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9권, 영조 38년 1762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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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을미

조정(朝廷)에서 정후(庭候)하였다.

 

1월 2일 병신

정실(鄭實)을 유선(諭善)에 단부(單付)하고, 심성진(沈星鎭)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대사간 이섭원(李燮元)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 회복되신 후에 모든 경상(景象)이 새롭게 되고 상서로운 구름과 상서로운 별이 나타났으며, 봄 기운에 만물이 싹트고 있습니다. 주연(胄筵)001)  을 거듭 열어 학문에 부지런한 정성을 폐하지 마시고 빈대(賓對)002)  를 연달아 접하시어 정사에 부지런히 하는 마음을 더욱 돈독히 하시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삼양(三陽)003)  의 때가 돌아와 태운(泰運)이 바야흐로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대조(大朝)께서 보령(寶齡)이 높으신데도 체도(體度)가 강녕(康寧)하시고 문손(文孫)004)  이 성두(聖痘)005)  를 새로 겪어 경례(慶禮)가 임박하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위로 우러러 모시는 즐거움과 아래로 임하시는 즐거운 마음이,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근심이 없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런 복경(福慶)이 냇물과 같이 이르렀으니, 마땅히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져서, 기천 영명(祈天永命)006)  의 근본을 삼으셔야 합니다. 시험삼아 한가로운 즈음에 혹 일예(逸豫)007)  의 싹이 트고 있으면 마땅히 한 칼에 베어버려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풀을 베는 데 있어 부리를 없애버리는 것처럼 공경하고 정성스럽게 하시고, 전년 9월 24일의 〈감선(減膳)했던〉 일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문(景賢門)에 나아가 궐내의 신구번(新舊番) 금군(禁軍) 및 군병(軍兵)을 호궤(犒饋)008)  하는 데에 친림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1월 4일 무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고, 천극(栫棘)009)  한 죄인 서지수(徐志修)의 위리(圍籬)를 특별히 철거하여 감등하고, 황경원(黃景源)은 우선 위리를 철폐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두 사람의 좌죄(坐罪)된 바는 비록 경중(輕重)이 있으나, 해가 이미 바뀌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프다."
하고, 이어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김시찬(金時粲)의 석방(釋放)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정한 바가 있으니,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전라 감사의 장문(狀聞)으로써 본도의 영진곡(營賑穀) 1만 5천 석을 조치해 주어 진제(賑濟)하자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청하기를,
"금당도(金塘島)를 다시 양향청(糧餉廳)에 소속시켜 둔전(屯田)을 열어 개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봉한이 나라에 경사가 있다는 것으로써 선양(宣揚)하기를 앙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심발(沈墢)과 한광회(韓光會)를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사 궁민(四窮民)010)  에게 쌀과 베를 하사하였다.

 

1월 5일 기해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등이 상소하여 성대(盛大)한 의식(儀式)을 거행하고, 이어서 칭상(稱觴)011)  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대하였다.

 

1월 6일 경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예문관(藝文館)에 나아가 한림(翰林)에게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였다. 다시 숭정전에 나아가 승지 홍수보(洪秀輔)에게 예문관 현판(懸板)을 쓰도록 명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7일 신축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저경궁(儲慶宮)으로 나아갔다.

 

1월 8일 임인

전교하기를,
"기로(耆老)의 신하에게는 부장(扶杖)하는 예가 있으니, 기로의 신하가 들어올 때에는 그 자제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빈궁(嬪宮)의 책례(冊禮)에 친림하였다.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으며, 기사(耆社)012)  의 당상을 소견하고 찬(饌)을 내렸다. 그리고 상신(相臣)으로 치사(致仕)013)  한 자는 복상(卜相)014)  하는 데 의망(擬望)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월 9일 계묘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우의정 윤동도(尹東度)와 2품(品)의 여러 재신(宰臣)이 다시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정한 바가 있고, 역시 이미 구주(口奏)하기도 했다."
하고, 명하기를,
"금년을 한하여 정원(政院)과 여러 상사(上司)에서 쓰는 패(牌) 및 외읍(外邑)에서 백성을 침해하고 백성을 사역(使役)하는 일을 일체 엄금하라. 태학(太學)의 전복(典僕)에게 오늘부터 상원(上元)까지 삼사(三司)의 속전(贖錢)을 특별히 면제하라."
하였다.

 

임금이 부로(父老)와 서민(庶民)을 불러들여 폐단을 묻고, 면식(麵食)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조참(朝參)과 대조회(大朝會)에는 마땅히 예필(禮畢)015)  이 있어야 하는데도 의례의 절목에 빠짐이 있으니, 해방(該房) 승지는 체차하고, 통례(通禮)는 도태시키라."
하였다.

 

김효대(金孝大)를 승지로 삼았다.

 

1월 10일 갑진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감선(監饍)을 너무 늦게 했다는 것으로써 감선 부제조(監饍副提調)를 파직하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한익모(韓翼謨)가 앙청하기를,
"덕(德)을 닦고, 정사에 부지런하시어 천휴(天休)를 이어받고, 동정(動靜)과 언행(言行)은 반드시 대조(大朝)의 심법(心法)을 본받으소서."
하고, 김양택(金陽澤)은 청하기를,
"더욱 예로써 대우하고, 불러들여 초선(抄選)에 참여하게 하소서."
하니, 윤동도가 말하기를,
"병조 판서의 아룀이 실로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1월 13일 정미

윤봉오(尹鳳五)를 대사간으로, 조엄(趙曮)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70세가 가까운 나이에 문에 임하여 조참(朝參)을 하고 전(殿)에 임하여 상참(常參)을 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면려(勉勵)하려는 것이다. 아! 기강이 떨치고 뜬소문이 그쳤는가? 조경(躁競)016)  이 그치고, 백도(百度)가 펴지고 있는가? 맹춘이 장차 반이 지나고 있는데 주사(籌司)의 문을 몇 번 열었는가? 이목(耳目)의 신하가 걸핏하면 외방에 있다고 일컬으며 외방의 원통함을 품은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관사(官師)가 서로 규정(規正)하는 것 역시 조용하고, 탐관 오리(貪官汚吏)들은 전혀 기탄하는 바가 없으니,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되겠는가? 각자 힘써서 장차 무너지려는 나랏일을 만회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상참(常參)하였다.

 

1월 14일 무신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숭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충청 감사의 폄제(貶題)017)  를 읽게 하니, 유신(儒臣) 박사해(朴師海)가 말하기를,
"도신의 폄제에 스스로 짐작함이 있다고 말하였고, 전조(銓曹)에서는 과궐(窠闕)을 만들고자 해서 하고(下考)018)  에 둔 것이니, 성상께서 수고롭게 점(點)을 찍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최(殿最)019)  에 점을 찍는 일은 전부터 있었는데 유신이 곧바로 하지 말기를 청하니, 무엄하다."
하고, 파직을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충청 감사의 장문(狀聞)으로써 본도의 영진곡(營賑穀) 5천 석을 조치해 주어 진자(賑資)를 삼자고 앙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1월 15일 기유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상참하였다. 하령하기를,
"대조께서 진전(眞殿)에 구주(口奏)하였다고 하교하시어 칭경(稱慶)할 수가 없으니 내 마음이 울적한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다.

 

1월 16일 경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도정(都政)020)  에 친림하였다. 전교하기를,
"편리하고 부유(富裕)한 주현(州縣)은 서울의 호화 자제(豪華子弟)가 먼저 차지하고, 잔폐하고 쇠잔한 고을은 세력이 없는 사람이 먼저 차지하니, 이것이 어찌 관원을 가리는 뜻이겠는가?"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17일 신해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18일 임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침묵해야 용납될 수 있다.’고 한 가르침을 마음속으로 애석하게 여긴다."
하니, 시독관(侍讀官) 김상익(金相翊)이 대답하기를,
"신하로 하여금 반드시 스스로 침묵하게 하는 것은 모두 임금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였다. 수령(守令)·변장(邊將)·찰방(察訪)을 인견하고, 칠사(七事)021)   및 방어하는 계책을 묻고는 모두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왕세자가 경춘전(景春殿)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춘추관 당상(春秋館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의 아룀으로 인하여 앙청하기를,
"균역청(均役廳)의 돈 5만 냥을 호조로 옮겨 보내어 매등(每等)의 별무가(別貿價)를 순전(純錢)으로 지급하고, 호조의 지목(地木)022)   5백 동(同)은 새로 받아들이는 합당한 군문(軍門)의 급대(給代)하는 데에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계축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0일 갑인

임금의 복부(腹部)에 산기(疝氣)가 왕래하는 증세가 있어 하루에 건공탕(建功湯)을 네 차례 올렸다. 이때에 임금이 이미 나이가 높은데다가 우환(憂患) 중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아니하여 매양 종일 낮과 밤을 새워도 스스로 피로한 줄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징후가 있게 된 것이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1일 을묘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提調)가 탕제(湯劑)를 가지고 와서 입시하였다.

 

나리포(羅里鋪)의 환곡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많은 것으로써 임피(臨陂)의 전 현감(縣監)을 정배(定配)할 때에 현감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한 번으로 합쳐 읽게 하였다.

 

왕세자의 탄일(誕日)에는 이날의 전후 3일 동안 공사(公事)를 정원에 머물러 두는 예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특명으로 단지 그날만 정원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경흥(慶興)의 백성 김익빈(金益彬)이 개시(開市)에서 호의(胡衣)를 사들인 것을 감시 어사(監市御史)가 그 죄상을 보고하니, 임금이 비국 당상에게 널리 물어서 일률(一律)023)  을 감하여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다.

 

봉상시(奉常寺) 관원이 공사로 인해서 공인(貢人)을 사역(使役)하는 자가 많으니, 제조는 삭직(削職)하고, 낭청(郞廳)은 해부로 하여금 감률(勘律)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2일 병진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은 비록 체통이 중하지만 그래도 논사(論思)하는 관직과는 같지 않다. 전번 정사(政事)024)  에서 유신으로 대직(臺職)에 이배(移拜)된 자는 다시 옥당(玉堂)으로 의망함이 옳다."
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3일 정사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고, 승지에게 문답(問答)한 것을 불러 베끼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4일 무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5일 기미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6일 경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경기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영진곡(營賑穀) 7백 석을 갈라 주어 남양(南陽)의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자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임금이 《고려사(高麗史)》 예악지(禮樂志)를 들여오도록 명하고, 승지에게 제향의(祭享儀)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참람하구나. 이로써 보면 《오례의(五禮儀)》는 아주 질서 정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1월 27일 신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다.

 

조돈(趙暾)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돈은 고(故) 판서(判書) 조상경(趙尙絅)의 아들인데, 확고하게 봉공(奉公)하고 진취(進取)를 조용히 하니 식자들이 그를 어질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9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돈은 고(故) 판서(判書) 조상경(趙尙絅)의 아들인데, 확고하게 봉공(奉公)하고 진취(進取)를 조용히 하니 식자들이 그를 어질게 여겼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1월 28일 임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법전(法殿)에 있을 때는 모두 남면(南面)을 하지만 초계(醮戒)025)   때에는 전중(殿中)에서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하였으니, 이는 종사(宗事)를 소중히 여겨서이다. 명사(命使)할 때는 비록 북쪽에 앉으나 초2일에는 마땅히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할 것이니, 이렇게 의조(儀曹)026)  에 분부하라."
하였다.

 

1월 29일 계해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의 세 제조가 탕제를 가지고 입진하였다. 임금이 《고려사》를 보다가 감흥(感興)이 있어 승지를 보내어 고려 태조(太祖)의 능에 치제(致祭)하였다.

 

왕세자가 경춘전에 좌정하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제도(諸道)의 영장(營將)이 도적을 잡은 데 대해 상(賞)을 청하는 장계를 엄금하라."
하였으니, 대개 영장의 무리들이 간혹 난장(亂杖)으로 다스려 자복을 받아내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30일 갑자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세손(世孫)의 가례(嘉禮)가 집안을 바루는 시작이라 하여 초계(醮戒)의 의례를 더욱 중시하였다. 이에 의장(儀仗)과 금려(禁旅)를 모두 뜰 가운데 열지어 있게 하고, 당상 3품 이상 및 옥당(玉堂)은 문 안에서 절하게 하고, 당하 3품 이하는 문 밖에서 절을 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혼례(婚禮)는 헌가(軒架)를 베풀기만 하고 연주(演奏)는 하지 않았으니, 이 역시 3일 동안 음악을 울리지 않는 뜻인데, 유독 하례(賀禮)만은 오히려 있으므로 이를 내가 한번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3백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 차후에는 대혼(大婚)에 비록 사유(赦宥)는 하더라도 하례 한 절목은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황단(皇壇)027)  에 친제(親祭)할 때에는 삼학사(三學士)028)  의 자손 및 오충신(五忠臣)029)  의 자손으로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모두 배제(陪祭)하게 하여 내가 황명(皇明)을 위하고, 충절(忠節)을 장려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주서(注書) 송영(宋鍈)을 특별히 승륙(陞六)030)  시켰는데, 그의 선조가 황조(皇朝)에서 옥등(玉燈)을 받은 것으로 인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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