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9권, 영조 38년 1762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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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예당(禮堂)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단에는 흑생(黑牲)을 써야 한다."
하니, 김시묵(金時默)이 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 보았더니, 흑우(黑牛)를 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황우(黃牛)를 쓰는데, 단지 우두(牛頭)와 양(羊)·시(豕)를 각 하나씩만 쓰고 있으니, 대개 하늘을 제사할 때에 특생(特牲)을 쓰는 뜻에서 나온 것인가? 내가 일찍이 황단에서 육일(六佾)052)  을 쓰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의심해 왔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사(士)의 예(禮)로써 제사하는 뜻이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섭행하기를 힘써 청하는데, 황은(皇恩)에 보답하는 도리는 오직 황단에 제사하는 데에 있다. 더군다나 금년은 〈명나라 의종이 몰(歿)한〉 갑신년053)  〈2주갑(周甲)〉과는 1년의 간격(間隔)이 있어 내 마음을 억제하기가 어려운데, 어찌 섭행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3월 2일 을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한학 전강(漢學殿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황단에 공신(功臣)을 배향하는 일로써 예관을 보내어 외방에 있는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공신을 배향하는 예에 의해서 3조(朝)에 각기 1인씩을 뽑으며, 지방(紙榜)을 만들고 장막을 베풀어 제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고, 이어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널리 물어서 결행해야 한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3월 3일 병신

임금이 경현당 서정(西庭)에 나아가 황단(皇壇)의 의식을 익혔다.

 

3월 4일 정유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고 소대(召對)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3월 6일 기해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갔는데, 대개 대제(大祭)를 친행하기 위해서였다. 하교하기를,
"경경(耿耿)한 일념(一念)이 오직 황단에 제사를 행하는 때에 있으니, 마땅히 설만(褻慢)함을 단속해야 한다. 제사(祭祀)의 정시(正時)가 되면 원량(元良)은 시민당(時敏堂)에 정좌(整座)하라는 일을 춘방(春坊) 관원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다시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황단으로 들어가 망위례(望位禮)를 거행하였다. 단상(壇上)에서 봉심(奉審)한 뒤에 제기(祭器)와 희생을 살피고, 첫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3월 7일 경자

회가(回駕)하면서 육상궁(毓祥宮)을 들러 전배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해서 어사(海西御史) 신익빈(申益彬)이 복명하였는데, 장연(長淵) 전 부사(府使) 정항령(鄭恒齡)과 봉산 군수(鳳山郡守) 박재수(朴載洙)를 해부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였다.

 

3월 8일 신축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행소(行素)하기 때문에 탕제를 들지 않았는데, 약원의 여러 신하들이 간쟁했으나 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불초(不肖)의 정성이 천박하여 자성(慈聖)의 성대한 덕과 선빈(先嬪)의 어진 마음을 하나도 드날리지 못하고 있으니, 효(孝)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들은 마땅히 어버이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마는 또한 성대한 덕과 어진 마음을 본받은 것이다. 순화방(順化坊)과 여경방(餘慶坊) 사인(士人)으로 나이 60세 이상과 서민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자는 내일 마땅히 친림하여 쌀을 내리겠다. 사인(士人) 및 중서인(中庶人)으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자 역시 비단을 내리고, 사부(士夫)의 부녀와 일찍이 실직을 지낸 사람의 처와 비록 실직은 없으나 천호(賤戶)의 처가 아닌 자는 그 자손으로 하여금 대신 받아가게 하라."
하였다.

 

동궁(東宮)이 하령(下令)하기를,
"나의 과실로 인해서 성려(聖慮)를 번거롭혀 내 마음이 송구스런 가운데 강관(講官)이 스스로 이처럼 허물을 인책(引責)하니 칙교(飭敎)가 내려진 뒤로 마음이 더욱 두렵다. 이런 때에 더욱더 힘을 써서 나의 미치지 못함을 보필하라."
하였다. 대개 이때에 강관 이기덕(李基德)과 홍검(洪檢)이 대조(大朝)의 칙교(飭敎)로 인해서 글로 진달하였는데, 환급(還給)했기 때문에 이런 영이 있게 된 것이었다.

 

3월 9일 임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북부(北部)의 노인에게 쌀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명하기를,
"삼학사(三學士)와 문충공(文忠公)의 자손 가운데 나이 60세 이상은 내외를 물론하고 해조로 하여금 본도에서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해 주게 하고, 문충공의 자손인 김시찬(金時粲)은 비록 죄적(罪謫) 가운데 있지만 역시 일체로 거행하라는 일을 도신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사간 안복준(安復駿)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풍기군(豊基郡)의 종으로 연좌된 죄인 태후(泰垕)를 절도(絶島)로 이배(移配)하여 방금(邦禁)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새로 방방(放榜)된 생원·진사를 소견하고 명하기를,
"생원·진사의 장원(壯元)은 방하(榜下)의 사람을 이끌고 입궐하여 사은(謝恩)하라."
하였는데, 근래에 방하의 사람을 인솔하는 규정이 오랫동안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진사(進士) 이형윤(李衡胤)을 발거(拔去)하라고 명하였는데, 역관(譯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윤동도가 강학(講學)과 수덕(修德)에 힘쓰라는 것으로 면계하였다.

 

3월 11일 갑진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대신과 예조 판서를 소견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부수찬 김화택(金和澤)의 귀양(歸養)054)  하겠다는 청을 듣고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겼는데, 오늘 입시에서 그 사람을 보고는 그 일을 깨닫고 내 마음이 흥기되었다. 당(唐)나라 때의 양성(陽城)이 어찌 여러 유생들에게 이르지 않았던가?055)   더군다나 인군(人君)은 효(孝)로써 다스리면서 한 사람을 허여하여 백 사람을 용동(聳動)시키는 것도 역시 이륜(彛倫)을 부식(扶植)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 그 청을 면전에서 허락하겠으니, 본도로 하여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제급해서 그 보양함을 도우라. 아! 김화택이 아니면 내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으며, 내가 아니면 김화택의 마음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는 바로 선유(先儒)들이 말한 광무제(光武帝)와 엄자릉(嚴子陵)의 일056)  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이날 김화택이 입시하여 귀양하기를 힘껏 청하니, 임금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이어서 차탄(嗟歎)하며 말하기를,
"비록 한 유신(儒臣)이 없더라도 나에게 어찌 신하가 없겠는가? 노친이 있는 자는 믿을 수가 없다."
하니, 김화택이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리고 임금도 눈물을 뿌리니, 연신(筵臣)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자로다. 이 사람이여!"
하였다. 이튿날 입시해서 김화택이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언로(言路)를 열며,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라는 세 가지 일을 진계하고 인하여 물러 나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필기(朴弼琦)가 당상(堂上)으로 치사(致仕)한 후, 또 이런 일이 있게 되었으니, 마치 이것이 있어 예(例)가 된 듯하다."
하였는데, 대개 임금이 특별히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는 뜻을 미루어서 유신의 귀양(歸養)을 허락하였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며, 굳이 청하여 돌아간 자도 역시 족히 가상하다 하겠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과장(科場)이 엄하지 못한 폐단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가노(家奴)를 향군(鄕軍) 대신으로 입장(入場)시키고 있으니, 청컨대 엄히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근일에 과장(科場)의 부정(不正)한 습성이 비단 이런 폐단만이 아닌데 끝내 바로잡는 실효가 없으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은산(殷山) 칙수고(勅需庫)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2천 30냥을 탕감하라고 명하였는데, 현감 김재순(金載順)의 청으로 인해서였다.

 

구선행(具善行)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3월 12일 을사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유선(諭善) 송명흠(宋明欽)이 대명(待命)하고 있으니, 개석(開釋)하는 하교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명하지 말라는 일로 하유(下諭)함이 옳다."
하였다. 대개 송명흠은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선비인데, 전번에 교외(郊外)에 왔다가 거듭 소명(召命)을 어기고 지레 돌아가니, 임금이 아주 격노했기 때문에 현옥(縣獄)에서 대명한 것이었다.

 

3월 13일 병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윤홍렬(尹弘烈)에게 급제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3월 16일 기유

김양행(金亮行)을 지평으로, 김치인(金致仁)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관동 어사(關東御史) 정이환(鄭履煥)과 호서 어사(湖西御史) 김상묵(金尙默)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어사의 서계(書啓)로써 고부 군수(古阜郡守) 조후(趙垕)를 먼저 파직한 후 잡아오기를 청하였는데, 재결(災結)을 환롱(幻弄)했기 때문이었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난번 한림(翰林) 이장로(李長老)가 포쇄(曝曬)057)  차 내려 갈 때에 선산(先山)을 들러 살피겠다는 일을 정서(呈書)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몽롱하게 받아들였으니 지극히 그릇됩니다. 해당 승지를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는 이미 파직하였으니, 사관(史官)도 마땅히 서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대개 부모의 분묘(墳墓)가 아니면 감히 성묘(省墓)를 청하지 못하는 것이 국조(國朝)의 법례(法例)이다.

 

홍자(洪梓)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명하기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은 반드시 이미 각 군문(軍門)의 중군(中軍) 및 서북의 병사(兵使)나 통제사(統制使)를 지내어 마땅히 먼저 장망(將望)에 통한 자로써 극진하게 가리고, 이 직임을 지낸 후에 비로소 포장(捕將) 및 제장(諸將)에 의망하는 일로 규식을 정하고, 각 군문에서 중군에 이차(移差)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3월 17일 경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당하(堂下) 무신(武臣)의 시사(試射)를 행하였으며, 정관(政官)을 불러들어 장전(帳殿)에서 개정(開政)하여 정광한(鄭光漢)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8일 신해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당하 무신의 시사를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김광한(金光漢)·이한익(李漢翼)을 첨사(僉使)로 제수하고, 팔순(八巡)에 모두 수석을 차지한 최규량(崔奎亮)에게는 숙마(熟馬)를 내려 주었다.

 

3월 19일 임자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예를 마친 후, 땅 위에 부복(俯伏)하여 첫새벽부터 진시(辰時)에 이르렀는데 비가 내려 옷이 젖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힘껏 청하매 비로소 내전으로 들어왔으니, 대개 명(明)나라의 옛 은혜를 추억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금이 우문합(右文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의종(毅宗)의 기일(忌日)이란 것으로써 탕제(湯劑)를 들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초관(哨官)·백부장(百夫長)·파총(把摠)·반천부장(半千夫長)은 《모시(毛詩)》에 보건대, 토저 야인(兎罝野人)058)  도 그가 능히 간성(干城)이 되는데, 승평 세월(昇平歲月)이 오래 되매 인심이 해이해졌다. 장관(將官)을 차출할 때에 소중한 바를 생각하지 않고 한갓 그 사람만을 위하여 연로한 사람과 무예를 닦지 않은 사람을 구차스럽게 충당해서 차출하여 조련에 임해서 기치(旗幟)의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고, 활을 쏘는 데 임하여는 1백 보도 미치지 못한 자가 많으니, 만약 뜻밖의 일이 생기면 지모(智謀)를 어떻게 낼 수 있겠으며 용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어제 분수(分數)가 없는 자를 도태시키지 않은 것은 가르치지 않고서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차출한 사람은 비록 조사해서 도태시키기가 어렵지만 이후에 차출하는 장관은 절대로 사심에 이끌리지 말고 반드시 각별히 가려야 한다. 만약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면 그 사람을 다스리지 않고 그 장수를 다스릴 것이니, 이로써 여러 군문에 엄칙하라."
하였다.

 

3월 20일 계축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하기를,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더욱 본원(本源)의 공부에 힘쓰시어 방실(放失)함이 없게 하소서."
하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우상의 말이 절실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영상·우상과 문관(文官)·음관(蔭官) 2품 이상과 당상·당하의 시종인(侍從人)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생각건대 지금의 나랏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알지 못한다. 지금의 나랏일은 믿을 것이 없다. 《주역》에 ‘망할까 망할까 하여 무더기로 난 뽕나무에 매듯 한다’059)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홍봉한과 윤동도가 흰 무지개의 변괴로써 퇴직을 구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개 재변을 만나 체직을 구하는 것은 대신의 체면이지만 아뢴 말이 너무 간략하여 형식적임을 면치 못하였고, 임금 역시 형식적으로 답하여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부족하였다. 대신과 유신, 여러 신하들이 재이(災異)로써 진계하였으나, 역시 의례적으로 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임금이 대소 신하들을 소견하여 황단(皇壇)의 배향(配享)에 대한 편리 여부를 묻고, 하교하기를,
"옳다고 여기는 자는 왼쪽으로 나와 엎드리고, 그르다고 여기는 자는 오른쪽으로 나와 엎드리며, 긍정(肯定)하지도 않고 부정(否定)하지도 않는 자는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
하니, 왼쪽으로 나온 자가 10여 명이요, 일어나지 않은 자가 가장 많았다. 우의정 윤동도 및 참판 한광조(韓光肇)가 가장 불가하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배신(陪臣)을 배향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승지 홍자(洪梓)가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재이 때문에 감선(減膳)하라는 전교가 계셨는데, 저하께서 또 감선하라는 영을 내리셨습니다. 더욱 경척(儆惕)하시어 간단(間斷)이 없게 하시고, 거기다가 다시 ‘근독(謹獨)’ 두 글자를 더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홍자가 또 말하기를,
"대조께서 편전(便殿)에 임어하시면서 의자(椅子)를 없앴으니, 저하께서도 역시 정당(正堂)을 피하셔야 마땅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감선하라는 휘교(徽敎) 가운데다 ‘정당을 피한다.[避正堂]’는 세 글자를 첨가하라."
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무령왕(武寧王)060)  을 제1위(第一位)에 종향(從享)하고, 영원 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061)  을〉 제2위에 종향하며, 범 문정(范文貞)062)  을 제3위에 종향하고, 제물(祭物)은 우리 나라에서 종향하는 공신(功臣)의 예에 의하여 당하(堂下)에 자리를 베풀라. 풍악(風樂)은 동쪽 담장 안에 진설하고, 위판(位板)을 만들어 평상시에는 남동루(南東樓)에 보관하라. 제사 때에는 지방(紙榜)을 쓰고, 단상에서 삼헌(三獻) 때의 행례(行禮)는 당상 정3품(正三品)이 일을 행하되 우리 나라 공신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 지방(紙榜) 서사관(書寫官)은 단하의 집례(執禮)가 겸하여 행하고, 유차일(油遮日) 1건, 휘장(揮帳) 1건, 지의(地衣) 1건은 함께 동루(東樓)에 두고, 제기(祭器)·제준(祭樽)·잔(盞)·향로(香爐)·향합(香盒)은 자기(磁器)를 쓰며, 두(豆) 6개, 변(籩) 6개를 한결같이 유기로 만들어 역시 남루(南樓)에 두라고 분부하라. 이 일을 우리 황제(皇帝)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명년 3월 황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친제(親祭)나 섭제(攝祭)를 물론하고 축문(祝文) 끝에 써 넣도록 하라. 의절(儀節)을 이에 의거해서 한 권(卷)에다 써서 본실(本室)에 두도록 의조(儀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승지 홍자(洪梓)가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라고 앙달(仰達)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가운데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응교(應敎) 김종정(金鍾正)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진 하늘이 경고(警告)하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은 왜 그렇습니까? 강토(講討)하는 공부가 한갓 장구(章句)에만 있어 심신(心身)에 체험하지 못하고, 주자(疇諮)063)  하는 모책(謨策)이 혹 형식에 가까워 치리(治理)에 도움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물을 뉘우치는 마음이 비록 새롭지만 선단(善端)을 계속하기가 어렵고, 잡념(雜念)을 다 사르지 못하여 사욕(私慾)이 점차 불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을 검속(檢束)하는 방도가 혹 그윽하고 혼자 있는 곳에서 소홀히 하고, 조심(操心)하는 요령이 혹 정고(貞固)한 덕(德)에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優渥)하게 답하였다.

 

우의정 윤동도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윽이 생각건대, 여러 신하들의 말이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라는 것은 한바탕 한담 설화(閑談說話)에 불과하며, 저하의 말씀은 맹렬히 반성하고 두려워한다고 하시나 또 하나의 응당 해야 할 형식적인 예답(例答)일 뿐이니,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그 과연 이에 그치고 말아야겠습니까? 아! 저하께서 금일에 마땅히 성실(誠實)해야 할 것은 진덕 수업(進德修業)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고, 진수(進修)하는 실제는 먼저 본원(本原)에 따라 공부를 힘써야 하니 독서(讀書) 궁리(窮理)도 이에서 말미암았으며, 일에 응하고 물(物)에 접하는 것도 이에서 말미암게 됩니다. 참으로 이에 소홀히 하면 비록 날마다 성현(聖賢)의 글을 외우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누차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성(誠)으로써 인접(引接)하시고 성으로써 개강(開講)하시며, 조정의 일에 응할 때는 반드시 실지의 은혜가 백성들에게 미칠 것을 생각하시고, 방책(方冊)064)  을 대하실 때에도 역시 몸에 공효(功効)가 더하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신하는 감히 임금을 넘어서는 안되며, 아들은 감히 아버지를 넘어서는 안된다. 내가 이미 감선(減膳)하였으니, 원량(元良)이 어찌 감선하는 것이 마땅치 않겠는가? 기타의 하령(下令)은 승정원에 머물러 두고, 승지의 구대(求對)는 지워 없애라."
하였다.

 

임금이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고, 제목(題目)을 내건 뒤에 이어서 하련대(下輦臺)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다.

 

3월 22일 을묘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경현당으로 다시 나아갔다.

 

3월 23일 병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과차(科次)065)  하여 권이강(權以綱) 등 3인을 뽑아 급제를 내리고 모두 입시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신은(新恩) 민백흥(閔百興)에게 수서(手書)를 내려 그의 형 고 상신(相臣) 민백상(閔百祥)의 궤연(几筵)에 돌아가 고하게 하였으니, 무릇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었다.

 

3월 24일 정사

평안 감사가 장문(狀聞)하기를,
"동지 정사(冬至正使) 해흥군(海興君) 이연(李槤)이 신요동(新遼東)에서 돌아와 이달 18일에 졸서(卒逝)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25일 무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영의정과 예조 판서·호조 판서의 입시를 명하였다.

 

민백흥(閔百興)을 판결사(判決事)로 명하였다.

 

명하기를,
"휘릉(徽陵)의 정자각(丁字閣)을 중수할 때의 당상에게 상전(賞典)을 시행하고, 낭청은 승서(陞敍)하며, 감역(監役) 및 본릉의 참봉(參奉)은 출륙(出六)시키라."
하였다.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언형(李彦衡)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3월 26일 기미

이의철(李宜哲)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7일 경신

부교리 윤득맹(尹得孟)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우리 저하께서는 두 번째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을 대신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위로는 대조(大朝)께서 부탁하신 중함을 마음에 두시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의 부화(浮華)하고 시끄러운 습성을 진정시켜 황천(皇天)이 견고(譴告)하는 뜻에 답해야 합니다. 오늘날 거듭되는 재이(災異)를 늦추는 것은 어찌 우리 저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방방(放榜)하고, 민백흥(閔百興)을 승지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지나치다고 여겼다.

 

3월 28일 신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의 신은(新恩)을 소견하였다.

 

3월 29일 임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왕세손(王世孫)과 회강(會講)에 참여하였다. 임금은 《대학(大學)》을 강하고 세손은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팔조목(八條目)066)  이 많은데 반드시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왜 그런가?"
하니, 세손이 답하기를,
"먼저 내 몸을 수양한 후에야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공자(孔子)의 도(道)를 행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수신(修身)을 하면 행할 수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쉬운가, 어려운가?"
하니, 대답하기를,
"착실히 공부하면 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은 과연 덕이 있어서 제위(帝位)에 올랐으나 후세에는 덕이 없어도 제위에 오른 것은 왜 그런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그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이 없으면 등극할 수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가상히 여겨 감탄하기를,
"과연 옳다. 내가 그 말을 듣고자 하였는데 참으로 기특하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미치지 못함은 왜 그런가?"
하니, 대답하기를,
"부인(婦人)이 잉태(孕胎)할 때 잘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말한 바를 너는 실천하고자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모쪼록 힘쓰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날 임금이 많은 것을 물음이 수백 마디의 말뿐만이 아니었으니, 비록 성덕(成德)한 자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곳이 가끔 있었으나 우리 세손은 응대함이 메아리처럼 빨랐다. 문의(文義)의 미지(微旨)와 도덕(道德)의 원두(原頭)가 대체를 잃지 않았고, 행지(行止)와 어묵(語默)함이 저절로 법도에 맞았다.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겨 기뻐하였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기뻐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억만년 무강(無彊)한 경사가 어느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임금이 상교(上敎) 및 세손의 대답한 말과 여러 신하의 이름을 열서(列書)하여 별도로 책자로 만들어 안으로 들이라 명하고, 각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한벌씩 내렸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후세에 영화롭게 빛날 것이다."
하였다.

 

3월 30일 계해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우의정 윤동도가 대략 재이(災異)로써 진계하고 또 사면(辭免)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세손에게 《대학》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군자(君子)를 보고 가리우는 것은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잘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좋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처음부터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세손이 〈《논어》 선진(先進) 편의〉 욕기장(浴沂章)을 외고, 또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경시영대장(經始靈臺章)을 외니, 임금이 말하기를,
"걸(桀)의 대(臺)나 문왕(文王)의 대가 다 같은데, 백성들의 향배(向背)가 어찌 이다지도 상반(相反)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과 혼자만 즐긴 것이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堯)임금과 걸(桀)과는 무엇이 다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자신을 수양하면 요임금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걸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임금과 걸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달랐는가?"
하니, 답하기를,
"걸은 욕심을 따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장차 어떻게 해서 요임금처럼 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마음을 굳게 정하면 요임금처럼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마음을 굳게 정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신(修身)하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수신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굶주리는 것이 좋은가, 백성이 굶주리는 것이 좋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 모두가 굶주리지 않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임금은 비록 굶주리더라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 임금을 세우는 것은, 임금을 위해서인가, 백성을 위해서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군사(君師)를 세우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사의 책임을 능히 한 자는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요·순 등 삼대(三代)067)  의 임금이 모두 그러하였고, 삼대 이후에는 능한 자가 적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세록(世祿)의 신하인데 혹 늙고 혹 젊지만 신하가 너에게 선(善)을 하도록 권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조상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너는 후일에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비록 글을 잘하더라도 만약 조선(祖先)을 잊거나 여러 신하를 홀대(忽待)하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참으로 무익하게 된다. 오늘의 이 말들을 사각(史閣)에 보관하여 하나의 금등(金縢)068)  을 만들어야 한다. 너는 모름지기 《소학(小學)》에서 보았겠지만 한나라 무제(武帝)가 관(冠)을 쓰지 않으면 급암(汲黯)을 보지 않았다069)  . 나와 네가 비록 궁중에서 방탕(放蕩)하더라도 밖의 신하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런 것을 삼가야 한다."
하였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홍낙순(洪樂純)이 복명하였는데, 언양 현감(彦陽縣監)은 기민(飢民)을 뽑아 보고하면서 정밀하지 못한 것으로써 파직을 명하고, 군병의 도안(都案)을 만들 때 정채(情債)를 받은 해당 수신(帥臣) 김종만(金鍾萬)은 해부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으며, 청도 군수(淸道郡守) 조재한(趙載翰)은 함부로 사람을 죽인 것으로써 잡아다 심문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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