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을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가례 연상(嘉禮宴床)에 영원히 화초충(花草蟲)을 파하고 소지화(小紙花)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2월 2일 병인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왕세손(王世孫)의 가례 초계(醮戒)를 행하였다. 임금은 동벽 서향(東壁西向)하고, 왕세자는 북향하여 부복(俯伏)하였으며, 왕세손은 북쪽에 앉아서 남향하니, 임금이 친히 초계(醮戒)하였다. 또 세손에게 하유하는 글을 친히 지었는데, 이르기를,
"이제 네가 먼저 삼가(三加)031) 의 예를 행하였고, 또 초례(醮禮)를 행하였으니, 4백 년에 가까운 나라가 장차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3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어서 추모(追慕)하고 기쁜 마음이 가슴 속에 간절하게 교차된다. 나이는 성동(成童)에 이르지 못했으나 예(禮)로는 성인이 되었으니 이후부터는 더욱 강학(講學)에 부지런하고 본심(本心)을 잃지 아니하여, 우리 종팽(宗枋)032) 을 계승하고 선조의 업(業)을 계술(繼述)하라."
하였다. 신시(申時)에 왕세손이 명광전(明光殿)에서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2월 3일 정묘
왕세손빈(王世孫嬪)이 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팔도와 양도(兩都)에 반교(頒敎)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성스러운 상서(祥瑞)가 사손(嗣孫)에게 응하여 만대의 경사가 계속되고, 하늘의 아름다움으로 그 짝을 맞이하여 백 대의 수레로 예(禮)를 이루었다. 기쁨이 종묘(宗廟)에 넘치고, 축하의 말이 조야(朝野)에 들끓는다. 오직 우리 적손(嫡孫)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관례(冠禮)와 초례(醮禮)를 막 치르게 됨을 다행히 보았노라. 가법(家法)을 마음으로 전해 받았으니 일찍이 효제(孝悌)의 도리를 알았고, 증자(曾子)의 교훈을 복응(服膺)했으니 수신(修身)·제가(齊家)의 공부를 잘 강론하였다. 선비들이 처음 입학할 때부터 우러러 보았으니 참으로 고개를 늘여 기대(企待)하기에 합당하였고, 백옥같은 바탕은 스승에게 나아갈 나이가 되었으니 혼인의 예를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삼간(三揀)의 옛법을 따라, 드디어 육례(六禮)033) 의 길일(吉日)을 가렸도다. 《주역(周易)》의 곤상(坤象)034) 을 본받았으니 사실 풍화(風化)의 근원이 매어 있었고, 주시(周詩)의 관저(關雎)035) 를 사모했으니 이에 요조 숙녀(窈窕淑女)를 구했노라.
왕세손빈(王世孫嬪) 김씨(金氏)는 성후(聖后)와 같은 성씨요, 명조(名祖)의 후손이다. 이는 그 조상의 경사(慶事)가 후손에게 다시 이어져 숙녀가 태어났고, 그 상서가 오래 전부터 정해졌으니 마땅히 휘음(徽音)을 계승하리라. 본디 자질이 온화하고 유순하였는데, 내칙(內則)을 익혀 침착하고 정숙하였다. 귀서(龜筮)036) 가 모두 좋았으니 하늘이 지어준 짝임을 알겠는데, 폐백을 받는 날 또한 길일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금년 2월 병인일에 왕세손을 초계(醮戒)하여 친영(親迎)을 마쳤고 의문(儀文)을 갖추어, 책호(冊號)를 내렸도다. 선고(璇誥)037) 와 화유(華褕)038) 는 차례를 따라 법도에 맞았고, 은인(銀印)과 채장(綵仗)은 제도를 따라 아름다움을 간직하였도다. 후세에 전해질 아름다운 계책은 왕세손에게 길이 내려지고, 혼행(婚行)의 꽃다운 교화는 계승하는 여자가 행해야 할 바이다. 이 어찌 조단(造端)039) 의 기반이 될 뿐이랴? 또한 가통(家統)을 잇는 근본이 되리라.
뒤늦게 이 왕세손을 얻고는 오직 빨리 성장하기를 바랐었는데, 지금 혼인하는 모습을 보니 기쁜 마음을 어찌 가눌 수 있으랴? 형패(珩珮)040) 가 문침(問寢)041) 에 이어지니 늘그막에 기쁨이 가이없고, 집안을 잘 다스릴 것을 미리 점쳤으니 끝없이 영원한 복이로다. 이는 실로 고금(古今)에 드문 영전(令典)이니, 마땅히 중외(中外)와 더불어 기뻐해야 할 일이다. 아! 손성(孫星)이 세자궁(世子宮)에 더욱 빛나고, 세손궁(世孫宮)에는 자손이 번성한 칭송이 일어날 것이다. 혼가(婚嫁)를 도와주고 환독(鰥獨)을 위무(慰撫)하도록 이미 혈구(絜矩)042) 의 은혜를 시행할 것이고, 아내에게 모범을 보여 가방(家邦)을 다스리려면 몸을 수양(修養)하는 학문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이정보(李鼎輔)가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9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어문학-문학(文學)
[註 033] 육례(六禮) : 혼인(婚姻)의 여섯 가지의 예(禮). 즉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을 이름.[註 034] 곤상(坤象) : 《주역》 팔괘의 하나인 곤괘로 순음(純陰)의 때임. 건(乾)의 대로서 땅·신하·음성(陰性)·여성을 상징함. 여기서는 후비(后妃)의 덕을 말함.[註 035] 관저(關雎) : 《시경》 주남(周南)의 관저편을 말하는데, 주나라 문왕(文王)과 그 후비(后妃)인 사씨(姒氏)의 덕을 군자가 숙녀를 구득하여 배필을 사모하는 것과, 구득한 뒤 화락(和樂)하는 정경으로 노래했음.[註 036] 귀서(龜筮) : 점대로 치는 점과 귀갑(龜甲)을 불에 그을리어 그 갈라진 금을 보아서 치는 점.[註 037] 선고(璇誥) : 고명(誥命).[註 038] 화유(華褕) : 왕비의 화려한 옷.[註 039] 조단(造端) : 시작.[註 040] 형패(珩珮) : 장식으로 차는 옥(玉).[註 041] 문침(問寢) : 문안(問安).[註 042] 혈구(絜矩) : 자기를 척도로 하여 남을 헤아리는 동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전라 감사 박도원(朴道源)이 분재(分災)를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으로써 삭직(削職)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채위하(蔡緯夏)가 주청하기를,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인하여 산림의 선비를 초치(招致)하여 세손(世孫)을 보도(輔導)하게 하소서."
하고, 또 진달하기를,
"진서(眞書)의 윤음(綸音)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방곡(坊曲)에 효유(曉諭)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관사(官師)가 서로 규정(規正)해야 하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진서를 언문으로 번역해서 반포하자는 청에 있어서는 바로 도신(道臣)이 신칙할 일이지 간신(諫臣)이 말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왕세손 가례 도감(嘉禮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주었다. 도청(都廳)은 가자(加資)하고, 참하(參下)는 승륙(陞六)시켰으며 도년(徒年)은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또 명하기를,
"금오(金吾)043) 와 추조(秋曹)044) 의 시수(時囚)를 품방(稟放)하라."
하였다.
고성(固城)의 선창(船倉)을 도선(道善) 앞 바다로 옮기라고 명하였는데, 영남 도신과 수신(帥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장령 박해윤(朴海潤)이 호서(湖西)의 금년 결전(結錢)을 면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향인(鄕人)의 부탁을 받고서 감히 군부(君父)에게 진달하는가?"
하였다.
왕세자와 세자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갔다.
2월 4일 무진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2월 6일 경오
신회(申晦)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윤덕(李潤德)을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삼았다. 무산(茂山)·온성(穩城)의 을해년045) ·병자년046) 의 구 환자(還上)를 탕감하고 진전(陳田) 1천여 결(結)을 속전(續田)047) 으로 강등(降等)하라고 명하였으니, 어사 김종정(金鍾正)의 장문을 따른 것이었다.
2월 7일 신미
세손(世孫)과 세손빈(世孫嬪)이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2월 8일 임신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건원릉(健元陵)과 숭릉(崇陵)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휘릉(徽陵)을 봉심(奉審)하고, 예조 판서 신회(申晦)와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에게 정자각(丁字閣)을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또 혜릉(惠陵)·목릉(穆陵)·현릉(顯陵)에 전배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의릉(懿陵)에 가서 봉심하도록 하였다. 경기 감사 홍계희(洪啓禧) 및 각읍 수령을 인견하고, 백성들의 폐단을 물어 조목으로 열거해서 장문하도록 하였다.
2월 9일 계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안에서 예를 행하였다.
2월 10일 갑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048) 과 사학(四學)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순통(純通)한 사람을 부(賦)로써 비교하여 정몽필(鄭夢弼)·유익지(柳翼之)를 뽑아 급제를 내리고, 이어서 반과(盤果)를 내렸다. 재임(齋任)을 불러들여 사찬(賜饌)에 동참하게 하고, 시관(試官)에게도 또한 반과(盤果)를 내렸다.
2월 11일 을해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여 소대(召對)를 행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의 면포(綿布) 50필과 병조의 면포 50필, 마포(麻布) 1백 필을 성균관에 주라고 명하였으니, 알성(謁聖) 때 선비들을 먹일 밑천이었다. 남양(南陽)·고양(高陽)의 칠전(漆田)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는데, 경기 감사 홍계희의 진달한 바로 인해서였다.
지평 신익빈(申益彬)이 아뢰기를,
"경조(京兆)에서 상서(象胥)049) 로서 회음(會飮)한 자를 잡아 추조(秋曹)로 이송하지 않았으니, 해당 경조의 당상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낭청은 엄히 처치하여야 하며, 여러 역관(譯官)은 율에 의해 죄를 주어야 합니다. 황해 감사 조영진(趙榮進)은 성후(聖后)의 사제(私第) 침실(寢室)을 억측하여 대답하였고, 어제(御製)를 잘못 걸어 둔 일까지 있었으니, 조영진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아야 하며 어제는 옮겨 걸어야 합니다. 전 병조 판서 구선행(具善行)은 훈장(訓將)으로 있을 때, 본영의 돈 수천 냥이 간 곳이 분명치 못하였으며, 병조 판서가 되어서는 병조에 저장된 돈 5천여 냥과 면포 수십여 동(同)이 역시 간 곳이 없어 비국에서 해당 서리를 붙잡아다가 묻는 일까지 있었으니, 구선행은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조사해야 합니다. 예조 판서 남태기(南泰耆)는 그의 동생 남태회(南泰會)의 사행(使行)에 6, 7마리의 말을 보내기 위하여 서로(西路)에서 두루 애걸했으니, 남태기는 마땅히 개정(改正)해야 합니다. 병조 정랑 홍상직(洪相直)은 공화(公貨)를 함부로 낭비하여 대신의 꾸중까지 들었으니, 홍상직은 마땅히 삭직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따랐다. 또 진달하기를,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휘령전(徽寧殿)의 망제(望祭)를 친행하겠다는 명을 조금 물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특별히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간신(諫臣)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유독 묵묵히 있는 것을 죄주었다.
서명응(徐命膺)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서명천(徐命天)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2일 병자
홍자(洪梓)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형조 당상을 소견하여 금주(禁酒)를 신칙하였다. 회음(會飮)한 역관(譯官)을 교동(喬桐)과 영종(永宗) 등지에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무인
왕세자가 집영문(集英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팔도에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 민폐(民幣)와 진황(賑荒)의 정사를 염탐하게 하였다.
2월 15일 기묘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이어서 휘령전에 나아갔다가 향교동(鄕校洞)의 옹주(翁主) 집에 들렀다.
왕세자가 휘령전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하였다.
2월 18일 임오
이은(李溵)을 이조 참의로,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신만(申晩)을 판부사로 삼았는데, 신만은 이미 상제(喪制)가 끝난 때문이었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오영(五營)의 장졸(將卒)을 소견하고, 추운 날씨에 직숙(直宿)하는 노고를 물어 위유(慰諭)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 우문각(右文閣)으로 다시 나아가 유신(儒臣)을 소대하여 《심경(心經)》을 강하고, 우문각 소지(小識)를 지어 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각판(刻板)하라고 명하였다.
2월 19일 계미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삭시사(朔試射)에 친림하였다. 쏘기를 마치자 종신(宗臣)·무신(武臣)·승사(承史)에게 1순(巡)씩을 쏘라고 명하여 좌익선(左翊善) 이해중(李海重)을 준직(準職)으로 올렸는데, 수석을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라도 광주(光州)의 사노(私奴) 일만(一萬)이 상언(上言)하여 그 주인의 아내가 겁탈을 당해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호소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협박해 욕을 보인 사람을 잡아내어 엄형하여 실정을 알아내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2월 22일 병술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무신 당상(武臣堂上)의 시사(試射)에 친림하려고 할 때에 눈바람이 크게 쳐서 우의정 윤동도(尹東度), 판중추부사 정휘량(鄭翬良)이 차자를 올리고, 옥당에서 연명 차자로 성명(成命)을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부교리 이인배(李仁培)는 숙사(肅謝)하지 않았는데 홀로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승여(乘輿)가 장차 나가려고 하기에 미쳐 이인배가 곤룡포 자락을 붙잡고 힘써 간하였으며, 약방 제조 및 여러 승지가 번갈아 알현하고 다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인배가 차자로 청하고 면대하여 진달한 바가 과연 옳다. 그러나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우인(虞人)을 속이지 않았으니050) , 내가 몸소 가서 약속을 파하겠다."
하고, 드디어 먼저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으며, 이어서 친림하고 이익정(李益炡)을 명관(命官)으로 삼아 시험을 마치게 하고, 회가(回駕)하였다.
임금이, 유선(諭善) 송명흠(宋明欽)이 마침 일로 인해 흑석동(黑石洞)에 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독히 유시하였다.
2월 23일 정해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감시(監試)의 초시(初試) 소학 강생(小學講生) 10인을 소견하고, 다시 외우게 하였다.
임금이 다시 송명흠이 와 있는 곳에 사관을 보내어 구전(口傳)으로 면유(面諭)하고, 그와 함께 오도록 하였다.
2월 24일 무자
임금이 수서(手書)로 유선 송명흠에게 유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정(先正)을 생각하여 너를 보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직명(職名)에 구애되겠는가? 군직(軍職)에 부치게 하였으니, 즉시 함께 들어와 내가 전(殿)에 임하여 너를 기다리는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2월 25일 기축
임금의 기후(氣候)가 편치 못했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나았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있으면 심화(心火)가 따라서 올라간다. 초선(抄選)이 근교에 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간절하게 기다려져 마음이 자연히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심화가 올라간 것인데,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낫다."
하였다.
이방엽(李邦燁)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북관 어사(北關御史) 김종정(金鍾正)에게 묻기를,
"청나라 차인(差人)에게 정해주는 법이 과연 엄히 세워져 변방 백성들에게 폐단이 없는가?"
하니, 김종정이 말하기를,
"임장(任掌)의 무리들이 곤란을 받고 있는 것은 면하지 못하나 민간에는 폐해가 없습니다. 북병사(北兵使) 이방좌(李邦佐)는 고집을 부려 원망을 부르는 계제를 만들었고, 감사 이이장(李彛章)은 잘 조치하여 볼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지중추부사 이익정(李益炡)에게 명하여 사릉(思陵)에 가서 사초(莎草)를 고치는 일을 감동(監董)하게 하였으니, 대신이 유고하면 보국(輔國)이 대행(代行)하는 것이 예(例)였다. 임금이 판중추부사 신만(申晩)을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로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신만이 이때 부상(父喪)을 당해 담제(禫祭)에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담월(禫月)에 행공한 자가 있었다."
하매, 승지 정광한(鄭光漢)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명준(吳命峻)이 탄핵을 당함으로 인해서 출사(出仕)하지 않는 규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였다.
소과(小科) 시강 절목(試講節目)에 불통(不通)한 사람을 충군(充軍)하는 율(律)을 첨가해 넣으라고 명하였다.
2월 27일 신묘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2월 28일 임진
밤에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친히 배윤현(裵胤玄)을 국문하였다. 배윤현은 상주(尙州) 사람인데 대궐 문에 괘서(掛書)하려다가 한성부의 하례(下隷)들에게 붙잡혔다. 판윤(判尹) 이철보(李喆輔)가 청대하여 진달하니, 임금이 즉시 친국(親鞫)을 명하였는데, 공초한 바가 모두 허망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글을 보니, 잡술(雜術)을 하는 허탄(虛誕)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은 엄히 제방(隄防)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 조열(條列)한 죄목을 친문하여 이미 지만(遲晩)051) 하였으니, 마땅히 먼 변방으로 내치라."
하니, 대정현(大靜縣)으로 정배하였다.
2월 29일 계사
김상복(金相福)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김상익(金相翊)이 복명(復命)하기를,
"석성 현감(石城縣監) 황반(黃槃)은 진휼(賑恤)을 마친 후에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추국해야 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경기 감사의 장문으로 인하여 앙청하기를,
"진위(振威)와 부평(富平)의 〈전지를〉 고쳐 측량(測量)할 때에 드는 물력은 해당 고을의 결전(結錢)을 계산해 제하여 주고 부족한 숫자는 해당 고을에 있는 상진미(常賑米)를 계산해 감하여 주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동도가 또 청하기를,
"황반(黃槃)에게 다시 책벌(責罰)을 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파직을 명하였다.
참서(讖書)와 비기(秘記)를 감추어 두었다가 탄로난 자는 도신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한 뒤에 세 차례 엄형(嚴刑)하여, 해도(海島)로 정배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배윤현(裵胤玄)의 일로 인해서였다.
집의 유사흠(柳思欽)이 청하기를,
"배윤현은 도신으로 하여금 세 차례 엄형한 뒤에 발배(發配)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도신으로 하여금 형(刑)을 청함은 대체(臺體)에 결흠이 된다."
하였다. 헌납 남현로(南玄老)가 청하기를,
"배윤현은 해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청하기를,
"배윤현을 친문(親問)할 때에 양청(兩廳)의 포도 대장을 청패(請牌)하지 않았으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고, 이방좌(李邦佐)는 잡아다 처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윤동도가 말하기를,
"어사 김종정(金鍾正)의 서계에, 전 병사(兵使) 이방좌의 일을 나열만하고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사체(事體)가 어떻겠습니까? 이방좌를 잡아다 신문하자는 대계(臺啓)를 이미 윤허하셨으니, 김종정은 추고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동도가 황단(皇壇)의 제향(祭享)을 섭행(攝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임금의 기후(氣候)가 회복되지 않아서 여러 신하가 간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응제(應製)에 수석을 차지한 이미(李瀰)에게 직모(織毛)로 만든 말 안장(鞍裝)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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