 도신(道臣)에게 반드시 자신을 잘 단속하고 부임한 뒤에 출척(黜陟)을 엄명(嚴明)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신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도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듣고 가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병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형조 당상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니, 나주(羅州) 등 고을에서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한 죄인과 능주(綾州)에서 향축(香祝)을 도적질한 죄인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수(白首) 늙은 나이에 무슨 마음으로 어리고 어리석은 소민(小民)에게 대벽(大辟)257) 을 결정한단 말인가?"
하고,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에게 감사 정배(減死定配)하고, 향축을 도적질한 어린 노비(奴婢)에게는 혹은 정배하고 혹은 형장(刑杖)을 쳐서 방송(放送)할 것을 명하였다. 형조 참판 이지억(李之億)이 말하기를,
"신이 법관(法官)이 되어 일률(一律)로 처단하지 못하였으니, 대죄(待罪)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유(鄭彦儒)가 말하기를,
"뒷날의 폐단이 있게 되니 이와 같은 율(律)은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는 뜻으로 8도(道)에 반포해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판의 말한 것이 체통을 얻었구나."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비록 우리 성상(聖上)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한 인(仁)에서 나왔으나 유사(有司)의 신하가 능히 법으로써 간쟁하지 못하고 다만 대죄(待罪)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옳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7책 98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8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출판-인쇄(印刷)
[註 257] 대벽(大辟) : 사형.
사신(史臣)은 말한다. "비록 우리 성상(聖上)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한 인(仁)에서 나왔으나 유사(有司)의 신하가 능히 법으로써 간쟁하지 못하고 다만 대죄(待罪)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옳겠는가?"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였다.
11월 14일 무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임피(臨陂) 백성의 호소하는 자를 불러 물으니, 말하기를,
"신구(新舊) 포흠(逋欠)에 대한 징납(徵納)과 양역(良役)의 신포(身布)가 어렵기 때문에 전곡(錢穀)을 거두어 상경(上京)하여 호소해서 견감(蠲減)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바를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형조 판서로 하여금 개양문(開陽門) 밖에서 장두(狀頭)258) 두 사람은 형장(刑杖)을 집행하여 정배(定配)하고, 임피 현령 김치량(金致良)은 성현역(省峴驛)에 도 삼년(徒三年)에 정배하며, 도신(道臣) 박도원(朴道源)은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11월 17일 신해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1월 19일 계축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각도(各道)에서 물선(物膳) 공상(供上)은 분등(分等)의 제도가 있는데, 탐라(眈羅)의 감유(柑柚) 공상은 이제 들은즉 세손궁(世孫宮)에도 있다고 하니, 이 뒤로는 공상하지 않는 것으로 영원히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0일 갑인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호서(湖西)에 생복(生鰒)을 복정(卜定)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어공(御供)은 또한 백성의 폐단이 되고 또 산 물건을 차마 진어(進御)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백성의 폐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곧 저치미(儲置米)를 탕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간략하게 봉진(封進)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의대(衣襨)가 두텁지 않은 듯하니, 아마도 조섭(調攝)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배양(培養)하기를 이와 같이 했으니, 만약 두터우면 기거(起居)하는 즈음에 불편하다."
하였다.
홍낙순(洪樂純)을 진위 사진 어사(振威査陳御史)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대사성 서명신(徐命臣)에게 명하여 본관(本館)에 월강(月講)과 승보시(陞補試)를 신칙하고, 이어서 학교수(學敎授)에게 명하여 상제(庠製)를 최촉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니,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입대(入對)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평안 감사 장계(狀啓)를 가져다 올리며 말하기를,
"이는 모두 대조(大朝)께 품의하여 처리할 것입니다. 이런 등의 장계로 만약 하문(下問)하신다면 실로 이는 백성의 폐막(弊瘼)을 살피고 국정(國政)을 위하는 도리가 되니, 물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반복하여 상세히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사간 심각(沈殼)은 차대(次對)에 참여하지 않은 비국 당상을 중추(重推)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11월 21일 을묘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강원 감사 이최중(李最中)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관동(關東)은 비록 극심한 곳은 아니나 경(卿)은 마땅히 선무(宣撫)하라."
하니, 이최중(李最中)이 말하기를,
"전의 도신(道臣)이 송금(松禁)259) 으로써 도내(道內)에 엄히 신칙하였으니, 신도 또한 이를 이어받아 신칙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하(蕭何)가 법을 만든 것을 조참(曹參)이 따르고 실추됨이 없게 했었던 것260) 이 옳았다."
하였다. 홍낙순(洪樂純)을 입시(入侍)하라 명하고, 말하기를,
"답험(踏驗)하는 즈음에 자호(字號)261) 가 서로 바뀌면 어떻게 간계(奸計)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홍낙순이 말하기를,
"촌·면(村面)의 양안(量案)에 스스로 정해진 경계가 있으니, 감히 대단히 속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일에 대해 익숙하게 아는 사람을 얻어 데리고 가게 되면 일을 이룰 것이다."
하였다.
11월 22일 병진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특별히 윤득맹(尹得孟)을 수찬으로 제수하고 김상익(金相翊)을 부수찬으로 삼았는데, 김상익은 부위(副尉) 김두성(金斗性)의 아버지이고, 윤득맹은 참판 윤득양(尹得養)의 형이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누락되는 것은 진실로 애석한 일이나 다만 옥서(玉署)262) 에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떳떳한 일이 못됩니다. 이 뒤로는 성의(誠意)에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을 강(講)하도록 명하고, 또 《한서(漢書)》의 노중련전(魯仲連傳)과 자공전(子貢傳)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11월 23일 정사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서 노중련전(魯仲連傳)과 추양전(鄒陽傳)을 읽으라고 명하고, 승지에게 악의전(樂毅傳)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연(燕)나라 헤왕(惠王)으로 하여금 성심으로 다시 불렀다면 악의가 반드시 다시 연나라로 돌아왔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천재(千載)의 뒤에도 그 성심이었는가 성심이 아니었는가는 소명(昭明)하여 가리울 수 없으니, 후세에 또한 족히 보고 경계 삼을 곳이 된다.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반드시 성심을 다하여 평생에 남을 미워하지 않았고 또한 남을 편벽되이 사랑하고자 하지도 않았으니, 이것으로써 스스로 힘쓸 뿐이었다. 그런데 어제 자공전을 보건대 반드시 이런 이치가 없을 것이니, 성인의 문하(門下)에 학행이 높은 제자로서 어찌 전국 종횡(戰國縱橫)의 설을 하였겠는가? 곧 사씨(史氏)가 잘못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入對)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어제 서연(書筵)에서 창문을 열어 놓아 추위에 촉감(觸感)되어 기운이 몹시 불편하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날씨의 차가움이 비록 이와 같으나 서연을 열지 않으면 진덕(進德)·수업(修業)하는 길이 끊기게 되니, 원컨대 더욱 더 힘쓰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옳으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11월 25일 기미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의대(衣襨)가 몹시 얇으니, 신과 호조 판서가 서로 의논하여 초구(貂裘) 한 벌을 지어 올릴까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입지 않았던 것을 이제 어떻게 입겠는가?"
하매, 도제조 홍봉한이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짧고 작은 옷으로 지어 올리고 사서 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영흥(永興) 단천(端川)에 은점(銀店)을 설치하여 채용(採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흥은 곧 용흥(龍興)한 옛 기지이니, 청명(淸明)한 산맥(山脈)을 훼손시키는 것은 마땅치가 않고 또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북쪽 지방은 피지(彼地)와 멀지 않으니 또한 금(金)나라 임금 양(亮)이 오산(吳山)에 말[馬]을 세우는 뜻263) 을 열어 주는 격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서 입직(入直)하는 선전관을 부르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몰래 가서 물정(物情)과 산형(山形)을 상세히 탐지해 오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근래에 설서(說書)는 모두 회피하는 자리가 되었으니 한림에서 설서로 천전(遷轉)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한림에 있는 사람이라도 서로가 설서가 되는 규례로 마땅히 변통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소시(召試)에 입격(入格)하면 이미 설서(說書)의 후보(候補)가 되니, 이제부터 한림 소시에 입격한 사람은 부직(付職) 여부를 물론하고 모두 설서에 의망하여 승륙(陞六)하게 되면 반드시 사국(史局)을 거쳐 앞질러 나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며, 일찍이 한림을 지난 사람이라도 또한 당후 가관(堂后假官)에 의망하여 승륙되기 전에 한유(閑遊)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신방(新榜)이 죽 늘어서 있어 가관(假官)에 비의(備擬)할 때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데, 어찌 일찍이 좌우 춘방(春坊)을 지난 사람으로서 굽어 나아가 의망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대저 조정에서 사국(史局)을 대우하는 것이 중(重)하지 않기 때문에 사관이 된 자도 또한 스스로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이미 개탄스럽다. 그리고 어찌 다시 신진(新進)의 직임을 대신하기를 즐겨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7책 9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8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농업-임업(林業) / 광업-광산(鑛山) / 의생활(衣生活) / 역사-사학(史學)
[註 263] 금(金)나라 임금 양(亮)이 오산(吳山)에 말[馬]을 세우는 뜻 : 금(金)나라 임금 양(亮)이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임안(臨安)의 호산(湖山)에서 ‘백만 대군을 서호(西湖) 위로 옮기고 오산(吳山)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말을 세웠도다.[移兵百萬西湖上 立馬吳山第一峰]’라는 시(詩)를 쓰고 중원(中原)을 병탄(倂呑)하려는 뜻을 표시한 고사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신방(新榜)이 죽 늘어서 있어 가관(假官)에 비의(備擬)할 때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데, 어찌 일찍이 좌우 춘방(春坊)을 지난 사람으로서 굽어 나아가 의망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대저 조정에서 사국(史局)을 대우하는 것이 중(重)하지 않기 때문에 사관이 된 자도 또한 스스로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이미 개탄스럽다. 그리고 어찌 다시 신진(新進)의 직임을 대신하기를 즐겨하겠는가?"
임금이 지일 윤음(至日綸音)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70년의 양복(陽復)264) 이 내일에 있으나 다스리는 효과는 아득하기만 하여 백성이 날로 곤란해지기만 하니 굽어보거나 우러러 보매 부끄러워 말이 없고자 한다. 더구나 양복의 날은 원조(元朝)와 같은데 지금 고애자(孤哀子)가 되었으니, 비록 좋은 때를 만났으나 장차 어디에 기쁨을 받들며 비록 하례를 드리려고 하나 또한 장차 어디에 하례를 하겠는가? 이는 내가 일에 따라 감회가 일어나고 부딪치는 곳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나는 체계를 이어받은 임금과는 다름이 있어 민간의 고락을 이미 익히 안다.
도하(都下)의 백성이 공시(貢市)265) 를 중요시 하여 오다가 한번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뒤로부터 공인(貢人)이 과연 이 혜택을 받고 있는가? 비록 그러나 옛날에 천하던 것이 이제 귀하고 옛날에 귀하던 것이 이제 천한 데다가 용도(用度)는 날로 번다해지고 경비는 날로 줄어들어 상평(常平)의 법이 문득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진배(進排)하는 즈음에 정채(情債)266) 는 백 가지나 되어 한 달의 응당 바칠 공물과 하루의 진상(進上)하는 물건에 대하여 1건(件)에 백 가지로 소비해야 하니, 이것이 어찌 한갓 관리(官吏)의 허물이겠는가? 또한 늠료(廩料)가 박한데 연유하여 다만 이에 의뢰하게 되니 이것이 공인(貢人)의 폐단이다. 시민(市民)은 옛 사람의 말에 ‘물건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물건의 정상이다.’라고 하였는데, 옛날 천했던 것이 이제 귀하고 옛날 귀했던 것이 이제 천한 것은 시민도 또한 한가지이다. 게다가 호노(豪奴)와 한복(悍僕)이 〈윗사람을〉 빙자하여 백성을 침탈하고 직패(直牌)를 조종하여 해독이 처노(妻孥)에까지 미치며, 한 가지 매매(賣買)로 인하여 시전(市廛)이 거의 비게 되니 이것이 시민의 폐단이다.
아! 이서(吏胥)도 또한 백성이니 교활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 교활한 것은 이서가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곧 관장(官長)이 시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서(吏胥)의 밑에서 기회를 타고 틈을 엿보는 것은 곧 겸종(傔從)267) 의 무리이다. 때로 혹은 관원이 불량하여 사(私)를 먼저하고 공(公)을 뒤로 하니, 아침에 서리(胥吏)가 되었던 자는 저녁에 거지가 되고, 아침에 틈을 엿보던 자는 저녁에 갑자기 부자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즈음에 앉았던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으니 또한 어찌 정채에 골골(汨汨)하지 않겠는가? 이서가 곤궁하여 백성이 그 폐해를 받으니 이는 서울 백성이 곤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 구중 궁궐과 시골의 오막살이는 문득 하늘과 땅 차이와 같으니, 아! 저 먼 외지의 백성은 비록 무한한 고통을 안고 있더라도 그 장차 하늘에 부르짖으며 임금에게 호소할 길이 있겠는가? 게다가 모리(牟利)의 무리들이 하나의 관원을 끼고 하나의 관문(關文)을 얻게 되면 만반으로 백성을 침탈하여 백성이 지탱하지 못하고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백단(百端)으로 백성을 침탈하니 백성은 무슨 죄인가? 황패한 마을에서 부르짖어 부자간에 서로 오열(嗚咽)하고 부처(夫妻)가 눈물을 머금고 있으니, 이와 같은데 황천(皇天)에서 백성에게 준다[皇天畀民]는 뜻이 어디에 있으며 열조(列朝)에서 백성을 부탁한 뜻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옛날 당(唐)나라 양관(楊綰)이 정승이 됨에 곽자의(郭子儀)가 성악(聲樂)을 감축시켰고, 우리 조정에서는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도헌(都憲)이 됨에 남녀가 길을 같이하지 않았으니, 지금 바라는 바는 오직 낭묘(廊廟)와 이목(耳目)의 관원에게 있다.
아! 유사(有司)의 신하와 방백 수령(方伯守令)은 정성껏 그 직무에 부지런히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때와 더불어 양복(陽復)을 맞이하게 하라. 금년의 농사는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크게 어긋났으니 내년 봄 농사에 부지런히 한 뒤에야 거의 넉넉하게 될 것이다. 무릇 모든 백성을 사역(使役)하는 정책은 일체 금지하고, 방죽을 쌓는 역사는 백성의 폐단이 가장 심하니, 봄 이후 가을 전에는 내수사(內需司)와 모든 각사(各司)의 이런 청을 일체 엄금하여 조금이나마 백성의 힘을 펴게 하며, 서울과 외방에 크고 작은 백성을 침탈하는 정사도 또한 엄금하여 하늘을 본받아 영(令)을 행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유신 윤득맹(尹得孟)을 불러 신릉군전(信陵君傳)을 읽으라고 명하고, 이어서 과천(果川)과 양천(陽川)에 암행(暗行)할 것을 명하였다. 형조와 포도청에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11월 26일 경신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같이 입대(入對)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필선(弼善)이 나에게 《패문운부(佩文韻府)》를 보라고 권하기 때문에 보았더니, 과유(科儒)의 학문에 적합함으로 곧 내어 주었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경 현전(聖經賢傳) 외에 이단 제가(異端諸家)의 설(說)을 강석(講席)에서 논란(論難)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옛날 공자(孔子)가 진(陣)을 물은 것에 대해 답하지 않은 것268) 도 또한 그럴 듯하다."
하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강관(講官)이 연석의 체모를 잃었으니,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고, 홍봉한은 파직(罷職)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하나의 양(陽)이 처음 생동하는데 바야흐로 자라는 것을 꺾지 않는 것이니, 파직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27일 신유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배알하고, 환궁할 때에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명하기를,
"좌부승지 홍명한(洪名漢)을 의약청(議藥廳)의 부제조로 더 차임(差任)하여 그로 하여금 강서원(講書院)에서 숙직하게 하라."
하였다. 그때에 왕세손이 천연두(天然痘)의 조짐이 있으므로, 환궁한 뒤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홍봉한에게 명하기를,
"경이 만약 하궐(下闕)에서 숙직한다면 내 마음이 느슨해지겠다. 오늘부터 강서원에서 숙직하고, 의약(議藥)의 모든 절차를 와서 품(稟)할 필요 없이 경의 소견으로 참작해서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11월 28일 임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승지에게 《고시선(古詩選)》을 읽으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아(孤兒)의 행한 정상은 일이 비록 불쌍하나 공손하지 못함을 면할 수 없고, 초중경(焦仲卿)269) 은 소절(小節)에 구애되어 그 대륜(大倫)을 그르쳐 또한 불효를 하였으니, 이 두 시(詩)는 효제(孝悌)의 도가 아니다. 내가 다시 유신에게 《심경(心經)》을 가지고 소대(召對)하라고 명한 것은 이 마음을 깨끗이 씻고자 한 것이다."
하니, 유신이 《심경》을 읽고 문의(文義)를 진달하였다.
11월 30일 갑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승지가 세초(歲抄)270) 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최(殿最)271) 는 중요한 일인데 경사(京司)에서 탈품(頉稟)272) 으로써 입계(入啓)하였으니 사체가 그렇지가 않다. 비록 설청(設廳)을 하더라도 마땅히 차등이 있어야 하니 명령이 있으면 그것을 하는 것이 옳겠다. 형조와 포청(捕廳)에서는 형신(刑訊)을 좌기(坐起)273) 하는 외에는 모두 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좌정하니,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입대(入對)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각사(各司)가 비록 개좌(開坐)하지 않았으나, 의금부의 과장(科場) 죄인을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마땅치가 않으니, 제때에 감단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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